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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개
캐롤린 파크허스트 지음, 공경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며칠 전 너무도 사랑했던 아내를 떠나보낸. 아내는 아찔하게 높은 사과나무 위에서 떨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모두들 아내가 자살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남자는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데...아내가 떠난 순간을 지켜본 건 부부가 기르던 ‘로렐라이’라는 개가 유일했습니다. 언어학자인 남자는 진실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로렐라이에게 인간의 말을 가르치려 합니다. 개가 말을 해준다면 모든 걸 들을 수 있을테니까요.
아내의 죽음이라는 큰 얼개를 개에게 말을 가르치려는 남자의 노력과 설레는 첫 데이트부터 행복한 결혼생활, 부부관계의 양념과도 같은 부부싸움까지 지난 일을 회상하는 장면들을 번갈아가며 소묘하듯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던 가슴아픈 순간은 다행히 한 번도 없었지만 오죽하면 개에게 말을 가르치려고까지 할까, 하는 마음에 깊이 공감하며 책장을 넘겼답니다. 바람이 찬 이 가을,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에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미스터리적인 소재를 사용했지만 사실 추리소설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난 날의 회상을 통해 아내의 성격과 아픔을 드러내며, 아내가 죽기 전에 남겨둔 퍼즐을 통해 잔재미를 주며, 특히 개에게 말을 시키기 위해 불법적인 구강수술을 단행하는 동물학대 집단을 등장시켜 긴장감을 더하는 등 작가 캐롤린 파크허스트는 자칫 단조롭고 지루해지기 쉬운 신파극에서 이 작품을 좀더 품격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립니다. 데뷔작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힘든 수준이예요.
그렇게 해서 드러난 건 아내의 죽음에 얽힌 기상천외한 비밀, 의외의 반전이 아닙니다. 남자는 둘이 함께 했던 순간들을 반추해보며, 아내를 온전한 모습 그대로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마술과도 같은 사랑에 빠졌으며, 어떻게 그 사랑을 키워나갔는가 하는. 좋은 모습은 좋은 걸로, 나쁜 모습도 좋은 걸로가 아닌 진짜 아내를 가슴 속에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아내는 아름답지만 불안정했고, 상냥했지만 슬픔이 많았습니다. 그녀가 드러냈던 진짜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남자가 깊은 회한에 잠기는 것은 당연할 듯 합니다.
<바벨의 개>라는 제목은 성경에서 나온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습니다. 태초에 인간들의 말은 모두 같았는데, 그들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자 하느님이 말을 모두 다르게 바꿔버렸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실 거예요. 그렇게 인간의 말은 나라별로 모두 달라졌지만, 같은 말을 쓰는 한 나라 안에서도 사실 진짜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란 쉽지 않죠. 그러나 남자가 진심을 통해 죽은 아내와 말 못하는 개와 소통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우리 안의 바벨 탑은 언젠가 무너뜨릴 수 있을 듯해요. 진심으로 들려주고 싶고, 진심으로 듣고 싶다면...
쉿, 귀를 기울여 들어보세요. 잘 들으면 들릴지도 몰라요. 가면 속에 가려져 있던 상대의 진짜 목소리가 말이죠. 그때 그 목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되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로지 그것만 기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