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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의 거짓말 - [할인행사]
피터 카소비츠 감독, 로빈 윌리암스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제이콥의 거짓말 - 희망의 아이러니에 관해

 

 

 

 

  어느날 히틀러가 점쟁이에게 물었다.

 

  "내가 언제 죽을 것 같나?"

 

   점쟁이 왈

 

  "유태인 경축일 날입니다."

  

  히틀러 화들짝 놀라

 

  "아니 왜 하필 유대인 경축일인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점쟁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의연한 태도로 말하길

 

  "당신이 죽는 날이 유태인 경축일 테니까..."

 

 

 

  살벌한 그 시기에 유대인들은 이런 사소한 유머와 때론 터무니없는 희망들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해 나갔다고 한다. 왜? 그렇게 도저히 희망이란 이름이 가당치도 않을 암담한 시대일수록 미약하게라도 붙잡고 늘어질 무언가가 필요했을 테니까...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은 이러한 베이스 아래 유대인 제한구역인 게토 (게토는 포로수용소를 들어가기 전 단계로 제한적인 최소하의 생활을 보장하는 장소임) 안에서의 유대인들의 살벌한 삶을 코믹하게 엮어나가고 있다.

 

 

  언제나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사건의 발단은 참 사소하고 지극히 우연한 돌발들로부터 시작된다. 먼저 화면엔 바람이 거세게 불고 도저히 잡힐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신문 한 장이 휘날리고 있다. 그리고 어떤 난세에도 전혀 튀어오를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소시민인 제이콥(로빈슨 윌리암스)은 그 신문을 부여잡으러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아마 아주 사소한 희망이라도 붙잡아보고 싶은 뜬금없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문제는 그런데 그 신문 쪼가리 하나가 더럽게도 잡히지가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쫓아가도 이리저리 도망치는데, 결국 시간은 통금시간(오후 8시)에 가까워지고, 그만 제한구역의 경계선까지 와버리는데, 신문이란 하나의 붕 뜬 희망에 팔려 거기까지 밀려와버린 제이콥은 그만 그것도 잊었는지, 독일군의 탐조등 아래 자신이 드러나질 때까지 정신이 없다. 결국, 이런 사소한 일로 제이콥은 게토 바깥에 위치한 독일 장교 초소까지 끌려가게 되고, 거기서 가볍다고 하기엔 좀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는, 게토 바깥에 위치한 장교 초소에서 장교의 장난스런 시간끌기로 인해 통금시간인 8시가 지났다는 사실인데, 통금시간이 지나 게토 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못 돌아 갈 경우 사형을 당한다는 상황이다. 둘째는, 그럼에도 독일 장교와 독일군들은 아무 잘못 없는 제이콥에게 아무런 통행증도 없이 다시 게토 안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한 상황이다. 즉, 제이콥은 일종의 목숨을 건 게임에 말려들게 된 것이다. 왜냐면 게토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미 닫혔고, 그러하기에 들어가기 위해선 독일군 보초들과 탐조등을 피해야만이 무사히 자신의 집으로 귀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연유로 이제 제이콥은 위기의 상황에 봉착하게 되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위기엔 희망의 전조 또한 드리워지게 된다. 첫째는, 장교의 초소에서 그는 아주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전선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동안 아무런 소식조차 상상할 수 없던 절망에서 소련군이 자신의 게토 400km 근처에까지 와있다는 무언가 확실한 희망의 소식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희망의 전조로 그는 게토 안에 무사히 들어오는 과정에 포로수용소로 끌려 들어가다가 탈출해온 한 유대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어찌 보면 이는 자신에겐 커다란 부담이며 위험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는 아마 이는 앞에 첫 번째의 불확실한 희망보단 더욱 근거 있는 희망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제이콥에겐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아내가 있었다고 하나 총살당하였기에 그는 누구도 의지하거나 바라볼 대상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한 이 소녀와의 만남으로 그는 이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살아남아야 하는 절실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사실 이럴 때 보면 인간은 참으로 人이 아니라 人間임을 알 수 있는 거 같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과적으로 제이콥은 오랜 탈출기로 쌓은 소녀의 노하우에 힘입어 무사히 집으로 귀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희망이란 근거 하에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희망이란 불안이나 절망 혹은 우울만큼 그 전염성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되레, 엄청난 과장성을 띠고, 확대되어가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제이콥 혼자만의 희망이란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전염을 통해 확대되어져야 만이 희망의 온전한 힘이 발휘되어지고, 아울러 제이콥이란 한 개인에게도 그것이 해당되어지게 될 테니까... 물론 그러하기에 어쩌면, 희망이란 것은 거짓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거짓이다! 그러나 거짓만으로 끝나는 것은 결코 희망이 아니다. 희망은 되레, 거짓에 관한 믿음이며 신념이다! 그러하기에 희망 안에선 거짓도 진실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직 중요한 건 희망 그 자체이고 삶을 연장시키는 그 힘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제이콥은 어쩔 수 없이 모든 이들이 희망을 짊어지고서 거짓을 증거하는 예언자가 되어 버리게 된다. 당연히 그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단지, 너무나 절망에 휩싸여 어떤 삶도 쉬 포기해 버리는 동료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희망에 대해 발설했을 뿐인 것을 희망이란 그 자체가 커지고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증거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사람들은 그런 막연한 희망이라도 무언가 잡혀지는 구체적인 근거들을 원하고 합리화시켜나가길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도구로 희망의 발설자인 제이콥은 너무나 적절하였다. 왜냐면 추상적 관념인 희망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고 잡혀지는 사람이니까. 일말의 책임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제이콥은 열심히 거짓말을 하게 된다. 소련군이 곧 진군해 들어올 것이라고. 그리고 곧 우리는 해방될 것이라고. 매일 밤 벌어졌던 자살행각은 이제 사라지고, 이제 유대인들은 사실 터무니없지만 엄청난 희망에 근거하여 무력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파워를 얻게 된다. 비밀 결사대가 조직이 되기까지 하고, 다들 포기했던 삶을 무언가 다른 방식으로 분주히 꾸려가기 시작한다. 물론 이런 희망이 거짓이며, 이런 분주함이 위험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 모두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마저 포기하기엔 그들의 삶의 기반은 너무나 빈약했고, 당연히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결국 모두는 희망을 선택했다. 그 대가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모두가 예감한 채. 그리고 역시 그 예감대로 아주 빨리 그 대가는 찾아왔다. 있지도 않은 라디오의 정체, 그동안 게토 안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제이콥의 거짓말에 관한 희망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제이콥에게 라디오가 있을 것이라 상상해 냈었다. 그리고 제이콥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굶주린 요구를 채워주기 위해 본인이 라디오를 가장해야만 했다. 이에 관한 독일군의 수사가 시작되었고, 제이콥은 독일군에게 순순히 잡혀 들어가게 된다. 모두의 엄청난 희망을 남겨두고서... 그리고 자신만을 의지하고 있는 한 소녀의 희망을 남겨두고서... 왜? 저항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그리고 왜 그토록 간단하게 잡혀 들어갈 수밖에 없던 것이었을까? 상황은 다시 맨 처음 상황과 비슷한 연장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제껏 신문이란 실상은 허공에 붕 뜬 언어들이 (언어는 언제나 사실이라는 통념이 있다) 가진 희망에 팔려 정신없이 쫓아가다 보니, 어느새 그는 다시금 독일군의 탐조등 아래 자신의 발가벗겨진 무력함이 폭로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의 희망이 애초에 거짓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이다. 만일 그 희망이 진실이었다면? 그러나 영화는 애초에 모든 희망은 거짓이며, 그러하기에 한없이 무력한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희망이란 게 어이없고 간단한 것일까? 여기서 영화는 다시금 희망에 관한 커다란 반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무엇이냐면 희망 자체가 무력한 거짓이라도 희망에 관한 믿음과 신념은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제이콥의 거짓말은 독일군에게 발각되었다. 그리고 모든 자신의 동포들 앞에서도 발각되었는지 모른다. 누구도 라디오를 본 적이 없으며, 동포들 앞에 끌려나온 제이콥은 거짓말쟁이라는 죄명으로 서있다. 분명, 모든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렇지만 제이콥은 끝까지 그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고 제이콥을 바라보던 유대인들의 얼굴도 역시 마찬가지다. 희망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삶의 출구도 없을지라도, 어떤 형태도 없는 막연한 희망이기에 무력하기 그지없을지라도, 희망은 언제까지나 존재해주어야만 하며, 희망 자체가 거짓일지라도, 그것만은 진실이어야만 한다. 그러하기에 제이콥은 자신의 거짓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처형을 당한다. 희망의 남겨진 조그만 몫을 모든 동포들에게 남긴 후,,, 이제 다시 무대는 맨 처음 상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제이콥과 함께 제이콥의 희망은 죽었고, 그와 함께 라디오의 비밀도 사라졌으며, 이제 유대인들은 제한구역을 떠나 포로수용소로 모두가 끌려가는 마당이다. 물론, 제이콥은 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됐든 간에, 제이콥의 죽음과 함께 구체적인 희망의 근거는 사라지고,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막연한 희망에 관한 믿음만 남겨진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기적을 가져오는 것일까? 아니면, 희망과 믿음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오게 되는 필연을 우리는 희망과 믿음에 근거하여 기적이라 부르는 것일까?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기차가 50km를 채 지나기도 전 약속했던 소련군이 도달하고, 영화는 제이콥의 희망이었던 소녀에게서 다시 제이콥의 희망을 그대로 전이시킴으로써 마치 제이콥의 죽음을 부활처럼 남기며, 막을 내린다. 즉, 제이콥의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이콥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로의 희망의 부활이며, 전이였음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그 긴 120분 동안 희망은 거짓일지라도 그 믿음은 진실이며 언제나 존재해야 만이 되는 것임을 제이콥의 거짓말을 통해, 그리고 마지막 소녀의 환상을 통해,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정말로 그 어떤 희망에 관한 가르침보다 근거 있고, 파워 있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의문을 던져보고 싶다. 마지막 희망의 결론이 어떤 기적과 소녀의 환상일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제이콥이 그리고 그 소녀 자체가 희망이었던 까닭은 아닐까? 영화 전반적으로 암시만 두었을 뿐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았기에 자세히 나타나진 않지만, 희망의 막연함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바로 사람이고 우리 자신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누군가에 말대로 나는 지금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은근히 말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이 희망 될 수 있었던 이유들은 구체적인 우리의 절망들이 그렇게 만든 것임을 한 번 생각해보고 싶다.

 

 

 만일, 세계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이 아니라 해방되어 축복받고 선택받은 유대인의 관점에서의 희망이라면, 이런 방식으로 희망이 말해 질 수 있었을까? 아마, 분명 다를 것이다. 어쩌면 상황에 따라 희망의 이런 거짓은 욕망으로 변모하여 가장 사람을 무섭게도 만들기 때문에... 즉, 이 모든 베이스에 허공에 붕 뜬 거짓만큼 절실한 우리의 절망이 숨겨져 있었음을 잠시 기억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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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rik SATIE:Gnossienne No.4
같이 듣고 싶은..^^

몽원 2015-01-13 18:36   좋아요 0 | URL
저도 가지고 있는 음원이기는 합니다.^^

[그장소] 2015-01-13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원님 글 덕에 오랫만에 에릭사티를 청해들었어요. 요즘은 유툽이 좋아서 찾아 걸지않아도 비교적 좋은 음질로 들을수있어서..좋긴 좋구나..( 이런 간사한..ㅎ) 했더랍니다.저.곡은 야곱의 사다리˝ 라는 영화때문에 알게되었어요.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죠..오래전에 본 기억이 나요.엔딩에 울리던 곡을 찾다.닿은 곡였구요..
 
화양연화 (1disc) - [초특가판]
왕가위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화양연화 -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그리움

 

 

 

  사실 영화의 내용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어느 날 우연히 벽 하나를 두고 두 집안이 이사를 오게 된다. 젊은 남녀 두 부부... 쉽게 떠올리듯이 여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무언가 불륜의 전조가 드리워지고... 역시 예상대로 한 여자와 남자는 눈이 맞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부터가 재밌다. 왕가위는 바람난 두 남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두 내외 즉 양조위와 장만옥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아주 의도적으로... 문제의 원인인 이 두 사람의 부인과 남편에 관해선 목소리와 뒷모습 같은 배경적 의미 이외에 제대로 얼굴조차 비추지 않을 정도로. 그렇다면 왜 별로 재미도 없을 거 같은 바람난 남녀의 내외인 양가위와 장만옥에게 왕가위는 애틋한 시선을 보내었던 것일까? 사실 여기선 그전에 중경삼림이나 타락천사 등에서 보여주었던 왕가위의 시선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날카롭게 소외된 이들의 만남임에는 분명히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지만, 왕가위는 도리어 이번엔 이 소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도시적인 미학 속에 머물렀던 그의 시선이 도시적인 향수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다!`하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면, 제목 ‘화양연화’가 의미하는 바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분명, 비련의 주인공일 수 있는 이 영화의 두 남녀 주인공에서 어떻게 왕가위는 그런 애틋한 그리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영화에서 두 남녀는 처음엔 단순히 서로의 부인과 남편을 되찾기 위해 만나기 시작했지만, 서로 점차 끌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과 아시아의 도덕적 환경이란 무거운 압박 속에서 그들은 결연히 사랑의 도피를 할 만큼 용기 있는 주인공들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에게 시작된 조그만 호감의 감정들을 끝까지 부인하고 싶다. 그러나 각자 부인과 남편에게서의 소외라는 상황과 주위의 시선에 대한 부담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감정을 사랑으로 발전시키게 되고, 급기야 이제 그들은 서로를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영화 `화양연화`는 이런 미묘한 두 남녀의 세세한 감정들을 왕가위 특유의 논리와 감각으로 잘 포착해 내고 있다. 특히 영화 중 나오는 그들의 연습(다른 의미로 연극)은 그러한 두 남녀의 심리에 대한 역설적인 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처음 자신들의 부인과 남편의 불륜의 관계를 확인하던 밤, 그들은 어떻게 자신의 배우자들의 불륜이 이뤄졌는지 더 자세히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상의 연극을 해본다. 슬며시 유혹하는 두 남녀의 시선은 이미 연극을 넘어선 실제에 가 닿고, 어느새 두 남녀는 마지막 연극 연습을 하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서로의 진실을 알아차린 미묘한 감정 속에서 헤어지기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남자는 덤덤히 떠난다 하며, 이제껏 표현하지 못한 자신의 진실을 고백하고, 손 끝 쉬 범하지 못한 여자의 손목을 애처롭게 잡았다 놓으며 떠나간다. 슬픔을 견디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 지어보려 홀로 떠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자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참을 수 없는 격정으로 남자에게로 달려가 그 품에 안기며 엉엉 서러이 울어버리고, 남자는 연습이라며 여자를 달랜다.

 

 

 

 

 

 

 

  다른 진실을 가정하고 그 진실 속에 몰입하는 그들의 약간은 장난스러운 듯하면서도 처연한 연극은 그들의 시작과 끝을 너무나 분명한 현실로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이 한 것은 연극이 아니라 실제의 진실이었고 실제였다. 마지막 두 주인공의 이별신 연습은 영화 스스로 그것을 인정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이러한 지점이 드러나고 있다. 즉, 그들은 그들의 가장 불행스러운 시절들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만들어내고 싶었던 욕구들을 하나의 연극을 통해 맛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이러한 연극의 종영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결국 연극은 막을 내리고, 두 주인공은 내려와 서로 각기의 길을 걸어야 했으며, 남겨진 무대를 두고 서로 엇갈린 걸음들로 찾아와 종종 들여다보고,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것, 이것으로 끝을 맺어야 했다. 연극은 끝이 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짜였기에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진실로써 그들에게 절실한 그리움으로 남겨지게 된다. 비록, 이 또한 하나의 또 다른 소외를 위한 몸부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왕가위는 이러한 연극의 행위를 통해 낳아진 소외를 그 그리움을, 우리 삶의 각박한 소외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얘기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검은 커튼이 드리워진 꽉 닫힌 창문 사이로 한 개 시린 바람이 불어와 눈을 감은 눈가에도 빛이 어린다... 흐린 그림자 가뭇가뭇 어리어지고 그 사이 나도 모를 그리움이 피어올라 다시 보고 싶다. 그 때 그 시절... 끝나버렸기에 아름다운, 그토록 아름다운 그 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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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이미 교감을 나눈 이가 있기에
더 함이 나눔보다..못할것같아서..

몽원 2015-01-13 20:49   좋아요 0 | URL

교감이라.. 좋네요^^ 이 글은 제가 거의 처음으로 썼던 품평인데... 10년도 넘은 시간 전에...
그 때 노블이란 문학 사이트에서 처음으로 이 글을 통해 저도 여러 사람과 글이란 도구를 통해 소통할 수 있게 된 계기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의미가 있긴한데... 지금 보면, 살짝 부끄러운 ㅎㅎ

[그장소] 2015-01-1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안바래진 걸요.. 영화 다시봐도 전혀 촌스럽다거나 시대를 모르겠거나 하지않아요.그게..어색하지않음..세련됨..
같아요.저 영화는 은근하게 세련되고 은근하게 밝히고 은근하죠..사람들 속내같이..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화양연화...여전할 수있다고..믿어요.^^

몽원 2015-01-13 21:08   좋아요 0 | URL

아~ 영화 말고요. 화양연화는 그 이후로도 5번 정도 더 봤습니다. 워낙 명작이라..
볼 때마다 새롭더군요. 더 아리고. 제 글이 살짝 부끄럽다는 의미였습니다.^^;; 하하;;

[그장소] 2015-01-1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같은 말을..ㅎㅎ
님의 글 역시 (아..부끄럽다...개인이 느끼는 감정을..) 주제넘게 아니다..그렇다..할 자격이 제게는 없지만..누구의 추억도 지나서 부끄러울..그런 기억은 아주 커다란
잘못이나..두고두고 후회할 만한 일이 아니면..대부분 미담으로 남겨지잖던가요..?.. ㅎ윽! 웹으로 가야..겠어요.
폰이 오늘 뭔가붎편한듯..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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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 - 변신에 관한 변명

 

 

 

 

  카프카의 변신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 앞서, 보통 변신이 가지는 의미 혹은 목적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고 싶다. 이를 위해 잠깐, 잘 알려진 우습지도 않은 군대개그를 하나 들먹여 보고자 한다.

 

 

  군인의 운전 시, 좌석에 높은 분이 있을 경우 항상 복창 (원래는 명령을 확인했다는 의미에서 반복해서 말한다는 의미이지만) 이라고 해서, 미리 앞으로의 행동을 얘기하는 것이 철칙이다. 즉, 예를 들어 오른쪽으로 회전하기 전에 미리 "우회전하겠습니다!" 말하고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회전하기 전에 "좌회전하겠습니다!" 말하고, 좌회전하는 식의 행동을 의미한다. 기어를 바꿀 때에는 "2단으로 변속하겠습니다!" "3단으로 변속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런데 운전병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는 모 이등병에게 어느 날, 별 두 개짜리(스타=장군)를 태우고 운전을 해야 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일개 이등병이 장군을 태우고 운전해야 하니, 그 얼마나 떨리겠는가! 그 옆에 몇몇 대령들도 함께 할 예정이었고. 당연히 모 이등병은 그 시작부터 바짝 긴장했고, 출발하기에 앞서 겨우 떨리는 손으로 차의 핸들을 잡았다. 곧 이어 장군이 뒷좌석에 앉았고, 대령들도 자리에 함께 했다. 이윽고 이등병은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시작했다.

 

 

  "출발하겠습니다!"

 

 

  부르릉~~

 

 

  그런데 이등병은 갑자기 변속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당장 기어 변속은 해야 하고 또 복창도 해야겠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는 생각나는 대로 복창을 하기 시작하였다.

 

 

  "2단으로 변신하겠습니다!"

 

 

  "3단으로 변신하겠습니다!"

 

 

  ^^;;;

 

 

  옆에 탑승했던 조교의 표정은 굳어졌고, 대령들은 피식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군은 표정 하나 변함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해, 다들 내릴 시간이 되었다. 그때 장군이 조용히 운전병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자네~ 합체는 언제하나?"

 

 

  우스갯소리지만 이 개그 가운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변신에 대한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합체!! 비단, 어릴 적부터 우리가 즐겨 봐 온 만화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는 늘 이렇게 변신은 합체란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변신을 할 경우, 사실 그 둘의 궁극적인 목표는 남녀 합체이다. 그리고 어린이가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변신하는 이유 역시, 그것은 이 사회와의 합체나 혹은 또 다른 의미로써의 합체를 원하기에, 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늘 무언가 변신하기를 원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와 합체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칫하면 이런 변신과 합체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또 무언가를 상실하기도 한다. 다시 그러한 예를 들기 위해, 또 우습지도 않은 개그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이 땅에서 선하게 살다 죽어서 천국에 올라간 세 사람이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셋에게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이야기 해보라고 하였다. 첫 번째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하기를

 

 

  "별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를 별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이 나왔다.

 

 

  "전 왕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를 왕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의 차례가 왔다. 그런데 그는 조금 욕심이 많아서인지, 별도 되고 싶고, 또 왕도 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어, 하나님께 그 두 가지를 모두 간청하게 되었다.

 

 

  "전 별도 되고 싶고. 왕도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그를 스타킹이 (별=스타, 왕=킹 => 스타+킹=스타킹) 되게 하였다고 한다. -,-;;

 

 

  이 역시 매우 황당무계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변신을 통한 합체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 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다시 아주 쉽게 생각해서, 우리가 어린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와의 합체라는 긍정적인 기능을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전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괴물로의 변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어릴 적, 가장 증오하고 역겨워하며 두려워했던 존재인 몬스터, 바로 그 끔찍한 몬스터가 되어 있는 우리 자신을 우리는 쉬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카프카의 변신은 어떤 범주에 속한 변신일까? 이제 본 이야기로 넘어가 보기로 하자.

 

 

  카프카의 변신을 처음 읽었을 때는 고등학교 적이었다. 그 당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매 주 독서 토론회 비슷한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그 때 우리는 이 카프카의 변신을 택했고, 그래서 이 '변신'이란 주제를 통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 때는 그러한 변신에 대한 연민만 앞섰을 뿐, 정말로 카프카의 변신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묻거나, 알기는 힘들었던 듯싶다. 그러나 대학 때, 학교에서 문학 동아리 회장이었던 나는 변신을 주제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게 되었고, 그 때문에 변신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과 물음들을 가져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직도 나는 카프카의 변신이 어떤 변신인지에 대한 물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변신이었을까? 아니, 왜 변신한 것일까?

 

 

  사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어보면, 나의 위의 물음에 대한 어떠한 힌트도 나오고 있지 않다. 아니, 카프카는 그런 물음에 대해 거의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거나, 관심 자체를 두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까 그레고리는 끔찍한 벌레로 변신이 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사회에서, 가정에서 철저히 냉대 받다가 죽어 버리게 될 뿐, 거기에 별반 특이한 물음이라든가 내용은 보태어 있지 않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흔히 우리 주위의 치매 환자 이야기나 혹은 조금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이해해왔고, 사실 어떤 의미에서, 카프카의 변신은 그것에 대한 알레고리로 한정짓는 것이 가장 합당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왜 불현듯 내게 그 변신이 그레고리 자신 혹은 카프카 자신이 가장 원하였던 변신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즉, 그 변신을 통해 사회와 가정에 철저히 냉대받기를 그레고리 그 자신이, 혹 카프카 그 자신이 원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늘 소외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소외는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생각할 경우가 더러 있는 듯하다. 하지만 때론 소외라는 것은 철저히 내부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 싶다. 모든 사람과 다르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이다. 타인과 자기 자신과의 분명한 경계를 구분지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 내는 일, 어쩌면 모든 사람과 다르다는 그 소외감이란 것은 이러한 자의식 속에서 비롯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즉, 소외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철저히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발견해 내는 일이 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왜 그러한 변신의 이유를 숨기고서, 변신을 통한 사회와 가정의 냉대에 더욱 초점을 맞춘 것이었을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합체에 대한 의미를 떠올려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자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극심한 경우 타인과의 철저한 결별한 통한, 소외라는 변신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그러한 변신의 이유엔 항상, 그 소외의 이유엔 항상, 합체라는 목마름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철저히 자기 자신을 소외시킴으로써, 모든 타인들을 지옥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오직 자기 자신의 존재와 실존만을 이야기하고 고백한다고 하여도, 우리 뇌리 언저리에 남아 있는 합체에 대한 동경을 우리는 쉬 지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변신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원점으로 돌아와, 우리는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카프카를 통해서 대변되는, 우리 모든 변신의 목마름에 대한 그 변명을 감히 감행해보고자 한다.

 

 

  카프카 그 자신은, 모두가 잘 알겠지만, 비교적 이른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치열하게 글을 썼으며, 또 그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불살라 버리고, 남은 작품들마저 친구에게 불살라 줄 것을 부탁하고 세상에 안녕을 고하였다. 그러하기에 그의 이런 점들만 살펴보았을 때는 분명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변신은 철저히 자기 소외를 위한 변신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글이란 것도 항상 깊은 굴을 파거나, 단단한 성을 지어, 그 속에 갇히는 일이 대부분이었기에, 우리는 그의 삶과 그의 글을 통해서 모두, 그의 변신에 대한 이견을 달리 붙여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왜 카프카 그 자신이 그 변신을 끔찍한 벌레로써 밖에 표현을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만약 그의 변신이 성공적이었다면 카프카 그 자신이 자신의 변신을 벌레라고 표현할 수 있었을까? 카프카는 낮에는 법원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철저히 자기 삶을 충실히 이행함과 동시에, 밤이면 밤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서 평생 동안 철저히 지키면서 글쓰기에 몰입했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그의 변신에 관한 열망은 대단했으며, 치열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변신은 그가 어떤 합체를 꿈꾸었던 간에, 그가 생각한 바와는 달리 전개되어진 듯싶다. 그러하기에 그는 늘 자신의 작품들에 만족하지 못하였고, ‘변신’이란 글을 통해 자기 자신을 끔찍한 벌레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들로 인해, 그는 그의 작품 '변신'에서 변신의 이유를 밝히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의 변신은 그가 결코 원하고자 했던 변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어느 날 그렇게 변신이 되어져 있었고, 그러하기에 그 어느 날 심판의 형장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가 최후에 선택한 죽음과의 합체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별이 내게 묻는다.

 

 

  "언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지?"

 

 

  "넌 닿을 수 없어. 그렇기 때문에 난 너하고 하나가 될 수 없어."

 

 

  "하지만 넌 늘 나에게 닿으려 밤마다 몸짓하며, 기도했잖아."

 

 

  "아니야. 그건 너를 위한 기도가 아니었어. 그건 나 혼자 견디기 위한 자위였을 뿐이야."

 

 

  "그럼 너는 나와 하나가 되고 싶지 않은 거니?"

 

 

  "아니... 하나가 되고 싶어..."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가 되었다고 믿으면 돼. 알겠니?"

 

 

  "............"

 

 

 

 

  별이 지고, 나는 다시 밤을 기다려 본다. 카프카가 치열하게 끔찍한 벌레로 변신을 하고, 죽음으로 내려갔던 그 밤을 별과 함께 지새워 보기 위해....... 그리고 내 자신도 언젠가는 어머니 자궁과도 같은 안온한 죽음과의 합체를 이루어 내기 위해....... 하지만 만약 치열하지 못하다면, 그러한 죽음과의 합체에서 두려워 이탈해 버릴지도, 그렇게 아무 의미 없는 죽음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하기에 그 밤, 조금 더 치열해지기를, 조금 더 버거워지기를... 그래서 별과 하나 될 수 있음도 믿어 볼 수 있기를, 두렵게 몸짓하며,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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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역시 변신을 고등학생때..읽었고..나중에 졸업하고 잠시 서점에서 알바를 하며 다시 ..본 기억이 있어요. 우리의 시간이 겹치지는 않겠지만..저의 글읽기는 누구와 나눌 형편이 못됐었어요.잠시 그런 때가 있긴 했지만 그 반가움..과 설렘이 내내 행복을 준 건 아니어서..그 무렵은 세계문학보단..국내 작가들편에..또..영화와..음악에..위로를 받곤..했어요.영원한 벗은..없을지도 라며..
외로워했고요. 변신에 대한 제 생각은 스스로가 벌레로...더는 누군가에게 보여지지 않기를 꿈꾸며 자유를 갈망한 카프카의 희망으로..가득차 보였어요.미세하여 번식은 끊임없이 이뤄지며..도처에 있으나 그 있음을 들키지 않음으로 생을 살아갈 수 있는게 벌레...
그도 그런 바람을 원하였다고..계속되기를..
아무도 모르게..그의 부스럭거림은 그저 못본척 외면 되어지길..그래야..연장되어갈 테니까..그도 시선에서 벗어나고싶다..한 낱 미물이 되서라도..그랬던건 아닐까..하면..너무 단세포적 접근이라고 할지요..!ㅎㅎㅎ

몽원 2015-01-13 20:52   좋아요 0 | URL

아니오. 무척이나 새로운 시각!! 같습니다. 이 글 역시 오래 전 글이라 지금 다시 카프카의 변신을 보면 저도 어떨지 기실 잘 모르겠어요~ 님의 말씀대로 합체가 아닌 벌레 그 자체에 대한 변신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단세포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카프카스러운 느낌처럼 들리네요^^

[그장소] 2015-01-13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단.삼단..보면 일단 벌레이길 희망하다.보다..더 근본의 뭔가 있었겠지만..오늘은 일단까지만...합니다.

[그장소] 2015-01-13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를 연상케하는 국내 작가들이 간혹 있어요.잠깐씩 비춰지는 광각이긴 하지만.. 그래서 변신은 여러번 곱씹게 되더라고..하지만 이미 제 안에서 변태한 카프카를 그라고 믿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몽원 2015-01-13 21:12   좋아요 0 | URL
음.. 제가 아직 소천해서 국내작가들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기호의 <수인>이란 작품을 읽으면서, 그리고 서유미의 <당분간 인간>이란 단편집을 보면서 카프카를 떠올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님 말씀대로 이 역시 제 마음속 카프카가 변태해서 마음대로 투사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네요^^;
 

 

 

 

늙은 창녀의 노래 -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하여

 

 

  90년대 중반쯤, 그러니까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얼마 안 된 그 때, 대학가에선 한 연극 한편이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양희경이 혼자 나와서 독백으로 연극을 하는 모노드라마인데, 엄청나게 감동적이고 짠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원래 연극 관람 같은 것은 팔자에 없던 탓에, 나는 원작 소설로 된 '늙은 창녀의 노래'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원작자인 송기원에 대해 그 자신의 표현대로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은 도리어, 송기원이란 사람에 대한 끌림의 다른 표현이었는지, 나는 그 후로도 내 마음 속에서 '늙은 창녀의 노래'를 쉬 지우지 못했고, 그 소설과 함께 거의 동시에 출간된 송기원의 '마음속 붉은 꽃잎'이란 시집을 연방 입안으로 되뇌게까지 되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것이 나의 정직성에 대한 문제와 함께 흐드러지는 꽃잎처럼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기에, 이쯤에서 늙은 창녀로 대변되는 그의 고백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10년이란 세월동안 창녀촌을 떠돌며 방황하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우연히, 목포 뒷골목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새울 늙은 창녀를 찾게 된다. 그리고 늙은 창녀와 마주하게 되면서, 소설은 늙은 창녀의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애착과 회한에 대해, 그녀의 목소리만을 통해 일방적으로 독백을 시작한다.

 

 

 '나이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여덟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와 오메, 이십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 뗌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아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마로 살붙이 같어라우.'

 

 

  이십 년 동안 창녀 생활을 했으면, 흔히 생각하기를, 닳고 닳은 회한뿐이거나, 삶에 찌든 독기뿐일 것이라고 쉬 단정하기 쉽겠지만, 어이된 게 이 순박한 아짐씨 전혀, 그런 것에 물들지 않은 채, 자신의 모진 삶 가운데서도 무언가 의미를 발견해 낸 모양이다. 그러하기에 비록 많이 배웠지만 10년 동안의 방황에, 허기로 가득 찬 손님인 남자를 다독이며, 위로해 주기위해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한다.

 

 

  '열여덟 꿈꾸는 나이로, 보리밭 이랑에 앉아 나물을 캤어라우. 보리밭이나 나물만 어디 푸르렀간디요. 가난하지만 때묻지 않은 제 웃음도 푸르게 눈부셨지라. 아직 누군한테도 뵌 적 없는 젖가슴은 이랑, 이랑을 메울 듯이 부픈 것이 터질것만 같았서라우. 그래서 손님모양 맘이 허해서 떠도는 사람을 보먼 한잔 술에 스무 해 전 내 열여덟을 담아주고 싶어라우. 차갑게 식어뿐 젖가심 저 깊이 그때의 보리밭 이랑에서, 처음 가심을 열어 손님모냥 허한 맘을 채와주고 싶어라우.'

 

 

  그렇다고 그녀에게 회한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열아홉의 나이로 멋도 모르고 서울로 상경하려다, 중간에 한 남자에게 사기를 당해 목포로 끌려가, 강제로 창녀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천성이 워낙 순박했던 그녀는 나중에 자기에게 사기를 쳐, 자신을 창녀로 만든 그 남자마저 측은히 여기고 사랑하게 된다. 심지어 그 이유로 잠시 창녀 생활을 접고서, 그 남자와 함께 살게까지 된다. 그렇지만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다시 그 남자에게서 버림받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아이만 낳으면 된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고서, 아이 하나에 자신의 모든 존재가치를 건다. 그렇지만 무슨 놈의 팔자인지, 그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죽은 채로 태어난다. 이에 그녀는 크게 절망하여 한 동안은 실성기까지 나타내보이게 되지만, 결국은 그것마저 체념하게 된다. 그리고 이젠 누구도 잘 찾지 않는 늙은 창녀로써의 삶을 순응하면서, 살아오고 있던 것이다.

 

 

 '정을 주는 일이 인자는 무섭들 않어라우. 지아비도 자석도 없이 몸 폴아 살어온지 벌써 스무 해! 한번도 맘속 옷고름 푼 적 없이 숱한 밤과 숱한 사나들만 먼 강물모냥 흘러왔다 흘러가고 몰라붙는 개울창의 모랫바닥으로 혼자 누워 있제만 정을 주는 일이 인자는 무섭들 않어라우. 사는 일이 추와서 떠는 손님을 만나면 썩은 몸뚱어리 쩌 깊숙이 살어오는 온기... 끝끝내 맘속 옷고름 풀게 함시롱 몰라붙는 모랫바닥을 적시는 흥건한 온기...'

 

 

  아니, 심지어 그녀는 늙은 창녀로써의 삶의 순응을 넘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창녀생활을 통해 몸으로 드리는 기도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몸뚱어리도 인자는 어떤 의미가 되고잡어라우. 영혼이 아니고 바로 썩은 몸뚱어리 말이여라우. 누구를 사랑한다등가 사랑을 받는다등가 그런 의미가 아니고만이라우. 스스로 한번도 아께본 적이 없는 몸뚱어리제만은, 시방 왜 이리도 소중해진다요? 숨가쁜 어떤 골목에서는 썩은 몸뚱어리마자 없어서, 갈증 땀시 죽어가는 사나가 있을 것만 같어라우.'

 

 

  이제 10년 동안을 방황을 한 그녀의 손님인 남자는 그녀의 이 의미를 향한 몸짓을 통해 하나의 사랑을 깨치게 된다.

 

 

 '맘속 맺힌 매듭 풀지를 못해서, 밤마둥 헤매제만 돌아갈 디가 없어서, 헤어진 사람들은 별빛보담도 아득해서, 싸구려 막쇠주에도 취할 수가 없어서, 거리에 불빛들이 웬수보담도 짚어서, 내딪는 걸음마둥 끝끝내 허방을 짚거든, 짓뭉게덱기, 짓뭉게덱기, 나라도 기억해라우. 역전 뒤 힛빠리 골목에 누워, 스무 해 동안 아직까장 지달리고 있는 나라도 기억해라우.'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남자는 한 남자가 아닌 그녀를 스치고 간 모든 남자로써, 사랑의 폭과 넓이가 온 세상으로 확장된다.

 

 

 '내 몸뚱어리를 스치고 지나간 그 많은 남자들이 단 한 남자로만 밝아오는 저 환장한 보름달!'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려 간 후, 내가 느낀 감정은 글의 서두에 밝힌 욕지기였다. 원작가인 송기원 역시 '마음속 붉은 꽃잎' 이란 시집을 통해서, 자신이 늙은 창녀를 처음 보았을 때 심한 욕지기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도, 그리고 송기원에게도, 나아가 늙은 창녀를 읽고 본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이 토할 것 같은 메슥메슥한 느낌은 단순히 역겹다는 차원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구토라는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눈물 그리고 회한, 나아가 자기 모든 존재의 '토함'이라는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나의 감정은 사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함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역시, 처음 느꼈던 소설 속에 손님인 남자로 대변되는 '송기원'에 대한 역겨움은 쉬 지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이유가 어찌됐든 10년 동안이나 창녀촌을 일부러 돌아다니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 내려 했던 그에 대해 도저히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송기원은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주도한 배후세력으로 신군부에 의해 고 김대중 대통령, 고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소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된다. 그로 인해 그의 어머니가 월문리에서 자진함으로써, 자신 안에 심각한 어머니의 부재를 창녀들을 통해 찾고 싶었을는지도, 그리고 그 극심한 자괴감에 자신을 밑바닥 진창에 뒹굴도록 놓아버리고 싶었을는지도,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창녀를 통해 그러한 어머니의 부재와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했던, 그 행위 자체는 역겹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그가 물랭 루주를 그린 19C 유명한 인상파 화가 로트레크처럼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불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래부터 그런 밑바닥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도 아닌데, 일부러 거기로 가서 자신의 존재의 기반을 찾는다는 발상 그 자체가 얼마나 치기 어린지....... 게다가 감히 그 치기 어린 어릿광대짓을 통해 늙은 창녀로 대변되는 밑바닥 인생의 짠한 고백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도용하다니....... 어떻게 그 모든 작태들을 역겹지 않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마 그를 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역겨움이 아닌, 다른 무언가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으로 그를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송기원이 늙은 창녀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았듯이, 송기원이란 사람을 통해 나는 내 자신의 진실과 욕망을 본 까닭이었다.

 

 

  스무 살 적, 친구와 친구의 여자 사이에서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그 둘을 배신하고서, 친구의 여자와 관계를 가졌던 나는 결국, 그 친구의 여자와 헤어지게 되면서, 이상스런 체험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아마 견딜 수 없는 극심한 죄책감과 상실감이 뒤섞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체험이었다.

 

 

  군대를 조기 제대한 나는 그녀를 만나서 그녀가 다시 나의 친구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늘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녀와 나는 서로 친구임을 다짐하던 사이였기에, 나는 그것을 당연한 귀결처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간 그 친구를 마음속에 품고서도, 그녀가 나와 일종의 연민 때문에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은, 내 자신을 매우 비참한 기분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 때문에 조금 취하고 싶은 기분에, 그 날 나는 혼자서 술을 들이켰다. 소주 한 반병이나 마셨을까? 원래 주량이 소주 2~3병 가뜬했던 나이기에 전혀 취기도 돌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면서, 모든 것이 선명해 지는 것이 더욱 씁쓸한 기분만 가득하였다. 하지만 뭉실하게 헝클어지는 드가의 그림처럼 흐느적거리는 세상의 자태를 보고 싶어, 나는 취한 척 거리를 내달렸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깨어났는데, 갑자기 구토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구토가 다소 평소와 그 성격이 달랐던 것은 한 번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번으로 이어졌고, 내 감정에 따라서 계속되어졌다는 점이다. 사실 술을 별로 마신 것도 없었기에 나올 것도 없어, 나는 연방 헛구역질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다시 조금만 슬픈 감정이라던가, 이상한 맘이 들면, 계속 구토가 치미는 것이었다. 나올 것이 없는데도 계속, 끊임없이,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사람이 죽을 때 보인다는, 이제까지의 모든 삶들의 영상들이, 한 찰나에 수십 컷의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환영으로 나타나지고, 다시 참을 수 없는 구토증이 치밀어 올라, 변기통에 헛구역질을 시작하는데, 뚝뚝 피가 떨어졌다. 그리고 변기통에 핏방울이 천천히 스며들면서 나는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그 지루했던 몇 시간의 구토를 멈추게 되었다. 훗날 그것이 나의 젊은 날의 나쁜 피가 빠져나간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짓기는 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왜 나는 구토를 참을 수 없었을까? 그리고 왜 나는 내 자신의 피가 흐르기까지 그 구토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일까?

 

 

  사르트르는 자신의 소설 '구토'를 통해서 세계에 대한 한 개인의 구토증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워낙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이었기에, 사실 내가 그것을 감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리는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참을 수 없는 구토증 아래 놓여있다는 것이다. 프로이드를 통해선,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세계의 본질적 원리로써 제시되어지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보며 느끼는 구토증, 그리고 남자든 여자든 배설하고 싶어 하는 구토증 등등. 그러하기에 우리는 글쓰기를 하나의 배설이며, 멈출 수 없는 구토증이라고도 한다. 아니, 비단 글쓰기 뿐 아니라, 요즘 시대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소비라는 구토증 혹은 성적 욕망의 구토증으로 대변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이 구토증이 한 번으로 끝나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구토증을 불러일으키는 중독현상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하기에 어떤 이들은 이런 멈출 수 없는 구토에 대한 염려와 기우로, 그것을 참아내고, 자신에게 하나의 응어리처럼 만들어, 의미가 되어 질 때 구토할 것을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그 누가 우리에게 광기를, 그 구토증을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준 적 있단 말인가? 아니,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그 구토증을 참아내고, 하나의 의미되는 몸짓으로 토해내어야 한단 말인가?

 

 

  위의 물음들은 나의 오래된 화두들이다. 그렇지만 실상 나는 구토에 대한 그 괴로움과 역겨움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이제껏 피해왔고, 지금 이 순간도 분명 그 이유로, 구토가 아닌 하나의 의미되는 아름다움을 머릿속으로 계산해 놓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찌됐든 간에 구토를 하지 않고서는 그것이 난잡함인지 혹은 아름다움인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송기원의 구토에 대한 그 욕망은 사실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용감함이었다고 감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구토를 당하는 대상자에 대해선 묵인한 생각임에는 분명하다. 사실 당연히 우리는 송기원의 구토의 행위를 변태적이고, 편협한 것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그 스스로 수십 번 게워 내면서, 모두에게 감히 보여 준 늙은 창녀를 통한 구토는 결코 추잡하지 않았다. 이것이 비단 나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그것은 아름다운 구토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연방 허방을 짚어내며 헛구역질을 하던 나의 구토와는 달리, 자기 자신의 모든 존재의 '토함'이었고, 그러하기에 늙은 창녀와 함께 어우러진, 멈출 수 있는 구토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늙은 창녀를 처음 보고서 느낀 그 욕지기대로 바로, 조급하게 그녀에게 구토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만 집착했다면, 그는 그녀의 모든 존재의 구토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년간 계속 게워 낸 그 구토 끝에, 그는 늙은 창녀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고, 아울러 구토를 멈춰내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구토가 끝났다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젠 그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해 참고 견딜 길을, 그리고 그 난자하게 헝클어진 토사물 가운데에서도 무언가 아름다움이 있음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바로 그래서 그는 그 늙은 창녀를 통해, 자신이 감옥에 가 있을 동안 자진한 어머니를 보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자신의 씻을 수 없는 恨을 감히,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고 그 늙은 창녀를 통해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여기에 의문은 남는다. 무엇이냐 하면, 위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구토의 대상이었던 늙은 창녀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들에 대한 철저한 희생의 강요에 관한 문제이다.

 

 

  오랫동안 나는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해 정직해 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스무 살 적 그녀에게 뱉어내고 싶었던 그 구토들을 나는 다하지 못하고, 혼자서 게워 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게도 된다. 그리고 아직도 연방 허방을 짚으며, 헛구역질만을 계속하는 내가 도저히 이 구토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구토에 대한 나의 욕망들에 대해서 너무나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구토라는 끔찍한 토사물들을 보기엔 나는 그 동안 너무나 아름다움에 집착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란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가 닿지 못하는 이상에 대해 동경한다는 것, 바로 거기서 오는 비극적 아름다움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상이라 할 때 이데아라는 세계를 떠올려 보곤 한다. 불완전한 이 세계에 완전한 형상이며, 실체, 그리고 완벽함 그 자체.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이 세계에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아름답고, 고결하다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은 그 길을 못 가더라도, 당신들은 그 길로 가서 끝까지 목마르고 비극적이어 달라고 바라기까지 한다. 그러하기에 그 길을 가는 당신들은 늘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고서, 그 길을 끝까지 가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그 길 위에서 목마름으로 사라져 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당신들이 바라던 것이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까? 그 길에서 사라지기까지 당신들은 수십 번 아니 수만 번 구토를 하고 싶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까? 당신들의 본질이 정녕 그렇게 아름답고 고결한 것이라 당신들은 감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당신들은 정말 누군가의 희생과 상처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완벽함 가운데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숱한 물음들과 의문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지금 나는 다시금 스무 살 때와 같은 구토증을 느껴 보게 된다. 비록 이젠 그녀라는 대상도 없고, 누군가처럼 늙은 창녀라는 대상도 없지만, 구토증은 참을 길이 없고, 그것은 아직까지 내 관념에선 추잡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아무 의미 없는 헛구역질이라도 나는 이제 구토를 시작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일지라도 정직하게 다가서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래서 그 지저분하고 더러운 모든 토사물을 토해내고 게워내어, 거기서 참고 견딜 길을 배우고, 또 하나의 사랑을 배워서, 나도 누군가의 허기와 토사물들을 받아 낼 수 있는 썩은 몸뚱아리가 될 수 있기를, 그러한 몸짓이라도 될 수 있기를, 염치없게도 자꾸 바래보게 된다.

 

 

 

 

기도

 

 

제 몸뚱어리도 이제 어떤 의미가 되고 싶습니다.

영혼이 아니고 바로 썩은 몸뚱어리입니다.

누구를 사랑한다거나 사랑을 받는 그런 의미가 아닙

니다.

스스로 한번도 아껴본 적이 없는 몸뚱어리지만, 지

금 왜 이리 소중해지는지요.

숨가쁜 어느 골목에서는 썩은 몸뚱어리마저 없어,

갈증에 죽어가는 이가 있을 것만 같아요.

 

-------송기원의 '마음속 붉은 꽃잎'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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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클로 - [초특가판]
트란 안 홍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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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클로 - 죽은 시인의 사회에 바침

 

 

  트란 안 홍 감독의 "씨클로"...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선뜻 영화의 내용보다는 영화의 주제가였던 ‘Radio head’의 ‘Creep’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기억을 끄집어내면, 몇 가지 강렬한 이미지 정도... 그러하기에 사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내러티브(이야기 구조)의 범주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몇몇 프랑스의 누벨바그 계열의 영화들처럼 아예 내러티브가 파괴된 영화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기엔 이 영화 속에 리얼리즘은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영화는 배경이 되는 어두운 이야기의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Creep’과 같은 강렬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그랬다. 분명히... 그래서 어쩌면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늘 다시 보고 싶으면서도 망설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다시금 마약에 흠뻑 젖어 취한 듯한 그 기억 속으로 들어가기가 선뜻 겁이 났기 때문이다.

 

 

  처음, 영화는 베트남의 한 가난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평생 씨클로를 운전하다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어, 이제 가난이라는 삶의 현실과 맞부딪쳐야 할 세 남매 그리고 할아버지...

 

  이제 18세가 되는 소년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씨클로(인력거)를 운전한다. 그리고 이제 갓 10살이나 지났을까 싶은 어린 여동생은 식당에서 구두를 닦는 일을 하고, 누나는 살림을 도맡아 보면서, 시장에서 물을 기르는 일을 하고 있다. 또, 연세가 지극하여 이제 좀 일손을 놓아야 할 것 같은 할아버지는 아픈 어깨 때문에 진통제 약을 먹어가면서, 자전거 고치는 일을 하고 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지독한 가난함... 그렇지만 역시 가난함이라는 말에서 절로 배어 있는 때묻지 않음이 아직 여기까지는 이 가족을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가난이라는 건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기에, 필연적으로 이 가족에게는 세속에의 찌듦이라는 불행한 전조가 드리우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마치 자연주의 소설 계열이나 리얼리즘 영화에서와 같이, 지극히 사소하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우연으로부터 출발한다. 가령 예를 들어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에서처럼 아내가 하루 빌린 값비싼 목걸이를 잃어버려, 평생 그 빚을 갚기 위해 돈의 노예가 되는 것과 같이... 혹은 리얼리즘 영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전거 도둑'에서처럼 가난한 노동자가 자전거를 도둑맞게 되어, 자전거를 훔치게 되는 과장과 같이... 소년은 하루하루 임대 받았던 씨클로를 도둑맞게 된다. 그러하기에 씨클로를 도둑맞은 소년은 원래 씨클로의 주인인 마님이라 불리는 한 여자에게로 간다. 한 30대 후반쯤... 소년의 나이 18세와 동갑인 정신지체아 아들을 품에 끼고서 애지중지 하고 있는 여자이자 범죄조직의 대모... 마님은 매정하게도 소년을 용서하지 않고, 아직 이 모든 현실이 버거워 보이는 소년에게 빚을 계산 받기 위해, 범죄를 알선한다. 그러면서 영화에선 처음 시인이 등장하게 된다.

 

  왠지 우울해 보이다 못해 창백해 보이기까지 한 시인(양조위)은 마님의 애첩이자 심복으로 보인다. 그러하기에 그는 소년에게 범죄를 지시하면서도, 괴로워한다. 그런데 철없는 소년은 처음의 두려움과 달리,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범죄의 묘한 매력에 차츰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소년은 이제 아예, 범죄조직 안에 발을 들여놓길 원하게 된다. 그렇지만 다시, 처음 예상과 달리, 깊이 들여놓으면 들여놓을수록 조여 오는 죄책감에 소년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소년은 다시 마님에게 찾아가, 자신의 원래 일인 씨클로로 이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매정하기 짝이 없는 마님은 거절을 한다. 그리고 오히려 이제 소년에게 살인을 명령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한편 영화에서는 소년과 또 하나의 축으로써 소년의 누나가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소년의 누나 역시, 마님의 애첩이자 심복인 시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처음, 둘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 영화는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둘은 서로 이전부터 알았고, 사랑하는 사이처럼 비추고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소위 시인이라는 사람이 범죄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춘을 알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소년의 누나는 그런 시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매춘을 거부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 소년의 누나는 쉽사리 거기에 적응을 못할 것처럼 비추어진다. 그래서 시인은 소년의 누나에게 수치심을 버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사람을 고용한다. 아주 음흉해 보이는 40대 중후반 가량의 남자... 시인은 자신이 고용한 남자에게 저 여자는 이런 일이 처음이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소년의 누나와 같이 있던 방을 나온다. 그리고선 걱정이 되었는지 복도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몰래 난간을 타고 올라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고문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한다.

 

  청순해 보이기 그지없는 여자는 두려움에 떨며, 의자에 앉아있다. 그리고 여자의 발밑에는 세수대아와 생수통이 보인다. 천천히 시인이 고용한 음흉한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서며 말한다.

 

  "오줌 마렵지? 오줌 마렵지 않아?"

  그리고 계속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목마르지? 목마르지 않아?"

  그리고선 다시 여자에게 물을 먹이기 시작한다.

 

  "오줌 마렵지. 오줌 마렵다고 생각해."

  그리고 마침내, 끝내 거부할 것 같던 여자는 자신의 수치심을 버리고 소변을 보기 위해, 치마를 걷는다. 그리고 자신의 속옷마저 다리 사이로 빼낸다. 그러자 남자가 말한다.

 

  "앉아서 하지 말고, 서서 눠."

  서있는 여자의 벌린 다리 사이로 찔끔찔끔 내려오는 물줄기가 세수대아에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난간에서 이 모든 과정을 훔쳐보고 있던 시인은 코피를 흘리고 있다.

 

  이렇게 수치심을 잃어버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소년의 누나인 여자는 차츰 매춘부로서 거듭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애인인 시인의 소개로 인텔리계층으로 보이는 한 삼십대 남자와 마주하게 된다.

 

  어두운 성인 나이트... 여자는 매춘부 특유의 속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옷을 입고서, 한쪽 손에는 수갑을 찬 채, 유혹의 춤을 추고 있다.

 

  음악은 Creep.......

 

  시인은 남자에게 열쇠 키를 건넨다. 하지만 너무나도 괴로워 보이는 시인... 자신의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맡겨버리고서, 돌아선 시인의 코에선 다시 코피가 쏟아지고 있다.

 

  다시 장면이 바뀌어, 여자의 얼굴은 멍이 들어있다. 그리고 양손은 수갑을 찼던 흔적으로 빨갛게 핏줄기가 그어져있다. 그 양 옆으론, 같이 매춘을 하는 여자들이 소년의 누나인 여자의 상처를 매만지고 있다. 하지만 돌연 참을 수가 없는지.. 돌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시인에게 달려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이 얘는 처녀였단 말이야......."

 

  괴로워 보이는 시인...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시인은 자신이 매춘을 알선했던 남자를 살해해 버린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는 거의 종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매춘부로 전락시킨 시인은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자살을 하고... 한편 마님에게 살인명령을 받은 소년 또한, 살인을 하기 전날 밤, 잔뜩 술과 마약에 취해,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술과 마약에 의한 환각이었는지 소년은 다음 날 죽지 않고 깨어난다. 그리고 그 소년 곁에는 이제껏 소년을 놓아주지 않았던 마님과 그 일행들이 서있다.

 

 

 

 

 

 

  맞은편으론 자신의 애첩이자 심복이었던 시인의 불타버린 집이 보이고... 전날, 돌발적 사고로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정신지체아 아들을 잃어버린 마님이라 불리는 여자는 소년을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선 소년을 범죄 세계에서 놓아준다.

 

  마지막 영화는 이런 복잡한 고통의 과정을 겪고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소년이 끄는 씨클로를 타고, 어딘 가로 떠나는 소년과 소년의 누나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모습을 비춰주며, 끝을 맺는다.

 

 

  처음에 밝혔듯이 이 영화는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다분히 갖추고 있다. 그러하기에 내용 중간에서 잠깐 소개한 모파상의 '목걸이'나, 비토리아 데 시카의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과 같이 이 영화를 본다고 해도 아무런 하자가 없다. 게다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베트남의 상황이 자본주의 체제로 돌입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기에 이는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린 파파야의 향기'와 같이 현대판 신데렐라 유형의 영화를 만든 트란 안 홍 감독에게서 왠지 리얼리즘은 어울려 보이지가 않는다. 특히, 영화를 본 이라면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이 영화는 이야기 줄거리보다는 분명, 장면 하나 하나에서 나오는 강렬한 이미지가 우리를 압도하는 영화이다. 가령 예를 들면, 소년이 살인하기 전 날, 자살을 기도하면서 파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금붕어를 입에 물고 있는 장면이라든가... 괴로울 적마다 코피를 흘리는 시인이 시를 읊조리며,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장면이라든가... 오히려 모든 장면 하나하나는 이렇게 하나의 시적인 형상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범죄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시인이라는 설정 그 자체가 이것을 대변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인과 이 악의 구렁텅이라는 리얼리즘이라는 세계가 어디 어울릴 법하단 말인가? 아니, 그러고도 정녕, 우리는 그를 영화에서처럼 시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젠 우리에겐 머나먼 신화가 되어버린 고대로부터 흔히 시인이란 족속들은 신을 찬미하고, 사랑을 노래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분명 시인이라는 설화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사랑과 순수의 대명사로 구전되어져 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왜 그들이 사랑과 순수의 대명사로 구전되었느냐는 것이다. 사실, 시인이 아니더라도 그 누군들 신을 찬미하고, 사랑을 노래하지 않고 싶겠는가? 그런데 왜 유독, 그들만 그런 영광의 딱지를 부여받았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순수하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는 세상 모든 다른 이들에 대한 예증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세상 모두가 당연히 신을 예찬하고, 사랑을 노래했다면 시인이라는 대명사 또한 필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언젠가부터 우리는 시인에게서 사랑과 순수 그리고 좀 더 나아가 낭만과 희망 대신 고통과 절망이라는 딱지를 부여해 왔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현대라는 곳에서는 그런 시인들이 고통과 절망에 허덕이다 못해, 모두 죽어버렸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순수하기 그지없던 고등학교 적, 나는 친구들과 함께 문학 소모임 비슷한 모임을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절대적인 영향은 그 당시 우리를 휩쓸고 간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뭐, 이 영화야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겠기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여하튼... 그 당시 우리는 키팅 선생을 부르는 학생들의 '캡틴 오 마이 캡틴'에 열광하였고, 그래서 실제로 문학 모임을 결성함과 더불어 교회를 다니며, 창작 연극을 해보기도 하고... 밤새 신과 인간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 보기도 하고, 각자 불같은 짝사랑의 열병에 앓아 괴로워해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마치 영화가 '캡틴 오 마이 캡틴'을 외치며, 키팅 선생을 떠나보내고, 더 이상 자란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듯이, 우리의 시인이었던 시절은 그 때로 모두 끝이 나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때 미처 시인의 고통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키팅 선생은 그렇게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 버린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우리에겐 키팅 선생이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고 실제론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가난 때문이었던지, 아니면 그 무엇 때문이었던지, 어쩔 수 없이, 아니 어차피, 범죄 세계로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은 소년을 범법자로 만들고, 자신이 사랑했던 처녀를 매춘부로 전락시킨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괴로움 끝에 자살을 해버린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이 모든 것을 예감할 수 있었을까? 아마 어쩌면, 자신이 괴로워 할 것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거기에 쉬 적응하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한번쯤 생각해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달리 그에게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가 살고 있는 공간은 모두 사랑과 순수가 가득하여 시인이라는 대명사가 필요 없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 사랑과 순수에 대한 열망만 가득하여 시인에게 그 모든 고통을 전가시켜버리는 세상인 것을... 그러면서도 얼마나 그들은 자신의 타락과 동시에 시인으로서 태생적으로 지닌 자신의 고통을 갈망한단 말인가? 마치 자신이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의 타락을 바라보듯이... 그리고 소년의 타락을 바라보듯이... 게다가 어차피 그들은 자신이 아니더라도 이 험난한 세상에서 순결을 지켜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의 고통을 전염시키는 것이 그들에겐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자신은 한 때 사랑과 순수의 대명사였던 시인이니까... 아니, 소년과 처녀 모두 분명히, 다른 사람이 아닌 시인 그 자신에게서 절망과 고통을 배우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 모든 변명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범죄의 손에 물들었고, 처녀는 순결을 상실했고, 시인은 이미 죽어버렸다.

 

  그렇게 시인은 죽었다. 그리고 이제 소년과 처녀가 아닌 다른 그 누군가들은 시인이 없는 세상에 살아남았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의 마지막 떠나지는 모습은 또 다른 시인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의 떠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진 그곳에 오늘도 또 다른 시인의 죽음이 있을지, 그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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