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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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그 외롭고 혹독한 자기만의 세계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 이야기를 한다.’

 

 너무나도 유명한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의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읽고, 그녀의 생애에 관심을 가졌을까? 글쎄, 내 경우만 봐도 댈러웨이 부인을 보기까지 관심도 없었다. 박인환의 시는 그저 겉멋만 부린 그런 시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만의 방’, ‘3기니’, 이렇게 두 작품을 더 보았다. 사실, ‘자기만의 방‘3기니는 소설이라 말할 수 없다. 그저 여성과 문학에 관한 주제와 남성과 전쟁이라는 주제를 다룬 수필일 뿐이다. 그런데 무엇이 내 가슴에 울림을 준 것일까? 이 진실을 알기 위해 우선 페미니즘의 고전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2의 성을 읽어보았다. ‘2의 성의 경우 시몬 드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후 세 번째로 접하게 된 작품이다. 일단, 두 작가의 색깔은 분명히 다르다. 버지니아 울프의 경우 깊은 생각들이 감성과 함께 어우러져 문학적인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반대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철학적 사색이 문학과 어우러져 있다. 내 개인적인 취향은 분명히 버지니아 울프이다. 그럼에도 시몬 드 보부아르의 2의 성은 생각보다 내게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첫째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녀의 논리대로 나는 여성과 완전히 타자인 남성이다. 그러하기에 여성을 이해할 수 없고, 모르는 여성을 심미적 대상으로 삼거나 혹은 신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나는 그녀가 비판한 브르통이라든가, ‘스탕달처럼 여자를 우상화하여 헌신하는 어머니상으로 여겼던 적이 많았다. 정작, 내 자신은 그 헌신의 비호 아래 아주 당연히 방황을 하고, 떠돌아다니는 것이 권리라도 되는 양,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실제로 페미니즘의 큰 관심도 없다. 그랬기 때문일까? 다시 자기만의 방을 펼쳤을 때, 전과 다른 감정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던 건.

 

 여기서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자기만의 방은 절대 페미니즘 서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이 수필은 주제에 대해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다만, 화자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겪고 있는 온갖 제한들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명상을 하고 싶지만, 대학의 어느 구역은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자리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이야기들에 대해 풀어갔을 뿐이다. 오랫동안 여자들은 교육받을 권리도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여자들이 글을 쓴다면 당시의 사람들이 뭐라고 하였을까? 쓸데없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집안 일이나 하라며 분명 타박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명의 여류 시인들은 사랑을 노래하였고, 모든 어머니들은 아이에게 자장가를 읊어주면서 끊임없는 이야기들을 전승시켜 왔다. 그리고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에밀리 브론테가 등장했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여성 고유의 문학을 꽃 피우기 시작한 작가들이다. 물론, 그 이전에 에이프라 벤이라는 여성이 처음으로 여성 작가로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는 하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여자들은 글로써 돈을 번 적도 없고, 벌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 때문일까? 버지니아 울프는 간명하게 이야기한다. 여자들은 매해 500파운드(우리나라 돈으로 약 3000만 원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정도 되는 돈을 벌어본 적도 없고, 벌려고 생각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는 또 다른 한 가지를 강조한다. ‘자기만의 방이다. 물론, 제인 오스틴의 경우 조카의 증언을 토대로 추측해보건데, 자기만의 방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공동 거실에서 오가는 손님들과 가족, 하인들의 눈치를 보며 썼다고 한다. 그럼에도 오만과 편견이라는 작품이 나왔고, 버지니아 울프의 기준에서 에밀리 브론테와 달리 훨씬 더 자신에게 솔직하고, 정직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시대는 이제 버지니아 울프의 현존하는 시대, 그녀는 동시대의 작가 마리 카마이클로 넘어간다. 그녀의 소설이 제인 오스틴보다 훌륭한가? 훌륭하지 않은가? 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현존하는 시대의 마리는 이전과 달리 여성과 여성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이전 시대의 여자는 꼭 남자를 통해 이야기 되거나 혹은 둘의 관계 속에서만 조명되었는데, 이제 시대가 바뀌고, 주제가 더 넓어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더 다양한 층위의 주제들과 자유들이 주어져 있다. 백년 전 버지니아 울프가 예견한 것처럼. 여하튼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에게 마지막으로 매우 혹독하게 이야기한다. 자신들이 연간 500파운드를 벌지 못하고, 자신만의 방을 갖지 못한다면, 아니, 그럴 용기조차 없다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말라고. 당신들은 당신들 생각보다 훨씬 무지하며, 비겁한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왜냐하면 리얼리티란 그런 아주 사소한 환경과 여건을 갖추기 위한 노력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면, 추구할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라고, 아주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가 계산했을 때는 연간 500파운드가 1500만원에서 2000만원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인터넷을 살펴보니 연간 3000만원 정도라고 한다. 내가 벌고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조금 놀라긴 했다. 물론, 문제의 핵심은 돈이 얼마인가가 아니고,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고 있는가라고 봐야 할 것이다. 글 속에서도 이야기하듯이 시인 중에 가난한 시인들은 없었다. 거의 모든 시인들이, 소설가들이 좋은 부모 아래서 어느 정도의 경제력 뒷받침을 배경으로 시를 썼고, 그 시를 통해 위대한 시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현실적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이야기의 핵심일 것이다. 두 번째, 자기만의 방은 실제적인 자신의 방에 관한 이야기와 마음속의 자기 자신의 방 두 가지를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방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도, 그 속의 의미적으로도. 이런 이유였기 때문이었을까? 내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이 모든 좋아진 여건 속에서도 나의 방은 외따로이 떨어져 혼자서 빈방이 되어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무엇이 두려워서 그 방으로 그렇게 자주 가지 못하는 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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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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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 아프리카 부흥을 기원하며

 

 

 아프리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나이지리아? 축구를 잘하는 나라? 월드컵 때 녹색 옷을 입은 아프리카인들이 봉고를 치면서 열정적으로 응원을 하던 모습이 얼핏 기억난다. 그 외 아프리카에 대해서, 나이지리아에 대해서, 난 아는 바가 전무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책을 읽었고, 뜻밖에 흥미를 느껴 추천하게 되었다.

 

 첫째는, 식민지 문학이라는 특성 때문이었다. 솔직히 우리나라의 식민지 문학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문학이 뭐가 있을까? 꽤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상 거의 없었다. 이광수의 무정? 김유정의 봄봄? 염상섭의 삼대? 솔직히 이런 작품도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우화적으로 돌려치기를 했을 뿐, 식민지 시대를 잘 표현하고 있는지 개인적으론 잘 모르겠다. 차라리 절망으로 가득 찬 이상의 문학이나, 그 당시 윤동주, 김소월, 한용운, 백석 등의 시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친일로 유명했던 서정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또 무슨 연유일까?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를 제대로 표현한 식민지 문학이 존재했는지 개인적인 의구심을 가져본다. 이에 비교해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확실히 식민지 문학의 전형성을 갖추고 있다. 기존의 자신만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던 주인공들이 영국 국교회의 선교사들과 대치하면서, 갈등을 일으키고, 그 갈등이 주인공의 죽음으로까지 귀결되는 까닭이다. 물론, 여기에 어떤 사상적 담론을 치열하게 다룬 흔적은 없다. 아니 담론에 대한 어떤 논의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이 담담한 구조가 오히려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둘째는, 서두에서 밝힌 아프리카에 대한 내 무지에서 출발했다. 식민지 문학이든, 무엇이든 간에, 무언가 모르는 미지를 탐험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프리카 특유의 종교적 의식과, 속담의 향연, 그리고 각종 생활의 편린들이 이 글 속에는 가득하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갖고 본 부분은 종교적 의식과 속담의 내용들이었다. 종교적인 부분은 일본의 종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숲과 빽빽한 밀림으로 되어 있어, 정령에 관한 이야기 부분이 유독 강하기는 하지만, 그 외에 모든 사물을 대할 때 종교적으로 접근한다는 의식이 일본의 종교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담의 경우는 중국의 고사성어가 떠올랐다. 아프리카 특유의 생활과 밀접한 지혜를 담은 속담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 글은 일단 아프리카에 대해 생소한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과 그에 따른 기쁨을 주리라 생각한다. 동시에 식민지 소설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어떤 안타까운 마음을 품게도 만들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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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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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꾿빠이, 이상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며 안녕

 

 

 처음, 이 소설을 기성작으로 하자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기회에 이상을 다시 읽자, 이었다. 마침, 내 집에 이상 전집이 있기도 했고, 당연히 시집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당연함이 전혀 당연함이 아니었다. 일단, 시집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 전집도 읽어보니, 내가 아는 건 날개, 다른 소설은 말 그대로 난해함 그 자체였다. 첫 소설 지도의 암실부터 지주회시’, ‘동해’, ‘종생기,’ ‘환시기’, 거의 모든 소설이 어려운 번역서를 읽는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을 느꼈다. 그나마 봉별기가 조금 가슴이 아려서 소설 같은 느낌이었다. 이어서 시를 읽어보는데, , 정말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1아해 제2아해 제13아해를 떠나서 아예 우주 밖으로 치솟아 올라버린 이 시들을 어떻게 이해하는 게 맞는지. 솔직히, 개인적으로 시는 가슴으로 읽는다 생각했는데, 이 시들은 가슴으로 읽을 수가 없었다. 일단, 해석부터 어렵고, 해설서를 보면 더 산으로 가는 느낌이었다. 정말 이상을 포기해야 하나? 이상은 이해할 수 없는 미친놈인가? 이런 생각으로 결론을 맺으려 할 때, 이 책을 펴들었다. 일단, 끝까지 읽고서 든 단상적인 느낌을 몇 가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첫째, 이상은 정말 믿음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둘째, 이상은 지독한 에고이스트라는 점도 동의한다. 시든, 소설이든, 자기 얘기 말고는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김연수라는 작가에 대해 조금 놀라게 되었다. 그전에 한두 편 읽어본 적 있는 줄 알았는데,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딱 한 작품만 읽어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그 작품도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도 안 난다. 여하튼 지금 이 꾿빠이 이상작품만 보았을 때 내 개인적 평가로는 앞으로 당분간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중견작가로 손꼽아도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서론은 이쯤으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보려고 한다.

 

 일단, ‘데드마스크. 정말 단순한 구도이다. 어느 날 잡지 기사인 주인공이 서씨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이상의 데드마스크의 이야기에 홀려, 이상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는 이야기이다. 물론, 여기에 유부녀에 대한 사랑 이야기도 있고, 여기저기 철저한 이상에 관한 고증도 뒤섞여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이 삼부작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먼저 화두를 꺼내 놓는다는 점이다. 이상은 믿음인가, 하는 이상한 화두이지만. 솔직히 이상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화두라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머지 두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실마리가 주어진다. 두 번째 이야기 잃어버린 꽃은 첫 번째 데드마스크에 나온 서씨의 형 서혁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마지막 참조로서의 이상 텍스트를 쓴 피터 주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 소설의 화두는 인간 김해경그리고 시인 이상에 관한 질문이다. 여기에 평생 이상의 흉내를 내며 살아간 서혁민의 삶이 보태져 있다. 철저하게 이상을 흉내내며 살아온 서혁민이 진짜였을까? 아니면 이상이 없었더라면 자연스럽게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갔을 서혁민이 진짜였을까? 언제 이상은 이상이 되었고, 어느 순간 김해경이 되었을까? 다소 현학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상 작품보다 이상을 존재케 한 이상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재조명했다는 데 의의가 있어 보인다. 마지막 소설 는 말 그대로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이상이라는 난제 때문에 한 인간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려버린 이야기이다. 한국인의 부모 밑에서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 전까지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나라에 대해 이상오감도를 읽고 관심을 갖게 된 주인공, 피터 주는 한국으로 와 이상의 연구를 계속해나간다. 그의 주제는 사라져버린 오감도 15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논문 발표 날, 사라졌다던 이상의 오감도 16실화가 나타난다. 자기는 기껏 19311932년 사이의 소설들과 시를 비교해 오감도에 실렸을 만한 시들을 추렸는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을 떠나려는 찰나, 첫 번째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김연화에게서 연락이 온다. 자신에게 또 다른 버전의 오감도 16편인 실화가 있다고. 그리고 그의 삶을 철저하게 따라서 산 서혁민의 수기도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다. 일단, 한 번 논란이 일었던 데드마스크사건은 분명한 가짜로 밝혀진 일이다. 그리고 그 논거의 중심엔 그 자신이 낸 책 참조로서의 이상 텍스트에 주석으로 쓴 내용이다. 데드마스크가 북한에서 이미 사라졌다고 들었던 내용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그 자신도 그리고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도 전해 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학계에 새로운 오감도 16편의 버전을 발표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철저한 검증도 필요할 뿐 아니라, 아닐 경우 그 파장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여 철저한 검증을 한 후 학계에 발표를 한다. 그런데 이게 가짜라고 판명이 난다. 첫 문장 자체가 이상의 오감도에서 가장 빈도수가 높은 글자들을 그대로 조합한 문장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궁지에 몰렸다. 더 이상 한국에 발붙일 곳이 없다. 실제로 그의 부모는 한국인도 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타이완에 이민 온 한 여자였다. 어떤 이유로 그를 낳았는지 알 순 없지만, 책임을 질 수 없기에 입양을 시킨 것이다. 그동안 알아 온 모든 정체성이 흔들리며 그를 사지로 내몰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살아야 한다. 이상처럼 부러진 날개로 날아야 한다. 동시에 이별해야 한다. 이상이라는 작가와, 어쩌면 이상이 태어난 나라와. 꾿빠이 이상, 꾿빠이.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된 건 정말 어이없게도 이상이라는 필명의 의미였다. 이상이 그동안 나는 당연히 이상(理想)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李箱)이라니. 내 무지에 일단 감탄했다. 그리고 한 작가에 대해 이렇게까지 고증을 하면서, 이별 의식을 치러내는 작가의식에 또 다른 경외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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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백석 시집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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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집 오금덩이라는 곳을 중심으로

 

 

 ‘라는 한 단어에 가슴이 찌릿하게 저려온다. 맨 처음 소설 모임에 들어왔을 때 내가 무엄하게도 들이밀었던 한 단어는 시적인 무언가와 같은 소설이었다. 맨 처음 소설이 아닌 시로 시작한 까닭에,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 작품 영향으로 난 시적인 무언가와 같은 소설이 정말 쓰고 싶었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때부터 10년이 넘은 지금, 나는 시적인 무언가와 같은 소설을 과연 쓴 적이 있을까? 아니, 시라는 그 마음 자체도 이제는 잃어버려, 머릿속에 맴돌기만 할 뿐, 시 한 줄조차 제대로 못 쓰고 있지 않은가? 이런 때 백석의 시집을 읽으니, 가슴이 먹먹하고 울컥거렸다. 사실, 전체적으로 내 취향의 시집은 아니다. 너무 향토색이 짙고, 언어들도 옛말인 까닭에 쉽지 않은 시들이었다. 게다가 어떤 정취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시라는 건 공감하고 해석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다만, 시는 그저 한 단어, 한 단어 곱씹으면서 읽는 것이라고, 그렇게 한 문장을 읊는 것이라 배웠기에, 마음속으로 읊는 그 자체가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예전 시들의 어떤 시적 가치의 단초가 될만한 시를 살짝 보았기에 지금부터는 그 시를 중심으로 조금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오금덩이, 국어사전에 안 나온 이 단어는 과연 무슨 뜻일까? 사실, 거의 개인적 추측이지만 병이 있을 때 다섯 가지 음식을 금한다는 오금(五禁)에서 이 뜻이 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시적인 내용이 이러한 부분과 조금 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이유이다.

 

 어스름저녁 국수당 돌각담의 수무나무 가지에 녀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

 추어놓고 비난수를 하는 젊은 새악시들

 -잘 먹고 가라 서리서리 물러가라 네 소원 풀었으니 다시 침노 말아라

 

 캄캄한 저녁이 되기 전 성황당 돌무더기 앞에서 제사를 받지 못한 귀신들에게 젊은 처자들이 왜 비는 것일까? 다시 오지 말라고, 이제 잘 먹고 잘 살라고.

 

 벌개눞녁에서 바리깨를 뚜드리는 쇳소리가 나면

 누가 눈을 앓어서 부증이 나서 찰거마리를 부르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피성한 눈숡에 저린 팔다리에 거마리를 붙인다

 

 벌건 빛깔의 늪가에서 주발 뚜겅 두드리는 쇳소리가 나면 왜 누군가는 눈을 앓고, 피멍이 든 그 눈덩이에 찰거머리를 붙어야 하는 것일까?

 

 여우가 우는 밤이면

 잠 없는 노친네들은 일어나 팥을 깔이며 방뇨를 한다

 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레히 흉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여우가 우는 밤, 노인들은 흉사를 막기 위해 팥을 뿌리고, 방뇨를 한다. 민간의 속신에서 팥과 오줌은 귀신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전해지는 까닭이다. 전염병이 다반사이던 그 옛날 여우는 다른 말로 그러한 재앙이 아니었을까? 그런 재앙에 어떤 의료적 대안이 없었던 그 시절 우리 선조들은 팥과 오줌으로 어떻게든 대처해보려고 자위했던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신화적 요인이 이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굳이 의학적으로 풀지 않더라도, 팥과 오줌엔 병을 이기는 속성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옛날 시라는 건 하나의 신화적인 풀이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연장선상으로 칠월 백중이라는 시도 개인적으로는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물론, 내 개인이 오정희 소설집 유년의 뜰에서 백중을 소설적으로 풀이하는 과정에 남달리 강한 인상을 받아 백중에 조금 더 집착하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시를 보지 못했다면, 백중에 예전에 평안북도에서는 친가로 가는 풍습이나, 약물맞이를 하면서 옷이 다 젖도록 논다는 그런 풍습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이 시도 거의 지역 풍토적인 해석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 안에 있는 신화적이고 민속적인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시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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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이야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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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이야기 다채로운 이야기들

 

 

 J.D.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은 적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사실은 영어 공부를 목적으로 손을 댄 책인데,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런 순수한 감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책을 덮자마자 아니, 거의 중후반쯤부터 내내 들었다. 그래서 나름 정말 많은 기대를 했다. 다시 그 감성을 만날 수 있을까? 어른을 위한 동화 같던 그 순수한 마음을? 글쎄, 반쯤의 기대는 채웠다. 하지만 반쯤은 조금 난해한 구석도 있었다.

 

 처음,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의 경우, 읽으면서 뭐 이런 이야기가 있어,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이따위 이야기를 하는지 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뒤늦게 뒤통수를 때리는 무언가 아린 슬픔이 전해졌다. 애초에 바나나피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이 이야기 속에 상황으로는 그것은 하나의 암시일 뿐이다. 사실 그 암시를 위해 앞에 쓸데없이 늘어놓은 여자의 통화 내용은 일종의 복선이었다. 결국, 마지막 총성을 올리기 위한 하나의 조곡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왜 완벽이라는 말이 붙었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웃는 남자는 야구팀 코만치의 추장이(주장을 코만치 부족의 입장으로 해석하여) 들려주는 웃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더불어 추장의 연인과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일단,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고, 재밌는데, 상상력이 기발하다. 그리고 웃는 남자이야기는 생각할 거리도 있어, 그냥 흘려보낼 순 없는 글이란 생각이 든다.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는 전형적인 셀린저의 감성이 드러난 글이 아닐까, 잠깐 생각해본다. 어린아이에 대한 동경, 그리고 젊음에 대한 절망감, 이 두 가지 의식이 교차하면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잠깐 떠올려보았다.

 

 ‘드 도미에 스미스의 청색 시대는 약간은 종교적인 냄새를 흘리지만, 작가 자신의 예술에 관한 입장을 보여준 글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아쉽게 수녀의 종교적 문제로 이 모든 희망은 아스러지지만,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웠다.

 

 마지막 이야기 테디는 읽는 내내 관심이 갔다. 물론, 처음은 조금 산만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이 글뿐 아니라, 아홉 가지 이야기 전체가 서두가 산만한 부분이 있어서, 읽는데 약간의 진입장벽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글의 경우 그 서두 부분만 잘 넘어가면, 우주를 넘나드는 정신세계를 가진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동시에 그 마지막 예언은 잔혹하지만, 아름답다고 말하면, 조금 인간미가 없을까?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조금 산만한 구석이 있다. 정서적인 차이인지, 아니면 이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래도 좋은 작품은 확실히 몇 작품 눈에 띈다.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한 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란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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