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뜰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4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겨울 뜸부기 - 과한 개인적 투영을 담은 나의 주접거림



 혼자 고무줄을 넘으며 쨍쨍히 노래를 부르던 계집애가 제풀에 흥이 식어 판자문 앞에 팔짝 주저앉자 사내아이는 이미 움직임을 멈춘 풍뎅이를 손바닥 위에 얹어 계집애의 눈앞에 들이대며 딱딱한 갑각 속에 감추인 연기빛 날개를 들춰보였다.

 이걸 땅속에 묻고 일곱 밤이 지나면 예쁜 나비가 될 거야.


 오정희, 최근 내가 이 작가에 사로잡혀버리는 바람에 다른 작가의 글들이 눈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오정희 작가의 글만 줄창 읽은 것은 아니다. 그간 나는 꾸준히 바이링궐 에디션에 나오는 작가들의 글을 읽어왔고, 그 중 몇몇 작품들은 품평을 써서 남겨두어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좋은 글들이었다. 그런데 오정희 작가의 어떤 강렬한 이미지들이 쉬 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 종내 품평을 쓸 수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내 개인적인 여러 가지 사정들도 곁들여져 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은 그런 내 개인적인 사정을 심각하게 과장하여 투영시켜 읽고서 쓰게 되는 그런 글이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글에서는 (전에도 늘 그래왔지만) 전혀 어떤 객관성의 담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 달아나자.”

 오빠가 한 자락 바람처럼 서늘하게 내게 말했다. 나는 무서움을 감추고 어린애다운 교활함으로 짐짓 천진하게 웃으며 크게 물었다. 어디까지 와있니.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로 오늘도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 아직 돌아오시질 않는다. 그럴 때면 오빠와 나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매일 이런 문답놀이를 한다. “어디만큼 와있니?” “고개 하나 넘어섰다.” “어디만큼 와있니?” “개울까지 와왔다.” “어디만큼 와있니?” “신작로까지 와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날 오빠는 내게 달아나자고 했던 것일까? 물론, 글속 화자의 말처럼 유년의 기억이란 건 빛 바랜 천연색 사진처럼 대단히 암시적이고 몽롱한 분위기와 비슷한 것이어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한갓 공상이었는지 분명치는 않을 것이다. 내 어릴 적 기억도 사실 이와 비슷하다. 열사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신 아버지의 부재와 늘 일하러 나가시는 어머니, 그 때문에 시골로 내맡겨졌던 기억, 심지어 7살 이전까지 내 사진은 돌 사진을 제외하고서 단 한 장도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7살 때의 사진이란 것도 어찌나 어두운 그늘을 얼굴에 품고 있는지. 어릴 적 너무 바보 같아서 시골에서 사슴 그림을 보여주며 사슴다리는 네 개라고 백일을 가르쳐줘도 자꾸 잊어버렸다는 나, 그때까지 신발도 제대로 혼자서 신을 줄 몰랐던 나,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을까? 달아나고 싶다고? 그 어딘가로?


 어머니가 말하는 엉뚱한 귀신이라는 것은 오빠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이미 씌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무렵의 오빠를 생각하면 허리에 단도를 여섯 개씩이나 차고 다녔다는 연개소문, 혹은 지나간 시대, 노혁명가의 자전 속의 소년을 연상케 되어 슬며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언젠가부터 모든 소년은 꿈꾸기 시작한다. 자신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아니, 이미 주인공이라고. 그래서 때로는 젊은 베르테르가 되어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보고, 때로는 이 세상의 믿을 수 없는 부조리함에 맞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뜻 모를 혁명과 이상을 순진하게 꿈꾸며 믿기 시작한다. 내 경우에는 중학교부터 그 엉뚱한 귀신이 씌인 것 같다. 어릴 적 너무 저능아여서 걱정이었다는 나는 놀랍게도 초등학교 때는 전교 1등을 밥 먹듯이 하는 우등생이 되었다. 유난히도 내게 애착이 강한 어머니께서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한글을 못 뗀 나를 억척스럽게 하루 4시간씩 붙잡고 한글을 가르치시고, 사방팔방 다방면으로 학원을 보내면서 이뤄낸 성과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너무 일찍 조숙해져버린 나는 중학교 때부터 엄마, 아빠라는 말 대신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고, 중2 때부터 삶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사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었다. 어차피 죽을 건데, 왜 그렇게 바둥거리면서 공부를 하고, 또 그렇게 겨우 힘들게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갔다, 졸업을 해서,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차피 죽을 건데. 그 때문이었을까? 도덕 시간에 반공을 목적으로 배우는 공산주의 사상에 유난히 나는 관심을 가졌고, 그 이유로 친구들 사이에서는 빨갱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내가 인생의 회의를 느낀 자체가 공부에 대한 지나친 경쟁의식으로 촉발된 염증이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런 경쟁을 과열하는 사회가 아닌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라면 인간이 덜 고통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아마 순진하게도 그렇게 믿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새 너무 깊게 내려앉은 내 절망감은 나를 좀먹어 들어가 그 어느 것도 믿지 못하는 염세주의자로 변질시켜버렸다. 그렇게 허무한 감정으로 고등학교를 들어갔고, 그런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절망 대신 희망이라는 단어를 전적으로 신봉하게 되었다.


 군에서 제대한 오빠는 그 무렵 정부에서 한창 장려하던 양돈에 손을 대었다. 늙도록 주정뱅이 술치다꺼리나 하며 험하게 살겠느냐는 오빠의 설득에 따라 어머니는 술집을 정리하고 집을 팔아 작은 집으로 옮기고 안양 교외의 오백여 평의 부지를 샀다.


 누구에게나 모든 것이 장밋빛 희망으로 붉게, 파랗게 물들어 보일 때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정부가 장려했던 양돈 사업이 한낱 허황된 꿈이었을지 어떻게 알았으랴? 아니, 모든 것이 바로 눈앞에 장밋빛으로 붉고, 파랗게 흐드러져 피어있는데, 어떻게 제대로 상황을 판단하고 바라볼 수 있겠는가? 정부의 장려로 경쟁이 심해진 양돈 사업으로 인해 오빠는 무작정 수입종을 사댔지만, 수입종 돼지는 뜻대로 잘 자라주지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양돈업이 대기업화 되면서 영세업자들은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오빠는 끝까지 버텼고, 그 결과 집안에는 빚만 남게 되었다. 아마도 내게는 고교시절 2년이 그러했으리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교회를 다니면서, 구원을 믿고, 희망을 믿게 되면서, 너무나 급변하게 된 나는 급기야 신학대를 가겠다고 집에 선전포고를 했다. 사실, 그 이전 한 집안의 장손으로 제사상에서 절을 하지 않았을 때부터 그러한 전조는 예상된 바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아버지가 젊을 적 신학대의 꿈을 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월남전에서도 군병으로 지내며 남몰래 신에 관한 소망을 꿈꿨다는 그 사실을. 18년 만에 처음으로 시도한 내 가출 때문에 아버지는 17장의 긴긴 편지로 내게 자신의 숨겨온 과거를 털어 놓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고, 나는 내가 원하는 신학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부터 나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가진 것이 없어지자 오빠는 더욱 허황해졌다.

 하루에도 몇 가지씩 사업 계획을 세웠다가 허물고 다시 세우면서 별반 알아듣지도 못하는 나나 어머니에게 설명을 늘어놓거나 사장을 육촌아저씨로 둔 친구를 만나 다시 계획을 짜며 우리 형편으로는 꿈같은 오백만 원, 천만 원 소리를 거침없이 해대는 것이었다.


 신학교 1학년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나는 내 마음의 진실이란 문제 때문에 신이란 진리에 대해 의혹을 품게 되었다. 사실 어쩌면 진리와 진실이란 동전이 양면과도 같은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하나인 듯하지만, 실은 결코 마주할 수 없는... 마음의 진실에 집착하는 순간, 진리는 마음에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커다란 부피가 되어 마음 밖으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진리를 잃어버린 진실은 뿌리와 줄기를 잃어버린 가지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토록 나는 성서의 포도나무 줄기 비유에서 가지에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목마른 까닭으로 메말라버린 잘린 가지가 불태워져야 하나의 온전한 줄기와 뿌리를 갖춘 나무를 이룰 수 있다고, 때문에 잘린 가지의 모순은 온전한 구원을 존재케 하는 선조건이라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모든 말들이 이미 너무 허황되며, 그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란 사실을. 그럼에도 놓을 수 없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여전히 쉽사리 놓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지만 삼년 전 수도원을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 잘린 가지에 대한 나의 집착을 버리게 되었다. 그냥 어차피 불태워질 것이 숙명이라면, 혹은 그렇든 그러하지 않던 간에, 이미 잘린 가지는 가지이기에, 잘린 가지로서 자유를 누리면 된다고, 그냥 마음으로 수풀에 걸리고, 떨어지고, 밟히고, 뒹굴러 다니고, 그런 것이 아마 잘린 가지일 것이라고. 불태워지고 나발이고 그런 건 다 아무 소용없는 관념의 놀이일 뿐이고, 결국엔 줄기의 이야기를 가지의 이야기로 변주한 역으로 줄기에 대한 집착이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몰랐다. 그로 인해 내 마음의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는 대신,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걸머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손에 천원권 지폐 서른 장의 부피가 가핏하게 느껴졌다. 우편물이 밀릴 때이니 사나흘 후에나 오빠에게 닿을 것이다. 어쩌면 일주일 후가 될지도 모르고 오빠는 그 동안 누이동생에게서 올 변변치 않은 액수의 송금을 걸고 둘러쓴 빚을 감당치 못해 벌써 어디론가 달아나버렸을지도 몰랐다.


 나는 근래 은행대출을 받기 위해 부단히 애를 먹고 있다. 청원경찰을 하게 되어 알게 된 카드대출 대환대출인 햇살론을 받기 위해 연일 초조하게 신경이 곤두서 있다. 총 3개의 카드대출 약 1700만원, 카드 두 개로 받은 현금서비스 약 200만원. 하지만 나의 빚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러한 빚 무더기에 이르기까지 각종 카드돌려막기를 하기 위해 대학 후배들에게 거의 1500에 가까운 빚을 졌다. 그럼에도 이번 카드 값을 감당할 수 없어 또 대학 후배에게 칠백 이상의 돈을 빌려야 한다. 그래야 겨우 은행대출을 받을 수 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누군가는 그렇게 큰돈도 아닌데 뭔 엄살이냐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보통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학자금 융자로 혹은 집을 사기 위해 일 이억 이상의 대출을 받아, 그 빚을 갚기 위해 평생 빚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니까. 하지만 나의 빚은 그런 현실적인 빚에서 결코 기인하지 않았다. 물론, 애초에 돈 자체에 무관심하여 씀씀이가 좋지도 않고, 계산에도 밝지 않아 돈을 모으는 방법도 모르기는 한다. 하지만 내가 가정이 딸린 것도 아니고, 이제까지 계속 백수로 지낸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빚이 늘었겠는가? 첫 번째는 여자 문제이다. 아니, 섹스에 대한 기갈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는 자주 돈을 주고 성매매를 하는 업소에서 몸을 풀었고, 그곳의 여자들과 따로 밖에서 만나보기도 하고, 인터넷 채팅을 통해 장기간의 조건만남도 해보았다. 처음에야 물론 그런 곳에 가는 데에 일종의 개인적 수치심과 모멸감이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자신을 합리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순간, 순간 진실하면 된다고. 아니, 어떤 면에서 분명 나는 그러했었다. 업소의 여자를 따로 밖에서 만났을 때도, 장기 조건만남을 했을 때도, 나는 진실하려 했고, 때문에 내가 그 여자들을 내 손으로 밀어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수도원에서 내려와 내 자신에 대한 이제까지 무거운 관념적 짐을 내버리게 되자, 그 고삐의 끈이 완전하게 끊어져버리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내가 그전보다 더 섹스에 집착하게 되었다던가, 그래서 더 돈을 많이 쓰게 되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왜인지, 무슨 이유인지, 정확하게 아직 밝혀낼 순 없지만, 내 마지막 고삐였던 순간의 진실함마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느새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내 관념의 고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경험에 의해 입증된 이야기다. 수도원에서 내려와 업소에서 한 여자를 알게 된 나는 그 여자와 밖에서 만나는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밝혔지만,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이번에도 개인적으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었다. 그냥 몇 번 만나다 시들해지겠거니, 뭐 이런 식의 생각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의 농밀한 몸에 완전히 내가 빠져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까지 그녀가 내가 만난 최고의 섹스 파트너였느냐?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냥 단지 너무 외로웠을 뿐이었다. 물론, 섹스라는 게 대다수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너무 외로웠고, 그러한 때에 그녀는 내게 너무나 큰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전까지와 관계가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업소를 그만두겠다며, 크리스마스에 줄 목도리를 평생 처음으로 짜본다고까지 말하는 그녀를 나는 처음부터 아예 믿지를 않았다. 아니, 그냥 처음부터 배반을 생각하며 만났다. 내가 그냥 외로워서 지금 그녀에게 집착하는 거니까, 조금만 좋은 여자가 나타나면 그녀를 배반하게 되리라는, 시작부터 벌써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만난 것이다. 사실, 누군가는 이 대목에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 대수냐고? 대다수의 남자가 그렇지 않느냐고? 모르겠다. 모든 남자를 집단으로 묶어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속속들이 알 수도 없는 나는 최소한 개인적으로 그래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여기에 일정부분 그녀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냥 평범한 직종의 여자도 아니고, 업소에서 만난 여자이고, 사실 이 문제보다 더 큰 것은 나와 만나며 너무나 별난 일들이 많이 일어나, 툭 하면 울고, 짜증을 내고 했으니까. 게다가 빚으로 허덕이고 있는 내게 갑자기 돈을 꿔달라지 않나, 일하고 있는데 혼자서 문자 보내서 헤어지자고 했다가, 미안하다고 했다가. 밖에서 못 만나는 날에는 외로우니까 업소를 와달라고 자꾸 생떼를 부리고. 결국, 애초에 그녀의 몸만 보고서, 배신을 꿈꾸며 그녀를 만났던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여자에게 그만 만나자고 말했다. 도저히 네 성격 받아줄 수가 없다고. 지금 생각해도 이건 잘한 일이다. 그녀로 인해 내가 쓴 돈들과 또 늘어난 빚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한 숨이 나오니까. 하지만 왜 나는 이렇게 변한 것일까? 왜 이제는 누군가를 순수하게 그냥 몸만 좋아하더라도 배신은 꿈꾸지 않는 그런 인간도 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데 정말 내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던 것은 그녀와 헤어진 뒤의 일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다른 여자와 섹스를 잘 못하게 되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면 몇 달간 그런 증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지고서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 심지어 발기가 되어져 한껏 달아올라 여자와 삽입하는 도중에 갑자기 그녀 생각이 나서, 섹스를 그만둘 정도였다. 그것도 돈 주고 간 업소에서. 그러면서 무언가 적을 두지 못하게 된 나는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휴대폰 게임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사실,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게임에 돈을 쓴다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다지 그때까지 컴퓨터 게임도 별로 즐겨 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전 국민이 다 한 번씩은 해봤다는 스타크래프트조차 해본 적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무심코 게임 아이템을 사기 위해 천 원짜리 소액결제를 클릭하면서부터, 다음엔 오천 원, 그다음엔 만 원, 그다음엔 오만 원, 십만 원, 이런 식으로 아무 생각 없이 클릭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게임 내에 최고 레벨에 오르고자 천만 원도 넘게 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한 게임에서 그렇게 다 쓴 것은 아니다. 처음 시작한 게임에서 한 육칠백, 그리고 그다음 게임에서 또 그 정도. 하지만 문제는 그 처음 게임을 지우기 전 나의 상황이 지금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때 나는 후배들에게 빌린 돈들도 여간 적지 않은 때였는데, 게임으로 인해 수백을 써서 카드 값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엔 카드대출을 손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첫 게임을 지울 때 나는 정말 단단히 결심을 했었다. 이미 그 게임에 수백의 돈을 들인 상태였기 때문에 게임 내에서 나의 레벨은 최상위권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다시는 이따위 구멍 난 항아리 물 붓기 식의 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서 게임을 지웠다. 하지만 게임이란 것이 금단현상 같은 것이 존재하는 줄 그때 나는 미처 몰랐다. 허황된 마음을 채울 길 없어, 잠들기 전 각종 애니메이션이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늘 손의 허전함을 느꼈다. 그래서 결국엔 돈 안 드는 게임을 하자는 식으로 다시 자기합리화를 하여, 몇 가지 게임을 해보았다. 그런데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어떤 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만 내 허황된 본성이 또 다시 폭발하고 만 것이다. 아무리 먹어치워도 허기진 내 허황된 기갈의 본성이.


 나는 한 고비, 한 고비, 전락이라고나 말해야 할 오빠의 변모를 볼 때마다, 지금보다는 돼지를 기를 때가, 그보다는 혈서를 품고 다닐 때가, 아니 그보다는 여선생의 비로드 치마에 얼굴을 묻을 때가 더욱 좋았다고 생각하곤 했다.


 755만원이라는 카드빚을 선결해야, 은행대출을 받을 수가 있어서, 그동안 내게 900만원이나 빌려주었던 후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것도 나 때문에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돈을 꿔준 돈을, 안 갚아도 돼요, 형, 이런 말을 덧붙여 말하던, 그런 미더운 후배이다. 그 이전에 나는 그 후배에게 백, 이백, 그다음에 또 이백, 그리고서 마지막엔 사백만원을 차례차례로 빌렸다. 빌려줄 때마다 후배는 괜찮다며, 그까지 마이너스 통장 대출이자 얼마 안 되니까, 신경 쓰지 말라면서 되레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하지만 마지막 빌려줄 때는 후배는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형, 빌려드리기는 하는데요. 저도 이게 쉽게 빌려드는 건 아니에요. 형도 그건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속으로 반드시 마이너스 대출 이자까지 갚아 주리라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또 이렇게 전화를 하게 될 줄 정말 꿈에도 몰랐다. 물론,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 마지막이라고 늘 다짐했고, 늘 그렇게 후배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또 그 마지막을 연발해야만 되는 상황이 올 줄 어떻게 내가 알았겠으며, 아니 상황을 이렇게 악화시킬 줄 알면서도 왜 그랬던 것일까. 하지만 결국 내가 비빌 언덕은 후배들 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미더운 후배이기에 먼저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는 후배도 무리가 따르는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벌써 진 빚이 천만 원이 가까우니, 자신이 개인적으로 융통할 수 있는 돈이 따로 있을리도 만무했고,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나를 꿔줘야 하는데, 내가 봐도 밑 빠진 물 붓기 식인 나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그럼에도 후배는 내게 너무 미안해했다. 그리고 다른 후배들에게 연락을 종용하면서, 내게 희망을 잃지 말라며, 나라도 지리멸렬한 삶 속에서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소박한 바람을 전해왔다. 그런데 그 게 참 아이러니한 이야기였다. 대학시절 가장 그 지리멸렬한 삶의 불안정성과 권태로움에 대해 토로하며 신과 삶에 대한 회의를 이야기했던 후배가 나에게 이제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그 사실이. 그때 나는 그 후배와 밤새워 가며, 그래도 우리가 마지막 시구에 남겨둘 희망의 가지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어떤 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그저 수풀 위에 툭 떨어져, 어느 이름 모를 새가 진짜 가지인 줄 알고 모르고 앉아도, 그런 것이 희망이며 신비이지 않겠냐며, 열렬히 말했던 그 사실이. 그러던 내가 이제는 쉽사리 어떤 희망의 단어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그 현실이.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아니, 왜 이렇게 떠밀려오게 되어버린 것일까? 그 어디서부터 그 언젠가부터 왜......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는 차라리 수산업에 손을 대어 한때 재미를 보았으나 왕창 망해버렸다는 호기와 허언으로 어느 날 불쑥 내 앞에 나타날 오빠와 맞닥뜨릴 것을 나는 바라는 것이 아닐까.


 후배와 통화를 하며, 문자를 주고받은 그날, 다행히도 다른 후배 둘이 나에게 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아주 우연하게 나는 그날 알라딘 서재에서 오정희 작품인 ‘중국인 거리’에 대해 썼던 품평이 이 달의 작품으로 뽑혀, 이만 원이란 상금이 내게 주어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예전에 어느 문학 사이트에서 이 달의 작품으로 자주 뽑힌 적은 있었지만, 내 글로 상금을 받은 적은 아마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 때문이었을까? 수천의 빚에 시달리고 있던 내가 호기롭게도 후배들에게 그날 그 사실을 떠벌리며, 비록 지금 빚에 쪼들리고 있더라도 지금 받은 상금 이만 원에 그 모든 빚 문제가 해결된 기분이라며, 또 다시 허황된 망발을 했던 것은. 하지만 나의 그 망발에도 불구하고 그날 나와 통화했던 후배와 다른 후배들은 함께 기뻐해주며, 그 이전 밤새워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시절 그 이야기에 대해 내가 글로 남겨주기를 순진하게도 그들은 내게 여전히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나이 41살에 고작 2만원이란 상금을 글로 타본 내게. 그러면서 우리는 실제로 마주할 날을 기약했다. 예전처럼 밤새워 무언가를 소진하듯 이야기를 나누며, 고민할 수 있는 그런 한 밤을.


 혼자 고무줄을 넘으며 쨍쨍히 노래를 부르던 계집애가 제풀에 흥이 식어 판자문 앞에 팔짝 주저앉자 사내아이는 이미 움직임을 멈춘 풍뎅이를 손바닥 위에 얹어 계집애의 눈앞에 들이대며 딱딱한 갑각 속에 감추인 연기빛 날개를 들춰보였다.

 이걸 땅속에 묻고 일곱 밤이 지나면 예쁜 나비가 될 거야.

 계집애는 심드렁한 낯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매번 사내아이의 말에 따라 죽은 풍뎅이, 잠자리 따위를 헝겊에 싸서 묻었건만 일곱 밤의 금기 후에도 나비는 날아오르지 않고 축축한 땅속에서 냄새 나는 진물과 곰팡이로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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