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단의 샛별 - 2014 신춘문예 당선소설집
한국소설가협회 엮음 / 한국소설가협회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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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로 간 파이어니어 - 포스트모던 글쓰기에 대한 소고

 

 

  모던이란 시대를 지나, 포스트모던이란 작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현대적인 글쓰기란 무엇일까? 너무 거창한 화두일지는 모르겠지만, ‘달로 간 파이어니어’란 짧은 단편을 다 읽고서, 내 안에 생긴 질문이었다. 아주 생소한 소재, 매우 간결하게 관념을 지워버린 문체, 그리고 분절된 의미들... 이런 세 가지 소스를 잘 엮으면, 아마도 이 글과 같은 포스트모던한 세련된 글이 될까?

 

 

  먼저, 앞에서 언급한 생소한 소재에 관한 부분이다. 사실, 생소한 소재라는 그 자체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 글쓰기에서 환영받을만한 조건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글이라는 것이 누군가 이야기한 것처럼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생소한 소재 자체가 우리에게 특별한 경험의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생소함에 경험이 부재되어 있다면...? 물론, 개인적으로 나는 이 글을 쓴 이세은이란 젊은 작가를 모른다. 그러하기에 이 작가가 실제로 이러한 비슷한 경험을 근거로 하여 썼다고 한다면, 지금부터 내가 쓸 글들은 역으로 진실이 부재된 잡설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실이 어찌됐든, 경험의 부재를 가정으로 하여 나는 내 평의 논리를 구성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경험이 가정된다면, 차후에 내가 파고들어갈 ‘간결한 문체’와 ‘분절된 의미’에 대해 논리를 감히 펼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매우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나로선, 이 글속에 경험을 공감하기에 쉽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내가 시체를 치워봤다거나, 아니면 이와 유사한 직종에서 일 해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는 그저 동물을 도살하는 일을 해보았고, 그러한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부패된 포유류를 몇 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또 다시 자연스럽게 인간의 죽음과 살인욕구에 대해 관념적인 접근을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내 자신이 이러했기 때문일까? 깨끗하게 관념이 배제된 문체 속에서 나는 생소한 소재가 갖는 경험의 부재를 여실하게 느끼곤 한다.

 

 

  글에 지나친 관념은 독이 된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이란 의미 자체는 이미 ‘탈관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당연히 글쓰기에도 적용되어 글속에 ‘관념’ 자체가 어찌되었든 상관이 없다는 논리를 지지해 준다. 동시에 ‘관념’이 내포한 ‘의미’에도 그러한 논리는 적용된다. 그렇다면 글쓰기에 가장 중요시되는 요소는 무엇이 될까? 그것은 묘사이다. 관념이 깨끗하게 배제된 간결한 묘사. 때문에 여기서 ‘경험’이나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애초에 ‘관념’과 ‘의미’를 배제한 글쓰기에서 그 ‘관념’과 ‘의미’를 지탱해 줄 ‘경험’과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그 안에도 나름의 ‘진실’과 ‘의미’를 담보할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진실’과 ‘의미’가 없다면, 애초에 ‘글쓰기’ 자체가 ‘무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 논리가 작가의 ‘진실’과 ‘의미’가 분리된 글 자체 내에 ‘진실’과 ‘의미’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글’이라는 그 자체에 가장 충실한 논리이고, ‘글’이 스스로 지닐 수 있는 최상의 ‘권리’이자, ‘자유’이다. 하지만 그러한 ‘권리’와 ‘자유’ 속에 ‘책임’은 고스란히 배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글 쓰는 자에게 분리된 ‘글’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까닭이다. 결국, 책임은 읽는 ‘독자’에게로, 그 ‘독자’가 내리는 ‘해석’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진실’도 없고, ‘의미’도 없는 글을 대체 ‘독자’가 어떻게 해석한단 말인가? 그리고 해석한다고 해도,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니, 그냥 심심풀이땅콩이라고 해도 누가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의 구조는 사실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져 있다. 시체를 치우는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글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지극히 사소한 감정과 관념이 배제된 묘사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글속에서 누구도 ‘의미’를 포기할 순 없는 법이다. 그래서 작가는 작중인물들의 무료한 일상을 깨뜨릴 대척점으로 ‘달로 간 파이어니어’와 ‘올리비아 밴슨’이란 인물을 이야기 곳곳에 끼워 넣는다. 정말 말 그대로, ‘끼워’ 넣는다. 왜냐하면 여기엔 어떤 치밀하게 구성된 ‘논리’나 ‘관념’이 필요 없는 까닭이다. 그냥 그 자체로 아마도 대개의 독자들은 그 두 대척점 사이와 간극과 염원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 간극과 염원을 치밀하게 논리와 의미로 채워간다는 게 더 이상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분절된 언어로도 충분히 우리는 이를 눈치 챌 수 있고, 오히려 분절되어 있기 때문에 두 대척점이 자연스러운 까닭이다. 여기서 어떻게 새삼스럽게 새로운 ‘의미’와 ‘관념’을 말할 까닭이 무엇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우리의 분절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져 있는 것을...

 

 

  사실,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글쓰기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떤 한편으로 분명, ‘글’ 자체에 무한한 자유와 권리를 주는데 지지하고 있는 포스트모던주의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일까? 역으로 이러한 생경한 소재를 전면적으로 내세워 묘사에 치중한 글쓰기를 표방한 글들에 허무함을 느끼곤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글쓰기 속에서 글 자체가 지닌 ‘자유’와 ‘권리’를 얻기 위한 몸부림과 생존의지를 느끼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사실, 포스트모던이란 말도 ‘모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절된 글쓰기도 전형적 글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뿌리에 대한 염원과 동시에 어떤 염증도 없이 분절되기만 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맨 처음 누군가 시도했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 많은 이러한 시도가 있어왔고, 이제는 너무 익숙할 만큼 이 방식이 존재한다면, 조금 더 글속에 치열함과 진실을 시도해보는 것도 작가정신이 아닐까? 그것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히든, 그러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 진정한 작가정신이란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잠깐, 감히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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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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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기형도의 수많은 시들 가운데 나는 이 시와 10월이란 시를 유독 좋아하였다. 하지만 10월의 경우, 시의 1절에서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이후, 2절에서의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란 구절이 언제나 내 마음 속에 걸림돌이 되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것은 기형도란 시인과 내 속에서 꿈꾸고 있는 시적 자아가 충돌을 일으키는 지점인 까닭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서 시는 언제나 수평선 너머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이거나 혹은 완전히 모순적으로 내 개인의 내적 자아를 할퀴고 도려내는 열망인데, 기형도란 시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일 뿐인, 추악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평가였던 고 김현 선생님의 말을 빌면, 이것은 너무나도 도저한 어둠이다. 그 때문인지, 그의 시들은 대부분 춥고 어두운 밤 겨울의 날씨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나마 추억을 기념하는 그의 가을의 시들조차 얼마나 황량하기 그지없는지... 언제나 죽음의 편에 서있기만 하다. 그럼에도 왜 내 젊은 날 나는 자석처럼 기형도의 시에 이끌렸던 것일까?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그 도저한 어둠속으로...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훌쩍 흘러, 어언 십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시어 한 구, 한 구에서 총성을 듣는다. 마치 내 관자놀이에서 터지는 극대화된 쾌감처럼 혹은 절망처럼... 내가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을 그가 갔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의 어둠이 그의 감당하기 벅찬 겨울의 긴 터널을 지나 봄빛을 기다렸다는 듯이 분질러져, 또 다시 다가올 계절에 관한 희망을 머금고 있는 까닭일까? 하지만 그 희망은 나뭇가지에서 툭, 툭 떨구어진 눈발처럼 지면에 닿으면 금세 사그라질 물기를 가득 머금은 슬픔과도 같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나는 그 눈발을 관조하는 대상이거나 혹은 상상하는 한낱 이방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처럼, 나는 모든 눈발을 훌훌 털어낸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오래된 습관이거나 관념뿐인 것이다. 그래도 계절은 다시 오고, 나는 죽은 나뭇가지 위에 우연히 새 한 마리가 내려앉는 꿈을 꾸거나 혹은 결국엔 툭 분질러져버린 가지가 썩어 그 위로 이끼들이 자라나고, 그 이끼들 틈새로 온갖 잡초들이 피어올라, 언젠가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나길 너무나도 간절히 망상하고 있다. 그 추악하게 말라비틀어진 죽은 가지의 날렵함을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말을 빌자면,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거추장스러운 무엇을.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드는 청년들의 욕망 속에서, 그 같은 종류의 쾌락 속에서... 내 젊은 날의 길바닥을 뒹굴며 토악질을 하던 그 구토물 속에서... 그 한 가닥의 연민을, 나는 본다. 내 속에서, 그리고 기형도의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 속에서.

 

 

  끝으로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를 복학한 후, 기형도를 읽고서 썼던 시를 여기에 덧붙여 두고 싶다. 그 시를 통해서 언젠가 다시 읽을 기형도에 대한 미련을 여기에 남겨두고자 한다.

 

 

 

기형도를 읽다

 

 

 

아주 조금씩

그렇게 무겁게

내어뱉은 읊조림들로

깊은 전철역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길은 언제나

바람이 맺혀 있었다

 

 

검은 외투를 부여잡으며

거리로 뛰쳐나오면

푸르른 하늘에 비친 어둠

무서워...

하지만 검은 외투는

때묻지 않은 잿빛으로

오래 닳고 닳을 수가 있어

 

 

그토록 푸른 하늘을 지나

다시 깊은 낭하로 들어서면

바람이 검은 외투에 맺혀

내내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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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살기 온우주 단편선 2
곽재식 지음 / 온우주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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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살기 - 잘된 이야기, 담화란 무엇일까?

 

 

  너무 오래간만에 읽은 또, 뜻밖에 너무 재미있던 소설이라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보통의 경우, 글을 읽고 나면, 글의 전체적인 맥락과 그림이 잡히고, 그 다음 그 글에 대한 비평의 질문들을 다듬어가기 마련인데, 이번 경우와 같이 시간에 쫓겨서 읽은, 그런데 너무 재미있었던 글에 대해서 평하기란 여간 난감하기만 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이 경우엔, 지금과 같이 글을 써가면서 이 글에 대해 비평을 해나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듯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글에 대해 내가 비평하기 까다로운 또 다른 이유는 이 글이 지금까지의 시적인 형상화 작업을 담아내려 했던 단편들과 달리, 하나의 이야기 그 자체로 글을 풀어내는 장편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이 왜 내게 그토록 재미있고 잘된 글이라고 느껴졌고, 또 그 때문에 왜 비평하기가 까다로워진 것일까?

 

 

  첫째로, 서두에도 잠깐 읊었지만, 이 글이 하나의 잘 짜인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것도 어떤 시적 형상화라든가, 어떤 교훈을 억지로 담아내려고 하지 않은, 이야기 그 자체로 승부수를 건 글이라는 점에서 이 글은 여타 다른 소설보다 더욱 소설의 본질인 이야기 구조 즉 담화 자체에 충실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맨 처음 이 글을 읽어내려 갈 때는, 조의 우랑의 충직함과 고구려라는 사회 구조의 모순을 대비시키면서, 현재 우리 사회에 대한 풍유적인 글이라고 예상하고 읽어내려 갔다. 그런데 이야기가 중후반 부를 넘어가면서 또 하나의 의로운 대인이라 할 수 있는 “안국군”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꼬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여기에 정당한 법제도로 대변되는 고구려라는 사회와 야만성을 대변하는 숙신족이 교묘하게 대비되면서, 이야기의 갈피를 어디로 잡아야 할지 더욱 어려워졌다. 그리고 솔직히 이 부분에는 묘한 민족적 감정도 뒤섞여, 글의 어떤 명확한 방향을 의도적으로 흩트리는 점도 있다. 어찌됐든 이런 양극의 모순 속에서, 글이 더욱 모순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초두부터 의인으로 대두되던 “조의 우랑”과 “안국군”의 어떤 인간적인 면모의 부각에 있다. 사실, “조의 우랑”의 경우, 어떤 면에선 마지막까지 이 부분이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믿는 고구려의 법대로 의롭게 행동했을 뿐인데, 너무나도 억울한 일들을 지속적으로 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이 글의 또 다른 측면에서 의인이라 말할 수 있는 “안국군”을 계략에 빠뜨려, 억울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물론, 여기엔 “안국군”의 잘못이 크기는 하다. 그는 그의 형수를 너무나 연모하여, 그것이 잘못인지 알면서도, 형수의 사치와 개인적 호사로운 생활을 묵과하였다. 아울러, 고구려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으로 숙신족에 대해 너무나 가혹한 처사를 행함으로써,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많은 원한들을 샀다. 이 때문에 그는 “조의 우랑”의 계략에 말려들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 때문에 그 계략에 대해 변명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조의 우랑”의 모든 행위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하기엔 “안국군”의 고구려에 대한 행적과 충심은 너무나 절실한 진심인 까닭이다. 때문에 우랑은 한 여인에게 시를 통해 읊게 함으로써 안국군에게 경고하지만, 안국군은 이를 무시하고 지나친다. 왜냐하면 안국군이 비록 개인적인 모순은 있다 할지라도, 고구려에 대한 그의 충심은 진심이기에, 그는 스스로 부끄러울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의 이런 지나친 충성심에 대한 떳떳함은 스스로의 덫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충성심 때문에 숙신족에게 너무 가혹했고, 또 그 떳떳함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너무 자만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조의 우랑”도 그러한 부류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아마도 “안국군”의 이런 성격을 더욱 잘 알아, 계략으로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안국군”의 고구려에 대한 충심은 과거의 우랑 자신과 같이 진심이건만, 그는 그의 개인적 원한으로 인해 한 나라의 너무나 커다란 한 인물을 모함에 빠뜨려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벼슬길을 마다하고 숙신족과 함께 산속의 동물을 사냥하며, 생을 연명해 간다. 그리고 그 어느 해 너무 추운 겨울 날, 동물 한 마리 잡기도 어려워져, 그가 죽인 “안국군”이 다스리던 단로성으로 다시 복귀한다. 거기에는 오랜 세월 그가 처음 단로성을 왔을 때 구해준, 바로 그 때문에 이 모든 복잡한 사건의 발단이 된 숙신족의 한 여인이 이제는 목소리를 잃은 벙어리가 된 채 바둑알을 귀에 걸고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를 알아 본 그 둘은 마치 이 모든 사연의 설움을 풀어내기라도 할 듯이 한참을 부둥켜안고 서러워 우는 것이다. 한바탕 덧없는 긴 생의 걸진 놀이마당을 끝내고자 하는 엔딩 신처럼.

 

 

  부차적으로, 이 글이 잘된 글이라고 여긴 두 번째 이유는 개인적으로 읽어 내려감에 있어서 역사적 배경지식이 크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하게 읽혔다는 점이다. 이는 글쓴이의 충분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검토와 적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글이 그러한 점이 부족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 담론을 숙고하기 위한 소고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점에서 그럴만한 개연성을 글 안에 담아내기만 한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소설적 이야기 형식 속에서 역사라는 틀을 빌려,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줄 수만 있다면, 소설은 충분히 그 기능을 다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다만, 그러한 이유로 마지막 부분에서의 감동적인 삽입은 개연성이란 측면에선 다소 부족해 보이는 지점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이 글이 현대의 배경이 아닌 과거의 역사란 모티브를 가져다가 쓴, 그리고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현재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나라의 설화를 풀어가는 전통적인 방식을 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마지막 부분은 하나의 한풀이나 살풀이 혹은 한바탕 걸지게 논 놀이마당을 끝내는 뒤풀이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덧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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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2015-01-14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졸저의 작가 곽재식입니다. 심도 있고 훌륭한 글에 진심으로 감사 말씀 올립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글 읽다 보니 한가지 기억나는 것이, 이 책으로 출판되기 1~2년 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내려고도 준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재미있었던 것이 그때 출판사에서 같이 읽으셨던 분들이 여자는 안국군이 더 멋있다, 남자는 우랑이 그래도 더 멋있다로 성별로 양분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제가 글쓰기 시작할 때는 우랑이 그래도 착한 주인공역할, 안국군은 어쨌거나 그래도 악당 역할로 정해 놓고 시작했는데,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살을 더해서 꾸미다 보니, 나중에 독자님들이 보시고 말씀해 주실 때에는 안국군도 나름대로 비극적인 주인공 느낌이 난다고 하셔서, 그 점도 재밌었습니다.

몽원 2015-01-14 15:36   좋아요 0 | URL

먼저, 저자가 친히 읽으주시고 칭찬해주시니 영광스럽고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 글을 읽었을 때는 수도원에서 몇 개월 살다가 잠깐 내려와서 수도원에 올라가기 전 참가하던 문학 모임에서 합평작으로 이 글을 선정해서, 휴가나왔다 급하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모임 앞두고 한 두세 시간 전에요^^;; 그래도 재밌게 읽었던 탓에, 나름 재밌게 글을 써내려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죄송한 것은 그 때가 2년 전인데 책이 아직 출판되지 않았던 탓인지, 제가 수도원에서 내려와 급했던 탓인지, 직접 책을 구입해서 읽지 못하고, 모임에서 누군가 올려준 필사본인지, 아님 인터넷 주소에 올라온 글인지, 하하;; 한글판으로 올라온 글을 프린트 해서 읽은 점이 좀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책은 웬만하면 사서 보는 게 예의일 텐데 말이죠.^^;

여하튼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꾸벅
 
체리 향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호마윤 에르사디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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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향기

 

 

그래 아마 이란 영화였을 거야.

제목이 체리향기이었던가?

여하튼 한 사내의 이야기였어.

짙은 콧수염을 달고 있는 남루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으려고 발버둥치는

그런데 마치 무슨 코믹영화처럼 감독은

그 사내의 죽음을 녹록히 허락지 않는 거야.

그렇게 실의에 빠져 허무해 보이던 사내가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들의 자질구레한 부탁들을

전혀 거절하지 못하더군.

그렇게 상황은 자꾸 이상하게 꼬여가고

마치 사내의 삶은 그 사소한 책임감들로 인해

오래도록 지속될 것처럼만 보였어.

그런데 사뭇 진지한 영화였기 때문이었을까?

끝내 사내는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서

아무 미련도 없이 홀로 관속으로 들어서더군.

대체 혼자서 관속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죽으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을 그 비좁은 공간에서 누워있더군.

때마침 체리나뭇가지가 바람에 잘게 흔들리는

그런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이야.

그러더니 어느새 불현듯 사내가 관 속에서 일어서는 거야.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리고 다시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더군.

아마 사내는 바람에 잘게 흔들리는 체리나뭇가지 사이로

은은히 불어오는 상큼한 체리향기를 맡았던 것 같아.

그와 동시에 무언가 격렬한 생의 희망을 붙잡았겠지.

그러니까 제목이 체리향기 아니었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말이야.

그토록 긴 시간을 죽음을 위해 기꺼이 견뎌왔던 사내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죽음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너무 허무하고 어처구니없지 않아?

체리향기가 대체 뭐라고?

그런데 말이야 난 체리향기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요즈음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면 자꾸 이상스레

눈알이 시큼거려 또 미친놈 마냥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아카시아향기와 당최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리움들이

마구 솟구쳐 오르는 거야.

하지만 포악하게 포대 한 자루에 한가득 담아

얼굴을 파묻고 마구 집어 삼키던 그 그리움들이란 건

누군가의 말처럼 사뭇 죽음과 닮아 있어야 하는 것

그런 것 아닐까?

그런데 난 왜 그 잔혹스런 죽음과도 닮은

그 찌릿한 그리움들 속으로

이렇게 살아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정녕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는

정녕 더 이상 내 것이고 싶어도 내 것일 수 없는

그 그리움들이 대체 뭐라고?

 

 

결국, 난 아카시아향기를 맡으며 이렇게 살아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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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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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 벽이란 화두 혹은 신이란 벽 그리고 천국에 관한 물음

 

 

  어릴 적 문고판으로 접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 제대로 된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접한 것은 21살 적 성공회 수도원에서였다. 당시, 종교와 사랑문제 등,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나는 성공회 수도원에서 몇 개월 동안 머물렀었다. 그렇지만 1달 앞으로 나가온 군대영장 때문에 결국엔 그곳에서도 떠나야만 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쉬 떠날 수 없는 발걸음 때문에 나는 2박 3일 정도의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한 피정을 신청하고, 홀로 방안에 틀어박혔다. 말이 수도원이긴 하지만, 일종의 기독교 수도공동체와 가까운 그곳에서 피정, 그것도 혼자서 방안에 틀어박혀서 금식에 가까운 피정을 하는 일은, 그 당시 30년 가까운 그곳의 역사에서 처음이었다고 한다. 뭐 여하튼, 막상 피정을 신청하긴 했는데 그 좁은 방안에 혼자서 무얼 해야 할지, 당최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막연하게 보내고서, 문득 책장에서 눈에 보이는 책 한 권에 눈길이 갔다. <죄와 벌>, 그 수도원에 들리기 전 혼자 여기저기 방랑을 하면서 무작정 사두었던 책들 중 하나였다. 약 800페이지의 빽빽한 글씨들, 그 당시 갈 곳 없던 내 마음과 뒤섞여, 너무나 길고 길었던 그 하루 흡사 사투를 벌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렇지만 고통을 쾌락으로 즐길 수 있다는 인간의 권리와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은 당시 감수성 예민했던 내게 막연하게나마 알알이 박혔고, 후에도 끊임없이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던 듯싶다. 때문에 군대를 제대하고서 나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카라마조프가 형제들>과 그의 단편 중에 가장 그를 잘 대변하고 있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찾아 읽게 되었다.

 

 

  아마 신학을 전공했고 아직도 그 선상에서 헤매고 있는 내 개인의 관점이기에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대한 해석은 지극히 종교적일 것이란 예상과 전제를 먼저 해두고 싶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사상서 비슷한 아니, 사상 나부랭이 비슷한 1부 <지하>에 대한 내 개인의 해석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벽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두고 싶다. 벽!! 실제로 소설 속에서도 등장하는 벽에 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은 일종의 화두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잠깐 생각해 본다. 물론, 소설 속에서 벽은 신 혹은 자연의 진리와 가까운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 벽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인간 군상들이 더불어 표현된다. 벽을 부수려는 자, 벽에 기대어 안주하는 자, 혹은 벽 주위를 한없이 맴도는 자... 그리고 결코 부셔질 수 없는 벽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러한 까닭으로 끝까지 품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자들... 아니, 어쩌면 지금의 나의 이런 묘사에도 모순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벽을 부수길 원하며 동시에 부술 수 없음을 수긍하며, 벽에 기대어 안주하길 원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하며, 벽 주위를 쥐새끼처럼 한없이 맴돌면서도 동시에 벽 앞에서 면벽하면서 벽의 의미를 묻는, 그런 복잡한 유형의 인간일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에게 있어 벽은 ‘신이란 화두’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는 왜 그 신이란 화두를 가슴속에 깊이 떠안고 고통스러워하면서, 동시에 그 고통의 쾌락을 즐기면서도, 마지막 순간엔 침 뱉을 수밖에 없던 것일까? 그리고 지하로, 히키코모리라기보다는 반항자로서 언더그라운드로 침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2부 <진눈개비에 대하여>서 그는 1부 <지하>로 가게 된 그 이유에 대해 문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주인공인 <나>는 당시 24살의 나이로 관청에서 말단관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심술궂은데다 자기의 지적인 능력으로 인해 남을 깔보는 경향마저 있기에 주위에 친구가 없다. 게다가 그 나이에 벌써 몽상가로서 혼자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취미마저 있어, 그가 남들을 먼저 찾는 일도 거의 드물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도 인간인지라, 내리 몇 달 혼자 공상에 처박혀 살 순 없는 까닭에, 그의 직장상사인 안톤 안토니치라는 지인과 그의 동창생인 시모노프라는 지인이 있기는 했다. 이야기는 바로 이 중 시모노프라는 그의 동창생을 찾아가면서 부터 시작된다. 지겨운 몽상의 나날 끝에 찾아온 고독을 참지 못하고 찾은 그의 예정 없던 이 방문은 우연히도 주인공 자신이 배제된 일종의 동창회 자리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동창생 중 가장 그의 증오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즈베르코프의 환송회에 대한 기획회의 자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서 그냥 돌아서면 될 것을, 어떻게 돼먹은 인간인지 이 주인공 <나>는 기어코 그 환송회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사실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란 사실은 논외로 치고, 관청의 일개 말단관리로서 그 자리에 참석한다는 자체가 경제적으로도 그의 한 달 치 봉급이 드는 무리한 자리였다. 그럼에도 가불까지 받아가면서 그가 기어이 그 자리에 참석한 이유는 그의 숙적 즈베르코프를 골탕 먹이고 싶은 그의 못돼먹은 심술 때문이었다. 그런데 골탕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골탕에 무시까지 당한 쪽은 주인공 그 자신이었다. 때문에 1차로 비싼 레스토랑에서 자리 이후 2차 기방까지 갈 돈이 없던 그는 시모노프에게 일종의 구걸과도 같이 돈을 빌려 그 자리를 쫓아간다. 그리고 쫓아가는 마차에서 1차 자리에서 모욕 받았던 순간을 내내 곱씹으며 즈베르코프의 따귀를 갈긴 후 결투신청을 할 몽상에 빠진다. 하지만 기방에 들어섰을 때 이미 그들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 이후였다. 그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가 원하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사실 따귀를 갈길 용기도 결투를 할 자신도 없는 그런 비겁한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그런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기방 안으로 들어가 처음 보는 창녀와 뒹구는 일일 뿐일 게 분명하다. 아니, 자신을 모욕할 용기도 없기에 창녀를 흠씬 모욕하고 경멸하는 행위가 그런 부류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만난 창녀인 리자는 그가 쉬 모욕할 수 있는 부류의 창녀가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일한지도 얼마 안됐을 뿐더러, 무언가 창백하면서도 고통을 머금은 표정은 그녀를 모욕하겠다는 그의 첫 의도와 달리, 그녀를 진심으로 교화하는 일로 전도되어버리게끔 만들어버린다. 게다가 그와 같은 인간에게도 일말의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지 그는 그의 집주소를 그녀에게 남기기까지 한다. 때문에 그녀는 며칠 뒤에 그의 집을 찾아온다. 그런데 그 시점과 상황이 적절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로선 가장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던 그의 본질을 들키게 되었으니까... 그의 하인에게 월급을 줄 돈이 없어 무시 받으면서도, 한없이 비겁한 이유로 자존심을 내세우는 옹졸하기 그지없는 그의 본질을... 그런데 오히려 거기서 그녀는 그녀 자신보다 불쌍한 그의 그러한 본질을 봄으로써 그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의 온 마음을 담아 바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음에도 아니, 앞으로 그녀를 통해 얻을 그 자신의 구원까지 충분히 예감하고 있음에도 그는 그녀에게 화대를 지불하면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아마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짧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과 문학에 대해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1부 <지하>에서 거의 직선적으로 그의 사상을 피력한 후, 2부 <진눈개비에 대하여>에서 그의 사상의 실험으로써 문학의 특질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밝힌 동어반복이 될지 모르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1부에서 벽이란 화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벽이란 화두는 동시에 신 혹은 천국이거나 구원이란 화두에 관한 비유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이 책 속에서 이미 표현했듯이 인간의 모든 모순과 절망이 통제된 완벽한 천국이란 장소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곳이 존재한다면 그곳에서 인간은 침 뱉을 권리조차 없는 그런 존재여만 하는 것일까? 물론 그러한 완벽함을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이 그곳에 대해 상상하고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상상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는 순간, 그러한 장소 혹은 그러한 존재는 인간의 오성을 넘어버려 판단불가라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즉,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것의 존재를 신이라 규정짓고 그곳에 귀의한다. 아니, 그 품에 안착한다. 하지만 인간의 것이 아닌 것을 어떻게 인간이 규정하고 안착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논리적 모순을 누군가는 이율배반이란 철학적 용어로 해결하고, 신 존재의 당위성에 관해 말하려 했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 자체가 이율배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이 또한 지극히 인간적인 언어란 이성의 판단범위에서 이루어졌고, 신의 당위성이란 말 자체가 이미 신 존재의 물음에 관해 배제한 채 <신은 인간의 이성과 질서를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논리인 까닭이다. 한 마디로, 너무나 인간의 경험과 이성적 한계치를 무시한 허공에 붕 뜬 논리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간경험과 이성적 한계치 안에서 신과 구원에 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소설 속에서 앞의 이율배반이란 논리를 펼친 칸트에 관해서 언급한 글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이러한 논리의 역방향으로 그 자신의 사상을 구축했는지 솔직히 단언할 자신은 없다. 그렇지만 칸트가 그보다 1세기 앞선 사람이고, 그를 통해 유럽의 사상적 방향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을 떠올려 볼 때, 도스토예프스키가 칸트의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했으리란 점은 쉬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유럽의 정황과 기독교에 관해 오랜 전통의 뿌리를 지니고 있던 러시아적 상황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전까지의 전제와 달리 인간의 경험과 이성치 안에서 <만약 신이 없다면 인간이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란 물음을 문학을 통해 던지고 실험해 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고 싶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한 장르가 철학이 아닌, 다름 아닌 문학인 까닭이다. 만약 그가 철학이란 장르를 선택했다면 신에 관한 문제에 대해 풀어가기 위해 아무래도 인간의 경험보다는 이성이라는 논리에 기댔을 것이다. 즉, 논리의 기본인 대전제를 통해 지극히 관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경험을 더 중시할 수밖에 없는 문학이란 장르를 택함으로써 인간의 경험치 안에서의 이성으로 신의 문제에 관해 생각하고 한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왜냐하면 2부에서 그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구원과 신의 세계를 ‘리자’라는 존재를 통해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리자’라는 존재의 사랑을 그는 화대를 줌으로써 거절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신이란 존재 혹은 천국이란 완벽한 장소가 있을지라도 인간이 그곳에서 침 뱉을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이란 존재가 그러한 모순덩어리일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인간의 모순이 동시에 신과 구원이란 불가해한 존재와 개념을 가능케 한다고 그는 믿고 있는 듯싶다. 왜냐하면 소설 마지막에도 나와 있듯이 그 스스로 원해서 들어간 지하임에도 그는 지하에서 탈출하기를, 어쩌면 다시 ‘리자’라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기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단 이는 그의 이 소설 뿐 아니라, 여러 작품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죄와 벌>에선 노파를 죽인 죄를 지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라는 존재를 통해 그의 죄를 회개함으로서 구원을 얻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의 형벌을 의미함으로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는 친부살인을 통해 <신이 없는 자유>를 꿈꾸었던 이반의 모순과 정작 이반의 사상을 실행해 옮긴 스메르코자프의 자살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사상의 문학적 실험이 지속적으로 보인다.

 

 

  이제 내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허공의 붕 뜬 말들로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인 이야기를 대충 정리하고 싶다. 왜 하필 또 다시 17년 만에 예전의 성공회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고서 이 소설을 떠올렸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처음에도 밝혔듯이, 내 이십대의 모든 화두는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 내가 천국이라고 상정해둔 그곳에 다시 돌아갈 때 어떤 화두를 가지고 가야할지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던 거 같다. 그리고 거의 흐릿한 기억이었지만 다행히도 이 소설을 택한 것은 내 개인적인 물음들을 정리하는데 다소간의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과연 그곳에서 내가 침 뱉을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이 과연 아직도 여전히 내게 17년 전처럼 천국일 수 있을지도 나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반드시 가지고 들어가야만 할 거 같다. 그곳이 내게 천국이라면 내가 과연 침 뱉을 수 있을지, 없을지... 과연 천국이란 건 내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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