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혼



겨울 달빛에

앙상히 드러난 마른 가지들의

섬뜩한 빛깔들이

그림자 되어

가슴에 새겨진다.


활활 불타오르는 불빛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산산이 아스러지는 꿈, 꿔보지만

서린 바람에 분질러지지 못하고

견디어간다.


봄날에 젖은 기억들 되살아나면

썩어지는 꿈, 꿔볼 터인데

뻣뻣이 굳은 그 자태

휘어지지 못하고서 그대로

칼날 같은 바람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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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기도



웅크려 있는 나에게

소리 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그토록 나를 사랑한다는

소리 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하지만 소리는 소리일 뿐이라오.

그런 소리 소리들일랑 하려거든

웅크린 내를 먼저

당신의 뜨거운 가슴 맞대어

꼬옥 안아줘 보시오.

웅크려 있는 내를 어느 누가

감히 품을 수 있단 말이오?

그래도 그 누군가 뜨거운 가슴으로

내 웅크린 가슴 맞대어

꼬옥 품을 수 있다면

나, 그 품에서 고이 잠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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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산보



화창한 어느 봄날의 토요일 오전 11시

거리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재잘재잘거리고 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선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Then shall I start?

But, What am I supposed to do?

I'm not sure what the hell I'm doing here.

I don't belong here.

이렇게 푸르른 날이면 교복을 벗어 던지고선

담장 너머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산책을 나온 세련된 미시족 부인의 강아지가

자꾸만 귀찮게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

부인이 불러도 이 녀석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편으로 가는 내 뒤만 졸졸 따른다.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세련된 미시족 부인이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강아지가

부인에게 붙잡혀 어딘가로 끌려 가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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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의 이유



이해했다고 말했던 나의 모든 기억들을 부셔버린다

너를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여진 간격으로

마음껏 나래를 펴서 너를 자르고 붙이고 꿰매어 이제

너는 새롭게 태어난 의미들-너에게 결코 고백할 순 없어

너는 오직 나만의 부풀려진 모호한 꿈덩어리처럼 내 것

영원히 살아서 지울 수 없는 찰나의 형이상학적

이미지, 아우라, 신비, 경이로운 상심

헝클어진 토사물처럼 난잡하여도 아름다웠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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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마음



진창에서만 피어나는

천한 태생의 꽃이라고

깊고 어두운 수렁 안에서만

절 찾지 마세요.


당신 곁에 가까이 피어나

가닿을 순 없어도

화사한 꽃밭에 어여삐 피어나

고이 드리울 순 없어도

여기저기 모르게 피어나

당신 발치에 부딪치는

옅은 파문처럼

고요히 물결치고 싶어요.

바람에 흔들려 흩날리는 벚꽃처럼

발그레 부끄러운 당신 머리 위로

황홀히 화환을 씌울 순 없지만

당신 머리맡을 밝히는

은은한 촛불처럼

고요히 흔들리고 싶어요.


진창에서만 피어나는

천한 태생의 꽃이라고

깊고 어두운 수렁 안에서만

절 찾지 마세요.

당신 가슴 안에 먼저

놓여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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