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몽상가의 기억

 

 

오직 떠나지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떠나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모 말도 않고 생각도 없이*

그저 떠나지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떠나지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바뀐 걸까요?

아직도 내 마음은

오직 떠나지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정처없이

터진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쏘다니고 싶은데

모든 걸 쏟아내고 싶은데

더 이상 방밖으로 나오질 않고

아무것도 쏟아내지 않은 채

무력하기만 한데

그렇게 절망으로 가득한데

그래도 아직도 내 마음은..

 

 

 

 

 


*랭보, 감각, 민음사, 2010년, p10

**랭보, 나의 방랑생활, 민음사, 2010년,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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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과 진심의 정합

 

 

나비야 어쩌란 말이냐

푸른 날개를 파르르 떠는

푸른 나비야 어쩌란 말이냐

내 너를 볼 때마다

짐승처럼 발기하여

네 날개를 뜯고

처참히 능욕하고 싶은 것을

푸른 나비야 어쩌란 말이냐

세월이 지나

모든 것이 잊혀지면

내 너를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을

푸른 나비야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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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코피가 흐른다

바닥에 점점이 맺혀

빨간 웅덩이를 만든다

눈물이 흐르고

콧물이 터지고

오줌보가 폭발한다

모든 구멍에서 물기가

빠져나와

웅덩이는 샘이 되고

샘이 강이 되어

바다로 흘러간다

그 바다 건너 혹은

바다 깊은 곳에서

폭풍의 전설을 간직한

빗물이 쏟아진다

그렇게 코피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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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뜨기

 

꽃무늬를 닮아 꽃처럼

아름답고 싶다

별무늬를 닮아 별처럼

반짝거리고 싶다

강무늬를 닮아 강처럼

시원하게 흐르고 싶다

바람무늬를 닮아 바람처럼

자유롭게 다니고 싶다

산무늬를 닮아 산처럼

깊게 숨쉬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내 무늬는

회색빛 도시의 빌딩무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유리창의 먼지무늬

사람의 무늬가 되고 싶다

꽃처럼 별처럼 강처럼

바람처럼 산처럼

확실한 무늬가 있는

사람무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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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방의 기도

 

 

나방이라고 너무 쉬 죽이지 말아주세요

저도 어엿한 나비목에 속해있어요

꽃을 찾아 꽃무늬를 한 나비는 아니지만

나뭇결에 고요히 잠든 나뭇결을 닮은

저의 무늬가 징그럽다면

꽃가루가 아닌 밤의 가루를 뿌리고 다녀

위험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니랍니다

저는 그저 밤을 사랑하는 나비일뿐

찬란한 태양 대신 당신들이 만들어 놓은

형광등의 불빛과 가로등불을 사랑하는

나비보다 더 당신과 친해지고 싶은

그런 존재일뿐입니다

그래도 제가 밉고 보기 싫으시다면

한밤에 촛불을 켜주세요

그 촛불에 오직 당신을 위해

불타올라 사그라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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