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마음속 통에 넣었다 아주 가끔만 꺼내보는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기억이 제가 대학내내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대표주자, 댓거리하면 슬그머니 사라지고 춤추고 악이나 치며 놀고 데모하면 맨 끝줄에도 겨우 앉을동말동 하면서도 이 언저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일 겁니다.
지금은 우람한 월드컵운동장이 서 있는 상암동이 제가 대학교 1학년 시절에는 철거 투쟁이 한창이었습니다. 1학년도 다 끝나가던 겨울 겨울전수다 농활이다 이래저래 분주해 몇 번 그곳에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운명의 그날은 설날 하루전 이맘때였습니다. 보통 이때가 되면 학생들이나 연대단위들이 고향을 가느라고 동력이 많이 없지요. 깡패들 떡값주려고 이 때 철거를 많이 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곳 한 철거민분 댁에서 아이 둘과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당탕탕 밖을 내다보니 만삭 임산부분은 소화액에 뒤덮여있고, 앞을 막아서는 노인분은 머리가 깨져 있는등 생지옥이었습니다. 고양이 앞의 생쥐는 두려움에 도망을 못간다지요. 저도 전경의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 깡패의 눈빛에 '이러다 죽는구나' 싶어 얼어붙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들어보니 제가 마구 달리고 있는거예요. 내 손에 올망졸망 메달려있던 아이들은 어디다 두고.. 나중에 아이들 어머니에게 사과를 드렸습니다만, 차마 죄송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더군요..
아마 머리 나쁜 내가 아무리 글로 읽어도 몰랐을 일이 그날 하루에 몸으로 이해가 됐습니다. 사람이 저리 목숨 걸고 싸우면 뭔가 잘못된게 틀림없다. 뭔진 모르지만 이주비 주고 나가라고 하는게 뭐가 잘못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틀린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기억이 지금 현실에서 걸어나옵니다. 십년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채로 아니 이젠 주변지역까지 몽땅 재개발을 해대니 어디 갈 곳도 없으니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이제 MB식 오세훈식 무자비 재개발로 문제점은 더욱 쉽게 알겠습니다. . 은평구에 살던 제 친구는 쥐꼬리 이주비로 결국 가족과 서울에서 살곳을 못찾아 경기도로 밀려나 두시간 통근 중입니다. 이 친구는 그래도 운이 좋습니다. 일을 할 수 있으니.. 상가를 세얻어 장사를 하던 분들은 하루아침에 집도 일터도 빼앗깁니다. 청계천변에 장사하시던 분들은 저기 어디 동대문쪽에 가 계시다구요? 이번 용산도 상가세입자분들이 가장 크게 저항한 것으로 압니다.
재개발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할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피막골 대신 높다란 주상복합을 짓는게 서울의 관광성 개발을 위해 어떤 도움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한꺼번에 개발을 시작하면 이 사람들은 집이 지어지기까지 어디에 살아야 되고 수십년 후 집들이 낡아 다시 철거할 때도 동시에 도래할텐데 그땐 어쩌나요? 이 혼란을 다시 겪어야 하는 건가요? 이렇게 무섭게 집값이 들썩여서는 세입자 아니라 집주인들도 살던 곳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추가 공사비 부담을 댈 수 없을테니요.(관악구 난곡지구의 경우도 재개발 후 원주민 재정착률이 10%대 였다는 걸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서민들은 마을도 이웃도 살던 집도 최악은 일터도 다 잃는 동안, 부자들과 개발업자들 배를 불리겠지요.
정말 진지하게 재개발을 해야겠으면, 긴 안목으로 방식과 순서를 정해서 하면 안될런지.. 이번 기회에 이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값의 대가로 논의해봅시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개발하는데 노점상 때려잡고 서민들 몰아내는 방식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