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에게

 

 

무지한 네 자신을 알라는 당신의 격언이

그저 밑도 끝도 없는 말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를 알면 둘을 모르고 둘을 알면 셋을 모르고

무언가 안다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우주의

쏟아지는 별들의 무량수처럼 그 먼 거리만큼

헤아릴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단 사실을

그 무지의 진실을 이제야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모른다는 진실을 배워

아무것도 모르는 태아적 지고무지의 경지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태아날 순 없지만

이제 차마 무언가를 안다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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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

 

 

태풍이 올 거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연일 거센 바람이 여기저기 불어왔지만

폭풍우는 어디에도 쏟아지지 않았고

높은 습도에 가끔 잔비만 흩뿌렸습니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기승을 부리며

연일 들이칠 거라고 위협을 알리는데

소문만 무성하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

미국에서 나래 짓을 한 나비효과라고

누군가는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더러는 북한의 고냉저습한 독립적 기후가

한반도 전체에 영향을 끼쳐 안전하다고

해괴한 해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과장에 과장을 더했지만

연일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았습니다

나도 아무 일 없이 그렇게 잘 지냈지만

뜻밖에 집에 김치냉장고가 고장이 나서

드르륵 드르륵 태풍 소리를 들어야했습니다

너무 낡아버린 김치냉장고를 바꿔야한다고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께 간청했지만

나이가 들어 옹고집이 되어버린 아버지는

수리하면 괜찮을 거라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오래된 세월은 쉽게 청산할 수 없는 것인데

이젠 더 이상 어찌할 도리도 없이 방치되어

집에서 태풍 소리와 함께 김치 쉰내가

연일 진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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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과 한 덩어리

 

 

동네 편의점 그늘 쉼터 옆

이름도 생소한 고압 정유기

철책 너머 한 귀퉁이에

조그만 약과 한 덩어리를 보고

참새 한 마리가 날라왔다

짹짹, 짹짹거리며 쪼아 먹는데

어디서 알고 왔는지

여기저기서 참새들이 날라온다

다 먹지도 못 할 거면서

그 거 조금 붙어 먹어보려고

여기저기서 싸움이 붙는다

짹짹, 짹짹거리며 마치 투계인양

종종걸음으로 퍼덕이면서

서로 얼굴을 쪼아대기 시작하는데

그 사이를 피해 몰래 주워 먹는 놈

그걸 또 쪼아서 빼앗아 먹는 놈

여기저기서 정말 가관이 아니다

이러보아도 저리보아도

그 놈이 그 놈 같고 저 놈 같은데

그래도 그 안에서 제일 센 놈이

모두 쫓아내고 혼자서 독식한다

다음날 참새들은 어데 간 데 없고

개미들이 한데 달라붙어 있다

며칠 후 약과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누가 다 먹어버린 걸까?

참새일까? 개미일까? 시간일까?

아니면?

다 꼴 보기 싫어 누가 치워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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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추억이거나 그리움에 대해

 

 

좁은 신학교 앞동산에서

우리는 밑도 끝도 없는 신에 대해 말하며

누군가는 이 세상의 모든 예술에 대해

누군가는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에 대해

각기 다른 말로 떠들며

신학교 뒷산 마루에서 몰래 담배를 피며

그 담배에 실려있는 우리 반역의 함의를

아무도 모르게 봉화로 피어 올리며

그것이 우리의 밝고 빛나게 타오르는

낭만이란 사실을 만끽하며 그렇게

그렇게 모든 젊음이 타들어가도록

긴긴 밤들을 지새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우리 누구도 감히

신에 대해 말하지 아니하며

그 빛나던 예술도 사르트르의 실존도

반역의 낭만에 대해서도 함구한다

더 이상 빛나는 청춘이 아닌

빚내는 현실을 엄연히 마주하며

누군가는 두 아이의 아빠로

누군가는 한 직장의 책임자로서

서로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야기에 주억거리며

서로 무언가 할 말을 애써 찾고 찾다가

우리가 결국 그 시절을 재탕하며

또 우려먹고, 또 우려먹으며 되새김질하는 까닭은

결코 우리가 그 시절을 그리워하기 때문은 아닐 거다

더 이상 우리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완전한 타인이 되어버린 사실을 알고 있기에

드문드문 간혹 생각나더라도

안부를 묻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실체 없는 추억을 그리움으로 안주삼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 그 사실을

실체 없는 관계의 끈을 그렇게

이어가고 있다는 그 사실을

그렇게 받아들일 뿐이지만

 

난 아직도 늘 누군가가 그립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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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서류철

 

 

갓 돌 지난 우리 조카는

동요를 들려주면 춤을 춘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나는 파란 서류철로 부채질하며

나비의 날개 짓을 흉내 낸다

그때마다 조카는 서류철을 만지며

나를 따라 나풀나풀 나래짓한다

동네 배 밭 앞 카페가 생겼다

그냥 하릴없이 책을 읽다

담배를 피러 바깥으로 나오면

체험 텃밭 위로 나비가 날아다닌다

명치끝에서 목 위를 타고 울컥한다

언제쯤 우리 조카는 나비를 보고

울컥거리는 설렘을 알게 될까?

책장 속 푸른 서류철 안에서

나비가 쏟아져 날아오는 꿈, 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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