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강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0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오정희의 ‘불의 강’ - 그토록 생생한 적의와 마주하여

 

 

  오정희의 단편집을 읽어가는 동안 내내 ‘별사’와 ‘어둠의 집’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오정희의 다른 글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유독 그와는 별개로 ‘불의 강’이란 글이 지금도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다. 그렇다고 그 글이 ‘별사’와 ‘어둠의 집’과 비견될 정도로 뛰어났느냐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론 ‘동경’을 읽으면서 5년 전 내가 쓴 품평이 얼마나 설익고, 또 얼마나 ‘동경’을 설읽었는지를 자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옛우물’의 글들 경우엔 개인적으로 완연한 노년 작가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불의 강’일까? 지금부터 내가 할 해석이 특별하기 때문에? 아니다.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내가 해석하려는 방식은 개인적으로 다소 금기시하는 상징적 해석의 방식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이러한 방식을 취해 이 작품에 대해 해석을 시도하려는 까닭은 이 글 가운데 단 하나의 단어 ‘생생한 적의’란 그 단어에 나도 모르게 몰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1평짜리 아파트 6층 꼭대기에서 살고 있는 부부는 몇 해 전 아이가 죽고서, 적적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몇 년이란 시간만으로 갑자기 둘은 모든 것에 시들해지면서, 늙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가 죽고서 한 동안 남편은 밤늦도록 일하면서, 집에서 혼자 적적할 부인을 걱정해 자주 전화를 걸어주곤 하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그들이 결혼 초에 가끔 저녁 산책을 나가곤 했던, 하얗게 뻗은 강둑이 강줄기를 따라 U자로 휘어 도는 구비에 솟아 있는 오래된 발전소 건물이다. 잿빛 우중충한 3층 구조인 그 건물은 비교적 작은 화력 발전소였으나,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폐쇄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원래 목적과 달리 해산물의 하치장으로 쓰이다, 제빙업자에 의해 얼음 창고로도 쓰였다가, 제빙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다시 비어있게 되었고, 지금은 때때로 갱 영화의 촬영 현장으로 쓰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남편은 언젠가부터 늘 그곳에 시선을 두기 시작했고, 동시에 밤마다 외출을 나갔다. 그리고 담배도 피지 않는 그가 성냥갑을 늘 몸에 지니고서, 밤늦게 불에 탄 재 냄새를 흠씬 풍기고서 돌아왔다. 하지만 부인은 남편의 그런 잦은 외출을 막을 자신이 없다. 물론, 너무나 심약한 남편이기에, 만약 그녀가 몇 마디만 한다면 그는 당장 밤 외출을 중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시간 동안 남편과 어떻게 시간을 메울지 자신이 없다. 때문에 그녀는 차라리 그녀 몰래 시를 쓰던 남편을 떠올린다. 그렇게 자신의 터뜨리지 못한 발화를 삼키던 그의 시라는 발화를 그리워한다. 동시에 그 때문에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숨겨지지 않는 모든 발화의 전조에 대해 불안해한다. 대체 그는 밤마다 어디서 자신의 타오르지 못한 불꽃을 터뜨리는 것일까? 남편이 나간 동안 그녀는 현관 문틈 사이에 잠깐 외출을 나갔다 오겠다는 메모를 남기고서,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 모든 시발점인 발전소로 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발전소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녀의 알 수 없던 생생한 적의를. 남편은 처음에 발전소에 대해 소개하면서, 어릴 적 전쟁 직후 발전소가 그와 같은 아이들의 눈에 얼마나 대단해보였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동시에 그 거대함 때문에 발전소에 대한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온갖 소문들로 한없이 부풀려져, 자신에게 어떻게 견고한 적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그 때문에 그는 결국 단 한 번도 발전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고백과 함께. 그런 발전소가 이제 곧 헐리게 된다. 어차피 달리 용도도 없는 건물이 오십년 가까이 버려져 있었기에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발전소의 군데군데 판자가 떨어진 창에서 불빛이 새어나와 발전소 내부를 비추고 있다. 내부의 나선형으로 비틀려 올라간 가파른 층계를 뛰어오르는 남자들의 모습이 먼눈에도 확실히 잡혀오고 모여선 사람들의 윤곽이 불빛에 드러난다. 영화 촬영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남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다. 역시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도 그녀는 혼자서 선잠을 자다가 첫닭이 울기 전 들어온 남편을 껴안고서야 자리에 온전히 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스르르 긴장이 풀린 그녀는 잠시잠깐 잠에 빠져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녀는 사막 한복판에 꽃을 들고 있는 그를 본다. 그의 손에선 진한 자줏빛 꽃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사막은 붉은색 셀로판지를 통해 보듯 온통 붉은빛이다. 그 사막을 그녀는 그와 함께 건넌다. 그렇게 먼 길을 떠나는 그와 그녀를 위해 어느 술집 주인이 술 한 병을 건네준다. 하지만 그 사막을 다 건넌 후 마른 목을 축이고자 병을 땄을 때 병속에 든 술은 뜨거운 물이 되어 수증기로 피어오른다. 그때 그가 말한다. 마른 동남풍의 바람이 알맞게 분다고. 동시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온다. 그 소리에 그녀는 꿈에서 깬다. 그리고 불에 탄 재 냄새를 풍기며 현관 앞에 서 있는 남편을 본다. 남편은 발전소에서 불구경을 하다 겨우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녀는 그런 그를 자신의 가슴 깊숙한 품으로 안으며 그를 잠재우면서, 꽃보다 더 진한 어둠 속에서 메마른 목소리로 울고 있는 한 마리 삵을 보고 있는 듯한 쓸쓸함에 짐짓 소리 내어 우는 시늉을 한다.

 

  처음에 내가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떠올랐던 단 한 가지는 앞에서 말한 그토록 ‘생생한 적의’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 적의의 대상인 발전소에 대해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하필 발전소였을까? 그것도 더 이상 아무런 생산도 하지 못하는 발전소, 그리고 처음부터 유독 눈에 거슬렸던 굴뚝이란 단어... 사실, 여기에 내 나름 내용을 요약한 줄거리에는 굴뚝에 관한 이야기는 빠져있다. 그렇지만 소설 속에서 여자는 처음 발전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먼 강둑이 강줄기를 따라 U자로 휘어 도는 구비에 발전소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 굴뚝이 마치 자신의 6층 아파트 창 아래 바짝 다가와 창과 굴뚝 꼭대기가 직선으로 그으면 몇 미터 거리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어릴 적 너무나 거대하게 보여서 적의의 상징으로 남편에게 발전소가 자리 잡았던 것처럼, 부인인 여자에게도 역시 굴뚝으로 대변되는 발전소는 창을 가릴 만큼의 생생하고 거대한 적의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남편과 달리 굴뚝이라는 강조점에서 이상하게도 나는 남자의 성기를 떠올렸다. 아마 모양의 유사성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앞에서 이야기한 내가 개인적으로 금기시하는 상징적 해석이 바로 이 부분이다. 하지만 발전소와 남자의 성기가 계속 무언가를 생산해내야 한다는 점에서의 유사성은 이 소설에서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장 결정적으로 이 소설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주된 무거운 분위기는 이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소설은 은근히 더 이상 무언가를 생산할 수 없는 발전소에 빗대어 더 이상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남편의 무력함을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남편에게서 발화의 욕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편은 더 이상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그 이유로 더욱 발화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 발화는 더 이상 무언가를 생산할 수 없는 발전소의 마지막 폭발처럼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여기서 발화는 억압으로부터 발생한 폭력 그 자체이다. 때문에 남편과 부인 모두 생생한 적의로 대면할 수밖에 없고, 결국엔 발화는 생생한 적의에 대한 폭발이 아닌, 생생한 적의의 폭발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그럼에도 어떻게 그녀와 남편은 그 생생한 적의의 한 가운데서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조금도 뜨겁지 않은 화염 속에 누워서 서로 품으며 짐짓 우는 시늉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 소설의 적의의 폭발과 화해에 대해 나는 쉬 설명할 길을 찾지 못했다. 그 때문에 어쩌면 오래도록 뇌리 속에서 이 글이 잊히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화자가 그녀가 아닌 내 자신이 되어, 조금은 그 방향을 달리 밝혀보고 싶다. 사실, 내게 있어서도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내 생식기는 말 그대로 나의 치부이며, 그 까닭으로 생생한 적의의 대상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산해오지 못한 이 생식기의 발화의 욕망은 어쩔 수 없는 그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화력 발전소가 불을 뿜고, 그렇게 발화를 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듯이. 내게 있어서 나의 성기가 늘 발화를 소망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일 것이다. 그런데 왜 생생한 적의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 분명,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열패감이 자의식에 쌓여, 발화 그 자체가 자위란 이름으로 자기 파괴의 형태이거나 혹은 사랑 없는 섹스란 이름 아래 폭력으로 변해버린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미 이렇게 변해버린 생생한 적의의 대상인 발화의 욕구를 어떻게 폭파시켜 없애버릴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해서, 발화의 욕망을 생생한 적의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어떻게 포장할 수 있냐는 말이다. 말 그대로 발화의 욕망은 발화의 욕망 그 자체로 본능일 뿐이고, 생생한 적의는 그 욕망 너머에 존재하는 생명의 창조로 가지 못하는 열패감에서 기인한 것뿐인데, 어떻게 발화의 욕망이 생생한 적의가 아니라고 명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오정희의 소설 속의 여자도 남편의 방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물론, 완전한 이상 속에서 발화의 표현인 방화가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명명될 수는 있을 것이다. 쉽게 예를 들어서, 연인 간에 아이가 없더라도 끊임없이 애정표현으로 하는 섹스를 그 누구도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연인이 아닌 다른 여자들과 발화의 욕망을 풀 수밖에 없던 나 같은 남자들 혹은 여자들의 방화에 대한 엄연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그러한 방화가 이 사회에서 불륜이거나, 성매매란 이름의 범죄로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여기서 아주 작은 한 걸음만 더 나가게 되면 강간이거나 성폭력이 되어, 극도로 위험한 강력범죄가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에서 불륜과 성매매에 대해 생생한 적의를 느끼고, 그러한 방화에 범죄란 이름을 붙이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자명한 일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을 부인할 어떤 이론도 논리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그 생생한 적의의 대상인 방화가 인간의 본능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내 개인의 지극히 부끄러운 치부라는 점을 떠올려볼 때, 이와 화해할 방법들을, 아니 방화의 작은 숨구멍들을 트여줄 방법들이 있어야한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비록 짐짓 우는 시늉밖에 되지 않을지라도, 그렇게 조금도 뜨겁지 않은 화염 속에서 서로를 품고 있는 인간의 기이하기 짝이 없는 동물적 행위밖에 되지 않을지라도, 거기서도 누군가는 메마른 목소리로 울고 있는 한 마리 삵을 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인간은 저열한 자기모습을 타인을 통해 바라보며 연민하며 잠시잠깐 외로움을 달래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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