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소리

 

 

찬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옷소매가 내내 펄럭이다

꽁꽁 얼어붙는다

대기에 맺힌 바람이

옷깃에 스며든다

언제 어느 때 바람이

내게서 떠나갈까

맺힌 바람이

적을 둘 곳이 없어

슝슝 성성 흉흉 헝헝

숭숭한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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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눈썹

 

 

눈 안에 자꾸 무언가 걸려

손마디 등으로 눈을 부빈다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는데

자꾸 눈시울만 불거져

눈물이 똑똑 흘러내린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렇게

흘러내리다 보면

괜찮을 거라고 기다려보지만

계속 눈 안에 자꾸 무언가 아려

손가락으로 눈을 들쑤신다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는데

자꾸 눈시울만 불거져

또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대체 그깟 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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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 대한 기억

 

 

몸에 병이 생기자 어머니는

자신이 어릴 때 나를 때려서 그렇다고

연신 자신 탓을 하신다

기억 회로의 어딘가가 고장났는지

가끔 기억을 잃어버리는 나는

언제 어머니가 나를 때렸는지

기억하지 못 한다

 

큰 빚을 지고 어머니께 가면

어머니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면서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매 번

대신 빚을 갚아주신다

기억 회로의 어딘가가 고장났는지

가끔 기억을 잃어버리는 나는

언제 어머니가 내 빚을 갚았는지

기억하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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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신의 부재 - 진정한 신앙에 대한 개인적 물음

 

 

  설마, SF 소설을 읽으면서 종교에 대한 내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재정리해 볼 시간을 가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실상, 이 단편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목록 중에 거의 SF와 무관한 유일한 소설이라고 보아도 좋을 거 같다. , 제목부터 종교적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 정말 놀랐던 건, 종교적 냄새 차원을 떠나 진짜로 종교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끝까지 내 주관이 들어간 이야기이다. 한때 신학생이었지만 이제는 교회도 안 다니고, 신에 대해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거기에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종교 다원주의자이거나, 혹은 종교의 거대한 물음에 대한 담론을 다소 꺼리는 그러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는 중요한 인물이 세 명 나온다. 한 명은 주인공은 닐 휘스크란 인물이고, 또 다른 인물은 그 반대 축에 속한 제니스란 인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소 중도적이거나 혹은 다소 평범하고 일반적인 입장의 이선이란 인물, 이 셋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이 소설은 천사 강림이라는 매우 신비적인 요소를 섞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사탄의 현시라든가, 지옥의 설정이 현실과 똑같다는 가정, 예를 들어 건물도 있고, 사람들도 평범하게 결혼하고 애 낳고 살고, 뭐 그런 가정, 그리고 천국으로 올라가는 영혼들에 대해 인간들이 볼 수 있다는 상황까지, 모두 다소간의 극단적인 신비한 설정들을 해놓았다. 그렇지만 읽다보면, 이 소설이 설정만 신비적일 뿐, 매우 현실적인 소설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러기위해선, 각 인물에 대해 조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단, 주인공인 닐 휘스크는 다리에 선천적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이것을 신의 의지의 개입이라고 표현한다. 그것도 다소 징벌이거나 저주에 가까운. 하지만 주인공은 그러한 생각을 가져본 적도 별로 없고, 굳이 신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그냥 그것은 가지고 태어난 기형일 뿐 그것이 무슨 신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천국? 이 글속에선 당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굳이 자신이 가고 싶다는 욕망을 별반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사건을 통해 그는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천사강림이란 신비한 사건을 통해 그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된다. 하지만 왜? 천사강림이란 거룩하고 신비한 사건에서 아내가 죽는단 말인가? 이 글속에선 천사강림이 결코 거룩하고 아름답게만 그려져 있진 않다. 그것은 사실상 무척이나 잔혹한 사건이다. 천사라는 인간이 담을 수 없는 존재의 현시를 통해 누군가는 그 거룩한 빛에 눈이 멀게 되고, 누군가는 강림이 가져오는 강한 후폭풍에 차가 뒤집혀 죽고, 누군가는 깨어진 유리 파편에 맞아 죽게 된다. 그의 아내의 경우 마지막 케이스였다. 그런데 또 아이러니한 건 이 죽음들을 통해 그 누군가의 영혼들이 천국으로 가는지, 지옥으로 가는지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아내의 경우는 천국으로 갔다. 바로, 여기서 주인공의 딜레마가 생기게 된다. 그는 이제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천국을 가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없던 믿음이 어떻게 그냥 막 생겨날 수 있겠는가? 천사강림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나, 그 유족들 모임에 참여해 보아도, 그는 그 자신이 그들과 다른 대척점이 있다는 사실만 느낄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는 천국을 그리고 신을, 자신의 아내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할 뿐, 신 그 자체에 대해 혹은 천국에 대해 아무런 동경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가 가고 싶은 천국은 그저 자신의 아내 사라가 존재하는 천국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사라가 지옥에 갔다면, 그는 아마도 서슴지 않고 지옥에 가기 위해 자살을 택했을 것이다. 이러던 차에 그는 자신이 속해 있던 그룹에 매우 유명한 설교자 제니스와 만나게 된다. 그녀 역시 태어날 때부터 주인공 닐 휘스크처럼 다리에 선천적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다. 다만, 다소 달랐던 것은 그녀의 경우 부모님에 의해 선천적 기형을 축복과 긍지로 여기며 자라났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그녀는 그녀가 가진 결함에도 불구하고 늘 당당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녀 자신 또한 그러한 장애가 자신을 향한 신의 강한 메시지이며 축복이라 여겼기에, 설교자가 되어 수많은 동조자들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뜻밖에 사건이 벌어진다. 그녀 자신이 천사강림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때 없던 다리가 갑자기 생겨나게 된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상황에 이제까지 얻었던 확신이 다소 흔들린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신의 뜻을 알 수가 없는 까닭이다. 똑같이 천사강림을 경험했는데, 누군가는 유리 파편에 맞아 죽고, 누군가는 없던 다리가 생겨난다. 물론, 그냥 이것이 그녀에게 내린 축복이라고 단순히 그렇게 말하면 모두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까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본보기로써 존재했던 그녀 자신이, 더 이상 같은 입장이 아닌 상태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당신들도 어떤 시련을 극복하면 자신처럼 신이 축복을 줄 거라 어떻게 확신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솔직히 그 질문에 대해 자신이 천사강림 이후 다소간의 난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설교자의 불확실한 믿음을 누가 따라가겠는가? 주인공 닐은 분노한다. 제니스는 누가 보아도 믿을 수 없는 축복을 받았건만, 불평하고 있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대척점에 있는 두 인물과 다르게 이선이란 등장인물이 있다. 그의 경우 늘 천사강림을 통해 무언가 확실한 체험을 갖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에겐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겐 무언가 특별한 소명이 있을 거라고, 늘 그렇게 믿고 살아왔지만, 어떤 눈에 보이는 징표도 없이, 아니 어떤 확실한 경험도 없이 어떻게 그가 그 소명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때문에 그는 평범한 삶을 택하게 된다. 도서관 사서가 되어 클레어란 여자와 결혼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는 늘 자신에게 나타날 운명의 징후를 대비해 줄곧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혹은 그냥 우연인지는 몰라도, 아주 멀리서지만 제니스에게 나타났던 천사강림의 여파로 생긴 지진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무언가 확실하지가 않았다. 1분간의 지축의 흔들림 속에 신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긴 했지만, 다른 경험자들과 달리 그에겐 어떤 축복도 저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소거법에 의해 천사강림 경험자들 속에서 불확실성을 느끼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뜻밖에 제니스란 이름을 그는 보게 된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세 사람이 엮어지는 지점을 이 소설에서는 성지순례라는 설정으로 풀고 있다. 그런데 이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성지순례와는 많이 다르다. 여기서의 성지순례는 순수하게 천사강림을 경험하기 위한 성지순례이다. 다시 말해서, 천사가 천국을 자주 오가는 장소가 성지이고, 그곳에 가서 무언가 확실한 징표를 얻기 위해 가는 순례가 성지순례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90%이상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나머지 10%는 기적적인 치유라는 체험의 가능성이긴 하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경우 어떻게 성지순례라는 결단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과정은 돌아 돌아갔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숱한 살인을 한 어떤 살인마가 사형 때 천국에 가는 일이 있었다. 그 사건을 통해 희생자 유족들은 분노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희대의 살인마가 분명 사형을 앞두고 엄청난 회개를 했을 거라는 가정을 했다. , 그 자신도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천국에 가서 사라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거의 자살의 형태를 띤 성지순례이긴 하지만, 어차피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는 그로선 해볼 수 있는 마지막 도박이었다. 반면에,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제니스는 자신에게 신이 내린 치유의 축복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어차피 더 이상 그녀 자신의 불확실성을 가지고 대중 앞에 설교자로 선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왜 신은 그녀에게 치유란 축복을 주어 그녀를 흔들리게 했단 말인가? 그녀로선 신의 뜻을 알 길이 도저히 없었다. 이에 그녀는 진정한 신의 뜻을 알기 위해 성지순례를 결심하게 된다. 마침 그녀와 함께 교류를 하던 이선도 적극 동참하여, 성지순례 장소로 둘은 함께한다. 그리고 우연히 주인공 닐과 조우하여, 같은 차를 타고, 천사강림의 순간을 동시에 맞이하게 된다. 각기 전혀 다른 형태로써. 우선, 제니스의 경우는 그 자리에서 천사의 찬란한 빛에 바로 눈이 멀게 된다. 그와 동시에 그 빛의 충만함으로 인해 더 이상 그 어떤 의심도 없는 황홀한 신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며, 축복이다. 다시 말해, 천국 그 자체이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 있던 주인공 닐은 역행 아닌 역행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또한 제니스와 같이 이루 말 할 수 없는 신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더 이상 사라가 필요치 않은 천국 그 자체의 황홀함을 맛본다. 그런데 그의 영혼은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택한 성지순례는 처음부터 자살의 의도성이 다분했던 까닭이다. 이선은 이 둘의 교차하는 운명을 목도하고, 그 자신의 소명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 둘에 대한 신의 선택이 너무나 극명했던 까닭이다. 제니스의 경우 천국 그 자체를 경험하게 되어, 더 이상 그 어떤 간증을 해도 의미가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천사강림을 목격하고 제니스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의 간증은 도저히 일반 사람들의 입장에선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었던 선례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냥 행복하다고, 신의 사랑은 도저히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이렇게 막연하게 설명하는데, 어떻게 인간의 말과 경험으로 이해하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더한 경우인 주인공 닐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순간 똑같이 천국을 경험하면서, 신의 사랑을 느낀 그는 대체 왜 지옥으로 가야만 한단 말인가? 아무리 자살을 염두에 두고 간 성지순례가 할지라도, 똑같이 회개했는데 왜 희대의 살인마는 천국으로 가고, 그는 지옥으로 가게 된 것일까?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정의란 기준, 휴머니즘이란 기준에 입각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를 설파할 수 있는 사람은 목격자였던 이선밖에 없을 것이다. 끝으로, 이 소설은 지옥을 간 주인공을 통해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이제 주인공은 천국 그 자체를 경험한 사람이다. 더 이상 그의 아내와 함께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가 간 지옥은 신이 없다. 현실과 똑같이 건물들이 있고, 똑같이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만, 영원히 그곳엔 신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알고 있다. 그가 영원한 신의 부재라는 그 절망 속에서도 영원히 신을 사랑할 것임을, 영원히 천국을 꿈꿀 것임을.

 

  이제 길게 늘어놓았던 이 소설에 대해 조금은 나름으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먼저, 제니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히, 중요한 부분인 마지막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대체 제니스가 느낀 신의 사랑이란 건 무엇이란 말인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신의 사랑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정말 이해하기 힘든 말이며,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조심스레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 까닭으로 고등학교 때 내 모든 삶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노래는 찬송가나 복음성가 아니면 듣지도 않았고, 겨우 고1 겨울방학 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주제에 매일 친구들한테 신의 사랑에 대해 늘어놓고, 전도하고, 그렇게 20명이 넘는 친구들을 교회에 데려오고, 결국 아무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우리 집안에서 신학대를 가겠다고 가출까지 해서 승낙을 받아 나는 기어이 신학대를 갔다. 신에 대한 사랑 빼고는 다른 그 무엇도 보이지가 않았다. 도무지 가슴을 주체할 수 없고, 하루하루 행복해서, 주위 사람 모두가 나를 예수에 미친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는 왜 신학대에 가서 변하게 된 것일까? 지금 거의 무신론에 가까운 신념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 내 자신에게 그것보다 더 뜨거웠던 감정을 느껴본 적 있느냐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그런 신을 포기하고 버렸느냐? 왜 심지어 신을 부정하느냐? 또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결국, 신학대를 가서 배운 너의 어설픈 지식들이 너를 병들게 하고, 너의 신앙을 앗아갔다고 누군가 나 대신 대답한다면, 나는 아마 그렇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성서를 분석하고 쪼개 읽기 시작하면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고, 거기에 신학과 철학을 배우면서 나도 모르게 시나브로 젖어들었으니까. 그 어떤 부인도 부정도 할 길이 없다. 다만 그럼에도 정리할 건 정리해보고 싶다. 아마도, 가장 처음으로 봉착한 문제는 진리냐 진실이냐는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제니스의 경험과 유사하다. 진리를 신봉하는 사람에게 진실의 잣대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 모든 의심은 시작된다. 그와 동시에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성서의 무오성이란 절대성에 대해 의구심 또한 수반된다. 왜냐하면 진실은 더 이상 신의 영역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엄격한 잣대인 까닭이다. 그런 이유로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검열을 시작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이제까지 자신에게 가장 잣대가 되었던 기준인 성서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왜 사복음서의 결들이 저마다 다른지, 왜 바울은 직접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도 않았는데 사도로써 불리는지, 하나하나 의구심이 든다. 그때 가장 내게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은 특히 사도 바울의 문제였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제자들이 거의 순교를 하면서, 교회가 당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더 이상 살아 숨 쉬는 구원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로마라는 대제국이 가진 정신적 유산인 그리스 철학과의 피할 수 없는 논쟁이었다. 이때 바울이 등장했다. 예수쟁이들을 때려잡는데 선봉장이었던 그 자신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빼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쓰레기일 뿐, 아무 가치도 없는 거라고, 설파하면서.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그 아무 것도 아닌 쓰레기에 불과한 그의 그리스 철학에 관한 지식들이 그 당시 로마인들과 싸우는 무기가 되었다. 사복음서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신약을 집필한 바울의 성서는 대충 봐도, 사복음서와 완전히 결이 다른 느낌을 파악할 수 있다. 논리적이고 치밀하게 그는 그리스도의 사상을 설법하고, 그 반대 이론에 대한 나름의 변증법을 펼친다. 신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바울이 그리스 철학이라는 맥락을 이용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도구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거의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모든 세상의 것들이 부차물이고, 쓰레기일 뿐이라는 사상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맥락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기 시작할 때, 굳건했던 신앙의 틈이 서서히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을 맥락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리고 그 맥락을 알았기에 바울이 사도로써 제 역할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성서 이외의 그 맥락들에 대해 어떻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여기서 누군가는 그럼 너도 바울처럼 그 맥락들을 수단으로써 잘 이용했으면 그만 아니냐 하고 되물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랬다면 나는 분명 지금 목사를 하고 있거나, 아니더라도 최소한 교회는 다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첫 시작이 진리인가, 진실인가의 문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서 묻는 물음이다. 처음부터 진리의 입장에서 출발했다면, 아마 나는 그 선에서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의 기준에서 출발한 그 순간, 내겐 이미 진리가 가진 브레이크 기능은 어느 정도 상실해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 때문에 나는 성서도 진리가 아닌 맥락으로 읽기 시작했다. 어떤 부분이 신화화 되었는지, 그 신화화 과정을 통해 어떻게 성서란 큰 맥락에서 상징으로 읽히는지,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점점 진리와 멀어져갔다. 물론, 이 지점은 신학서적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나는 불트만의 성서의 비신화화 사상과 폴 틸리히의 성서에 관한 상징이론에 대해 일정부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거기에 그전까지 쓰레기라 치부했던 맥락들, 노자, 장자, 불교, 여타 다른 숱한 책들의 영향이 덧보태졌다.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 진리에 대해 남은 것은 무엇일까? 지금 생각해볼 때, 거의 없었다. 다만 진리가 주었던 엄청난 경험, 그 경험에 대한 추억의 실마리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방황하는 한 젊은이의 초상이 있었을 따름이다. 물론, 어떻게 거기까지 비약이 이를 수 있느냐 또 누군가 묻는다면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성서를 맥락으로 읽고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내게 있어서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 세상과 별개로 떨어진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 대한 혹은 각 개인의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구원으로 읽혔다. 그 여실한 예가, 그때까지 전혀 별개로 보던 지옥의 불과 성령의 불을 똑같은 불로 해석하면서, 왜 누군가는 같은 불에 지옥을 경험하고, 왜 또 누군가는 천국을 경험하는지 의구심을 품었고, 신의 그 진리에 대해 부인할 의지를 품게 되었다. 동시에,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포도나무 가지 비유에 대해서 조금은 역설적인 해석을 하게 되었다. 원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포도나무이고, 신자인 우리는 가지인데, 메마른 가지는 불살라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부분은 생명의 주체가 되는 포도나무 그 자체일 것이다. 아니면 메마른 가지가 불살라진다는 신앙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한 부분에 대해 초점을 맞출 것이다. 사실, 맥락상 그것이 옳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아직도 부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상징으로 성서를 보는 순간 달라진다. 왜냐하면 상징은 기존의 의미를 새롭게 재해석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메마른 가지가 왜 불살라져야 하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왜 불살라짐으로써 하나의 포도나무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지 이유를 묻게 되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처럼, 하나의 메마른 가지가 잘려버린 그 이유로 십자가에서 하나의 거룩한 표징이 되어 마치 불살라진 것처럼, 나에게 잘린 가지는 역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에 대한 표징으로 읽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과한 자기 투영이거나 자기 투사를 시켰다. 내가 바로 그 잘린 가지라고. 물론, 이 맥락은 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혀 다른 의미로써, 잘린 가지 자체에 대한 애착을, 그렇게 잘려버릴 수밖에 없는 가지에 대한 연민을, 내 자신에게 투영시켰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린 가지로써 내 자신을 투영시킨 까닭으로, 나는 신앙을 부인하게 되었다. 물론, 신의 존재, 그런 거대 담론에 대해 완전히 포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무신론자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러한 거대한 빛, 마주하면 그 나머지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그런 거대한 빛에 대해 나는 지금 부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내가 문학으로 돌아서고, 문학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런 거대한 빛보다 반딧불이 빛처럼 소소하고 마주할 수 있는 빛을 동경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탓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가지 내 스스로 반문을 하게 된 점은 있다. 왜 나는 이 글의 주인공처럼 끝까지 절망일지언정 신을 사랑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내 스스로 잘린 가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으로 해석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이라는 건 혹은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진정한 사랑이라는 건, 그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아무런 바람 없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서의 지옥의 불과 성령의 불을 똑같은 불로 해석했다면, 사실 지옥의 불이면 어떻고, 그것이 성령의 불이라면 또 어떻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다르게 역행한 어떤 존경했던 선배의 신앙 고백을 통해, 바울과 고백과 똑같은 신앙 고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모든 것은 쓰레기일 뿐이라는 고백을 통해, 그 절정인 상징인 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그 고백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 적이 있다. 나를 처음으로 시로써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준 선배였기에 충격이 더 했을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내 자신이 똑같이 선배와 그런 고백을 했었던 사람이기에 더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이고,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사랑이란 걸 나는 알고 있던 이유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그것이 너무나 공포스럽다 말하고 있다. 심지어,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잔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의 사랑은 그것이 어떤 신의 모습일지라도 나의 이런 공포심과 휴머니즘과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런 진리일지라도 나는 그곳으로 결코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니, 그것이 정말 내 생에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가장 커다랗고 엄청난 기쁨과 행복이었을지라도, 그것이 내게 있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다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이미 진실은 진리를 어느 순간 인간의 판단 영역에서 저 멀리 밀어내고, 인간의 진실이 지닌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은 모순으로 가득함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 모순이 인간 자체의 존재 기반이며 인간 자체를 대변하는 것으로 믿는 이상, 나는 모순 가득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에 얽매여 숨을 헐떡이면서 그렇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숨이 멈추길 기다리고 싶다. 어느 가을 밤 우연히 마주한 반딧불이 빛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것처럼 그렇게, 내 눈 안에서 사라져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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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이해 - 오해의 이유를 찾아서

 

 

  어떤 글을 읽고 나서 내내 맺히는 경우가 있다. 그 글의 여운이나 강한 전율을 받을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더러는 무언가 다 게워내지 못한 찝찝함 같은 것을 느낀 경우에도 그렇다. 테드 창의 이해같은 경우가 그랬다. 어떤 의미인지,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다 알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 맥락 하에서 토론도 해보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아직도 다 못한 이야기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랬던 걸까? 먼저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테드 창의 이야기 전개 방식이 내게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테드 창의 소설은 SF이다. 그런데 동시에 SF가 아니다. 언어와 구성 소재는 모두 SF의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매우 철학적이고, 심지어 신학적이기까지 하다. 둘째는 테드 창의 이해속에 나온 미학과 윤리학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아마 이것은 소설 그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자신을 위한 정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내 아렸던 마지막 장면을 다시 재구성해봄으로써 무언가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해본다.

 

  소설의 초반부는 주인공의 치료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빙판 사이 얼음물에 빠져 거의 1시간 가까이 있으면서 주인공은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깨어나면 그것은 악몽이고, 병원 침상에 누워있고, 또 다시 얼음물 속에 잠긴 악몽을 꾸고, 다시 깨고. 그 과정 속에서 그는 그가 호르몬 K에 의해 손상된 뉴런이 복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시에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천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지점부터 발생하게 된다. 이 호르몬 K의 성공적 실험에 의해 피실험자들은 정부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뇌의 손상이 심했던 사람일수록 뇌의 활용도의 수치는 올라갔다. 바로 주인공 그 자신의 경우처럼. 그러니 정부는 피실험자들을 이용하여 정부의 요원으로써 활용할 방안을 고심 중이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더 어떤 강제성을 띠게 된다. , 주인공은 이제 정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정부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천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손쉽게 그 모든 것을 예상하고 도망자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어차피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런 대의적인 정부의 문제들이 아니다. 그리고 자유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서 그는 정부의 시선을 따돌린 채 주식 시장과 경매를 통해 소소한 벌이를 하면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그렇다고 정부가 포기할리는 결코 없다. 실제로 정부는 그를 유인하기 위해 그의 전 여자 친구를 범죄 방조죄로 체포했다. 하지만 그는 정부의 정보망에서 CIA 국장과 미국 상원의원의 스캔들 문제를 알아내 협박함으로써, 그의 전 여자 친구를 무죄 방면시켰다. 사실, 그에겐 그런 것들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천재가 되어버린 지금, 그에게 당면한 문제는 그가 가장 추구할 수 있는 천재다움, 다른 말로 표현해서 아름다움이다. 왜냐하면 자기 이외의 그 누구도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른 적도 없고, 이를 수도 없기에, 가장 자신다운 것, 그 때문에 오직 자신만이 추구할 수 있는 어떤 경지만이 그의 관심의 대상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책에선 게슈탈트라고 표현되어 있다. 부분으로써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의식의 흐름, 음표를 보고 음률과 가락을 떠올리고, 하나의 단어를 봄으로써 문장과 나아가 글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의식, 아마 자기완성의 극의를 저자는 이렇게 파악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글속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고, 뇌의 혁명적 변화를 통해 신체의 변화와 운동 과정을 이끌어내기까지 한다. 하지만 여기에 제동이 걸린다. 누군가 자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 그가 그에게 암시를 보낸다. 만나야 한다고.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의 친구가 아니다. 그의 적이다. 그것도 절대적인 적.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그 절대적인 적이 윤리학적 관점에서 전 인류를 구원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혼자서 미학을 추구하는 주인공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 책에선 보편 인류에서 벗어난 뛰어난 천재성, 그 자체가 바로 잠재적 위험으로 대두될 수 있다는 것을 주인공의 적은 가정하고 있다. 어차피 살아있는 한 두 인물의 조우는 필수불가결하다. 윤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주인공이 그의 재능을 썩히고 인류에 이바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윤리학적으로 보편을 추구하는 자에게 미학적 존재란 늘 걸림돌이 될 확률이 존재한다. 때문에 둘은 각자 익혀온 방식으로 서로 대화 후,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번 씩 공격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안타까운 현상이 발생한다. 외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주인공의 공격 패턴이란 독특하고 독창적이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윤리학이라는 보편적 관점을 기반에 둔 주인공의 적은 수용력이 폭넓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주인공은 그의 적이 걸어놓은 암시를 해독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의 나락으로 향하는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적이 걸어놓은 암시는 이해이며, 주인공은 이해하고, 이해가 작용하는 수단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붕괴한다.

 

  사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 글이 왜 SF이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초반의 설정 빼고는 거의 철학적 내용에 가까웠고, 마지막 장면은 그 미학과 윤리학이라는 그 대척점을 표현해냈으니, 도저히 SF 소설로 읽히지 않았다. 물론, 설정에 관해 치열하게 파고들어서 허점을 찾아낸다면, 그런 게 SF라면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실제로 얼마 전 하반신 불구의 환자를 전기 치료를 통해 중추신경에 자극을 줌으로써, 보행기구에 의지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 더 이상 뉴런의 신경 중추돌기의 복구가 환상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 소설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가정, 뇌의 99%의 가까운 능력을 끌어내는 이야기는 별개이다. 그러나 이는 SF이니 얼마든지 너그럽게 가정으로 봐줄 수 있다고 내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여하튼 중요한 건, 그 소재가 어떻게 차용되었든, 이 소설은 과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학과 윤리학에 관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그것도 나름 잘 짜인 논리로 무장되어 있다. 미학이 가진 특징 중 하나인 창조성은 보편성과 대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보편은 모든 개성을 아울러 하나로 엮는 힘과 권력이지만, 창조는 그에 반하여 또 다른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개성인 까닭이다. , 한 마디로 이 글에서 말한 것처럼 전에 없던 게슈탈트이다. 그런데 반대로 윤리는 보편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왜 창조를 억누르는 힘과 권력이 되어야 하는지 이 글에 명약관화하게 보여주었다고 나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창조의 관점에서 언제까지 보편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상황을 보여주었다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세상과 소통하지 않은 채 창조 그 자체만을 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있다면, 그는 신일 것이다. , 미학을 추구하는 창조자는 필연적으로 보편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반대로 보편을 추구하는 입장에선 굳이 미학적 관점의 창조를 이해할 이유가 없다. 도리어 그것은 보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공산이 큰 까닭이다. 그러하기에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윤리를 추구하는 보편의 입장에선 늘 이해와 소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수의 개성을 하나로 엮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심지어 보편이 추구했던 이해와 소통마저 사라진 채, 하나의 권력만이, 오직 힘만이 남게 된다. 왜 늘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일까? 창조와 이해가 함께할 수 있는 자리는 없는 것일까? 오해할 수 있는 여지는 없는 것일까?

    

 

P.S 이십대 때 썼던 오해의 이유라는 자작시를 덧붙인다.

 

이해했다고 말했던 나의 모든 기억들을 부셔버린다

너를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여진 간격으로

마음껏 나래를 펴서 너를 자르고 붙이고 꿰매어 이제

너는 새롭게 태어난 의미들-너에게 결코 고백할 수 없어

오직 너는 나만의 부풀려진 모호한 꿈 덩어리처럼 내 것

영원히 살아서 지울 수 없는 어느 순간에 사라진 형이상학적

이미지, 아우라, 신비, 경이로운 상심

헝클어진 토사물처럼 난잡하여도 아름다웠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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