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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묘촌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팔묘촌이란 이름 그대로 여덟 개의 무덤이 있는 마을입니다. 이 기묘한 마을 이름의 유래는 일본의 전국시대 패주한 8명의 무사들이 주군의 황금을 가지고 마을로 들어와 권토중래를 노리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견물생심이라 했던가요. 마을 사람들은 8명의 무사들을 전부 몰살시키고, 황금을 찾지만 무사들은 이미 황금을 꽁꽁 숨겨둔 뒤였죠. 기대했던 황금은 허탕치고, 오히려 죽어가던 무사 대장의 저주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마을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무사들을 달래기 위해 8개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해서 마을 이름이 ‘팔묘촌’이 된 거랍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무사들의 저주 때문일까요. 전쟁 전 팔묘촌의 최고 갑부인 다지미 가의 당주 요조가 광기를 일으켜 총과 칼로 32명의 마을 사람들을 살해하고 사라집니다. 무심한 세월은 흐르고 흘러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 요조의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나, 타츠야는 다지미 가를 상속받기 위해 팔묘촌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저주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타츠야가 돌아오자마자 마을에서는 연쇄독살 사건이 벌어집니다. 마침 마을에 머물고 있었던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사건에 참여하지만 진상은 오리무중이고, 타츠야는 계속되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는 내용입니다.
마치 옛날 할머니가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 나는 책입니다. 일본 추리소설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요코미조 세이시가 1947년 발표한 이 작품은 약간은 고색창연하고 빛바랜 느낌이라 마치 셜록 홈스나 애거서 크리스티,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를 보는 듯한 고풍스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그 좋아하던 밥도 마다하고,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보게 만들던 책이 주는 즐거움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팔묘촌>에는 보물과 보물지도, 비밀통로, 동굴탐험, 연쇄살인, 오싹한 공포 등 고전 모험소설, 추리소설, 공포소설의 요소가 모두 들어가 있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종래의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와는 달리 1인칭으로 집필되어 독자들의 몰입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더구나 주인공 타츠야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 어디 하나 특출난 구석이 없어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과거도 모르는 인물이라 이 끔찍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당황하기만 하죠. 이것은 우리 독자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주인공과 역시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독자와의 심정적 동화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이 작품에 깊이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보물지도를 가지고 종유동굴을 탐험하는 모험소설로도 그지없이 재미있지만, 오싹한 공포감도 제법입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특기인 봉건적 인습이 주는 공포감이 그것이죠. 패전 이후 경제적 악화에도 불구하고 점차 시민들의 인식이 깨어나고 개화되는 대명천지에, 전국시대부터 내려온 저주에 매몰된 사람들이라니요. 패쇄된 공간에 사는 시골 사람 특유의 무지와 편협함, 전해 내려오는 저주에 대한 맹신, 사리를 분별하지 않는 가공할 행동력으로 팔묘촌 사람들은 폭도로 변해 저주의 현신이라 생각하는 타츠야를 공격하게 됩니다. 왜 사리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앞뒤가리지 않는 공격성을 보면서 우리는 무서워하잖아요. 팔묘촌의 마을 사람들이 꼭 그렇거든요. 이 분위기를 잘 살려낸 건 요코미조 세이시의 탁월함이라 하겠습니다.
더구나 추리소설로도 꽤 뛰어납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비록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나타나 사건을 수사합니다. 마침내 그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밝혀진 연쇄독살사건의 비밀을 풀어냅니다. 최종장에서 모든 용의자들을 한자리에 몰아놓고 진범을 폭로하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모습은 뛰어난 고전 추리소설의 절정에서 느낄 수 있었던 짜릿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잘 안배된 단서들을 가지고 직접 추리할 수 있는 재미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팔묘촌>은 일본 추리소설 사상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 중 한 편답게 재미와 스릴, 흥분과 몰입으로 가득찬 굉장히 뛰어난 작품입니다.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는 총 77편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남겼고, 현재는 후배 만화가들이 코스케의 손자, 긴다이치 하지메(김전일) 시리즈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의 국민 추리소설가와 국민 탐정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팔묘촌>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아주 행복한 일입니다. 충분히 즐길 만하고 만족스러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눈뜨고 놓치는 사람이 있다면...흠흠...바보라고 불러주겠습니다.
p.s/ 긴다이치 코스케는 명탐정답게 머리 회전이 비상하지만 유독 희생자의 인권(?)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8명이 죽은 후 사건의 비밀을 풀어낸 긴다이치는 말합니다.
“나는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어요...다만 증거가 없었을 뿐이지.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범인을 알면 증거가 없어도 함정 수사를 하거나, 몰래 숨어 사건 현장을 덮친다거나 하는 행동은 왜 못 하나요? T.T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었을까요. 정말 무서운! 탐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