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 그 마법적이고 주술적인 시어를 담은 노래의 힘

 

 

  오랜만에 글을 통해 혼잣말들을 하기 시작해서일까? 갑자기 원래 개인적으로 가끔씩 느끼는 어떤 홀림이거나 기시감처럼 일을 하다가 무언가를 콧노래로 읊조리고 있었다. ‘연분홍 치마가 어쩌고저쩌고.......’ 어 무슨 노래지? 분홍이라는 어감 때문인지 순간 어이없게도 광복절 특사에 나오는 송윤아의 분홍빛 립스틱이란 노래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미 문장 속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듯이 떠올린 그 순간 느낀 그대로 어이없는 연상이었다. 차라리 봄날은 간다란 영화에서 할머니가 무언가를 연신 읊조리던 기억이 스쳐갔다. 그래! 무언가, 마법 같고 주술 같은 낮은 읊조림으로 약간은 홀린 상태에서 중얼거리던 노래....... 그래서 당장 인터넷에 노래, 연분홍치마라고 검색해보았다. 그러자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봄날은 간다에 왜? ‘봄날은 간다하면 떠오르는 김윤아란 고유명사가 아닌, 백설희, 이미자, 장사익, 한영애 등 조금은 더 고전적인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 노래가 주인공 할머니 테마곡으로 쓰였다는 검색내용도 보였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에 영화 봄날은 간다20대 중반쯤, 그래서 이제는 거의 기억도 없는, 단지 두 유명한 대사만 기억에 남아 있는 정도였다. ‘라면 먹고 갈래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당시 우리 세대 사이에서 유행어처럼 쓰이던 그 말, 나도 한 번은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 다시 말해서, 할머니가 읊조리던 그 노래와는 전혀 관계없이 영화 속 너무나도 예뻤던 이영애와 순진무구했던 유지태에 대한 기억만이 존재하는 영화다. 그런데 갑자기 왜 생뚱맞게 영화 속 할머니의 그 노래가 마법처럼 주술의 힘을 담아 어제부터 오늘까지 종일 내 입술에 맴돌게 된 것일까?

 

  어제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원곡 버전인 가수 고 백설희 님의 봄날은 간다를 들어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백설희와 이미자가 듀엣으로 부른 버전, 조용필, 주현미, 한영애, 장사익이 부른 버전을 차례차례로 들어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검색하다보니 복면가왕이란 프로그램에서 가수 린이 부른 버전까지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 약간 길이 틀어져 그 회 방송분 복면가왕을 다운받아 보게 되고 또 다시 다른 한 편 보게 되면서, 결국 원래 어제 다시 보려던 영화 봄날은 간다를 오늘 보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어찌됐든, 어제부터 오늘까지 가수 고 백설희 님의 노래 봄날은 간다에 대해 원하는 전반적인 정보는 대충 얻어낼 수 있었다. 아니, 왜 갑자기 홀린 기시감 같은 현상이 내게 벌어졌는지 대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말 그대로 홀렸고, 또 현재로선 기시감이란 단어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내 기억들은 조금씩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할머니의 노래는 내 생각과 달리 그렇게 홀린 모습도 주술적인 음색도 아니었다. 물론, 영화 속에서 할머니가 젊을 적 할아버지와의 사랑에 대한 기억으로 도피하여 약간의 치매기가 있는 것으로 나오기는 한다. 때문에 누군가는 할머니에 대한 그런 설정 자체가 할머니의 노래 음색을 반 미쳐서 나오게 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 사실 아주 짧은 장면이고, 게다가 가사도 1절의 초반부만 나오는 그 장면에서 할머니의 음색은 봄날의 추억에 대한 환희가 담겨있다. 영화 맥락상으로도 그 장면은 유지태가 이영애와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하면서 찬란한 봄날을 맞는 때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게다가 내 개인적으로 가장 어처구니없던 것은 영화 속 주인공의 할머니는 내가 기억하던 영화배우가 아니었다. 얼굴은 알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분이 할머니 역할을 했기에, 내 기억이 완전히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내가 백설희 버전의 봄날은 간다를 영화 속 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 음악파일 속에 장사익 버전으로 봄날은 간다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장사익 노래 중 그 노래를 자주 들었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내가 좋아하는 장사익 씨의 노래는 따로 몇 곡 정해져 있다. 아마 그래서 이곡저곡 마구잡이로 다운받는 와중에 아마 한두 번 정도 장사익 씨 버전으로 봄날은 간다를 들었을 거라 생각해본다. 그런데 사실 오히려 더 내게 친근하게 들린 버전은 한영애 씨 버전이었다. 아니,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뜨악이었다. 사실, ‘뜨악이란 원 표현이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고 꺼림칙하다.’란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근래 뜨악이란 단어는 무언가 신선한 충격을 받아 놀랐을 때 자주 쓰이곤 한다. 그렇다면 내 감정은 아마도 어제이거나 혹은 그 이전 언젠가도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상충되는 의미를 다 포함한 뜨악이라 말해야할 거 같다. 사실, 엄밀하게 따져서, 비록 내가 앞에선 상충된다 말했지만, 이 두 가지 뜻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너무 신선한 충격인데, 그것이 너무 마법 같고 주술 같아서, 섬뜩 놀라 피해버림으로써 기억에서 말소시켜버렸다고 말해야 할까? 그리고 지금도 이 감정은 비슷하다. 왜냐하면 이 곡에 있어서 한영애 씨의 그러한 곡 해석은 물론 신선하지만, 이 곡이 담고 있는 가사 본질의 아름다운 처연함을 다 살려낼 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 곡이 담고 있는 가사 본연의 시적인 힘에 대해서, 그리고 특히나 우리 고유의 정서적인 맥락과 닿아있는 주술적인 읊조림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해보고 싶다.

 

  원래 이 곡은 작사가 손로원 님께서 3절까지 지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백설희의 레코드 초판엔 1절과 3절만 나오고 2절은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재 레코딩하면서 2절을 첨가하게 되었고, 이후로 백설희 자신과 대부분의 리메이크 가수들도 굳이 3절까지 부르지 않고, 2절까지 된 가사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2절이면 이 가사는 충분히 전달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3, 그리고 다른 시인들이 덧붙인 4절과 5절까지 가면,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가사 하나하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우리 전통 민요적인 측면에서 이런 반복되는 연 구성이 하나의 특색이기는 하지만, 원래 이 곡이 가지고 있는 시적인 힘을 반감시키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것은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여하튼 그래서 지금부터 순전히 내 개인적인 차원에서 1,2절을 해석해보고, 3절이 왜 불필요한지 조금은 설을 덧붙이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맹세의 옛말

 

  1절의 시작은 내가 나도 모르게 읊조리기 시작한 연분홍 치마란 가사부터 시작한다. 일단, ‘연분홍이란 단어가 주는 어감이 우리 고유 정서에 있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모두 알리라 생각한다. 그 어감만으로도 무언가 미쁘고 달뜬 기분인데, 2행에 보면 이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일까? 3행에서는 옷고름을 씹어가며라는 표현을 쓰면서 약간의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은 해석하기 조금 곤란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옷고름을 씹는다는 표현이 당시에 어떤 어감이었는지 내가 잘 모를뿐더러, 다소간의 중의적인 어감을 띠고 있는 까닭이다. 뭐랄까? 봄바람에 살짝 달뜬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옷고름을 부여잡으면서도, 씹는다는 어휘 속에는 무언가 초조함이 담겨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례를 들어, 아이들이 자신의 손가락을 빨아먹는 행위를 볼 때, 그것은 무언가를 먹고 싶지만 동시에 참아야 하는 불만족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다음 행으로 이어지는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란 어휘들도 같은 맥락으로 읽혀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서도 다소 묘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과연 산제비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인데, 사전에는 따로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는 호랑나비과의 한 종인 산제비나비라고 하고, 어떤 이는 그냥 제비대한 표현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봄을 알리는 측면에서, 그리고 성황당이란 어떤 소망과 기도의 장소를 넘나든다는 측면에서 그냥 제비로 보는 것이 조금 더 유연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맥락상으로도 그 전 행과 어울리려면, 그리고 다음 2,3절에서도 제비나비보다는 조금 더 어울린 거란 판단을 해본다. 어찌됐든 이렇게 성황당까지 이르는 바람과 기도 때문일까? 그저 철 지나가면 떠나갈 제비라도 꽃 피면 같이 웃고, 꽃 지면 같이 울면서, 알뜰한 맹서까지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조금 더 이 가사를 음미하기에 좋은 단어는 알뜰한이란 단어다. 아마 우리 대부분은 그저 알뜰하다란 뜻이 일이나 살림살이를 빈틈없이 잘 처리하는 의미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사전에도 그 의미가 첫 번째로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두 번째 뜻을 보면 다른 사람을 아끼고 위함이 참되고 지극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제비의 맹서라도 알뜰한 맹서라면 그 누가 그 찬란한 봄날의 맹서를 마다하겠는가?

    

 

새파란 꽃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딸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사실, 이미 1절의 가사에서 산제비란 가사가 등장하면서 아무리 찬란한 봄날이라도 그 짧음에 대한 예감을 누구나 언뜻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2절에선 1행부터 새파란 꽃잎이 등장한다. 그냥 1절의 첫 가사인 연분홍 치마와 비교 해봐도 그 어감부터 차이가 확연히 달라진다. 물론, 새파란 꽃잎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새파란 꽃잎이 지니는 어감은 무언가 시퍼런 멍이거나 서슬 퍼런 한같은, 그런 퍼란 어감이 있다. 서양에서 말하는 파랑새이거나 파란 나라와는 무언가 확연히 구별되는 느낌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2행에서 보면 그 꽃들이 물에 떠서 흘러가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물론, 이 역시 얼마나 아름답지 않냐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 강물에 꽃잎을 띄우는 풍습이 있어왔다. 물론, 이것이 우리 고유의 이별 풍습이라 할 순 없지만, 왜 나는 이 풍경이 자꾸 이별을 연상시키는 걸까? 혹은 누군가를 향한 가 닿을 수 없는 편지가 왜 자꾸 떠오르는 것일까? 그 때문일까? 오늘도 꽃편지를 내던지는 이거나 혹은 그녀는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로 누군가를 자꾸 찾아나서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미 제비 떠난 그 길에 역마차로 누가 되돌아온단 말인가? 아무도 없는 그 길에서 이제 꽃이 아닌 별을 보며 '그'이거나 '그녀'는 지난날을 자꾸 돌이켜본다. 하지만 별은 희미하다. 우리네 정서에서 그것은 희망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끝나지 않는 기다림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이유로 이제는 같이 웃고 같이 울던 님이 아닌 서로 웃고 서로 울던으로  님으로 교묘하게 님과의 거리를 표현하고 있다. 사실, '같이'라는 말은 거의 거리가 없는 말과 같다. 하지만 '서로'라 했을 때는 이제 상대방의 입장이라는 차이, 즉 '너'와 '나'라는 거리가 생긴다. 게다가 시가 절대로 번역될 수 없는 이유로 언어의 소리적인 측면에서 비슷한 어감이라는 특수성이 있다. 여기서 바로 그런 점이 확연히 드러나는데, 말은 서로 웃고 서로 울던이라고 해놓았지만, 실상 들리는 소리는 서럽게 웃고, 서럽게 울던처럼 들리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언어의 어감에 대한 내 인상이고 해석이다. 하지만 아무리 원래 소리인 '서로'라 할지라도 알뜰했던 그 모든 맹서는 결국 실없는 기약이었기에, 그렇게 속절없는 배반의 약속에 대한 믿음 속에 우리네 봄날은 끝나고 만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속에 슬퍼 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 구름 흘러가는 신작로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3절은 사실 너무나 확연해진 상태에서 시작된다. 때문에 더 이상 가사들이 숨김으로써 중의적 표현이 있는 시어의 기능을 담고 있기보다는 그냥 다 보여주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한 마디로 지나갈 봄날이란 시절에 대한 다소간의 한을 노래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다만, 후렴구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운다는 연은 1연과 비교해 생각해볼만한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그 새가 우리는 이미 어떤 새인지 추측할 수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새의 노래인지 이 노래인지 혹은 두 노래를 모두 지칭하는지 알 순 없지만, 얄궂은 노래에 이미 끝나버린 봄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 봤을 땐 이미 1,2절에서 이 부분까지 다루었다 생각하기에, 이 노래에 시적인 미학을 생각했을 땐 3절이 없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이 노래의 매력은 너무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봄날의 그 잔혹한 짧음, 그곳에 미학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원초적인 시어의 힘이 주술적인 가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때도 (‘구지가형태이든, ‘정읍사형태이든, 그 비슷한 무엇이든 간에) 한 사건에 대해 간결하게 반복하는 것이 더 시적인 마법을 더해준다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는 까닭도 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듯이 우리 전통 가요 중엔 아리랑과 같이 여러 연이 반복되면서 이루어진 노래가 많기는 하다. 하지만 이 노래들은 주로 명절의 놀이나 혹은 노동요와 관계가 많다. 때문에 주술적인 힘보다는 흥이거나 한풀이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추상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시가 꼭 주술적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원초적인 시가 추상보다는 주술적인 구어의 반복으로 왔다고 봤을 때, 이 노래는 그러한 시적 주술성을 다소 갖고 있다고 내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때문에 내가 홀린 듯 기시감을 느끼고, 이렇게 이틀 간 미쳐서 이 노래에 대해 빠져 이렇게 글까지 쓰게까지 됐으리라고, 자꾸만 그렇게 믿어보고 싶다. 억지 춘향 식으로라도 그렇게.

 

 

 

 

    

 

 

  

 

 

 

https://youtu.be/IpKoCaiCV-s      백설희 버전

 

 

https://youtu.be/NG1_E3HQVkc   한영애 버전

 

 

https://youtu.be/ao5O_CNzbCU   장사익 버전

 

 

https://youtu.be/Zm6Ldd3toMU    린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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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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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 아름다운 순간이 영원으로 지속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염원

 

 

  5개월 만에 켠 넷북은 먼저 오랫동안 V3가 업데이트 되지를 않아 피시의 보안상태가 위험함을 가르쳐준다. 물론, 이 메시지가 매우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멘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의례적임에 못지않게 자못 관료적이기까지 한 나는 굳이 V3를 업데이트 하고 정밀검사와 최적화까지 진행한다. 그와 동시에 5개월 만에 문학이라고 일컫는 문자들을 읽어 내려간다. 늘 그렇듯이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혹은 문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온갖 상념들과 함께.

 

  이 소설의 모든 초점이 마지막에 맞추어진 까닭인지 몰라도, 처음에 사실 나는 다소간의 혼란 가운데 글을 읽어야만 했다. 주인공이 사형을 받은 까닭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굳이 무인도에, 그것도 매우 위험하다고 알려진 무인도로 도망친다는 설정이 너무 작위적인 것 같았다. 게다가 서두의 보르헤스가 말한 모험 소설? 물론, 나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어릴 때 읽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단지 주인공이 무인도에 있다는 이유 빼고 이게 무슨 모험 소설인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갑작스런 한 무리들의 등장, 그런데 여기서 더 웃긴 건 주인공이 어떤 노이로제인지 몰라도 그 무리들이 자신을 체포하러 왔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그동안 자신의 생활 거주지였던 고지대의 박물관과 예배당을 포기하고, 거의 늪지라고 말할 수 있는 저지대로 도망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조수간만의 차이로 밀물 때면 물에 젖은 채로 일어나고, 저지대의 늪지에서 식물 뿌리들로 연명하는 등, 웃지 못 할 해프닝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다 그는 그녀를 발견한다. 포스틴, 집시처럼 관능적인 몸매로 색색의 스카프를 두르고서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여자. 개인적으로 나는 여기서 주인공이 그 여인에게 사랑에 빠지는 설정을 처음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어떤 여인의 묘사나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그리고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들 속에서 그가 기댈 수 있는 존재를 찾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까. 게다가 관능적이고 늘 석양을 바라보는 분위기 있는 이성이라면 그 어떤 남자가 쉬 사랑에 빠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소설은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에도 덫을 놓아둔다. 모렐, 포스틴과 모렐의 관계는 이 소설 속에서 명확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모렐이 포스틴에게 구애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단지 그 이유로 주인공이 극심한 질투에 빠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점점 이성을 상실해간다. 대담하게 포스틴에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꽃으로 작은 화단을 만들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포스틴은 그를 향해 아무런 대꾸도 없고, 주인공의 화단에 대해서도 그 어떤 시선도 보내지 않는다. 게다가 포스틴에 대한 끝없는 갈애 때문에 결국 몰래 잠입한 박물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렐과 포스틴의 친구들조차 그에게 그 어떤 시선을 주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순간, 여기서 나는 프랑스 소설인 벽을 드나드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그 현상에 대해 자신이 낮 동안 섭취한 이상한 뿌리로 인한 환각이 아닐지 의심한다. 아니, 심지어 모든 것이 꿈이거나 거짓이 아닐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지막 모렐의 연설을 통해 환각의 정체는 드러난다. 환각은 자신이 아닌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 환각엔 시각적인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촉각과 후각, 한 발자국 나아가서 공감각의 이미지까지 재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허상들은 주기적으로 늘 반복되어 나타난다. 순간이 영원으로 남겨진다는 염원을 품고서.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통해 소설가 아돌프 비오이 카사레스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조금 더 주목해보고 싶다.

 

  첫째, 이 소설 서두에도 나오지만 이 소설의 배경인 무인도는 매우 위험한 곳으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서두에 교묘하게 주인공에게 이 섬을 소개해준 이탈리아 상인을 통해 이 섬을 조사했던 증기선 선원들이 모두 전염병에 걸렸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와 눈의 각막이 죽어버렸다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 주인공의 죽음의 형상에 대한 복선을 미리 깔아놓은 셈이다. 물론, 이 글속에서 주인공은 그런 이야기들을 모렐이 자신의 영원한 예술품인 자신과 자신 친구들의 이미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소문을 냈을 거라고 추측한다. 동시에 그렇게 형상화된 모렐과 그의 친구들이 모두 자신과 같은 최후를 맞이했을 거라는 직감을 갖는다. 그러면서 이미 존재하지 않는 포스틴을 사랑하는 자신의 비참함에 대해 절감한다. 그러함에도 그는 포스틴과 자신의 영원한 형상을 남기기 위해 모렐의 발명품을 통해 자신을 이미지화하여 포스틴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를 그 섬에 남겨두었다. ,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실체화하여 영원히 반복되는 거짓 형상으로 자신을 남겨둔 것이다.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 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까지 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쉽게 예술의 영원성이니 혹은 인간의 순간이 멈추지 않고 영원으로 지속되기를 원하는 본능이니 하는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 말고 달리 이 소설의 설정들과 주인공의 행위들을 설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언어들은 없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보여준 것은 그 차원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절심함의 차원에 있었다는 생각을 문득 해보게 된다. 누구나 쉽게 사진을 찍고, 영상을 남기고, 녹음을 해서 우리의 이미지를 이 세상에 남기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촉각과 후각, 한 단계 더 나아가 공감각까지 가세한 영원한 형상이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이 소설의 설정처럼 실상 그것은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그러하기에 여기엔 대가가 필요하고, 그 대가는 소설 속에서 처참한 죽음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렐도 그랬고, 주인공도 그랬고, 모렐이 만든 거짓 소문이겠지만 어쨌든 모든 이 섬을 조사했던 증기선 선원들조차도 자신들이 영원 속에 남겨지기를 선택했다. 만약 내 자신이라면 어떠할까? 과연 나는 순간의 영원한 지속성을 위해 내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것이 소위 말하는 예술이며 문학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너무 거창한 이야기들은 경계하는 편이니까. 그렇지만 그 절실함만큼은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본다.

 

  둘째로, 내가 주목한 부분은 포스틴의 존재이다. 그렇지만 사실 이 부분은 거의 여담에 가깝거나 편지의 추신과도 유사한 부분이다. 말 그대로 포스틴은 포스틴으로 남겨두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저자는 다소 포스틴에게 의미를 부여한 장면이 있다. 마지막에 가서 주인공은 포스틴에게 베네수엘라라는 거창한 국가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형이 다소간의 정치적 상황과 엇물렸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1940년대 베네수엘라 정치적 상황에 대해. 하지만 인터넷에 나온 내용은 거의 없었다. 사실, 베네수엘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미스 유니버스를 많이 배출한 나라, 카라카스의 고원, 정치적으로는 차베스 정도? 내 개인적으로는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1940년대도 잘 모르는 내가 베네수엘라 1940년대를 알아보려고 하니, 당연히 단편적인 지식밖엔 얻을 수가 없었다. 이 소설 속에 아마 발렌틴 고메스라고 인용된 비센테 고메스30년간의 독재, 그리고 그 독재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저장된 많은 석유들이 외국 자본으로 유출되었다는 사실, 뭐 이 정도? 하지만 이 정도로 왜 주인공이 포스틴에 거창한 베네수엘라라는 명칭을 달았는지는 다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베네수엘라일지라도 그 국가가 연주되면 뜨거워졌던 그의 가슴처럼 무언가 함의적인 이중성을 포스틴에게 부여하고, 이를 통해 조금 더 포스틴의 추상성을 구체성으로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여겨본다. 마치 우리의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가 진짜 나무의 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포스틴에게 나름의 시적 형상화 작업과 함께 정치적 함의가 들어갔을 것이라 예상해본다. 하지만 이미 이십대부터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았던 나로선 포스틴의 추상성 쪽이 조금 더 낭만적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동시에 다른 구체성으로 포스틴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방향은 없었을까하는 아쉬움도 있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보아야겠다. 한 마디로 좋은 소설이었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방향은 다소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구상의 소설을 현재 계획하고 있는 나로선 좋은 공부도 되었다. 동시에 그동안 백 년의 고독픽션들등을 통해 당혹스러움을 느꼈던 라틴 문학의 환상적 리얼리즘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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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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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 카프카와는 다른 묘한 에로티시즘의 향기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사기 위해 처음으로 직장 근처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 매장에 들렸다. 보통 온라인상에서 편하게 구매를 했는데, 왠지 오랜만에 서점에서 직접 오래된 책 냄새를 맡고 싶다는 기분이 든 탓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요즈음처럼 깔끔하게 잘 정돈된 서점에서 예전 헌 책방에서 느꼈던 그럼 정겨움을 느껴볼 수 없으리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문학전집 사이에 비치된 ‘모래의 여자’를 찾는 과정에서 그간에 봐왔던, 그렇지만 다소 오래 전에 알고 지냈던 정겨운 이름들을 함께 발견할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스탕달, 마르케스, 베케트, 이문열, 밀란 쿤데라, 카프카 등등, 윤동주가 ‘별헤는 밤’에서 복잡한 심경으로 별 하나에 그리운 이름들과 함께 나열했던 어느 시인들의 이름처럼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것까지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동안 내가 너무나 오랫동안 이 이름들을 잊고 살아왔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려보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글쓰기 모임에서 활동한지 어언 6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 6년 동안은 확실히 지난 십 몇 년의 내 문학에 대한 관심과 관점을 변하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 글쓰기 모임이 등단이라는 특정한 목적과 수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까닭에? 그렇다고 하기엔, 그동안 내가 이 모임에서 등단 목적으로 글을 제출해본 것은 신춘문예에 고작 두세 번 정도이다. 나머지 숱한 등단을 위한 글쓰기 대회에도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나는 ‘엽서시’라는 특정한 문학공모 정보 제공 사이트를 알고 있음에도, 근 1년 동안 들어가 본 적도 없고, 이 글쓰기 모임을 참여하는 동안에도 손가락에 겨우 꼽을 정도로 방문해봤을 정도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공모전에 글을 내본 적도, 아니 어느 공모전이 어떤 형식의 글을 원하는지조차 거의 알지를 못한다.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모임에서 원하는 등단용 작품에 대해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세계문학전집에서 내 시선도 한국문학전집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게 시나브로 젖어들었다. 그런데 지난 번 모임에서 선택한 ‘몰락하는 자’와 이번에 선택된 ‘모래의 여자’를 통해 그간에 잊혔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뭐랄까? 달콤하면서 독한 관념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탐미의식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니면, 강한 자의식과 그에 대한 거부반응이 일으키는 집요한 집착에 대한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모래의 여자’ 몇 장을 읽어가면서 느낀 점은 문장의 집요함이었다.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와 우리네 문장의 서술형식이 같은 까닭인지, 문장에서의 집요함과 어떤 집착이 끈적하게 달라붙어왔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기묘했던 것은 문장이 끈덕지게 늘어져 있지도 않았고, 간결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간과하지 못할 내용상의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글속 주인공의 벌레에 대한 집착, 그것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모래 속에 사는 벌레에 대한 집착, 좀길앞잡이. 그리고 그와 함께 딸려서 전해지는 모래에 대한 집착. 그런데 왜 하필 모래와 좀길앞잡이일까? 주인공은 여기서 갑자기 유체역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열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모든 과학시간이면, 특히나 물리 시간이면 더욱 생경하여 잠을 자거나 공상의 나래로 멍을 때리던 나로선,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가공할만한 정보력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무지함을 한층 빛내주는 인터넷의 검색엔진을 이용해보았다. 그런데 더욱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함께, 유체역학이 기체와 액체에 관련된 운동에너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정의가 나왔다. 즉, 한 마디로, 유체역학이란 것은 기체가 액체로 변해도 원래의 성질을 유지하는 현상에 대한 연구이거나, 혹은 그와 관련된 연구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주인공은 고체인 모래에 대해 유체역학을 들먹인 것일까? 물론, 글속에서 주인공은 모래가 지닌 특수성에 대해 나름의 논지를 펼치기는 한다. 먼저, 모래가 다른 흙과 암석과 달리 일정한 크기인 1/8mm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그 크기가 다른 암석 파편의 입자와 달리 바람이라는 유체에 의해 가장 멀리 이동될 수 있는 크기의 입자라는 정의를 덧붙인다. 그와 함께, 이 모래의 유동성에 의해 많은 찬란한 문명들이 매몰되어갔음을 글 중간에 살짝 언급한다. 즉, 이제까지 모래는 모든 사물들이 사라져도 바람과 함께 그 입자가 지닌 특유의 고유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해왔다는 측면에서 주인공은 모래를 유체역학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초반부에 이 글은 다소 난해한 모래와 좀앞길잡이에 대한 이야기로 거의 전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서 갑자기 주인공이 이 좀앞길잡이를 찾아들어온 사구에 정착해 있는 어느 마을에 갇히게 되면서 글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뒤바뀌어 간다. 사실, 원래 직업이 학교 선생인 주인공은 이 사구에 살고 있는 ‘좀앞길잡이’ 중에 다소 변이종을 찾기 위해 며칠 간의 휴가를 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마을의 한 집에 묵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는 그 집에 감금되게 된다. 그것도 여자 혼자 살고 있는. 처음에는 주인공은 이 모든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유를 알고 나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유라는 것이 고작 모래 속에 파묻혀 지은 집인 이유로 날마다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집이 무너질 수 있다는 까닭이다. 즉, 여자 혼자서는 그 집에서 날마다 해야 하는 중노동과 가사를 전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다. 아니, 앞으로 불어닥칠 바람이 세찬 날의 위험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이유란 말인가? 그렇게 살기 힘든 구조의 집이라면 그냥 나오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 이 척박한 환경에서 벗어나 조금 더 나은 환경이 주어진 도심이나 마을로 가서 살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여자와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의 그 어떤 항변에도 묵묵부답일 따름이다. 때문에 주인공은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해본다. 처음엔 꾀병으로 아픈 척을 해서 자신이 얼마나 노동력으로써 무가치한지를 입증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래봤자 마을 사람들은 애초에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남자를 그대로 방치해둘 뿐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남자는 작정을 변경하여, 마을에 적응하고 있는 척하다 마을 사람들이 여자의 집에 생필품 물자를 공급해주는 날에 여자를 인질로 해서 자신을 그 집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역시 마을 사람들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오히려 물 배급을 중단함으로써 결국, 주인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 남자는 결국 마을 사람들과의 어떤 교섭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절망감으로 인해, 아니 사실은 오랫동안 해묵은 여자와의 섹스를 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여자의 삶의 방식과 마을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남자 그 자신도 그 생활방식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그 마을을 탈출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해와 수긍이라는 측면에서일 뿐이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자유의 박탈에 대한 부당함이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번에는 다소 오랜 시간을 걸쳐 탈출 계획을 세운다. 마치 남자 자신이 마을에 다 적응한 것처럼 시간도 들이고, 여자와 관계도 가지면서, 마을의 구조에 대해 넌지시 여자에게 물어 물어서, 머릿속에 마을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고서, 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남자가 끊임없이 도주한 길은 어찌된 일인지 마을로 다시 회귀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도주가 들켜, 반대 길로 남자는 열심히 달아나본다. 하지만 남자는 모래 늪에 빠지게 되고, 결국엔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를 요청하게 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생활은 다시 지속된다. 매일 똑같이 바람에 실려 날려 오는 모래를 치우는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구슬을 꿰매는 일을 하면서 언젠가 라디오를 집에 들일 날을 꿈꾸면서....... 하지만 그래도 남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집 앞 한 귀퉁이에 모래 덫을 만들어, 까마귀가 잡힐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는 거기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왜냐하면 잡힌 까마귀에 자신이 편지를 달아, 그 까마귀가 멀리 날아가 어느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당한 처지의 이야기가 전해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마귀의 생활권이 인간의 생활권과 밀접하기에 그 편지가 십중팔구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사실쯤은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또 흘러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 그 자신이 이제 그 마을에 온지 반 년쯤 된 것 같다. 그동안 여자는 임신을 했고, 자신이 ‘희망’이라 명명한 모래 덫에는 잡히라는 까마귀는 잡히지 않고, 어이된 일인지 물이 솟아올랐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모래의 모관 현상 때문인 것 같다. 그때부터 남자는 자신의 ‘희망’의 지표를 까마귀에서 유수현상에 대한 연구로 바꾸게 된다. 왜냐하면 잘만하면 그 유수현상의 연구를 통해 얻은 물로 마을 사람들에게 협박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 남자의 목표는 탈출보다는 마을 사람들을 향한 협박으로 자연스레 바뀌게 된다. 어차피 그 모래의 유수현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물로 세상에 이야기해봤자 누가 자신을 알아주겠는가? 그 사실을 알아주고 들어줄 청중은 이제 마을 사람들 밖에 없다는 그 자명한 사실을 이제야 주인공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글을 처음 읽을 때는 문장의 묘한 집요함에 끌렸지만,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그러니까 주인공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강금되면서부터 문득,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떠올랐다. ‘마의 산’의 주인공의 원래 계획과 달리 어느 요양소에 방문하게 되었다가 그 자신이 폐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7년 동안 강금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폐병이 어쩌면 그 자신에게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요양소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그 끊임없는 관념과 독설들이 왠지 모르게 이 글의 시작점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 읽었던 책들이 대다수 관념으로 점철되어 있던 글이었기에 이 글 ‘모래의 여자’에서 등장하는 사구의 마을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점이 많았다. 우선, 이 글은 그런 관념들보다는 사구의 마을 중에서도 특히 과부인 여자의 집에 갇히게 되는 매우 불합리하지만 특정한 현상에서 벌어지는 주인공의 개인적인 체험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카프카 식의 글쓰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카프카의 ‘굴’에서의 강금처럼, 이 글 속의 주인공은 모래의 마을과 여자에 강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스스로의 강금이었던 카프카의 ‘굴’과는 전혀 상이한 구조이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강금과 풍유의 구조들이 사뭇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다 읽고서, 일부러 미뤄두었던 작가 연보를 보니, 이 야베 코보라는 사람이 일본의 카프카라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토마스 만과도 그리고 카프카와도 달랐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처음부터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감춰진 에로티시즘의 향기가 났다고 말하면 좋을까? 사실, 카프카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달리, 한 마디로 그 이전의 서양 작가들과 달리, 근원적인 관념과 그 관념에 대한 끝없는 나열들의 형식인 글쓰기가 아닌, 근원적인 불안과 생에 대한 허무이거나 허위의식을 풍유적으로 표현하는 글쓰기를 했다. 그렇지만 역시 서양 작가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완전히 관념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 근원적인 불안이거나 허무의식조차 관념의 역작용이거나 파생일 확률이 높은 까닭이다. 하지만 이 야베 코보의 경우 역시 성진국인 일본 작가인 까닭일까? 처음부터 등장하는 좀앞길잡이서부터 모래, 그리고 모래의 여자와 마을, 모두 에로티시즘적인 요소를 다분히 갖추고 있었다. 아니, 거의 대놓고 전면에 드러내놓았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하기에 글속에서도 그는 모래의 여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좀앞길잡이의 유혹 행위와 비슷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왜 하필 제목이 모래의 여자란 말인가? 글속 주인공이 계속 벗어날 수 없는 모래의 마을 그 자체를 여자가 대변하고 있기에, 제목을 그렇게 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처음부터 글속 주인공은 다소 생경한 좀앞길잡이의 변종을 찾아 사구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소 특이한 변종인 여자를 찾아 사구의 마을로 들어섰던 것 아닐까? 그러한 이유로 이 모래의 여자에 야베 코베는 자신의 성적인 판타지와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불어 넣었으리라 예상해본다. 정신적 강간이라는 새로운 병에 시달리는 현대 여성이 아닌 자연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원초적 여자의 이미지로써.......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혹은 내 개인은 한 가지 의문에 부딪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성적인, 그리고 나름 완벽한 이미지의 여인을 판타지로 그려놓았다면, 왜 주인공이 거기서 벗어나려고 발악한단 말인가? 그것도 마지막쯤엔 거의 덧없는 혹은 허무와 같은 이름의 ‘희망’이라는 이름에 기대어 글속 주인공 스스로는 자기 자신이 끝끝내 마을 사람들과 상이한 자아일 것임을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듯 읊조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한 마디로 이것은 이율배반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두 가지 양면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이율배반의 첫 이유가 되는 모래의 여자이다. 모래의 여자는 말 그대로 모래라는 늪이다. 사실, 남자가 가진 여자의 성적 판타지이거나, 고유한 이미지는 그동안 물이거나 바람의 속성과 관련되어서 이해되어져 왔다. 그런데 저자는 특이하게도 이 글에서 여자를 모래로 표현했고, 모래가 가진 유체역학적 이미지,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가 줄곧 사용해온 물과 바람의 이미지를 동시에 모래에 투영시켰다. 거기에 덧붙여, 모래의 속성이 지닌 잔인함과 공포를 끊임없이 묘사하고 있다. 즉, 우리 남성들이 투영시킨 여성의 판타지에 스스로 갇혀버린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역으로 여성이라는 희망의 덧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거나 혹은 이 주인공 남자가 이 판타지를 벗어나 어디 갈 데가 있단 말인가? 사실, 글속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남자의 어떤 탈출도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모든 길들은 모래의 여자에게로 되돌아오는 길 뿐이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주인공은 거기에 완전히 빠져서 여자를 임신시키게 되고, 유수현상과 관련하여 덧없는 ‘희망놀이’에 빠져있을 뿐이다. 즉, 끝내 이 모래의 여자라는 희망에 사로잡혀 빠져나올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임신이라는 짧은 언급을 통해, 주인공 자신은 전혀 희망이라 명명하지 않았지만, 여자에 대한 희망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계속 전개되어져 감을 은근히 말하고도 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주인공 혼자만의 ‘희망놀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어반복일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의 근본적인 속성이 지닌 허상과 덧없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그 허상이 존재해야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어떤 측면에서 이 글은 여자에 대한 에로티시즘에 관한 글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희망에 관한 글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이 글을 정리해보려 한다. 오랜만에 본 세계문학전집의 이 책을 통해 잠깐 관념의 세계에 빠져본 기분이다. 물론, 나는 이 글이 처음부터 관념보다는 에로티시즘에 가깝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글을 해석하는 내 자신이 너무 관념적이기에, 결국엔 관념적으로 빠졌던 것 같다. 그래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허무하지만,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관념에 빠지는 것 그 자체에 살아있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야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의 남자가 하는 그 덧없는 희망놀이처럼 허무한 관념놀이도 때로는 누군가에게는 삶의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기도 하니까. 그렇게 잠깐 혼잣말을 중얼거려보며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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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 미로 특별전을 다녀와서 - 너저분한 여백에 관한 단상

 

 

  사실, 이제까지 미술 전시회에 가본 적은 거의 없다. 이번을 포함해서 한 세 번쯤? 그것도 한 번은 과거 여친이랑 그냥 잘 모르는 회랑에 들려서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른 한 번은 르네 마그리트 전시회였는데, 기대가 컸는지 실망감이 오히려 더 컸다. 그래서 전시회에 대한 내 기억은 거의 전무하다. 다만, 스무 살 때 한 선배의 선물로 ‘루오’ 화집을 선물 받아, 그때부터 다소간 그림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 미술에 대한 관심이란 건 고작, 루오의 ‘거울 속에 비친 나부’를 보면서 느낀 자기연민과 유사하다. 그래서 피카소를 처음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우는 여인’이란 작품을 통해서였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입체적으로 내 개인의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호안 미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이가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일 것이다. 다만, 이전에도 그랬고 또 지금도 그럴 수밖에 없기에, 여전히 나는 내 개인적 투영을 심하게 담은 전시회 소감을 적으려 한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그래도 무언가 스스로 간과할 수 없는 단상을 얻은 까닭이다.

    

 

  이번 전시회를 나는 크게 세 가지 그림 영역으로 분류하고 싶다. 첫째는 유아성에서 비롯한 추상적 세계에 대한 표현이고, 둘째는 그림의 시적 형상화에 관한 부분이고, 마지막으로 서양화된 동양화의 관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번째와 마지막 이야기는 다소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첫 번째 이야기를 아주 짧게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 좋아 유아성에 비롯한 추상적 세계에 대한 표현이지, 그냥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계의 세계를 화폭에 담아 놓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제목도 없이 거의 무제로 벌려놓아서, 도무지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게다가 개중에 몇몇은 피카소와 친분이 있어서 그런지, 피카소의 ‘빨간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의 누드’의 형상과 닮아 있는 그림이 아주 많았다. 물론, 그냥 딱 봐도 닮았다는 게 아니라, 어떤 그런 여인의 형상을 다소 과장되게 그린 선들이 호안 미로의 형상에서도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목이 없어서 그게 대체 뭘 그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설령, 제목이 있던 몇몇 작품들은 ‘새’나 ‘여인’이란 제목을 달고 걸어놓았지만, 거기서 개인적으론 어떤 단상을 떠올릴만한 것은 없었다. 아마 이 부분은 그림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의 경우 대다수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다만, 중간에 스페인의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를 위한 도안들’이란 작품들은 개인적으로 가우디의 건축물에 대한 인상이 남아 있어 비교해보는 재미는 있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내 개인의 어떤 단상을 끄집어내기엔 어려웠다. 때문에, 지금부터는 내 개인적인 단상과 연결된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둘째로 내가 분류해놓은 ‘그림의 시적 형상화’에 대한 부분은 호안 미로의 개인적 견해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호안 미로는 그림과 시의 경계를 특별하게 두지 않고, 시가 글로써 어떤 형상화된 작업을 추구한다면, 그림은 어떤 선과 형태로써 형상화된 작업을 추구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전시회 중간에 보면 어떤 문자들 옆에 형상들이 나란히 붙어있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처음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불어였다. 사실, 스페인 화가라 불어를 썼으리라 전혀 예상하지를 못했는데, 뜻밖에 불어여서 그나마 해석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내 불어 실력이란 게 애초에도 없는데다 아주 녹슬어, 앱으로 깔아놓은 사전을 겨우겨우 찾아가며 해석해야 하는 실력이지만, 그래도 그 덕에 조금은 옆에 형상들과 문자들의 관계에 대해 유추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쉬운 작업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호안 미로의 경우 문자 자체도 그림으로 이해한 탓에 너무나 흘려 그려서 알아보기 힘든 문자도 많은데다, 또 바로 그 이유로 문자의 의미 자체보다는 문자의 형상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어떤 단상의 단초는 얻을 수가 있었다. 그림이라는 형상의 시적 가능성에 대한 단상을. 하지만 만약 내가 호안 미로의 동양적 시도의 그림들을 보지 못했다면, 이 또한 단초란 의미 그대로 감겨있거나 헝클어진 실의 첫머리일 뿐이었을 것이다. 불이 붙여지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쓸데도 없는, 그래서 애초에 그랬듯이 혼돈의 형태로밖에 영영 남을 수 없는.

    

 

  호안 미로는 동양에서 서예를 하는 작업을 보고서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중간에서부터 후반 마지막까지 그렇게 동서양을 아우르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동양의 서예와 많이 다른 것은 그 기법의 너저분함에 있다. 여기서 대다수가 느끼겠지만 이 말은 완전히 모순된다. 왜냐하면 동양의 서예란 무릇 여백을 담아내는 작업인 까닭이다. 즉, 완전히 깨끗하고 숭고하게 비어진 공간을 통해 담겨진 문자를 보여주는 작업이 동양의 서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웬 너저분함이란 말인가? 사실, 그림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다소 동양적 서예의 역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대로 동양의 서예는 여백이라는 완전무결한 빈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호안 미로가 서양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를 못했는지, 아니면 애초에 관념이 달랐는지, 호안 미로의 그림의 여백은 물감이 줄줄 흘러있고, 심지어는 여기저기 손바닥 자국까지 나타나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앞에서 말한 그대로 ‘너저분함’ 그 자체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너저분함’이 동양의 서예를 보고서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가장 세밀하고 정밀하게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일본의 서풍을 보고서. 사실, 이 부분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길도 없고, 설명할 수 있는 바도 전혀 없다. 때문에, 질문을 내 개인적 투영으로 바꾸어보고자 한다. 어떻게 ‘너저분함’이 여백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제까지 ‘너저분함’을 여백으로 이해하지 못한 걸까?

    

 

  우선, 위의 질문을 던지기 위해 내 개인적인 여백에 대한 이해에 대해 잠깐 밝히려 한다. 사실, 여백이란 단어를 떠올리기 전 내가 먼저 거쳐 간 단어는 ‘길 옆’이란 단어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스무 살 때 혼자만의 여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무작정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인생의 커다란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깨달아 보려 했다. 그런데 그냥 걷는데, 어떻게 무언가가 막 떠오르고 심지어 해결되기까지 하겠는가? 다만, 무식하게 부산까지 걸으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만은 알게 되었다. 정작 보름간 길을 걸었지만 그때까지 내가 본 것은 ‘길’이 아니라 ‘길 옆’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실은 ‘길’을 존재케 하는 것은 ‘길’이 아닌 ‘길 옆’이란 사색을 해볼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여백에 대한 집착이 생겨났다. 온전하게 옆자리에 비어 있음으로 문자와 그림들을 더 온전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여백이란 미, 아마 이 부분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동양화를 자연스레 많이 접한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여백에 집착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말이 좋아 여백이지, 정말 뜬구름 잡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너무 고결하고 온전해서 다가서고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때문에, 내게 있어 여백은 곧 허무덩어리로 전락해버렸고,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호안 미로의 여백의 너저분한 표현을 보고서, 왜 내가 여백을 그토록 고결하게만 생각했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의 한계에 대해 성찰하게 된 것이다. 사실, 여백의 집착에 대한 단초가 되었던 내 개인적 여행에서 본 ‘길 옆’은 그렇게 고결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내 푸근하게 풍기는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얼굴이었고, 혹은 길가를 진동하는 거름내였다. 그런데 어찌돼먹은 내 관념이란 놈은 그런 것은 싹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고상하고 이상적으로만 포장하려고 하였는지, 지금에 와선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너저분한 것은 너저분한 것이고, 그렇다 해서 그것이 더럽거나 추한 것이 아닌 것을. 왜 모든 것을 극단으로만 추구하려 들었던 것일까? 물론, 호안 미로의 경우 나와 같은 사유의 경로를 통해 그러한 그림들을 그렸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림의 시적 형상화라는 궁극적인 지점에서 바라봤을 때, 호안 미로에게 있어 굳이 여백이 동양의 서예나 그림처럼 완전무결하게 비어 있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즉, 아마도 그는 즉물적으로 여백이란 공간을 해석함으로써, 여백의 너저분함과 모순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했으리라 본다. 그리고 시란 결국 그러한 즉물적인 해석이거나 표현이라고 본다면, 그가 추구한 선과 모형의 시적 형상화는 분명 시라 말해도 좋은 것은 아닌지 잠깐 생각해보며, 동시에 나도 그러한 시를 꿈꿔보며, 전시회 다녀온 소감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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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우산의 꿈

 

 

아직도 설운 추위 다 가시지 않은

3月의 초 봄날

꽃샘추위보다 더 꽃 센 바람에

샛노란 우산 하나 두둥실

사무실 창가 맞은편 나무 위에

자리를 틀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나뭇가지 위 우산 내려앉지 않고

샛노란 빛깔이 잿빛 되어 녹빛 되어

어느 5月의 푸르른 날 아무 빛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푸른 나무가 되는 꿈

이루어 두둥실 하늘로 올라간 걸까요?

아니면 그대로 나뭇가지가 되어

나무와 함께 대지에 뿌리내린 걸까요?

그러나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냥 어느 무심한 바람결에 떨어져

쓰레기통에 처박혀버렸을

구깃하고 꾀죄죄한 노란 우산의 꿈을.

하지만 시는 모든 이룰 수 없는

꿈의 노랫말이며

쓰레기통속에서도 푸르게 피어나야할

한 줄기 나뭇가지에 대한

덧없는 희망의 미련이거나 음률이기에

아직도 저는 눈감고

당신의 노란 꿈을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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