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
오랫동안 고수했던 머릿결 방향을 바꾼다
툭 튀어 불거진 상흔을 어설프게 감춘
거울 속 내 모습이 영 거북스럽기만 하다
하루아침에 결이 쉬 바뀔 수는 없으리라
내 생에 그 얼마나 많은 결이 바뀌었던가
숱한 시도와 바람들로 한결같기를 꿈꿨지만
일렁이는 걸음에도 쉬 흐트러지는 머릿결
얼마나 자주 거센 바람을 맞으며 걸어왔는지
언젠가 아버지처럼 머리숱이 다 사라지면
그때쯤 모든 결이 사라진 진짜 내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마주할 수 있을까
더 이상 그 어떤 결도 없는 무결한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보여줄 수 있을까
아름다움에 관한 명제
아름다운 길이 가장 위험한 까닭을 그대 아는가
눈 내린 다음날 나뭇가지 위 잔설을 바라보는
그 길 위에서 그대는 미끄러지고
벚꽃이 휘날리는 화려한 봄밤 그 뒤안 어둠 너머
그대가 향한 그 길에서 그대는 혼자가 된다
너무 정결하고 아름다워 꺾이는 것이 꽃이라면
너무 고고하게 피어난 까닭으로 그 누구의 손길도
가 닿을 수 없는 사실을 그대 혹시 아실는지
그렇게 모든 아름다움이 위태롭다는 그 사실을
결 혹은 그 사이
결 바람결 꿈결 숨결
긴 치맛자락 두루두루 펼쳐진 결
살결 당신과 나의 결 그 사이
층층이 쌓인 시간의 겹과 겁 사이
단 한 번도 매만져보지 못 한 그 한결
한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그 사이
어떤 그리움에 관한 시
10년 만에 시낭송회를 하자고 해서
한껏 들떴는데 후배들이 바쁘다고
취소하겠다 전한다
그 후 자꾸 나를 피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리다
시를 나눌 수 있다는 기쁨보다는
어쩌면 다시 본다는 기쁨이었는데
시 때문에 다시 볼 수 없다니
혼자 마시는 커피 위에
흩날리는 눈발이 떨어지고
문득 자욱한 안개를 떠올린다
모든 생각의 편린들이
시가 될 수 없어
젖은 담배처럼 불이 붙지 않고
모든 그리움의 흔적들이
젖은 담배 연기처럼 피어나질 못하고
그래도 불을 켜고 연기를 뿜고
명제
스탠드 옷걸이 맨 위에 걸린 바지가 떨어져
마지막 걸이에 걸려 위태롭게
바닥에 반쯤 널브러져 있다
누군가는 나 대신 거리에 낙엽을 쓸고 있는 가을
마지막 걸이에 걸린 옷 같은 내 마음이
쓸어도 쓸어도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투성이 같아
빨아도 빨아도 질척거리는 걸레의 얼룩 같아
푸석푸석하고 찝찝한 그 뒷맛이
내내 씁쓸하고 안쓰럽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바지를 털고 다시 입을 것이란
그 자명한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