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
김지우 지음 / 창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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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 오해와 편견 그리고 문학의 세 가지 난제에 대해

 

 

 

  평소에도 한국 소설가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이번에도 역시 이 소설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이번에도 대충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면 될 뿐이라고 생각하고서, 김지우란 이름을 도서관 앱으로 검색을 했을 따름이다. 운이 좋았는지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가 맨 위에 검색창에 뜨고, 다음으로 나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가 떴다. 둘 다 분명히 김지우란 이름의 작가였다. 그런데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려고 하니, 한 권은 청소년으로 분류되고, 다른 한 권은 소설로 분류되어 있었다. 내 기억이 왜곡된 건지 어떤 건지는 정확지 않지만,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가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나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라는 책이 소설로 따로 또 분류되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잠깐 소설가의 약력을 살폈다. 사범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하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다 문득 선생님보다 작가님이라 불리고 싶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거리낌 없이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를 읽어 내려갔다. 정말 선생님 법한 글이었다. 온갖 토속어에 순우리말들의 잔치, 국어교육을 전공하지 않고서 과연 누가 쓸 법하단 말인가?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오류가 발생했다. 청소년 문학에서 찾은 소설이란 편견에 무언가 비슷한 뉘앙스의 두 제목이 내게 주는 심각한 오류였다. 뭐랄까, 예상과 달리 너무 올드한 느낌에 난문이었다고 말하면 좋을까? 나도 보기 어려워서 사전 찾아가며 겨우 보는데,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본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두 작가는 전혀 다른 작가였다. 만약 모임에서 누군가 집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또 다른 김지우의 나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를 읽으면서, 헤어나올 수 없는 오류의 덫에 빠져 아직도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히 두 작가가 이름만 갖고, 전혀 다른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또 다른 김지우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나는 원래 비평을 하려던 김지우 작가의 소설집에서 무언가 놓쳐 내내 아쉬웠던 질문들을 새삼 다시 들쳐 볼 수 있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앞서 논외로 다른 김지우 작가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겠다. 내가 감히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원래 김지우 작가에 비견해 수준 미달이다. 아무리 좋게 보고, 의미를 부여한다 해도, 문학으로 조금은 장난친 기분이 들고, 괜한 사념놀이에 빠져있는 느낌이 과하다. 만약 원래의 김지우 작가를 보지 않고 봤다면, 조금 더 다르게 평가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글의 겹이 다르고, 무게라 표현하긴 그렇고, 뭐랄까, 삶의 문제에 접근하는 진정성이 다르다. 또 다른 김지우 작가는 그저 자기 세계에 몰두해있다면, 원래의 김지우 작가는 다채로운 세계를 다채로운 각도에서 바라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올드하다고 분명 말했다. 그 이유로 첫째는 청소년 문학이란 말도 안 되는 편견으로 시작된 오해였다. 둘째는, 초장부터 문학의 뉘앙스와 주제들이 내게 있어 너무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할 것 같다. 올드하다는 것은 문학에서 무조건 나쁜 것일까? 아니다. 결코, 그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왜 늘 올드하다는 사실 그 자체에 거부반응을 선천적으로 느끼는 걸까? 문학은 늘 새로워야 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늘 새로울 수 있는가? 해 아래 새것이 없고, 세상 사는 이야기가 다 거기서 거기인데, 어떻게 늘 새로울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문학은 늘 현재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책무가 있기 때문일까? 일정 부분 이 사실은 맞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제껏 봐온 위대한 소설들은 모두 올드함이란 모태에서 시작되었다. 그 시대에 현재적으로 해석되었을지라도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 소설도 태반이다. , 올드함은 소설의 기준을 잴 때 결코 잣대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 다만, 그럼에도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올드함에 기대어 우려내고 우려낼 대로 우려낸 진부함이다. 그렇다면 김지우의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란 소설은 과연 진부한 소설집일까? 반은 맞고, 반은 그렇지 않다. 소재적으로 다소 올드한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전부 올드하다고 폄하하기엔 소설의 전체적인 겹이 남다른 부분이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주제도 난제이긴 하다. 왜냐하면, 이 부분 역시 올드함과 연결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문학이 과연 국어적 사명을 갖고, 순우리말과 토속어에 집중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사실, 이 역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매우 난제다. 일단, 순우리말과 토속어에 집중하는 순간, 우리는 그 글을 올드하다 말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순전히 그런가 하면 또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간과한다. 예를 들어, 이 소설집의 물고기들의 집눈길은 이런 토속어와 순우리말의 집결체이다. 그러다 보니, 쉽게 올드하다고 몰아가기 쉬운데, 찬찬히 읽어보면 주제적으로나 소재적으로 매우 세련된 작품들이다. ‘물고기들의 집에서 모아놓은 온갖 군상들의 이야기는 마지막 며느리의 생리통 이야기로 귀결되면서, 그냥 모두 농지거리가 되어버린다. 전라도 말로 눙친다.’는 표현처럼 그냥 문제 삼지 않고 어물쩍 넘겨 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돼버리면 그때까지 벌여놓은 판은 대체 뭔지 조금 허무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렇게 낚시 손님은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떽떽거렸으며, 엄니는 무신 일 땜시 자기 자식이 업동이란 사실부터 며느리년의 과거사까지 떠벌리면서 오만가지 한풀이를 해댔는지, 대체 이야기의 두서도 없고, 벌려놓은 이야기를 매조지는 어떤 결말도 없다. 그럼에도 며느리의 생리통으로 그 모든 판을 슬쩍 넘겨 버린다. 대체 그 모든 게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굿을 하는 마냥 혹은 살풀이 모냥새라도 내는 것처럼, 여하튼 그렇게 어물쩍 넘겨 버린다. ‘눈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판은 이미 다 벌어져 있다. 감방 동기가 와서 같이 금고 문짝만 슬쩍 따버리면 끝인데, 눈은 무장무장 하염없이 내리고, 감방 동기는 올 생각도 없는데, 웬 이발소에서 만난 처녀가 며느리라며 그 눈길 속을 비집고 마을에 들어섰다. , 손이라 한 번 잡았으면 모를까, 그냥 점잔 뺌시로 몇 마디 나눈 게 이 사단이라고 해야 할지, 이 경사라고 해야 할지, 주인공은 스스로도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다만 그 눈길 속에서도 그 종잡을 수 없는 처자는 끝내 자기네 집으로 들어설 같은 예감을 주며 글은 끝난다. 아무런 서사 없이 그저 눈이라는 풍경과 여자와 감방 동기만으로 분위기를 잡아서, 글의 흥취를 더 하고, 그 흥취만으로 이렇게 글을 끝내버리는 것이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그것이 눈길이고, 삶인 것을.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좋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토속어와 순우리말들의 향연에 접근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올드하다는 선입견을 독자는 바로 갖게 된다. , 왜 소설집 구성을 이렇게 해놨는지, 같은 맥락의 디데이 전날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는 소설집 뒤에 자리잡은 물고기들의 집눈길에 비해 소재적으로나 주제적으로 조금 올드한 느낌이 강하다. 물론, ‘디데이 전날은 어떻게 보면, ‘물고기들의 집과 비슷하게 무언가 눙치는 느낌이 있긴 하다. 그런데 소재가 조금 무겁다. 그리고 그 소재가 약간은 예전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눙치는 느낌보다는 소재도 자해공갈단이라 그런지, 오히려 더 지랄발광한다는 느낌이 좀 있다. 물론, 이 뉘앙스는 전라도 식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는 심각한 소재의 무거움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야기이긴 하다. 하지만 이 무거운 광주항쟁이란 소재는 우리에게 너무 지난 이야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아니, 솔직히 접근 방식이 너무 무거웠다. 무언가 야단법석을 떨고는 있는데, 제대로 눙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랄 맞게 발광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멋을 부린 느낌이 있다. 여기에서 오해는 비롯되고, 이제 작가는 순전히 올드하다고 매장된다. 하지만 토속어 사용과 순우리말 사용이 올드한 것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끝까지 눈치채기 쉽지 않다. 그저 그 분위기에 편승해 과한 토속어와 순우리말 사용은 올드하다와 같다는 등호를 성립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런 등식을 따로 분리해낼 수 없는 것일까? 아니, 머릿속으로 분리하더라도 그 분위기를 따로 떼어놓기가 왜 이리 쉽지 않단 말인가? 결코, 이 둘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도 그렇다고 등식의 관계도 아니다. 그저 문학의 한 선상에 토속적 소설이란 한 획이 지나가고, 우리말이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선상에 문학이란 한 획이 자연스럽게 겹치면서 지나갈 뿐인 데, 뭐가 그렇게 복잡한지, 이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끝으로, 이 글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실, 모든 오해는 나의 그릇된 편견과 첫 두 작품 때문에 비롯되었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들을, 그리고 너무 큰 이야기들을 무작정 꺼내는데, 작가가 제대로 감당하지 못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뒤로 가면 갈수록 이 소설집은 전혀 상반된 작품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히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무거운 소재와 커다란 주제에 대해 엿이나 먹으라고 장난을 치는 느낌이라면 좋을까? 그런데 이 놈의 출판사이거나 혹은 비평가들이 문제인 거 같다. 책 제목을 제일 무겁고 커다란 소재와 주제로 잡은 소설로 내걸은 것도 모자라, 앞에 그 사흘의 남자까지 세 편을 모두 너무 올드한 소재들로 판을 깔아놓았다. 물론, 다 나름의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이 소설가가 잘하는 건 눙을 치고, 산통을 깨고, 그 모든 것을 어그러뜨리는데 재능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약간의 허세가 있는 작품들을 맨 앞으로 내세웠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 세 소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집을 끝까지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무언가 아니다 싶었다. 하지만 무언가 모를 약간의 아쉬움 때문에 끝까지 오롯이 읽고 나니,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꼭 소설이 무언가 대단한 주제를 다룰 필요도 굳이 없고, 또 반드시 벌여놓은 판을 정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막연하지만 공감하게 된 것이다. 물론, 조금 내가 읽기에는 여러모로 올드하고 실제적으로도 시대에 조금은 역행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기존 소설의 작법들을 가볍고 부드럽게 뒤집어엎고, 삶의 소소한 해학들을 펼친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 소설가의 이런 글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애달픔을 느끼며 두서없던 비평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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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 목련공원 Magnolia Park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22
이승우 지음, 유진 라르센-할록 옮김, 전승희 외 감수 / 도서출판 아시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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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공원 마지막 총성이 울리기 전 생의 절정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봄꽃들 가운데 목련을 가장 좋아한다. 물론, 봄을 수놓는 꽃들은 가지가지이고, 저마다 아름다움의 이유가 있다. 그중 목련과 벚꽃은 새하얗게 만발한 그 자태만큼 유려하게 낙화하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 다만 그 차이가 있다면 무게의 차이일 것이다. 내겐 가볍게 흩날리는 벚꽃의 유려함보다는, 어쩐지 무겁게 그렇지만 결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유유히 떨어지는 목련의 낙화하는 모습이 늘 가슴 한구석에 맺혀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떨어지는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그 이유 혹은 그 잔혹한 진실은 대체 무엇일까?

 

  이 글의 스토리는 어쩌면 너무 단순하다. 화자인 남자 주인공이 목련 공원으로 향하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장례식장으로 유명한 이 목련 공원에 그는 동시에 결혼식 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초대한 사람이 자신의 불륜 상대였다. 우연히 아는 지인의 미술 전시회에 초대받아서 들렸던 목련공원 내 찻집 목련에서 만났던 여자, 처음부터 그는 그녀에게서 어떤 불안한 예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현실이 되어 그는 멈출 수 없는 그녀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암컷 사마귀와 같은 그녀의 집게라는 족쇄에 갇히게 된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사마귀가 교미할 때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그 사실을. 하지만 거기서 어떤 에로틱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목련 찻집의 그녀는 자신의 생명마저 내어주는 수컷의 정렬을 사랑이라 이야기하며 주인공을 그녀의 강력한 집게와도 같은 품으로 가둬버린다. 그 집게가 얼마나 강력한지 그는 늘 그 잔인한 품에서 벗어나길 발버둥 치지만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얼마나 교묘한지 그녀는 그의 일상생활 범위로 그 집게를 좁혀 들어와, 아내가 있는 그의 집으로 수시로 전화를 걸기까지 한다. 마치 자신의 먹이가 잘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양, 그렇게 그를 옥죄고, 결국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아내와 별거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목련 찻집의 여자와는 정반대로 너무나도 이성적인 여자이다. 비록 별거했지만, 그 사실을 그의 형제에게도 숨기고, 가족 행사 때면 남편인 주인공을 부르기까지 한다. 별거 후 딱 세 번, 그녀는 그에게 전화했는데 그 일이 모두 그녀의 형부와 관련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집을 사기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일했던 그의 형부가 별안간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이제 속절없이 마흔다섯이라는 나이에 이 세상에서 하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장례식의 발인 날과 그의 불륜 상대였던 목련 찻집 여자의 결혼식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는 당연히 장례식장에 가야만 한다. 이제 그 여자에겐 그 어떤 미련도 끌림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묘지에서 마지막 섹스 후 그녀는 차갑게 돌변하여, 마치 그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매달려 보고, 애걸해봤지만, 그를 용서하지 못 하는 그의 아내처럼 그녀에게서 되돌아온 것은 차가운 냉소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그녀가 또 다른 애인에게 그에게 했던 것처럼 비슷하게 사마귀와 생쥐의 싸움 장면을 보여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 달리, 사마귀가 방아깨비를 잡아먹는 것처럼 흡사하게, 사마귀가 생쥐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자신의 집게로 생쥐를 파먹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그녀를 깨끗하게 털어내고 단념했다. 그러하기에 그의 발걸음은 당연히 자연스럽게 장례식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 밑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자연스럽게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산 밑으로 걸음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녀의 결혼식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녀가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자기와도 똑같은 처지였을 한 남자가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끌고 가고 있었다. 순간 그는 속으로 어서 빨리 그가 방아쇠를 그녀의 가슴에 한 발 더 쏘아주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그는 살 것이고 그녀의 구렁텅이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 확실하니까. 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그 순간에도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끌고 가는 것이 그가 아니라 그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소설을 읽어가면서 사실은 조금 너무 극적인 설정들이 많지 않나 생각했다. 장례식장과 결혼식장의 설정도 그렇고, 마지막 그녀를 향한 총성의 장면도 너무 극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그 극적인 장치를 통해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목련 찻집 여자의 미소를 드러낸 순간, 그 총성으로 가기까지 그 모든 장치와 설정이 꼭 필요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총성은 내 가슴에 찌릿하게 박혀, 토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소화하지도 못해,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 내내 머물 것만 같다. 왜냐하면, 이제야 왜 내가 목련의 낙화를 생의 어떤 절정으로 동경했는지, 왠지 깨닫게 된 거 같으며, 동시에 이제껏 나를 끌고 온 그 무언가가 내가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이거나 거기서 폭발한 블랙홀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미소는 이렇게 이성적인 설명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표현할 길이 없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그 미소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자칫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표명하지도 못하고, 자신이 총을 쏘는 것인지, 총을 맞은 것인지 알 수도 없게, 그렇게 시나브로 젖어 들어 그 머금은 모든 피가 자신의 것인지 알 수도 없게 되어, 그렇게 넋이 나가지 않도록, 혹은 반대로 간절하게 그렇게 되기를 영영 바라도록, 그녀의 미소를 이 소설 너머 어딘가에 고이 놓아주거나 혹은 내내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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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 봄에 우리 그 누구도 없었다

 

 

  언젠가부터 소설을 읽는데 조금 흥미를 잃어버렸다. 원래 문학에 대한 동경이 소설보다는 시적인 무엇인가에 대한 목마름인 탓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내게 어떤 커다란 화두가 있었을 때 소설은 그 시적인 무언가를 탐미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커다랗던 화두였던 신이었거나 화두 그자체가 사라진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체되어버렸고, 그냥 그렇게 현실이란 무난한 하루 속에 혹은 일정한 조류에 흐름을 맡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가슴속에 박동은 뛰고, 뛰는 박동 속에 흐르는 피는 어릴 적부터 새겨진 시에 대한 갈망을 품고서 가끔씩 온몸을 달아오르게 만들곤 한다. 지금 이 소설을 읽고서 내가 그런 달뜬 감정을 느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기억들을 계속 끄집어내고,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글의 주인공 조앤은 영국의 중산층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여자 캐릭터이다. 모험과 꿈보다는 안정된 미래를 지향하며, 지독하게 현실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그녀는 행복했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와 결혼을 했고, 자식 셋을 낳아 반듯하게 잘 길러서 모두 잘 출가시켰다. 완벽한 삶이다. 이 소설은 그런 완벽한 삶을 산 그녀가 아주 낯선 환경인 사막에서 사흘 동안 지내면서 자신이 알던 자신의 삶이, 그리고 자신의 주위가 붕괴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그려낸 소설이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서 그녀가 무너져버린 걸까? 그녀의 남편 로드니는 성공한 변호사이다. 다만, 단 한 번 그에게도 위기가 있기는 했다. 그는 그녀 모르게 농장에서 사는 삶을 동경했다. 변호사 생활이란 결코 그가 꿈꾸던 삶이 아니다. 때문에 그는 그의 아내 조앤과 농장 생활에 대해 의논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뻔했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답이었다. 변호사가 주는 사회적 위치와 월급,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에 관한 이야기, 그녀는 그녀의 남편 로드니의 생각을 철없는 생각이라고 단정지었다. 만약 그때 그녀가 그와 함께 시골로 내려갔다면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그녀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다. 그랬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자랑하던 그 완벽한 삶을 살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거기가 불행이 시작점이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불행히도 그녀가 낳은 자식들은 그녀 자신보다 그녀 남편 로드니의 기질을 닮아있었다. 이상하게도 자식들은 모두 그녀 자신보다 로드니를 더 따랐고, 모두 이제는 잘 자라 출가를 했지만, 한 번씩 그 기질 탓에 속을 썩였다. 늘 자신을 은근히 비아냥거리며 조소하던 큰딸 에이버릴은 갑자기 스무 살이나 나이 많은 유부남과 결혼을 하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그때 그녀는 도무지 무얼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남편 로드니가 이성적으로 그녀의 딸을 설득시켰다. 마치 자신이 로드니의 꿈에 대해서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는 결혼이라는 것이 일시적인 감정적 격정이 아니라 계약이기 때문에 계약 당사자인 또 다른 한 사람, 에이버릴이 사랑하는 남자 아내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에이버릴이 앞으로 사랑할 남자가 에이버릴과 결혼함으로써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사라는 사회적 신분과 위치가 위협받게 될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그로 인해 나중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동시에 결혼이라는 신성한 의무인 계약 파기를 한 번한 사람이 다시 한 번 그 계약 의무를 파기할 수 있음을 이야기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에이버릴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의 권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에이버릴에게 상기시켜주었다. 다행히 에이버릴은 똑똑하고 이성적인 아이였다. 그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수긍하고, 그녀의 연애를 끝냈다. 그리고 지금은 성공한 부동산 중개사와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조앤은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녀의 딸 에이버릴과 그녀의 남편 로드니가 냉랭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원래 현실은 그런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그렇지만 도덕적이고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제 길을 가게 마련인 법이다. 그녀는 그렇게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아이들은 다 제각각이었다. 둘째인 아들 토니는 어떻게 자신의 남편 로드니를 똑 닮았는지, 갑자기 농장 생활을 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녀는 아들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번엔 남편이 도와주질 않았다. 오히려 남편 로드니는 그녀를 설득했고, 아들 토니의 길을 열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막내 바버라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늘 자신을 못마땅하고 시비를 걸었다. 게다가 어찌나 천박하고 상스러운 아이들과만 노는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 시시때때로 하는 연애는 얼마나 경박스럽고, 변덕스러운지,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는 딸 바버라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막내 바버라가 다행히도 자신이 주선한 성실한 청년 사업가 윌리엄을 사랑하게 되어, 급기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편 로드니는 그 결혼에 대해 너무 급하다고,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자신과 의견을 달리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늘 그랬듯이, 그녀 자신 남편의 의견을 무시하고, 바버라를 결혼시켜 보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바버라는 사실 윌리엄을 사랑했다기보다는 그저 집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변덕스러운 그녀는 결혼하고도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고, 아이까지 가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그저 바버라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그 둘이 사는 이라크까지 한 걸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이 글은 주인공 조앤이 그 둘과 함께 있다가 이유는 모르지만, 그 둘이 자신과 오래 머물기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집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시작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조앤은 예기치 않게 여정 중에 사막의 한 여관에 갇혀버린다. 도무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사막이라는 공간에 사흘 동안 갇혀서, 너무나 뜨겁게 빛나는 태양 아래 이 모든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그녀는 스스로 무너져 내려간다. 그런데 여기에 또 가장 중요한 인물인 그녀의 남편 로드니의 중요한 이야기 하나가 숨겨져 있다. 처음부터였는지 아니면 그의 부인 조앤이 자신이 동경하던 농장 생활에 대해 반대했을 때부터인지, 그는 단 한 번도 그의 부인 조앤을 사랑한 적이 없다. 물론, 그도 어쩔 수 없는 영국의 전형적인 성공한 중산층 남자이기에 조앤의 삶의 방식과 목적에 대해 부인할 도리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는 자신의 딸 에이버릴에게 얼마나 그것이 합당한 삶인지 스스로 입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랜 동경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천성의 연민과 정 때문이었을까? 그는 단 한 번 사랑했던 여자에게 끝내 고백하지 못 한 사실을 후회하고 있다. 레슬리 셔스턴, 찰스 셔스턴이란 사기꾼 기질이 있는 남편을 만나서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암으로 죽은 불쌍한 여인, 그렇지만 그녀는 결코 불쌍한 여자가 아니다. 그녀의 남편 찰스가 감옥에 가있을 때도 정원을 가꾼 채소들을 시장에 팔아 자식들을 거뜬히 건사해냈고, 그 무능한 남편이 돌아왔을 때도 그를 위해 끝까지 헌신하면서 개도하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누가 봐도 그녀는 정상적인 안색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고, 늘 자신의 삶을 긍정한 그런 여자였다. 그녀와 그는 10월의 어느 날 따사로운 햇살 아래 1m 남짓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거기서 그는 그와 그녀 사이에 전기장처럼 갈망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으리.’라고 낮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 전기장을 그의 부인 조앤 역시 먼발치에 바라보며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둘은 신성한 결혼이란 계약 관계 당사자들이다. 무엇이 어찌됐든 사랑을 끝까지 연기해내야 하며, 서로 영원히 외톨이임에도 둘인 것처럼 위장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앞으로도 쭉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 글을 다 읽고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중후반까지 정말 매력이 있는 소설이었다. 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면서, 진실에 대한 진정성 있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지금까지 한 인간의 진실을 해체시키면서 제기했던 문제의 핵심들을 그대로 복원하여, 현실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소설 막판에 등장하는 공작부인과의 대화에서 어느 정도 암시가 있기는 하다. 우리는 예수와 같은 성자가 아니다. 사막에 사십일 동안 갇혀 무언가를 깨닫고 각성했다고 해도, 자신의 기존의 모든 삶을 부인하고 예언자이거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선언할 수 없다.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인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은 현실이 아닌 소설이다. 소설은 현실 이상의 그 무언가를 찾아내야 하고, 그 무언가를 던져주어야 한다. 물론, 이 소설은 완벽한 현실에 대한 어떤 틈을 발견하고, 그 틈에서 발견된 문제들을 제기했다. 거기까지만 해도 대단한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문제제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화두이거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구심을 가져본다. 물론, 이 또한 너무 막연한 이야기란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글이란 것이 밑도 끝도 없는 화두를 던져야할 의무도 없는 법이고, 꼭 어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이 소설은 그 모든 가능성을 봄이라는 닿을 수 없는 존재였던 레슬리 부인에게 전가시켜 놓고, 그렇게 시라는 상징 속에서만 살라고 강요하고서, 모든 봄에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고 어느 정도 단정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이미 죽어버린 애슬리 부인처럼 모든 과거의 시점으로 지나간 계절로 봄을 상정하고, 혹은 영원한 여름을 그렇게 상정하고서, 남겨진 로드니이거나 조앤인 우리는 서로 뻔한 거짓말로 위로하면서, 일종의 의무감으로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렇게 마무리한 점이 나는 조금 씁쓸하면서도 서글퍼서, 이 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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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신의 부재 - 진정한 신앙에 대한 개인적 물음

 

 

  설마, SF 소설을 읽으면서 종교에 대한 내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재정리해 볼 시간을 가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실상, 이 단편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목록 중에 거의 SF와 무관한 유일한 소설이라고 보아도 좋을 거 같다. , 제목부터 종교적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 정말 놀랐던 건, 종교적 냄새 차원을 떠나 진짜로 종교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끝까지 내 주관이 들어간 이야기이다. 한때 신학생이었지만 이제는 교회도 안 다니고, 신에 대해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거기에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종교 다원주의자이거나, 혹은 종교의 거대한 물음에 대한 담론을 다소 꺼리는 그러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는 중요한 인물이 세 명 나온다. 한 명은 주인공은 닐 휘스크란 인물이고, 또 다른 인물은 그 반대 축에 속한 제니스란 인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소 중도적이거나 혹은 다소 평범하고 일반적인 입장의 이선이란 인물, 이 셋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이 소설은 천사 강림이라는 매우 신비적인 요소를 섞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사탄의 현시라든가, 지옥의 설정이 현실과 똑같다는 가정, 예를 들어 건물도 있고, 사람들도 평범하게 결혼하고 애 낳고 살고, 뭐 그런 가정, 그리고 천국으로 올라가는 영혼들에 대해 인간들이 볼 수 있다는 상황까지, 모두 다소간의 극단적인 신비한 설정들을 해놓았다. 그렇지만 읽다보면, 이 소설이 설정만 신비적일 뿐, 매우 현실적인 소설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러기위해선, 각 인물에 대해 조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단, 주인공인 닐 휘스크는 다리에 선천적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이것을 신의 의지의 개입이라고 표현한다. 그것도 다소 징벌이거나 저주에 가까운. 하지만 주인공은 그러한 생각을 가져본 적도 별로 없고, 굳이 신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그냥 그것은 가지고 태어난 기형일 뿐 그것이 무슨 신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천국? 이 글속에선 당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굳이 자신이 가고 싶다는 욕망을 별반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사건을 통해 그는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천사강림이란 신비한 사건을 통해 그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된다. 하지만 왜? 천사강림이란 거룩하고 신비한 사건에서 아내가 죽는단 말인가? 이 글속에선 천사강림이 결코 거룩하고 아름답게만 그려져 있진 않다. 그것은 사실상 무척이나 잔혹한 사건이다. 천사라는 인간이 담을 수 없는 존재의 현시를 통해 누군가는 그 거룩한 빛에 눈이 멀게 되고, 누군가는 강림이 가져오는 강한 후폭풍에 차가 뒤집혀 죽고, 누군가는 깨어진 유리 파편에 맞아 죽게 된다. 그의 아내의 경우 마지막 케이스였다. 그런데 또 아이러니한 건 이 죽음들을 통해 그 누군가의 영혼들이 천국으로 가는지, 지옥으로 가는지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아내의 경우는 천국으로 갔다. 바로, 여기서 주인공의 딜레마가 생기게 된다. 그는 이제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천국을 가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없던 믿음이 어떻게 그냥 막 생겨날 수 있겠는가? 천사강림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나, 그 유족들 모임에 참여해 보아도, 그는 그 자신이 그들과 다른 대척점이 있다는 사실만 느낄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는 천국을 그리고 신을, 자신의 아내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할 뿐, 신 그 자체에 대해 혹은 천국에 대해 아무런 동경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가 가고 싶은 천국은 그저 자신의 아내 사라가 존재하는 천국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사라가 지옥에 갔다면, 그는 아마도 서슴지 않고 지옥에 가기 위해 자살을 택했을 것이다. 이러던 차에 그는 자신이 속해 있던 그룹에 매우 유명한 설교자 제니스와 만나게 된다. 그녀 역시 태어날 때부터 주인공 닐 휘스크처럼 다리에 선천적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다. 다만, 다소 달랐던 것은 그녀의 경우 부모님에 의해 선천적 기형을 축복과 긍지로 여기며 자라났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그녀는 그녀가 가진 결함에도 불구하고 늘 당당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녀 자신 또한 그러한 장애가 자신을 향한 신의 강한 메시지이며 축복이라 여겼기에, 설교자가 되어 수많은 동조자들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뜻밖에 사건이 벌어진다. 그녀 자신이 천사강림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때 없던 다리가 갑자기 생겨나게 된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상황에 이제까지 얻었던 확신이 다소 흔들린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신의 뜻을 알 수가 없는 까닭이다. 똑같이 천사강림을 경험했는데, 누군가는 유리 파편에 맞아 죽고, 누군가는 없던 다리가 생겨난다. 물론, 그냥 이것이 그녀에게 내린 축복이라고 단순히 그렇게 말하면 모두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까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본보기로써 존재했던 그녀 자신이, 더 이상 같은 입장이 아닌 상태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당신들도 어떤 시련을 극복하면 자신처럼 신이 축복을 줄 거라 어떻게 확신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솔직히 그 질문에 대해 자신이 천사강림 이후 다소간의 난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설교자의 불확실한 믿음을 누가 따라가겠는가? 주인공 닐은 분노한다. 제니스는 누가 보아도 믿을 수 없는 축복을 받았건만, 불평하고 있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대척점에 있는 두 인물과 다르게 이선이란 등장인물이 있다. 그의 경우 늘 천사강림을 통해 무언가 확실한 체험을 갖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에겐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겐 무언가 특별한 소명이 있을 거라고, 늘 그렇게 믿고 살아왔지만, 어떤 눈에 보이는 징표도 없이, 아니 어떤 확실한 경험도 없이 어떻게 그가 그 소명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때문에 그는 평범한 삶을 택하게 된다. 도서관 사서가 되어 클레어란 여자와 결혼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는 늘 자신에게 나타날 운명의 징후를 대비해 줄곧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혹은 그냥 우연인지는 몰라도, 아주 멀리서지만 제니스에게 나타났던 천사강림의 여파로 생긴 지진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무언가 확실하지가 않았다. 1분간의 지축의 흔들림 속에 신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긴 했지만, 다른 경험자들과 달리 그에겐 어떤 축복도 저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소거법에 의해 천사강림 경험자들 속에서 불확실성을 느끼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뜻밖에 제니스란 이름을 그는 보게 된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세 사람이 엮어지는 지점을 이 소설에서는 성지순례라는 설정으로 풀고 있다. 그런데 이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성지순례와는 많이 다르다. 여기서의 성지순례는 순수하게 천사강림을 경험하기 위한 성지순례이다. 다시 말해서, 천사가 천국을 자주 오가는 장소가 성지이고, 그곳에 가서 무언가 확실한 징표를 얻기 위해 가는 순례가 성지순례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90%이상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나머지 10%는 기적적인 치유라는 체험의 가능성이긴 하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경우 어떻게 성지순례라는 결단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과정은 돌아 돌아갔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숱한 살인을 한 어떤 살인마가 사형 때 천국에 가는 일이 있었다. 그 사건을 통해 희생자 유족들은 분노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희대의 살인마가 분명 사형을 앞두고 엄청난 회개를 했을 거라는 가정을 했다. , 그 자신도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천국에 가서 사라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거의 자살의 형태를 띤 성지순례이긴 하지만, 어차피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는 그로선 해볼 수 있는 마지막 도박이었다. 반면에,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제니스는 자신에게 신이 내린 치유의 축복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어차피 더 이상 그녀 자신의 불확실성을 가지고 대중 앞에 설교자로 선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왜 신은 그녀에게 치유란 축복을 주어 그녀를 흔들리게 했단 말인가? 그녀로선 신의 뜻을 알 길이 도저히 없었다. 이에 그녀는 진정한 신의 뜻을 알기 위해 성지순례를 결심하게 된다. 마침 그녀와 함께 교류를 하던 이선도 적극 동참하여, 성지순례 장소로 둘은 함께한다. 그리고 우연히 주인공 닐과 조우하여, 같은 차를 타고, 천사강림의 순간을 동시에 맞이하게 된다. 각기 전혀 다른 형태로써. 우선, 제니스의 경우는 그 자리에서 천사의 찬란한 빛에 바로 눈이 멀게 된다. 그와 동시에 그 빛의 충만함으로 인해 더 이상 그 어떤 의심도 없는 황홀한 신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며, 축복이다. 다시 말해, 천국 그 자체이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 있던 주인공 닐은 역행 아닌 역행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또한 제니스와 같이 이루 말 할 수 없는 신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더 이상 사라가 필요치 않은 천국 그 자체의 황홀함을 맛본다. 그런데 그의 영혼은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택한 성지순례는 처음부터 자살의 의도성이 다분했던 까닭이다. 이선은 이 둘의 교차하는 운명을 목도하고, 그 자신의 소명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 둘에 대한 신의 선택이 너무나 극명했던 까닭이다. 제니스의 경우 천국 그 자체를 경험하게 되어, 더 이상 그 어떤 간증을 해도 의미가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천사강림을 목격하고 제니스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의 간증은 도저히 일반 사람들의 입장에선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었던 선례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냥 행복하다고, 신의 사랑은 도저히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이렇게 막연하게 설명하는데, 어떻게 인간의 말과 경험으로 이해하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더한 경우인 주인공 닐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순간 똑같이 천국을 경험하면서, 신의 사랑을 느낀 그는 대체 왜 지옥으로 가야만 한단 말인가? 아무리 자살을 염두에 두고 간 성지순례가 할지라도, 똑같이 회개했는데 왜 희대의 살인마는 천국으로 가고, 그는 지옥으로 가게 된 것일까?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정의란 기준, 휴머니즘이란 기준에 입각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를 설파할 수 있는 사람은 목격자였던 이선밖에 없을 것이다. 끝으로, 이 소설은 지옥을 간 주인공을 통해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이제 주인공은 천국 그 자체를 경험한 사람이다. 더 이상 그의 아내와 함께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가 간 지옥은 신이 없다. 현실과 똑같이 건물들이 있고, 똑같이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만, 영원히 그곳엔 신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알고 있다. 그가 영원한 신의 부재라는 그 절망 속에서도 영원히 신을 사랑할 것임을, 영원히 천국을 꿈꿀 것임을.

 

  이제 길게 늘어놓았던 이 소설에 대해 조금은 나름으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먼저, 제니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히, 중요한 부분인 마지막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대체 제니스가 느낀 신의 사랑이란 건 무엇이란 말인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신의 사랑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정말 이해하기 힘든 말이며,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조심스레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 까닭으로 고등학교 때 내 모든 삶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노래는 찬송가나 복음성가 아니면 듣지도 않았고, 겨우 고1 겨울방학 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주제에 매일 친구들한테 신의 사랑에 대해 늘어놓고, 전도하고, 그렇게 20명이 넘는 친구들을 교회에 데려오고, 결국 아무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우리 집안에서 신학대를 가겠다고 가출까지 해서 승낙을 받아 나는 기어이 신학대를 갔다. 신에 대한 사랑 빼고는 다른 그 무엇도 보이지가 않았다. 도무지 가슴을 주체할 수 없고, 하루하루 행복해서, 주위 사람 모두가 나를 예수에 미친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는 왜 신학대에 가서 변하게 된 것일까? 지금 거의 무신론에 가까운 신념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 내 자신에게 그것보다 더 뜨거웠던 감정을 느껴본 적 있느냐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그런 신을 포기하고 버렸느냐? 왜 심지어 신을 부정하느냐? 또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결국, 신학대를 가서 배운 너의 어설픈 지식들이 너를 병들게 하고, 너의 신앙을 앗아갔다고 누군가 나 대신 대답한다면, 나는 아마 그렇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성서를 분석하고 쪼개 읽기 시작하면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고, 거기에 신학과 철학을 배우면서 나도 모르게 시나브로 젖어들었으니까. 그 어떤 부인도 부정도 할 길이 없다. 다만 그럼에도 정리할 건 정리해보고 싶다. 아마도, 가장 처음으로 봉착한 문제는 진리냐 진실이냐는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제니스의 경험과 유사하다. 진리를 신봉하는 사람에게 진실의 잣대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 모든 의심은 시작된다. 그와 동시에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성서의 무오성이란 절대성에 대해 의구심 또한 수반된다. 왜냐하면 진실은 더 이상 신의 영역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엄격한 잣대인 까닭이다. 그런 이유로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검열을 시작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이제까지 자신에게 가장 잣대가 되었던 기준인 성서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왜 사복음서의 결들이 저마다 다른지, 왜 바울은 직접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도 않았는데 사도로써 불리는지, 하나하나 의구심이 든다. 그때 가장 내게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은 특히 사도 바울의 문제였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제자들이 거의 순교를 하면서, 교회가 당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더 이상 살아 숨 쉬는 구원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로마라는 대제국이 가진 정신적 유산인 그리스 철학과의 피할 수 없는 논쟁이었다. 이때 바울이 등장했다. 예수쟁이들을 때려잡는데 선봉장이었던 그 자신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빼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쓰레기일 뿐, 아무 가치도 없는 거라고, 설파하면서.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그 아무 것도 아닌 쓰레기에 불과한 그의 그리스 철학에 관한 지식들이 그 당시 로마인들과 싸우는 무기가 되었다. 사복음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신약을 집필한 바울의 성서는 대충 봐도, 사복음서와 완전히 결이 다른 느낌을 파악할 수 있다. 논리적이고 치밀하게 그는 그리스도의 사상을 설법하고, 그 반대 이론에 대한 나름의 변증법을 펼친다. 신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바울이 그리스 철학이라는 맥락을 이용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도구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거의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모든 세상의 것들이 부차물이고, 쓰레기일 뿐이라는 사상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맥락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기 시작할 때, 굳건했던 신앙의 틈이 서서히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을 맥락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리고 그 맥락을 알았기에 바울이 사도로써 제 역할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성서 이외의 그 맥락들에 대해 어떻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여기서 누군가는 그럼 너도 바울처럼 그 맥락들을 수단으로써 잘 이용했으면 그만 아니냐 하고 되물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랬다면 나는 분명 지금 목사를 하고 있거나, 아니더라도 최소한 교회는 다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첫 시작이 진리인가, 진실인가의 문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서 묻는 물음이다. 처음부터 진리의 입장에서 출발했다면, 아마 나는 그 선에서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의 기준에서 출발한 그 순간, 내겐 이미 진리가 가진 브레이크 기능은 어느 정도 상실해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 때문에 나는 성서도 진리가 아닌 맥락으로 읽기 시작했다. 어떤 부분이 신화화 되었는지, 그 신화화 과정을 통해 어떻게 성서란 큰 맥락에서 상징으로 읽히는지,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점점 진리와 멀어져갔다. 물론, 이 지점은 신학서적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나는 불트만의 성서의 비신화화 사상과 폴 틸리히의 성서에 관한 상징이론에 대해 일정부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거기에 그전까지 쓰레기라 치부했던 맥락들, 노자, 장자, 불교, 여타 다른 숱한 책들의 영향이 덧보태졌다.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 진리에 대해 남은 것은 무엇일까? 지금 생각해볼 때, 거의 없었다. 다만 진리가 주었던 엄청난 경험, 그 경험에 대한 추억의 실마리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방황하는 한 젊은이의 초상이 있었을 따름이다. 물론, 어떻게 거기까지 비약이 이를 수 있느냐 또 누군가 묻는다면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성서를 맥락으로 읽고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내게 있어서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 세상과 별개로 떨어진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 대한 혹은 각 개인의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구원으로 읽혔다. 그 여실한 예가, 그때까지 전혀 별개로 보던 지옥의 불과 성령의 불을 똑같은 불로 해석하면서, 왜 누군가는 같은 불에 지옥을 경험하고, 왜 또 누군가는 천국을 경험하는지 의구심을 품었고, 신의 그 진리에 대해 부인할 의지를 품게 되었다. 동시에,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포도나무 가지 비유에 대해서 조금은 역설적인 해석을 하게 되었다. 원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포도나무이고, 신자인 우리는 가지인데, 메마른 가지는 불살라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부분은 생명의 주체가 되는 포도나무 그 자체일 것이다. 아니면 메마른 가지가 불살라진다는 신앙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한 부분에 대해 초점을 맞출 것이다. 사실, 맥락상 그것이 옳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아직도 부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상징으로 성서를 보는 순간 달라진다. 왜냐하면 상징은 기존의 의미를 새롭게 재해석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메마른 가지가 왜 불살라져야 하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왜 불살라짐으로써 하나의 포도나무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지 이유를 묻게 되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처럼, 하나의 메마른 가지가 잘려버린 그 이유로 십자가에서 하나의 거룩한 표징이 되어 마치 불살라진 것처럼, 나에게 잘린 가지는 역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에 대한 표징으로 읽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과한 자기 투영이거나 자기 투사를 시켰다. 내가 바로 그 잘린 가지라고. 물론, 이 맥락은 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혀 다른 의미로써, 잘린 가지 자체에 대한 애착을, 그렇게 잘려버릴 수밖에 없는 가지에 대한 연민을, 내 자신에게 투영시켰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린 가지로써 내 자신을 투영시킨 까닭으로, 나는 신앙을 부인하게 되었다. 물론, 신의 존재, 그런 거대 담론에 대해 완전히 포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무신론자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러한 거대한 빛, 마주하면 그 나머지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그런 거대한 빛에 대해 나는 지금 부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내가 문학으로 돌아서고, 문학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런 거대한 빛보다 반딧불이 빛처럼 소소하고 마주할 수 있는 빛을 동경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탓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가지 내 스스로 반문을 하게 된 점은 있다. 왜 나는 이 글의 주인공처럼 끝까지 절망일지언정 신을 사랑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내 스스로 잘린 가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으로 해석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이라는 건 혹은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진정한 사랑이라는 건, 그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아무런 바람 없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서의 지옥의 불과 성령의 불을 똑같은 불로 해석했다면, 사실 지옥의 불이면 어떻고, 그것이 성령의 불이라면 또 어떻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다르게 역행한 어떤 존경했던 선배의 신앙 고백을 통해, 바울과 고백과 똑같은 신앙 고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모든 것은 쓰레기일 뿐이라는 고백을 통해, 그 절정인 상징인 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그 고백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 적이 있다. 나를 처음으로 시로써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준 선배였기에 충격이 더 했을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내 자신이 똑같이 선배와 그런 고백을 했었던 사람이기에 더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이고,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사랑이란 걸 나는 알고 있던 이유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그것이 너무나 공포스럽다 말하고 있다. 심지어,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잔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의 사랑은 그것이 어떤 신의 모습일지라도 나의 이런 공포심과 휴머니즘과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런 진리일지라도 나는 그곳으로 결코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니, 그것이 정말 내 생에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가장 커다랗고 엄청난 기쁨과 행복이었을지라도, 그것이 내게 있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다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이미 진실은 진리를 어느 순간 인간의 판단 영역에서 저 멀리 밀어내고, 인간의 진실이 지닌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은 모순으로 가득함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 모순이 인간 자체의 존재 기반이며 인간 자체를 대변하는 것으로 믿는 이상, 나는 모순 가득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에 얽매여 숨을 헐떡이면서 그렇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숨이 멈추길 기다리고 싶다. 어느 가을 밤 우연히 마주한 반딧불이 빛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것처럼 그렇게, 내 눈 안에서 사라져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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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이해 - 오해의 이유를 찾아서

 

 

  어떤 글을 읽고 나서 내내 맺히는 경우가 있다. 그 글의 여운이나 강한 전율을 받을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더러는 무언가 다 게워내지 못한 찝찝함 같은 것을 느낀 경우에도 그렇다. 테드 창의 이해같은 경우가 그랬다. 어떤 의미인지,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다 알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 맥락 하에서 토론도 해보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아직도 다 못한 이야기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랬던 걸까? 먼저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테드 창의 이야기 전개 방식이 내게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테드 창의 소설은 SF이다. 그런데 동시에 SF가 아니다. 언어와 구성 소재는 모두 SF의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매우 철학적이고, 심지어 신학적이기까지 하다. 둘째는 테드 창의 이해속에 나온 미학과 윤리학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아마 이것은 소설 그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자신을 위한 정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내 아렸던 마지막 장면을 다시 재구성해봄으로써 무언가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해본다.

 

  소설의 초반부는 주인공의 치료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빙판 사이 얼음물에 빠져 거의 1시간 가까이 있으면서 주인공은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깨어나면 그것은 악몽이고, 병원 침상에 누워있고, 또 다시 얼음물 속에 잠긴 악몽을 꾸고, 다시 깨고. 그 과정 속에서 그는 그가 호르몬 K에 의해 손상된 뉴런이 복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시에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천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지점부터 발생하게 된다. 이 호르몬 K의 성공적 실험에 의해 피실험자들은 정부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뇌의 손상이 심했던 사람일수록 뇌의 활용도의 수치는 올라갔다. 바로 주인공 그 자신의 경우처럼. 그러니 정부는 피실험자들을 이용하여 정부의 요원으로써 활용할 방안을 고심 중이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더 어떤 강제성을 띠게 된다. , 주인공은 이제 정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정부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천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손쉽게 그 모든 것을 예상하고 도망자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어차피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런 대의적인 정부의 문제들이 아니다. 그리고 자유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서 그는 정부의 시선을 따돌린 채 주식 시장과 경매를 통해 소소한 벌이를 하면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그렇다고 정부가 포기할리는 결코 없다. 실제로 정부는 그를 유인하기 위해 그의 전 여자 친구를 범죄 방조죄로 체포했다. 하지만 그는 정부의 정보망에서 CIA 국장과 미국 상원의원의 스캔들 문제를 알아내 협박함으로써, 그의 전 여자 친구를 무죄 방면시켰다. 사실, 그에겐 그런 것들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천재가 되어버린 지금, 그에게 당면한 문제는 그가 가장 추구할 수 있는 천재다움, 다른 말로 표현해서 아름다움이다. 왜냐하면 자기 이외의 그 누구도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른 적도 없고, 이를 수도 없기에, 가장 자신다운 것, 그 때문에 오직 자신만이 추구할 수 있는 어떤 경지만이 그의 관심의 대상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책에선 게슈탈트라고 표현되어 있다. 부분으로써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의식의 흐름, 음표를 보고 음률과 가락을 떠올리고, 하나의 단어를 봄으로써 문장과 나아가 글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의식, 아마 자기완성의 극의를 저자는 이렇게 파악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글속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고, 뇌의 혁명적 변화를 통해 신체의 변화와 운동 과정을 이끌어내기까지 한다. 하지만 여기에 제동이 걸린다. 누군가 자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 그가 그에게 암시를 보낸다. 만나야 한다고.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의 친구가 아니다. 그의 적이다. 그것도 절대적인 적.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그 절대적인 적이 윤리학적 관점에서 전 인류를 구원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혼자서 미학을 추구하는 주인공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 책에선 보편 인류에서 벗어난 뛰어난 천재성, 그 자체가 바로 잠재적 위험으로 대두될 수 있다는 것을 주인공의 적은 가정하고 있다. 어차피 살아있는 한 두 인물의 조우는 필수불가결하다. 윤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이 그의 재능을 썩히고 인류에 이바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윤리학적으로 보편을 추구하는 자에게 미학적 존재란 늘 걸림돌이 될 확률이 존재한다. 때문에 둘은 각자 익혀온 방식으로 서로 대화 후,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번 씩 공격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안타까운 현상이 발생한다. 외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주인공의 공격 패턴이란 독특하고 독창적이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윤리학이라는 보편적 관점을 기반에 둔 주인공의 적은 수용력이 폭넓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주인공은 그의 적이 걸어놓은 암시를 해독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의 나락으로 향하는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적이 걸어놓은 암시는 이해이며, 주인공은 이해하고, 이해가 작용하는 수단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붕괴한다.

 

  사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 글이 왜 SF이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초반의 설정 빼고는 거의 철학적 내용에 가까웠고, 마지막 장면은 그 미학과 윤리학이라는 그 대척점을 표현해냈으니, 도저히 SF 소설로 읽히지 않았다. 물론, 설정에 관해 치열하게 파고들어서 허점을 찾아낸다면, 그런 게 SF라면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실제로 얼마 전 하반신 불구의 환자를 전기 치료를 통해 중추신경에 자극을 줌으로써, 보행기구에 의지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 더 이상 뉴런의 신경 중추돌기의 복구가 환상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 소설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가정, 뇌의 99%의 가까운 능력을 끌어내는 이야기는 별개이다. 그러나 이는 SF이니 얼마든지 너그럽게 가정으로 봐줄 수 있다고 내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여하튼 중요한 건, 그 소재가 어떻게 차용되었든, 이 소설은 과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학과 윤리학에 관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그것도 나름 잘 짜인 논리로 무장되어 있다. 미학이 가진 특징 중 하나인 창조성은 보편성과 대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보편은 모든 개성을 아울러 하나로 엮는 힘과 권력이지만, 창조는 그에 반하여 또 다른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개성인 까닭이다. , 한 마디로 이 글에서 말한 것처럼 전에 없던 게슈탈트이다. 그런데 반대로 윤리는 보편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왜 창조를 억누르는 힘과 권력이 되어야 하는지 이 글에 명약관화하게 보여주었다고 나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창조의 관점에서 언제까지 보편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상황을 보여주었다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세상과 소통하지 않은 채 창조 그 자체만을 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있다면, 그는 신일 것이다. , 미학을 추구하는 창조자는 필연적으로 보편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반대로 보편을 추구하는 입장에선 굳이 미학적 관점의 창조를 이해할 이유가 없다. 도리어 그것은 보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공산이 큰 까닭이다. 그러하기에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윤리를 추구하는 보편의 입장에선 늘 이해와 소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수의 개성을 하나로 엮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심지어 보편이 추구했던 이해와 소통마저 사라진 채, 하나의 권력만이, 오직 힘만이 남게 된다. 왜 늘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일까? 창조와 이해가 함께할 수 있는 자리는 없는 것일까? 오해할 수 있는 여지는 없는 것일까?

    

 

P.S 이십대 때 썼던 오해의 이유라는 자작시를 덧붙인다.

 

이해했다고 말했던 나의 모든 기억들을 부셔버린다

너를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여진 간격으로

마음껏 나래를 펴서 너를 자르고 붙이고 꿰매어 이제

너는 새롭게 태어난 의미들-너에게 결코 고백할 수 없어

오직 너는 나만의 부풀려진 모호한 꿈 덩어리처럼 내 것

영원히 살아서 지울 수 없는 어느 순간에 사라진 형이상학적

이미지, 아우라, 신비, 경이로운 상심

헝클어진 토사물처럼 난잡하여도 아름다웠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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