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애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이 소설의 시작인 이 한문장이야 말로 그의 글이 가진 묘미를 보여준다. 참으로 정교한 묘사다.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특별한 클라이막스도 없이, 온천 두메산골에 대한 풍경과 서로에게 매혹되는 순간을 손에 잡히듯 그려내며 참 이야기는 느릿느릿이 흘러간다.
매번 읽을 때마다 눈길이 가는 대목이 다른데, 왠일인지 이번엔 1935년에 나왔으니 꽤나 오래된 이 소설의 이별이 다가오는 순간을 묘사한 대목이 와닿는다.
'당신은 좋은 애야'
"어째서요? 어디가 좋아요?"
'좋은 애라고'
"그래요? 이상한 분이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정신차려요"하고 고마코는 시선을 돌리고 시마무라를 흔들며 뚝뚝 끊어 혼내듯 말하더니 잠자코 있었다.
(중략)
'당신은 좋은 여자야'
"어떻게 좋은데요?"
'좋은 여자야'
"이상한 사람" 하고 어깨가 가려운 듯 얼굴을 가렸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한쪽 팔꿈치를 세우고 고개를 들고는,
"그게 무슨 뜻이죠? 네, 무슨 말이에요?"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고마코를 보았다.
"말해 줘요. 그래서 절 만나러 온 거예요? 당신은 절 비웃고 있었군요. 역시 비웃고 계셨던 거군요"
(126~127쪽)
하지만 이런 애착은 지지미 한 장만큼의 뚜렷한 형태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옷감은 공예품 가운데 수명이 짧은 편이긴 해도, 소중하게만 다루면 50년 이상 된 지지미도 색이 바래지 않은 상태로 입을 수 있지만, 인간의 육체적 친밀감은 지지미만한 수명도 못 되는 게 아닌가 하고 멍하니 생각하고 있으려니,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고마코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시마무라는 움찔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곤한 탓인가 싶었다.
고마코가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이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 되었다.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코에게는 시마무라의 그 무엇도 전해지는 것이 없어 보였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히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133~134쪽)
"당신은 절 좋은 여자라고 하셨죠? 떠날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신 거예요?"
(144쪽)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참 다른 인간들이다.
떠날 때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불안감에 떨며 나의 어떤 점이 좋았냐고, 어째서 내가 강하고 좋은 사람이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 물음의 끝은 싸움이었던듯 하다..
받은 마음을 돌려줄 수 없어 마음아팠던 많은 날들과,
어째서 나를 두고 가느냐고 되묻던 많은 밤들이 떠오른다.
매순간순간 서로를 이해하기는 그렇게 어려운데,
시공간을 넘어서 글에 묘사된 인간관계들은 또 어찌 이리 보편적인지.
참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