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이 닦기

 

 

얘야! 자기 전엔 이빨을 꼭 닦아야 한단다

닦지를 않으면 나이 들어 틀니를 해야 해

자기 이빨이 아니면 얼마나 불편한지 아니?

엄마! 칫솔질할 때마다 토악질이 나와요

얼마나 괴로운지 이를 닦기가 힘들어요

얘야! 네가 나를 닮아서 위가 좀 약하구나

하지만 세상을 살려면 비위가 좀 있어야 한단다

뻔뻔하게 토악질보다 더한 발악질도 해야 해

엄마! 토악질을 하고 나면 잠이 다 달아나버려요

잠들지 못하는 새벽에 이는 바람이 너무 무서워요

얘야! 네가 나를 닮아서 예민하고 겁이 많구나

나도 네 아버지 뒤척이는 소리에도 흠칫 깨고

갑자기 네 걱정에 잠들지 못하기도 한단다

그런 날이면 선잠이라도 청해보렴

선잠을 자다 보면 언젠가 깊은 단잠을 자게 될 거야

엄마! 깊은 단잠을 자면 정말 아침이 달라지나요?

이빨을 닦아도 더 이상 토악질하지 않게 될까요?

얘야! 네가 나를 닮아서 너무 잔걱정이 많구나

우선 오늘 하루라도 이빨을 닦고 자려무나

그다음 일은 늘 그다음에 생각해야 해

엄마! 엄마는 너무 강하고 억척스러워요

저는 엄마처럼 넘어오는 슬픔을 쉬 삼킬 수 없어요

얘야! 너도 언젠가 그렇게 될 거란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내 귀여운 아가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헛걸음

 

 

비 내리는 늦은 밤

빌린 책을 반납하러

동네 큰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다 와서 도서 반납기에

반납하려는 찰나

아차 싶은 게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빌렸다는 사실이 기억난다

내가 그럼 그렇지

허무한 마음에 쿵 내디딘

발걸음이 웅덩이에 부딪혀

바짓단이 흠뻑 젖는다

어기적 걸음으로

동네 작은 도서관에 왔는데

여지없이 문은 닫혔고

도서 반납기도 없다

그러니 동네 작은 도서관이지

침 한 번 퉤 뱉고서

씁쓸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혹시 그대는 아시는지

헛걸음 덕에 맛본

봄비로 다 씻겨 내린 밤공기의

상쾌함과 호젓한 그 기분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금 아버지의 신화화에 관해

 


 박범신 작가의 작품은 은교’, ‘소소한 풍경이후로 이번에 읽은 소금까지 총 세 권의 책을 읽었다. 사실, 전에 은교소소한 풍경에서 나이를 뛰어넘는 감성과 몽환적 풍경에 감동을 받은 탓에 조금 기대를 했다. 다만, 제목이 약간 마음이 걸렸다. 무언가 진부하고 올드한 감성을 풍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철에서 1시간 동안 약 60페이지를 읽는데, 너무 재미가 없었다. 시대가 갑자기 거꾸로 역행하는 느낌이었다. 사실, 300페이지 분량의 장편을 읽을 때, 서두가 너무 장황하면 읽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어떤 절실한 화두가 있어서 선택한 책이라면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냥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심정으로 손에 잡은 소설이 초반에 지루하다면, 누가 끝까지 읽겠는가? 그 때문에, 잠시 시간을 두고서, 독한 마음으로 겨우 읽을 수 있었다. 다행히 중간부터는 나름대로 이야기 전체적인 내용이 들어오긴 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까?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네 소설  대부분은 아버지란 이름에 신화가 덧씌워 있다. 폭군, 책임, 고생, 억압 등등, 아버지란 이름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단어를 연상시킨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쟁 이후 베트남전 참가, 군부 독재 시대, 중동 파견 사업 등으로 아버지의 이름들이 겹쳐진다.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오셨고, 그 덕으로 나는 대학을 마치고, 나름의 삶을 살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특별한 것은 내가 신학대를 가겠다는 이유로 가출을 했을 때, 아버지께서 내게 쓴 17장의 편지가 있다는 점이다. 자신도 베트남전에서 군종이었고, 제대 후 바로 결혼하여, 사우디아라비아에 3번이나 다녀온 아버지의 절절한 삶을 나는 아버지의 편지를 통해 접했고, 그로 인해 아버지를 신화화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미묘한 심리가 그 저변에 깔려있다는 사실을 한참이 지나고서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신화화는 아들이거나 딸 자신의 신화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 아버지의 신화화를 통해 아들인 나 또한 신화를 대물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니 그런 심리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잘 몰랐다. 물론, 이런 심리가 나쁜 건 아니다. 자신을 삶을 긍정하는 데 있어서, 가족의 영향과 힘이 가장 중요한 자산인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라고 내 개인적으로도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신화는 지속되어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존재해야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신화를 대물림한, 그 커다란 윤회와 같은 고리를 지속해야만 하는 걸까?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확립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 소설은 일단, 이러한 기본적인 물음 속에서 시작되었고, 동시에 이러한 예로 선명우란 인물을 등장시킨다.

 

 세 딸의 아버지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 일생 한 마디 불평 없이 살아온 남자가 아주 우연한 사고로 인해 집을 가출하게 된다. 물론, 거기에 췌장암 말기라는 전조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이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한 인간을 통해 잊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는 사실이다. 언뜻 보면, 이게 사실 무슨 말도 안 되는 설정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사고 당시 주인공이 본 소금에 대한 인상이 바로 자기 아버지와의 연결 매개로 이어진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로 더 중요한 건 이를 통해 그가 전신마비가 된 김승민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살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선명우가 아닌, ‘김승민이 된 것일까? 첫째는, ‘천명우로서의 그의 삶은 너무 고달팠다. 세상 모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책임이란 미명에 묶여, 자신이 아닌, 아버지로서만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김승민의 삶은 달랐다. 그것은 유랑의 삶이었고, 유랑엔 지금껏 그가 맛보지 못한 자유가 있었다. 그때까지 가족을 위해 오직 회사에서 생산성이란 이름 아래 묶여, 그 구조를 평생 못 벗어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냥 단 한 번의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그는 그 구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짜 자신을 찾고, 동시에 전혀 혈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진짜 가족을 만들 수 있었다. 아주 좋은 설정이고, 좋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먼저, 원론적으로 그 이전의 가족에 대한 선명우의 책임이다. 그의 이탈로 인해 한 가족은 처참하게 무너지게 된다. 여기에 대해 선명우김승민이 됨으로써 책임 회피를 해버린다. 너무 극단적인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두 번째는 이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 너무 진부하다.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선명우를 강조한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설정들이 너무 길고, 그 설정들이 전부 이제까지 우리 한국 소설에서 오르내린 이야기뿐이다. 게다가 얼마나 중언부언이 많은지, 읽다가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났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쉬웠던 건, 결국 이 소설도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나열함으로써, 아버지에 관한 신화를 더욱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조금 더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아버지를 바라봄으로써,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한숨으로 달래며, 이 소설에 대한 평을 끝내고자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냥 줄 것도 아니면서

 

 

 랭보, 보들레르, 생텍쥐페리, 프랑시즈 잠, 조르주 베르나노스, 모든 문학의 고유어 같은 이름들,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시몬 베유,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셸 푸코, 모든 자유롭고 불온한 사상의 대변인 같은 이름들,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르네 마그리트, 모든 예술가가 사랑했던 도시이거나 나라일 것 같은 이름, 네 멋대로 해라, 사탄의 태양 아래서,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 모든 예술 영화의 고향이거나 예술로 대접받을 것 같은 장소, 실비 바르탕, 카를라 브루니, 프랑소아즈 아르디, 엘자, 케렌 앤, 이십 대 초반 내 귓가를 간질이던, 아니 심장을 간질이던 노래이거나 마법 같은 주문들, 이 수많은 이름과 주문에 홀려 얼마나 오랫동안 불어불문을 배우길 원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삶이란 게 늘 녹록지 않듯이 대학을 졸업하고서, 먹고 살기 위해 영어를 선택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모든 직장이 토익과 텝스 점수를 원하니, 신학을 전공한 내가 밥 벌어 먹고살려면, 어떻게든 영어 점수를 올려야 했다. 물론, 남들과 똑같은 위치에서 시작할 순 없었다. 전공도 전공이지만, 졸업하고서도 습관적 방랑벽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배를 타겠다고 인천에 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자취하며 공사판을 떠돌기도 하다가, 결국 주차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별생각 없이 들어간 자리인데, 그곳에서 약간의 행운이 따랐다. 단지,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로, 들어가자마자 거의 두 달 만에 반장이란 직함이 주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2시간 근무, 1시간 휴식으로 시간이 남아도는데, 주차 부스 안에서 달리 할 일도 없고, 때마침 일자리 근처가 종로 학원가라, 이래저래 영어 공부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주간 근무를 고정으로 서고서, 오후 3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영어학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나는 그때 토익이나 텝스 학원을 선택하지 않았다. 언어라는 게 생각보다 머리로 익힌다고 해서, 오래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학교 때 몸소 체감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름 언어의 재능이 있어서 대학 입학시험 때도 언어영역은 거의 만점 가까이 나왔다. 그리고 대학 때도 고스란히 그 재능을 발휘하여, 남들 죽으라고 머리 싸매도 대부분 낙제하는 헬라어, 히브리어 과목을 매우 쉽게 통과했다. 그것도 보는 시험 족족 항상 거의 만점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나의 욕망도 일정부분 작용한 바가 있다. 어차피 목회보다는 신학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 성서라도 제대로 원어로 보고 싶은 욕심이 나름 있었다. 그래서 오후에 독서실 총무를 하면서 사실 남들 모르게 죽으라고 머리 싸매며, 헬라어, 히브리어를 공부했고, 그 결과로 신약의 경우는 요한복음서와 히브리서, 요한서신 등은 어느 정도 원어로 완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 2년 후 친구들과 자취하는 곳에서 후배가 헬라어 단어를 물어보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것도 정말 쉬운 단어인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헬라어 알파벳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 언어란 말로 배우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3시간 동안 영어로만 대화하는 회화반 초급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학원에서 모든 한글로 된 책을 끊고, 영어로 된 문법책과 소설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한 마디로, 영어란 환경의 불모지인 환경에서 어떻게든 영어로 말하고, 듣고, 읽으면서 살아보려는, 맨땅의 헤딩을 시도한 것이다. 이 맨땅의 헤딩은 나름의 효과가 있었다. 2년 후, 한 번도 따로 공부하지 않은 토익과 텝스 시험에서 손쉽게 고득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내 인생에서 계획하지 않았던, 영어 선생의 길로 들어섰다. 영어 선생으로서 자리 잡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처음엔 학원에서부터 시작했는데, 도저히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여자 선생들끼리의 질투와 기 싸움에 왜 내가 끼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배척당했다. 아니, 남의 뒷말에 대해 듣기를 꺼리니, 결국 모두 나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그만둘 때, 몇몇 학생들이 따로 연락을 주어, 과외로 전향할 수가 있었다. 처음엔 네다섯 명을 가르치는 과외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생각보다 내게 맞는 일이었다. 네다섯 명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한 달 수입이 족히 200만 원이 넘었고, 시간도 많이 남았다. 드디어 그렇게 내가 꿈꾸던 불어불문을 공부할 수 있는 시간과 경제적 여유라는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불어 공부를 하기 위해 맨 처음 시작한 것은 영어 공부 때 방법과 같았다. 불어 회화 학원을 등록하고서,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영어로 불어를 가르치는 MP3를 다운받아서 매일 15분씩 청취했다. 다행히 영어 공부했던 성과가 있어서, 처음 불어 공부하는데 나름 속도가 붙었다. 일단, 어순에 있어서 어색함이 덜 했고, 어휘가 의외로 발음의 차이가 있을 뿐 어원이 같은 단어가 많았다. 그렇지만 역시 혼자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것은 방송대 불어불문학과를 지원하기 전 예비단계로 나름의 기초훈련 과정이었다. 이미 대학을 졸업한 내가 1학년부터 다니기는 조금 시간적인 손해가 있다고 생각해서, 2학년 편입을 염두에 둔 나름의 사전계획이었다. 어찌 됐든, 3개월간에 이런 기초 과정을 거치고, 방송대 불어불문 학과 2학년에 편입을 했다. 그 첫 시작은 물론, 12일의 OT였다. 거기서 일단 가장 놀란 것은 의외로 방송대 불문학과 학생들이 젊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방송대라는 이미지가 내게는 나이 든 사람이 젊은 날 못다 한 학업에 관한 아쉬움으로 늦깎이 공부를 하는 만학도들의 학교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불문과 오리엔테이션 때 학생들 숫자도 30명도 채 안 되는 데다, 모두 얼핏 봐도 파릇파릇한 이십 대투성이였다. 실제로 자기소개를 할 때도 거의 다 이십 대였다. 삼십 대가 나를 포함해 겨우 대여섯 명이었고, 40대부터는 아예 없었다.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온 것은 조교들의 존재였다. 두 명의 영미라는 이름의 동갑내기 여자 조교가 있었는데, 한 명은 김영미, 다른 한 명은 허영미라는 이름의 조교였다. 두 사람은 이름은 같았지만, 성씨의 차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혀 인상도 성격도 달라 보였다. 먼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인 김 씨인 김영미 조교의 경우, 그 성씨의 대표적 성격대로 평범하고 수더분했다. 그에 반해 조금 특이한 성씨인 허 씨인 허영미 조교의 경우, 외모부터 뭐랄까, 너무 확 튄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나 프랑스적인 사람이라고 표시를 낸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얼굴에 바른 화장만큼 화려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말씨도 어찌나 뉘앙스가 있으신지, 약간 허스키한 톤으로 천천히 발음하는데 무언가 기품이 있어 보였다. 둘은 실제로 그렇게 구분한 것 같지는 않지만, 업무도 무언가 달라 보였다. 김영미 조교의 경우, 무언가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일을 맡은 듯했고, 허영미 조교의 경우는 친교 담당 느낌이랄까? 밤이 늦어 자연스럽게 나이와 성별로 나누어진 그룹 사이사이를 여기저기 다니다가, 어느샌가 우리 삼십 대 남자 그룹에 끼어있었다. 유유상종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한국적 문화의 특성상 동년배끼리의 필연이라고 해야 할지자연스럽게 모인 삼십 대 남자들은 나도 그렇지만 꽤 별종들이었다. 일단, 가장 큰 형님뻘인 이예종이라는 분은 사십을 바로 코앞에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젊어 보였다. 외모도 동안이지만 스타일 자체가 나이 들어 보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때까지 영화 조감독을 하면서, 여러 스타와 대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스타일보다 그 말씨였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깍듯하고, 예의가 있어, 인품이 흔히 우리가 아는 형님이라는 이름의 대명사 꼰대와는 정말 거리가 멀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나와 동갑인 이순주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진짜 별종이었는데, 역사학과를 졸업해서, 바둑 선생을 하고 있다는데, 개똥철학이 정말 별스러웠다. 예전 이슬람의 왕조의 이름이 알리인데 여기서 리가 우리 한국의 이씨 성으로부터 왔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눙치는데, 목소리도 조금 음험해서 재밌다고 해야 할지,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서로 친해지는데 윤활유 역할을 해주었다. 모두가 거의 잠들고 새벽 4시까지 이렇게 우리 세 남자와 허영미 조교만 남아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실상 마신 건 우리 셋이고, 허영미 조교는 그냥 우리 보조만 맞추는 척하면서 술은 삼갔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중요한 첫날 이렇게 네 명이 친해졌다는 사실이다.

 

 짧은 12일 일정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가 마련되었다. 1차가 끝난 뒤 2차로 자연스럽게 첫날 멤버였던 넷이 대학로 고깃집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우리 모임 한 번 만들면 어떨까요?”

 예종 형님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어떤 모임이요?”

 “당연히 프랑스어 공부죠?”

 “영어 스터디처럼 프랑스어 스터디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우리 같은 한량들이 어떻게 그런 스터디를 해요? 무언가 즐길 수 있는 동호회 같은 클럽뭐 그런 거 말하는 거죠.”

 “클럽이라.”

 “예를 들면, 내가 철학과를 졸업했으니까, 철학이나, 또 하늘 씨가 문학 동아리를 했다고 하니까, 문학이나, 순주 씨가 역사를 전공했으니까, 역사 뭐 그런 걸 다 싸잡아서 넣어 보는 거죠.”

 “, 역사는 빼주세요. 학교 다닐 때도 사이비 역사밖에 관심 없었으니까.”

 “그럼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예술은 어때요?”

 영미 조교가 옆에서 의견을 냈다.

 “, 그거 괜찮은데요.”

 “그럼, 됐네요. ArtA, LittératureL, PhilosophieP, 그리고 모든 복수들을 뜻하는 S를 따와서, ALPS 클럽 어떤가요?”

 “, 정말 괜찮은데요.”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름에 모두 격한 환영의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모여서 뭘 하죠?”

 “그건 내가 생각해 올게요.”

 “뭘 공부하는지 정해지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학교 학생들한테 홍보해줄 테니까.”

 이렇게 일사천리로 예종 형님이 공부할 내용을 정하고, 영미 조교가 홍보를 맡기로 했다.

 “그럼 ALPS 클럽을 위하여

 “위하여


 모임의 공부 내용은 바칼로레아였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 바칼로레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프랑스 입시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논술 시험 자료라고 하는데, 사실상 서양철학사였다. 이미 신학을 전공한 탓에 철학사의 경우, 서너 번 넘게 읽어, 조금 식상했지만, 대세에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주에 한 강씩 나눠서 맡기로 했다. , 영미 조교의 경우 학생이 아닌 조교이기도 하고, 자신도 조금 그것이 걸리는지, 가끔 참관하겠다는 의지만 보였다. 사실, 다들 초짜만 모인 곳에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프로가 낀다는 게 다들 걸리기도 했고, 동시에 철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영미 조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영미 조교는 서너 주에 한 번은 꼭 찾아와 함께했고, 모임엔 참가하지 않더라도 뒤풀이엔 거의 새벽까지 같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영미 조교의 소개로 여성 회원이 세 명이나 들어와, 모임의 분위기는 정말로 남녀 비율적으로도, 실제 화기애애함으로도 최고조였다. 다만,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일단, 바칼로레아의 프랑스어가 너무 고급 언어였다. 원래, 철학 용어라는 게 그렇기도 하지만, 실제 언어와 동떨어진 면이 많다. 그런데 초짜인 내가 따라가려니 이건 뭐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꼴이었다. 솔직히, 어느 정도의 영어 실력과 철학에 대한 선지식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한 영역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꽤 고급 영어를 독해할 줄 알았던 나는 비슷한 어원들을 영어식으로 해석하면서 겨우겨우 따라가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게 문제였다. 영어를 공부할 때 분명히 나는 회화부터 시작했다. 그래야 언어라는 것이 실제적 효과가 나타나게 마련이고, 오래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쭙잖은 실력으로 독해와 문법을, 그것도 고급 독해와 문법으로 공부를 시작하니, 제대로 된 프랑스어를 공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식의 공부는 전에 신학과를 다니면서도 경험한 것처럼 시험에서는 강점을 드러낸다. 실제로 100% 사지선다 객관식으로 보는 방송대 시험을 나는 전 과목 거의 만점 가까이 받았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늘 장학금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 내 불어 실력은 형편없었고, 모임 멤버 내에서 거의 최악에 가까웠다. 일단, 여기서 순주 씨는 논외로 치기로 하자. 정말 이 사람은 못 말리는 사람이다. 그래도 반년 이상 모임을 했는데, 불어 발음은 고사하고, 늘 해석도 엉망이었다. 그래도 어찌나 늘 당당한지, 정말 공부를 하고 싶은 건지, 이름대로 순 주당이라 술 마시는 뒤풀이하려고 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괴짜였다. 예종 형님의 경우, 솔직히 나와 비슷하게 불어 실제적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확실히 독해와 문법에 관해선 우리 중 누구보다 가장 우위에 있었다. 일단, 학년 톱을 놓치지 않았다. 거의 늘 전 과목 만점이거나, 한 개나 두 개 틀리는 수준일 정도로 완벽했다. 게다가 철학 전공자이기도 하기에, 철학을 논함에도 막히는 부분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세 명의 여자 회원의 수준이 문제인데, 그게 정말로 내게 절망의 벽과 같은 수준이었다. 일단, 나보다 한 살 많은 이영희 씨라는 사람은 2년 동안 프랑스에서 살면서 프랑스 남자와 동거까지 한, 유학파라면 나름의 유학파였다. 그러니 발음, 어휘, 회화, 그 모든 면에서 나를 압도했다. 그리고 이십 대 후반인 해맑은 영혼의 김나영 씨 역시 2년 동안 프랑스 어학연수를 다녀온 유학파였다. 영희 씨보다는 조금 여러 면에서 실력이 달리기는 했지만, 회화에 있어서 우리 남자들과 수준차는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막내 김보라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불어불문학과에 들어와서 시작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언어 천재였다. 이미 들어오기 전 영어, 일어, 중국어, 독어, 스페인어를 섭렵한데다, 불어 또한 어찌나 습득력이 빠른지, 6개월 만에 원어민과 비슷한 발음을 내며, 기본적 회화를 하는 데 전혀 무리함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박학다식한지 나름 철학에 관해서도 빠삭하게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친화력도 얼마나 좋은지 허영미 조교와 마찬가지로 거의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뒤풀이에 참여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건 우리의 뒤풀이는 늘 밤샘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다른 여자 회원들이 1차 이후에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나름 자기 관리하는 영미 조교도 자정이 되기 전 몰래 발을 빼곤 했다. 하지만 보라는 당최 무슨 배짱인지 다음날 출근날이더라도 우리와 함께 밤새 끝까지 달렸다. 그리고 은근 내 옆에 찰싹 붙어 아양은 아닌 눙 비슷하게 치면서 나를 붕 띄우기도 하고, 그러면서 슬쩍슬쩍 과한 리액션 형식으로 내 등을 터치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취한 척 내 어깨에 기대기도 해서 괜스레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워낙 특이한데다 알 수가 없는 애라,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함께 어울렸다. 한마디로, 내게 이 모임은 한번 빠지면 쉬 헤어나올 수 없는 독주와도 같았다. 아니, 정말 나도 그렇지만, 어찌나 한량들인지,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서 밤새우는 게 어느샌가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술이 술을 먹고, 먹은 술만큼 허세 가득한 친분을 쌓았지만, 그것도 모자란다고 생각하여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는 여름 바다로 MT를 갔다.

 

 한여름 서해 바닷가의 갯벌 축제를 한껏 만끽하면서 우리는 모두 느슨해졌고, 서로의 민낯과 살결을 낱낱이 보여주는 것만큼 서로에 대한 무언가 막연했던 감정을 은밀히 드러내게 되었다. 아니, 우리 당당한 막내 보라는 너무나 당당하게 비키니 끈을 풀어 제친 채 보란 듯이 내 옆에 나른하게 엎드려 있었다.

 “오빠, 나 등에 오일 좀 발라줘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지만 자연스럽게 보라 등에 오일을 발라주었다.

 “오빠, 나 남자한테 이런 부탁하는 거 처음인데, 무슨 말인지 알죠?”

 “?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오빠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죠.”

 “, 농담하지 마라. 너하고 나이 차이가 10년 차이인데 뭔 아저씨한테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

 “왜요? 나이 차이하고 좋아하는 게 무슨 관계라고? 뭐 내가 좋아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처럼 똑똑하고 예쁜 애가 뭐하러 나한테 관심을 가지냐는 거지.”

 “좋아하는 게 뭐 이유가 있나요?”

 한참을 당황하며 어줍은 소리를 하고 있는데, 바닷가에 갔던 일행들이 모두 돌아왔다.

 “오빠, 언니들, 내가 하늘 오빠 좋아한다고 했더니, 오빠가 나이 차이가 어떻니, 뭐 이런 소리 하는데 나 차인 건가요?”

 “, 내가 언제 널 찼어? 내가 자격이 안 된다고 말한 거지.”

 “그러니까 그 핑계로 날 찬 거잖아요?”

 “, 하늘 씨, 잘됐네. 보라가 들이대는데, 한 번 사귀어 보지, 그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형님. 나이 차도 나이 차고, 얘가 지금 나 가지고 농담하는 거 가지고, 무슨 말씀이에요?”

 “하늘 씨야말로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르는 듯. 여자가 이렇게 여러 사람 앞에서 고백할 때는 정말 진심인 거예요.”

 이번 MT도 객원 회원 자격으로 함께한 영미 조교가 예의 그 화려한 비키니와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서 말을 거들었다. 속에서 은근 부아가 끓어올랐다. 이 여자가 날 놀리는 것도 아니고, 상황을 어색하게 만들려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솔직히 부아가 끓어오른 나 자신에게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렇다면 보라야 미안하다. 진지하게 말해서 진짜로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 조금 그러네. 그리고 나는 네가 조금 더 너와 어울리는 사람하고 만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알았어요. 그럼 지금부터 앞으로 오빠 마음을 어떻게든 바꿔 볼게요. 오빠 생각이 정 그렇다면 천천히 시간을 들이죠. .”

 모두 웃음바다가 되었다.

 “, 그런데 너 내가 왜 좋은 건데?”

 “, 일단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니까. 얼굴도 괜찮고, 몸매도 나름 오늘 보니까 근육질이고. 평소 모임 때 이야기하는 내용도 무언가 깊이도 있고. 아니, 솔직히 좋아하는데, 굳이 이유가 필요해요?”

 “하늘 씨, 좋겠네. 앞으로 보라가 계속 대시한다니.”

 “, 순주 씨도 그렇고, 다들 그만 놀리세요.”

 정말 어색해질 수 있는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나는 자꾸 선글라스 안에 눈동자가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어느새 나도 모르게 영미 조교에 대해 의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화기애애했던 여름 축제가 끝나고서 며칠 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 앞으로 영미 조교가 자리를 잡았다. 평소 오전에는 과외가 따로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거의 방송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시간이 남을 때 영미 조교가 종종 이렇게 내 앞에 자리를 잡는 경우가 있기에 그날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 날엔 공부하다 지겨우면 같이 커피도 마시고, 점심엔 같이 식사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엔 영미 조교가 뜬금없이 오후에 같이 데이트하자고 제안을 했다. 사실, 그날 오후 과외가 두 개가 잡혀 있어, 실제로는 약속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학생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과외를 미루고, 영미 조교가 끝날 때까지 도서관에서 기다렸다. 오후 5시쯤 영미 조교가 나와서, 같이 된장 예술에서 저녁을 먹고, 카페 마들렌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낙산 공원으로 산책을 했다.

 “하늘 씨는 보라 씨 진짜로 어떻게 생각해요?”

 “?”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낙산 공원에서 걷다가 잠깐 쉬기 위해 자리 잡은 카페에서 영미 조교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아니, 뭐 저번에 이야기한 그대로예요.”

 “그대로라니 어떻게 그대로인데요?”

 “그냥 나이 차이도 너무 나고, 사실 어디론 튈지도 모르는 얘인데다가, 너무 당돌한 스타일이 나한테는 안 맞기도 하고.”

 “, 그렇구나.”

한참을 말없이 창밖을 보더니 다시 대뜸 내게 질문을 했다.

 “그럼 나는 어때요?”

 “?”

 “그러니까 나는 어떠냐니까요?”

 “아니, 갑자기 당황스럽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 예쁘고, 세련되고, 쁘띠, 쁘띠한 프랑스 느낌도 나고, 뭐 그렇죠. .”

 “아니, 그런 거 말고요. 여자로서 전 어떠냐고요? 한 번 사귀어 보고 싶은 그런 여자인지 아닌지, 하늘 씨 생각이 궁금해서요?”

 “지금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가요?”

 “, 나름 진지하다면 진지하죠.”

 “, 누구나 한 번쯤 사귀어 보고 싶은 그런 여자? 뭐 그렇지 않을까요?”

 “하늘 씨는요?”

 “, 저도 그 누구나 중 한 명이겠죠.”

 “그럼 사귀어 볼래요?”

 “에이, 농담하는 거죠.”

 “, 진짠데.”

 “그냥 커피나 마셔요. 이렇게 느긋하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전 충분해요.”

 “바보, 하늘 씨는 아무래도 여자 평생 못 사귀겠네요.”

 “왜요?”

 “여자 마음을 잘 몰라요. 가끔은 농담이라도 장단을 맞춰 줘야, 뭐가 재미가 있는데, 매사에 늘 너무 진지해.”

 “거봐요. 농담일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농담일 줄 알면 안 된다니까요. 아직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죠?”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지금이 제일 좋아요. 이렇게 원했던 불어불문 공부하면서 예상도 못 했던 ALPS란 클럽에서 지인들과 즐기기도 하고, 이렇게 예쁜 영미 씨랑 뜻밖에 데이트도 하고. 이 정도면 뭐, 더 바랄 게 없는 거 아닌가요?”

 “하긴, 그게 하늘 씨 매력이기 하죠. 욕심이 없는 거. 조금 더 욕심내도 되는데.”

 마음속에서 쿵덕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자의 농담 아닌 농담을 어떻게 받아들 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대체로 이런 여자의 경우 남자들을 그냥 가지고 놀려는 경향이 있다고 여겨왔다. 아니, 마음 가지고 장난친다고 해야 하나, 어디부터 진심이고, 거짓인지 분별하기도 힘들고, 어디가 얼굴이고, 어디가 화장으로 커버한 마스카라인지 확인할 길도 없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예쁜 매니큐어처럼 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의 사람, 아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막의 신기루이거나 연꽃으로 위장한 아름다운 늪, 분명히 이 모든 게 장난일 거라고,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우리의 이런 만남은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일주일에 꼭 한 번, 내가 오후에도 수업이 없는 날이면 그녀와 나는 거의 비슷한 코스로 데이트를 즐겼다.

 

 2학년을 마치기까지 1년 동안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되었다. , 조금 바뀐 건 내 개인은 영미 씨가 물어다 준 영어영문학과의 영어 논문 대행 일이 새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한 편에 20페이지 정도로 한 편당 거의 100만 원 가까이 받았다. 짭짤한 부수입이었다. 그동안 우리 모임은 바칼로레아를 끝냈고, 새 스터디 교재로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선택했다. 동시에 3학년 편입생인 새 회원이 들어왔다. 이찬휘라는 여성분이었는데 나이가 사십 대 중반이었다. 프랑스에서 약 6년간 유학 생활을 하고, 실제로 프랑스 소르본 대학을 다니다 왔다고 한다. 왜 그만두었는지 자세한 사정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제까지 사람들과 격이 달랐다. 일단, 프랑스어 실력 자체에서 기존 멤버와 하늘과 땅의 격차였다. 그리고 가장 특이한 점이 이분이 열렬한 페미니스트였다는 점이다. 사실, 페미니스트 그 자체에 대해 기존 멤버들이 거부반응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다. 어느 정도 현대 철학을 공부한 만큼 다 각자 나름 페미니스트였고, 동시에 남녀 평화 공존 주의자라고 보면 딱 좋을 정도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도 순주 씨의 경우는 예외로 쳐야 할 거 같다. 이 사람은 원래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가끔은 나치나, 마오쩌둥을 찬양하다가도, 온갖 신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둥, 마호메트부터 조로아스터교까지 아주 얇고 넓게 해박한 지식을 떠벌리곤 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사람의 나치와 마오쩌둥에 대한 동경이 단순히 재미나 농담이 아닌, 진짜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순주 씨가 그렇게 페미니즘을 혐오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알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워낙 괴짜라 반은 늘 농담이거나, 거짓과 진실 사이에 걸쳐 있는 색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그냥 별종 취급해버렸으니까. 하지만 진짜 페미니스트였던 이찬휘 씨와 마주하게 되자, 매번 모임은 남녀 간의 성별 토론회로 바뀌게 되었다. 만약에, 텍스트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격렬하게 토론회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왜 하필 이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말만 가득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텍스트는 어찌나 여성 편향적인지, 게다가 순주 씨는 또 예의 그 아무 대책 없는 불성실함으로 텍스트와 전혀 관계없는 맥락에 벗어난 논리를 펼치는지, 그에 반해 찬휘 누님은 어찌나 해박하고 똑똑한지, 어느새 가재는 게 편이라고 예종 형님도 날을 세우는 형국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도 어떻게 그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천 개의 고원을 약 6개월 만에 끝내게 되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이갈리아의 딸들’, 이 책이 다음 텍스트로 정해지고, 페이지를 펼쳤을 때, 나는 파국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한 성 역할의 역전, 이건 서로 대놓고 싸워보자는 이야기였다. 모임을 시작하기 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이전까지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여성 회원들의 정말 무언가 벼르고 온 듯한 싸한 분위기가 느껴졌고, 남자 회원들은 남자 회원들 나름대로 무언가 화가 난 듯 날이 서있었다. 하필 이런 날 들뢰즈 텍스트 이후로 잘 오지도 않던 허영미 조교까지 와 있었다.

 

 “다들 잘 읽어오셨죠? 이번엔 사실 처음이라 분량이 짧았으니까, 다들 읽어오셨을 거라 생각해요. 일단, 빠르게 독해하고서 토론했으면 좋겠네요.”

 어느새 예종 형님 대신 진행을 맡은 찬휘 누님의 목소리가 시작을 알렸다.

 “전 안 읽었는데요. 아니, 왜 이딴 책을 읽어야 해요?”

 순주 씨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아니, 그러면 텍스트 정했을 때 반대하지, 왜 이제 와서 그래요?”

 보라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런 책인지 몰랐으니까 한다고 그랬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적어놓고서 책이라고 써놨는지.”

 “, 꼴에 조금 읽긴 읽었나 보네.”

 “뭐라고? 가만 가만히 있었더니 가마니로 보이나, 보라, 너 뭐라고 했어?”

 “읽긴 읽었나 보네요, 라고 혼잣말했어요. 왜요?”

 “그래, 읽었다. 그런데 도저히 거지 같아서 읽다 말았다.”

 “아니, 사실 나도 이 책에 대해서 원래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이건 좀 심하잖아요?”

 옆에서 점잖게 있던 예종 형님도 조용히 순주 씨를 거들었다.

 “아니, 뭐 심하고 아니고가 어딨어요? 불어 공부하는 텍스트일 뿐인데.”

 “아니, 이 거는 막말로 정말 서로 싸우자는 이야기밖에 안 되잖아요?”

 “아니, 왜요? 싸울 게 뭐 있어요? 뭐 찔리는 게 있나 보죠?”

 “뭐라고요?”

 예종 형님과 찬휘 누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칼바람이 쌩쌩 부는 조짐이 이미 오늘 모임이 감정싸움 말고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감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남자가 아기를 키우고, 여자가 배를 타고, 사회생활을 하고, 이런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굳이 우리 불어 텍스트로 정한 의도가 뭐냐는 거예요?”

 “아니, 왜 억지인데요? 남자만 배 타고, 사회생활하고, 여자는 얘 키워야 한다는 뭐 그런 법 있어요?”

 “아니, 이야기의 본질이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불어 공부를 하는 모임인데, 이렇게 비약적으로 극단적 상황을 가정한 책을 읽을 필요가 있냐는 거죠?”

 “왜 비약적으로 극단적인데요? 그리고 우리가 불어 공부를 하니까 더욱더 이렇게 일반상식을 뛰어넘고, 혁명적인 생각들을 적은 글들을 읽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혁명적 좋아하시네? 여자가 밥도 안 차리고 배 타는 게 뭐가 혁명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예종 형님과 찬휘 누님의 언쟁에 다시 순주 씨가 끼어들었다.

 “아니, 오빠는 맨날 말을 왜 그딴 식으로 해요? 여자가 밥이나 차려야 한다니? 자기는 맨날 술이나 처먹으면서, 그리고 뭐 우리는 불어를 공부하니까 불온한 사상을 숭배한다느니 그래 놓고서, 여자 이야기만 나오면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요?”

 “그래, 나 맨날 술 처먹는데 뭐 네가 보태준 거 있냐? 그리고 불온한 사상하고, 어떻게 여성 우월주의가 같을 수 있어? 힘 있는 게 남자고, 현실이면, 거기에 따라야지. 내가 언제 약한 인간들 옹호한 적 있어?”

 “, 웃기고 있네. 잘난 게 있어야 따르지. 맨날 술 처먹는 게 힘인가?”

 순주 씨와 보라가 이제 수위를 넘어 개인적 험담까지 오가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 다른 여성 회원들도 합세하여 남자들의 권위주의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고, 특히 순주 씨의 평소 말도 안 되는 힘에 대한 숭상과도 같은 우월주의를 비판했다.

 “웃기고들 앉아 있네. 여기서 뭐라고 한다고 뭐 이 사회가 바뀔 줄 아나 본데. 그럼 평소에 남자한테 남자니까 뭐 해달라고 하지를 말아야지. 게다가 힘 있는 사람이 때리고, 힘없는 사람이 맞는 게 자연법칙인데, 그걸 부정한다고 뭐 달라져!”

 순주 씨가 윽박지르자, 여성 회원들 눈에 모두 빨갛게 비상등이 켜졌다. 더 이상 무언가를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순주 씨, 아 그만 좀 해요. 내가 생각해도 좀 도가 지나친 거 같아요. 일단, 다른 분들도 조금만 진정하시고요. 남녀가 같이 동등하게 공존하는 게 중요한 문제지. 누가 더 힘이 세고, 약하고, 그런 건 두 번째 문제잖아요?”

 “오빠 말이 맞긴 해요. 하지만 그것도 오빠가 남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몰라요. 여자들이 평소에 얼마나 여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차별을 당하는지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을 거예요.”

 “보라 씨 이야기가 틀린 건 아닌데, 현실적으로도 이야기해야죠. 지금 서로 싸우자고 모인 자리는 아니잖아요. 공부를 하자고 모인 자리지.”

 내내 가만히 듣고 있던 영미 조교가 나를 거들어줬다.

 “, 알아요. 그런데 순주 오빠가 깽판을 놓잖아요. 책도 제대로 안 읽어왔으면 가만히 있지,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

 “뭐라고? 책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깽판을 놓으니까, 내가 이러는 거지. 이건 그냥 서로 싸우자고 정한 책이잖아?”

 이후 더 이상 모임은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나와 영미 조교가 어떻게든 무마해보려 했지만도리어 입장이 뭐냐는 공격까지 받는 상황까지 왔다. 그렇게 단 한 문장의 독해도 못 하고, 약 1시간가량 서로 간 감정의 소모와 깊은 앙금만 남긴 채 그날 모임은 끝이 났다.


 사실, 처음에 다른 여성 회원들이 이렇게 페미니스트였던 건 아니다. 하지만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물듦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새 모두 찬휘 누님의 휘하에 들어가 있었고, 정말 모임 분위기 자체가 일촉즉발의 사태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미 조교는 모임에 적을 두지 않게 되었다. 들뢰즈를 하면서부터 그런 내색을 비추기도 했고, 유학하러 가기 위해 남은 1년 동안 반드시 대학원 석사 논술 과정을 통과해야 하기에 바쁘다고도 했다. 그래도 한 번 시간을 내서 왔는데 하필, 오늘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에 천 개의 고원을 할 때도 가장 서로의 칼날이 맞선 강렬하게 되기, 동물 되기,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라는 주제 토론을 할 때 와서,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제는 동물 되기에서 파급된 남성의 여성 되기에 관한 토론이었다. 왜 이 철학자는 남성의 남성 되기에 대해 전제도 없고, 여성의 남성 되기는 배제했는지, 정말 남녀 간 불화를 위해 이 책을 만든 것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이럴 때 남녀 모두가 토론이 격화되게 되면, 이성적인 논리에서 감정적인 싸움으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어려워서 곡해되기 쉬운 이 책에 대해 귀에 붙이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붙이면 코걸이가 된다는 식으로 순주 씨가 딴지를 걸면서, 동물 되기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던 찬휘 누님의 가슴속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휘발유를 끼얹어버리자, 보라부터 시작해서 영희 씨, 나영 씨 모두 남자들의 역할론부터 권력론,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거짓과 위선, 그리고 폭력성에 대해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잠자코 있던 예종 형님도 모든 것을 페미니즘으로 귀착시키는 여자들의 무력함과 피해의식에 대해 건드렸고, 순주 씨는 여기서 또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현실에서 여자들이 얼마나 남자에게 의지하면서 권리만 주장하는지에 대한 격렬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말 그대로 파국의 형상이었다. 그러니 그 꼴을 본 영미 씨가 안 오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모임의 마지막 된 오늘 이갈리아의 딸들에 대한 토론은 이보다 더 심한 감정 소모가 서로에게 오갔다. 사실, 욕만 안 나왔지, 서로 대놓고 상종 못 할 인간들이라고 규정짓는 자리였다. 여기서 또 그걸 어떻게든 중재해보겠다고 나선 내 꼴이나 영미 조교도 결과적으로 조금 우습게 됐다. 어째서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핵심을 피하냐면서 양쪽 모두에게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영미 조교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평화 공존 주의자였다. 동시에,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어두고, 조금씩 단계를 밟아 생각하자는 평소에 소신이 있었기에, 되도록 이성적으로 대화를 진행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모든 이성적 판단이 소실되고, 감정의 앙금만 남은 자리에서 이성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 꼴이 꼴값 떠는 바와 진배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모임을 끝으로 예종 형님과 순주 씨는 더는 ALPS 모임을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무언가 마지막 미련이 남아있던 나는 감정을 추스르고 다음 자리에 나가보았지만, 나 또한 더는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만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가 처음 한량들의 모임으로 만든 ALPS는 바야흐로 여성 전성시대로 접어들어, 남자는 그저 호구이거나 실험대상 같은 존재와도 같았다. 무엇보다, 그동안 우리가 빌려 쓰던 모임 장소를 바꾸어 찬휘누님 집으로 정해버렸고, 모임이 끝났을 때 이 강력한 페미니스트인 아줌마가 갑작스레 내게 오는 이유가 뭐냐?’라는 소리를 했을 때, 나도 더 이상의 이성의 끈을 붙잡고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그럼에도 마음에 걸렸던 건 보라였다. 비록 페미니즘에 물들어 다른 남자 회원들과 날카롭게 척지었지만, 보라는 한 번도 내게 고개를 가로저은 적이 없었다. 물론, 여기엔 진심이든 아니든, 보라가 내게 고백했었다는 애틋함이 있었기에 내가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보다 보라가 아직 어리기도 하고, 누구보다 똑똑한 아이이기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임을 나간 후 ALPS란 이름이 아마조네스로 바뀌었다는 소리를 예종 형님께 듣고서, 문득 생각이 나, 따로 만났다.

 

 “보라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 오빠도 잘 지내지?”

 “, 잘 지내.”

 “오늘 무슨 일로 불렀어?”

 “일단, 식사부터 하자 그리고서 천천히 이야기하자.”

 저녁을 함께 먹은 후,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서, 마로니에 공원으로 나왔다. 한여름이 지나가고, 초가을 날씨라서 그런지 제법 쌀쌀했다.

 “지금부터 오빠 하는 이야기 고깝게 듣지 말고 그냥 들어줘. 좋은 동생이라고 생각해서 무언가 안타까운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래. 또 분위기 왕 진지하네.”

 “아니, 그냥 너 그거 아냐? 너는 내가 세상에서 본 가장 머리 좋은 얘야. 솔직히 내 머리는 네 머리에 비하면 머리도 아니야. 내 머리 한 열 개 분량이 네 머리 정도 될까? 그렇게 너는 똑똑해. 너도 알지, 그거?”

 “, 나도 어느 정도 내가 확실히 똑똑한 편이라고는 생각해.”

 “아니, 넌 정말 똑똑해.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제일.”

 “고마워. 오빠. 그런데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사람을 붕 띄워?”

 “그런데 그거 아니? 똑똑한 거하고, 지혜로운 건 조금 달라. 나는 네가 조금 더 지혜로웠으면 좋겠어. 물론, 네가 똑똑하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거야.”

 “,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겠어.”

 한참 동안 우리 둘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쌀쌀한 초가을 날씨만큼 무언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오빠, 인제 와서 하는 말인데, 나 오빠 정말 좋아했어. 그거 알아?”

 “, 알아.”

 “그리고 이제야 오빠가 왜 나를 찼는지 알 거 같아?”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찼다고. 그때도 내가 그게 아니라고 몇 번 설명했잖아.”

 “아니야. 오늘에서야 알 거 같아. 내가 똑똑하기만 하고 지혜롭지 않으니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맥락이 다르잖아.”

 “알아. 오빠가 왜 그 이야기를 했는지는. 내가 요즈음 너무 막 찬휘 언니한테 휘둘려서 페미니즘에 급격하게 빠졌으니까. 그런데 원래 내가 좀 그래. 뭐에 빠지면 확 빠졌다가, 금방 식어버려. 그래도 오빠는 사람이 조금 은근하고 뜨뜻미지근한 게 오래 갈 거 같았는데. 오빠 성에 내가 안 찼던 거겠지. 아마.”

 “아니야. 그건 아니고. 정말로 10살 차이 정도 나면, 여자로 보기 조금 힘들어. 그리고 좋은 오빠, 좋은 여동생으로 알고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럼 앞으로 만나기 힘들겠네. 나는 오빠랑 좋은 여동생으로 있기는 싫으니까. 오빠가 모임도 안 나오고, 이게 마지막이겠네.”

 “그래. 그럼 아마 그럴 거 같다. 아쉽네.”

 “나도.”

 또 한참 동안 말없이 자리를 서성였다. 어느새 밤 10시가 넘어 서로 헤어질 시각도 다가왔다.

 “오빠, 마지막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그냥 마지막으로 한번 가볍게 안아줘.”

 “,”

 “잘 지내

 “오빠도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찰나 보라가 다시 나를 불렀다.

 “오빠. 오늘 고마웠고. 오늘 오빠가 한 말 꼭 명심해 둘게. 조금 더 지혜롭고 멋진 여자가 될게. 그렇게 되면 다시 대시할 테니까 그땐 꼭 받아줘. 알았지?”

 “알았어. 잘 지내. 그럼 진짜 갈게.”

 “. 오빠도. 안녕.”

 

 이렇게 방송대 불어불문과의 거의 내 전부였던 ALPS 클럽과 나는 작별을 고했다. 그래도 나의 방송대 생활은 비슷한 패턴으로 지속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영미 씨와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즐기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예종 형님과 순주 씨와 함께 날밤을 새우며, 술을 마셨다. 그렇게 3학년을 보내고, 4학년이 되었을 때 연달아 깜짝 이벤트가 벌어졌다. 첫 번째는 예종 형님의 결혼이었다. 모임을 시작하기 전부터 사실 예종 형님은 오래된 연인이 있었다. 그래서 뭐 깜짝 이벤트라고 하기는 뭐 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혼전임신으로 육아에 전념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나와 순주 씨와 달리 3학년 편입으로 들어온 예종 형님은 이미 졸업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예종 형님의 얼굴을 자주 보기가 힘들어졌다. 모임의 축인 예종 형님을 보기 힘들어지니, 무언가 서로 친하면서도 데면데면했던 순주 씨와 나 또한 뜸하게 되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이벤트는 이 괴짜 순주 씨로부터 벌어졌다. 이 역시 결혼 이벤트였는데, 결혼 대상자가 보라였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무엇보다 이제껏 모임에서 가장 척지던 두 사람이 결혼하다니, 사실 보라가 페미니즘에 빠진 결정적 이유는 내 생각에 거의 전적으로 순주 씨 때문이었다. 물론, 찬휘 누님의 찬바람 휘날리는 카리스마에 보라가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토론 때 만약 순주 씨가 그 전형적인 꼰대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아마 보라도 다른 여자 회원들도 그렇게까지 페미니즘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나치를 찬양하고,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괴짜는 권력과 폭력에 대한 이상한 장광설까지 늘어놓으면서, 여성 회원들의 치를 떨게 했다. 가뜩이나 페미니즘의 영향 세가 한랭 고기압으로 찬바람이 생생한데, 이런 시대에 역행하는 엉뚱한 소리를 해대니, 어느 누가 화나지 않겠는가? 특히나 보라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 모임에서 둘은 늘 으르렁대는 모양새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웃긴 건 당사자인 그 둘 또한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다 보니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얼버무리는 모양새였다. 상극이 통한 걸까? 아니면 원래 음양엔 어떤 법칙도 이성도 존재하지 않는 건지, 의문이 남는 결혼식이었다. 하지만 그 결혼식으로 현 아마조네스, ALPS 클럽의 모든 멤버들이 모이게 되었다. 당연히 서로 데면데면하였고, 그 때문인지 뒤풀이도 어영부영 그냥 끝나버렸다. 정말 어이없기도 했지만, 무언가 정신없던 결혼식이었다. 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12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끝날 때쯤 부슬부슬 비가 내리다,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방향이 같던 영미 조교와 함께 택시를 탔다.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둘이 결혼을 하다니?”

 “그러게 말이에요. 순주 씨는 그렇다 쳐도 보라가 무슨 마음을 먹고서 결혼을 한 건지 조금 이해가 안 됨.”

 “, 하늘 씨, 보라 씨 나이 차이 핑계 대면서 거절해놓고서 이제 와 아쉬워요?”

 “무슨 소리예요? 순주 씨가 어떤 사람인지 영미 씨도 잘 알잖아요.”

 “잘 알죠. 완전 괴짜에, 이상한 개똥 철학자?”

 “뭐 대충 그렇죠.”

 “그러고 보면 사람 속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 정말 사람 속도 그렇고, 남녀 사이도 그렇고.”

 비바람이 더욱 거세졌는지 택시 앞 유리 와이퍼가 다소 큰 소리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 유학 준비는 잘 돼 가요? 논문 다 끝났죠?”

 “, 대강. 논문도 이제 담당 교수님 승인만 받으면 돼요.”

 “언제쯤 갈 거 같아요?”

 “한 내년 봄쯤.”

 “. 잘됐네요. 내년엔 정말 친한 사람도 없고 적적하겠네요.”

 “왜요? 순주 씨 있잖아요?”

 “사실 예종 형님 없으면 서로 잘 안 봐요. 무언가 좀 안 맞는다고 할까.”

 “, 이해해요. 그럴 거 같아요. 서로 결이 조금 다른 느낌?”

 “. 조금 그런 거 같아요.”

 “그래도 재밌는 사람이에요.”

 “. 그건 맞아요. 이상한 소리만 안 하면 괜찮은 사람이죠. 사람은.”

 무언가 어색했다. 거의 1주일에 한 번씩 만나며,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면서 친분을 쌓았는데 그날따라 무언가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벤트로 정신이 없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너무 갑작스러운 겨울 폭우로 감정선에 이상이 생긴 건지, 끽끽거리는 와이퍼 소리만 택시 안 정적을 채웠다.

 “이런 말 하면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오늘 우리 집에 아무도 없어요. 부모님도 여행가시고, 동생도 친구 집에 놀러 가고, 저 혼자밖에 없어요. 날씨도 춥고, 배도 고픈데, 라면 먹고 갈래요?”

 순간,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라면 먹고 갈래요?’ 너무나 평범한 이 한 마디가 우리 세대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인지 영미 조교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와 나의 나이 차이는 겨우 3살 차였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연하인 유지태를 유혹할 때 썼던 말, ‘라면 먹고 갈래요?’. 그 둘은 정말 라면만 먹고 가지는 않았다. 라면 면발처럼 얽혀, 한겨울 내 함께 하고서, 화창한 봄날에 헤어졌다. 내게도 그렇게 한정된 기한의 사랑이 온다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그런 사랑이 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일단 같이 내려요.”

 그녀의 집인 장안동 근처 아파트에서 우리는 택시에서 내렸다. 편의점에 산 비닐우산을 나란히 쓰고서 그녀 집 바로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갔다.

 “잠깐만요. 그냥 집에 갈게요. 라면이 지금 너무 먹고 싶기는 한데, 먹으면 심하게 라면에 중독될 거 같아요.”

 그녀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 바보. 그럼 잘 가요. 잘 지내고요.”

 “. 영미 씨도요. 잘 지내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학교에서 영미 조교를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고, 마주쳐도 그냥 가볍게 서로 묵례만 주고받았다. 가슴속에서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솔직히 두려웠다. 기한을 정해둔 연애라는 자체도 그랬고, 영미 씨라는 여자를 만날수록 잘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란 생각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순주 씨의 결혼식 이후 2월쯤 오랜만에 예종 형님과 순주 씨와 함께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뜻밖에 둘에게서 영미 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영미 조교 말이야.”

 “어떤 영미 조교요?”

 “당연히 허지. 우리가 언제 김하고 친하게 지낸 적 있어요?”

 “그런데 왜요? 무슨 일 있었나요.”

 “아니, 사람이 조금 이상해.”

 “혹시 형님한테도 그랬어요?”

 예종 형님과 순주 씨 두 사람 모두 같은 일이 있었다는 듯 서로 입을 맞추었다.

 “그럼 순주 씨한테도 그랬단 말이야?”

 “, 아니 이 여자가 막 일주일에 한 번씩 데이트도 하고 그러기에, 한 번 줄줄 알았죠. 지가 또 술 먹자고도 했고. 그런데 아무리 졸라도 한 번을 안 주는 거예요.”

 “순주 씨한테도 그랬어? 나하고도 일주일에 한 번 따로 만났어. 술 마신 날 많이 늦어서 집에 바래다줬는데, 집에 아무도 없다고 라면이나 먹자고 하더니, 끝까지 나를 내치는 거야. 뭐야, 완전히 나만 나쁜 놈 되고. 이상한 사람이 돼버렸잖아. 혹시 하늘 씨한테는 안 그랬어?”

 “아니, 뭐 전 같이 공부하고, 점심은 종종 먹었는데, 따로 뭐 그렇게까지는.”

 나도 모르게 거짓말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여하튼 이상한 여자야. 그냥 줄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여기저기 꼬리를 쳐대.”

 “맞아요. 그냥 줄 것도 아니면서.”

 

 4월 중순쯤 가장 화창한 봄날에 그녀에게서 메시지 한 통이 날라왔다.

 

 ‘하늘 씨, 정말 좋아했어요. 거짓말 아닌데. 이렇게 그냥 떠나려니까 섭섭해서 문자 남겨요. 잘 지내요. 그리고 좋은 여자 만나요. 나 같은 여자 말고 정말 좋은 여자요. 꼭이요!’

 

 4학년 1학기를 마저 다녔다. 방송대 21학기 동안 총 평준 학점은 대략 4.25, 믿기지 않는 점수였지만, 그 외향만 화려할 뿐, 실질적으로 나는 프랑스어로 대화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몰랐다. ALPS 클럽 때 텍스트도 천 개의 고원부터는 아예 영어 텍스트로 대체하고, 3학년 동안 영어 논문만 5개를 써야 해서, 대체 나 자신도 방송대에 불어를 공부하러 왔는지, 영어를 공부하러 왔는지, 정체성에 혼란이 생길 정도였다. 아예 그래서 3학년 2학기부터는 불어불문 수업 반, 국어국문 수업 반 정도로 비중을 바꾸어버렸고, 4학년 1학기 때는 전공을 제외하면, 거의 다 국어국문 수업으로 채워버렸다. 결론적으로, 방송대를 다니는 내내 나는 프랑스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예의 그 특유의 방랑벽에서 기인한 헛발질만 연발한 셈이다. 거기에 4학년 1학기 때는 이런 헛발질이라도 함께하면서 자위하며 자학 개그를 남발할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예종 형님도 떠나고, 순주 씨도 결혼 이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도 프랑스로 떠나갔다. 그녀가 솔직히 진심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내가 프랑스어에 목멘 실체가 낯간지러운 발음이거나 허세 가득한 철학이었던 것처럼, 내가 그녀를 나와 비슷한 동류의 허영미 가득한 여자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녀와 만났어도, 나는 결코 그녀의 그 어떤 부분도 채우지 못했을 것이다. 동시에 나 또한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 화창한 봄날에 혼자 서글피 남겨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우리 둘의 실체는 서로 누군가를 어장 관리하듯 썸타면서, 자신은 어떤 일에든 깊게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코 상처받지 않고, 그냥 막연하게 서로 그냥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말로 평화 공존을 주장했던 것처럼, 어느 누군가와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바다 위에 부표와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파도를 함께 타며 흔들리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가깝고 먼 부표 사이. 아쉬움이 있었지만, 왜인지 어떤 미련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늦은 봄날이 가고, 방송대 불어불문학과 4학년 2학기를 남겨두고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안녕하세요, <종각역 글벗들>이라는 합평 모임 운영자입니다.

2011년 3월부터 모임을 시작했고, 이미 3명 이상 등단자를 배출한 나름 끈기 있는 모임입니다. ^^*

저희 모임에서 활동 인원을 충원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글을 써본 경험이 없어도 열정만 있다면 상관 없습니다.

멤버 연령은 주로 30 ~ 40대이지만,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합니다.


성별, 나이, 아무런 제한 없습니다.


순수 문학 중 소설을 중심으로 합평을 진행하지만,

특별히 장르를 가리지는 않습니다.

모임은 주로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3시 종로 근방에서 합니다.


정착하여 함께 교류하며 문학을 즐길 준비가 되신 분만 연락하세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실력은 전혀 따지지 않지만 열정은 있어야 합니다.)


문의는 이메일(kkl0308@naver.com)로 하거나 문자(010 9289 1467)주세요.


=>주인장은 제가 아닌 다른 분입니다.


불편하심 이메일(ivan33@daum.net)로 하거나 문자(010 5668 4450)주세요.


=> 제 연락처입니다.




* 온라인 카페 가입하는 방법


1> 다음 내 카페에서 <종각역 글벗들> 검색하고 회원 가입하기


=> 등업은 자기소개 게시판에 자기 소개 후 가입해드립니다.


2> 클릭 => https://cafe.daum.net/s0u1station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