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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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는 단 하나뿐입니다. 비슷한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엘리 위젤

그 어느 세기보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과학적 발전과 문화적 진보를 이루어내었다는 20세기. 그러나 그 수사적 화려함의 뒤안에는 잊고 싶거나, 잊혀진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바로 증오의 기억이다.

철학적, 문화적 성숙이 빠르게 진행되던 20세기 초반, 우리는 믿기 힘든 두 번의 야만의 세월을 겪어내게된다. 이른바 제1차, 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야만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주체들에게는 하나같이 강한 선민의식과 혈통주의가 타 민족과 혈통을 배제하는 증오의 법칙으로 작용하였다. 그 증오의 법칙을 가장 잘, 그리고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이해한 예는 바로 아우슈비츠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끔찍한 상흔이 되어버린 이 역사적 사실은 어느 누군가에게는 잊고 싶은 하나의 기억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끊임없이 재생산하여야할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다. 아마도 임마누엘 레비나스와 같은 철학자나 엘리 위젤과 같은 소설가,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프리모 레비에게는 후자 쪽에 인생의 초점을 맞춘 듯 싶다. 자신들의 추체험을 묻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너무-하게도 특별했던 혹은 지난했던 시간이었으리라.

야만의 시대에 대한 프리모 레비의 증언의 기록인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페이지를 덮을 수 밖에 없었다.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 때마다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고, 건조한 문체로 묘사된 수용소의 참상이 그려질 때마다 욕지기와 구토가 거의 동시에 일었다. 한 줄 한 줄을 고통스럽게 읽어내려갈 때마다 어느새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고, 급기야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프리모 레비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바닥'으로 기투된 존재들의 인생을 결코 '이해될 수'없는 그 잔혹의 현장으로 그려낸다. 그곳에서의 삶이란 상상할 수 없을만큼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지만 그는 자기 슬픔에서 최대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담담하게 써-나간다. 그곳은 기껏해야 '죽 한 숟갈 더 먹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하는 곳이지만, 그리고 자신의 안위를 담보하기 위해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아야 할 말세의 곳이지만 그러나 어떤 희미한 가능성으로 그들은 죽지 않고 버.틴.다!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187쪽)

가스실로 향하는 대열에 합류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규정하기 어려운',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머금으며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쟁투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 야만의 세월을 견뎌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그 죽음의 현장에서 레비는 살아남았고 그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216쪽)고 했떤 메모들도 함께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야만의 기록들은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있었다.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241쪽)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전제 하에 아우슈비츠는, 神이라곤, 혹은 신의 뜻이라고는 부재했던 그 현장은 이제 역사와 인간들 속에서 레테의 연가가 되어버렸는가? 신의 섭리가 있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던 증오의 기억은 모두 사라져버렸으며, 그만큼 모두가 행복한가? 레비. 그의 글은 증오와 배제와 차별이, 탐욕과 야만과 부패가 여전한 오늘날의 세상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파렴치했던 시대는 종언을 고했는가? 인간이, 바닥으로 떨어졌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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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낭독의 발견'이후로 양동근의 그 특별함은 더 진한 풍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한 마디로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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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두통이 심하다.

슬프게도, 처방전은 없을 것 같다.

이건 아픈 게 아니다, 슬픈거다.

미치도록 복잡한 내 머릿 속이 슬퍼서 괴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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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 무엇을 이야기 하시나요?

사랑할 때 무엇을 감추시죠?

본래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감추는 게 없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각자의 은밀한 부분들을 적당히 숨기고 만나지요. 표리부동인가요?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요. 정말 너무나도 말하기가 어려워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란 고작해야 피상적인 것들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자의 비밀은 감춘 채로 만나니까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닙니다. 마음을 이야기하기란 이렇게 어려운가 봅니다.

영화는 그 미묘한 거리를 잘 그려내주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형편과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그들에게 '두 번째' 사랑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남은 자꾸만 어긋납니다. 서로에게 빠져들수록 상대방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까 두려운 것이지요. 혜란(김지수)은 그렇게 도망칩니다. 그 균열의 상태에서 인구(한석규)에게 갑작스런 슬픔이 닥쳐옵니다. 어머니의 죽음. 그것도 못난(?) 형 때문이니 오죽 가슴이 아팠을까요?......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은 영화에서 큰 터닝 포인트가 됩니다. 모친상을 치른 후 인구와 혜란은 늦은 밤 동대문 야구장 관중석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인구의 한 마디가 혜란의 마음을 저의 마음도 찌릅니다. "참 쉽지가 않죠?......."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하여 사랑을 싹 틔우고 열매를 만들어내기까지의 그 과정 모두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영화는 그 쉽지 않음, 거리라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적당한 비밀, 적당한 사생활, 적당한 거짓이 모두 거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거리'없는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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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사랑. 성공과 꿈의 파열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그걸 잘 보여주는)그런 영화다.

우연히 찾아 온 기회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여인에게 정작 꿈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는 최고의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그녀의 출세를 보장한 곳은 세계 최고의 패션지 '런웨이'였다. 물론 그곳에서의 삶이라는 것 또한 기쁨과 희열이 넘치는 것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완전한 행복을 줄 수 없었다. 게다가 그곳(런웨이)에서의 일과 성공의 뒤란에는 사랑이 내동댕이쳐져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새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일과 사랑, 꿈과 성공 그 모든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같은 몸으로 섞여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전혀 별개의 것들을 서로 요구한다. 그 요구의 중심에서 누구나 고민하고, 때로는 좌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용기 있는 선택이란 일보다는 사랑을, 세속적인 성공보다는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해나가는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다만 현실의 이유가 그것들을 훼방하는 걸림돌로 기능할 뿐이다. 일인가, 사랑인가? 성공인가, 꿈인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는 사랑과 꿈이 선택된다. 정말이지 온당한 선택임에 틀림없다. 주인공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쇠귀 선생께서는 선택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용기란 선택이며, 선택이란, 어느 하나를 골라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를 버리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버리라! 그리하면 진정한 행복을 찾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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