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는 강가에서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가 여성 작가인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만약 그가 남자였다면, 필시 교복 패티시즘이나 미소녀 마니아, 변태 작가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물론 국내에 소개된 그녀의 작품 세 개만을 보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국내 출간작들에서는 미소녀들이 대거 등장해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굽이치는 강가에서>는 아예 미소녀 군단이 출현한다. 요염하지만 기품 있는 가스미, 차분하고 온화한 요시노, 아직 소녀의 상큼함을 간직한 마리코, 어른스럽고 시원시원한 마오코 등이 영광의 얼굴들이다. 도대체 어느 동네인지 알고 싶다. 이사 가게...한 동네에서 그토록 많은 미소녀가 출몰한다니 남자라면 누구나 살고 싶은 동네가 아닐까. 이런 미소녀들이 한 좁은 마을에 군웅할거한다니 말도 안 되는 설정이다. 하지만 뭐 좋다. 세상에 많아서 좋을 것이라고는 술과 미소녀 밖에 없으니까.

 

굽이치는 강가에 자그만 마을이 있다. 오래 전부터 그 강가에 자리 잡고 있었던 집에는 개망초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작은 선착장이 있으며 그네가 매어진 나무가 있다. 거기서 모든 일이 벌어졌다. 때로는 무시무시하고, 때로는 아름다워 한숨이 비어져 나오는 모든 일들이...생기가 피어나는 여름방학의 첫날, 그림을 잘 그리는 마리코는 평소 동경하던 두 선배, 가스미와 요시노 콤비로부터 연극제에 쓰일 배경 그림을 같이 그리자는 합숙 제의를 받는다. 마리코는 당연히 승낙하지만, 절친한 친구 마오코는 웬지 마음이 무겁다. 둘 이외에는 세상의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듯 보이는 선배들의 세계로 마리코가 끌려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니들과의 시간이 몹시 기다려지는 마리코는 뜻밖의 방문을 받는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눈을 가진 소년, 쓰키히코다. 그는 말한다. "너는 가스미를 감당할 수 없어.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말 거야." 불안함과 설레임이 교차되는 가운데 마리코는 같이 합숙할 가스미의 집, 선착장이 있는 그 집에 도착하고, 가스미의 사촌으로 밝혀진 쓰키히코와 그의 친구 아키오미도 도착해 다섯 소년소녀의 9일간의 기묘한 동거가 벌어진다. 합숙에서 빠질 수 없는 무서운 이야기는 그날 밤에...10년 전 그 집에선 가스미의 엄마가 목에 졸린 시체로 선착장에 묶여 있던 배 안에서 발견되었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한 어린 소녀가 죽었던 것이다. 봉인된 기억을 끄르는 다섯 소년소녀. 알고보니 그들 모두가 각각 그날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날 있었던 사건의 비밀스런 관계자들이 모두 모인 셈이다. 그날의 진실이란 무엇이었을까...

 

전체 4장으로 되어 있으며 매 장마다 화자가 바뀐다. 1장은 마리코, 2장은 요시노, 3장은 마오코, 4장은 에필로그 격으로 가스미다. 다소 심심하게 진행되던 이야기는 1장 결말에서 마리코가 잊고 있던 기억을 아키오미가 끄집어내면서 타오른다. 그 다음부터는 회상 속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아, 현재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좇아 정신없이 읽어내려갔다.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으로 작가 온다 리쿠의 장점을 모두 간직한 수작이다.

 

 온다 리쿠의 장기인 이미지의 능수능한 활용이 그 첫째다. 물론 모두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듯한 이미지들이다. 강물이 느리게 휘돌아가는 좁은 강 위에 작은 나무배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강가에는 꽃이 피어 있고, 눈이 시리도록 파아란 풀이 무성하다. 버드나무에 매인 그네를 타는 어린 소녀, 3층 다락방에 나란히 누워 창밖을 바라보는 소녀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웬지 기억에 선연한 아름다운 풍경들이다. 일종의 데자뷔라고 할 수 있는 원형적인 이미지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영상을 불러내는 것은 온다 리쿠만의 장기이다. 이런 시각적인 풍성함 외에도 그녀만의 섬세한 심리 묘사도 돋보인다. 소녀에서 여자로 넘어가는 짧고 찬란한 한 때의 순간을 온다 리쿠보다 잘 그리는 작가도 없을 것이다. 소녀가 소녀에게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감정들, 동경, 질투, 헌신, 시기, 매혹 등을 참으로 세심하게 그려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무엇보다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은 이 작품이 아주 우수한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데 있었다. 미스터리 소설가라는 온다 리쿠의 레테르 면에서 전작들이 실망스러웠던 것에 비해 <굽이치는 강가에서>는 정통 미스터리에서 볼 수 있는 정통 트릭을 구사하고 있다. 단서가 독자에게 모두 주어진 공정하고 기발한 트릭. 나는 이 작품에 사용된 알리바이 트릭이 왜 미스터리 애호가들에게 회자되지 않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근래 본 가장 재미있었던 트릭으로 애호가라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밤의 피크닉>은 밤새도록 걷는다는 플롯에서 별다른 재미를 찾을 수 없었고, 심리 묘사는 한 마디로 잔망스러웠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이야기를 너무 벌려 모호하고, 장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굽이치는 강가에서>는 과거와 현재에 공통된 한 가지 사건을 맞아 몇 명의 등장인물들이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진실을 찾고 비밀을 벗겨낸다는 압축적이면서 효과적인 이야기 구조를 보인다. 긴장감은 한층 강화되고, 몰입감은 더욱 커진다. 사견이지만 현재 국내에 나와 있는 그녀의 작품 중에서는 이 작품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섬세하면서 재미있는 소설이다. 

 

삼세번이라고 그녀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이처럼 좋은 작품을 발견하게 되서 반갑다. 온다 리쿠는 전술한 대로 여러 장점도 있지만 비현실적인 설정이나 웬지 비주얼노벨 게임, 미소녀 시뮬레이션 게임, 라이트노벨을 보는 듯한 가벼움도 지적된다. 그 점에서 취향에 맞는 않는 독자도 제법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온다 리쿠가 그려내는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라면 그까짓 현실성쯤은 초월해지고 싶은 기분도 든다. 왜 좋은 영화나 소설을 보면 밤새도록 그 감흥을 이야기하고 싶고, 괜히 그 기분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가. 나는 이 책을 덮고 나서 밤새도록 등장인물과 이야기에 관해 떠들고 싶었고, 몹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이 기분은 하루가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솔로 2006-09-13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해봐도 읽고 '아, 좋다, 정말 좋다!'라고 느낀 소설이었어요.

물만두 2006-09-1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교복 패티시즘이라니요 ㅜ.ㅜ 정말 좋죠^^

jedai2000 2006-09-13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솔로님...동감입니다. 책장을 덮기 아까울 정도였어요. 아, 좋다~ 정말 좋다~ ^^

물만두님...그런 혐의도 있지 않을까요. ^^ 미스터리적인 재미도 특출난 우수한 작품이었어요. ^^

거친아이 2006-09-14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의 피크닉만 읽어봤는데,,제다이님 리뷰를 보니 읽고 싶은 욕구가 팍팍 생기네요^^

jedai2000 2006-09-15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친아이님...읽어보세요.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드려요. ^^ <밤의 피크닉>에서 본 온다 리쿠의 이미지 메이킹과 심리 묘사 뿐 아니라 정교한 추리소설적 재미까지 같이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

펭귄 2006-12-1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전혀... 나름 미스터리소설을 좋아하지만, 오히려 <밤의 피크닉>은 굉장히 재밌게 봤는데요. 이책에서는 제일 실망스러웠던 부분이 알리바이 트릭 부분이었습니다.

jedai2000 2006-12-1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러셨군요. 보는 느낌은 다 다른 거니까요. ^^ 저는 이 책이 굉장히 환상적인 분위기라 그런 분위기 위주로 나가다가 끝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트릭이 있는 본격 추리소설 스타일로 매조지하는 게 굉장히 느낌이 좋았거든요. 비현실적이지만 그런대로 깔끔하지 않았나요? ^^
 
바벨의 개
캐롤린 파크허스트 지음, 공경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며칠 전 너무도 사랑했던 아내를 떠나보낸. 아내는 아찔하게 높은 사과나무 위에서 떨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모두들 아내가 자살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남자는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데...아내가 떠난 순간을 지켜본 건 부부가 기르던 ‘로렐라이’라는 개가 유일했습니다. 언어학자인 남자는 진실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로렐라이에게 인간의 말을 가르치려 합니다. 개가 말을 해준다면 모든 걸 들을 수 있을테니까요.


아내의 죽음이라는 큰 얼개를 개에게 말을 가르치려는 남자의 노력과 설레는 첫 데이트부터 행복한 결혼생활, 부부관계의 양념과도 같은 부부싸움까지 지난 일을 회상하는 장면들을 번갈아가며 소묘하듯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던 가슴아픈 순간은 다행히 한 번도 없었지만 오죽하면 개에게 말을 가르치려고까지 할까, 하는 마음에 깊이 공감하며 책장을 넘겼답니다. 바람이 찬 이 가을,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에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미스터리적인 소재를 사용했지만 사실 추리소설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난 날의 회상을 통해 아내의 성격과 아픔을 드러내며, 아내가 죽기 전에 남겨둔 퍼즐을 통해 잔재미를 주며, 특히 개에게 말을 시키기 위해 불법적인 구강수술을 단행하는 동물학대 집단을 등장시켜 긴장감을 더하는 등 작가 캐롤린 파크허스트는 자칫 단조롭고 지루해지기 쉬운 신파극에서 이 작품을 좀더 품격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립니다. 데뷔작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힘든 수준이예요.


그렇게 해서 드러난 건 아내의 죽음에 얽힌 기상천외한 비밀, 의외의 반전이 아닙니다. 남자는 둘이 함께 했던 순간들을 반추해보며, 아내를 온전한 모습 그대로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마술과도 같은 사랑에 빠졌으며, 어떻게 그 사랑을 키워나갔는가 하는. 좋은 모습은 좋은 걸로, 나쁜 모습도 좋은 걸로가 아닌 진짜 아내를 가슴 속에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아내는 아름답지만 불안정했고, 상냥했지만 슬픔이 많았습니다. 그녀가 드러냈던 진짜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남자가 깊은 회한에 잠기는 것은 당연할 듯 합니다.

 

<바벨의 개>라는 제목은 성경에서 나온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습니다. 태초에 인간들의 말은 모두 같았는데, 그들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자 하느님이 말을 모두 다르게 바꿔버렸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실 거예요. 그렇게 인간의 말은 나라별로 모두 달라졌지만, 같은 말을 쓰는 한 나라 안에서도 사실 진짜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란 쉽지 않죠. 그러나 남자가 진심을 통해 죽은 아내와 말 못하는 개와 소통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우리 안의 바벨 탑은 언젠가 무너뜨릴 수 있을 듯해요. 진심으로 들려주고 싶고, 진심으로 듣고 싶다면... 

쉿, 귀를 기울여 들어보세요. 잘 들으면 들릴지도 몰라요. 가면 속에 가려져 있던 상대의 진짜 목소리가 말이죠. 그때 그 목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되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로지 그것만 기억하시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6-09-07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귀기울여 볼랍니다.

jedai2000 2006-09-07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놓치지 마세요. ^^
 
토끼와 잠수함 타인의 방 굴뚝과 천장 타인의 얼굴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30
최인호.박범신 외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창작과 비평사에서 '20세기 한국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펴낸 50권 묶음집 중에 제30권이 최인호, 박범신, 한수산 등의 단편집이다. 이 한국소설선은 이광수부터 김연수, 배수아까지 한국소설 100년의 명단편들이 두루 실려 있는 대표적인 단편소설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많은 한국의 문인들의 수작들을 전부 수록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작가 한 사람마다 한두 편씩의 대표 단편 소개에 그치고 있으나 이는 분량상 그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50권 중에 한 권을 골라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누구의 것을 고를까 고민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는 김유정, 이상, 김승옥, 손창섭, 이문열, 황석영 등인데 웬지 이 작가들은 전집으로 깊이 있게 읽고 싶어 넘어가고, 월북작가라 거의 읽어볼 기회가 없었던 이태준의 작품을 고르고 싶었지만 역시 전작을 읽고 싶어 다음으로 기회를 돌렸다. 제30권에 최인호의 이름이 보이길래 몇 년 전 <상도>의 기막힌 재미를 생각하며 그것을 골랐다. 더구나 같이 수록된 작가 중에 박범신, 한수산 등의 이름이 보여 더욱 좋았는데 예전 중고등학교 때 서점을 가면 매대에 꽂혀 있는 대부분의 책이 이 세 사람의 책이었던 까닭이다. 70, 80년대 대표 베스트셀러 작가들이라 할 수 있는데 많이 팔린 만큼의 재미를 보장해줄 것 같아 흥분했었다.

 

최인호의 작품은 <타인의 방>과 <깊고 푸른 밤>이다. <타인의 방>은 70년대 초기 단편으로 출장을 다녀온 남자가 외딴 방에서 홀로 고립되다 마침내 사물화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70년대 초반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인간이 기계화, 사물화되어가는 풍경을 구체적인 물건(이를테면 찾잔, 스푼, 샤워기)을 제시하며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지금이야 사람이 사람 같지 않고, 조립 라인에서 기계처럼 구르고 또 구르는 매일이 일상이 되었다지만 그런 전조를 최초로 발견한 70년대 초의 작가에겐 심상치 않은 일이었으리라. 안성기가 나온 영화로도 유명한 <깊고 푸른 밤>은 대마초로 나락에 빠진 전직가수와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지식인이 한국에서 도피해 LA 여행을 하는 이야기다. 본인 같이 젊은 사람이 당시의 어두운 현실을 어떻게 알겠는가마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절망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깊은 탄식이 배어나오게 된다.

 

유명세는 거의 누리지 못했던 오탁번이라는 작가의 <굴뚝과 천장>은 4.19 혁명 당시의 대조적인 두 대학생을 통해 지식인 사회의 풍경을 그린다. 현실주의자이자 체제에 어느 정도 순응하는 '나'와 끝없이 현실을 개탄하고 바꿔보고 싶어했던 친구의 대조적인 삶의 방식이 잘 표현되고 있다. 마침내 혁명에 성공하지만 더 큰 혼란과 위선으로 혼탁한 세상을 바라보는 친구의 깊은 좌절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한수산의 <타인의 얼굴>은 자전적인 소설로 보여지는데, 학창시절 깊은 깨달음을 주었던 교수가 암에 걸리자 그와의 지난 날을 반추해보는 일종의 회상기라 할 수 있다. 문장이 아주 섬세하고 촘촘한 느낌을 주지만 실상 교수가 어떤 깨달음을 주었는지,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뭘 말하고 싶은건지 모르겠다.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 삶의 비애를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과문해서 그렇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거의 공감할 수 없었던 앙상한 감동의 작품이었다.

 

박범신의 <토끼와 잠수함>은 유신체제 시절의 혹독한 정치 현실을 알레고리 형식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사소한 교통위반으로 잡혀온 일군의 사람들, 도시를 돌며 위반자들을 태워 즉결재판소로 데려가는 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경찰은 아이가 죽어간다는 행상 여인의 눈물도 무시하고, 염천의 더위 아래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창문 좀 열자고 호소하는 소리도 무시한다. 이런 비인간적이고 가혹한 통치는 결국 파국을 맞는다는 메시지를 결말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완벽한 자전소설이다. 실제로 작가는 글쓰기의 한계를 느끼고 절필을 선언했다는데, 문학의 사망선고를 받은 작가가 실제 자신에게도 사망선고를 내리기 위해 죽으러 간다. 눈이 몹시 쌓인 산 중에서 그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만나는데, 남자는 웬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작가의 지난 날의 이야기가 회상의 형식을 빌어 소개되며, 결국 깊은 깨달음을 얻은 작가는 그동안의 자신의 글쓰기가 허식에 다름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이 작품의 마지막은 이렇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자꾸 글을 쓰고 싶으니...눈물겹다."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과 솔직한 내면의 고백, 반성과 회환의 정조까지 모두 인상적인 정말 좋은 단편이다.

 

당대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작품답지 않게 재미보다는 문학성에 기울어졌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을 주로 선정한 듯 하다. 책 뒤에는 평론가의 작품 해설도 실려 있는데, 수록된 작가들이 처음에는 신선했는데 대중소설, 통속소설, 상업소설화 되면서 망가졌다는 느낌의 평을 한다. 역시 평론가란 먹물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인 듯, 그 놈의 대중소설/순문학 구분은 이제 제발 사라져줬으면 한다. 그게 바로 오늘의 한국문학의 초라한 현실을 낳게 만든 주범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존경하는 일본소설가 다카무라 가오루가 이런 말을 했단다. "책은 책이고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순문학이나 통속문학이니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소설을 쓸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인호 작품의 공은 (아마도 평론가들은 공감하지 않겠지만) 70,80년대 그 어두웠던 시절에, 놀것 하나 재미거리 하나 없던 그 시절에, 재미와 감동을 겸비한 소설들로 숱한 대중들에게 불면의 밤을 선물했다는 것이다. 책 읽는 재미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작가라고 불리려면, 자기 이야기만 쏟아내는 것도 좋지만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잘 들어줄까 하는 '포장의 고민'도 해야 한다. 당연한 걸 모르는 기본도 안 된 작가가 요즘 너무 많고, 그래서 한국 문학의 위기가 온 것이다.

 

 

P.S/ 평론가의 해설과 단어풀이까지 수록되어 있어 수험생을 겨냥한 듯 하다. 그러나 단어풀이는 맨 뒤에 실려 읽는 도중 흐름을 깨기 일쑤였다. 계속 앞뒤로 왔다갔다하니 말이다. 게다가 '여우비' '돌개바람' '일갈' 등의 단어들도 뜻풀이를 해준다. 수험생에게 공부를 시키고 싶다면, 이런 단어쯤은 사전 찾아 해결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의 밥떠먹여주기가 한국 수험생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요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에 좋은 저작물을 쓰신 작가분께서 한 턱 내는 자리. 모 국문학 교수님도 같이 갔음.

인사동 이모집에서 갖은 안주와 함께 소주, 맥주...작가분이 중국에서 사온 '주귀'라는 50도 고량주.

2차로 자리를 옮겨 보드카에 자몽 주스를 섞어 마셨다. 한국, 독일, 중국, 러시아의 술을 모두 맛본

희귀한 경험.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택시비 손실 3만원, 오늘 하루종일 뱃 속은 전쟁 중.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jedai2000 2006-08-31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솔로님 스타일로~ ^^

아영엄마 2006-08-31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도수도 높은 술들을 마시셨으니 속이 쓰릴만도 하십니다. ^^;;

상복의랑데뷰 2006-08-3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

jedai2000 2006-08-3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독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을 두 개나 마셨네요. 하루종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상복의 랑데뷰님...다시 술 마시면 제가 갭니다. -_-;;

2006-11-09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6-11-09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마케터가 정확히 뭘 지칭하는지 모르겠는데, 일반적으로 출판사에서 마케팅하고 영업을 주 업무로 하시는 영업자의 역할이라 봤을 때, 영역이 많이 다르죠. 책을 만드는 과정에는 거의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표지나 홍보 방향, 이벤트 내용 등에 관해서 회의를 같이 하는 경우는 있겠지만, 도서 기획이나 편집, 제작 등의 일에 관해선 일반적으로 별로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

답변이 됐는지 모르겠는데, 더 궁금하신 게 있으면 메일 주세요.

2006-11-10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6-11-10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별로 알려드린 것도 없는걸요. ^^ 혹시 질문거리가 있으시면 주저말고 주세요.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공부하세요~(노현정 톤으로) ^^

2006-11-13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15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24 0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박방 - 전2권 세트
스티브 베리 지음, 정영문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공군: 나 왔다. 허, 이 자식. 또 자빠져 자고 있네. 지금 2시가 넘었다.
강군: 어, 왔냐. 잘 왔다. 심심해서 그냥 누워 있었어.
공군: 심심하면 집 밖으로 나갈 것이지 이게 뭐하는 짓이야.
강군: 그런 소리 말고 너도 내 옆에 누워.
공군: 미친 거 아냐. 내가 왜 니 옆에 눕냐.
강군: 내가 중3때 일이었어. 친구네 집에 놀러갔는데 뭐할까 고민하다가 둘이 같이 침대에 누웠는데, 둘다 깜빡 잠이 든거야. 그때가 한창 피곤할 때잖아. 4시쯤 잤는데 9시까지 같이 잔 거야. 그때 어찌나 달게 잤는지...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라는 느낌이 그렇게 편안함을 준 것 같아. 그때처럼 한 번 같이 누워보자.
공군: 뭐 그렇다면 알았다...



강군: 누우니까 편하지.
공군: 그러네.
강군: 이러고 있으니까 꼭 BL(boy love)이나 야오이 같지 않냐.
공군: 그런 건 꽃미남들이 하는거지. 네 상판을 봐라. 기름 덕지덕지 끼고, 머리는 개털에다...쯧쯧.
강군: 피곤하니까 그렇지.
공군: 악, 이불 속에 딱딱한 거 뭐야!
강군: 놀라긴..쯧쯧. 핸드폰이야.
공군: 그렇구나. 깜짝 놀랐잖아.
강군: 도대체 뭔지 안 거야.




공군: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심심한데 최근에 본 책 이야기나 해봐라.
강군: 최근에 본 거...음, <호박방>이 있군.
공군: 호박으로 만든 방이라니. 냄새 죽이겠네.
강군: 먹는 호박이 아니라 보석 호박.
공군: 그래.
강군: 나도 이번에 이 책을 보면서 알았는데 러시아에 있었단다. 벽 전체가 20톤의 귀한 보석, 호박으로 장식된 호박방이라는 게 말야. 나치가 가져갔는데, 전후 행방불명 되었다지. 아직도 찾고 있는 보물 수집가가 많단다.
공군: 보물이라...그것만 있으면 구질구질한 우리 인생도 바뀔텐데 말야.
강군: 그렇지. 넌 보물 찾으면 뭐하고 싶냐.
공군: 글쎄...소외된 이웃도 돕고 수해피해자나, 가정폭력 희생자 단체 등에 기부를.
강군: 놀고있다.
공군: 전지현이랑 사귄다.
강군: 이 자식아. 상상력이 그렇게 없어. 그 보물을 가지고 고작 전지현이냐. 난 김태희.
공군: 이 상상력 기발한 자식 같으니라구. 김태희 받고 손예진 내꺼.
강군: 다 줘도 서지혜는 못 줘.



공군: 알았다. 너 다 가져라. 책 이야기나 더 해봐. 맨날 흥에 겨워 난리치더니 오늘은 왜 그래.
강군: 응. <호박방> 이야기 더 해볼게. <호박방>은 일단 종이질이 좋다. 가벼워서 들고다니기도 좋고. 두 권으로 분권했는데, 이벤트해서 한 권 가격으로 살 수 있다. 끝.
공군: 뭐야, 정말 끝이야?
강군: 내가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알아먹어야지. 임마, 내용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건덕지가 없다는 거잖아. 호박방을 찾으려는 두 거물 기업가가 있어. 그 사람들 밑에는 살인마 겸 색정광인 각각 남녀 해결사가 있고. 얘네들이 호박방 때문에 박터지게 싸우는데, 우연히 미국인 이혼 부부가 단서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지.
공군: 당연히 해결사들은 부부를 노리겠네.
강군: 그렇지!


공군: 소재도 재미있고,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강군: 우선 '호박방'이라는 소재는 그럴싸하지. 본문 앞에 현재 러시아에서 재현해놓은 호박방 사진이 실려있는데 휘황찬란하더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팩션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싸구려 작가가 다 망쳐버린 셈이지. 단문이 많은데, 속도감 있는 문장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문장을 쓸 수 없는 사람이라 죄다 딱딱 끊어지고. 내용은 완전 쌍팔년도 막 나가는 소설만도 못해.
공군: 어떻길래?
강군: 주인공들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장면 같은데서도 독창성이 전혀 없고. 예를 들어 건물 옥상에서 킬러와 맞닥뜨린 주인공들. 킬러가 딱 보니까 아무도 없는거야. 그러고 킬러가 사라지면, 얘네 난간에 매달려있는 거지. 진짜 영화에서 한 5000번은 나왔던 거 아냐. 게다가 어찌나 밝히는지, 마지막에 킬러가 적들을 앞에 두고, 그 중요한 순간에 여주인공 강간하려다 비명에 간다. 그게 말이 되냐. 적들 다 죽여놓고, 나중에 그러면 되는 거 아냐.
공군: 허허.

강군: 인물들 얄팍하기는 어떻고. 여주인공은 원래 좀 땍땍거리고 앙칼진 성격인데, 남편이 우유부단하고 좀 소심해서 이혼한 거거든. 근데 모험을 같이 하다보니 남자가 의외로 결단력이 있는거라.바로 눈녹듯 남편한테 다시 뿅 가더만. 등장인물 성격도 막 바뀌고. 주인공 부부를 도와주는 발굴 전문가가 나오는데, 이 친구가 처음에는 거칠고 약간 이기적인 성격이었는데, 나중에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주인공 부부 대신 총맞고...또 그 놈의 호박방의 유래와 행방불명된 경위는 어찌나 자주 나오는지. 내가 거기 등장하는 콰니히스부르크를 아예 외웠다. 작가가 조사 열심해 했어요, 하고 자랑하는 것 같아서 기가 막히지, 아주.
공군: 나름 좋은 소재를 갖고 잘 못 살렸던거다.
강군: 총체적인 실패작이다. 스티브 베리라는 작가에 대면 댄 브라운이 세익스피어로 보일 정도니까. 비싼 돈 주고 왜 이런 작품을 사왔나 몰라.
공군: 그래도 장점 한 두 개는 있을 거 아냐.
강군: 그나마 잘 읽힌다는 거. 어렵지도 않고, 익숙한 플롯이라 생각할 필요 없이 페이지 넘기면 되니까. 야한 장면이 많아서 그런 쪽에서 약간 흥미를 가질 사람도 있기야 하겠지만. 뭐 책이 야해봐야 얼마나 야하겠냐
...



공군: 알았다. 잘 들었다. 별로 볼 필요 없는 책이구나
강군: 내 말이.
공군: 어, 너 핸드폰 왔다. 백만 년 만이구나. 이거 소리 어디에서 나는거냐?
강군: 어제 책상 위에 놔두고 잤어. 일어나서 받아야겠네.
공군: 잠깐...핸드폰이 저 위에 있다고...그럼 아까 그 이불 속에 있던 것은...
강군: ......
공군: ......
강군: 일단 맥주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자....
공군: .....좋아.





                                                                                                <끝>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6-08-2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호박빵 사먹을껄 했답니다 ㅡㅡ;;;

jedai2000 2006-08-26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건강에는 호박빵이 더 좋겠죠. ^^

paviana 2006-08-26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풉 리뷰 보다가 웃기는 처음이에요.
앗 리뷰가 이상하다거나 웃기다는말이 아니에요.
건강에는 호박방보다는 호박빵이 더 좋다는걸 알고 갑니다.ㅎㅎ
근데 정말 소설 쓰셔도 되시겠어요.^^

비로그인 2006-08-2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jedai2000 2006-08-2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고맙습니다. 좀 건방지지만 <호박방>보다는 내 리뷰가 더 재미있을 거다, 라는 자신감이 생길 정도로 좋지 않았던 작품입니다. ^^ 호박빵 많이 드시구요. 건강해지세요. 칭찬 고맙습니다. ^^

정군님...^^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

Apple 2006-08-27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이 가끔씩 사용하시는 대화체 리뷰 너무 재밌어요!!!

비연 2006-08-27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이거 읽으려고 방금 샀는데요...ㅠㅠ

jedai2000 2006-08-27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님...강군, 공군 적당히 귀엽지 않습니까. ^^ 가볍게 쓰고 싶을 때 가끔 등장시키는 데 저는 정이 단단히 들었어요 ^^

비연님...삼가 애통함을 표하겠나이다. 나름의 재미를 찾아 즐겨보세요 T.T

2006-08-28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6-08-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그렇게 웃기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