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는 강가에서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가 여성 작가인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만약 그가 남자였다면, 필시 교복 패티시즘이나 미소녀 마니아, 변태 작가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물론 국내에 소개된 그녀의 작품 세 개만을 보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국내 출간작들에서는 미소녀들이 대거 등장해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굽이치는 강가에서>는 아예 미소녀 군단이 출현한다. 요염하지만 기품 있는 가스미, 차분하고 온화한 요시노, 아직 소녀의 상큼함을 간직한 마리코, 어른스럽고 시원시원한 마오코 등이 영광의 얼굴들이다. 도대체 어느 동네인지 알고 싶다. 이사 가게...한 동네에서 그토록 많은 미소녀가 출몰한다니 남자라면 누구나 살고 싶은 동네가 아닐까. 이런 미소녀들이 한 좁은 마을에 군웅할거한다니 말도 안 되는 설정이다. 하지만 뭐 좋다. 세상에 많아서 좋을 것이라고는 술과 미소녀 밖에 없으니까.

 

굽이치는 강가에 자그만 마을이 있다. 오래 전부터 그 강가에 자리 잡고 있었던 집에는 개망초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작은 선착장이 있으며 그네가 매어진 나무가 있다. 거기서 모든 일이 벌어졌다. 때로는 무시무시하고, 때로는 아름다워 한숨이 비어져 나오는 모든 일들이...생기가 피어나는 여름방학의 첫날, 그림을 잘 그리는 마리코는 평소 동경하던 두 선배, 가스미와 요시노 콤비로부터 연극제에 쓰일 배경 그림을 같이 그리자는 합숙 제의를 받는다. 마리코는 당연히 승낙하지만, 절친한 친구 마오코는 웬지 마음이 무겁다. 둘 이외에는 세상의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듯 보이는 선배들의 세계로 마리코가 끌려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니들과의 시간이 몹시 기다려지는 마리코는 뜻밖의 방문을 받는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눈을 가진 소년, 쓰키히코다. 그는 말한다. "너는 가스미를 감당할 수 없어.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말 거야." 불안함과 설레임이 교차되는 가운데 마리코는 같이 합숙할 가스미의 집, 선착장이 있는 그 집에 도착하고, 가스미의 사촌으로 밝혀진 쓰키히코와 그의 친구 아키오미도 도착해 다섯 소년소녀의 9일간의 기묘한 동거가 벌어진다. 합숙에서 빠질 수 없는 무서운 이야기는 그날 밤에...10년 전 그 집에선 가스미의 엄마가 목에 졸린 시체로 선착장에 묶여 있던 배 안에서 발견되었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한 어린 소녀가 죽었던 것이다. 봉인된 기억을 끄르는 다섯 소년소녀. 알고보니 그들 모두가 각각 그날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날 있었던 사건의 비밀스런 관계자들이 모두 모인 셈이다. 그날의 진실이란 무엇이었을까...

 

전체 4장으로 되어 있으며 매 장마다 화자가 바뀐다. 1장은 마리코, 2장은 요시노, 3장은 마오코, 4장은 에필로그 격으로 가스미다. 다소 심심하게 진행되던 이야기는 1장 결말에서 마리코가 잊고 있던 기억을 아키오미가 끄집어내면서 타오른다. 그 다음부터는 회상 속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아, 현재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좇아 정신없이 읽어내려갔다.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으로 작가 온다 리쿠의 장점을 모두 간직한 수작이다.

 

 온다 리쿠의 장기인 이미지의 능수능한 활용이 그 첫째다. 물론 모두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듯한 이미지들이다. 강물이 느리게 휘돌아가는 좁은 강 위에 작은 나무배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강가에는 꽃이 피어 있고, 눈이 시리도록 파아란 풀이 무성하다. 버드나무에 매인 그네를 타는 어린 소녀, 3층 다락방에 나란히 누워 창밖을 바라보는 소녀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웬지 기억에 선연한 아름다운 풍경들이다. 일종의 데자뷔라고 할 수 있는 원형적인 이미지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영상을 불러내는 것은 온다 리쿠만의 장기이다. 이런 시각적인 풍성함 외에도 그녀만의 섬세한 심리 묘사도 돋보인다. 소녀에서 여자로 넘어가는 짧고 찬란한 한 때의 순간을 온다 리쿠보다 잘 그리는 작가도 없을 것이다. 소녀가 소녀에게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감정들, 동경, 질투, 헌신, 시기, 매혹 등을 참으로 세심하게 그려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무엇보다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은 이 작품이 아주 우수한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데 있었다. 미스터리 소설가라는 온다 리쿠의 레테르 면에서 전작들이 실망스러웠던 것에 비해 <굽이치는 강가에서>는 정통 미스터리에서 볼 수 있는 정통 트릭을 구사하고 있다. 단서가 독자에게 모두 주어진 공정하고 기발한 트릭. 나는 이 작품에 사용된 알리바이 트릭이 왜 미스터리 애호가들에게 회자되지 않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근래 본 가장 재미있었던 트릭으로 애호가라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밤의 피크닉>은 밤새도록 걷는다는 플롯에서 별다른 재미를 찾을 수 없었고, 심리 묘사는 한 마디로 잔망스러웠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이야기를 너무 벌려 모호하고, 장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굽이치는 강가에서>는 과거와 현재에 공통된 한 가지 사건을 맞아 몇 명의 등장인물들이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진실을 찾고 비밀을 벗겨낸다는 압축적이면서 효과적인 이야기 구조를 보인다. 긴장감은 한층 강화되고, 몰입감은 더욱 커진다. 사견이지만 현재 국내에 나와 있는 그녀의 작품 중에서는 이 작품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섬세하면서 재미있는 소설이다. 

 

삼세번이라고 그녀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이처럼 좋은 작품을 발견하게 되서 반갑다. 온다 리쿠는 전술한 대로 여러 장점도 있지만 비현실적인 설정이나 웬지 비주얼노벨 게임, 미소녀 시뮬레이션 게임, 라이트노벨을 보는 듯한 가벼움도 지적된다. 그 점에서 취향에 맞는 않는 독자도 제법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온다 리쿠가 그려내는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라면 그까짓 현실성쯤은 초월해지고 싶은 기분도 든다. 왜 좋은 영화나 소설을 보면 밤새도록 그 감흥을 이야기하고 싶고, 괜히 그 기분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가. 나는 이 책을 덮고 나서 밤새도록 등장인물과 이야기에 관해 떠들고 싶었고, 몹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이 기분은 하루가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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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로 2006-09-13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해봐도 읽고 '아, 좋다, 정말 좋다!'라고 느낀 소설이었어요.

물만두 2006-09-1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교복 패티시즘이라니요 ㅜ.ㅜ 정말 좋죠^^

jedai2000 2006-09-13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솔로님...동감입니다. 책장을 덮기 아까울 정도였어요. 아, 좋다~ 정말 좋다~ ^^

물만두님...그런 혐의도 있지 않을까요. ^^ 미스터리적인 재미도 특출난 우수한 작품이었어요. ^^

거친아이 2006-09-14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의 피크닉만 읽어봤는데,,제다이님 리뷰를 보니 읽고 싶은 욕구가 팍팍 생기네요^^

jedai2000 2006-09-15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친아이님...읽어보세요.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드려요. ^^ <밤의 피크닉>에서 본 온다 리쿠의 이미지 메이킹과 심리 묘사 뿐 아니라 정교한 추리소설적 재미까지 같이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

펭귄 2006-12-1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전혀... 나름 미스터리소설을 좋아하지만, 오히려 <밤의 피크닉>은 굉장히 재밌게 봤는데요. 이책에서는 제일 실망스러웠던 부분이 알리바이 트릭 부분이었습니다.

jedai2000 2006-12-1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러셨군요. 보는 느낌은 다 다른 거니까요. ^^ 저는 이 책이 굉장히 환상적인 분위기라 그런 분위기 위주로 나가다가 끝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트릭이 있는 본격 추리소설 스타일로 매조지하는 게 굉장히 느낌이 좋았거든요. 비현실적이지만 그런대로 깔끔하지 않았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