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심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선택이야 자기 자신의 것이지만, 사람 사이는 그런게 아니다.

때로는 정직한 세월 앞에서 뿌리깊은 나무로 서있을 일이다.

최근들어 조심스럽게 연애에 관한 조언을 구하는 요청이 잦아졌다.

대개가 소위 양다리이다. 그런 경우 나는 거의 함구하는 쪽을 택한다.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사랑을 키우는 일은,

존재의 '전부'로만 가능한 일일텐데,

다른 이가 들어올 틈이 있었다니 말문이 막힌다.

균열.

그것은 '예의없는 것들'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예의없는 짓'일 뿐이다.

함구하다가 나는 말한다.

"헤어져, 그럼. 널 사랑하는 그 사람이 참 불행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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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고 내 방에 햇빛을 쪼인다

작은 공간 내 마음도 볕들날 있겠지

털오라기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내며

기억을 탈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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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될 게 없다

마음에 잔인해지기.

난 최고의 사랑을 꿈꾸고,

이제 최악의 기억을 버린다

안될리가 없다

모든 연민을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물론 추억도 함께

잔인했던 기억만 잘근잘근 씹겠다

확실히, 확실히,

지쳤다. 불쌍하다 마냥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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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간 화천에 머물며 옛일을 추억해 보았다.

사람이며, 나무며, 걸었던 길이며, 남았던 흔적이며 하는 것들을

되뇌어보았다. 어찌도 그리 애잔한 것들 뿐인지......

마음 한 켠 서럽고, 바람은 분다.

내일이면 이 곳을 난 떠나고, 홀로운 내 거처로 향한다.

조금 덜 서럽길, 조금 덜 쓸쓸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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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_이사야 6장 11-13절

_하느님의 심판이 불같이 임한다. 사람으로서는 그 분의 진노를 누를 길이 없다. 그저 시키는대로 할 뿐이다. 그런데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하느님의 진노를 전하는 메신저의 소임을 누가, 어찌 감당할꼬. 그런데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던 이사야가 나선다. 입에 댄 숯으로 인해 모든 악이 제하여졌다는 하느님을 선포를 듣고 나서이다. 참으로 대장부다운 기개요, 믿음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러한 이사야의 물음엔 인간의 연민이 묻어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니이까......" 이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은 에누리가 없다. 심판 뿐이다. 끝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끝장을 보고 난 뒤에야 이사야는 소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만약 여기에서 성서의 기록이 그쳤다면 야속한 하느님이다. 당췌 여백이라곤 하나도 없는 무정(無情)한 여호와일 뿐이다. 그런데 성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지를 남긴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여백이요, 여호와의 품이다. 그의 진노로 세상의 모든 것이 진멸할지라도 그루터기는 남는다니.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로 남는다니.

 우리의 시대에도 심판이 온다면 나는 베인 밤나무일까, 상수리나무일까? 아니면, 혹시라도 남은 그루터기일까......? 할수만 있다면, 아니 할 수 있다는 노력조차도 내려놓고 그저 하느님의 심판을 기다릴 밖에. 나에게 주어진 몫을 감당하며, 우직하게, 어리석게 살아갈 밖에는. 거룩한 씨로서 이 땅의 그루터기로 남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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