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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분들이 기대해 마지 않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 마침내 출간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 몹시 기다렸었죠. 주말을 맞아 피서로 바다를 다녀왔는데, 집에 와보니 딱 도착되어 있더군요. 책을 잡는 손이 덜덜덜. 그 정도로 기다렸던 작품이었어요. 몇년 전부터 꽤 많은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와서인지 특별히 이렇게까지 애타게 보고 싶었던 작품은 없었는데 말이죠. 역시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단순히 팬으로써가 아니라 사랑하고 있는가 봅니다. ^^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또 최후에 밝혀지는 사건의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하게 쓸 수도 없겠군요.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가 주인공입니다. 적수를 찾을 수 없는 수학의 달인인 그지만 순수 학문인 수학만으로는 생계가 곤란해 고등학교 수학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실용적이거나 돈이 되지 않는 연구로 밥먹고 살기는 힘든가 봅니다. 아무튼 이시가미는 옆집에 중학생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 평범한 중년 여성(하지만 이시가미의 눈에는 세상 누구보다 예뻐보이는), 야스코에게 반해 그녀가 일하고 있는 도시락 가게를 매일 찾아가 도시락을 삽니다. 물론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워 날씨 얘기나 한 마디 삐죽 하고 돌아오기 일쑤지만요.
그런데 야스코에게는 한 가지 말 못할 고민이 있었으니...폭력적인 난봉꾼, 전남편의 존재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를 피하기 위해 숨어숨어 도시락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전남편이 언제까지나 야스코의 존재를 모른다면 내용이 진전되지 않겠죠. 언제나 그렇듯이 전남편은 야스코를 찾아내고, 미스터리 소설에서 가장 명을 재촉하는 방법 제1위에 올라있는 짓을 합니다. 바로 야스코에게 돈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린 겁니다! 견디다 못한 야스코와 딸 미사토는 전남편을 살해하고 망연자실. 이때 구원처럼 초인종이 울리고 이시가미가 등장합니다. 옆방에서 모든 소리를 들었다며...이젠 내가 지켜주겠다고 합니다. 수학의 천재답게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려 하는 이시가미.
한편 이 사건을 수사하는 구사나기 형사에게는 묘한 조력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유가와 조교수로 물리학의 천재입니다. 알고보니 이시가미와 유가와는 같은 대학 동기로, 학창시절부터 호적수였답니다. 두 천재의 지략 공방전이 마치 체스를 두듯 짜릿하게 펼쳐집니다. 알고보니 유가와 조교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두 작품 <탐정 갈릴레오>와 <예지몽>에서 이미 등장한 적이 있었다는군요. 본격추리용 탐정 캐릭터로 간간히 쓰인답니다.
전체 400쪽 분량의 작품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이시가미가 최초로 술수를 부리는 장면을 50쪽 안에 묘사합니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는 군더더기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날렵하죠. 그는 세부묘사에 지나치게 공을 들여 읽는 이를 피곤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예컨대 그 방에 들어갔더니, 왼쪽에 스토브가 있고, 오른쪽에는 책장이 있는데 책장 안에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꽂혀 있고, 방 정중앙에는 장식장이 있는데, 장식장 위에 인도 코끼리 상아로 만든 담뱃대가 있었다는 식의 묘사는 절대 쓰지 않습니다. 아니, 그 사람 눈은 무슨 카메라라도 달렸답니까. 한 번 보고 그걸 다 파악하게. (이 방면의 최고는 역시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겠죠. 작가 페터 회의 배의 세부 구조 묘사는 정말이지...페터 회는 반은 작가이고 반은 사이코.) 히가시노 게이고는 사건을 이끌어가는 데 불필요한 정보는 일절 제공하지 않는 경제적인 작가랍니다.
또한 그는 지엽적인 부분을 열심히 묘사해 독자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편법 따위는 절대 쓰지 않습니다. 제목만 봐도 알죠. <용의자 X의 헌신>입니다. 용의자 X란 이시가미. 결국 범인도 다 밝히고, 왜 범인이 그렇게 열심히 공작을 펴는가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시가미가 사랑 때문에 헌신하는 이야기라는 거죠. 이렇게 제목으로 스포일러 깔고도 재미난 작품을 쓰는 히가시노 게이고에게는 정말 두손 두발 다 들었어요.
역시 작품 말미에 밝혀지는 이시가미의 천재적인 트릭에 무게중심이 실려있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낚시 바늘을 파이프에 세 번 감아, 빙빙 돌려 철사줄로 매듭을 짓는 식의 화려하지만 말도 안 되는 트릭은 절대 아닙니다. 경제적인 작가 답게 트릭도 경제적입니다. 멋들어지지는 않지만 읽고 나면 납득이 가면서,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트릭이죠. 솔직히 너무 기대를 하고 봐서인지 그 트릭에 완전 넉아웃되지는 못했습니다. 생각보다 좀 약하군,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 찬찬히 곱씹어볼수록 절묘함을 느끼게 됩니다. 현실적이고 말이 되는, 그러면서 의표를 찌르는 트릭 하나를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기인 애절한 마무리는 <백야행>이나 <비밀>에 비해 약간 떨어집니다. 눈물이 많은 편인 제 눈에 약간의 물기도 비치지 않았네요. 다만 짝사랑 1급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는 저와 이시가미의 처지가 오버랩되면서 많이 안타까웠죠. 왜 헌신하는 사랑은 보답을 받지 못할까요...
대중문학계 최고 권위의 나오키 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등의 작년 일본추리문학상을 거의 모두 휩쓴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제 기준으로는 위에 언급한 <백야행>이나 <비밀>의 약간 아래에 있는 작품으로 판단됩니다만 결코 부족한 작품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본격 추리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유독 한국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품은 재미있는데 트릭이 약하다거나 추리적 재미가 떨어지지 않나 하는 평가절하를 받고 있었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에 등장하는 군더더기 없는 트릭을 보면 그 오해는 상당부분 풀릴 것입니다.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 표 본격추리를 더 기대하게 되겠죠. 히가시노 게이고는 몇몇 신본격 작가들과는 달리 문장력이 되면서, 트릭도 되는 만능 작가니까요.
p.s/ 개인적으로 직업이 직업인지라 웬만하면 이런 말 잘 안하는데 오타가 상상을 초월하게 많더군요. 아무리 출간 예정일이 급박하게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라면 문제가 심각하죠. 냉정하게 말해 리콜 감이었습니다. 무게 있는 좋은 작품을 내더라도 책 상태가 이 정도면 좋은 작품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먹는 꼴이 됩니다. '현대문학' 출판사에서는 당장 체크해서 다음 쇄부터는 제대로 된 책이 독자들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게끔 조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19禁 p.s2/ 위에 언급한 오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24쪽입니다.
"구사나기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등을 고추 세웠다."
도대체 구사나기는 뭘 세운 겁니까? 등입니까, 고추입니까?
(넘 야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