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사에서 '20세기 한국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펴낸 50권 묶음집 중에 제30권이 최인호, 박범신, 한수산 등의 단편집이다. 이 한국소설선은 이광수부터 김연수, 배수아까지 한국소설 100년의 명단편들이 두루 실려 있는 대표적인 단편소설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많은 한국의 문인들의 수작들을 전부 수록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작가 한 사람마다 한두 편씩의 대표 단편 소개에 그치고 있으나 이는 분량상 그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50권 중에 한 권을 골라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누구의 것을 고를까 고민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는 김유정, 이상, 김승옥, 손창섭, 이문열, 황석영 등인데 웬지 이 작가들은 전집으로 깊이 있게 읽고 싶어 넘어가고, 월북작가라 거의 읽어볼 기회가 없었던 이태준의 작품을 고르고 싶었지만 역시 전작을 읽고 싶어 다음으로 기회를 돌렸다. 제30권에 최인호의 이름이 보이길래 몇 년 전 <상도>의 기막힌 재미를 생각하며 그것을 골랐다. 더구나 같이 수록된 작가 중에 박범신, 한수산 등의 이름이 보여 더욱 좋았는데 예전 중고등학교 때 서점을 가면 매대에 꽂혀 있는 대부분의 책이 이 세 사람의 책이었던 까닭이다. 70, 80년대 대표 베스트셀러 작가들이라 할 수 있는데 많이 팔린 만큼의 재미를 보장해줄 것 같아 흥분했었다.
최인호의 작품은 <타인의 방>과 <깊고 푸른 밤>이다. <타인의 방>은 70년대 초기 단편으로 출장을 다녀온 남자가 외딴 방에서 홀로 고립되다 마침내 사물화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70년대 초반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인간이 기계화, 사물화되어가는 풍경을 구체적인 물건(이를테면 찾잔, 스푼, 샤워기)을 제시하며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지금이야 사람이 사람 같지 않고, 조립 라인에서 기계처럼 구르고 또 구르는 매일이 일상이 되었다지만 그런 전조를 최초로 발견한 70년대 초의 작가에겐 심상치 않은 일이었으리라. 안성기가 나온 영화로도 유명한 <깊고 푸른 밤>은 대마초로 나락에 빠진 전직가수와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지식인이 한국에서 도피해 LA 여행을 하는 이야기다. 본인 같이 젊은 사람이 당시의 어두운 현실을 어떻게 알겠는가마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절망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깊은 탄식이 배어나오게 된다.
유명세는 거의 누리지 못했던 오탁번이라는 작가의 <굴뚝과 천장>은 4.19 혁명 당시의 대조적인 두 대학생을 통해 지식인 사회의 풍경을 그린다. 현실주의자이자 체제에 어느 정도 순응하는 '나'와 끝없이 현실을 개탄하고 바꿔보고 싶어했던 친구의 대조적인 삶의 방식이 잘 표현되고 있다. 마침내 혁명에 성공하지만 더 큰 혼란과 위선으로 혼탁한 세상을 바라보는 친구의 깊은 좌절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한수산의 <타인의 얼굴>은 자전적인 소설로 보여지는데, 학창시절 깊은 깨달음을 주었던 교수가 암에 걸리자 그와의 지난 날을 반추해보는 일종의 회상기라 할 수 있다. 문장이 아주 섬세하고 촘촘한 느낌을 주지만 실상 교수가 어떤 깨달음을 주었는지,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뭘 말하고 싶은건지 모르겠다.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 삶의 비애를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과문해서 그렇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거의 공감할 수 없었던 앙상한 감동의 작품이었다.
박범신의 <토끼와 잠수함>은 유신체제 시절의 혹독한 정치 현실을 알레고리 형식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사소한 교통위반으로 잡혀온 일군의 사람들, 도시를 돌며 위반자들을 태워 즉결재판소로 데려가는 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경찰은 아이가 죽어간다는 행상 여인의 눈물도 무시하고, 염천의 더위 아래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창문 좀 열자고 호소하는 소리도 무시한다. 이런 비인간적이고 가혹한 통치는 결국 파국을 맞는다는 메시지를 결말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완벽한 자전소설이다. 실제로 작가는 글쓰기의 한계를 느끼고 절필을 선언했다는데, 문학의 사망선고를 받은 작가가 실제 자신에게도 사망선고를 내리기 위해 죽으러 간다. 눈이 몹시 쌓인 산 중에서 그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만나는데, 남자는 웬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작가의 지난 날의 이야기가 회상의 형식을 빌어 소개되며, 결국 깊은 깨달음을 얻은 작가는 그동안의 자신의 글쓰기가 허식에 다름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이 작품의 마지막은 이렇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자꾸 글을 쓰고 싶으니...눈물겹다."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과 솔직한 내면의 고백, 반성과 회환의 정조까지 모두 인상적인 정말 좋은 단편이다.
당대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작품답지 않게 재미보다는 문학성에 기울어졌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을 주로 선정한 듯 하다. 책 뒤에는 평론가의 작품 해설도 실려 있는데, 수록된 작가들이 처음에는 신선했는데 대중소설, 통속소설, 상업소설화 되면서 망가졌다는 느낌의 평을 한다. 역시 평론가란 먹물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인 듯, 그 놈의 대중소설/순문학 구분은 이제 제발 사라져줬으면 한다. 그게 바로 오늘의 한국문학의 초라한 현실을 낳게 만든 주범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존경하는 일본소설가 다카무라 가오루가 이런 말을 했단다. "책은 책이고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순문학이나 통속문학이니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소설을 쓸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인호 작품의 공은 (아마도 평론가들은 공감하지 않겠지만) 70,80년대 그 어두웠던 시절에, 놀것 하나 재미거리 하나 없던 그 시절에, 재미와 감동을 겸비한 소설들로 숱한 대중들에게 불면의 밤을 선물했다는 것이다. 책 읽는 재미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작가라고 불리려면, 자기 이야기만 쏟아내는 것도 좋지만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잘 들어줄까 하는 '포장의 고민'도 해야 한다. 당연한 걸 모르는 기본도 안 된 작가가 요즘 너무 많고, 그래서 한국 문학의 위기가 온 것이다.
P.S/ 평론가의 해설과 단어풀이까지 수록되어 있어 수험생을 겨냥한 듯 하다. 그러나 단어풀이는 맨 뒤에 실려 읽는 도중 흐름을 깨기 일쑤였다. 계속 앞뒤로 왔다갔다하니 말이다. 게다가 '여우비' '돌개바람' '일갈' 등의 단어들도 뜻풀이를 해준다. 수험생에게 공부를 시키고 싶다면, 이런 단어쯤은 사전 찾아 해결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의 밥떠먹여주기가 한국 수험생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요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