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묘촌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팔묘촌이란 이름 그대로 여덟 개의 무덤이 있는 마을입니다. 이 기묘한 마을 이름의 유래는 일본의 전국시대 패주한 8명의 무사들이 주군의 황금을 가지고 마을로 들어와 권토중래를 노리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견물생심이라 했던가요. 마을 사람들은 8명의 무사들을 전부 몰살시키고, 황금을 찾지만 무사들은 이미 황금을 꽁꽁 숨겨둔 뒤였죠. 기대했던 황금은 허탕치고, 오히려 죽어가던 무사 대장의 저주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마을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무사들을 달래기 위해 8개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해서 마을 이름이 ‘팔묘촌’이 된 거랍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무사들의 저주 때문일까요. 전쟁 전 팔묘촌의 최고 갑부인 다지미 가의 당주 요조가 광기를 일으켜 총과 칼로 32명의 마을 사람들을 살해하고 사라집니다. 무심한 세월은 흐르고 흘러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 요조의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나, 타츠야는 다지미 가를 상속받기 위해 팔묘촌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저주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타츠야가 돌아오자마자 마을에서는 연쇄독살 사건이 벌어집니다. 마침 마을에 머물고 있었던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사건에 참여하지만 진상은 오리무중이고, 타츠야는 계속되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는 내용입니다.

 마치 옛날 할머니가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 나는 책입니다. 일본 추리소설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요코미조 세이시가 1947년 발표한 이 작품은 약간은 고색창연하고 빛바랜 느낌이라 마치 셜록 홈스나 애거서 크리스티,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를 보는 듯한 고풍스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그 좋아하던 밥도 마다하고,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보게 만들던 책이 주는 즐거움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팔묘촌>에는 보물과 보물지도, 비밀통로, 동굴탐험, 연쇄살인, 오싹한 공포 등 고전 모험소설, 추리소설, 공포소설의 요소가 모두 들어가 있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종래의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와는 달리 1인칭으로 집필되어 독자들의 몰입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더구나 주인공 타츠야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 어디 하나 특출난 구석이 없어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과거도 모르는 인물이라 이 끔찍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당황하기만 하죠. 이것은 우리 독자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주인공과 역시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독자와의 심정적 동화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이 작품에 깊이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보물지도를 가지고 종유동굴을 탐험하는 모험소설로도 그지없이 재미있지만, 오싹한 공포감도 제법입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특기인 봉건적 인습이 주는 공포감이 그것이죠. 패전 이후 경제적 악화에도 불구하고 점차 시민들의 인식이 깨어나고 개화되는 대명천지에, 전국시대부터 내려온 저주에 매몰된 사람들이라니요. 패쇄된 공간에 사는 시골 사람 특유의 무지와 편협함, 전해 내려오는 저주에 대한 맹신, 사리를 분별하지 않는 가공할 행동력으로 팔묘촌 사람들은 폭도로 변해 저주의 현신이라 생각하는 타츠야를 공격하게 됩니다. 왜 사리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앞뒤가리지 않는 공격성을 보면서 우리는 무서워하잖아요. 팔묘촌의 마을 사람들이 꼭 그렇거든요. 이 분위기를 잘 살려낸 건 요코미조 세이시의 탁월함이라 하겠습니다.

 더구나 추리소설로도 꽤 뛰어납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비록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나타나 사건을 수사합니다. 마침내 그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밝혀진 연쇄독살사건의 비밀을 풀어냅니다. 최종장에서 모든 용의자들을 한자리에 몰아놓고 진범을 폭로하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모습은 뛰어난 고전 추리소설의 절정에서 느낄 수 있었던 짜릿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잘 안배된 단서들을 가지고 직접 추리할 수 있는 재미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팔묘촌>은 일본 추리소설 사상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 중 한 편답게 재미와 스릴, 흥분과 몰입으로 가득찬 굉장히 뛰어난 작품입니다.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는 총 77편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남겼고, 현재는 후배 만화가들이 코스케의 손자, 긴다이치 하지메(김전일) 시리즈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의 국민 추리소설가와 국민 탐정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팔묘촌>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아주 행복한 일입니다. 충분히 즐길 만하고 만족스러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눈뜨고 놓치는 사람이 있다면...흠흠...바보라고 불러주겠습니다.


 

p.s/ 긴다이치 코스케는 명탐정답게 머리 회전이 비상하지만 유독 희생자의 인권(?)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8명이 죽은 후 사건의 비밀을 풀어낸 긴다이치는 말합니다.

“나는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어요...다만 증거가 없었을 뿐이지.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범인을 알면 증거가 없어도 함정 수사를 하거나, 몰래 숨어 사건 현장을 덮친다거나 하는 행동은 왜 못 하나요? T.T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었을까요. 정말 무서운! 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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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로 2006-08-25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보가 안 되기 위해 읽어야 할까요ㅎㅎ. 저에게는 아직도 펌푸질이 덜 되었습니다.^^

물만두 2006-08-25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하하하 읽었어요^^ㅋㅋ 님의 글에 많은 분들이 유혹당해야 하는데요^^

아영엄마 2006-08-2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른 읽고 폼푸질에 동참을 해야 할텐데...^^;;

jedai2000 2006-08-25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솔로님...앞으로 동네방네 '한솔로님 바보!' 하고 떠들고 다닐 겁니다..ㅋㅋ 농담이구요. 나중에라도 꼭 읽어보세요. ^^

물만두님...괜찮은 작품이라 솔직히 많은 분들을 유혹하고 싶네요. 유혹에 빠질 사람 어디 없수~ 유후~! -_-;;

아영엄마님...빨리 보세요. 폼푸질 연합을 이뤄보자구요. ^^

Apple 2006-08-2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보될뻔 했습니다!!!!!
저도 어여...-_-

oldhand 2006-08-25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란포의 "외딴섬 악마"에 비견할 만한 모험 소설적 요소를 갖추고 있더군요.

비로그인 2006-08-25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T^T

jedai2000 2006-08-25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님...괜히 바보 이야기를 적었나 봅니다. 부끄럽사옵니다...^^ 누구나 재미있게 볼 수 있을 작품입니다. 꼭 보세여~ ^^

올드핸드님...예. <외딴 섬 악마>하고 분위기가 비슷하죠. 시점도 그렇고요. 다만 짜임새는 <팔묘촌>이 더 좋은 것 같네요. ^^

정군님...이런, 안 보셔도 바보 아닙니다. ㅋㅋ 시간 나실 때 천천히 보세요. ^^


상복의랑데뷰 2006-08-26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봐야하는데....요즘 추리소설 자체가 잘 안 읽히는지라...리뷰를 봐야하는데 아쉽습니다...ㅠㅠ

jedai2000 2006-08-26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대작들이 쏟아져나오는 이때 슬럼프라니요. 힘내시고 즐독 하세요~ ^^

페일레스 2006-08-26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거 진짜 긴다이치 완전 무시무시하군요. 김전일이 할아버지를 쏙 빼닮은 듯...
주인공만 있으면 주위에서 픽픽 죽어나가니 -_-;

jedai2000 2006-08-26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다이치 조손의 생명 경시 풍조에 대해 가슴이 아픕니다. 둘 앞에서 한 300명은 죽어나갔을걸요. ^^
 



 
여름은 바다의 계절
이름모를 바다새가
푸른 하늘을 수놓고
반짝이는 모래 위로
날 따라오는 발자국
내가 만든 발자국이지만
내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바닷가에 새겨진 또 하나의 풍경
파도와 아이스크림
그리고 너의 둥근 웃음
 
요즘 '바다이야기'로 세간이 온통 떠들석하다. 다행히 내 이야기는 진짜 '바다이야기'이니 안심하기 바란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나고, 이제 여름이 끝나는 모양이다. 올 여름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바다를 간 것. 본래 물을 좀 무서워하는 편이라 바다에 갈 일이 있으면 피하는데, 이번만은 따라 나섰다. 만리포였는데, 심지어 바닷물에도 들어갔었다. 물론 튜브를 탔지만. 짗궃은 친구 덕에 짠물도 먹고, 튜브 위에 둥둥 떠서 유람하듯 돌아다니기도 하고...너무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을 것같다.
 
인간은 누구나 중력의 노예, 발에 땅을 딛고 산다. 그래서인지 잠시나마 물 속에 떠 있을 때의 그 해방감이란 굉장했다. 아, 이 맛에 바다를 오는구나 싶었다. 역시 여름의 로망은 바다인 듯. 수많은 사람들, 가족들, 친구들, 연인들이 푸른 바다에 청춘을 실었다. 웃고 떠들고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에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 그 바다에 있던 사람들 중 집으로 돌아가면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는 나쁜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날만은 모두들 아이가 된듯 환한 얼굴로 웃느라 바빴다. 그 얼굴들이 너무 좋아 내년에도 바다를 찾을 것이다.
 
한바탕 물놀이가 끝나면 쉬 피곤해진다. 갈증으로 타는 목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이면 이야, 천국이 따로 없다. 올해 여름, 그 바다에는 대박을 부른다는 '고래'도 무서운 '상어'도 없었다. 그토록 무서워하던 바다와 마침내 화해를 했다고나 할까. 나로서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바다에는 많은 선택지가 존재한다. 바닷물로 들어가 저기 아무도 없는 지평선까지 나아가볼까, 모래 위에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보는 것은, 달콤한 주스를 마시며 바다를 감상해볼 수도, 철지난 바다노래를 목청껏 불러보고, 마음 맞는 친구와 밤새도록 이야기는...이런, 벌써 하루가 다 가버렸네. 만리포에서의 짧은 휴가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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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23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그 바다이야기땜에 순수한 바다가 오염됐어요.
그나저나 밀려오는 파도 멋있네요^^

jedai2000 2006-08-24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거기다 왜 바다이야기를 갖다 붙이는지 원..
밀려오는 파도 사진 보니까 다시 바다 가고 싶네요. ^^
 



올해 최고의 화제작이 될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던 봉준호 감독의 신작. 사실 영화 <괴물>에 대해서는 웬만한 설명은 불필요한데, 그도 그럴 것이 이미 1000만 명이 보았기 때문이다. 인구 5000만 명이 안 되는 나라에서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괴물>까지 천만 영화가 벌써 4편째이다. 다리가 멀쩡해 극장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이면 거의 다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이러한 몇 편의 장사 되는 영화의 ‘싹쓸이’에 대해서는 좋다, 나쁘다의 의견이 갈리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괴물>을 보고 든 생각은, 아직도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 중에 다리가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꼭 보고 오시라는 거다.


아무리 언론에서 좋다고 떠들고, 극장이 수백 개가 넘어 독점이네 어쩌네 해도 결국 영화의 판단은 관객이 한다. 보기에 재미 있으면 몰려가서 보는 거고, 재미 없으면 때려 죽여도 안 본다. 와이드 릴리즈로 초반에 재미를 봐도 영화 자체에 힘이 없으면 개봉 첫 주가 지나면 바로 힘이 빠지기 마련이다(<태풍><한반도> 등). 위에 언급한 4편의 천만 영화는 그 나름대로 완성도를 갖추었고, 그 많은 관객에게 소구하는 바가 있었기에 그 정도 장사가 된 것이다. 그걸 갖고 영화계 안에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한 번도 흥행 못 해본 놈이 질투하는 꼴이나 다를 바 없다.


한강 변에서 매점을 하며 지리멸렬하게 살아가는 가족이 변종 괴물과 싸운다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점은 역시 ‘괴물’의 존재일 것이다. 봉준호 감독 이하 스태프들은 이 작품에서 전세계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기술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물론 괴물의 CG 제작은 뉴질랜드 특수효과 회사가 맡았다지만, 영화 안에서 튀지 않게 유기적으로 묶어낸 것은 분명 한국 제작진의 성과일 것이다. 비주얼만 강화된 단순한 괴수 영화로 보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지만, 만약 영화의 성취가 정말 발전된 비주얼에만 그쳤다는 말에 수긍한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 칭찬받을 일이다. 예를 들어 돈이 넘쳐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 정도 기술력의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영화의 특수효과에 사용되는 기술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기술력은 많은 경험을 통해 노하우가 축적되는 것이다. <괴물>로 인해 한국영화계는 기존의 기술적 한계를 한발자국 뛰어넘은 것으로 보인다. <괴물>을 만드는 데 성공한 기술의 자신감으로 앞으로 더 발전된 비주얼의 SF영화, 특수효과 영화 등이 나올 길을 개척해낸 것이다.

 

그렇다고 <괴물>이 단순한 흥행 영화의 조건만을 갖춘 것은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답게, 그만의 고유한 영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감독은 전작 <살인의 추억>에서도 형사 스릴러의 내러티브 속에 80년대의 시대적 아픔, 거대한 권력구조가 자행하는 인위적인 어둠(등화관제)에 무기력하게 스러져 가는 여성들, 형사들의 모습을 그려 잊지 못할 슬픔을 관객들에게 안겨준 바 있다. 한마디로 장사도 되면서, 할 말도 다 하는 시네마 아티스트의 면모를 보여준 것인데, <괴물>에서도 봉준호 감독만의 시각은 존재하고 있다. 괴물의 탄생 배경과 괴물이 발생시킨다고 추정되는 바이러스의 처리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개입이나, 누구나 알 수 있는 뻔한 진실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부의 모습, 소외 당하고 핍박 받는 처지의 힘없는 소시민의 정서를 그림으로써 보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특히 후반부, 미군 추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시위대의 요란뻑적지근한 모습은 부조리에 항거하는 시위가 최근 들어 진실성을 잃고 거의 '이벤트'로 전락하고 만 풍경을 그럴싸하게 풍자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살인의 추억>에서는 쭉 흘러가는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메시지를 드러나지 않게 잘 삽입했다면, <괴물>에서는 너무 대놓고 메시지를 설파해 흥이 좀 떨어지는 면모는 있다. 뻔한 흥행 영화 이상의 것을 보이고 싶어했던 감독의 고민이 영화의 균형잡기에 약간 어색함을 준 형국이라고나 할까.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의 결을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연기를 꼽으라면 언제나 두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가 그중 한 편인데, 이번 작품에서도 단백질이 부족해 약간 지능이 떨어지는, 그러나 처절한 부성애를 보여주는 박강두 연기로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나머지 한 편의 영화는 <공공의 적>의 설경구). 그러나 이번 작품의 최고수훈갑은 역시 변희봉 선생과 고아성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살아온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으로 괴물과 맞서 싸우는 변희봉 선생의 잊지 못할 명연기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를 발산했던 고아성은 정말 대단했다. 특히 괴물의 등을 밟고 하수구 위에 매단 줄로 뛰어오르는 장면의 고아성은 최근 한국 영화를 보면서 그만큼 흥분했던 적이 없었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박해일과 배두나도 몫을 충분히 했고. 배두나는 마지막 활쏘기 결정타에서 제대로 멋졌다. 역시 영화는 배우가 살아야 사는 법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했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걸 진심으로 즐겼고, 대단히 만족했다. 현서(고아성)가 살아남기를 애타게 바랐고(손에 땀이 찰 정도였다), 박강두(송강호)의 눈물에 같이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익숙한 한강변에서 괴물이 활개칠 때는 공포감을 느꼈으며, 교각을 꼬리로 감아 이동하는 괴물의 모습에서는 탄성을 질렀고, 괴물과 맞서 싸우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더할 나위 없는 흥분을 느꼈다. 근 몇 년 사이 이렇게 만족한 영화는 없었다. 봉준호 감독은 또 한 번 성공했으며, 당분간 국내에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그와 대적할 감독은 없어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애정을 넘어 흠모까지 하게 됐다. 꼭 한 번 뵙고 싶을 정도이다. 이 정도의 영화는 한 두 사람의 재능 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운과 떄가 맞아야 나오는 게 아닐까. <괴물>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별점: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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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8-19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옆에 낑겨서 박수 좀 보내겠습니다. 흐흐. -_-)b

2006-08-20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6-08-20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일레스님...같이 박수 쳐요 ^^

상복의 랑데뷰님...죄송합니다. 요즘 핸폰이 완전 맛이 가서요. 지금 문자 보고 전화 드렸는데 안 받으시네요. 꼭 사고 싶네요. 부탁드립니다.


하늘바람 2006-08-2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진 리뷰네요

jedai2000 2006-08-21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어이쿠.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 과찬이시지만 기분 좋네요. 고맙습니다.
 

 




 21세기는 스타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채로운 재능과 끼로 대중의 우상으로 군림하는 그들은 손짓 하나로도 팬들을 열광시키고, 필연적으로 큰 돈을 벌며, 선남선녀답게 많은 스캔들을 만들어낸다. 스타가 이루지 못할 것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금만 더 지나면 죽은 사람도 살릴지 모른다. 이러한 스타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터.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은 스타를 꿈꾼다. 스타공화국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서일까, 최근 연예계 스타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나왔다. <오버 더 레인보우>라는 제목으로 MBC에서 매주 수,목요일 밤 10시에 방영하는 16부작 미니시리즈이다. 예전에 모 유명 매니저가 연예 사업 중에서 가장 돈이 많이 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가요계라 한 적이 있다(음반 산업이 붕괴해버린 요즘은 아닐 수도 있지만).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보다 많은 별이 운집해있는 가요계의 정상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청춘들의 드라마가 바로 <오버 더 레인보우>이다.


 모처럼 감각적이고 빠른 진짜 청춘 드라마가 나온 것 같다. 사실 내용은 간단하다. 가난한 고등학생 권혁주(지현우 분)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새끼건달로 일한다. 정식 조폭 데뷔를 앞두고 있는 어느 날, 뉴질랜드에서 스타의 꿈을 좇아 한국으로 온 정희수(김옥빈 분)와 만나게 되고 열정이 넘치는 그녀에게 반해 춤을 배우게 된다. 방황을 정리한 혁주는 희수와 사귀면서 백댄서(라고 쓰면 웬지 혼날 것 같다)로 일한다. 

 한편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렉스(환희 분)는 우연히 희수를 보게 되고 반하게 된다. 자신의 뮤직비디오에 희수를 출현시키는 렉스. 처음에는 그렇고 그런 무뇌아 가수인줄만 알았던 렉스가 나름 생각도 깊고, 아픔도 있다는 사실을 안 희수는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주인공 4인방 중 마지막 인물인 렉스의 열혈 팬, 마상미(서지혜 분)는 공교롭게도 렉스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대신, 비루한 현실도 탈출하고 렉스와 더 가까워질 겸 그가 소속되어 있는 연예기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간다.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기지만 군더더기 없고 속도감 있는 진행과 댄싱 장면이 보여주는 박진감(혁주가 소속되어 있는 댄싱 팀의 단장 팝핀현준의 춤은 정말 최고!)과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전개에 깊이 몰입하며 보게 된다. 각본을 쓴 홍진아, 홍자람 일명 홍자매는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며, 뻔한 상황에서 한두번의 비틀기를 주어 뒷이야기를 짐작할 수 없게끔 만드는 실력도 제법이다. 솔직히 대한민국의 시청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초등학교 때부터 일주일에 십여 편의 드라마를 보며 단련된 사람들이다. 이제는 1회만 딱 보면, 이게 어떻게 되는 이야기며 어떻게 끝나고 누가 누구랑 되겠구나, 각이 딱 나온다. 그런데 <오버 더 레인보우>는 그게 안 된다. 벌써 7회까지 방영됐지만 여전히 이야기 전개는 안개 속이며, 애청자들의 관심 1호인 커플들이 어떻게 맺어질 것인가도 불투명하다.

 상미-혁주 / 렉스-희수 조합 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와도 아무 문제가 없다. 어떤 쌍이 맺어질지 초미의 관심사이다. 개인적으로는 혁주-희수 / 상미-렉스의 조합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어떻게 끝맺음 될지는 작가만 아는 것이기에...딱히 드라마에 악역도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젊은 영혼들의 분투기이기 때문이다. 철지난 선악의 이분법이나, 고루한 교훈 타령, 천박하고 말초적인 재미에 머무르는 그런 드라마가 아니다. 질주하는 청춘의 거친 숨결을 제대로 잡아낸 진짜 ’청춘 드라마’이다.



 

타이틀 롤을 맡은 지현우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기럭지가 넘 크고, 춤을 많이 춰본 적이 없는지 별로 태가 안 난다. 이 역할을 비가 맡았으면 어땠을까. 아마 대박이 터졌을 것이다. 비가 보여주는 반항적인 눈빛이나, 섹시함, 카리스마 등을 열심히 흉내내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아직 연기가 많이 서툴어 보인다(서지혜와 키스 신이 있어서 쓴 소리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진짜다). 다만 느낌 만은 제대로 살리고 있어, 시청하는데 불편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렉스 역의 환희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캐스팅인데 처음에는 생각 외로 잘 어울렸다. 아마 아이돌 가수 역할이라 실제 아이돌 가수 출신인 환희가 소화하기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평소 하던 대로 건방 좀 떨어주면 되지 않았을까(환희 팬들, 농담입니다 ^^)? 춤도 되고, 노래도 되기에 렉스 역에 크게 어색함은 없다만, 만들어진 아이돌용 기획 가수로서의 한계와 아픔을 드러내는 복잡한 연기를 요구받고 있는 중후반부에 와서는 확실히 내공이 딸리고 있다. 신인 배우라고 생각하고 아량 있게 넘어가 주자.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초반부의 몰입감은 꽤 좋아 요즘 환희가 나오면 무심코 ’렉스 나왔다’고 해 버린다.

 

    

 

 희수 역의 김옥빈이다. 얘가 일단 얼굴 부속물(눈, 코, 입)이 다 커서 시원시원하다. 현재로서는 이 드라마가 낳은 최고의 스타가 될 확률이 높다. 초반부 희수가 보여준 발랄함과 생기는 누구도 쉽사리 흉내 낼 수 없는 생짜 젊음의 그것이었다. 춤 연습도 많이 한 듯 댄스 장면마다 근사했다. 착하고 소탈하지만 성공과 꿈을 위해 결과적으로 혁주를 배신한 가장 변화무쌍한 캐릭터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전형적인 배신녀, 악녀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감정 이입을 불러 일으키는 성공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솔직히 내가 작가라도 이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에 가장 공을 많이 들이겠다. 공들인 역할을 잘 소화해내고 있는 김옥빈에게 더 정도 많이 갈테고...작품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로 앞으로도 중심에 서서 드라마를 이끌 것이다.

 



 마상미 역에 미모가 특출난 서지혜이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열혈 팬이라 공정한 평가가 힘들다. 20대 초반의 배우군에서 가장 빼어난 연기자 중 하나임을 입증한 노국공주 역처럼 다면적인 캐릭터는 아니고, 전형적인 열혈 청춘 역이다. 캔디 형이라고나 할까.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고 밟혀도 꿈틀대는 뭐 그런 캐릭터. 역시 생기발랄하고, 귀엽다. 다만 출연 시간이 너무 짧다. 처음 2회까지는 나오지도 않았다. 이 드라마가 주연 4인방에 골고루 시선을 나누어주는 스타일이라 그러는 줄 알았는데, 진행될수록 계속 겉도는 느낌이다. 작가 홍자매가 희수-렉스-혁주의 삼각 관계에 더 큰 비중을 실었기 때문이다. 히로인인 서지혜가 밀렸다,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인데 워낙 희수의 매력이 특출나(시청자 입장에서나, 쓰는 작가 입장에서나) 배역 운이 없다고 한탄할 수밖에...

 



 그래도 김밥 장면은 정말 좋았다. 늘 자신을 갈구는 혁주에게 왜 자신은 꿈을 꿀 수 없나며 눈물 짓는 장면이었는데 보면서 같이 눈물 흘리고 말았다. 하기야 나는 자동인형, 이미 지혜가 울면 나도 울고, 지혜가 웃으면 따라 웃는 상황까지 되어 버렸으니...

 



 한 가지 재미있었던 장면, 교통사고 보상 대신 프라이드 기획 연습생에 받아 달라는 마상미를 두고 사장과 부장의 대화. "얼굴은 수준 이하고, 춤은 일반인보다 못하다..." 춤이야 그렇다 치고, 이 얼굴이 수준 이하란 말이냐!

 

이상으로 대강의 소개를 마칠까 한다. 적당히 달콤하며, 때로는 쓰기도, 가끔은 눈물도 비치는 괜찮은 드라마이다. 아직도 9회나 방송분이 더 남았으니 지금부터 시작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작품성에 비해 7%초반이라는 시청률은 너무 가혹하다. <신돈>때부터 계속 시청률 실패라 우리 지혜 많이 의기소침해 할까봐 걱정된다. 절대로 유치하거나, 뻔한 드라마가 아니다. 기성 세대가 원하는 청춘 상이 아닌 진짜 살아 숨쉬는 청춘남녀가 등장해 약동하는 청춘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멋진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너무도 귀여운 서지혜 양의 사진 두 장을 보너스로 감상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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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8-17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지혜에 대한 평가가 심하게 좋은데요? ㅎㅎ
지현우는 원래 록밴드(더 넛츠라는 밴드) 출신이라 춤이 약한 게 이해가 가고...
홍자매는 드라마 '반올림' 각본을 쓰면서도 많이 알려졌죠. 잘 쓰더라고요.
제가 이 드라마를 자주 보는 건 아닌데, 제다이님 글 보고 관심이 생겼습니다.
한 번 봐야지 -ㅅ-;

jedai2000 2006-08-1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홀홀...요즘 청률이(시청률)도 잘 안 나오는데 저라도 응원해줘야죠. 지금껏 살면서 수많은 여자 배우들의 명멸을 지켜보았지만 서지혜 만큼 어여쁜 처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단 하나 소박한 꿈이 있다면 한 번 사귀어 보고 싶다는 것...-_-;;

<오버 더 레인보우> 많이 사랑해주세요. ^^
 
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분들이 기대해 마지 않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 마침내 출간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 몹시 기다렸었죠. 주말을 맞아 피서로 바다를 다녀왔는데, 집에 와보니 딱 도착되어 있더군요. 책을 잡는 손이 덜덜덜. 그 정도로 기다렸던 작품이었어요. 몇년 전부터 꽤 많은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와서인지 특별히 이렇게까지 애타게 보고 싶었던 작품은 없었는데 말이죠. 역시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단순히 팬으로써가 아니라 사랑하고 있는가 봅니다. ^^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또 최후에 밝혀지는 사건의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하게 쓸 수도 없겠군요.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가 주인공입니다. 적수를 찾을 수 없는 수학의 달인인 그지만 순수 학문인 수학만으로는 생계가 곤란해 고등학교 수학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실용적이거나 돈이 되지 않는 연구로 밥먹고 살기는 힘든가 봅니다. 아무튼 이시가미는 옆집에 중학생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 평범한 중년 여성(하지만 이시가미의 눈에는 세상 누구보다 예뻐보이는), 야스코에게 반해 그녀가 일하고 있는 도시락 가게를 매일 찾아가 도시락을 삽니다. 물론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워 날씨 얘기나 한 마디 삐죽 하고 돌아오기 일쑤지만요.

 

그런데 야스코에게는 한 가지 말 못할 고민이 있었으니...폭력적인 난봉꾼, 전남편의 존재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를 피하기 위해 숨어숨어 도시락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전남편이 언제까지나 야스코의 존재를 모른다면 내용이 진전되지 않겠죠. 언제나 그렇듯이 전남편은 야스코를 찾아내고, 미스터리 소설에서 가장 명을 재촉하는 방법 제1위에 올라있는 짓을 합니다. 바로 야스코에게 돈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린 겁니다! 견디다 못한 야스코와 딸 미사토는 전남편을 살해하고 망연자실. 이때 구원처럼 초인종이 울리고 이시가미가 등장합니다. 옆방에서 모든 소리를 들었다며...이젠 내가 지켜주겠다고 합니다. 수학의 천재답게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려 하는 이시가미. 

 

한편 이 사건을 수사하는 구사나기 형사에게는 묘한 조력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유가와 조교수로 물리학의 천재입니다. 알고보니 이시가미와 유가와는 같은 대학 동기로, 학창시절부터 호적수였답니다. 두 천재의 지략 공방전이 마치 체스를 두듯 짜릿하게 펼쳐집니다. 알고보니 유가와 조교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두 작품 <탐정 갈릴레오>와 <예지몽>에서 이미 등장한 적이 있었다는군요. 본격추리용 탐정 캐릭터로 간간히 쓰인답니다.

 

전체 400쪽 분량의 작품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이시가미가 최초로 술수를 부리는 장면을 50쪽 안에 묘사합니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는 군더더기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날렵하죠. 그는 세부묘사에 지나치게 공을 들여 읽는 이를 피곤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예컨대 그 방에 들어갔더니, 왼쪽에 스토브가 있고, 오른쪽에는 책장이 있는데 책장 안에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꽂혀 있고, 방 정중앙에는 장식장이 있는데, 장식장 위에 인도 코끼리 상아로 만든 담뱃대가 있었다는 식의 묘사는 절대 쓰지 않습니다. 아니, 그 사람 눈은 무슨 카메라라도 달렸답니까. 한 번 보고 그걸 다 파악하게. (이 방면의 최고는 역시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겠죠. 작가 페터 회의 배의 세부 구조 묘사는 정말이지...페터 회는 반은 작가이고 반은 사이코.) 히가시노 게이고는 사건을 이끌어가는 데 불필요한 정보는 일절 제공하지 않는 경제적인 작가랍니다. 

 

또한 그는 지엽적인 부분을 열심히 묘사해 독자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편법 따위는 절대 쓰지 않습니다. 제목만 봐도 알죠. <용의자 X의 헌신>입니다. 용의자 X란 이시가미. 결국 범인도 다 밝히고, 왜 범인이 그렇게 열심히 공작을 펴는가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시가미가 사랑 때문에 헌신하는 이야기라는 거죠. 이렇게 제목으로 스포일러 깔고도 재미난 작품을 쓰는 히가시노 게이고에게는 정말 두손 두발 다 들었어요.

 

역시 작품 말미에 밝혀지는 이시가미의 천재적인 트릭에 무게중심이 실려있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낚시 바늘을 파이프에 세 번 감아, 빙빙 돌려 철사줄로 매듭을 짓는 식의 화려하지만 말도 안 되는 트릭은 절대 아닙니다. 경제적인 작가 답게 트릭도 경제적입니다. 멋들어지지는 않지만 읽고 나면 납득이 가면서,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트릭이죠. 솔직히 너무 기대를 하고 봐서인지 그 트릭에 완전 넉아웃되지는 못했습니다. 생각보다 좀 약하군,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 찬찬히 곱씹어볼수록 절묘함을 느끼게 됩니다. 현실적이고 말이 되는, 그러면서 의표를 찌르는 트릭 하나를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기인 애절한 마무리는 <백야행>이나 <비밀>에 비해 약간 떨어집니다. 눈물이 많은 편인 제 눈에 약간의 물기도 비치지 않았네요. 다만 짝사랑 1급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는 저와 이시가미의 처지가 오버랩되면서 많이 안타까웠죠. 왜 헌신하는 사랑은 보답을 받지 못할까요...

 

대중문학계 최고 권위의 나오키 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등의 작년 일본추리문학상을 거의 모두 휩쓴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제 기준으로는 위에 언급한 <백야행>이나 <비밀>의 약간 아래에 있는 작품으로 판단됩니다만 결코 부족한 작품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본격 추리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유독 한국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품은 재미있는데 트릭이 약하다거나 추리적 재미가 떨어지지 않나 하는 평가절하를 받고 있었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에 등장하는 군더더기 없는 트릭을 보면 그 오해는 상당부분 풀릴 것입니다.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 표 본격추리를 더 기대하게 되겠죠. 히가시노 게이고는 몇몇 신본격 작가들과는 달리 문장력이 되면서, 트릭도 되는 만능 작가니까요.

 

 

 

p.s/ 개인적으로 직업이 직업인지라 웬만하면 이런 말 잘 안하는데 오타가 상상을 초월하게 많더군요. 아무리 출간 예정일이 급박하게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라면 문제가 심각하죠. 냉정하게 말해 리콜 감이었습니다. 무게 있는 좋은 작품을 내더라도 책 상태가 이 정도면 좋은 작품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먹는 꼴이 됩니다. '현대문학' 출판사에서는 당장 체크해서 다음 쇄부터는 제대로 된 책이 독자들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게끔 조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19禁 p.s2/ 위에 언급한 오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24쪽입니다.

"구사나기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등을 고추 세웠다."

도대체 구사나기는 뭘 세운 겁니까? 등입니까, 고추입니까?

(넘 야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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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15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타 때문에 별표 다섯개에서 네개로 그만..;;;

jedai2000 2006-08-15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심했죠. 무성의해 보일 정도입니다. 좋은 작품 내놓고도 욕 먹을 짓을 하다니 안타까워요.

페일레스 2006-08-15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작품인데 그놈의 오타가... 리뷰도 써야지 -_-

jedai2000 2006-08-16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재미있게 보셨죠? 만능 엔터테이너 히가시노 게이고의 진가를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오타는 곧 수정이 될 것 같네요. 미리미리 신경 좀 써 주시지...안타깝네요/

페일레스 2006-08-1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 제다이님 네이버 블로그도 잘 봤어요!
한 번에 두 군데를 꾸리기가 쉽지 않으실텐데... -_-)b
특히 [노국지혜]라는 폴더가 눈에 띄더군요 ㅋㅋ
저는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제다이님은 영문과!! 출신이시니까 제다이님께 영어교습을 받는 건 어떨까요 -ㅅ-;;
(참, 알고 보니 제다이님께서 다섯 살! 위시더군요. 형님! -_-;)

jedai2000 2006-08-19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거길 다녀오셨군요. 별로 볼 것도 없었을텐데 부끄럽네요. ^^
그런데 사실 알라딘 서재에 따로 쓰는 건 없고, 그냥 퍼오는 거예요. 블로그가 메인이라고나 할까요. ^^ <노국지혜>는 처음에는 없었는데, 그녀에 대한 흠모의 감정이 쌓이자 나중에 추가한 거구요. 서지혜에 대한 용의자 제다이의 헌신이라고나 할까요...ㅋㅋ

영문과지만 영어는 거의 못하구요. ^^ 저보다 무려 다섯 살이나 적으신데 일어를 그렇게 잘하신다니 부럽네요. 저는 뭘 했을까요. 확실히 떡국 몇 그릇 더 먹어봐야 형님 대접을 받는 건 아닌가봐요. 나이에 맞는 뭔가가 있어야죠. T.T 아무튼 고맙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가 뵙겠습니다. ^^

bongbong 2007-04-15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속에 담긴 슬픔이 아직도 떠나질 않아요

jedai2000 2007-04-15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당히 감명깊게 보셨나 봅니다. 저도 그랬어요. 이렇게 슬픈 추리소설이 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