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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06년 1월
평점 :
자기만의 방 – 그 외롭고 혹독한 자기만의 세계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 이야기를 한다.’
너무나도 유명한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의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읽고, 그녀의 생애에 관심을 가졌을까? 글쎄, 내 경우만 봐도 ‘댈러웨이 부인’을 보기까지 관심도 없었다. 박인환의 시는 그저 겉멋만 부린 그런 시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만의 방’, ‘3기니’, 이렇게 두 작품을 더 보았다. 사실, ‘자기만의 방’과 ‘3기니’는 소설이라 말할 수 없다. 그저 여성과 문학에 관한 주제와 남성과 전쟁이라는 주제를 다룬 수필일 뿐이다. 그런데 무엇이 내 가슴에 울림을 준 것일까? 이 진실을 알기 위해 우선 페미니즘의 고전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어보았다. ‘제2의 성’의 경우 시몬 드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후 세 번째로 접하게 된 작품이다. 일단, 두 작가의 색깔은 분명히 다르다. 버지니아 울프의 경우 깊은 생각들이 감성과 함께 어우러져 문학적인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반대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철학적 사색이 문학과 어우러져 있다. 내 개인적인 취향은 분명히 버지니아 울프이다. 그럼에도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생각보다 내게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첫째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녀의 논리대로 나는 여성과 완전히 타자인 남성이다. 그러하기에 여성을 이해할 수 없고, 모르는 여성을 심미적 대상으로 삼거나 혹은 신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나는 그녀가 비판한 ‘브르통’이라든가, ‘스탕달’처럼 여자를 우상화하여 헌신하는 어머니상으로 여겼던 적이 많았다. 정작, 내 자신은 그 헌신의 비호 아래 아주 당연히 방황을 하고, 떠돌아다니는 것이 권리라도 되는 양,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즉,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실제로 페미니즘의 큰 관심도 없다. 그랬기 때문일까? 다시 ‘자기만의 방’을 펼쳤을 때, 전과 다른 감정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던 건.
여기서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자기만의 방’은 절대 페미니즘 서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이 수필은 주제에 대해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다만, 화자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겪고 있는 온갖 제한들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명상을 하고 싶지만, 대학의 어느 구역은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자리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이야기들에 대해 풀어갔을 뿐이다. 오랫동안 여자들은 교육받을 권리도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여자들이 글을 쓴다면 당시의 사람들이 뭐라고 하였을까? 쓸데없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집안 일이나 하라며 분명 타박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명의 여류 시인들은 사랑을 노래하였고, 모든 어머니들은 아이에게 자장가를 읊어주면서 끊임없는 이야기들을 전승시켜 왔다. 그리고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에밀리 브론테’가 등장했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여성 고유의 문학을 꽃 피우기 시작한 작가들이다. 물론, 그 이전에 ‘에이프라 벤’이라는 여성이 처음으로 여성 작가로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는 하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여자들은 글로써 돈을 번 적도 없고, 벌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 때문일까? 버지니아 울프는 간명하게 이야기한다. 여자들은 매해 500파운드(우리나라 돈으로 약 3000만 원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정도 되는 돈을 벌어본 적도 없고, 벌려고 생각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는 또 다른 한 가지를 강조한다. ‘자기만의 방’이다. 물론, 제인 오스틴의 경우 조카의 증언을 토대로 추측해보건데, 자기만의 방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공동 거실에서 오가는 손님들과 가족, 하인들의 눈치를 보며 썼다고 한다. 그럼에도 ‘오만과 편견’이라는 작품이 나왔고, 버지니아 울프의 기준에서 ‘에밀리 브론테’와 달리 훨씬 더 자신에게 솔직하고, 정직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시대는 이제 버지니아 울프의 현존하는 시대, 그녀는 동시대의 작가 마리 카마이클로 넘어간다. 그녀의 소설이 제인 오스틴보다 훌륭한가? 훌륭하지 않은가? 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현존하는 시대의 마리는 이전과 달리 여성과 여성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이전 시대의 여자는 꼭 남자를 통해 이야기 되거나 혹은 둘의 관계 속에서만 조명되었는데, 이제 시대가 바뀌고, 주제가 더 넓어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더 다양한 층위의 주제들과 자유들이 주어져 있다. 백년 전 버지니아 울프가 예견한 것처럼. 여하튼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에게 마지막으로 매우 혹독하게 이야기한다. 자신들이 연간 500파운드를 벌지 못하고, 자신만의 방을 갖지 못한다면, 아니, 그럴 용기조차 없다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말라고. 당신들은 당신들 생각보다 훨씬 무지하며, 비겁한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왜냐하면 리얼리티란 그런 아주 사소한 환경과 여건을 갖추기 위한 노력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면, 추구할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라고, 아주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가 계산했을 때는 연간 500파운드가 1500만원에서 2000만원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인터넷을 살펴보니 연간 3000만원 정도라고 한다. 내가 벌고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조금 놀라긴 했다. 물론, 문제의 핵심은 돈이 얼마인가가 아니고,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고 있는가라고 봐야 할 것이다. 글 속에서도 이야기하듯이 시인 중에 가난한 시인들은 없었다. 거의 모든 시인들이, 소설가들이 좋은 부모 아래서 어느 정도의 경제력 뒷받침을 배경으로 시를 썼고, 그 시를 통해 위대한 시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즉,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현실적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이야기의 핵심일 것이다. 두 번째, 자기만의 방은 실제적인 자신의 방에 관한 이야기와 마음속의 자기 자신의 방 두 가지를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방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도, 그 속의 의미적으로도. 이런 이유였기 때문이었을까? 내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이 모든 좋아진 여건 속에서도 나의 방은 외따로이 떨어져 혼자서 빈방이 되어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무엇이 두려워서 그 방으로 그렇게 자주 가지 못하는 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그런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