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표백 - 상징이 되지 못한 코드 속 담론에 관해
근래 은행에서 청원경찰로 일하기 시작한 나는 아침에 지점을 오픈하기 전 30분, 점심시간에 10~20분, 그리고 4시에 지점 문을 닫고서 20분 정도의 자투리 시간을 책 읽는 시간에 할애한다. 보통 짧은 단편을 읽을 경우엔 하루면 족히 읽고도 시간이 남지만, 장편일 경우엔 당연히 시간이 며칠 걸린다. 예전에 장편을 읽을 경우, 흐름이 끊기는 게 싫어서 한 자리에서 서너 시간 읽고, 그 다음날 또 그렇게 서너 시간 읽으며 흐름을 이어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런데 내 호흡이 짧아져서인지, 아니면 요즈음 글들 호흡이 그다지 길지 않아서인지, 이런 편린의 흐름 속에서 장편을 읽는데도 별 어려움이 없어졌다. 물론, 더 큰 이유는 근래 읽는 책들이 장편이라고 하더라도 관념적인 글들이 아닌, 관념의 편린들을 다룬 글들이거나, 그저 이야기 중심의 글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당분간 이런 글들이 소설계의 주류를 차지하리라 본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 더 이상 적을 두고서 싸울 거대한 담론과 이상이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표백’의 경우도 이런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지만, 실상은 내가 말한 첫 번째 부류의 소설로 (관념의 편린을 다룬) 분류해야할 것이다. 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제될 하등의 이유는 없다. 어차피 소설이란 것이 관념을 다루는 영역도 아니고, 그러하기에 굳이 관념적일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신이 없다면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갖고서 치열하게 관념적 소설을 써간 도스토예프스키와 달리, 왜 우리 세대는 ‘신이 이미 없는 완벽한 세상에서 무엇이 가능한 저항일까?’라는 거대한 질문을 갖고도 관념의 편린을 다룬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 이 시대의 십자가이거나 순교로 비견될 수 있는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왜 이 시대를 상징하는 십자가나 순교가 아닌 젊은 세대의 비루한 절망과 낙담을 되뇌게 되는 것일까?
이 소설이 흥미를 끄는 요소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 캐릭터가 상징하는 코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다소 중의적인 단어를 두 번 사용하였다. 상징과 코드, 이 단어들을 사실 이 글에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아니면 이 시대에 어떻게 구분해서 표현해야할지, 나는 정확하게 그 방법을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상징이라는 것이 상징의 원대상과 아무런 비교와 대조지점 없더라도 하나의 표상이 되어, 그 상징을 해석하는 이들에게 상징의 정확한 의미가 아닌 상징의 이미지를 재창출하게 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이 글의 캐릭터를 상징으로 해석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코드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이 또한 애매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원래, 코드란 의미는 정보를 나타내기 위한 기호체계를 뜻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용어가 문학적으로 차용되면서 의미의 변질과정이 이루어졌다. 어떤 때는 이야기 속에 감춰진 은유나 비유를 의미할 때 사용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이야기 속에 숨겨진 상징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마치 코드라는 용어를 쓰면, 그 글에 무언가 감춰진 것이 존재하고, 또 그 감춰진 것에 그 글이 원래 의미하는 바 그 이상의 무엇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한 마디로 용어 자체가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채 무차별적으로 사용되어져 온 것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문학에서 코드라 하면 상징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 듯싶다. 다만, 조금 더 현대적 의미가 덧붙여졌다고 할까? 그렇다면 그 현대적인 의미란 게 과연 무엇일까? 상징인데 상징이 되지 못하는, 아니면 상징이고 싶은데 이미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상징할 수 있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냥 코드라 지칭해버린, 그런 것이 현대적인 의미일까? 갑자기 이 글의 흥미 요소인 세 유형의 캐릭터를 이야기하다, 내가 이런 상징과 코드에 대해 의문을 달고, 또 그 정의에 대해 의문을 다는 것은, 이 글이 그러한 연장선상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상징을 담아내고 싶은 코드를 사용했다고 하면 좋을까? 아니면, 상징을 갈망하는 코드라고 표현해야 할까? 글쎄, 잘 모르겠다. 내게도 상징과 코드는 너무 어려운 용어니까. 다만, 이러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 글의 축을 이루는 세 인물이 이와 유사한 느낌을 내게 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이 글의 가장 큰 축은 자살이라는 반항으로 상징되는 세연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의 반으로써 적그리스도로 표현되는 주인공 화자가 두 번째 축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소 아이러니한 사실은 자살이라는 반항으로 표상되는 세연이 마치 그리스도와 그를 따랐던 순교자처럼 동격화 되어 정(正)이 되고, 그를 반대하여 자살을 반박하는 주인공이 반(反)으로써 서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축은 세연의 숭배자이자, 주인공의 여자 친구였던 추이다. 그런데 이 추라는 인물은 정반합 이론에 근거한 정과 반의 합(合)이 아니라, 글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잉여? 혹은 나머지?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쓴 작가와 거의 연배가 비슷하여 추라는 인물이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에서 나온 여자 캐릭터와 비슷하거나, 혹은 우리 세대 때 자주 보던 여자 캐릭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글속에서 추는 분명 정인 세연과 반인 주인공의 연결고리로써 작용하고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동시에 세연에게도 주인공에게도 버려지는 잉여와 같은 존재로써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중요한 축은 결국, 세연과 주인공이 된다. 이렇게 단정 지을 때 세연과 주인공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려다, 결국 상징이 되지 못하고 하나의 코드로 전락해버린 것일까? 아니면 어떤 상징적 코드로 이 글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 속에서 세연이 상징하는 바는 사실 간단하다. 신이라는 거대한 담론이 사라진 세상, 그래서 어떤 이는 신의 존재유무를 떠나 당위성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그 이야기의 전제 자체가 신이 없다는 가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은 우리 문명 속에서 도태되어져 갔다. 물론, 우리 시대에 기독교는 그 어느 시대보다 인구과밀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아이러니로 존재하고 있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신은 그러한 신이 아니다. 인간의 규칙과 도덕성의 절대기준으로서 작용하는 신을 의미한다. 그러한 신은 관념 속 과정 속에서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그동안 신이 제한해 놓은 규범을 벗어나 자연스럽게 진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는 마치 필연적 과정처럼 산업화로 이어졌고, 오늘날의 현대화된 사회를 이룩해놓았다. 그런데 이러한 산업화에서 현대화로 이루어진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아이러니에 봉착하게 된다. 신이란 규범을 대체한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우리를 규정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소위 민주주위와 선진화 그리고 세계화 등등, 이 모든 구호들이 자연스럽게 오늘날 우리의 위치를 규정짓고 있다. 때문에 여기엔 더 이상 신에 관한 어떤 의문도, 존재에 관한 어떤 의문도 달 수 없게 되었다. 오직 시스템 그 자체와 그 시스템 하에 존재하는 우리라는 시스템이 함께할 따름이다. 하지만 어떻게 인간이 어떤 의문도 없이 시스템화 되는데 동의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우리는 그와 역행하는 질문들로 우리 존재 당위성을 증명하려 했다. 소위 탈구조주의라 불리는 우리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런 맥락에서 광기와 성, 정신분석 등등으로 역사를 해석하면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 구조주의에 대항했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이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인 세연은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질문을 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전제는 세연과 같은 세대는 그와 같은 질문마저도 먼저 할 권리를 빼앗겼다는 점이다. 즉, 더 이상 이 세계의 시스템 그 자체에 역행할 어떤 질문도 반항도 남아있지 않은 세대를 표상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마지막 반항의 발로로 왜 하필 하고 많은 선택지 가운데 진부하기 짝이 없는 자살이란 말인가?
사실 이 글에서 이 시대에 반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고전적이고 진부한 자살을 선택했다는 점은 어떤 의미에서 이 시대에 더 이상 어떤 특별한 반항과 절규의 방법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할 것이다. 즉, 그만큼 우리 세대가 이 시대의 시스템에서 가져올 수 있는 어떤 혁명도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케 하는 대목이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글속의 세연의 자살이라는 반항이 가진 상징은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어떤 절규의 메아리로 우리 가슴을 미어지게 할지언정 소리 자체가 되어 어떤 울림이 되지 못하는 현상과 비슷하다. 즉, 벙어리 냉가슴의 모양새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많이 차용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비교해보면, 이는 더 분명해진다. 비록,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신’이라 상징될 수 있는 친부교살을 행했지만, 이는 ‘신’이라고 상징되는 상징 그 자체와 더불어 아버지라는 혈육의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살인을 의미한다. 즉, 소설 속에서 이반은 친부교살을 통해 모든 법규와 나아가 근본적인 인간관계와의 단절까지 감행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선 자살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할 때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즉, 인간관계의 끈을 놓지 못한 상태에서 자살이라는 반항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 매우 일방적인 전제를 지닌 실험이다. 마치 후기 구조주의 지식인들이 일방적으로 성, 광기, 정신분석 등으로만 구조주의에 맞서려고 했던 것처럼 착각하는 본새이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 해석이 파격적이라는 측면에서 대중에게 보다 어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통해 구조주의에 역행하는 시도를 해왔다. 그래서 근래 다양성과 소통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을 빼놓고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 제대로 논박하지 못하고서) 자살을 반항의 수단으로 주장하는 것은 정해진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도록 실험의 조건을 이미 한정시켜 놓고서 시도하는 실험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다. 물론, 이 글이 정말로 그러한 실험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그저 우리 세대의 자화상을 그려내려고 했으며, 그러한 자화상에 필요한 부수적 도구들로 이 시대의 관념들을 다소간 차용한 것이라는 사실쯤은 나도 잘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의 세연의 반으로써 작용하고 있는 주인공 화자가 그 부분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선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추의 캐릭터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은 부분이 이 소설 속 가장 큰 결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관계의존성 혹은 관계중독성으로 표현되고 있는 추가 인간관계에 대해,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사랑에 대해 조금 더 우리 독자들에게 제대로 된 설득력을 갖추었다면, 굳이 주인공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자살이라는 반항이 갖는 시대적 메시지와 동시에 그에 반하는 우리 시대에 남은 소소하지만 거대한 담론에 대해서도 다시금 떠올려볼 수 있는 많은 여지를 주었으리라 생각해본다. 물론, 지금 이 자체로도 여러 가지를 떠올려볼 수 있기는 했지만, 다시금 스스로 질문해본다. 이 시대에 정말로 반항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건지, 정말로 더 이상 우리에게 남겨진 담론과 숙제는 없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