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1
키리노 나츠오 지음, 권남희 옮김 / 산성미디어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때 가족 외식을 나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간 곳은 수많은 가족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한국의 외식 장소인 갈비집이었다. 그 나이만 되도 가족 간의 외식이나, 여행은 사실 인내심 수련이다. 지루한 시간을 억지로 보내며 밥을 먹다가 맞은 편 좌석의 가족을 보았다. 그쪽은 두 자녀가 초등학생쯤으로 보였는데, 어머니가 고기를 구워 일일이 먹여주고 있었다. 무심코 그쪽 어머니를 쳐다보고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모르는 사람을 두고 이런 식으로 나불대는 것은 굉장한 실례겠으나, 어쨌든 나는 그 육아와 살림에 찌든 듯한 그 어머니의 얼굴 깊은 곳에서 기묘한 생기를 느꼈다. 감출 수 없는 생명력 말이다. 그토록 생기가 있는 여자가 저렇게 지쳐 있다니...나는 씁쓸해졌고, 그 어머니의 얼굴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다.

 

<내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원제:부드러운 볼)>에 꼭 이런 여자가 등장해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의 이름은 카스미. 흡사 야생동물처럼 생기가 넘치는 그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그녀, 어린 시절의 카스미가 사는 곳은 홋카이도의 외딴 바닷가였다. 아무 것도 없는 바다, 음울한 파도만이 마치 악의를 가진 듯 모든 걸 쓸어가버리는 그런 곳이다. 카스미는 디자이너의 꿈을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출을 감행해 도쿄로 온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던 도쿄마저도 그녀에게는 그 손을 벌려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평범한 남편과 결혼해 딸 둘을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산다.

 

남편의 친구인 이시야마와 사랑하게 된건 정체되고 고여있는 현실에 절망한 시점, 첫 딸 유카가 다섯 살이 될 무렵이다. 절망한만큼 파멸을  향해 무섭게 달려가는 두 사람. 두 사람은 각자의 가족과 함께 이시야마의 별장으로 가족 여행을 떠난다. 좁은 별장에서 각각의 배우자들의 눈을 피해  몸을 섞는 두 사람. 카스미는 생각한다. 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가족을 모두 잃어도 좋아, 아이를 잃어도 좋아. 다음 날, 아침 잠깐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린 사이에 맞딸 유카는 정말로 사라져버렸다.카스미는 죄책감에 몸부림친다. 딸에게 시선을 떼서 아이를 잃을 빌미를 만든 것보다도, 딸을 잃어도 좋다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너무도 죄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카스미는 남아있는 모든 정열을 불태워 유카를 찾아나서지만 행방을 알 수 없다. 한편, 우연히 사건을 알게 된 전직형사 우츠미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몸이다. 죽기 직전 자원봉사를 할 요량으로 카스미를 도와 함께 유카를 찾는다.  

 

대담하고 관능적인 소설이다. 불륜에 빠지게 되는 카스미와 이시야마의 심정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데, 기리노 나쓰오라는 장인의 손길이 닿은 작품답다.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넓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마력에는 그저 놀랄 수밖에. 읽으면 읽을수록 이 여성작가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내용 요약만 보면 평범한 유괴된 딸을 찾아나서는 추리소설로 볼 수도 있지만 작가의 관심사는 그런 게 아닌 듯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카스미와 우츠미가 꾸는 세 번의 꿈 속에서 사건이 재현되고 각각 다른 범인이 나타난다. 세 백일몽 중 어느 것이 정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여러 가능성이 제시될 뿐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인간 관계에 대한 통찰력과 기발한 관찰력이 특히 만족스러운데, 죽기 직전 자원봉사를 자처하는 우츠미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카스미를 돕지 않는다. 기리노 나쓰오는 그런 인물은 절대로 그리지 않는다. 죽어가는 우츠미는 자신보다 더 불행한, 딸을 잃고 절망에 빠진 카스미에게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스미도 곧 죽어야할 우츠미를 보고 역시 우월감을 느끼는 심술궂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불행함을 이해하게 되고, 공감하게 된다. 흔치 않은 감동이다.

 

쓸쓸한 작품이다. 아이가 사라진 후, 죄책감에 카스미와 이시야마는 이별을 했다. 이시야마의 마지막 말은 그렇게 좋아하던 낚시와 담배를 끊겠다는 것이었다. 자신도 뭔가 고통을 받고 싶다며...몇 년 뒤 우연히 재회한 두 사람. 이시야마는 술집 여자의 기둥서방이 되어 있었고, 담배도 거침없이 피고 있다. 그걸 보는 카스미의 쓸쓸함이란. 아무리 뜨거운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식게 마련이다. 반석같은 사랑의 맹세도, 굳은 결심도...

 

누구나 어른이 되면 부모의 품을 떠나 점점 늙어가며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가야 한다. 카스미가 부모의 품에서 가출했듯, 유카가 엄마에게서 사라졌듯 말이다. 혹시 유카의 실종은 이렇듯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인생길을 상징하는 대목은 아닐런지...카스미가 바라보던, 황량한 바닷가의 쓸쓸한 파도가 환영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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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7-29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보관함에 넣어요..;;

물만두 2006-07-29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까지 사로잡는 대단함이 느껴지는 작품이죠^^

jedai2000 2006-07-30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후회하지 않으실 작품입니다. ^^

물만두님...예. 최후까지 만족시켜주는 작품이예요. ^^

bongbong 2007-04-15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리오 나츠오 작품중 최고최고
이 작품만한 역량을 다시보여주면 좋으련만


jedai2000 2007-04-15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그로테스크>나 <아웃>에 비하면 이 작품을 최고로 꼽는 분들이 적은데, 저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기리노 나쓰오의 최고작이라 생각합니다. 반갑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