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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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젊은 작가상 동성애 코드를 중심으로

 

 

 이번이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읽은 지 두 번째이다. 첫 번째, 2015년 작품집 때,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볼 때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후장 사실주의라느니 하면서, 비평도 아닌 것이, 소설도 아니고, 그냥 독자 다 무시하고 혼자 잘난 척하는 게 요새 시대의 트렌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2021년 작품집은 그에 비하면 무난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어떤 색깔이 드러났다. 일단, 모든 작품 수상 작가들이 여자였다. 원래 문예창작과에 여자가 8할 이상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문학이 여성의 전유물로 편파성을 띤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두 번째는 이제 페미 코드를 벗어난 확연한 동성애 코드의 등장이었다. 원래 문학이라는 장르가 약자에 대해 더 민감하고, 사회의 기존 관념에 대해 저항 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렇지만 다루는 방식에 대해선 조금 여러모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일단, 이 소설집에서 동성애 코드가 은연중이든, 대놓고든, 드러낸 글은 총 네 편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나뭇잎이 마르고는 은연중에 동성애 코드를 사용하였고, ‘사랑하는 일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은 전면에 드러내놓고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은연중에 사용한 두 작품의 경우, 주제 자체가 큰 테두리로 보았을 때 약자에 관한 이야기, 반짝거리는 사람 뒤편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동성애 코드는 말 그대로 동성애 코드로만 사용되었다. 이미 이 코드가 약자를 대변하는 경향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 특유의 우정에 관해 접할 때 백합이라는 동성애 코드를 우리는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분위기였다. 물론, 백합이라는 동성애 코드가 요즘처럼 자연스럽게 사용된 건, 조금 더 문학의 주요 테마로 등장한 건, 그리 오래된 시기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차원 넘어서서 아예 동성애 그 자체를 다루는 소설이 이제는 등장하고 있다. 이 소설집에 사랑하는 일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그런데 또 특이한 게 다루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일은 가족 관계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다루었다면,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은 수동무라는 역사적 기록과 함께 일제 강점 시대로 인해 마치 우리의 자랑스러웠던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동성애라는 자유가 빼앗긴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동시에 이 시대로 그 이야기를 끌고 와 출구 없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일이 훨씬 와 닿았다. 비록, 숱한 고증의 노력과 스타일리쉬의 방법으로 온갖 정성을 들였을 것임이 분명한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이겠지만, 왜 내게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일까? 일단, 첫 번째는 너무 동성애자를 부각한 점이다. ‘사랑하는 일에서 주인공은 동성애자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사랑에 관해서도 동시에 이야기를 하고 있다. , 공감의 폭을 넓히는 작업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소원은...’은 제목부터 너무 절실해서 그런지, 동성애적 사랑의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이성애자의 사랑은 마치 메조나 사드밖에 없는 것처럼 매도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문헌을 통해 수동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일제 강점 시대와 엇물리게 한 점은 신선했지만, 누구나 읽다 보면 아마 이 비약에 대해 조금 심한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솔직히, 수동무의 개념을 정확하게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그리스 시대의 향연에서 나온 동성애 제자와 조금 비슷한 내용으로 이해해볼 때, 이 역시 일부 양반이라는 특권층만 누렸던 이익일 텐데, 이 글이 이 지점은 간과하고 그냥 갔다 쓴 건 아닌지 하는 우려도 있다. 이런 이유로 사실, 수동무는 자유로웠던 존재가 아니라, 억압받았던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으로 빼앗긴 우리의 동성애적인 자유에 관해 말한다는 건 논리 기반 자체가 빈약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한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수미상관 방식의 시대 연결은 일반 독자가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장치들이 그 절실한 소원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점은 이해한다. 보다 애절하고, 보다 특별하게 봐주기를 바라는 저자의 심리가 이러한 장치들과 구성에 노력을 기했으리라 예상한다. 하지만 그 애절함과 특별함에 대한 애착이 이 글을 난해하게 만들어버리고, 더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은 미처 계산하지 못한 듯하다. ‘동성애자도 똑같은 인간이다. 이런 방식으로 시작했다면, 조금 더 나와 같은 일반 독자들이 조금 더 편하게 다가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도 평범한 이성애자이면서, 어느 정도 동성애에 대해 개념적으로는 동의해줄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한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여기서도 공감받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공감을 받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인상 깊게 본 작품은 동성애 코드와 별개인 박서련의 당신 엄마가...’라는 작품이었다. 시대에 관해서 잘 짚었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었다. 게임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제 대충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왜 우리 시대의 문학 주제가 동성애 코드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 개인적인 한계에서 바라는 동성애 코드는 코드 그 자체의 특별함보다 인간의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으면 한다.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아닌, 똑같은 인간이라는 동일선상에서 공감의 코드로 사용되기를 원한다. 더불어, 조금 더 이 시대를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당신 엄마가...’와 같은 작품들이 더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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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아내 - 진화를 넘어서는 섹스의 심리학
데이비드 레이 지음, 유자화 옮김 / 황소걸음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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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아내 일부일처제의 대안을 찾아서

 

 

 몇 년 전 한 친구 녀석이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못 읽는 책이지만, 나라면 한 번 봐도 괜찮을 거라면서 이 책을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제목부터 욕망의 아내인데다, 대놓고 표지에 여자 반나체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평소 내가 대체 어떻게 행동을 하고 다녔기에 녀석이 이런 책을 주었는지, 조금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 괘씸하기도 했다. 물론, 녀석의 의도는 이렇게 진보적인 생각이나 심리학을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읽기 힘들어도 나라면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는 의도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손이 잘 가질 않아, 몇 년 동안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책장 한구석에 처박아 놓았다. 그러다 요즈음, 욕망에 관한 내용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려고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을 읽으면서, 이 책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장장 550페이지가량이나 되는 이 책을 다 읽고서 떠오른 생각은 그때 이 책을 건네준 친구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사실이다. 일단,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기존의 선입관들을 많이 버려야 한다. 스와핑, 관음증, 마조히즘, 사디즘, 동성애자, 양성애자 등이 병적인 현상이라는 기존의 관념들을 버릴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그나마 조금 다른 사람들보다 육체적으로는 아니지만, 관념적으로는 항체가 있는 편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친구가 오판한 건 내가 그때부터 몇 년이 지난 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10년 가까이 비혼인 상태로 지내고 있기에, 이 책을 이해하기에 다소 부적절한 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이 책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기에는 너무나 위험천만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다. 아니, 그 위험천만함을 통해 기존의 관례들을 깨부수고 싶은 욕망들로 가득하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조금 낯설었던 것은 용어들의 문제였다.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용어들이 날 것 그 자체로 쓰이는 데다가, 번역도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일단, 핫와이프 현상부터 해서, 쿠콜드, 스윙잉, 스윙 커플, 폴리아모리까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낯선 용어들이었고, 우리나라와 관련 없는 문화현상들처럼 보였다. 게다가 웬 오쟁이 진 남자? 알고 보니, 부인을 다른 남자에게 넘겨진 남자를 폄하는 단어였다. 물론, 이 책에선 단순히 아내 나누기의 대안적 용어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굳이 이런 번역을 택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리고 앞서 말한 이 용어들의 낯설음이란 정말... 하지만 쉽게 번역하면, 쿠콜드는 일부일처의 반대 개념인 비일부일처로 보면 될 것 같다. 한 마디로, 부부의 합의 하에 남편의 외도와 부인의 외도를 서로 용인하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독려하는 형태의 부부관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여기에서 분류를 나누어, 스윙잉은 그런 부부관계 속에 참여하는 독신의 남자이거나 여자를 의미한다. 스윙 커플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스와핑으로 개념이 와전되어 있다. 어찌 됐든 적극적으로 이런 커플들이 만든 비밀 클럽에서 합의 하에 부부끼리 섹스를 즐기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여기에 폴리아모리는 섹스라는 쾌락을 넘어서 서로의 자아 추구를 위해 부부간의 외도를 독려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핫와이프 현상은 이러한 부부간의 외도, 혹은 아내 나누기의 일환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현상에 관한 용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하필 이 작가는 이런 기이한 형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솔직히,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남녀 간의 뜨거운 연애의 감정은 길어야 3년이다. 그 나머지 기간은 뜨거운 감정이 아닌 안정을 찾는 인간의 기본 심리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으로 회귀하게 된다. 왜 그래야 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육아에 책임이 있고, 그 이유로 노동을 해야 한다. 노동은 섹스를 추구하는 에로티즘의 적이다. 결국, 누구도 매일 자극적인 삶과 여행으로 일생을 살아갈 순 없는 법이다. 아무리 에로티즘을 추구한 사람도 결국엔 안정을 추구하게 되고, 평생 방황을 한 사람도 결국엔 돌아올 집을 찾게 된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여기 이 책에서는 일부일처제를 통해 인간의 생명 번식력과 노동력을 집약해온 방식에 관해 먼저 의문을 표한다. 그리고 그 반대 개념으로 적극적으로 아내를 나누고, 그를 통해 새로운 자극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펼친다. 물론, 읽다 보면 너무 극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쓰리섬을 독려하고, 외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하는 것을 넘어서, 합의된 마조히즘과 사디즘까지 독려하고 있기에, 글을 읽는 내내 난색을 표명할 수도 있다. 아니, 초반부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애초에 읽기를 포기하기를 내 개인적으로는 권하고 싶다. 이 책은 애초에 목적 자체가 새로운 결혼체제에 관한 대안으로써 비일부일체를 지지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충 이 책에 관한 소개를 마치고, 개인적인 소회를 말해보려고 한다. 기존 관념들에 대해 도전적인 정신들이 돋보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초반부터 들어서기가 너무 어렵다. 너무 많은 역사의 예시들에 대한 열거, 사례들에 대한 열거들이 책의 개념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게다가, 아직 이런 개념에 관한 책이 처음이라 그런지, 정확한 분석과 철학적인 사고도 미흡하다.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런 사례들 가운데 부정적 사례도 마지막에 조금 소개하고 있지만, 거의 긍정적 사례들로 치우친 경향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조금 더 고려될 사항은 이런 쿠콜드 개념이 가능한 계층은, 언급되기는 하지만, 일부 성공한 중산층 40대 이후의 부부라는 점들도 다소 간과하고서 설명한 측면이 많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핫와이프 현상이 포르노와 거의 동일선상에서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도 조금은 축소 해석했다는 생각도 든다. 끝으로, 남성이란 입장에서 여성의 성의 자유를 주장하려고 한 탓에, 다소간에 남성적 욕망과 판타지가 개입된 측면도 더러 보인다. 그럼에도, 새로운 지평을 여는 도전이란 측면에서 읽어볼 만한 책이라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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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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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삶을 지탱한 그 고약한 것에 관해

 

 

 모임에서 권여선 작품을 기성작으로 하여 품평을 하자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분홍 리본의 시절에서 보여주었던 깔끔한 문장과 문체, 무언가 여자, 여자 하면서도, 조금 짙었던 청춘의 고뇌 등이 떠올랐다. 그런데 작품집이 안녕 주정뱅이에 그중 최고의 작품이 이모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무언가 선명한 이미지가 잡히질 않았다. 너무 걸쭉한 느낌의 어감들과 신파적일 것 같은 막연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 듣자 하니, 권여선 작가가 술을 좋아해서 그런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작품이라고 했다. 어차피 내가 아는 권여선 작가 작품이라고 해봤자, 거의 10년 전에 읽은 분홍 리본의 시절이 전부이고, 그것도 기억이 거의 없기에, 새롭게 다시 보자는 의미로 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아니나 다를까, 첫 작품 봄밤부터가 다소 신파적인 작품이었다. 물론, 아름다운 신파이고, 다소 감동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가 작가들에게 기대하는 건 항상 그 이상이다. 그런데 그다음 작품인 삼인행은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종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혼을 앞둔 남녀와 친구가 셋이서 여행하면서 술 처먹고, 농담 따먹고, 싸우고, 지지고 볶고, 대사는 많은데 의미는 없고, 무슨 홍상수 영화도 아니고, 정말 기대 이하였다. 드디어 이모차례가 되었다. 이제는 정말 아무런 기대도 없이 책을 넘기는데, 다 읽고서, 코끝을 찡하게 하는 무언가에 그만 당혹하고 말았다. 대체 무엇이 내 가슴 속에 파장을 일으켜, 먹먹한 감동을 준걸까?

 

 화자인 주인공은 작가이다. 그녀는 결혼 후 자신의 남편에게 시이모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이모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뭐 굳이 숨길 일도 아닌데, 숨긴 것일까? 알고 보니, 시이모님은 남편의 가족과 다소 척지고 지낸 모양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주인공은 시어머님과 함께 병문안을 가게 된다. 이를 통해서 주인공은 시이모님이 그동안 외가의 모든 생계를 홀로 책임지다가, 2년 전 돌연히 사라진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시어머님의 이야기가 묘했다. 시이모님이 떠나면서 남긴 편지가 그냥 별 내용 아닌데, 이상하게 무섭고 으스스한 게 서럽게 느껴지더란다. 하지만 병원에서 마주한 시이모님은 그저 평범한 늙은이이었다. 다소 차갑고 퉁명스러운, 그렇지만 무언가 고집스러운 면모가 보이는 그런 늙은이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늙은이가 주인공의 어떤 면이 맘에 들었는지, 아니면 주인공이 작가라는 직업 때문이었기에 그랬는지, 퇴원 후 주인공을 바로 집에 초대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자연히 주인공과 시이모님은 가까워진다.

 

 시이모님의 삶은 수녀와 같은 정말 간결하고, 규칙적인 삶이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담배를 피우고, 동네 도서관에 간다. 담배는 하루에 네 가치 정도로 제한하고, 술은 일주일에 한 번에 두 번으로 정한 날에만 먹는다. 그렇게 하루에 드는 돈이 5천 원 정도이다. 일주일에 한 번 술 마실 때 약간의 사치를 부린다 해도 고작 한 달에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35만 원 안팎이다. 여기에 관리비 포함한 월세 30만 원을 더하면, 실질적으로 한 달에 쓰는 돈은 65만 원이 전부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제된 삶이 가능할지도 의문스럽지만, 더 이상한 점은 그녀가 원래 집을 나온 이유와 이런 삶이 조금 모순된다는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책임지느라 그동안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는 이유로 나왔기 때문이다. 동생들의 학비를 다 대고, 남동생이 사업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 빚을 다 갚는데 꼬박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도 또 동생의 사업이라 일컬어지는 도박 빚을 갚아달라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없이 편지만 남긴 채 집을 나와버린 것이다. 그러면 이제 자신을 위해 맘껏 즐길 만도 하련만, 고작 한 달에 35만 원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어불성설이란 말인가?

 

 최근 나는 일자리를 그만두고, 생애 처음으로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쉬고 있다. 30대까지는 거의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살아왔기에, 겪어볼 수 없던 경험이다. 그런데 40대 들어서 은행에서 청원경찰로도 일하고, 구청 소속으로 공원에서도 일하니까, 8개월의 실업급여가 지급된단다. 150만 원 정도 되는 금액이다. 아무래도 내가 늘 최저임금으로 살았기 때문에 책정된 금액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다. 50만 원은 부모님 생활비, 50만 원은 빚을 갚기 위한 저축, 그리고 남은 50만 원에서 내가 한 달 동안 쓰는 금액은 약 20만 원 정도이다. 물론, 내가 부모님과 같이 사는 이유로, 식비라든지, 여타 다른 생활비는 따로 들지 않는다. , 아파트 한 채를 가지고 있어서 분기별로 재산세를 내야하고, 요새는 치아 치료비용 때문에 거금 110만 원이 따로 들기는 했지만,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적은 생활비로 내 개인은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책에 나온 이모와 같이 일주일에 며칠을 정해놓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담배는 하루에 네 가치 정도, 술은 어차피 지병 탓에 이제 더는 할 수 없기에 금주를 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나온 이모처럼 나는 수녀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일주일에 내가 정한 5일 정도의 도서관 출입을 늘 지키지 못하고 있고,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면서 집구석에서 퍼질러서 있기 일쑤이다. 다만, 그런데도 내가 이 삶에 만족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이다. 처음으로 돈에서 자유로운 시간, 나만을 위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런 외부의 방해도 없이, 구속도 없이. 그런데 사람이란 참 이상하다. 이런 삶에 대한 만족 탓인지는 몰라도, 내 성격은 예전에 비교해 몰라보게 변했다. 점점 인간관계를 귀찮게 여기고,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물론, 나와 정말 친한 지인들의 경우는 예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지인의 경우라도 내가 만나는 횟수는 일 년의 한두 번이 고작이다. 그러니 거의 일 년 내내 나는 한 달에 한 번 나가야 하는 문학 모임을 별도로 두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극히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갑자기 일하는 곳에서, 갑자기 친한 척하며 다가온 초등학교 때 친구 때문에 당혹한 적이 있었다. 분명, 친했던 것 같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말이다. 그런데 그게 이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갑자기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고, 자신의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 내 언어 능력을 살려보자고 제안하고, 자꾸자꾸 나를 귀찮게 한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여러 번은 아니고 그저 한두 번이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귀찮고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나는 그만 한마디하고 말았다.

 

 “, 왜 자꾸 친한 척하려고 하냐? 우리 별로 안 친하잖아.”

 

 이 소설 속의 이모도 그랬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일상에 균열을 준 얼어버린 수도 배관 탓에 엮이게 된 늙은 노숙자와 그녀를 할머니가 부른 물고기 눈의 여자와 그 남편, 그리고 관리실의 늙은 당직자와 죽이 잘 맞던 두 기사 때문에 예전 추억의 상념 속으로 그만 빠져들고 만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간절하고 처량한 눈길로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내밀고 있다.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아마 그것은 그녀를 향한 구애의 손길이거나, 관계에 대한 애절한 몸짓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손바닥에 자신이 피던 담뱃불을 지져버린다. 왜 그랬던 걸까? 단순히 그녀는 그때 그것이 귀찮고, 성가셨던 것뿐이었다. 그랬으면 이제 그만인 것을 왜 그녀는 죽기 전 다시 그 일이 떠올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 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대체 무엇일까? 지금 현재, 나를 지탱하고, 살아가게끔 하는 그 고약한 것은? 사람들에게 가닿지 못하고, 가닿을 수 없게 만드는, 나의 불가촉천민의 기질은 대체 무엇이고, 가닿은 사람들마다 데인 자국들은 과연 그 사람들의 상처였을까? 아니면 나의 상처였을까? 그 고약한 자국들이, 아니 그 고약한 상처 자국들을 바라는 외로운 마음들이, 우리를 모두 불가촉천민으로 규정짓게 하는 건 아닐까? 그래도 자꾸 손을 내밀어 보고 싶다. 그 누군가에게. 그리고 아물 수 있는 만큼의 깊이로 다시 한번 진하게 데이고 싶다. 그 누군가에게. 그리고 만약 나에게도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누군가를 깊게 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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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터네츠
김빛누리 지음 / 마인드레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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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터네츠 재밌었지만 조금 길었던 동화역정에 관해

 

 

 평소에 동화를 잘 보지 않지만, 조카 덕에 '캐스터네츠'를 읽게 되었다. 전체 이야기가 좀 길긴 한데, 그 중 하루의 꿈 이야기가 인상에 남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이 하루의 꿈 이야기가 이 글에서 가장 인상이 남는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너무 길어서, 중간에 집중력을 조금 잃어버렸다. 연령대를 어느 대상에 신경 쓰고 쓴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른들의 동화라고 하기에는 조금 못 미치고, 그렇다고 청소년들이 대상이라기에도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대상일 텐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무언가 내가 처음 대학 때 의무감을 느끼고 잃었던 천로역정처럼, 어쩌면 너무 간단한 이야기가 질질 끌고 간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사실, 하루의 꿈 이야기를 논외로 해도 중간중간에 재밌고, 따로 동화로 빼도 손색없는 내용들이 있었다. 아니, 작가가 소제목으로 만들어놓은 그 자체를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모두 거의 재밌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캐스터네츠라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이 글 전체를 이끌어갈 만큼 실의 궤가 잘 맞아 들어갔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사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고, 또 에필로그에서도 나오듯이 또 하나의 미래로 상정된다는 점에서 분명 연결고리는 존재하는데, 이렇게까지 길게 할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되기 위해서는 어린 왕자 정도의 풍부한 비유와 기발한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는 걸리버 여행기프랑켄슈타인처럼 완전 고전인 작품들이다. 솔직히 걸리버 여행기프랑켄슈타인은 지금이야 동화 같은 느낌이지만, 당시로선 혁신적인 작품들이었고, 지금도 그런 이유로 동화로 분류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이 소설보다 길지 않다. 아님, 그렇게 느껴지지 않든지. 어찌 됐든, 하나의 주제를 위해 너무 같은 이야기들이 똑같은 선상 위에서 반복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재밌으면서도 무언가 이건 좀 너무 긴데, 라는 생각을 내내 머릿속에서 지울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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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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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로맹 가리의 책을 오랫동안 읽고 싶었다. 불문과를 조금 다닌 탓에, 들어본 이름이기도 하고, 그의 대표 단편작들을 수록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제목이 멋있게 보였다. 일단, 전체적인 느낌은 생각보다 사회적 성격이 강한 작가였다. 아무래도 세계 2차 대전의 일선에서 전쟁을 겪었던 사람이다 보니, 나치에 대한 혐오가 보였고, 곳곳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세태 풍자도 볼 수 있었다. 물론, 프랑스 작가들의 대체적 경향인 좌파적 성향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하지만 만약에 첫 두 작품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와 ‘류트’만 본다면, 전형적인 프랑스 작가의 시적이고 몽환적인 경향이 두드러져 보인다. 내 개인적으론, 부부 내의 치열한 심리를 다룬 ‘류트’보다는 조금 더 선이 부드럽고 몽상적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더 좋았다.


 왜 수많은 새들이 페루의 해변에 와서 죽는지는 알 수 없다. 해변은 그렇게 새들의 성지 바라나시가 되어, 죽기 전 그들이 수없이 뿌려놓은 똥들이 굳어져, 조분석을 이룬 바위와 파도뿐인 고독한 공간이다. 이곳에 카페를 차려놓은 주인공은 그동안 스페인 내전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쿠바에서 전투를 치른 다음, 모든 곳이 종말을 고하는 이 페루의 해변에 카페를 차려놓고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중이다. 한낱, 피에로 분장을 한 서커스 단원 같은 떠돌이들이나 우연히 마주하는 이 바닷가에 한 여인이 자신의 나머지 생을 맞이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바다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주인공이 왜 그녀를 살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살아야겠다는 생의 본능처럼, 누군가를 살려야겠다는 생의 본능이 작용했으리라고 추측해볼 뿐. 


 “날 내버려뒀어야 했어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지만, 남자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곳에 머물게 해주세요.’라고 부탁까지 한다. 주인공의 마지막 생에 어떤 빛이 머무는 걸까? 잠깐, 간절했던 바람은 잠시 뒤 여자의 지인들 방문으로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다. 부부관계로 보이는 영국인 남자와 여자는 대화를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집착하고 있다. 여자는 무언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 보인다. 분명한 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카페를 떠나, 이 바다를 떠나, 다시 자신들이 사는 세계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새들이 이 해변에서 죽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돌아가는 길, 여자는 아쉬움에 뒤돌아본다. 카페는 비어있고, 그곳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편, 중간중간엔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그렇게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인’ 이야기이다. 새들은 왜 이 해변에 와서 죽는 걸까? 왜 카페는 비어있고, 누구도 남아있지 않는 것일까?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 글 속에 남자와 여자처럼 서툴게 살아갈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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