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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명상
고진하 지음 / KMC(기독교대한감리회) / 2007년 4월
평점 :
아침 등굣길에 차창 밖을 바라보니 거리의 풍경이 여간 복잡하고, 분주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한 명도 빠짐없이 달리기에 가까운 걸음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고, 비오는 거리는 그네들의 발걸음에 질퍽거리고 있었습니다. 가뭇없이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의 영혼의 무게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였습니다. 얼마나 가볍기에 저토록 빠르게들 떠나시는가? 사실 이러한 생각을 해본 것이 처음은 아니라서 저는 또 속수무책으로 우울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저토록 날래게 움직거리는 것은 기실 그 영혼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마음 탓인 듯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저 무거운 바위를, 그야말로- 오로지 ‘살기 위해’ 밀어 올려야만 했던 시지포스가 중첩되어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비루함은, 인간의 비루함은 거리 도처에 잔상처럼 남아서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분주하게 살아가는 ‘날랜 인생’들에게 일상의 틈은, 마음의 여백은, 창조의 포란(抱卵)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비움의 시간, 즉 참된 쉼이 없고서는 일쑤 팍팍한 인생이 되고 말지요. 그래서 지친 영혼들은 제 삶이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안도현)일 때, 어디론가 떠나서 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작은 바람도 현실의 분주 속에서 유야무야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렇게 세상의 불행한 인생들은 틈을 잊은 채 살고 있습니다.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마음이 산란할 때, 제 마음 속에 일체의 여백이 존재할만한 틈이란 없습니다. 그저 일상의 순간들을 ‘닥치는 대로’ 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그러던 중에 <나무명상>이라는 책이 문득 눈에 띄어 손에 들었습니다.
이 책은 시인 고진하 목사가 숲을 거닐며, 나무와 속삭이며 마음을 주고받았던 교감의 기록입니다. 그는 숲을 이루고 있는 그 수많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고요 속에 찾아오는 참된 안식을 누립니다. ‘모든 피조물은 안식을 주는 것에 끌린다’는 중세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진언(眞言)처럼 그는 나무에 끌려, 더불어 교감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나뭇잎마다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지문과 말씀에 오롯이 마주하며, 묵묵히 적어내려 간 이 명상록에는 그가 체험한 안식의 산문들이 정직하게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 산문들이 증언하는 것은 속도와 효율을 정점에 두는 시대정신에 있지 않고, 나무의 너른 품에 기대어 쉬는, ‘시간보다 더 느슨한’ 여유와 관조였습니다.
시인은 “나무와 생명의 교감과 신비를 나누는 마음은 곧 신성한 공간으로 변합니다. 이런 신성한 공간이 생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158쪽)라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나무는 단순한 미물(微物)에 그치지 않고 함께 더부는 벗이며, 동시에 교사(敎師)이기도 합니다. 시인에게 저 묵묵하고, 고요한 나무는 마치 ‘나+無’, 즉 ‘나’가 없는, 에고가 사라진, 완전한 비움에 이른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나무는 사람인 나보다 한참은 더 높고, 숭고하게 느껴지게 되지요. 그래서 나무는 마치 하나님께 잇댄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 앞에서 시인은 하릴없이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이 나무 같은 분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습니다.”(181쪽)라는 고백처럼.
온통 바쁘고 분주한 세상.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누는 말들이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소통의 도구로써 작용하지 못할 때, 그 숱한 말들은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신령과 진정을 담아야 할 기도의 언어조차 내적인 절제와 정화를 거치지 않은 채 저잣거리의 소음처럼 드릴 때, 그런 말들 역시 우리의 영혼을 메마르게 할 뿐입니다.”(81쪽) 그래서 소설가 이청준 선생은 ‘말은 없고, 떠도는 말들만 가득하다’고 하였나 봅니다.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한 번 더 곱씹고 되 뇌일 시간도 없이 내뱉고 마는 것이 인간의 말이기 때문이지요. 정말이지 갈수록 소통은 없고, 불통만 가득한 세상처럼 여겨집니다. 때문에 메마른 영혼의 갈증은 억수 같은 빗방울에도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단할 때, 자신의 허상(虛像)같은 현실을 내려놓고, 나무와 정직하게 마주하기 시작할 때, 그 고요와 침묵의 시간들은 우리의 영혼을 진정한 ‘안식’의 성소(聖所)로 인도할 것입니다.
무거운 짐진 자들이여, 지금 당장 나무의 품에 기대어 생명의 숨결을 나누고, 참된 평안과 안식의 거처로 들어가십시오. 그곳에서 당신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보화들이 빛을 발하고, 생수의 강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마태복음11장 28절과 요한복음 7장 38절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