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6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중심으로 글의 스타일에 관해

 

 

  모임을 통해 처음으로 나는 이번에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접하게 되었다. 사실 오랫동안 문학을 등진 채 (특히, 한국문학을) 살아온 내가 뭔들 읽어봤을까, 스스로 한심스럽기 그지없지만, 여하튼 이번 계기를 통해 그동안 평소 귀에 익었으면서도 굳이 찾아보지 않았던 내 또래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요즘의 문학적인 유행을 나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비평은 개인적 소감을 중심으로 하되, 각 글의 스타일적인 면을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각각 짚어보고, 기호의 여부를 떠나, 개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고 싶다.

 

 

  먼저, 순차적으로 책을 읽기도 해서 그랬지만, 글을 다 읽고 나서도 단연 눈에 띄었던 작품은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였다. 하지만 이 표현은 다소 양가적인 측면이 있기에, 아마 내 비평도 내가 개인적으로 다소 싫어하는 양비론적 비평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사실, 읽기 전 작가 소개부터 눈에 띄었다. 후장사실주의자? 이름부터 조금 거시기한데, 그걸 왜 굳이 작가 소개에 썼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저 후기 사실주의자의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로 넘겼다. 그런데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무언가 분명한 의도성이 다분히 느껴졌다. 일단, 글 자체가 거의 쉽게 읽히지 않는 글이었다. 물론,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숱하게 열거되고, 나열되는 건축가의 이름들과 건축기법 그리고 미술기법에 대해 공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문제는 ‘숱하게 열거되고, 나열되었다.’는 그 방식 자체에 있었다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보통 소설은 가령 그것이 과할지라도 자신이 쏟아낸 지식의 열정을 어떻게든 주워 담아, 수습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아마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책을 통해서 평범한 우리들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지식의 해저 속으로 빠져들어, 다시는 떠오를 수 없거나, 아예 미리 발을 대보고 발밑을 헤아리기 어려워 다가가길 포기해버린다. 그것은 그의 지적인 열거방식이 단순히 열거에서 끝나지 않고, 그 격하게 뿜어낸 지적인 배경들을 그의 글속에서 그가 어떻게든 수습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처음 그 광대한 넓이에 혹해 다가서보려 하지만, 그 깊이에 질색해 슬며시 발을 빼게 된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렇기 때문에 에코의 세계는 중세라는 철저하게 마술적이고, 종교적인 시대로 국한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은 분명히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 이미 중세라는 시대를 ‘암흑’으로 규정짓는 것을 넘어서, 현대가 현대후기를 말하고 있는 시대이다. 왜 모던을 살고 있는 우리가 모더니즘이 아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왜 예술이 예술을 부정하고, 그 부정한 예술을 다시 부정하는 이런 시대에서 우리가 말하는 예술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런 시대에서 문학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이러한 질문이 배경이 된 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이구라는 포스트 모더니스트가 되지 못한, 마지막 모더니스트를 통해 ‘벙커’ 속에 들어간 우리의 자화상을 풍자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김중업과 고든이란 인물을 통해 도시개발로 대변되는 모던주의 건축을 비판하고(김중업), 자르고, 대항하려(고든) 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여기에 박정희 시대의 김현옥이란 인물을 통해 서울의 공간과 이구의 제자 김원을 통해 뉴욕이란 공간의 비교를 통해 또 하나의 극명한 대척점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정말 ‘모르겠다.’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결국 전적으로 이 글이 취한 구성방식 때문이다. 겨우겨우 이 글을 다 읽고서 나는 처음에 작가가 일종의 ‘콜라주 기법’을 소설 속에 적용하고 싶었나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내 눈에 거슬렸던 ‘후장사실주의’란 용어가 번뜩 떠올랐다. 그래서 이제껏 거의 잘 보지 않았던 작가 후기와 작가 인터뷰까지 찾아보면서, ‘후장사실주의’가 뭔지 알아봐야만 했다. 그렇지만 허세 가득한 (개인적인 느낌에 정말로 자뻑과 후까시로 일관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후장사실주의’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영어버전의 위키백과를 뒤적거리며, 대충 파악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요지는 ‘후장사실주의’가 일종의 ‘Neo-Dadaism'이란 결론이었다. 뭐, 사실 남미에서 초현실주의에 반대해서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동아시아로 넘어와 후장사실주의가 됐다느니, 하는 정의가 있긴 했지만, 별로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물론, ‘새로운 다다이즘’에 대해서도 내가 제대로 이해하는 바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 맥락을 따라 나온 백남준의 작품들과 비틀즈의 존 레논의 아내였던 요코의 전위예술에 대한 어설픈 기억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도 20대 때 이후로 거의 소실해버린 기억의 편린일 터이다. 하지만 결국엔 그 모든 예술적 행위들이 상업적으로 변질해가는 예술에 대해 반대하는 일환의 운동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하기에 수백 대의 TV를 (이 게 더 상업적이라 개인적 생각도 있지만)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TV에 갇혀버린 현대인을 풍자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았을 때,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분명히 새로운 시도였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예술이 반예술을 추구하면서 대중들에게 고립되어가고, 오히려 일부 향유층을 위한 예술로 전락해버린 것처럼, 문학이 반문학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달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글의 소재는 이구라는 설정 상 한국인도 이방인도 아닌 대상을 씀으로써, 무언가 아시아적 정서를 배양하려했음은 분명하지만, 그 놀음방식 자체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외면한 서구적인 예술론에서 출발해서 끝났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과정이라면, (작가가 충분히 젊기에) 그래서 작가가 조금 더 아시아적인 한국적인 정서 하에서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나갈 수 있다면, 우리도 세계에 우리만의 문학형식이란 걸 하나쯤 내놓을 수 있겠다는 기대도 품어보게 된다. 마치 일본의 오에겐자부로처럼, 서구의 기독교 사상을 철저히 일본의 신화로 재해석한 그의 방식처럼. 혹은 미시마 유키오의 아시아적인 미적 의식처럼. 하지만 저자가 계속 지금과 같이 허세 가득한 ‘후장사실주의자’란 트레이드마크를 붙잡고서, 대중을 외면하려고 한다면, 실제 ‘후장사실주의자’의 모태가 된 비현실주의의 책들처럼 어느 농부들의 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지돈의 글을 읽고서, 바로 이장욱의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읽고 느낀 점은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평이한 문장과 평이한 구성으로 글을 써서, 읽기는 쉬웠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별로 가슴에 남는 문장이 없었다. 윤이형의 ‘루카’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이 책속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다. 소재는 ‘퀴어’라는 특수한 소재를 담고 있었지만, 근래 유행하는 소재주의 소설과 달리, 철저하게 연애소설이었다는 점이 아마 내 정서와 맞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초주의로 가득한데다 사랑에 다소 냉소적인 정서가 팽배한 내 개인이, 정반대급부인 순정적인 여자정서와 오직 순수한 사랑에 대한 열정 때문에 누군가를 증오할 수 있는 정서의 이 글을 읽었을 때 대비되는 감정선에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누군가를 증오할 만큼 사랑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기존에 윤이형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열정을 이 작품을 통해서 느꼈던 것 같다. 최은미의 ‘근린’의 경우 매우 구성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여러 인물의 배치를 통해 감정을 배제한 문장으로도 묘한 긴장을 일으키는 능력은 애초에 이 소설이 얼마나 구성에 공을 들였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들이었다. 하지만 대개 구성에 초점을 맞춘 글들이 그러하듯이, 이 글이 독자에게 저자가 의도한 빈 벤치에 대한 감동이나 여운을 얼마나 남겼을 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김금희의 ‘조중균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 진부한 설정과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 지나간 세계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름 재밌게 읽혔다. 그 이유는 캐릭터에 대해 생명력을 작가가 잘 부여한 까닭이라고 여겨본다. 손보미의 ‘임시교사’의 경우도 ‘조중균의 세계’와 같이 캐릭터가 잘 살아있는 작품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보다 풍자적인 요소를 갖춘 세련된 소설이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조중균의 세계’처럼 직접적으로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P부인의 내밀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담담하게 표현함으로써 뒷맛의 씁쓸한 풍미를 남기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소재적으로도 지나간 세계가 아닌, 지금의 세계,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에 대한 풍자가 그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본다. 마지막으로, 백수린의 ‘여름의 정오’는 가장 잘 쓰인 전형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지나친 전형성을 싫어하지만, 이 글에서의 전형성은 전혀 그러한 느낌은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아귀가 잘 들어맞으면서도, 내내 흥미를 유발시키는 구석이 있다는 전형적^^; 표현이 좋을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소설이 내 가슴에 와 닿았던 점은 누군가의 생의 안부를 묻는 방식이었다. 우연히 닮은 이름을 뉴스에서 보고서 혹은 갑자기 911테러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형체를 보면서, 죽어간 이를 추모하고, 위태로웠던 이에 대해 걱정하는, 보통 우리네들의 안부를 묻는 방식이 글속에 표현되었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독자를 공감하고, 동시에 독자에게 공감 받을 수 있는 글쓰기 방식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이제 대강 정리를 해봐야 할 거 같다. 처음 의도와 달리 다소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에 대한 평에 치우치다보니, (다소 예감은 했지만) 다른 소설들의 전체적인 글쓰기 방식을 면밀하게 살펴보지 못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근래 내 또래의 젊은 작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글쓰기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음에는 분명한 것 같다. 각자의 방식으로 기존의 틀에 대항하면서, 때론 융화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 비록 여전히 아마추어지만,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내내 아마추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도 주어진 하나의 숙제일 거란 생각을 해보며, 부족한 평을 이만 줄여보고자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미의 이름 -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 배경과 의미를 중심으로

 

 

 

  내 삶의 시기에서 여러 가지 굴곡이 많았지만, 그 모든 굴곡의 계기를 마련해준 결정적인 시기는 아마 신학교 1학년 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특히, 신학교 1학년 2학기 때에 나는 여러 가지 방면으로 내 생각의 기반들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방황의 전조를 스스로 예감하게 되었다. 1학년 들어서자마자 한 달도 채 안 되어 모든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들어간 소위 운동권 동아리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1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스스로 나와야만 했다. 그리고 2학기 때 들어간 동아리도 사실은 그 나물의 그 밥이었다. ‘새날을 사는 사람들’이란 동아리에서 ‘평화의 일꾼들’이란 동아리로의 방향 전환? 이름만 들었을 때는 역시 같은 운동권 동아리였고, 추구하는 바도 1학기 때 들어갔던 ‘새날을 사는 사람들’이란 동아리와 거의 방향성이 같았다. 다만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구멍이 숭숭 뚫린 여백투성이의 동아리였다고 하면 표현이 딱 맞을까? 선배들은 그 전의 동아리 선배들과 같이 신학, 역사, 철학을 위주로 하는 여러 가지 커리큘럼으로 우리들을 학습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학습의 내용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거의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의 주도하에 학습하기를 바랐다. 아니, 실상은 선배들에겐 우리들을 자기들의 생각으로 물들일 만큼 강한 카리스마와 열정이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나와 동기들은 그 아래서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 경우에는 오히려 1학기 때 선배들에 의해 타의에 의해 혹독하게 학습했던 때보다 더 많은 공부를 스스로 해나갈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공부내용이 소위 자유주의라 불리는 현대신학과 포스트모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철학이어서, 지금에 돌이켜봤을 땐 다소 고대와 중세라는 뿌리를 잘라내고서 건너뛴 감이 없지 않아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때문에 스스로 여러 생각의 갈래들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하튼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아래에서 동아리 안에 함께 하던 우리 동기들은 끈끈하게 뭉쳤다. 사실, 다른 동기들이 나만큼 열정을 갖고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 어느 누구라도 어떤 열정과 꿈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동아리 내에 우리 스스로 ‘Holy Club'이라는 모임을 따로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유치하지만, 당시에 우리는 자유로운 학문을 추구하면서도 경건함을 유지하자는 의도로, 감리교도의 뿌리가 되었던 웨슬리 형제의 ‘Holy Club'이라는 모임에서 그 이름을 따와, 그런 모임을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라서인지, 같은 동기들끼리만 모여서 그런지, 처음의 의도와 달리 나중엔 모임에서 여자 얘기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다. 여하튼 그럼에도 처음에는 나름 매 주 책 한 권씩을 정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는 했다. 그리고 그 첫 모임에서 우리가 다루었던 책이 ‘장미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너무 길고 어려웠기 때문이었을까? 거의 제대로 읽어온 사람이 없었다. 내 경우에도 읽어보려 했지만 처음부터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우리는 종교개혁에서부터 갈래를 둔 장로교파의 신학생들이었기에 가톨릭 역사에 대해 거의 피상적으로만 접했을 뿐, 제대로 배워본 적조차 없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가톨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많은 수도원을 전전해온 현재의 나조차도 너무나 국소적인 가톨릭의 역사와 철학을 다룬 이 책을 다시금 이해하는데 꽤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니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가 이 책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저 피상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염불 외우듯 이야기하며, 소설의 구성의 특이함에 대해 흥미를 나타냈던 것으로 기억될 뿐이다. 어리긴 했지만 신학생이었던 우리가 이 정도였는데, 다른 사람은 어떨까? 과연 이 책에 대해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을까? 이 책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는 할까? 아니, 굳이 이해해야 하는 걸까? 종교도 없고, 철학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문학적으로 단순히 풀기에도 이 책은 너무나 종교와 철학이라는 비문학적인 요소가 많다. 그러하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 방대한 책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잘 감이 잡히질 않는다. 분명히 종교, 철학, 문학적으로 그 의미를 나누어서 살펴봐야할 것은 분명하지만, 따로 때어놓고 설명하다보면 그 밀접한 관련성을 놓치게 될 것이고, 같이 엮어서 설명하기엔 너무 방대한데다 내 역량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일단 내 개인적 역량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으로 나누어 설명하되, 나름 밀접하게 관련시켜가면서 이 책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배경은 책에서도 나와 있듯이 교황 요한 22세가 재위했던 14세기 초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 시기는 두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먼저 시기적으로 이 시기는 15세기 중엽 르네상스가 발흥하기 전, 그 태동기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인 아비뇽 유수 이후 쇠약해진 교황 권력에 대해 교황들은 큰 위기감을 느낀다. 이 책에서도 잘 소개되어 있지만, 그 대표적인 예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청빈 사상의 대두이다. 사실 어느 시대나 수도사상은 청빈사상과 관련이 있어왔다. 로마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억압을 끝으로 순교라는 종교적으로 자기 생명을 바친다는 가장 위대한 개인적 헌신이 사라지게 되자,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을 바친다는 의미로 사막에 몰려들게 들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개인적 극기와 청빈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려 하였다. 다만, 초반에는 각자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려던 것이, 여러 사람이 모이면서 공동체를 이루게 되어, 수도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수도회 초기 역사는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기도가 노동이며, 노동이 기도다.’라는 격언과 함께 자급자족을 유지해가면서 자신들의 기도의 삶과 성서읽기의 삶을 실천해나가려고 했던, 청빈 그 자체의 삶을 유지해나갔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거룩한 성직자들의 노동을 만류하면서, 수도원 스스로 노동을 포기해가면서 부패해갔다. 물론, 주변의 농민들의 성직자에 대한 헌신은 아마도 로마의 멸망 이후 5-6세기부터 지나치게 확대된 교회 권력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유럽이 봉건제도의 사회가 되면서, 종교에 대한 권력이 황권에서 교권으로 넘어간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교회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그 고유의 기능을 넘어서 변질되어지게 된다.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먼저는 교황권력의 확대로 인해 일종의 각 지역대표의 세계종교회의였던 공의회의 성격이 변하게 된다. 그전까지 교회는 교회의 교리적이거나 역사적으로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공의회 소집을 통해 문제를 회의하고, 해결해나갔다. 그런데 교황권력의 확대로 인해 교황무오설이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교리가 등장하면서, 민주적인 공의회의 권력이 무색해져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종교재판의 성격도 변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종교재판은 다소 틀린 교리에 대해 이단으로 파문을 할지라도, 그것이 말 그대로 파문일 뿐이지, 실제적인 형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그전까지는 어떤 지역의 대표가 교리적 문제가 있으면, 그 지역에서 목회를 못하게 하는 것으로 끝이었지만, 교황권력이 무소불위가 되면서 한 번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면, 그것은 이제 극심한 고문 끝에 화형이라는 죽음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교황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11세기에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면죄부를 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발언을 했더라도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었겠는가? 왜냐하면 교황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였던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성서에서 이르길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그가 지상에서 축복하면 하늘에서도 축복할 것이고, 지상에서 저주하면 하늘에서도 저주할 것이라는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에 대해 내가 앞에서 ‘교황무오설’이 전혀 출처도 없는 사상이라고 비아냥거리기는 했지만, 실제 그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고, 지금도 가톨릭에서 ‘교황무오설’의 근거는 이러한 성서의 글귀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찌됐든 이러한 모든 교황의 절대적인 권력도 십자군 전쟁의 연이은 패배와 함께 점점 퇴색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비뇽유수라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출발한다. 아울러 여기에는 지금까지 언급된 두 가지 내용이 엇물려,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먼저는 이러한 교황의 절대 권력에 반대하여 등장하게 된 프란체스코회의 극단파에 대한 내용이고, 여기서 꼬리를 잇게 되는 중세 말기의 뜨겁게 논의된 그리스도의 ‘사용권’과 ‘소유권’에 대한 문제, 그리고 ‘교황무오설’과 ‘공의회우위설’에 대한 논쟁이다.

 

 

  소설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그리스도의 ‘사용권’과 ‘소유권’에 대한 문제는 프란체스코회의 극단적 청빈파에서부터 문제가 비롯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말한 대로 모든 수도회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삶을 온전히 따른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하기에 ‘청빈’이라는 것은 너무나 그들에게 당연한 교리였고, 특히 탁발수도회였던 ‘프란체스코’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명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의 교권이 썩을 대로 썩어있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극단적 청빈파의 경우 기존 사제의 성찬례를 인정하지 않는 사례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로선 쉬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성찬례’라는 자체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대신해 포도주와 떡을 나눔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예배의 중심이다. 그런데 사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그 성찬례를 거부한다는 것은 기존의 교회와 결별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성찬례를 집전하는 사제를 공격하고, 교회를 점거한다면, 어떻게 기존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명백하게 교황에 대한 도전이며, 나아가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죄가 성립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요한 22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자신의 교권을 확립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청빈 사상을 실천하는 프란체스코회 25명을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그 중에 4명을 화형시키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이 책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프란체스코의 청빈파에서도 극단파는 소수였을 뿐이고, 대부분은 온건파였다. 그래서 이에 대해 당시 프란체스코회의 총장이었던 미켈레는 교황과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아비뇽으로 향하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교황을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이탈리아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요한 22세를 ‘공의회우위설’을 근거로 공의회에 고발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후 프란체스코의 청빈파의 지도적인 노수도자였던 카잘레의 우베르티노는 1329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요한 22세의 나름의 사정이 있기는 했다. 당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교황권으로 인해 아비뇽에서의 교황청은 재정이 바닥이었다. 때문에 요한 22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교권확립과 더불어 교황청의 재정을 복원시킬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더욱 프란체스코회의 청빈파가 눈에 가시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요한 22세는 가톨릭 교회사적으로도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다. 때문에 요한이라는 교황의 이름이 그 이후에 사용되는 요한 23세가 등극하기까지 약 7세기의 시간이 필요했다.

 

 

  종교적인 배경은 이쯤으로 하고, 철학적인 배경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어찌됐든 이 책의 키워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그것도 존재하지 않는 ‘시학’ 2장 ‘희극’에서의 ‘웃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실 이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이라는 가설이 있기 때문에, 철학이라기보다는 문학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하기에 이 부분에 관해선 차후에 더 다루어보기로 하고, 먼저 중세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정리해보는 것이 책을 이해하는데 한결 도움이 되리라 믿어보며,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사실 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중세는 말 그대로 ‘암흑의 시대’이다. 그러하기에 철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굳이 중세를 공부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된다. 너무 종교적인데다가, 그냥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로저 베이컨(물론 중세 사람이지만), 데카르트로 넘어가도 철학을 이해하는데 하등의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라는 시대는 유럽의 6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1000년의 시간이다. 이 긴 시간을 역사 속에서 지운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며, 때문에 의미 없다고 말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 말이 안 되는 의미일 것이다. 즉, 어찌됐든 간에, 중세에서도 철학은 지속되어져 왔다. 물론, 그 중심에는 ‘플라톤’ 사상이 축을 이루고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개념은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진리’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할 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초기 기독교의 사도 시대가 끝난 후 교부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성 어거스틴’의 경우 플라톤의 이러한 사상을 엮어 그리스도의 사상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유독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의 경우는 교회와 줄곧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 10-11세기 유대 철학자들과 이슬람 철학자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 책들이 대거 유입되어 들어오기 전까지, 거의 금서에 가까웠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중세시대의 학자들이 전혀 접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강한 ‘플라톤주의’의 색으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배격했다는 것뿐이다. 실제로 10-11세기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들이 대거 유입된 이후에도 교회는 그와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그래서 13세기에 모든 신학과 철학 사상의 중심이었던 파리대학과 옥스퍼드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공연하게 강의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미 파리를 중심으로 한 대학에서의 지적인 열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열망에 가닿아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하는 토론의 중심엔 늘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근거로 하는 논증법이 공공연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철학의 기저를 이루는 ‘형이상학’의 문제였다. 플라톤만 해도 자연보다는 자연 우위에 있는 ‘이데아’라는 개념을 상정하여, 기독교 형이상학과 원만하게 병행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플라톤 철학에 반대하여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그러한 ‘이데아’를 부정하고, 자연 개체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었다. 때문에 모든 자연의 사물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분류를 묶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근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자연과 만물에 초월한 신에 대한 개념과 대립되게 된다. 때문에 교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것은 어떤 면에서 쉬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미 공공연하게 퍼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언제까지 금기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등장한 것이 중세의 스콜라 철학이다. 스콜라 철학은 간단하게 말해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란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철학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의미한다. 즉, 언제까지 철학을 금기시할 수 없던 교회에서 입장을 바꾸어 철학과 신학의 종합을 시도했던 것이 ‘스콜라 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스콜라 철학’의 대표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리고 그가 당시 모든 학문의 중심지였던 파리 대학의 철학교수라 활동했던 시기가 13세기 말엽이었다. 물론 그곳에서의 그의 삶은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그의 노력으로 인해 철학과 신학의 타협은 13세기 말엽에 극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철학과 신학을 따로따로 분리시켜서 자연에 대해선 철학, 나머지 영역에 대해선 신학이라고 설명하고서, 종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책의 배경이 되는 14세기에 이르면 철학적으로 신을 입증하려는 모든 시도 자체를 거부하는 ‘유명론’이 등장하기도 하고, 동시에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연과학적으로 신을 입증하려는 영국의 ‘경험주의’ 사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주인공의 스승인 윌리엄이 영국의 경험주의를 대표하는 ‘로저 베이컨’의 제자란 사실은 이 책이 실제적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논외로 하더라도,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주인공의 스승을 통해 투영한 이 책의 사상의 근저가 철학적인 이성보다는 입증 가능한 경험 하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당시의 종교적인 현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우리와 가장 흡사한 시각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부터 사실상 거의 결론과 다름없는 본론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왜 하필 이 책은 많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중 ‘시학’에 대해서 다룬 것일까? 그리고 그것도 존재하지도 않는 ‘시학’의 2부 ‘희극’편 ‘웃음’에 관해서 다룬 것일까? 사실, 시학을 읽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본격적으로 ‘비극’에 관해서 말하기 전, 서두에 시학이 다른 문학과 달리 운율을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소재를 다룬 측면에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모방하여 나타낸다는 측면에서, 그 궤를 달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비극’과 동시에 ‘희극’에 대해 비교하여 다루고 있다. 그리고 ‘희극’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웃음’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비극’과 달리 어떻게 이야기 구성과 담화로 발전했는지는 모른다고 나오며, 다만 고대 아테네에서 집정관들의 허락 하에 희극이 성행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아테네의 희극은 아마도 메가라라는 지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을 남근사상과 함께 디오니소스 축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즉, 일종의 열광과 도취 상태의 의식인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온 것으로 유추함으로써 희극을 비극보다 다소간 덜 발전된 형태의 극적인 형식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실제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을 그때까지 가면을 쓰는 방식으로 인간의 왜곡된 형태와 추악한 형태를 웃음이라는 가벼운 형식으로만 다루었을 뿐, 진지하게 발전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진정으로 인간의 본질을 다루기 위한 복합적인 서사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비극이었다고 그는 생각한 듯싶다. 실제로 당시 고대 그리스의 희극엔 일종의 이솝우화와 같은 이야기는 존재했지만, 3대 비극 작가와 같은 쟁쟁한 작가들이 등장하지는 않았다. 즉, 이 소설에서 가정하고 있는 ‘시학’ 제 2장에 나오는 ‘웃음’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소설적인 상상력이라는 말이다. 사실 이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먼저는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적인 철학사상이 중세시대에 ‘스콜라 철학’이라는 종합의 형태로 타협가능 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키가 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순히 자연의 사물 개체를 분석하고 분류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서열을 나눔으로써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대상인 자연이라는 가장 최상위 그 위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소설의 핵심에 대한 이해이다. 사실, 지금 이 소설에 대해 역량이 되지 않아, 평론이 아닌 배경 소개를 하고 있지만, 그렇게 된 이유는 이 소설이 소설적 가치를 스스로 드러내기보다는 너무나 많은 종교적 철학적 관심을 열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이게 정말 소설책인지, 아니면 중세철학책인지, 실제와 허구 사이에서 길을 잃게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 존재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장 ‘희극’편의 ‘웃음’에 관한 이야기는 말 그대로 어디까지나 가정이며, 상상이기에, 이 책이 문학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왜 하필 ‘웃음’에 관한 이야기였을까?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잡설들을 열거하였지만, 이 글의 핵심은 ‘웃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이 책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가 진짜로 웃었느냐, 웃지 않았느냐, 뭐 이런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사실 그 이야기는 교회 종탑 꼭대기에 천사가 몇 명 서있을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소비적인 논쟁일 뿐이다. 그러하기에 이 책의 핵심은 왜 저자가 존재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부 ‘희극’편에서 ‘웃음’에 관해서 다루고, 이야기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사실, 많이 돌아왔지만,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엔 금욕과 정절 등으로 점철된 중세에 대해 ‘웃음’으로 풍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즉, 이 글에서 ‘웃음’이란 ‘금욕’이란 키워드로 대변되는 중세시대의 종말에 대한 예견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대한 새로운 키워드로써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끝으로 장미라고 불리는 이름도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결국 책에서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로 국한시키는 것보다는 ‘웃음’이라는 더 큰 키워드로 풀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P.S.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과 관계없이 종교적 측면에서도 이 글은 내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 있었다. 특히, 프란체스코의 청빈파와 세속적인 교황의 대립이라는 측면이 내 개인적인 맥락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아마도 나는 스무 살 적 방황을 시작할 때 프란체스코의 청빈파가 주장하는 그러한 맥락 하에 있었던 것으로 회고해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청빈파의 맥락은 ‘진리’와 ‘전통’이라는 맥락보다는 ‘진실’과 ‘개혁’이라는 맥락에 늘 서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또 다시 아이러니한 것은 결국 프란체스코회는 여전히 존속하고 그 ‘청빈’의 사상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지만, 결국 청빈파의 극단세력은 사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결국 교황이라는 다소 세속적인 종교집단이 진리라는 명목 하에 자신의 ‘전통’을 고수해왔고, 그로인해 결국엔 지금의 온건한 프란체스코회를 포용하여 그 청빈사상을 존속시켜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내 개인이 종교로부터 돌아서게 된 것은 내 극단적 성격으로 인해 ‘진리’와 ‘전통’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하려는 의지를 갖지 못하고, 모든 ‘진리’와 ‘전통’을 세속화되었다는 시각으로 싸잡아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세속화 된 것은 인간이지 ‘진리’와 ‘전통’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청빈파의 극단적인 무리들은 사제들을 교단에서 몰아세웠고, 나는 교회를 떠나버렸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종교의 속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사람들이 끊임없이 목말라하고, 동시에 고뇌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의문부호를 달아보며, 길고 길었던 잡설을 마쳐보고자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5-06-18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랫만에 장미의 이름˝과 재회 군요. 며칠째 밤을 계속 새워 멍..한 상태라..마지막 즈음, 웃음에 왜 희극이냐- 를 나름
답해야 겠다, 했는데 정리가 안되는 군요.대충 말하자면 비극은 지옥과 현실을 웃음은 희망,스스로 구원이기 때문에 교회
가 힘을 발휘 할 능력 상실을 상징. 장미란 여성과 행복, 스스로 찾는자유 질서 .있어서는 교회에 반하는(수도원에서 특히)
때문에 [장미 의 이름]이란 제목 이 된 것이 아닐까...강제하기 위해 비극과 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필요악 인 셈이죠. 희
극이야 말로 선한 힘, 뭐,그래서 피니스아프리카에 (세상 끝의 도서관 온갖 세계의 책은 전부 다 있다는 수도원의 장서각)
는 불꽃을 피우리라~ 로 그럼 범인은? ...안 알랴줌....ㅎㅎㅎ 이미 아실테죠?!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오래되어
이 얘기가 맞는지도 자신없는데..최근 절대지식 세계고전 을 읽어둔 것도 조금 이랑, 몽원님의 페이퍼글을 읽어 조합해서
결론 끌어내기..해본..것에 불과..^^ 그럼 곧 이 번 주도 끝나가는 군요..마지막 월말까지 마무리 잘하시고 장마,메르스 에
건강 잘 챙기시길..또 정신 좀 차리면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은하루 되세요~

몽원 2015-06-22 03:55   좋아요 0 | URL
좋은 댓글로 깔끔한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글을 쓰느라, 여기 자주 들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젊은작가상 받은 작품들과 시집 읽고 서평 쓸 생각이라.. (젊은 작가상 작품집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 님 서재에도 있어서 어차피 말씀드리려 했지만^^;) 여하튼 금방 찾아뵙겠습니다. 꾸벅~
 
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커포티 선집 4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In Cold Blood - 범죄심리 소설의 발전단계와 방향에 대한 개인적 질문들

 

 

 

 소설을 평하기 전, 먼저 내 기억 속 추리소설에 대한 편린 몇 조각을 꺼내보고자 한다. 군대를 제대하고서였다. 허리 디스크로 의병제대를 해서, 외할머니 댁에서 요양을 해야 했다. 이미 외할아버님도 돌아가시고, 외삼촌들도 모두 도시로 상경해, 외할머님만 계시는 적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물론, 외할머니 밭일을 소일거리 삼아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생각보다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님의 잔소리에도 꿋꿋하게 거의 종일 한량처럼 누워서 책만 읽었다. 그중에서도 그때 가장 많이 읽었던 책들이 추리소설들이다. 딱히 읽을 만한 책들이 외할머니 댁에 없기도 했다. 그나마 외삼촌들의 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들이 추리소설들이었다. 아가사 크리스티, 시드니 셀던 등등. 그리고 이전의 기억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코난 도일의 명탐정 설록 홈즈 이야기 정도? 이 때문인지 내 기억 속에 추리소설이라 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정도의 용도쯤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처음에 이 글을 읽을 때엔 정말 진도가 나아가질 않았다. 굳이 내가 이런 소설을 읽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게다가 거의 500페이지를 넘어가는 분량, 언제 다 읽을지 눈앞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첫 장 약 120페이지 분량의 ‘그들이 살아있던 마지막 날’을 넘어가자, 생각보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틀 만에 책을 다 읽었다. 사실, 앞으로 다가올 지겨움에 대한 지레짐작으로 첫 장이 거의 하루 걸린 셈이고, 나머지 장들은 매우 흥미로워서 하루 만에 다 읽은 셈이다. 왜냐하면 이 글이 읽으면 읽을수록 단순히 추리소설이 아닌, 아니 정확하게 추리소설이 아닌, 범죄심리학 소설로 내게 읽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내게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 아닌 범죄심리학 소설로 읽힌 것일까? 저자인 트루먼 카포티 스스로 밝혔듯이 이 소설이 저널리즘 접근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아니면 이 소설이 픽션이 아닌 논픽션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일까? 사실, 두 가지 다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특수한 범죄라는 대상이란 논픽션을 소재로 소설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저널리즘의 접근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소재를 재구성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구성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수많은 범죄의 프로파일 중 유독 형사나 탐정들의 추리력이 빛을 발하여 범인을 잡은 논픽션 소재를 저자가 찾아 골라서 소설적으로 재구성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 소설은 그런 소재를 골라잡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그런 전형적 추리소설의 재구성에도 관심을 보이질 않는다. 여기서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재구성이라 함은 사건의 주인공인 탐정이나 형사의 1인칭 시점으로 독자가 들어가, 범죄자의 단서를 찾아가는 형식의 추리소설 구성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항상 마지막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독자는 1인칭 주인공처럼 일반적인 추리력으로 범죄자의 단서를 찾아 확증하게 되지만, 소설은 그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추리소설은 일반적 독자의 추리력을 뛰어넘는 반전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추리란 세계의 매혹에 완전히 함몰하게 만드는 것이 그 역할이며 임무인 것이다. 물론, 근래 추리소설은 이런 고전적인 전형적 구조를 탈피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CSI수사대라든가, 기타 미드를 보더라도 이는 분명히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범죄도 범죄자도 전형적이지 않을뿐더러, 때문에 그 수사방법과 과정도 단순한 추리로는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미드나 장르소설에도 역시 반전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반전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과학적인 수사방법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독자에게 또 다른 영역의 추리적 카타르시스를 대신 선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이러한 현대적 장르의 추리소설 범주에도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엔 어떤 반전도 전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과학적 수사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건 자체의 해결도 거의 기막힌 행운에 의한 우연의 산물에 의해서 해결되고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심지어 이 소설에서는 사건 해결을 위한 복선조차도 거의 생략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냥 사건의 나열과 기록 연대기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면 차라리 더 나을까? 하지만 다 읽고서, 개인적으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렸다. 그 때문인지 이 소설이 어쩌면 ‘죄와 벌’의 현대판 범죄심리 소설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모든 접근방식과 문체 그리고 소설의 주제마저도 전혀 다른 별개의 소설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범죄심리학이란 관점에서 두 소설을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자못 흥미로울 것 같아, 지금부터는 두 소설을 비교하면서 이 소설에 대해서 평해보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라스콜리니코프란 젊은 청년이 한 노파를 살해하게 되면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범죄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약 700-8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의 긴긴 내용 가운데 팔 할이 범죄를 저지른 동기에 대한 아주 자잘하고 치졸한 자아성찰에 관한 이야기란 사실이다. 즉, 이 소설은 인간이 죄를 저질렀을 때 야기되는 여러 가지 심리적 문제와 본질적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는 다른 특별한 등장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로 주인공과 관련한 가족을 제외하고는 구원이라는 상징적 존재로서 소냐라는 등장인물, 그리고 재판과 관련된 인물들이 전부이다. 사실, 이 인물들마저도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내적인 고민을 위해 거의 배경적으로 저자가 끌어들인 인물들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 즉, 이 소설은 순전히 인간의 범죄 심리의 근본과 양심에 관한 문제의 본질인 선과 악에 대해 질문하기 위한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자체에서 이런 범죄적 인간의 유형들은 그에 따른 질문과 함께 점점 더 심화되고 진화해간다. 초기의 ‘죄와 벌’에서의 라스콜리니크프를 넘어서서,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는 ‘신’이란 상징적 존재로서의 아버지 살인을 꿈꾸는 이반 표도로비치란 인물로, 그리고 ‘악령’에서는 이미 그러한 모든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 악마적 초인으로써 소녀를 아무런 양심 없이 강간하기까지 하는 스타브로긴이란 인물까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 인간은 점차 도덕적인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거의 그 종국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든 도덕이란 인간의 한계조건을 벗어난 인간들에게 있어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딕이라 불리는 히콕, 그리고 페리 스미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 딕이란 인물의 경우에는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고전에서도 주인공으로써 전면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지만, 그 주변인물로써 딕과 같은 인간 유형은 자주 등장해왔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추잡한 인간군상의 표상으로써, 그러하기에 우리 자신의 한 얼굴로써, 딕과 같은 인물은 종종 소설 속에서 그 기능을 충실해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페리 스미스와 같은 인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름의 도덕적 관점은 형성하고 있지만, 살인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없고, 그 동기마저 불분명한,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지옥에서 보낸 한 철'과 같은 악마적인 시를 쓴 랭보나 소녀의 강간에 대해 주로 다룬 듯한 '말도로르의 노래'를 쓴 로트레아몽처럼 미치광이 천재이거나 예술가로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대중에 포함되는 우리이기에 그냥 자연스럽게 미친놈이라고 낙인을 찍으면 되는 것일까? 이 둘 다 아니라면 대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면 좋을까?

 

 

  'In Cold Blood'에서 작가는 페리 스미스를 다루면서, 중요한 두 가지 접근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맥노튼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더럼 규칙'이다. 먼저, '맥노튼 법칙'이란 정신질환의 증후를 보이는 피고인 범죄자가 도덕적으로는 몰라도 법적으로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다면, 정신이상을 인정하지 않는 규칙이다. 반대로, '더럼 규칙'은 단순하게 피고가 저지른 불법 행위가 정신병이거나 정신적 손상의 산물이라면 형법적으로는 책임이 없다는 관점이다. 재판 과정에서 페리 스미스의 정신감정을 맡았던 존스 박사의 경우는 페리 스미스를 '더럼 규칙'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렇지만 판사와 다른 모든 배심원들은 페리 스미스를 '맥노튼 법칙'에 의해 규정짓고, 사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법칙 모두 더 이상 어떤 도덕적인 잣대나 양심적인 화두에 대해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우리 시대에 한 인간에 대한 판단은 더 이상 도덕적인 화두가 아니라, 매우 심리적이거나 법적인 문제로 이전했음을 이 글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글속에서 저자는 많은 부분 페리 스미스의 성장과정과 그에 따른 나름의 도덕적 가치관을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인의 심리적 인과과정은 감춰져 있다. 그냥 갑자기 페리 스미스는 자기 삶에서 이제껏 누구보다 친절하게 대했던 느낌을 준 클러터 씨를 살해한다. 그것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물론, 글속에선 이 부분에 대해 두 가지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하나는 페리 스미스의 정신상태가 이중으로 분열되어, 살인하고 있는 자아와 생각하는 자아가 동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말만 많고 허세 가득한 겁쟁이 딕에게 진짜 사나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누군가에 의해 어설프게 심리가 분석되어져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설명 다 페리 스미스의 살인의 인과과정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설령 그렇게 설명이 된다하더라도, 이후에 등장하는 앤드루스와 같은 인물 유형에겐 이러한 두 가지 심리분석은 적용조차도 될 수가 없다. 평소에 모범생으로 살던 뚱뚱보 앤디(앤드루스의 애칭)가 자신의 부모형제를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하리라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도 마치 파리를 죽이는 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는 것이 똑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는 앤디의 정신 상태에 대해 그 누가 쉽게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이 문제에 대해 정신분열의 문제로 돌려놓고, 모든 도덕적인 책임을 심리적 문제로 몰아세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소설 속에선 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 도덕 대신 법의 문제로 환치시킨다. 왜냐하면 '신'이란 절대적인 선 대신 다양한 선과 가치관을 인정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절대적인 도덕적인 잣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도덕이란 문제는 이제 개인의 문제일 뿐, 더 이상 사회적 문제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일반적 함의가 담긴 도덕의 잣대를 법이란 틀에 담아 대신 활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페리 스미스와 앤드루스는 '맥노튼 법칙'과 '더럼 규칙'에 의해서 규정지어질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총체적인 삶의 자리를 다루고 고민하는 문학이란 자리에서도 이 규칙이 통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 질문은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질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연적인 존재 성찰에 있어서 악의 문제는 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하기에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치열하게 다루어져야만 하며, 그에 따른 새로운 질문들이 끊임없이 야기되어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제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써 정착된 범죄심리란 장르의 소설이 거의 추리소설이란 틀로 고착화되는 경향은 다소 안타까운 현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이런 장르의 거의 초기 형태라 말할 수 있는 이 글만 보아도 벌써 5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글보다는 더욱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그 저변에 깔린 비인간성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는, 아니 고민하는 소설들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비록 도덕의 잣대도 뭣도 다 사라진 시대라 할지라도, 그 화두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되새겨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아직도 나는 그런 소설들에 대한 기대의 끈들을, 미련들을 포기하지 못하고서, 이렇게 자꾸만 되물어보고 싶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뿌리 이야기 - 2015년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숨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뿌리 이야기 - 아프고 느린, 그래서 어쩌면 너무 오래된 접근방식에 대한 의문

 

 

  저자가 글속에서 밝힌 대로 뿌리라는 오브제가 지닌 한계 때문이었을까? 글속 화자의 남자친구의 뿌리에 대한 깊은 천착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처음 쓰일 때부터 일정부분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될지 예정된 부분이 있었다. 뿌리를 통째로 뽑힌 어느 한 인간의 자아성찰적인 고백과 그를 바라보는 한 여인의 뿌리 찾기, 이 글은 이렇게 두 남녀의 뿌리라는 존재 찾기의 작업을 실제적인 뿌리를 사용한 설치미술 이야기로 오롯하게 풀어내고 있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글속 남자주인공이 거대하고 무거운 뿌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수십 개의 못을 박고, 촛농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처럼 아릿하고 느리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방식이 뿌리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방식이라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글을 읽는 내내 이러한 방식에 대해 구태의연하다고, 그래서 무언가 아쉽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일까? 물론, 여기엔 내 개인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다른 철학적 접근방식과 선입견이 작용한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이 글을 온전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지금부터 나는 글을 내 나름대로 재구성해본 후, 읽는 동안 떠올렸던 내 개인의 뿌리의 접근방식과 대비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먼저, 글을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저자의 뿌리를 묘사하는 세밀한 방식이었다. 마치 실제로 뿌리를 마주대하고 있는 착각이 일게끔 김 숨 작가는 뿌리에 대한 묘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던 부분은 거의 첫 서두에 나오는 복숭아나무 뿌리에 관한 묘사이다. 사람의 얼굴 표정과 비교하면서, 그 중에서도 특별히 모나리자의 얼굴 표정과 비교하면서, 복숭아나무 뿌리에 빗댄 인간 감정의 복잡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을 처음부터 빠져들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자국 나아가, 포도나무 뿌리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천근성을 지닌 뿌리에 대해 접근한다. 천근성을 지닌 뿌리는 깊게 뿌리를 내리는 심근성의 뿌리와 달리 넓게 퍼지는 뿌리를 의미한다. 즉, 어떤 면에서 언제든지 쉽게 뽑힐 수 있는 존재의 불안정성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이 글속 화자와 그리고 그 남자친구와도 같이. 물론, 어떤 면에서 집요하게 뿌리에 집착하는 글속 주인공의 남자친구는 심근성의 뿌리의 특질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고아였기에, 태생부터 뿌리가 뽑혀진 인간이 지닌 안정에 대한 강박을 오히려 더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즉, 주인공의 남자 친구는 글속 화자보다 오히려 훨씬 더 천근성의 특질을 지닌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속 천근성의 특질을 지닌 포도나무 뿌리라는 오브제와 글속 남자친구 그리고 글속 화자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결국, 글속 화자의 경우도 일제 강점기 때 종군위안부가 됨으로써 원치 않게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통째로 뽑힌 고모할머니의 손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손금은 남자친구의 포도나무 뿌리 작품에 ‘남귀덕’이란 고모할머니 이름으로 고스란히 되살아나, 그녀와 남자친구를 정신적으로 연결시켜주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글은 뿌리라는 오브제와 글속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잘 맞물려진 구성과 의미를 갖춘 글로 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내 개인의 의문은 서두에도 밝혔지만, 그 접근방식에 있어서의 구태의연함이다. 즉, 또 다른 접근방식들에 대한 내 개인적 질문들이다.

 

 

  첫째로, 뿌리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읽는 동안 내 머리에 스친 생각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읽었을 때 알게 된 덩이식물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덩이식물은 감자와 고구마와 같은 종류의 식물들로 나무들과 달리, 따로 줄기와 뿌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즉, 감자나 고무나 그 자체가 뿌리이면서 동시에 줄기이고 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식물들의 또 다른 특징은 나무 한 그루에 뿌리 하나 줄기 하나라는 방식으로 따로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는 나무와는 달리, 덩이라는 그 말 자체가 일컫듯이 뿌리가 수평적으로 엉켜 하나의 군집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식물들을 의미한다. 즉, 감자와 고구마는 뿌리 하나에 수십 개의 감자와 고구마들이 뒤엉켜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뿌리에 대한 개념은 깨지게 된다. 왜냐하면 뿌리가 더 이상 존재의 근원을 찾는 접근방식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표현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선 더 이상 뿌리에 대한 물음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덩이식물이라는 한정적인 존재방식의 이야기이기에, 극단적인 설정이다. 그렇지만 뿌리에 대한 천착을 저자가 글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면, 심근성과 천근성이란 뿌리라는 설정보다 더 근원적인 이런 접근방식에도 물음을 가져야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두 번째는, 포도나무 뿌리라는 대상이었기에 글을 읽는 동안 떨쳐내기 힘들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들이었다. 무엇이냐면, 나무의 뿌리가 아닌 잘린 가지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사실, 신학생이었기에 신학을 포기하는데 있어 나는 내 나름의 화두와 이유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내가 찾았던 것은 성서에서 나온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의 비유에서였다. 성서에서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포도나무이기에 그 줄기에 접붙여지지 않은 가지는 말라비틀어질 것이라고, 그 때문에 잘려서 불태워질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 길로 가기를 거부하는 이라면 과연 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게 될까? 내 경우엔 줄기가 아닌, 말라비틀어지고 잘려서 불태워질 가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내 자신이 너무나도 말라비틀어져, 그 이유로 목마른 가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까닭으로 잘리는 가지는 나무 전체가 말라비틀어지지 않게끔 하는 희생의 제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의 제물로 불타오르는 표징의 불꽃은 참 포도나무에게 자신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생생한 증거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지극히 모순이고 역설이다. 그렇지만 애초에 이러한 자기 부인이라는 모순적인 자기 정체성의 논리로 자아를 구축한 내게 있어서, 뿌리에 대한 이 글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많았다. 왜 그토록 집요하게 뿌리에게만 집착한단 말인가? 잘리고 버려진 줄기와 가지는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란 말인가? 물론, 이 글이 처음부터 천근성이란 뿌리의 특질을 통해 쉽게 흔들리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쓴 글이기에, 이러한 물음은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와 같이 너무나도 다른 물음의 전제를 지닌 인간에게 있어선, 이 글의 그러한 점들이 너무나 구태의연하게만 느껴졌다. 만약 폭을 조금 더 넓혀 나 같은 인간에게도 질문할 수 있는 거리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자꾸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전체적으로 이 글에 대한 평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매우 잘 쓴 글이고, 잘 짜인 글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뿌리라는 문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무겁다. 그 이유로 늘 한 가지 방식으로 정형화되어 접근되어졌고, 질문이 던져져 왔다. 사실, 뿌리란 문제를 어떻게 쉬 가볍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하지 않을까? 조금 더 다양한 방식과 물음들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러한 방식이 글을 방만하고 산만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여, 어쩔 수 없이 정공법을 택했다면, 최소한 남녀 주인공의 다소 신파적인 설정은 피했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뿌리의 문제로 재고해볼 수 있도록... 아니면 뿌리 오브제 그 자체에 조금 더 집중하여, 자연스럽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뿌리의 문제로 환기하여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은 어땠을까? 잘 쓴 글이고, 좋은 글이었기에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아, 딴지 아닌 딴지를 자꾸 걸어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소한 풍경 - 순수한 사랑의 원형에 대한 고찰

 

 

 

 한국 문학에 있어서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내게 있어서, 박범신 작가의 ‘은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노년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욕구에 대한 고민 앞에서 마치 내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고, 때문에 나는 ‘은교’에 대한 품평을 쓰면서 내 사랑에 대한 갈망과 음심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거의 텍스트의 맥락과 관계도 없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이후 박범신 작가의 다른 작품을 특별히 찾아본 적은 없다. 어쩌면 이번 ‘소소한 풍경’의 경우에도, 모임에서 연말행사로 도서교환 이벤트를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제비뽑기로 ‘소소한 풍경’을 뽑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박범신 작가의 최근작인 이 책을 굳이 사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사실 언제나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는 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들에 애당초 무관심한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박범신 작가의 경우는 ‘은교’에 대한 강렬한 기억 때문에, ‘소소한 풍경’이 제비뽑기로 뽑혔을 때 내심 만족스러운 기분이었고, 그 때문인지 쉽게 다가설 수가 있었다.

 

 

 처음 이야기는 소설가이자 전직교수였던 저자에게 옛 제자인 ㄱ으로부터 뜬금없이 온 전화통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 웬 생뚱맞은 인사말인가? 거의 10년 만에 전화해서 이게 어디 꺼낼 법한 대화인가? 게다가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라니? 너무 끔찍하여 상상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렇지만 저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이야기에 어떤 홀림을 느낀다.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는 곧 저자가 아닌, 저자의 제자 ㄱ으로 넘어간다.

 

 

 ㄱ은 저자인 소설가의 제자 중 특이한 제자였다. 저자가 기억하는 그녀의 소설 ‘우물’은 말 그대로 몽환의 덩어리였다. 때문에 합평 시간에 독설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소설에 대한 동기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단답형일 뿐, 도통 소통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소설을 쓰는 것보다는 젊은 시절 내내 한 남자에게만 골몰했다. 남자1이라는 존재, ㄱ에게 있어 남자1은 반짝이는 청춘의 모든 것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모든 존재가 사라지고 그와 그녀 자신만 남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다. 불우했던 그녀의 유년시절의 기억인 오빠와 소녀시절의 기억인 아버지란 거대한 존재를 그녀는 그렇게 남자1을 통해 모두 상쇄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사랑이 지속될 순 없는 법이다. 아니, 연애라는 관계에서 결혼이라는 독점과 소유욕이 지배하는 관계 속에 놓이게 되면, 젊은 날 믿었던 모든 사랑이라는 감정의 허울은 지워지고, 결국엔 남는 것은 상처뿐인지도 모른다. 최소한 ㄱ에게는 그랬다. 자신의 아버지와의 유년의 고리인 선인장을 남자1이 싫다고 말하는 순간, 그 모든 젊은 날의 환상에 금이 가기 시작하리라는 사실을 어찌 그녀가 예감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이라 믿었던 남자1이 자신을 그저 소유하고 독점하기 위해 안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청춘의 찬란한 봄날 어떻게 미리 감지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남자1은 그녀가 꿈꾸던 모든 사랑을 짓밟고 능욕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남자1과 ㄱ의 관계는 끝이 난다. 그렇게 남자1과 이혼하게 된 후 ㄱ은 다시 그녀의 유년의 장소였던, 오빠-아버지-어머니가 같은 절벽으로 떨어졌던, 그래서 도망쳤던, 구소소로 되돌아온다. 그곳은 그녀에게 있어선 오빠-아버지-어머니란 이름의 묘지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그곳으로 되돌아간 것일까? 그 묘지에서 스스로 옛집에 혼자 살면서 마치 스스로에게 유배라는 형벌이라도 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지만 도리어 그러한 유배생활이, 그러한 그녀 스스로의 감금이, 혼자라는 그 삶이, 그녀는 왜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혼자 사니 참 좋다고. 하지만 그녀는 곧 동네 근방에서 물구나무를 하루 종일 서고 있는 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어느새 ㄱ은 ㄴ에게 물구나무서기론 죽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둘은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서 그녀는 말한다. 둘이 사니 더 좋다고. 왜일까? 그녀가 남자1에게서 받은 상처를 ㄴ에게서 받지 않게 되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미리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남자1과 함께 살면서 찔린 가시는 그녀 손가락을 꿰뚫고 들어가 영원히 각인될 상처가 되었지만, ㄴ에게는 그 가시가 속으로 감춰져 있었음을 어떻게 그녀는 감지할 수 있었을까? 그저 마치 모든 운명처럼, 예정처럼, 모두 우연에 기인한 탓일까? 아니면 서로를 향한 홀림이었을까? 결국, 둘은 깊은 관계를 맺게 되고, ㄴ은 묘지 같은 그녀의 터전에 낙엽을 쓸고, 지붕을 수선한 후, 샘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그 둘은 서로가 하나가 되는 깊은 관계를 갖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섹스란 말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그 언어가 갖는 의미가 너무 한정적이다. 아니, 그것에 대한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러하기에 ㄱ은 스스로 ㄴ과의 그 행위를 하나의 ‘덩어리’라 규정짓는다. 그리고 그런 그 둘의 삶에 ㄷ이 어느 날 자기 몸채만한 큰 가방을 들고 찾아온다. ㄱ은 또 말한다. 셋이 사니 진짜 좋다고. 왜 그랬을까? ㄱ과 ㄴ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절정에 이르는 그 순간에 ㄷ이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왜 말리지 않았을까? 아니,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둘의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ㄷ을 그들의 품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ㄱ과 ㄴ 그 둘에게, ‘자기들끼리만, 너무해요!’란 ㄷ의 외침이 팡파르이고 종소리가 될 수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누군가 함께 향유하고 있는 도락에, 특히 성적인 도락에, 다른 누군가가 저와 같은 소리를 한다면, 그것은 외마디 비명이거나 혹 지탄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그 외마디 비명에 놀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이를 쫓아내거나 소외시키지 않아 왔던가? 그런데 ㄱ과 ㄴ은 어떻게 ㄷ의 그 소리를 팡파르와 종소리와 같은 울림으로 받아들이고, 같이 하나가 되어 더 큰 원을 그리고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이것이 일반적인 현실에서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그 다음 삶은 또 어떠했던가? 너무 행복해서 갑자기 어느 날 연탄가스로 함께 공동자살을 꿈꿨던 ㄷ, 그리고 어느 날 그 둘로부터 도망치려했던 ㄴ, 그리고 마지막 절정의 순간 날개를 달아 우물 속으로 추락해버린 ㄴ!!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ㄴ이 ㄱ의 집으로 들어와 샘을 파기 시작한 그 기점으로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ㄱ과 ㄴ이 ‘덩어리’가 되고, ㄷ이 또 다시 들어가 셋이 함께 ‘덩어리’가 되어, 마지막 절정으로 치닫기까지. ㄱ의 묘지에 샘이란 생명을 남겨두고서, 자신은 절정 가운데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샘으로 날아 들어간 ㄴ, 그렇지만 그 꼭짓점엔 ㄴ의 날개에 버튼을 눌러줄 ㄷ이 필요했다. 아니, 어쩌면 내 개인적으론 이곳에서 ㄷ의 노래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으랴...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는 못 잊네.’ 이 노래가사처럼 평생 동안 심장에 남겨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겨울 그 셋이 함께 누린 열락의 세계는 이생이라는 생애에서는 죽음이라는 절정에 들어서지 않고서는 담보되지 않는 불가능이기 때문일까? 마치 마침표를 찍듯이 우물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ㄴ의 등을 ㄷ이 꼭 누르는 그 순간, 이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실상 끝나버린다. 그렇지만 데스마스크로 되살아난 ㄴ은 마치 불멸의 사랑의 증표처럼 남아, ㄱ과 ㄴ의 삶에 끝없이 솟아오르는 샘의 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해 본다.

 

 

  사실, 이야기를 나름 재구성해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재구성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ㄱ의 관점에서 소설의 전반부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에는 광주혁명에서 죽은 형과 아버지를 가슴 속에 가시로 숨긴 ㄴ의 이야기도 없고, 북한에서 어머니와 오빠와 넘어와 어린 나이에 중국인 사씨에게 능욕당하고 오빠를 뺏긴 ㄷ의 가시 이야기도 없다. 그렇지만 애초에 이 소설이 소설가 자신의 말대로 서사가 없는 소설을 지향했던 이유로 서사를 잡을 수 없는 까닭도 있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서사를 중심으로 탄탄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소설이 아닌, ㄱ과 ㄴ, 그리고 ㄷ이 완전하게 합일되는 순간인, ㄴ이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그 순간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즉, 그 순간에 대한 묘사 그 자체로 완성을 구가하고자 쓴 소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하기에 처음에 다 읽고서 나는 무언가 아련하고 먹먹한데 그 감정을 표현할 길이 당최 없었다. 그리고 품평을 하기 위해 글의 서사를 떠올려보려 했을 때도 전혀 서사 자체가 떠오르지 않고, 그 절정의 장면만 떠올라, 다시 발췌독으로 ㄱ,ㄴ,ㄷ에 대한 개인적 서사를 다시 읽어야만 했다. 아니, 거의 다시 내용을 훑어야만 했다. 대체 왜일까? 왜 쉽사리 나는 처음에 읽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을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먹먹한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그리고 왜 읽은 지 한 달도 채 안된 소설의 모든 서사를 깡그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오직 그 절정만을 기억하게 된 것일까? 지금 이 순간도 이 기묘한 현상을 설명하기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최대한 내 정직성을 담보로 한 내 마음속 소리에 귀를 기울여, 지금부터 설명해보고자 한다.

 

 

  먼저, 내 마음의 내밀한 소리를 듣기 전, 나는 이 소설이 분명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거라는 예상을 가져본다. 사실, 줄거리를 재구성함에 있어서도 나는 내내 의문투성이이었다. 그래서 거의 내용의 재구성 전반이 질문형으로 되어있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 품평 글쓰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의문형과 질문형으로 줄거리 자체를 재구성할 정도는 아니다. 즉, 그만큼 내 개인에게도 이 소설의 지향점들은 도무지 와 닿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소설의 인과구성의 개연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거의 깡그리 그 체계를 무시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만큼 많은 우연과 몽환으로 점철되어져 있다. 게다가 사회 상식선에서 남자 한 명과 여자 둘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난감하다. 물론, 이보다 더한 성적인 실험을 하는 소설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이 행위 묘사 자체에 대한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이유로 정말 야하게 이 행위들을 묘사했다면, 나는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엔 저자 표현대로 단순히 섹스라고 표현되는 단어로 담기엔 한정적인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저자의 표현방식대로 일단 ‘덩어리’라고 하자. 그런데 그 ‘덩어리 됨’이 왜 둘에서 셋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을 안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둘에서 셋으로 확장이 되어 원이 되어간다면, 셋에서 넷, 넷에서 다섯으로 확장되어가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 물론, 소설이 점점 그렇게 확장되어 가다보면, 가뜩이나 서사도 없는데, 점점 더 사공이 많아져 산으로 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소설이 셋으로 확장된 관계가 넷에서 다섯으로 확장되어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소설이라는 점을 굳이 상기시키고 싶어서였다. 즉, 이 소설은 관계에 대한 소설이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 중에서도 아마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둘이 아닌 셋, 넷, 다섯으로 확장되어가는 덩어리 같은 사랑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 소설 가운데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는 가시이다. 특히, 저자는 ㄱ,ㄴ,ㄷ, 이렇게 세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서 가시를 안으로 숨긴 선인장 비유를 들고 있다. 그리고 굳이 상징성을 찾자면, ㄱ은 아버지-오빠-남자1로 이어지는 남자에 대한 가시, ㄴ은 광주혁명에서 비롯된 아버지-형이라는 가시, ㄷ은 북한에서 넘어왔다는 가시와 더불어 자신을 능욕한 것도 모자라 오빠를 공안에 팔아넘긴 중국인 사씨를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가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이 가시들이 이 소설에서 굳이 꼽자면 서사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뭐랄까? 가시들 자체는 어떤 면에서 진부한 면이 있다. 저자가 굳이 ㄱ이라는 축을 통해 (그 축이 아마도 남자로 대변되는 모든 폭력의 가시를 숨긴 우리를 대변하고 있으리라 추정해보지만 여하튼), ㄴ의 광주혁명의 가시와 ㄷ의 북한이라는 가시까지 하나로 덩어리져 품어보려 했다고 한정짓는다면, 이 소설은 그냥 일종의 풍유적 상징성을 지닌 사회소설로 보아야할 것이다. 물론, 이 지점에 대해 내 개인이 부인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다만, 내 개인이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감에 있어서는 이면에 숨겨진 이러한 코드가 드러나기엔, 이 소설이 너무 소설의 절정의 한 순간 장면으로 집약되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그냥 도무지 사회적 소설로 읽히지가 않았다. 실상, 내가 소설의 내용을 재구성하려 했을 때도 그 때문인지 ㄱ,ㄴ,ㄷ의 어떤 가시의 내용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저 가시가 안으로 숨겨져 있다는 강렬한 기억과 더불어, 그 가시들이 응축되었다 폭발되는 지점으로써, 날개로 돋아나는 장면인 ㄴ의 우물에서의 추락장면이 내내 떠올랐을 뿐이다. 왜 ㄴ은 우물 안에 떨어짐으로써 남겨진 ㄱ,ㄷ의 샘이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왜 그 순간을 더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다른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셋으로 확장된 사랑이란 게 대체 이 세상에서 가능한 사랑이란 말인가?

 

 

  내 개인적으로 박범신 작가가 종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 사랑에 관해 둘이 아닌 셋이어야만 완벽한 사랑을 이루고, 그 중에서도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그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사상과 그리스도 사상에 입각하여 이 소설이 쓰였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하기에 그저 순수하게 문학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바라보고 싶다. 일단, 소설이라는 공간 하에서는 어떤 실험도 가능하다는, 그러하기에 어떤 사랑도 가능하다는,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가능성은 작가의 바람이며, 그 바람은 독자에게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이며 샘물이라는, 이러한 관점으로 이 소설을 바라보고 싶다. 그렇다면 내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자는 어떤 면에서 철저하게 ‘늙음’의 미학이란 관점 하에서 사랑을 재해석하여, 욕망과 소유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근원적인 사랑의 형태에 대해 고민하고 고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둘이 아닌 셋, 넷으로 확장될 수 있는 ‘덩어리 되어감’의 사랑에 대해선 일정부분 수긍할 수 있다 치더라도, 왜 누군가의 희생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일까? 굳이, 사랑의 불멸에 대해 말하진 않더라도, 무언가 더 오래 지속 가능한 사랑에 대해 고찰할 필요는 없었을까? ‘자기들끼리만, 너무해!’란 소설 속 대사로 ‘사랑의 관계가 단순히 둘이란 법은 없다!’하고 팡파르와 종소리를 울린 것처럼, 사랑의 시간도 단순히 영속이거나 순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다변적 사고로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은 없었을까? 꼭 순간으로 완성되는 사랑만이 심장 속에 남아 잊을 수 없는 걸까? 우리 생이란 한계 때문에? 하지만 이런 숱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나는 미리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침표가 없는 여운은 없다는 사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