내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1
키리노 나츠오 지음, 권남희 옮김 / 산성미디어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때 가족 외식을 나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간 곳은 수많은 가족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한국의 외식 장소인 갈비집이었다. 그 나이만 되도 가족 간의 외식이나, 여행은 사실 인내심 수련이다. 지루한 시간을 억지로 보내며 밥을 먹다가 맞은 편 좌석의 가족을 보았다. 그쪽은 두 자녀가 초등학생쯤으로 보였는데, 어머니가 고기를 구워 일일이 먹여주고 있었다. 무심코 그쪽 어머니를 쳐다보고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모르는 사람을 두고 이런 식으로 나불대는 것은 굉장한 실례겠으나, 어쨌든 나는 그 육아와 살림에 찌든 듯한 그 어머니의 얼굴 깊은 곳에서 기묘한 생기를 느꼈다. 감출 수 없는 생명력 말이다. 그토록 생기가 있는 여자가 저렇게 지쳐 있다니...나는 씁쓸해졌고, 그 어머니의 얼굴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다.

 

<내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원제:부드러운 볼)>에 꼭 이런 여자가 등장해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의 이름은 카스미. 흡사 야생동물처럼 생기가 넘치는 그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그녀, 어린 시절의 카스미가 사는 곳은 홋카이도의 외딴 바닷가였다. 아무 것도 없는 바다, 음울한 파도만이 마치 악의를 가진 듯 모든 걸 쓸어가버리는 그런 곳이다. 카스미는 디자이너의 꿈을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출을 감행해 도쿄로 온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던 도쿄마저도 그녀에게는 그 손을 벌려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평범한 남편과 결혼해 딸 둘을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산다.

 

남편의 친구인 이시야마와 사랑하게 된건 정체되고 고여있는 현실에 절망한 시점, 첫 딸 유카가 다섯 살이 될 무렵이다. 절망한만큼 파멸을  향해 무섭게 달려가는 두 사람. 두 사람은 각자의 가족과 함께 이시야마의 별장으로 가족 여행을 떠난다. 좁은 별장에서 각각의 배우자들의 눈을 피해  몸을 섞는 두 사람. 카스미는 생각한다. 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가족을 모두 잃어도 좋아, 아이를 잃어도 좋아. 다음 날, 아침 잠깐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린 사이에 맞딸 유카는 정말로 사라져버렸다.카스미는 죄책감에 몸부림친다. 딸에게 시선을 떼서 아이를 잃을 빌미를 만든 것보다도, 딸을 잃어도 좋다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너무도 죄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카스미는 남아있는 모든 정열을 불태워 유카를 찾아나서지만 행방을 알 수 없다. 한편, 우연히 사건을 알게 된 전직형사 우츠미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몸이다. 죽기 직전 자원봉사를 할 요량으로 카스미를 도와 함께 유카를 찾는다.  

 

대담하고 관능적인 소설이다. 불륜에 빠지게 되는 카스미와 이시야마의 심정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데, 기리노 나쓰오라는 장인의 손길이 닿은 작품답다.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넓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마력에는 그저 놀랄 수밖에. 읽으면 읽을수록 이 여성작가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내용 요약만 보면 평범한 유괴된 딸을 찾아나서는 추리소설로 볼 수도 있지만 작가의 관심사는 그런 게 아닌 듯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카스미와 우츠미가 꾸는 세 번의 꿈 속에서 사건이 재현되고 각각 다른 범인이 나타난다. 세 백일몽 중 어느 것이 정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여러 가능성이 제시될 뿐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인간 관계에 대한 통찰력과 기발한 관찰력이 특히 만족스러운데, 죽기 직전 자원봉사를 자처하는 우츠미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카스미를 돕지 않는다. 기리노 나쓰오는 그런 인물은 절대로 그리지 않는다. 죽어가는 우츠미는 자신보다 더 불행한, 딸을 잃고 절망에 빠진 카스미에게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스미도 곧 죽어야할 우츠미를 보고 역시 우월감을 느끼는 심술궂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불행함을 이해하게 되고, 공감하게 된다. 흔치 않은 감동이다.

 

쓸쓸한 작품이다. 아이가 사라진 후, 죄책감에 카스미와 이시야마는 이별을 했다. 이시야마의 마지막 말은 그렇게 좋아하던 낚시와 담배를 끊겠다는 것이었다. 자신도 뭔가 고통을 받고 싶다며...몇 년 뒤 우연히 재회한 두 사람. 이시야마는 술집 여자의 기둥서방이 되어 있었고, 담배도 거침없이 피고 있다. 그걸 보는 카스미의 쓸쓸함이란. 아무리 뜨거운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식게 마련이다. 반석같은 사랑의 맹세도, 굳은 결심도...

 

누구나 어른이 되면 부모의 품을 떠나 점점 늙어가며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가야 한다. 카스미가 부모의 품에서 가출했듯, 유카가 엄마에게서 사라졌듯 말이다. 혹시 유카의 실종은 이렇듯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인생길을 상징하는 대목은 아닐런지...카스미가 바라보던, 황량한 바닷가의 쓸쓸한 파도가 환영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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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7-29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보관함에 넣어요..;;

물만두 2006-07-29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까지 사로잡는 대단함이 느껴지는 작품이죠^^

jedai2000 2006-07-30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후회하지 않으실 작품입니다. ^^

물만두님...예. 최후까지 만족시켜주는 작품이예요. ^^

bongbong 2007-04-15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리오 나츠오 작품중 최고최고
이 작품만한 역량을 다시보여주면 좋으련만


jedai2000 2007-04-15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그로테스크>나 <아웃>에 비하면 이 작품을 최고로 꼽는 분들이 적은데, 저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기리노 나쓰오의 최고작이라 생각합니다. 반갑네요 ^^
 
창궁의 묘성 - 전4권 세트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보통 하늘의 뜻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원하고 바랐던 일이 잘 되지 않거나, 모든 준비를 완전히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운이 따르지 않아 실패했을 때 특히 하늘을 운운하며 책임을 돌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자주 듣다보면 불퉁스런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아니, 잘 되면 제 탓이고 못 되면 하늘 탓이란 말인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결국 그 말이 맞구나 하고 납득하게 된다. 60억의 인구 중 하늘을 이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만큼 광대무비한 하늘의 섭리를 어찌 거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늘이 내려주는 그늘 아래 사는 한낱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어찌 불복할 수 있겠는가.

 

 <창궁의 묘성>은 이러한 하늘의 뜻을 받은 인물들이 역사의 거센 파도를 헤쳐나가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리는 역사소설이다. 시대적 배경은 청나라 말기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19세기 말. 일본 작가가 썼지만 중국이 배경인 셈이다. 확실히 중국은 그 넓고 깊은 역사로 인해 동아시아 작가들에게 언제나 마르지 않는 창작의 원천이 되는 것 같다. 하기야 <삼국지>만 해도 벌써 몇 번을 우려내었는가.

 

외세의 침탈로 인해 피폐해진 중국의 시골 마을, 가난한 말똥주이 소년 이춘아와 지방 부호의 서자 양문수가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마을의 점쟁이 백태태에게 각각 미래의 예언을 듣게 된다. 백태태는 춘아에게, 네가 태어났을 때 하늘에는 모든 별의 우두머리인 묘성이 떠 있었다고 말해준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역대로 묘성이 떠 있던 사람은 징키스칸과 건륭제 밖에 없었고, 두 사람은 알다시피 천하의 모든 재물을 움켜쥐었단다. 이제 고달픈 현실을 넘어 꿈을 꾸게 된 춘아에게는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한편 양문수에게는, 곧 과거에 장원급제해 ‘진사’가 될 것이며, 황제를 보필해 천하만민을 위한 개혁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떨어진다. 고난이 가득한 삶이지만 명예를 잃지 말라는 조언과 함께...

 

초반부의 최고 재미는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가 되는 것을 묘사하는 장면에 있다. 춘아는 그토록 원하던 재물을 얻기 위해 살아있는 보살이라 불리우며 당시 조정을 좌지우지한 서태후의 측근으로 들어가길 원한다. 하지만 돈도 없고, 연줄도 없는 그가 어찌 황궁에 입성할 수 있겠는가. 번민하던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거세를 하고 환관이 된다. 이 과정은 세심한 취재를 통해 너무도 생생히 묘사되어 있어, 특히 남자에게는 말할 수 없이 공포스럽다. 이제 환관이 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서태후는 변덕이 이루 말할 수 없어 실수한 환관을 죽을 때까지 매를 내리는 걸 반찬삼아 식사를 할 정도다. 이런 서태후를 모시고 출세하라니, 일단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어렵겠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를 가진 춘아는 약간의 운과 타고난 좋은 성품으로 인해 결국 태후마마가 가장 사랑하는 측근이 된다.

 

한편 양문수는 과거 시험을 보고 하늘의 별을 움직인다는 ‘진사’에 장원급제한다. 중국 수천만의 선비들이 그토록 원하던 문치주의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이 시험이 어찌나 어렵냐면은 시험 보는 도중 응시자들이 미쳐나갈 정도다. 양문수의 옆자리에서 시험을 보던 응시자는 아흔이 넘은 노선비. 자기 답지를 채워나가기도 바쁜데, 옆에서는 이 노인이 계속 피를 토한다. 노인을 돌봐주느라 시험을 망치기 직전에 온 양문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해보라. 작가 아사다 지로가 공들여 쓴 이 장면의 몰입감은 정말 놀랍다. 결국 예언대로 젊은 황제, 광서제를 보필하게 된 양문수는 갈고닦은 학문으로 황제를 도와 변법을 선언하지만 필연적으로 구세대 정치인 서태후와 격돌하게 된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그러나 이토록 방대하고 촘촘한 이 작품을 몇 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작품은 결국 본인이 읽어보고 그 감동을 느껴볼 수밖에 없다. 역사 시간에나 짤막하게 배운 인물들이 살아 숨쉰다. 영욕의 인생을 산 ‘철의 여인’ 서태후 자희부터, 강유위(캉유웨이), 담사동 등의 변법 동지, 원세계, 영록 등의 매국노, 증국번, 이홍장 등의 청말 명신까지 등장인물들도 다채롭다. 심지어 소년 모택동도 나온다. 다루고 있는 시기도 다양해 청말뿐 아니라 건륭대제와 조혜 대장군,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등의 청나라 건국 초기의 위인들도 출현한다. 여담이지만 건륭제가 짝사랑했던 향비와의 이야기가 특히 안타까웠다. 몸에서 향기가 났다는 이 이국의 공주에게 반한 건륭제는 모든 것을 다바쳐 그녀를 사랑하지만 결국 그녀를 얻지 못한다. 철인 건륭제는 여기서 황제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작품 후반부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동력이기도 하다. 이토록 많은 인물들에게 총천연색 옷을 입힌 작가의 역량에 감탄하고 말았다.

 

작가 아사다 지로는 <철도원> <칼에 지다> <프리즌 호텔> 등으로 유명한 일본의 소설가. 개인적으로는 처음 접해본 작가인데 앞으로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군에 넣고 싶은 심정이다. 아사다 지로는 마음이 몹시 따뜻한 작가인 듯 등장인물 모두에게 그리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주입한다. 예컨대 폭정을 일삼는 서태후에게도 마찬가지다. 선인과 악인의 대결로 압축되는 기존의 역사소설과는 조금 다른 방향인데 작가의 인본주의적 사상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다고 말했다는데, 그 자신감에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는 대작이다.

 

서두에 하늘의 뜻을 인간이 거역할 수 없다 운운했는데, 사실 이 작품의 진짜 주제는 그게 아니다. 인간의 힘, 마르지 않는 그 정신력으로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단다. 근대 중국에서는 “메이화즈(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썼다 한다. 외세 열강의 압박으로 국토가 조각나고, 국민들의 몸과 마음은 피폐해져감을 상징하는 패배주의적인 말이다. 그러나 작가는 춘아와 양문수, 서태후, 이홍장 등의 인물에게 “네버 기브업” 정신을 주입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명예롭고 긍지에 찬 인물들로 그려낸다. 결말부 변법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는 양문수가 황제에게 보낸 결코 닿을 수 없는 편지를 눈물을 흘리지 않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신경이 고장난 사람일 것이다. 진실로 감동적인 작품이며 책장을 덮고도 오랜 시간 잊혀지지 않을 걸작이다.

 

 

p.s/ 옛날 한경출판사에서 나온 3권 분책으로 보았습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책은 4권 분량입니다. 혹시 달라진 바가 있을지 모르나, 아쉽게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께 소개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새로 창해출판사에서 나온 표지를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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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랑데뷰 2006-07-2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쯤 오겠군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

jedai2000 2006-07-2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당분간은 이 책에 빠져 보내시겠군요. ^^

짱꿀라 2006-07-29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jedai2000 2006-07-30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고 좋은 작품이죠. 알아주시는 분이 슬슬 나타나시는군요. ^^
 
아임 소리 마마 밀리언셀러 클럽 44
기리노 나쓰오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 여자 참 독하기도 하네,이다. 주로 여성, 나아가서는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악마성과 잔혹함, 파괴성을 날카로운 칼로 베듯 예리하게 그리는 그녀의 작품들은 쉽게 손이 가는 그것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의 작품들을 집어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역시 그녀의 완벽한 필력 때문이리라.

 

<아임 소리 마마>의 주인공은 아이코라는 예쁘게 들리는 이름을 가진 여자이다. 그러나 그녀는 47살의 살찐 중년 여성으로 예쁜 것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다. 여성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이런 소설에서 흔히 주인공 여성을 아름답게 그려 독자들로 하여금 동정의 여지를 깔아두는 것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작가는 이 작품의 주인공 아이코에게서 일체의 여성적 매력을 제거한다. 오히려 작가는 아이코에게 혐오감을 주는 외모를 선물할 뿐이다.

 

창녀촌에서 자란 아이코는 엄마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 뭇남성들을 상대하며 피폐한 정신 세계를 가진 창녀들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창녀촌이 폐쇄되자, 보육원에 들어갔고, 성장해서 그곳을 나와서는 살아남기 위해 몸을 팔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사람을 제거하고 살아왔다. 필요한 게 있으면 훔치고,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불태워 죽이며, 단순히 기분이 나빠져도 죽인다. 가장 갖고 싶었던 엄마를 가지고 있는 세살 아이는 질투심에 유괴해 버린다.

 

괴물이다. 그동안의 기리노 나쓰오 작품을 통틀어봐도 이런 인물은 없었던 것 같다. 읽어나가는 동안 아이코에게 완전히 질려버렸다. 해설을 보면 작가는 '섹스하는 어린 아이'를 그리려다가 앞뒤 가리지 않는 인물로 발전해버렸다고 말한다. 생존을 위해, 아이코는 섹스하는 어린 아이가 되고 싶었다. 섹스를 하면 돈을 받을 수 있고, 돈이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끌리는 외모'를 가지지 못했고, 결국 다른 방법으로 살아남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는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작가는 그동안 보여줬던 일관된 작품 세계를 여전히 펼쳐보인다. 흔히 여성적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것들의 해체 작업 말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모성애가 아닐까 한다. 그토록 찾고 싶던, 상상했던 마마와의 마지막 대면에서 아이코는 그토록 갈구해왔던 모성애도 사실은 허구적인 것,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아이코의 어머니는 어머니지만 딸을 증오했고, 증오했고, 증오했다. 아이코의 고통스런 깨달음은, 모성 신화가 깨어지는 걸 목도하는 독자의 고통스런 시선과 일치하며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불안감과 강렬함을 안긴다.

 

대체 기리노 나쓰오는 누구이길래 이런 글을 쓰는가. 예전에 지인들과 술을 마시며, 농으로 비슷한 연배의 여성 미스터리 작가 미야베 미유키와 비교한 적이 있다. 미혼의 미야베 미유키가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미스터리 소설을 써도 따뜻한 분위기와 인간적인 결말을 준비해놓는다면, 24살에 결혼해 평범한 회사원인 남편과 딸 하나를 둔 기리노 나쓰오는 처절하게 극단적이며, 인간과 인간의 교감 따위는 불가능하다고 외친다. 이 차이는 아마 결혼의 여부 때문이 아니었을까. 미야베 미유키는 결혼을 하지 않아, 세상이 아직 밝아보이는데, 기리노 나쓰오는 평범한 결혼 생활을 통해 지옥을 본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냥 농담이었는데 웬지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을 읽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특별한 경험이며, 그녀의 필력은 이미 일본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이코라는 괴물마저 경찰에게 붙잡혀 파멸하지 않을까, 독자들로 하여금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능력은 어지간한 작가는 하기 힘들다. 인간 사회의 비루한 것, 비천한 면들을 뻔뻔스럽게 제시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수법도 여전하다. 결국 엄마와 대면하면서, 그동안의 죄에 대해 약간이나마 눈을 뜨게 된 아이코에게 끝까지 구원의 길을 인도하지 않는 작가의 지독함에는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비록 그녀의 대표작에 비해 조금 짧은 분량으로 그 힘이 조금 부족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다른 대다수의 평범한 작가들과의 격차를 확인할 수 있는 역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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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 2006-07-19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책을 읽고싶도록 리뷰를 쓰시네요 님의 서재의 책들을 마구주문하고, 이것도 주문함에 넣습니다.

jedai2000 2006-07-19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keeffe 님...감사합니다. 과찬이시지만, 정말 제가 쓰면 사람들이 읽게 되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 추리소설 좀 많이 읽히게요..ㅋㅋ 기리노 나쓰오의 최고 걸작은 아니지만 좋은 작품이예요.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단 한번의 시선 1 모중석 스릴러 클럽 2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하다 못해 떡볶이집만 해도 문전성시를 이루는 대박집이 있는가 하면, 하루종일 파리쫓기 놀이만 해야 하는 쪽박집이 있음을 우리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엄밀히 들여다보면 사실 들어가는 재료는 거의 비슷하다. 겨우 떡볶이를 만드는데 얼마나 다른 재료로 차별화를 이루겠는가. 그러니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건 작은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대중 스릴러 작가 할란 코벤도 이와 비슷하다. 고만고만한 스릴러 작가들이 난립해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할란 코벤은 자신의 작품을 성공으로 이끄는 1%의 비결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미 국내에 <마지막 기회>와 <밀약>이라는 두 작품이 소개된 할란 코벤의 신작 <단 한번의 시선>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는 거의 비슷하다. CF에서나 나올 듯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초반에 등장한다, 그러다 모종의 사건으로 가정의 행복은 파괴되고, 주인공은 무엇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 조사를 결심하고, 곧 그들의 불행은 과거에서 찾아온 어떤 망령에 기인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조사 과정에선 초인적인 능력의 킬러가 주인공을 따라붙어 위기 상황을 만들고,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주인공은 수많은 단서와 증거들을 헤집다 마침내 과거의 모든 비밀을 풀고 행복을 되찾는다. 이제 다시는 가정이 깨어지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순간에 또 한 번의 반전으로 모골이 송연한 순간을 맞는다는 결말로 끝나버린다. 이것이 할란 코벤식 떡볶이 제조법의 모든 것이다.

 

세 작품의 내용이 모두 이렇게 요약 가능하다면 독창성이 없다고 실망할 독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대박집 떡볶이를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처럼, 할란 코벤의 작품도 볼 때마다 재미있다. 아니,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몰입시킨다. 이 글을 쓰고(치고) 있는 지금의 내 손을 카메라로 찍어 올려두고 싶을 정도다. 오른손 검지 손톱이 아예 반도막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도 물어뜯어서 말이다. 매번 비슷한 소재를 다룬다지만 할란 코벤은 그것을 약점이 아닌 장점으로 승화시켜 하나의 익숙한 할란 코벤 식 스릴러를 만들어낸다. 농구 경기에서 우수한 포인트가드가 공을 자유자재로 드리블하는 것처럼, 그는 여러번의 비틀기와 뒤집기로 독자의 신경을 드리블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드리블되다 결국 경기의 끝에 다다르면 충격적인 몇 번의 주의를 기울인 다중 반전과 만나게 된다. 경기가 완전히 끝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명승부를 보았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뿐이다.

 

서서히 이름이 알려져가고 있는 화가인 그레이스는 남편 잭, 두 자녀와 함께 뉴저지 교외에서 행복한 삶을 산다. 주말에 다녀온 가족 소풍 사진을 찾아온 그레이스는 사진 속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분명 이번 주말에 찍은 사진은 아니다. 자세히 보니 다섯 명의 남녀가 찍혀 있는데, 그중 한 명은 남편의 앳된 모습이 분명하다. 남편에게 이 사진은 뭐냐고 추궁하자, 그는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고는 그 길로 집을 나서 돌아오지 않는다. 청천벽력같은 사태를 만난 그레이스. 아이들은 아빠가 보고 싶다고 울고...사실 가장 잭을 보고 싶은 사람은 다름아닌 그레이스일텐데 말이다. 그레이스는 사진의 비밀을 풀고, 남편을 찾기 위해 약간의 단서를 가지고 조사에 나선다. 유감스러운 사실은 그레이스가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길 원치 않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그레이스와 잭은 곧 위기에 직면한다.

 

남편 잭이 사실 비밀조직의 킬러였다던가 하는 뻔한 이야기는 아니니 안심하기 바란다. 물론 그레이스가 <롱 키스 굿나잇>의 지나 데이비스처럼 기억을 잃은 암살자도 아니다. 아, 그레이스는 5일 정도의 기억이 사라지긴 했다. 이 작품은 위에도 언급한 작가의 장기인 정신없이 몰아치는 플롯 비틀기와 뒤집기, 결말부의 다중 반전도 일품이지만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고 우리가 꼭 행복해지는가, 혹은 인간이 인간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는가, 죄란 과연 무엇인가, 등의 곱씹어볼 만한 질문들을 담고 있어 더욱 만족스러웠다. 한 편의 재미있는 소설을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있게 추천드린다.

 

작가 할란 코벤은 스포츠 에이전트 마이런 볼리타가 유명 스포츠 스타들이 관계된 사건들을 해결하는 시리즈를 8편 써서 유명해졌다. 시리즈 3편은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 페이퍼백상을 수상하기도. 마이런 볼리타 시리즈 외에도 독립적인 스릴러 작품들을 다섯 편 썼는데, 그중 오늘 소개한 <단 한번의 시선>과 <밀약>, <마지막 기회>가 국내에 발간됐고, <Gone for good>과 <The Innocent>가 국내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작품들이다. 나머지 두 작품을 비롯해, 마이런 볼리타 시리즈까지 모두 만나보고 싶은 바람을 담으며 이만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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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7-17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님 리뷰를 읽으니 기대가 커요. ^^

Apple 2006-07-18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제다이님은 책을 꼭 사보고싶게 글을 쓰세요~+_+
별로 관심없던책인데, 갑자기 이것도 읽어보고싶다는...
나도 이책도 담아놔야징~추천 살포시 눌러요..^^

jedai2000 2006-07-18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원래 기대를 좀 줄여야 더 재미있는 법인데 제가 재미를 뺏는건지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그래도 조심스레 추천드립니다. 끝까지 재미나게 보세요.

애플님...이런 제가 애플님의 가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군요. 아마 큰 후회없이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추천 정말 감사드려요. ^^
 
눈은 진실을 알고 있다 - 2권 세트
조르지오 팔레띠 지음, 이승수 엮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뉴욕의 전직 형사, 조던은 화가였던 조카 제리코가 살해되자 한시적으로 복귀를 결심한다. 아들을 잃은 배다른 형의 눈물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조던의 형은 거대도시 뉴욕의 시장으로 사건 해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할 태세다. 도착한 살인사건 현장에는 살인자가 남겨둔 참으로 기괴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조카의 귀에 담요가 접착제로 붙여져 있고, 엄지를 입 안에 집어 넣어 마치 손가락을 빠는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이 풍경을 보고 무엇이 생각나는가? 그렇다. <피너츠>의 라이너스의 모습을 흉내낸 것이다. 살인은 계속 일어나고, 찰리 브라운의 친구 루시와 스누피 모양으로 죽어 있는 피해자들이 속속 등장한다.

 

로마의 형사 반장, 모린은 미국의 뮤지션 코너 슬레이브의 애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모린이 공무수행 도중 사살한 마약범의 형이 두 사람을 납치한 뒤, 코너는 죽이고 모린의 눈은 멀게 만든다. 눈을 잃은 모린은 자신의 눈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가 뉴욕에 있다는 걸 알고 수술을 받는다. 성공적으로 수술이 끝났지만 알 수 없는 환상이 보인다. 정체불명의 환상에 고통받던 그녀는 자신의 눈의 기증자가 며칠 전 라이너스 모양으로 피살된 제리코임을 알게 된다. 과연 그녀가 본 환상은 무엇이었을까? 

 

작년 소리소문도 없이 묻혔던 이탈리아 산 스릴러 <나는 살인한다>의 조르지오 팔레띠가 다시 돌아왔다. 배우에 뮤지션이었던 기묘한 경력의 이 사내를 스릴러 팬들은 분명히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 단 두 편의 작품에 불과하지만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품위있고, 사색적인 단단한 문장과 뒷이야기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여러가지 트릭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안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보다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미스터리의 장치를 사용한다. 이 점은 제프리 디버의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이다. <눈은 진실을 알고 있다>에서는 피살자의 눈에 어린 기억이라는 다소 초현실적인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범인의 정체를 알아내는 과정은 비교적 논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모던 스릴러 작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미국의 제임스 패터슨이나 할란 코벤처럼 액션을 강조하는 속도가 빠른 작가는 아니고, 등장 인물의 시점을 빌어 현대 사회의 병폐 등을 지적하는 등 무겁고 진지한 느낌이 나는 글을 쓴다. 이 점은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긴박한 장면에서 멋부린 문장이 도처에 튀어나오니 호흡이 그만큼 떨어지게 된다. 물론 시종일관 진지한 작품의 무게감을 유지시키는 데는 손색이 없지만 말이다. 이 점은 취향에 따라 호오가 갈릴 것이라고 본다.

 

모던 스릴러 소설이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여전히 큰 인기를 끌어서인지 꽤 많은 작품이 쏟아져나온다. 사람을 죽여도 이제 웬만한 장면에서는 독자들이 눈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시체의 뇌를 먹는 박사도 있고, 여자 피부를 벗겨 옷을 만드는 살인마가 활개치는데 뭐가 더 충격적이겠는가. 그래서인지 이 장르를 쓰는 작가들은 참으로 어려울 것 같다. 충격에 면역이 된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끌려면 더 독특한 죽음의 방법을 고안해야만 하니까. 이 작품에서는 그런 고민의 일환으로 세 명의 피살자들에게<피너츠>의 모양을 흉내낸 죽음을 안겨준다. 개인적으로 <피너츠>보다 <심슨>을 더 좋아해서 안타까웠다. 호머 심슨처럼 배가 나오게 만들고, 윗머리를 뽑아 두 가닥만 남겨둔 피살자가 등장할 수도 있었을텐데... 솔직히 만화 캐릭터를 흉내낸 살해 아이디어가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는 유치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는 책의 후반부가 뛰어나 용서가 된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액션 페인팅, 만화 <피너츠>, 영화 제작 등의 미국 대중문화 이야기도 쏠쏠한 재미가 되고...누가 읽어도 크게 후회하지 않을 괜찮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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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7-15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심슨은 너무 안어울려요 ㅠ.ㅠ

jedai2000 2006-07-17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렇죠. 너무 안 어울리죠. 그래도 피너츠보다는 심슨이 좋아요. ^^

거품 2006-07-20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찰리 브라운의 동생은 샐리.
루시 아님.


jedai2000 2006-07-20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실수네요. 샐리였군요. 죄송합니다. 정확히 알아보고 썼어야 했는데 말예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수정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