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쫓는 아이 - 쉽고 재밌는 소설에 대한 개인적 바람을 연에 실어 보내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내게 있어 가장 큰 질문 중 하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가?’이다.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위험한 불안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 자체가 너무 관념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생겨먹은 자체가 관념적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벌써 앞의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그렇다면 관념적이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 머릿속에 물음표를 자아내고 있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니, 1>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관한 견해나 생각, 2> 현실과 거리가 있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생각, 3> [불교]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혀 부처의 진리를 관찰하고 생각함, 이렇게 정의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정의가 나와 너무나도 관련 있는 사항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2>의 정의가 눈에 들어왔다. 현실과 거리가 있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생각, 생각, 생각, 수많은 생각의 꼬리들.......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떨리는 감정으로 주체하지 못해도 부족한데, 글을 쓰기도 전에 항상 미리 글을 왜 쓰는지 물으며, 주저하는 내 모든 감정과 생각의 연결고리들....... 그런데 그 연결고리들은 어찌하여 인과관계마저 제대로 성립되지 않는지, 결국엔 뫼비우스의 띠처럼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처럼 돌고 돌아, 언제나 하나의 절망이란 이름으로 내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이토록 절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대체 왜 나는 그토록 글을 쓰고 싶어 했으며, 여전히 글을 쓰고 싶다고 스스로 다짐하듯 되뇌고 있는 것일까?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해왔다. 아마 그 글에 대한 첫 느낌의 아름다움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당연하게 생텍쥐페리의 첫 작품인 ‘야간비행’을 읽어보았다. 그런데 당최 ‘어린왕자’와 연관이 되질 않는 작품이었다. 엄청나게 지루한데다, 내용도 뭘 위해 썼는지도 모르겠고, 관념적이라고 하기에는 관념이 너무 설익었고, 그냥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낭만을 이야기한 거 같긴 한데, 그냥 재미없을 뿐인, 정말 그렇고 그런 작품이었다. 처음엔 그냥 그의 첫 작품이니까, 그랬을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시작이 지날수록 깨달아지는 한 가지는 무섭게도 그의 설익은 작품이었던 ‘야간비행’과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어린왕자’가 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야간비행’에 대한 내 기억은 너무나 흐릿하다. 그럴만한 강한 인상이 없는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린왕자’가 비록 아주 세련되게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해 읊고 있지만, 실은 어느 별에서 혼자 사는 지독히 외로운 한 ‘어린왕자’란 이름의 소년이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우주여행을 떠나는 모양새이고, ‘야간비행사’도 지독히도 외로운 자신만의 비행을 통해 자아를 발견해 가는 그런 과정이란 점에서 닮은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린왕자’의 내용이 어느 부분이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점점 의구심이 들었다. 말들이 예쁘고, 좋은 비유로 가득하다할 뿐이지, 기실 너무나 현실적이지 못한 관념적인 이야기 그 자체 아니란 말인가? 그 때문인지, 혹은 내가 신이란 관념에 한때 너무나 크게 휘둘려서 인지, 이십대부터 지금까지 내가 읽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헤르만 헤세,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카프카, 미시마 유키오 등등, 대부분 관념 그 자체를 다루는 소설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시나브로 우리나라의 소설들을 읽지 않기 시작했다. 육이오 동란과 해방이후의 이야기들, 그리고 민주화 과정 속에 숱한 애환 섞인 이야기들이 그저 뻔하기 그지없는 상투적인 이야기들로 자연스럽게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설이란 것이 마치 무언가 대단한 의미와 관념들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처럼, 그렇게 믿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연을 쫓는 아이’에서 화자가 이야기하듯이 상투적이라는 말이 왜 나쁘단 말인가? 쉽고 재밌게 쓴 소설이 왜 소설로써 가치가 없단 말인가?

 

  평소 내 습관대로 역시 서두가 반 이상을 차지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최근 내가 당면했던 ‘쉽고 재밌는 소설’에 대한 화두가 이 소설 속에 존재했고, 너무나 오랜만에 읽어본 관념적이지 않은 장편소설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너무 쉽고 재밌게 쓰인 좋은 글을 마주할 수 있었던 기회를 가진 셈이었다. 마치 천일야화를 보듯, 혹은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떠올리듯, 그리고 언젠가 보았던 아랍영화들을 내내 마주하듯, 이 소설은 아랍이란 이국적인 풍경으로 살아서 꿈틀거리며, 소설을 읽는 내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쓰면 되잖아. 그리고 우리 이야기들도 사실 크게 다르진 않잖아. 비록 너무나 좋아진, 그래서 너무나 각박하고 바빠진 세상이지만, 그래도 우리들도 우리들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이야기들을 통해 이런 이야기들을 수없이 들어왔잖아. 자, 그럼 써봐! 이렇게! 그리고 네 얘기도 얼마든지 이색적이고 재밌는 모험과 이야기들로 가득하잖아! 주저하지 마! 용기를 가져!’ 하지만 정말 이렇게 쓸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나는 그러기엔 너무나 관념적인 내 자신을 부인할 길이 없다. 일 년 동안 혼자 여행을 떠나고, 수도원에서 살고, 배를 타고, 목장에서 살아보고, 공장에서 살면서 일한, 그 모든 이색적인 풍경들과 경험들이 애초에 신이라는 관념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고, 여전히 그 무한대의 가까운 관념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 입장에서, 이렇게 쉽고 재밌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해야 할까? 결코, 포기할 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은 관념도 철학도 아닌, 이야기 그 자체를 다루는 혹은 이야기 그 자체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가만히 눈을 감고 다시 떠올려본다. 비록 주인과 하인의 관계였지만 카불에서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며 연을 날리던 아미르와 하산, 그런 아미르를 위해 아세프에게 맞으며 강간까지 당하던 하산과 그 장면을 몰래 멀리서 훔쳐보던 아미르의 배신....... 그리고 길고 긴 역사와 민족 종교란 인과의 과정을 통해 밝혀진 아미르와 하산의 이복형제란 진실, 그럼에도 영원히 화해할 길을 잃어버리게 된 하산의 죽음이란 절망적 현실과 동시에 평생 동안 자신을 옥죈 배신이란 굴레로부터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존재인 하산의 남겨진 아들 소랍....... 그 소랍을 위해 모든 명예와 부가 보장된 미국을 떠나 전쟁 이후 죽음과 참혹한 현실만 거리에 가득한 카불로 향하는 아미르........ 그곳에서 무슨 기구한 운명처럼 다시 마주한 아세프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며 목숨을 위협받는 아미르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세프에게 새총을 쏘아 아미르를 결정적인 위기에서 구출해준 소랍....... 그럼에도 자신이 다시 아미르에게 버려지리라 믿고 자살을 시도해버린 소랍....... 그 이후 되살아났음에도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소랍의 길고 긴 블랙홀과도 같은 침묵........ 마지막으로 자신의 양자로 데려온 소랍과 미국에서 연을 날리며 작지만 서서히 진행될 소통을 꿈꾸는 아미르의 바람........ 그 바람에 나의 이야기들을 나의 꿈들을 실어 연을 날려본다. 쉽고 재밌는 그렇지만 지상에 쉬 안착하지 못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상한 모양새의 연을, 하늘에 높게 띄워본다. 바람에 훨훨 날아가기를, 그리고 언젠가 아무도 모를 어느 귀퉁이에 추락해 누군가에게 몰래 주워지기를, 그렇게 연으로써의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사라져주기를, 가만히 눈을 감고 바라본다. 언젠가, 그 언젠가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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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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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 살인 사건, 비상구 - 김영하의 섹시한 글쓰기에 관하여

 

 

 

  김영하의 작품은 자극적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글은 언제나 섹시한 맛이 있다. 아마 그의 첫 작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부터 나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간혹 그의 글을 볼 때마다 나의 오감은 항상 비슷하게 반응한다. 마치 하룻밤의 달콤한 정사를 꿈꾸면서 극대화된 쾌감의 짜릿함을 느끼는 기분과도 같이 제 혼자 달떠 올라서, 글을 다 읽고서는 항상 사람이 간혹 지나다니지만 잘 보이지 않는 폐허에서 몰래 자위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미묘한 감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대한 내 시선이 양가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먼저, 이번에 읽은 그의 여러 단편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었던 ‘사진관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여기서 내가 크게 주목한 키워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많은 살인과 치정이라는 상황,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결론은 결코 드라마틱하지 않으며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사실. 비단, 이 글속 화자의 직업 자체가 형사이기 때문이 아니라도, 그의 글속엔 언제나 살인과 치정이 넘쳐난다. 하지만 ‘사진관 살인 사건’에서와 같이 결론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살인과 치정이야기니까, 당연히 치정을 통한 살인이야기로 종국을 내야할 것 같지만, 살인자는 전혀 뜻밖에 곳에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굳이 무슨 까닭으로 살인이야기에 치정극을 섞어서 글을 쓴 것일까? 이 글 속에선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김영하는 그 여인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특이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조형사야 신참이니까 알 수 없을 테지만 내 코엔 그 냄새가 난다. 그것은 청결한 화장실과 비슷하다.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한 바닥, 미미한 방향제 내음, 개방된 은밀함, 금세 씻겨나간 더러움 같은 것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살인과 치정이야기인 까닭에 여자의 인상에 대한 이 묘사는 소설에서 하나의 풍미적인 작용으로 끝나야겠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이 글의 전체적인 방향과 분위기로 자리매김해버린다. 즉, 소재와 주제와 별도로 풍미가 주체가 되는 소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청결한 화장실 같은 느낌이라니? 또 금세 씻겨나간 더러움 같은 것들이라니? 이 얼마나 자극적이고 섹시한 단어선택이란 말인가? 물론, 이러한 묘사에 묘한 상상을 덧댄 내 개인적 기호와 취향이 소설의 해석 자체를 오도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괜한 장치적 기능으로 작용하는 소설의 풍미에 발정한 개새끼처럼 혀를 내밀고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껄떡거리는 우를 현재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내 개인적으로 가장 그다운 소설이라고 느낀 소설이 이 소설인 것을, 그래서 그 풍미가 이 소설의 전부라고 말할 수밖에 달리 더 좋은 표현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대체······.

 

  두 번째로 내가 유심히 본 소설은 ‘비상구’였다. 이 역시 ‘사진관 살인 사건’과 비슷하게 여자의 질을 비상구로 표현해내는 풍미 그 자체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그걸 빼고서 이 글을 이야기하자면, 그냥 90년대식 쌈마이들의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 뭐 이 정도쯤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물론, 굳이 이 이야기의 ‘비상구’를 각박한 현실에서의 탈출구라는 풍유라고 누군가 이야기한다면, 나는 대충 수긍할 것이다. 문학적으로 굳이 그렇게 해석을 해야 한다면 그건 분명히 온당한 해석이긴 할 터이니까. 하지만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이 작품집 내에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와 ‘고압선’ 등이 훨씬 풍유적인 글이기에, 내 개인적으로 김영하의 문학적 풍유와 비유에 관해 말하고자한다면 그 두 작품들을 뽑을 것이다. 그에 비해 ‘비상구’는 문학적 풍유를 들먹이기엔 그 끈이 너무 엷다. 아니, 사실 내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자가 의도적으로, 아니 거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여자라는 그것도 여자의 가장 은밀한 부위에 한정하여 그 특유의 판타지를 써내려갔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이 글은 ‘사진관 살인 사건’ 보다 풍미 그 자체를 위해서 쓴 글일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일까? 조금 섹시한 맛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여기엔 청결한 화장실이라든가, 갓 씻겨나간 더러움 같은 비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너무 대놓고서 표현하는 ‘비상구’라는 직유법적인 비유가 내 취향이 아닌 탓인 듯싶다. 하지만 재미와 가독성의 측면에서 이 글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제까지 내 개인적으로 몰랐던 김영하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의 섹시함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때론 너무나 하룻밤의 달콤한 정사만을 꿈꾸어 그 여운이 길지 못하다는 사실. 그래서 그의 발칙한 상상력과 사변들이 순간의 즐거움을 주긴 하였지만, 그때 그 순간뿐이었는지 나는 이제껏 김영하를 따로 파고자 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자전소설이라고 해서 이번에 읽게 된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경우는, 만약 문자 그대로 자전소설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보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지금까지 읽은 김영하와는 완전히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그 글속에서 그는 글에 영혼을 판 대가로 아마 그림자가 없는 자신을 설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림자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는지, 자신의 그림자를 만들어줄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다. 단순히 하룻밤에 달콤한 정사를 함께 나눌 여자가 아니라, 같이 밥을 먹고, 자신의 글을 읽어주고, 그렇게 같이 생활인으로써 함께 살 수 있는 여자에 대한 그리움······. 하지만 아쉽게도 또 아이러니한 것은 그 글이 그에겐 나름 의미 있는 자전적 소설일지는 몰라도, 그의 소설 특유의 풍미인 자극적 섹시한 맛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같이 김영하는 언제까지나 젊고 파릇한 감성으로 섹시한 글을 써내려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럴 수 있을까? 만약 섹시함이 불변한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란 작품집이 오래된 작품집이었기 때문에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감성이 아쉽게도 조금은 올드하다는 사실이었다. 삐삐와 채팅 이야기, 오래된 영화와 오래된 음악 이야기, 그 주된 감성의 뿌리는 거의 90년대 감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나와 같은 90년대 학번에겐 감성팔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 그게 통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도 이제 슬슬 하룻밤의 달콤한 정사에서 조금 더 오래 기억될 정사들로 이야기를 바꾸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조금 더 깊은 풍미의 섹시함을, 그래서 오래도록 우리 뇌리에 각인될 그런 섹시함을 추구해보는 것도 하나의 그다운 글을 추구하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물론, 그가 ‘피뢰침’에서 묘사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강렬한 기억이란 아주 짧고 순간적이기에, 그래서 전격을 맞은 듯한 느낌이기에, 그 뒤에 남는 것은 일종의 요의 현상뿐일지는 몰라도, 단지 그런 것들이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일지는 몰라도, 섹시함이라는 것에도 일종의 농도가 있다고, 그래서 그 뒷맛도 다양할 거라고 상상해보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거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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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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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꽃잎2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 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 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 같고

먼저 떨어져 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 같고



 내게 있어서 김수영이란 시인의 소리는 이제까지 이 시를 낭송하던 대학 동아리의 존경하던 선배의 목소리로 각인되어져 있다. 낙시촌, 즐거울 낙(樂), 시 시(詩), 마을 촌(村)이란 글자 그대로, 시를 즐기는 마을을 꿈꾸며 화요일 밤마다 조그만 대학 동아리 방에서 시를 낭송하던 날들, 그날들의 한가운데에 선배가 그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의 떨어지는 속도와 무게로 느릿하게 그렇지만 묵직하게, 임종의 생명 같고, 혁명 같고, 바위 같은 꽃잎을 낭송하던 순간, 어쩌면 나는 그때까지 모든 시가 꿈꾸는 침묵을 터뜨리는 지점을 발견했을지도,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랬기 때문일까? 몇 년 전 예기치 않던 죽음의 순간을 넘기고서, 다시 일상의 궤도로 돌아와 산책을 하던 날들, 나는 모르게 가만히 이 시를 읊조리면서 떠올리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도 임종의 생명 같은 꽃잎의 자태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나의 죽음이 그렇게 나의 삶이 조용하지만 무거운 혁명 같고, 바위 같기를 모르게 꿈꾸었을지도, 아마도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폭포, 풀과 함께 이 시의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는 아마도 시인 김수영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일 것이다. 내게 있어서도 이 시 각 행의 구절, 구절마다 머리의 총성을 울리는 강렬한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 시에서 주는 ‘눈’의 이미지가 아무리 부인하고, 부정을 하려해도, 순결과 순백을 의미하는 ‘눈’의 고유의 이미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심지어 이 시에서의 ‘눈’은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는 ‘눈’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 위로와 위안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평화란 이미지의 ‘눈’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그 평화가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위장된 평화임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김수영 시인 자체가 지닌 저항의식과 ‘눈’이란 이미지가 가진 이중성을 떠올려볼 때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눈’은 그 순결함이란 유일무이한 무기로 모든 세상의 잿빛과 총 천연의 가을빛깔마저도 앗아갈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 강원도에서 어떤 경험을 통해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기도 하다. 1미터가 넘게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을 정화한 듯한 느낌, 동시에 그렇게 온 세상을 매장시켜버린 듯한 느낌, 그 무어래도 좋다. ‘눈’은 때론 그렇게 잔인하다. 하지만 이 시 자체 내에서 그러한 ‘눈’의 거짓과 위장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이것은 시인 김수영이란 저항의 이미지 속에서 꺼내온 ‘눈’에 대한 구차한 이미지이며, 해석일 따름이다. 실은 이 시 속에서, 내 개인적으로는 ‘눈’이란 이미지가 더욱 ‘위장’과 ‘잔혹함’과 반대되는 이미지를 구현해내고 있다고 믿는다. 즉, 여기서 ‘눈’은 가장 완벽한 순백이며, 순결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젊은 시인들에게, 어쩌면 시인 그 자신에게, 그러할지라도 마음 놓고 기침을 하고,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뱉어내라고. 왜냐하면 시는 시 자체가 완성이라고 믿는 순간, 더 이상 시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시의 천성이며, 본능이다. 시는 늘 자기 자신의 배반을 꿈꾼다. 그리고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침을 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모든 반동에 대한 반동이며, 배신에 대한 배신이, 시이며 어쩌면 시인 김수영이 그토록 꿈꾸었던 혁명이 아니었을까?



거대한 뿌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디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이번에 김수영 전집 산문과 시를 전체적으로 읽으면서, 다시 바라보게 된 시이다. 아마도 이 시를 다시금 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김수영의 산문집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엔 이 시에서 등장하는 김병욱이란 월북시인과 그가 존경하던 김이석이란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아마도 1연은 김병욱 시인에 대한 그의 존경과 콤플렉스가 담긴 시구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2연은 지레짐작이기는 하지만, 월남 소설가인 김이석이 마지막으로 한국일보에 개재하고자 했던 대원군이란 소설의 사료로써 비숍 여사의 이야기를 김수영 시인이 담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3연부터는 자신의 존경과 콤플렉스의 대상이었던 김병욱이란 시인, 그리고 김이석이란 소설가, 어떤 의미에서 대극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남과 북을 초월하여, 김수영 시인 그 자신의 근원적인 그리움, 향수로 한 발자국 나아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그의 산문집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에서도 스스로 밝히듯이 요강, 망건, 장죽 등은 사라져가는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라져간다는 그 말속에서 김수영 시인은 그 말들이 자신의 향수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왜 시인은 이 시 속에서 그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들을, 그 향수들을 반동으로 표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거대한 뿌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 거대한 뿌리가 그가 4연에서 강하게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로 총성을 쏘는 듯한 씹과 개좇, 그리고 좇대강의 이미지와 너무나 흡사하게도 겹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냥 쉽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서 그냥 좇과 뿌리의 이미지를 다르게 생각하면 끝나는 문제일까?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반동도 아니고, 좇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김수영의 시는 어떤 의미에서든 반동이어야 하고, 좇이어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사용했던 개좇과 씹, 그리고 좇대강은 무섭도록 거대한 뿌리와 닮아 있는 하나의 형상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각기 다르게 시커먼 가지를 가진, 그렇지만 하나로 이어지는, 시인도 모르는, 나도 모르는, 그 거대한 뿌리란 것은......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여


결의하는 비

변혁하는 비……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이 시는 이번 기회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김수영의 시이다. 사실, 이 시를 통해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게 그동안 선배의 목소리로 깊게 각인된 김수영 시인의 <꽃잎1>의 이미지를 지우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물론,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이유일 뿐이지만, 내게 있어서 그 선배는 김수영이란 이미지와 더불어 ‘시가 그리스도를 죽였다.’란 강한 경구와 함께 각인되어진 선배이다. 사실상, 고등학교 적부터 일기 대신 시의 형식을 빌려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시를 써왔다고 자부해온 나이지만, 정작 그 모든 시들은 거의 한낱 감정의 부스러기이거나 나부랭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선배를 통해 처음으로 나는 시라는 것이 자신의 똬리에 갇힌 채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듯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한 언어의 최상위 도구이며, 동시에 그러한 이유로 침묵의 발산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했기에 내게 있어서 그 선배는 시인 그 자체였다. 그 선배의 시가 좋았느냐, 좋지 않았느냐 그 문제는 둘째였다. 지금 내가 김수영의 시가 서정주나 김춘수의 시보다 덜 정갈하다고 느끼듯이, 시와 시인의 문제는 내게 있어서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별개의 문제이다. 즉, 김수영이란 시인이, 그리고 내게 있어 선배란 존재가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시 자체라기보다는 시인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시인 자체가 일관되게 추구해오고, 줄기차게 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온 소리! 이것은 어떤 영감으로 급작스럽게 얻어진 하나의 시를 넘어선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선배의 갑작스런 절필은 내게 하나의 큰 사건이었고, 충격이었다. 동시에 그 이유로 김수영은 내게 있어서 언제나 정이 아닌 반으로써 자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선배의 절필을, 의미를 확장하여 선배의 배신을, 나는 쉬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이삼십 대의 대부분을 나는 선배의 그림자들을, 물론 이것은 글이기에 지나치게 과장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그런 시들을 내 안에 반으로써 정립하였고, 그렇게 부정하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으로 정립했던 김수영의 시를 다시금 보게 된 지금, 나는 이 시들이 내게 있어서 반이 아닌 오히려 정이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아직도 비는 움직이면서 내리고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가 흐릿하게 보이고 있으며,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그래도 여전히 비는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임을 제하는 결의로써 끊임없이 여기저기 물방울을 튕겨내며, 그렇게 춤을 추면서...... 그리고 침묵하는 소리로 침묵을 터뜨리는 배신을 여전히 꿈꾸면서...... 비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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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능성의 거리 문예중앙시선 6
박정대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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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능성의 거리 - 감정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내 감정 공산주의에 대해

 

 

 

 인은 이미지 자체가 한 편의 시다. 나는 솔직히 파르동, 박정대의 (미한지만, 박정대) 시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의 시를 읽는 동안 내내 그가 분명한 시인이며, 집시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시가 마치 격렬한 쿠바 음악 같고, 때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의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의 음악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알고 있다. 시가 본질적으로 현재형이며, 앞으로도 내내 우리의 피에 흐르고 있는 미래지향적 음률이라는 측면에서. 그렇지만 지금 내가 그의 시를 빌어 쓸 이야기는 그의 시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에 대한 무한한 내 동경이거나, 동시에 그로부터 비롯된 깊은 좌절감일 터이다. 파르동, 여전히 시를 꿈꾸기만 시인이 되지 못한 이여.

 

 

  감정이 확장되어 감정의 무한에 당도할 때도 감정 공

산주의는 태동하지 않는다, 해상의 수평선과 지상의 지

평선에 당도했을 때 나의 생각이 그러했다

 

 

  어느 꿈결에 시가 물결처럼 내게 밀려들었을까? 고등학교 적 일기를 시의 형식으로 빌려 쓰기 시작한 그때부터? 아니면 혼자 룰루 여행을 떠나, 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부르고, 길에서 잠들고 싶으면 잠들었던 그때? 그 어느 때 나의 감정이 무한에 당도하여, 해상의 수평선과 지상의 지평선에 당도해 보았을까? 공간을 한정 없이 떠돌았을 때 나는 홍길동이 되어, 축지법을 쓰고 있다,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공간이동 속에서 오히려 내가 느낀 것은 중력의 축복이었다. 결국 어딘가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그곳에서 감정은 무한하게 피어오른다. 무거운 중력으로 애련히 끓어오르는 감정의 확산, 세상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 대한 애도의 일기, 나의 생각이 그러했다.

 

 

  나는 자생적 감정 공산주의자

 

 

  감정의 무한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는 것은 나의 본

질적 욕망일 뿐 소립자의 세계사 그 어느 페이지에도 감

정 공산주의는 기록된 바 없다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중력이 축복이라 말한들, 누군가의 표현으로 확장하여 중력이 은총이 된다고 한들, 세상 그 누구 하나 나와 공감해줄 이 없다는 그 사실을. 오래된 일기장 같은 곳에 볼펜을 휘휘 휘갈기며, 누군가를 위한 시를 쓴들,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기 위한 고결한 시를 써본다 한들, 그 누구도 나의 휘휘 휘갈겨 날려 쓴, 그래서 휘휘 날아 가버린 글씨를 알아볼 길이 없으며, 그 어느 누구의 배고픔도 결코 중력이 축복이 될 수 없으며, 중력이 내린 고통일 뿐이라는 그 사실을. 그렇게 나의 시는 의미 없이 사라져버릴 나의 욕망일 뿐이라는 그 사실을.

 

 

  담배를 피워 물고 저녁마다 감정의 확산을 꿈꾸는 나

는 자생적 감정 빨치산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마다 온 세계를 나의 감정으로

물들이려는 나는 극렬 감정분자

 

 

  그래도 갖은 욕망으로 쉬 잠들지 못하는 밤들, 피어오르는 것이 욕망인지 감정인지 구분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밤들, 나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그대라는 타자인 대상에 나의 욕망을 투사하여, 나의 생명이 되지 못한 정액들로, 때론 쓸데없이 붉게 미처 날뛰는 나의 심장의 피로 그대라는 온 세계를 물들일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그렇게 단 한 밤, 단 한 밤, 그대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모든 날들이 그대의 날이 되어, 타자인 그대에게 투사된 내 모든 욕망들이 완벽히 소멸해버릴 수 있기를, 얼마나 꿈꿨는지. 불꽃처럼 피어올라 덧없이 사라지는 담배연기처럼, 그렇게 얼마나 나와 그대의 간격의 생멸을 꿈꿨는지.

 

 

  확장된 감정이 끝내 무한의 감정에 당도했을 때에도

나의 감정 공산주의가 한 일은 별을 향해 센티멘털 로켓

을 발사한 것

 

 

  그러니 언젠가 그 로켓이 또 다른 별에서 감정의 동무

들을 데리고 지구로 귀환하리라는 것을 안다

 

 

  꿈을 꿈꾸며, 존재하지 않는 그대를, 나의 누이를, 꿈꾸던 그 밤, 그 밤 내 꿈속에 홀연히 나타난 그대는 내가 밤새 뿌리쳐 내지 못해 뿌리내린 그대라는 환영, 잔상, 사념들, 그 모든 허튼 망상에 나는 ‘몽원’이란 이름을 붙여, 꿈속에서만의 바람이거나, 꿈속에서도의 바람이라고, 혹은 꿈의 근원이라고, 여전히 꿈동산에 머물러 그대에게 무한의 텔레파시를 보낸다. 그대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까? 그때 내가 부끄럽게 건넸던 그 편지를, 수줍게 띄웠던 엷은 미소를, 도망치듯 흘렸던 말들을, 시간이 지나도, 한 세월이 지나 꿈을 깨어도, 여전히 그대는 늙지 않고 그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는 그 사실을, 그대는 알고 있을까? 영원히 고착해버린 내 감정의 센티멘털을.

 

 

  본질적 고독이 세계를 물들이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파르동, 먼저 이렇게 인사를 할 수밖에, 그대여! 한 낮의 꿈을 꾸고서 깨어나 보니, 한 세월이 지나고도 또 한 세월, 더 이상 그 어느 누구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세월의 시대, 이제 그대를 향한 내 모든 시에, 나의 열정에, 그렇게 꼿꼿했던 내 고개에, 내 허리에 만성 통증이 생기고, 더 이상 잘라지지 않는 흰 수염이 자라나, 이제 그대는 나의 애도의 대상, 하지만 누군가의 말을 빌어 말할게요. <내가 뭘 잘못 했길래?> 그리고 이 말도 빌어 말할게요. <뭐 그래도 안녕> 더 이상 날 찾지 말아요. 어차피 난 혼자인 걸요. 그래도 혼자인 날 위해, 그대를 위해,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미루어두었던 시 하나는 여기에 남기고 싶어요.

 

 

  만약에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매일 동네 어귀에 트럭 한 대 대놓고서

  20년 동안 한결같이 회를 팔아온 아저씨의

  파닥파닥 물차 오르는 생선 대가리에

  탕탕 칼을 쏘고 쓱싹쓱싹 배 가르는 소리를

  시에 담아

  다리에 실금이 가 입원한 어느 어머님의

  못난 아들을 위해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병원에서 몰래 나와

  둔탁둔탁 걸어오는 석고붕대의 저린 발자국 소리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인 그대와 나의

  엷디 엷은 층층 사이 사이에 긴 다리를 놓아

  그대와 나의 체온 사이로 영혼의 습도를 녹여서

  겨울에 성에 낀 버스 창가에 그대 입김으로

  한여름 하염없이 창밖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 숨을 내쉬는 어느 아픈 소년의 숨결을 섞어

  시를 적어 놓을 수 있을 텐데

  만약에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그렇게 세상의 모든 고통의 멍에와 슬픔의 결들 사이에서

  한 마리 날아오르는 새가 되어 꿈이 되어

  차창 밖 갇혀버린 풍경들 속에 풍경화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잃어버린 표정들을 환하게 비추어

  되살려 놓을 수 있을 텐데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P.S.

 

 

  굵은 글씨는 시인 박정대의 시집 ‘모든 가능성의 거리’와 ‘체 게바라 만세’에서 인용한 글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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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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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중심으로 글의 스타일에 관해

 

 

  모임을 통해 처음으로 나는 이번에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접하게 되었다. 사실 오랫동안 문학을 등진 채 (특히, 한국문학을) 살아온 내가 뭔들 읽어봤을까, 스스로 한심스럽기 그지없지만, 여하튼 이번 계기를 통해 그동안 평소 귀에 익었으면서도 굳이 찾아보지 않았던 내 또래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요즘의 문학적인 유행을 나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비평은 개인적 소감을 중심으로 하되, 각 글의 스타일적인 면을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각각 짚어보고, 기호의 여부를 떠나, 개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고 싶다.

 

 

  먼저, 순차적으로 책을 읽기도 해서 그랬지만, 글을 다 읽고 나서도 단연 눈에 띄었던 작품은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였다. 하지만 이 표현은 다소 양가적인 측면이 있기에, 아마 내 비평도 내가 개인적으로 다소 싫어하는 양비론적 비평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사실, 읽기 전 작가 소개부터 눈에 띄었다. 후장사실주의자? 이름부터 조금 거시기한데, 그걸 왜 굳이 작가 소개에 썼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저 후기 사실주의자의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로 넘겼다. 그런데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무언가 분명한 의도성이 다분히 느껴졌다. 일단, 글 자체가 거의 쉽게 읽히지 않는 글이었다. 물론,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숱하게 열거되고, 나열되는 건축가의 이름들과 건축기법 그리고 미술기법에 대해 공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문제는 ‘숱하게 열거되고, 나열되었다.’는 그 방식 자체에 있었다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보통 소설은 가령 그것이 과할지라도 자신이 쏟아낸 지식의 열정을 어떻게든 주워 담아, 수습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아마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책을 통해서 평범한 우리들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지식의 해저 속으로 빠져들어, 다시는 떠오를 수 없거나, 아예 미리 발을 대보고 발밑을 헤아리기 어려워 다가가길 포기해버린다. 그것은 그의 지적인 열거방식이 단순히 열거에서 끝나지 않고, 그 격하게 뿜어낸 지적인 배경들을 그의 글속에서 그가 어떻게든 수습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처음 그 광대한 넓이에 혹해 다가서보려 하지만, 그 깊이에 질색해 슬며시 발을 빼게 된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렇기 때문에 에코의 세계는 중세라는 철저하게 마술적이고, 종교적인 시대로 국한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은 분명히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 이미 중세라는 시대를 ‘암흑’으로 규정짓는 것을 넘어서, 현대가 현대후기를 말하고 있는 시대이다. 왜 모던을 살고 있는 우리가 모더니즘이 아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왜 예술이 예술을 부정하고, 그 부정한 예술을 다시 부정하는 이런 시대에서 우리가 말하는 예술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런 시대에서 문학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이러한 질문이 배경이 된 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이구라는 포스트 모더니스트가 되지 못한, 마지막 모더니스트를 통해 ‘벙커’ 속에 들어간 우리의 자화상을 풍자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김중업과 고든이란 인물을 통해 도시개발로 대변되는 모던주의 건축을 비판하고(김중업), 자르고, 대항하려(고든) 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여기에 박정희 시대의 김현옥이란 인물을 통해 서울의 공간과 이구의 제자 김원을 통해 뉴욕이란 공간의 비교를 통해 또 하나의 극명한 대척점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정말 ‘모르겠다.’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결국 전적으로 이 글이 취한 구성방식 때문이다. 겨우겨우 이 글을 다 읽고서 나는 처음에 작가가 일종의 ‘콜라주 기법’을 소설 속에 적용하고 싶었나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내 눈에 거슬렸던 ‘후장사실주의’란 용어가 번뜩 떠올랐다. 그래서 이제껏 거의 잘 보지 않았던 작가 후기와 작가 인터뷰까지 찾아보면서, ‘후장사실주의’가 뭔지 알아봐야만 했다. 그렇지만 허세 가득한 (개인적인 느낌에 정말로 자뻑과 후까시로 일관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후장사실주의’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영어버전의 위키백과를 뒤적거리며, 대충 파악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요지는 ‘후장사실주의’가 일종의 ‘Neo-Dadaism'이란 결론이었다. 뭐, 사실 남미에서 초현실주의에 반대해서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동아시아로 넘어와 후장사실주의가 됐다느니, 하는 정의가 있긴 했지만, 별로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물론, ‘새로운 다다이즘’에 대해서도 내가 제대로 이해하는 바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 맥락을 따라 나온 백남준의 작품들과 비틀즈의 존 레논의 아내였던 요코의 전위예술에 대한 어설픈 기억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도 20대 때 이후로 거의 소실해버린 기억의 편린일 터이다. 하지만 결국엔 그 모든 예술적 행위들이 상업적으로 변질해가는 예술에 대해 반대하는 일환의 운동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하기에 수백 대의 TV를 (이 게 더 상업적이라 개인적 생각도 있지만)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TV에 갇혀버린 현대인을 풍자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았을 때,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분명히 새로운 시도였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예술이 반예술을 추구하면서 대중들에게 고립되어가고, 오히려 일부 향유층을 위한 예술로 전락해버린 것처럼, 문학이 반문학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달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글의 소재는 이구라는 설정 상 한국인도 이방인도 아닌 대상을 씀으로써, 무언가 아시아적 정서를 배양하려했음은 분명하지만, 그 놀음방식 자체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외면한 서구적인 예술론에서 출발해서 끝났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과정이라면, (작가가 충분히 젊기에) 그래서 작가가 조금 더 아시아적인 한국적인 정서 하에서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나갈 수 있다면, 우리도 세계에 우리만의 문학형식이란 걸 하나쯤 내놓을 수 있겠다는 기대도 품어보게 된다. 마치 일본의 오에겐자부로처럼, 서구의 기독교 사상을 철저히 일본의 신화로 재해석한 그의 방식처럼. 혹은 미시마 유키오의 아시아적인 미적 의식처럼. 하지만 저자가 계속 지금과 같이 허세 가득한 ‘후장사실주의자’란 트레이드마크를 붙잡고서, 대중을 외면하려고 한다면, 실제 ‘후장사실주의자’의 모태가 된 비현실주의의 책들처럼 어느 농부들의 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지돈의 글을 읽고서, 바로 이장욱의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읽고 느낀 점은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평이한 문장과 평이한 구성으로 글을 써서, 읽기는 쉬웠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별로 가슴에 남는 문장이 없었다. 윤이형의 ‘루카’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이 책속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다. 소재는 ‘퀴어’라는 특수한 소재를 담고 있었지만, 근래 유행하는 소재주의 소설과 달리, 철저하게 연애소설이었다는 점이 아마 내 정서와 맞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초주의로 가득한데다 사랑에 다소 냉소적인 정서가 팽배한 내 개인이, 정반대급부인 순정적인 여자정서와 오직 순수한 사랑에 대한 열정 때문에 누군가를 증오할 수 있는 정서의 이 글을 읽었을 때 대비되는 감정선에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누군가를 증오할 만큼 사랑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기존에 윤이형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열정을 이 작품을 통해서 느꼈던 것 같다. 최은미의 ‘근린’의 경우 매우 구성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여러 인물의 배치를 통해 감정을 배제한 문장으로도 묘한 긴장을 일으키는 능력은 애초에 이 소설이 얼마나 구성에 공을 들였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들이었다. 하지만 대개 구성에 초점을 맞춘 글들이 그러하듯이, 이 글이 독자에게 저자가 의도한 빈 벤치에 대한 감동이나 여운을 얼마나 남겼을 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김금희의 ‘조중균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 진부한 설정과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 지나간 세계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름 재밌게 읽혔다. 그 이유는 캐릭터에 대해 생명력을 작가가 잘 부여한 까닭이라고 여겨본다. 손보미의 ‘임시교사’의 경우도 ‘조중균의 세계’와 같이 캐릭터가 잘 살아있는 작품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보다 풍자적인 요소를 갖춘 세련된 소설이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조중균의 세계’처럼 직접적으로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P부인의 내밀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담담하게 표현함으로써 뒷맛의 씁쓸한 풍미를 남기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소재적으로도 지나간 세계가 아닌, 지금의 세계,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에 대한 풍자가 그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본다. 마지막으로, 백수린의 ‘여름의 정오’는 가장 잘 쓰인 전형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지나친 전형성을 싫어하지만, 이 글에서의 전형성은 전혀 그러한 느낌은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아귀가 잘 들어맞으면서도, 내내 흥미를 유발시키는 구석이 있다는 전형적^^; 표현이 좋을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소설이 내 가슴에 와 닿았던 점은 누군가의 생의 안부를 묻는 방식이었다. 우연히 닮은 이름을 뉴스에서 보고서 혹은 갑자기 911테러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형체를 보면서, 죽어간 이를 추모하고, 위태로웠던 이에 대해 걱정하는, 보통 우리네들의 안부를 묻는 방식이 글속에 표현되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독자를 공감하고, 동시에 독자에게 공감 받을 수 있는 글쓰기 방식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이제 대강 정리를 해봐야 할 거 같다. 처음 의도와 달리 다소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에 대한 평에 치우치다보니, (다소 예감은 했지만) 다른 소설들의 전체적인 글쓰기 방식을 면밀하게 살펴보지 못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근래 내 또래의 젊은 작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글쓰기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음에는 분명한 것 같다. 각자의 방식으로 기존의 틀에 대항하면서, 때론 융화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 비록 여전히 아마추어지만,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내내 아마추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도 주어진 하나의 숙제일 거란 생각을 해보며, 부족한 평을 이만 줄여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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