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올 때

 

그리운 손길은

가랑비같이 다가오리

흐드러지게 장미가 필 땐

시드는 걸 생각지 않고

 

술 마실 때

취해 쓰러지는 걸 염려치 않고

사랑이 올 때

떠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리

 

봄바람이 온몸 부풀려갈 때

세월 가는 걸 아파하지 않으리

오늘같이 젊은 날, 더 이상 없으리

 

아무런 기대 없이 맞이하고

아무런 기약 없이 헤어져도

봉숭아 꽃물처럼 기뻐

서로가 서로를 물들여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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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같이는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 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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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풍경 - 송선배에게

 

 

깊은 밤, 가로등 불빛 취해

비틀대는 육교 아래, 한폭의 투명 수채화,

풍경이 된 사람이 있다

 

청계천 재건하면 철거민은 어디 사냐고

교회 옆에는 빈민촌이 왜 그리 많냐고

툴툴대며 등진 뒷모습, 낯익은 풍경으로

눈에 선(善)하다

 

'삶과 사상(思想)의 통일(統一)'

 

아직도 인간 그리워 서울 밤을 떠도는

'서울의 예수' 찾아, 함께 인간의 잔 기울이며

그렇게,

풍경이 된 사람이 있다

낯익은 풍경으로 남은 사람이 있다

 


* '서울의 예수' - 정호승 시인의 '서울의 예수'에 등장, 인용.

* '삶과 사상(思想)의 통일(統一)' - 송효진 미니홈피 대문 제목, 인용

...............................

몇 해 전, 시詩쓰기 수련 중이던 후배 녀석이 써준 시를, 빛바랜 싸이를 정리하다 발견했다. 지금 봐서는 참 웃음도 나오고 하는데, 그 때는 후배 녀석이 꽤 진지하게 시를 써주겠다고 약조하였드랬다. 그리고 며칠 후에 내 싸이에 올려준 것이 이 시이다. 당시를 생각하니 짐짓 우울해지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여 베껴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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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여름 오면 겨울 잊고 가을 오면 여름 잊듯

그렇게 살라 한다

정녕 이토록 잊을 수 없는데

씨앗 들면 꽃 지던 일 생각지 아니하듯

살면서 조금씩 잊는 것이라 한다

여름 오면 기다리던 꽃 꼭 다시 핀다는 믿음을

구름은 자꾸 손 내저으며 그만두라 한다

산다는 것은 조금씩 잊는 것이라 한다

하루 한낮 개울가 돌처럼 부대끼며 돌아오는

흔들리는 망초꽃 내 앞을 막아서며

잊었다 흔들리다 그렇게 살라 한다

흔들리다 잊었다 그렇게 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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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항으로 가는 길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윈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짓밥 먹다가 석삼 년 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이 길은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줘야 아나?
걱정하지 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

 

지난해 늦여름, 안도현의 이 시를 쫓아 모항을 향해 떠났었다. 그 아름답고, 작은 모항이 기억날 때면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고 싶다.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 그리고 그곳에서 '던져 버릴 수 없는 희망'이 있음을 느끼고 싶다. 비록 지금 그곳에서 함께했던 이는 없다고 할지라도...그렇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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