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변신 그리고 절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창백한 소녀들이 떼 지어

뭉크의 화실로 들어서면

교교한 달빛에 여울지며

시뻘겋게 달떠 올라

얼굴 없는 사내들과

춤추기 시작하였다

밤새 다리와 다리 사이가

오가고 저가고

다음날이면 반드시

소녀는 어데 하나 보이지 않고

농염한 나신을 드러낸 여체 하나가

얼굴 없는 사내의

도려낸 심장을 가지고선

화실 안을 붉게 색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매장된 소녀의 옷자락을

기억하던 어느 사내는

온 세상이 헝클어지도록 길길이

비명이 되지 못하는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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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도시의 잿빛 하늘을 닮은 비둘기들이

간밤에 누군가 뜨겁게 게워낸 자리 위로

늑탈같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더러는 잘린 다리를 절룩거리며

더러는 고양이같이 부풀은 몸뚱이를 뒤뚱거리며

날카로운 부리를 끊임없이 바닥에 쪼아대듯

서로의 가슴을 부비며, 쥐어짜며, 입 맞추며

수없이 차들이 지나치는 고가차도 아래

철근 콘크리트 사이를 비집고

둥지를 틀기 시작한다.

그들의 터질 듯 부둥켜 엉킨 가슴 아래

얼마나 많은 새끼들이 사산되어져 갔을까?

전쟁을 치르듯 밀려오고 밀려가는 경적소리에

새끼들은 지들의 어미애비의 소리인 줄 알고

거리로 나서고 또, 누군가 간밤에 차도 위로

삼킬 수 없던 그들의 뜨거운 욕정을 토해내었다.

알록달록한 쪽빛 헤어브리지를 들인 소녀가

술에 취해 그 사이를 비틀거리며 지나가고

비둘기 새끼들은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 소녀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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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짜기 마을로 띄우는 첫 번째 편지

 

 

종로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술을 마셨습니다.

거리엔 눈이 내리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눈을 맞으며 바삐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사이를 비집고 돌아 돌아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아무도 오지 않을

어느 좁고 오래된 골목길로 들어섰습니다.

문득,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그냥 좁고 옹색한 골목길일 뿐이었는데

무언가 막연히 그리웠고 그 그리움의 이유를

내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내 생애 끝끝내 그 이유를

알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단지 눈이 내렸고, 좁은 골목길이었고

한 숨 가득히 담배를 들이마신 이유로

순간 감상적이었던 것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종종 지나치는 거리에서

야트막한 담벼락을 마주 두고서

아무 까닭도 없이 전 당신을 떠올릴 것이며

그 그리움의 대상인 당신은 아무 실체도 없으며

아무 형태도 없는, 잡을 수 없는 그림자이거나

그림자가 없는 영혼을 팔아버린 육체뿐이라는

그 사실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 이유로 어느 추운 겨울 날

거리에서 토악질하며 나뒹굴고 내지르던

당신을 향한 막연한 나의 청춘과 고통은

진실이었으며 추호의 거짓도 없었다고

그렇게 되새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없는 바로 그 자리에서, 존재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로, 이렇게 종종 저는 당신을

꿈꾸는 저의 날들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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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눗방울놀이



마른 눈 섧게 다문다문 내리는 날

아빠 손 꼬옥 잡고 걷던

어여쁜 꼬마 아가씨

갑자기 멈춰서 호호 바람을 분다.

바람의 무게를 아는 지

엷은 눈송이 두-둥실 솜털처럼

하늘 위로 날아오르다

천천히 다시 나려져 지면 위로

안착한다.

고 모양이 하도 귀염성스러워

마치 동네 꼬마 녀석들

빗물방울놀이 하는 것만 같아

눈송이 속에 그린 작은 세상

무지개 빛깔로 반짝이는 것만 같다.

그런데 어여쁜 꼬마 아가씨

그 조그맣고 어여쁜 입술로 너무 많이

바람을 불진 마세요!

그토록 영롱한 당신의 예쁜 꿈들이

그만 지면에 닿기도 전에

사르르 녹아내릴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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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오는 날에 일기



창밖엔 비가 내리고

너저분한 고물상에 종이들은

젖어 무게를 더해가고

고장 난 레코드판에서

덜컥거리며 나올 법한

러시아 노래를 듣다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에

담배 한 개비를 물고서

알 수 없는 상념에 빠져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다시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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