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고 사소한 아픔에 관해

 

 

책장을 넘기다 손을 베었습니다

상처도 없고 그렇게 아프지도 않아

약도 바르지 않고 가만히 낫기를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나날이 날짜가 지나갔지만

샤워를 할 때마다 물건을 집을 때마다

책을 읽으려 할 때마다

엄지손가락 보이지 않는 상처가

아리고 저며왔습니다

때론 이렇게 보이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상처가 오래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대여 하루하루 무사히

옷을 갈아입다가 가구 모서리에

팔뚝이 부딪히지 않기를

문을 열고 지나가다가 문턱에

발가락이 부딪히지 않기를

그렇게 그대의 무사하고 무난한 하루가

내내 지속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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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꼬마 아가씨

 

 

동네 슈퍼에서

조그맣고 통통한 소녀가

아주 앳된 목소리로

휴지가 없어

휴지가 없어

휴지가 없어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한다

동네 슈퍼 아저씨

집에 휴지 배달했어

크게 외쳐보지만

소녀는 더 앳된 목소리로

휴지가 없어

휴지가 없어

휴지가 없어

메아리처럼 소리를 되뇐다

너무 귀여운데

마음이 조금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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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의 猫,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차 안에서 선잠을 자고서

혼자 걷는 묘지의 산책로

짖어대는 개소리에

신경이 곤두서

돌아서려는 찰나

묘한 고양이 한 마리가

곁으로 다가와 아양을 떤다

묘하다

고양이가 아양을 떠는 모양새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서는 걸음이

하도 귀여운 모습에

차 안에 뱅어포를 가져와

고르게 잘라주니

먹는 모습도 묘하고 귀엽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보고 싶어 자리에 가보니

고양이는 없고 남은 뱅어포만

몇 조각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묘지 위에 꽃들은 시들어가고

꽃들의 주인은 아무런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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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

깊이 얽혀있다

아주 먼 옛날 바다에

표류한 누군가가

물고기의 밥이 되어

분해돼서

박테리아가 되고

또 썩고 또 썩어져

짙은 원유가 되어

당신의 날개가 되어서

저 하늘에서 이 하늘로

데려다주는 꿈을

이어준 검처럼

혹 다른 누군가는

나무의 거름이 되어

당신의 의자가 되고

당신의 집이 된 것처럼

나는 언젠가

당신의 등나무가 되어

당신이 잠시 쉴 수 있는

그늘이 되고 싶다

당신이 잠시 바라볼 수 있는

휴식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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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거센 폭풍우가 지난

다음 날 아침이면

빌딩 사이 참새들이

짹짹 짹짹 짹짹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다

참철아, 아무 일 없었지

참순아, 너도 무사했지

지지배배 지지배배

이름 모를 새들도

구구 구구 꾹꾹

거리의 비둘기들도

서로 안부를 묻는데

아무도 떠오르질 않는다

문득 당신께 안부를 묻고 싶다

간밤에 아무 일 없으셨지요

언제나 잘 지내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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