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관 살인 사건, 비상구 - 김영하의 섹시한 글쓰기에 관하여

 

 

 

  김영하의 작품은 자극적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글은 언제나 섹시한 맛이 있다. 아마 그의 첫 작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부터 나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간혹 그의 글을 볼 때마다 나의 오감은 항상 비슷하게 반응한다. 마치 하룻밤의 달콤한 정사를 꿈꾸면서 극대화된 쾌감의 짜릿함을 느끼는 기분과도 같이 제 혼자 달떠 올라서, 글을 다 읽고서는 항상 사람이 간혹 지나다니지만 잘 보이지 않는 폐허에서 몰래 자위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미묘한 감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대한 내 시선이 양가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먼저, 이번에 읽은 그의 여러 단편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었던 ‘사진관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여기서 내가 크게 주목한 키워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많은 살인과 치정이라는 상황,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결론은 결코 드라마틱하지 않으며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사실. 비단, 이 글속 화자의 직업 자체가 형사이기 때문이 아니라도, 그의 글속엔 언제나 살인과 치정이 넘쳐난다. 하지만 ‘사진관 살인 사건’에서와 같이 결론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살인과 치정이야기니까, 당연히 치정을 통한 살인이야기로 종국을 내야할 것 같지만, 살인자는 전혀 뜻밖에 곳에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굳이 무슨 까닭으로 살인이야기에 치정극을 섞어서 글을 쓴 것일까? 이 글 속에선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김영하는 그 여인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특이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조형사야 신참이니까 알 수 없을 테지만 내 코엔 그 냄새가 난다. 그것은 청결한 화장실과 비슷하다.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한 바닥, 미미한 방향제 내음, 개방된 은밀함, 금세 씻겨나간 더러움 같은 것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살인과 치정이야기인 까닭에 여자의 인상에 대한 이 묘사는 소설에서 하나의 풍미적인 작용으로 끝나야겠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이 글의 전체적인 방향과 분위기로 자리매김해버린다. 즉, 소재와 주제와 별도로 풍미가 주체가 되는 소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청결한 화장실 같은 느낌이라니? 또 금세 씻겨나간 더러움 같은 것들이라니? 이 얼마나 자극적이고 섹시한 단어선택이란 말인가? 물론, 이러한 묘사에 묘한 상상을 덧댄 내 개인적 기호와 취향이 소설의 해석 자체를 오도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괜한 장치적 기능으로 작용하는 소설의 풍미에 발정한 개새끼처럼 혀를 내밀고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껄떡거리는 우를 현재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내 개인적으로 가장 그다운 소설이라고 느낀 소설이 이 소설인 것을, 그래서 그 풍미가 이 소설의 전부라고 말할 수밖에 달리 더 좋은 표현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대체······.

 

  두 번째로 내가 유심히 본 소설은 ‘비상구’였다. 이 역시 ‘사진관 살인 사건’과 비슷하게 여자의 질을 비상구로 표현해내는 풍미 그 자체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그걸 빼고서 이 글을 이야기하자면, 그냥 90년대식 쌈마이들의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 뭐 이 정도쯤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물론, 굳이 이 이야기의 ‘비상구’를 각박한 현실에서의 탈출구라는 풍유라고 누군가 이야기한다면, 나는 대충 수긍할 것이다. 문학적으로 굳이 그렇게 해석을 해야 한다면 그건 분명히 온당한 해석이긴 할 터이니까. 하지만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이 작품집 내에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와 ‘고압선’ 등이 훨씬 풍유적인 글이기에, 내 개인적으로 김영하의 문학적 풍유와 비유에 관해 말하고자한다면 그 두 작품들을 뽑을 것이다. 그에 비해 ‘비상구’는 문학적 풍유를 들먹이기엔 그 끈이 너무 엷다. 아니, 사실 내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자가 의도적으로, 아니 거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여자라는 그것도 여자의 가장 은밀한 부위에 한정하여 그 특유의 판타지를 써내려갔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이 글은 ‘사진관 살인 사건’ 보다 풍미 그 자체를 위해서 쓴 글일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일까? 조금 섹시한 맛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여기엔 청결한 화장실이라든가, 갓 씻겨나간 더러움 같은 비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너무 대놓고서 표현하는 ‘비상구’라는 직유법적인 비유가 내 취향이 아닌 탓인 듯싶다. 하지만 재미와 가독성의 측면에서 이 글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제까지 내 개인적으로 몰랐던 김영하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의 섹시함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때론 너무나 하룻밤의 달콤한 정사만을 꿈꾸어 그 여운이 길지 못하다는 사실. 그래서 그의 발칙한 상상력과 사변들이 순간의 즐거움을 주긴 하였지만, 그때 그 순간뿐이었는지 나는 이제껏 김영하를 따로 파고자 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자전소설이라고 해서 이번에 읽게 된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경우는, 만약 문자 그대로 자전소설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보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지금까지 읽은 김영하와는 완전히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그 글속에서 그는 글에 영혼을 판 대가로 아마 그림자가 없는 자신을 설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림자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는지, 자신의 그림자를 만들어줄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다. 단순히 하룻밤에 달콤한 정사를 함께 나눌 여자가 아니라, 같이 밥을 먹고, 자신의 글을 읽어주고, 그렇게 같이 생활인으로써 함께 살 수 있는 여자에 대한 그리움······. 하지만 아쉽게도 또 아이러니한 것은 그 글이 그에겐 나름 의미 있는 자전적 소설일지는 몰라도, 그의 소설 특유의 풍미인 자극적 섹시한 맛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같이 김영하는 언제까지나 젊고 파릇한 감성으로 섹시한 글을 써내려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럴 수 있을까? 만약 섹시함이 불변한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란 작품집이 오래된 작품집이었기 때문에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감성이 아쉽게도 조금은 올드하다는 사실이었다. 삐삐와 채팅 이야기, 오래된 영화와 오래된 음악 이야기, 그 주된 감성의 뿌리는 거의 90년대 감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나와 같은 90년대 학번에겐 감성팔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 그게 통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도 이제 슬슬 하룻밤의 달콤한 정사에서 조금 더 오래 기억될 정사들로 이야기를 바꾸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조금 더 깊은 풍미의 섹시함을, 그래서 오래도록 우리 뇌리에 각인될 그런 섹시함을 추구해보는 것도 하나의 그다운 글을 추구하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물론, 그가 ‘피뢰침’에서 묘사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강렬한 기억이란 아주 짧고 순간적이기에, 그래서 전격을 맞은 듯한 느낌이기에, 그 뒤에 남는 것은 일종의 요의 현상뿐일지는 몰라도, 단지 그런 것들이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일지는 몰라도, 섹시함이라는 것에도 일종의 농도가 있다고, 그래서 그 뒷맛도 다양할 거라고 상상해보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거라 믿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리지어

 

 

전철 역 출구 앞에

허름한 외투를 걸친

할머니 한 분이

노오란 꽃을 팔고 있어요.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박스 위로 두껍게

‘프리지아’라고 써놓았어요.

프리지아, 발음이 예뻐서

자꾸 불러보게 되어요.

티 하나 없이 샛노란

그 환한 모습이 떠올라

자꾸 웃음지어 보여요.

어쩌면 그늘 하나 없는

순결한 당신을 닮아

자꾸 떠올리나 봐요.

어쩌면 깨끗한 향기가

당신의 체취와 비슷해

자꾸 생각나나 봐요.

프리지아, ‘아’ 발음이 예뻐요.

‘아’하고 신음하며 경탄하는

당신을 자꾸 떠올리게 되요.

프리지어, ‘어’ 발음이 싫어요.

‘어’하고 그냥 수긍하고

뒤돌아선 나 같아서 답답해요.

그냥 당신을 프리지어가 아닌

프리지아라 기억 할래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수영 -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꽃잎2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 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 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 같고

먼저 떨어져 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 같고



 내게 있어서 김수영이란 시인의 소리는 이제까지 이 시를 낭송하던 대학 동아리의 존경하던 선배의 목소리로 각인되어져 있다. 낙시촌, 즐거울 낙(樂), 시 시(詩), 마을 촌(村)이란 글자 그대로, 시를 즐기는 마을을 꿈꾸며 화요일 밤마다 조그만 대학 동아리 방에서 시를 낭송하던 날들, 그날들의 한가운데에 선배가 그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의 떨어지는 속도와 무게로 느릿하게 그렇지만 묵직하게, 임종의 생명 같고, 혁명 같고, 바위 같은 꽃잎을 낭송하던 순간, 어쩌면 나는 그때까지 모든 시가 꿈꾸는 침묵을 터뜨리는 지점을 발견했을지도,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랬기 때문일까? 몇 년 전 예기치 않던 죽음의 순간을 넘기고서, 다시 일상의 궤도로 돌아와 산책을 하던 날들, 나는 모르게 가만히 이 시를 읊조리면서 떠올리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도 임종의 생명 같은 꽃잎의 자태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나의 죽음이 그렇게 나의 삶이 조용하지만 무거운 혁명 같고, 바위 같기를 모르게 꿈꾸었을지도, 아마도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폭포, 풀과 함께 이 시의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는 아마도 시인 김수영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일 것이다. 내게 있어서도 이 시 각 행의 구절, 구절마다 머리의 총성을 울리는 강렬한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 시에서 주는 ‘눈’의 이미지가 아무리 부인하고, 부정을 하려해도, 순결과 순백을 의미하는 ‘눈’의 고유의 이미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심지어 이 시에서의 ‘눈’은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는 ‘눈’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 위로와 위안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평화란 이미지의 ‘눈’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그 평화가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위장된 평화임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김수영 시인 자체가 지닌 저항의식과 ‘눈’이란 이미지가 가진 이중성을 떠올려볼 때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눈’은 그 순결함이란 유일무이한 무기로 모든 세상의 잿빛과 총 천연의 가을빛깔마저도 앗아갈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 강원도에서 어떤 경험을 통해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기도 하다. 1미터가 넘게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을 정화한 듯한 느낌, 동시에 그렇게 온 세상을 매장시켜버린 듯한 느낌, 그 무어래도 좋다. ‘눈’은 때론 그렇게 잔인하다. 하지만 이 시 자체 내에서 그러한 ‘눈’의 거짓과 위장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이것은 시인 김수영이란 저항의 이미지 속에서 꺼내온 ‘눈’에 대한 구차한 이미지이며, 해석일 따름이다. 실은 이 시 속에서, 내 개인적으로는 ‘눈’이란 이미지가 더욱 ‘위장’과 ‘잔혹함’과 반대되는 이미지를 구현해내고 있다고 믿는다. 즉, 여기서 ‘눈’은 가장 완벽한 순백이며, 순결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젊은 시인들에게, 어쩌면 시인 그 자신에게, 그러할지라도 마음 놓고 기침을 하고,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뱉어내라고. 왜냐하면 시는 시 자체가 완성이라고 믿는 순간, 더 이상 시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시의 천성이며, 본능이다. 시는 늘 자기 자신의 배반을 꿈꾼다. 그리고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침을 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모든 반동에 대한 반동이며, 배신에 대한 배신이, 시이며 어쩌면 시인 김수영이 그토록 꿈꾸었던 혁명이 아니었을까?



거대한 뿌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디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이번에 김수영 전집 산문과 시를 전체적으로 읽으면서, 다시 바라보게 된 시이다. 아마도 이 시를 다시금 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김수영의 산문집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엔 이 시에서 등장하는 김병욱이란 월북시인과 그가 존경하던 김이석이란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아마도 1연은 김병욱 시인에 대한 그의 존경과 콤플렉스가 담긴 시구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2연은 지레짐작이기는 하지만, 월남 소설가인 김이석이 마지막으로 한국일보에 개재하고자 했던 대원군이란 소설의 사료로써 비숍 여사의 이야기를 김수영 시인이 담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3연부터는 자신의 존경과 콤플렉스의 대상이었던 김병욱이란 시인, 그리고 김이석이란 소설가, 어떤 의미에서 대극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남과 북을 초월하여, 김수영 시인 그 자신의 근원적인 그리움, 향수로 한 발자국 나아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그의 산문집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에서도 스스로 밝히듯이 요강, 망건, 장죽 등은 사라져가는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라져간다는 그 말속에서 김수영 시인은 그 말들이 자신의 향수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왜 시인은 이 시 속에서 그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들을, 그 향수들을 반동으로 표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거대한 뿌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 거대한 뿌리가 그가 4연에서 강하게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로 총성을 쏘는 듯한 씹과 개좇, 그리고 좇대강의 이미지와 너무나 흡사하게도 겹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냥 쉽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서 그냥 좇과 뿌리의 이미지를 다르게 생각하면 끝나는 문제일까?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반동도 아니고, 좇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김수영의 시는 어떤 의미에서든 반동이어야 하고, 좇이어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사용했던 개좇과 씹, 그리고 좇대강은 무섭도록 거대한 뿌리와 닮아 있는 하나의 형상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각기 다르게 시커먼 가지를 가진, 그렇지만 하나로 이어지는, 시인도 모르는, 나도 모르는, 그 거대한 뿌리란 것은......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여


결의하는 비

변혁하는 비……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이 시는 이번 기회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김수영의 시이다. 사실, 이 시를 통해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게 그동안 선배의 목소리로 깊게 각인된 김수영 시인의 <꽃잎1>의 이미지를 지우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물론,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이유일 뿐이지만, 내게 있어서 그 선배는 김수영이란 이미지와 더불어 ‘시가 그리스도를 죽였다.’란 강한 경구와 함께 각인되어진 선배이다. 사실상, 고등학교 적부터 일기 대신 시의 형식을 빌려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시를 써왔다고 자부해온 나이지만, 정작 그 모든 시들은 거의 한낱 감정의 부스러기이거나 나부랭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선배를 통해 처음으로 나는 시라는 것이 자신의 똬리에 갇힌 채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듯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한 언어의 최상위 도구이며, 동시에 그러한 이유로 침묵의 발산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했기에 내게 있어서 그 선배는 시인 그 자체였다. 그 선배의 시가 좋았느냐, 좋지 않았느냐 그 문제는 둘째였다. 지금 내가 김수영의 시가 서정주나 김춘수의 시보다 덜 정갈하다고 느끼듯이, 시와 시인의 문제는 내게 있어서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별개의 문제이다. 즉, 김수영이란 시인이, 그리고 내게 있어 선배란 존재가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시 자체라기보다는 시인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시인 자체가 일관되게 추구해오고, 줄기차게 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온 소리! 이것은 어떤 영감으로 급작스럽게 얻어진 하나의 시를 넘어선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선배의 갑작스런 절필은 내게 하나의 큰 사건이었고, 충격이었다. 동시에 그 이유로 김수영은 내게 있어서 언제나 정이 아닌 반으로써 자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선배의 절필을, 의미를 확장하여 선배의 배신을, 나는 쉬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이삼십 대의 대부분을 나는 선배의 그림자들을, 물론 이것은 글이기에 지나치게 과장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그런 시들을 내 안에 반으로써 정립하였고, 그렇게 부정하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으로 정립했던 김수영의 시를 다시금 보게 된 지금, 나는 이 시들이 내게 있어서 반이 아닌 오히려 정이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아직도 비는 움직이면서 내리고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가 흐릿하게 보이고 있으며,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그래도 여전히 비는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임을 제하는 결의로써 끊임없이 여기저기 물방울을 튕겨내며, 그렇게 춤을 추면서...... 그리고 침묵하는 소리로 침묵을 터뜨리는 배신을 여전히 꿈꾸면서...... 비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대가 시인이라면



만약에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매일 동네 어귀에 트럭 한 대 대놓고서

20년 동안 한결같이 회를 팔아온 아저씨의

파닥파닥 물차 오르는 생선 대가리에

탕탕 칼을 쏘고 쓱싹쓱싹 배 가르는 소리를

시에 담아

다리에 실금이 가 입원한 어느 어머님의

못난 아들을 위해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몰래 병원에서 나와

둔탁둔탁 걸어오는 석고붕대의 저린 발자국 소리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인 그대와 나의

엷디엷은 층층 사이사이에 긴 다리를 놓아

그대와 나의 체온 사이로 영혼의 습도를 녹여서

겨울에 성에 낀 버스 창가에 그대 입김으로

한여름 하염없이 창밖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 숨을 내쉬는 어느 아픈 소년의 숨결을 섞어

시를 적어 놓을 수 있을 텐데

만약에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그렇게 세상의 모든 고통의 멍에와 슬픔의 결들 사이에서

한 마리 날아오르는 새가 되어 꿈이 되어

차창 밖 갇혀버린 풍경들 속에 풍경화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잃어버린 표정들을 환하게 비추어

되살려 놓을 수 있을 텐데

우리가 모르게 흥얼거리는 못다한 노래들을 

한 없이 부르게 할 수 있을 텐데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배꽃이 진 자리에서



허기진 숨결로 들어선

동네 어귀 산기슭에 배 밭

가슴 속 깊이 일렁이며

울컥, 싸하게 열리던 순간

천지사방에 온통 배꽃이

환하게 순백을 터뜨리고

문득 생애 처음으로 떠올린

먼 그대 생각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흐드러진 꽃잎이 떨어지던 날

흐드러지게 뿌려지던 내 욕정의 관념들을

모두 뒤로 하고

배꽃 같이 환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사뿐히 즈려 감는 순백의 단꿈-

아스라이 사라지고

그늘 한 점 없는 배 밭 귀퉁이

언제 떨어진지도 모른

마른 아카시아 꽃잎들을 밟고서

배꽃처럼 너무 새하얘 다가설 수 없던 그대

이젠 고이 떠나가 주시기를

새하얗게 사라져 주시기를

내내 기다리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