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극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그리고 너무 익숙한 장면이라 현실과 혼동될 지경이다. 

그리지 말라고 연극 사이사이 하벨이 목소리로 개입한다. 

자신의 연극에 대한 논평, 희곡의 그 대목을 쓸 때의 감상, 어려움 등등을 표현하면서 말이다. 

이야기로 돌아가면, 

전직 총리였던 빌렘은 정부에서 제공하는 관저에서 

동지이자 연인인 이레나와 어머니, 그리고 그의 가족 참모들과 함께 퇴직후의 삶을 살아간다. 

1막은 별 사건없이 퇴임 후 그의 권력은 줄줄줄 세어 나가는 한편, 

빌렘이 그 남은 권력의 끄트머리를 주변사람들에게 주지시켜가며 사는 소소한 일상이다. 

2막부터 점점 빌렘을 온갖 사건들이 죄어온다. 

그와 이레나에 대한 의도한 스캔들,  

언론의 악의적인 보도, 

15년전의 문란한 사생활이 담긴 편지를 꼬투리 삼아  

경찰로 소환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굴종을 요구하는 신임 정권.  

결국 그는 자신의 신념과 다른 정권의 참모의 참모의 참모가 되기로 하면서 

집도 마지막까지 곁을 지키던 동지인 이레나도 잃는다. 

아마... 빌렘처럼 항복할 수 없다면, 

누군가처럼 몸을 던질 수 밖에 없으리라. 

두 장면이 특히 인상깊었다. 

하나는 앞장면의 나온 대사를 등장인물 모두가 벌갈라 가며 외치는 장면이다. 

a가 했던 말을 b가 하는 순간 맥락이 달라진다. 

두번째 장면은 시종일관 관저의 앞뜰을 장식하고 있던 나무들이 마지막에 

뿌리채 들려올라가는 장면이었다. 

주인공의 한 평생이 쓱 하고 뽑혀진 것 처럼 말이다. 

체코의 민주투사이고 대통령이었던 하벨이 그린 연극은  

정치가 인생의 모든 것이 었던 사람에게 그것이 부정되면 어떻게 망가지는가를 신랄하게 보여준다.  

정치인 빌렘과 인간 빌렘을 따로 생각하는 따위는 가능하지 않는가보다.  

삶은 이 연극보다 훨씬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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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4-05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사태평 단물 쪽쪽 빨아먹는 정권의 단맛에 길들여지는 순간....마지막에 딸려오는 쓰디 쓴 맛은 아마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우린 너무 잘알죠.(그런데 정치만 하면 죄다 까먹나 봐요.)

무해한모리군 2010-04-06 09:46   좋아요 0 | URL
우리는 너무 쉽게 용서해주는듯 해요.
변한듯 싶으면 일침을 날려줘야하는데 말이지요.

fiore 2010-04-05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오셨군요.

연극을 맘편히 보려면, 우선 무지하게 열심히 일을 한동안 해놓아야하는데 말이죠~

아직도 좀 비실 ^^; ㅋ

무해한모리군 2010-04-06 09:46   좋아요 0 | URL
저도 도저히 시간이 안나는 걸 연초에 예약을 해놔서 억지로 봤답니다 ㅎ

FIORE님 어서 건강을 찾으셔야할텐데요.
힘!

쎈연필 2010-04-05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거 잼있겠네요... 체코나 폴란드쪽 문학이 재밌난 게 많더라고요.

무해한모리군 2010-04-06 09:49   좋아요 0 | URL
주인공 집 앞마당이 무대인데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단 앞자리였는데 스크린에 대사를 읽느라 너무 고생해서 보는 내내 후회가 ㅠ.ㅠ

Alicia 2010-04-05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피나바우쉬 보러갔다가 포스터봤어요. ^^ 너무 비싸서 패스~
대신 La dispute를 보려고 해요.

무해한모리군 2010-04-06 09:58   좋아요 0 | URL
아 보고 오셔서 꼭 소감을 알려주세요.
연초에 덜컥 예매를 해놔서요.
아 남의 나라 무언극만 봐야지 자막의 압박이 --;;

마녀고양이 2010-04-06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왜 연극을 맘편히 볼 수 없는걸까요?
특히 소극장... 배우와 의사소통이 중요한 그런 곳 있잖아요..
그런데는 맘이 부담스러워요.
그러다보니 큰 극장이면서 부담없는 것들(뮤지컬, 인형극.. ㅡㅡ;;)만 골라보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무해한모리군 2010-04-06 17:27   좋아요 0 | URL
아.. 저는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ㅎ
엘지아트센터는 제법 큼지막하니 가셔도 될 듯 합니다.
저는 모든 공연에 대단한 기대를 하거나 사전 정보 없이 마음 내키는대로 보는 편이라서요. 공연자에 대한 예의가 없는듯.

머큐리 2010-04-06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걸 버릴 수 있다는 것...소유하지 말아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좋은 연극 보셨네요,,ㅎㅎ

무해한모리군 2010-04-06 17:21   좋아요 0 | URL
일단 가족지인이 몽땅 없지 않고서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