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세웠던 계획들은 여기저기 구멍이 나다못해 뻥 뚫린 채로 한해를 마감해 가고 있다. 씁쓸.
후줄근한 나의 집은 게으른 내가 살게 된 이후로 더욱 남루해지고 있다. 야식을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은 몇일만에 사라지고, 퇴근을 하고 라면을 엄마표 김치를 죽 찢어서 맛나게 끓여먹고 설겆이를 하는데 갑자기 내 손가락 만한 바퀴녀석이 싱크대위를 유유히 지나가지 뭔가. 깜짝 놀랐지만, 자취 십년차답게 물을 마구 틀어서 수쳇구멍에 빠뜨리는데 성공. 문제는 저녀석을 어떻게 처리하냐는 건데.. 일단은 처리하지 못하고 수체구멍 뚜껑을 덮어놓은 상태다. 쩝. 방바닥이면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여서 변기에 던져 물을 내려버리면 되는데.. 어떻게 싱크대구멍에서 변기까지 바퀴사체를 운반할까 흠.. 아.. 바퀴여~ 내가 하루에 집에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낮에만 돌아다니면 안되겠니? 아니면 불이 꺼질때까지 기다렸다 움직여도 될텐데~~ 물론 그대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대의 맨질맨질한 껍질과 가는 다리, 강인한 생명력과 그외 내가 모르는 당신의 무수한 미지의 영역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걸 조금은 이해해 주면 좋을텐데 말이다.
올해는 책을 많이 사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고, 시월엔 책을 사지 않으려고 했는데 벌써 두번째 구매를 해버렸다. 애초엔 중고샵에서 설국을 2,700원에 구매하려고 했는데 무료배송 받으려고 보관함에 장기 대기중이던 섹슈얼리티와 철학을 함께 구매했다. 아~ 보관함에 수백권의 책들이 서로 자기를 꺼내달라고 어찌나 나를 책망하는 눈망울로 보던지 흑.. 그러나 소설은 이미 다섯권이나 순서를 기다리고 있고, 사회과학서적들은 4권을 동시에 읽어가느라 내용이 섞여가고 있으며, 책에대한책도 대단한 책과 런던스타일책읽기를 동시에 읽고 있는 지경이라 더 구매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결혼'과 '성매매'에 대한 짧은 생각을 정리한 글을 쓰고 싶은지라 한번 구매해 보았다.
설국은 다분히 촌스러운 실용적인 이유에서 구입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에치고유자와 지역으로 크리스마스에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 가기 전에 다시 한번 읽어두고 싶어서다.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는데, 우리집에 책이라고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제들을 위해 부모님이 사준 검은 장정에 세로줄쓰기로 된 세계문학전집이 다였다. 노는 것도 놀아줄 사람도 없던 나는 학교를 파하면 집으로 돌아와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두꺼운 세로줄 쓰기 책들을 읽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설국이었다. 이 글의 현란함은 어린 마음에도 꽤나 깊숙한 흔적을 남겼고, 긴세월 사랑은 내게 뜨거운 어떤 것이기 보다 다소 나른한 느낌의 어떤 것으로 인식됐다. 나이에 비해 내가 온천여행을 꽤나 많이 다닌 것은 이 책이 남긴 '눈 내리는 노천탕'에 대한 선명한 로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노천탕도 일본의 료칸도 몇 번 경험해 본 적이 있지만, 술쌀물이 좋다는 그곳에 내 어린 시절의 로망에 다가간다니 설레인다. 기찻간에서 몇 구절 읊어주리라.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가 남긴 어두운 잔상 때문에 다음 책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가벼운 잡지를 읽을까 하다 뽑아든 닉혼비. 역시 다시한번 나는 그의 팬임을 고백하며 제목때문에(런던스타일이라니!! 웃긴다 --;;) 이 책을 사는 것을 잠시 망설였던 것을 후회하고 후회했다. 즐겁게 낄낄거리며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사들이는 서로에게 때로 깊이 공감하고, 어려운 책만 좋다고 주장하는 웃기지도 않는 치들을 한껏 함께 비웃고 있다. 그의 책은 왜 독서가 유흥인지를 말해준다.
글을 그의 책에 나온 코소의 시로 마무리 하고 싶었는데 찾을 수가 없구나 아웅..
참 잊어버릴 뻔 했다. 하필 일차주문분이 딱 소진된 시점에 주문을 해서 한달여를 기다린 끝에 나의 비틀즈가 도착했다. 이번주말엔 비틀즈를 들으며 친구가 준 대만에서 온 우롱차를 감말랭이와 곁들여 마실 수 있겠구나~
올해 음반은 이것을 끝으로 절대절대 더 사지 말아야지 결심결심!! (그러나 레드 제플린 박스셋에 계속 마음이 쓰이고 있긴하다 --)
무슨 일기가 이리 긴지..
결론은 올초에 세웠던 계획들이 숭숭 구멍이 뚫렸지만, 또 다른 계획들을 끊임없이 세워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