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 신경숙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9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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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인 소설은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 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아마 군대를 갓 제대하고서 쯤이었을 것 같다. 대학 신문사에 있던 후배가 문학포럼에 초청을 받았는데, 같이 가자고 제의를 했다. 기성세대 작가인 최인훈, 최인호, 이성복 등을 비롯하여 비평가인 정과리, 당시 인기가 있던 성석제, 유하, 김영하 그리고 신경숙까지 총망라하여 대학생들과 함께 자리를 갖는 포럼이라고 하였다. 당시 문학에 관해서 그리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문학을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때였기에 나는 흔쾌히 청을 수락하여, 후배와 함께 포럼에 참석하게 되었다. 약 40명의 가까운 작가들이 각자 문학에 관한 자기 생각들을 피력하였고, 때문에 포럼은 장장 3~4시간을 족히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소설만큼 재치 있게 언변을 펼치던 성석제도 아니었고, 무언가 그 시나 소설의 파격만큼 남달랐던 유하나 김영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말도 너무 못하고, 정말 작가가 맞는지 부끄러워서 차마 고개도 잘 못 드는 여류작가, 바로 신경숙이었다. 원래 여류작가들의 문체를 좋아하였던 나였기에 당시 신경숙의 소설도 두 세권쯤 읽기는 하였었다. 그리고 그 특유의 내밀하고 정갈한 문체에 끌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내가 작가 신경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그 문학포럼을 통해서였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부끄럽게 하여, 차마 말도 못 하게 만든 것일까? 그런데 어찌하여 그녀의 글속엔 그렇게 자잘자잘 할 말이 많은 건지.......

 

 

  그녀 소설이 누군가의 아류인지 혹은 비평가인 남편의 힘을 빌은 출세인지에 대해선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늘 그녀의 소설 속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그녀 특유의 밖으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상처이다. 여기 외딴방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녀는 그녀의 상처의 근원지인 쇠스랑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골이 지긋지긋한 소녀, 그래서 어서 서울에 있는 오빠가 서울로 데려가주기를 꿈꾸는 어떤 토속적인 동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소녀, 하지만 쇠스랑을 가장 신경이 밀집되어 있다는 발바닥으로 밟고서도 외마디도 지르지 않는 소녀... 그 쇠스랑을 그녀 집 앞 우물에 내던져버리고서, 이제는 어엿한 중견작가가 되어 살아가는 그녀에게 어느 날 뜻밖의 전화가 온다. ‘하계숙’이란 이름.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지우고 싶었던 기억들, 그래서 소설로도 차마 내뱉을 수 없었던 상처들. 그런데 그 상처가 생생하게 살아서 말을 걸어온 것이다. 왜 나는 존재케 하지 않느냐고?

 

 

  한참 글쓰기에 골몰하던 때, 어느 날 낮에 선잠을 자고서 깨어났다. 그런데 꿈속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고, 어떤 흐느낌만이 남아 내 속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를 존재케 해주세요.’ ‘제발, 나를 존재케 해주세요.’ 그 동안 글쓰기를 하나의 배설로써 치부하였던 나였기에, 그 흐느낌은 내게 어떤 공포와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단 하룻밤의 정사를 꿈꾸고서 낳은 나의 그 사생아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어느 귀퉁이에 내던져 버리고선, 그것을 밀쳐낸 힘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들이 내게 자신의 존재를 들이민 것이다. 마치, 수년간 버려져 여기저기를 뒹굴다 어느 사창가 귀퉁이에 겨우 자리 잡은 어린창부가 내게, 내가 마치 자신의 아빠 같다며 달려드는 것처럼. 그리고 서툴렀던 첫 정사에서 들었던, 이런 식이면 임신할지도 모른다는, 어느 여자의 차가운 말이 군대에서 잠 못 드는 밤 연신 떠올랐던 것처럼. 만약, 그럴 리는 없지만 그 어린 창부가 그 정사에서 떼어낸 사생아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제 와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그 기억들을 일일이 되물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그리고 만약 되묻는다면 그것이 내게 있어 하나의 담장 너머의 흐릿한 꽃과 같은 상징으로 여겨지는 글쓰기가 가능할까? 그것은 소설도 그렇다고 수필도 아닌, 하나의 기억에 대한 왜곡이거나 곡해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글쓰기의 존재적인 물음을 회피하고서 글을 쓴다면 그것은 온통 거짓과 가식일 뿐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결국 글쓰기란 그 존재에 대한 응답이거나 대답일 것이다. 또한 그러하기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럽고, 그 고통으로 인한 생채기에 메스를 들이미는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깨질이 될지, 아니면 상처를 꿰매고 아물게 하는 작업이 될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글이 끝나긴 전까진.

 

 

  소녀는 소녀의 원대로 서울로 오게 된다. 그리고 공장생활을 하며, 산업근로자를 위한 야간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당시, 노조 간에 갈등이 고조되던 80년대시기에 그녀가 학교를 다니기 위해선 노조를 탈퇴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배반을 의미한다. 이제 열여섯 살 밖에 안 된 소녀에게 그러한 선택은 너무나 가혹하다. 그렇지만 그녀가 왜 서울에 올라왔던가?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시골에서는 나름 중산층이었던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서울에서 모든 부당한 대우와 삶을 감당해야 하는 여공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겨우 그것을 위해 그녀가 온 것일까?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작가가 되기 위해서, 언젠가 이룰 그 막연한 꿈을 위해서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 그녀는 배신이란 각인을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 하루 끔찍한 나날들, 그런 나날 가운데 그녀는 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희재 언니’ 무표정한 작은 얼굴, 무심한 작은 얼굴, 조용한 작은 얼굴... 햇볕같이 표정이 없는 무심한 얼굴, 그렇게 작고 희미한 존재... 어쩌면 그녀는 희재 언니를 통해 그녀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하기에 그렇게 힘겨웠던 나날들 그녀들은 ‘그럼’이란 게임을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곤 하였다.

 

 

 난 잠을 자겠어. 사흘 나흘 깨지 않고 푹 자겠어.

 ......그럼.

 동생이 학교 졸업하고 설마 대학 간다고는 안 하겠지, 안 그래?

 ......그럼.

 그래도 가겠다 하면 보내야겠지.

 .....그럼.

 모르는 소리. 이보다 더 일할 수는 없어. 하루는 24시간뿐이니까.

 ......그럼.

 난 이정밖에 할 수 없어.

 ......그럼.

 반장님이 내일쯤은 작업실에 환풍기를 달아주겠지?

 ......그럼.

 이 다음에 마당이 있는 이층집에서 살 수 있을까?

 ......그럼.

 

 

  그럼, 그럼, 그럼....... 마치 자신들의 희미한 존재에 의미를 겨우 부여하는 것처럼 들리는 공명. 그렇게 그녀들은 힘든 시간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럼’이란 게임을 통해 앞으로 더 좋아질 시간들을 함께 하고픈 바람을 노래하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허공에 희미하게 울리던 그 목소리는 결국 사라지게 되고, 우리가 함께 뜨겁게 불렀던 그 희망도, 그 기억도, 그 사람도 결국엔 사라져버리게 된다. ‘희재 언니’는 그렇게 어느 명절 날 시골에 내려가야 한다며 그녀에게 자신의 방을 잠거 줄 것을 부탁하고, 며칠 후 싸늘한 시신이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때 너무 어렸다. 공장에서의 삶도 버거운데 한 존재의 죽음을 감당하기엔 그녀는 너무도 어렸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도망치듯 그 외딴방을 빠져나온다. 다행히도 그녀에게는 든든한 큰오빠가 있다. 마치 그녀를 돌봐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은 그녀의 큰오빠 덕에 그녀는 무사히 그 시절 그 외딴방을 빠져나온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는 한 무거운 존재의 그림자를 그녀가 지울 수 있을까? 그녀가 서울로 올라오기 전 우물 속에 내던진 쇠스랑은 부식되어 우물을 시나브로 오염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 속에서 그녀는 그녀의 희재 언니가 우물 속에 쇠스랑을 건져 올리는 상상을 통해 이야기를 갈무리하려 한다. 그렇지만 결국 그것이 그녀의 존재와 쇠스랑의 존재에 대한 너무 가벼운 대답임을 알기에 그녀는 쉬 글을 끝마치지 못하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 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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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민음사 세계시인선 1
보들레르 지음, 김붕구 옮김 / 민음사 / 197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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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의 ‘악의 꽃’ 그리고 ‘권태’

 

 

 

.....................................

Serré, fourmillant, comme un million d'helminthes,

달라붙어서, 우글거리는, 마치 수많은 기생충들처럼

Dans nos cerveaux ribote un peuple de Démons,

우리의 머릿속에서 진탕 마신다. 악마의 자손들은

Et, quand nous respirions, la Mort dans nos poumons

그리고, 우리가 숨 쉴 때, 죽음은 우리의 허파 속에서

Descend, fleuve invisible, avec de sourdes plaintes.

흐른다, 보이지 않는 강물로, 은밀한 신음소리와 함께

Si le viol, le poison, le poignard, l'incendie,

만약 강간, 독약, 비수, 방화가

N'ont pas encor brodé de nos piteux destins,

수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비참한 운명을

C'est que notre â̂me, hélas! n'est pas assez hardie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아! 충분히 대담하지 않기 때문!

.....................................

Dans la ménagerie infâ̂me de nos vices,

우리 악덕의 파렴치한 짐승의 우리 안에

Il en est un plus laid, plus méchant, plus immonde!

그것은 그 중 가장 흉하고, 가장 악랄하며, 가장 추잡한 놈이니!

Quoiqu'il ne pousse ni grands gestes ni grands cris,

그는 야단스런 몸짓도 과장된 소리도 없지만

Il ferait volontiers de la terre un débris

간단히 대지를 산산조각 내고

Et dans un bâ̂illement avalerait le monde;

그리고 하품으로 삼켜버린다 온 세상을;

C'est l'Ennui! L'oeil chargé d'un pleur involontaire,

그놈은 바로 권태! 무심한 눈물이 고인 눈으로

Il rê̂ve d'echafauds en fumant son houka.

그는 단두대를 꿈꾼다 물담배를 흡입하면서

Tu le connais, lecteur, ce monstre délicat,

너는 그를 안다. 독자여, 이 섬세한 괴물을

-Hypocrite lecteur,-mon semblable, -mon frère!

위선자인 독자여, 나의 동류여, 나의 형제여!

 

 

 

  보들레르를 처음 접한 것은 아마도 이 역시 20살 적, 학교를 휴학하고서 떠난 여정에서였을 것이다. 사실 그 때 내가 보들레르, 랭보나 까뮈 등에 집착했던 이유는 그들의 시나 소설의 제목이 단지 멋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악의 꽃’, ‘지옥에서 보낸 한철’, ‘이방인’ 등등. 그 당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내 안의 어떤 부름은 이 상처받은 영혼들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만들었고, 결국 지금까지 돌이킬 수 없는 긴 여정을 떠나오게 만들었다. 특히 그 민감했던 시기, 내게 첫 포고를 연 것은 단연 보들레르의 ‘독자에게’라는 시였다.

 

 

  모든 고통들이 뇌세포 마디마디마다 결결이 박혀 그 모든 좀먹는 벌레들을 말살시키기 위해 그저 펑 터져버리거나, 터뜨리고 싶을 때... 혹은 뚫려버린 심장 때문에 도저히 가눌 수가 없어 숨쉬기조차 버거울 때 오히려 가장 권태로웠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그 견디기 힘들고 길고 길었던 이십대가 왜 지금의 와서 문득 한없이 그리워지는 것일까? 권태라는 ce monstre délicat는 -많은 이들이 비록 까다로운 괴물로 번역하고 있지만- 왜 그토록 섬세하고 아름다운 괴물이었던 걸까?

 

 

 

Rapplez-vous l'objet que nous vimes, mon â̂me,

기억해보라 그대여, 내 영혼이여, 우리가 보았던 것을

Ce beau matin d'été si doux:

그토록 온화하고 아름답던 여름 아침

Au détour d'un sentier une charogne infame

오솔길 모퉁이 혐오스런 시체를

Sur un lit semé de cailloux,

조약돌이 흩뿌려진 자리 위에

 

 

Le ventre en l'air, comme une femme lubrique,

드러내 놓은 배때기, 음탕한 계집처럼

Brû̂lante et suant les poisons,

불타오르며 땀에 젖은 독기를

Ouvrait d'une façon nonchalante et cynique

열어젖히고 있었다 무기력하고 파렴치하게

Son ventre plein d'exhalaisons.

냄새 가득한 그 배때기는

 

 

.......................

 

 

Les mouches bourdonnaient sur ce ventre putride,

파리떼들이 윙윙거린다 썩어가는 그 배때기 위에서

D'où sortaient de noirs bataillons

거기서 검은 구더기들이 기어 나오면서

De larves, qui coulaient comme un épais liquide

걸쭉한 액체처럼 흘러나온다.

Le long de ces vivants haillons.

그 살아있는 누더기를 타고서

 

 

Tout cela descendait, montait comme une vague

그 모든 것들이 내려갔다, 올라간다. 파도처럼

Ou s'élançait en pétillant

거품이 일며 솟구쳐 오른다.

On eû̂t dit que le corps, enflé d'un souffle vague,

마치 희미한 바람에 부풀어 오른 시체는

Vivait en se multipliant.

점점 불어나면서 살아있는 것만 같다.

 

 

.......................

 

 

Oui! telle vous serez, ô̂ la reine des grâ̂ces,

그렇다! 당신도 그렇게 되겠지, 오 매력의 여왕이여,

Apres les derniers sacrements,

마지막 성사를 끝내고서

Quand vous irez, sous l'herbe et les floraisons grasses,

당신이 있을 때쯤 만발한 꽃들과 풀 아래

Moisir parmi les ossements.

곰팡이 슬 때쯤 해골들 사이에서

 

 

Alors, ô̂ ma beauté! dites à la vermine

오 나의 미녀여! 말하라 그 벌레들에게

Qui vous mangera de baisers,

당신을 입술을 파먹을

Que j'ai gardé la forme et l'essence divine

내가 그 거룩한 본질과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고

De mes amours décomposés!

내 부패한 사랑의

 

 

 

  사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시선과 시와 신에 대한 알 수 없음으로부터 시작한 내 詩作이기에 보들레르에 너무나도 강렬한 인간에 대한 혐오 그리고 악마에 대한 찬미들이 선뜻 내게 이해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악의 꽃’이라는 그 이미지와 맨 처음 ‘독자에게’란 시에서 포고를 열고, 수차례 언급한 ‘권태’라는 의미는 도무지 매칭이 되지를 않았다. 그런데 지금 위의 시 ‘Une Charogne(시체)'에서 나는 어쩌면 악의 꽃이 묘사하는 바를 그리고 그 ‘섬세한 권태’가 의미하는 바를 아주 조금 이해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 부패한 사랑의 거룩한 본질과 형태에 대해서.......

 

 

 

 

 

O Mort, vieux capitaine, il est temps! levons l'ancre!

오 죽음이여, 늙은 선장이여, 때가 되었다! 닻을 올리자!

Ce pays nous ennuie, ô̂ Mort! Appareillons!

이 고장은 우리를 권태롭게 한다. 오 죽음이여! 떠날 채비를 하자!

Si le ciel et la mer sont noirs comme de l'encre

하늘과 바다가 비록 먹물처럼 검다하여도

Nos coeurs que tu connais sont remplis de rayons

네가 아는 우리의 심장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Verse-nous ton poison pour qu'il nous réconforte!

너의 독을 우리에게 부어라 우리를 북돋기 위해

Nous voulons, tant ce feu nous brû̂le le cerveau,

우리는 이토록 그 불꽃이 우리의 머리를 불태우기를 바라보니

Plonger au fond du gouffre, Enfer ou Ciel, qu'importe?

심연 깊숙이 잠기리라, 지옥이든 천국이든 무엇이 중요하랴?

Au fond de l'Inconnu pour trouver du nouveau!

미지의 바닥 깊숙이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하여!

 

 

 

  드디어 마지막 시 ‘Le Voyage(항해)'에서 시인은 ‘권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죽음을 향한 항해이다. 그러나 이 항해는 단순히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단절되어 버리는 그러한 죽음이 아니다. 위대한 여행자는 말한다. 죽음이라는 심연 혹은 미지에 깊숙이 잠기는 것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어떤 일확천금처럼 주어지는 천국의 환상이라든가, 우리를 일생 동안 좀먹어 들어간 지옥이란 형벌의 공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또 다른 여정일 뿐이라고. 어쩌면 그것은 예술가의 현재의 고뇌와 고통 그 자체가 시로 발현되어 계속 지속될 것임을 예견하는 예언일지도 모르겠다.

 

 

 

 

 

La Mort des Artistes

예술가들의 죽음

 

 

Combien faut-il de fois secouer mes grelots

몇 번이나 내 방울들을 흔들며

Et baiser ton front bas, morne caricature?

입 맞추어야 하는가? 너의 천한 이마에, 서글픈 풍자화여

Pour piquer dans le but, de mystique nature,

신비로운 본질인 과녁을 맞추기 위해

Combien, ô̂ mon carquois, perdre de javelots?

오 내 화살통이여, 얼마큼의 투창을 잃어야 하는가?

 

 

Nous userons notre â̂me en de subtils complots,

우린 지치게 한다. 우리의 영혼을 치밀한 음모 속에서

Et nous démolirons mainte lourde armature,

그리고 우리는 무너뜨린다. 숱한 육중한 골조들을

Avant de contempler la grande Créature

그 위대한 창조물을 경탄하기 앞서서

Dont l'infernal désir nous remplit de sanglots!

지옥의 욕망으로 우리를 비통함으로 가득 채운다.

 

 

Il en est qui jamais n'ont connu leur Idole,

그의 우상을 영영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Et ces sculpteurs damnés et marqués d'un affront,

그리고 형벌에 처하고 치욕으로 낙인이 찍힌 조각가들

Qui vont se martelant la poitrine et le front,

가슴과 이마를 치며 분개하는

 

 

N'ont qu'un espoir, étrange et sombre Capitole!

희망은 오직 하나, 기이하고 어두운 신전이여!

C'est que la Mort, planant comme un soleil nouveau,

그것은 바로 죽음, 새로운 태양처럼 비상하는

Fera s'épanouir les fleurs de leur cervaus!

꽃을 피우게 하라 그들 머리에!

 

 

 

 

p.s.

 

불어는 깨지는 군요--; 힘들게 쓰고 번역했던 건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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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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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 멀티 우주 속에서 소통과 소통의 부재에 관한 이야기

 

 

 

  이런 종류의 일본 소설(?)을 읽은 지가 꽤 오래 전 일로 기억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츠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가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와 류의 소설을 제외하고 읽어본 2000년대 일본 소설의 전부일 것이다. 누군가 왜 안 읽어 보았냐고 묻는다면 지금 당장 떠오르는 느낌은 그냥 그 가벼움이 싫었던 것 같다. 읽는 순간에는 재밌는데, 읽고 나선 무언가 남는 게 없는 공허한 느낌? 이런 기억들이 근래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일본문학들과의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결국 나의 이런 선입관에 어떤 여지를 주지 않고 단단한 성을 쌓아버리게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이번 소설로 인해 내 이런 단단한 성과도 같은 선입관이 바뀌었느냐고 스스로 자문해 보면, 역시 크게 달라진 바는 없는 것 같다. 다만, 이러한 소설 속에 감춰진 현대적 흐름과 감각을 그동안 내 스스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너무 무감각하게 대응하여서, 가끔은 조응할 필요가 있다는 것 정도? 아마 이 정도가 나에게 이 책을 통한 수확이라면 일종의 수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것보다는 이 속에 감추어진 세계관을 살펴보는 것이 내 개인적으로는 의미 있다고 여겨져, 거기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첫째로, 이 소설 속의 구성과 관련한 세계관이다. 이 소설은 누구나 다 알 듯이 옴니버스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소 특이한 것은 하나의 공동체(집) 아래서 각자 주인공이 되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설의 구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소설 중간과 끝에도 나오듯이 이 소설은 구성 자체에서 Multi-Universe의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 원래, Universe라는 어원은 ‘보편적이다’라는 의미에서 도출된다. 즉 하나의 우주, 하나의 진리의 개념이 이 속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많은 소설 속에서 하나의 화자와 주인공을 우리는 마주하곤 한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현대적 가치와 관념을 반영한 소설이다. 그러하기에 소설은 보편이 통용하던 시대를 벗어나, 다변화된 사회적 가치와 관념을 하나의 우주 속에 발현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우주가 우리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우주의 틀을 크게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고 있는 공간으로써, 집의 기능이 기존의 결혼한 남녀와 아이가 이루고 있는 가정의 기능을 대처한다든지, 조금은 기존의 체제에서 정상범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수용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본질적이라기보다는 외형적 변화가 주어져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곳에선 시간의 왜곡도, 타인의 생각을 완벽히 알아낼 수 있는 독심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개개인은 주인공으로 각기 다른 양식 하에 시간이라는 퍼레이드에 동참하여야 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이곳에선 오히려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소통이 중시된다.

 

 

  둘째로, 앞에서 언급한 소통의 문제이다. 이 소설은 소설 내에서 줄곧 소통의 문제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가장 좋은 비유를 들자면, 아마 채팅창의 비유일 것이다. 채팅창은 익명의 공간이다. 익명은 어떤 의미에서 무한한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만약 어떠한 재제와 역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선 개인이라는 각기 다른 욕망만이 존재하게 되어 소통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인간에겐 페르소나가 존재한다. 본질적 자아가 아닌 어떤 주어진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이 가면의 얼굴은 타인과 소통을 가능케 한다. 즉, 채팅창과도 같이 달라진 우주 혹은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서로 발가벗지 않은 채 서로를 마주하고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어떤 순기능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글 속에서 사토루에 대한 요스케의 역할이 아마 그러한 순기능의 일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를 온전히 다 알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처음에 다루었던 익명이라는 무한한 욕망의 섬에 대한 문제를 여전히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소설은 나오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나오키에 관한 문제이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사실 내내 걸렸던 인물은 나오키이다. 사토루까지만 해도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어떤 소통에 있음이 분명했는데, 뜬금없는 나오키의 ‘살인의 추억’ 포스는 소설의 방향키를 어디로 잡아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뭐 장르 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 젊은이들의 모습을 심각하게 보여준 그런 유의 소설도 아닌데, 생뚱맞은 나오키의 본질 앞에서 잠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결국 이 소설이 옴니버스 식의 소설이고, 소통의 가능성 속에서 소통의 부재 또한 다루고 있다는 처음의 귀결로 차근히 되돌아가면서, 나오키가 그 부재 속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라면, 왜 굳이 그 집의 실제 주인이며, 사회적 성공 모델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나오키를 그러한 부재 속에 빠뜨렸느냐 하는가이다. 여기서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나오키를 현대인의 표상으로 혹 작가가 등장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럼에도 역시, 그 작위성 때문인지 혹은 여러 개연성들의 부족 때문인지 나오키 인물 캐릭터 자체에 대해 공감할 수가 없었다.

 

 

  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품평을 함에 있어서 자연스러움이 아닌 꿰맞추기 식 억지스러움이 있지 않았나, 잠시 반성해 본다. 그리고 몇 가지 더 사유해 볼 수 있는 부분을 바로 이 점 때문에 놓치지 않았는지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을 살아가면서, 조금 더 진중한 접근으로 메워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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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 -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박민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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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 - 삶과 죽음에 관한 진부한 문학적 접근

 

 

  처음 소설을 접했을 때 첫 문두에 모택동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먹이는 것이 무언가 폭력에 관한 문제의식을 지닌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어 내려가다 보니, 마치 진지했던 혁명가인 모택동이 이 시대에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해서, 혹 현대 시대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소설인가 하고 다시 착각을 하였다. 그런데 웬걸,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들어, 집단자살과 낙태에 대한 이야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처음에 뭐 땜시 거창하게 모택동에 혁명의 폭력의 당위성, 그리고 현대 시대의 그 폭력적 소비성에 대해 언급한 것일까? 전에 박민규 소설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만 살짝 본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게다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주제인 죽음에 관한 문제... 물론, 소설에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죽음을 간과하고 쓸 이야기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철학적인 접근이 아닌 문학적인 접근 속에서 삶과 철학을 어우른 질문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아니,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질문 방식을 어떤 식으로 취하고, 어떤 식으로 묘사할지가 문학적 화두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서 취한 방식에 대해, 글쎄 뭐랄까, 나는 도무지 긍정하고 싶지가 않다. 이런 이유로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을 던져 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이 소설이 취한 접근방식에 관한 직접적인 질문이다. 소설 속에서는 자살에 관해 최근 사회 문제가 되었던 집단자살에 관한 이슈를 통해 접근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느낄 때, 이 소설 속에서 집단자살은 말 그대로 하나의 이슈로 끝나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집단자살 속에 있는 어떤 심리의식이라든가, 하다못해 주인공이 왜 집단자살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드러나 있지가 있다. 물론, 박민규 특유의 소설을 개인이 아닌 소외계층그룹에 대한 관심사로 돌리는 성향이 이곳에 묻어난 것이라면 일정 부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집단자살에 대한 어떤 심각한 문제의식보다는 따뜻한 연민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한편으로는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접근의식을 갖지 못한 채 단지 소재로 채용을 한 것은 하나의 겉멋이나 허례로 밖에 느껴지질 않는다. 그리고 낙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글속에서 낙태를 하는 여인의 낙태에 대한 당위성을 개인적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이 또한 주인공의 자살충동의 근본적 이유의 하나로써 하나의 도구로 채택되었을 뿐, 근본적인 질문이나 문제의식을 느끼게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전체적으로 이런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박민규 자체가 어떤 현상에 관해 문제의식을 갖고 그 저변에 대해 파헤치기보다는 연민하고 공감하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란 추측을 해보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연민과 공감을 극대화하기에 이 소설이 선택한 방법은 너무 정공법이었다. 여타 다른 박민규 소설에서 드러난 어떤 특유의 해학이라든가 문학성이 이 글속에선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두 번째로 왜 하필 많은 박민규의 소설 가운데 이 소설을 이상 문학상에서 택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사실, 이 글을 읽은 후 나는 조금은 기대했던 박민규에 대해 크게 실망할 뻔했다. 만약 그 이후 그가 쓴 다른 단편들을 보지 않았다면 난 분명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전에 읽었다고 잠깐 언급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실제로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다른 스터디의 합평 책으로 이 책이 채택되어 어쩔 수 없이 읽었는데, 것도 그 주에 유난히 무슨 일들이 겹쳐 합평 글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스터디 시작하기 30분 전에 발췌독으로 대충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뭐 소설에 대해 느낌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냥 줄거리 파악하고, 아 박민규는 비 오는 날 갑자기 당기는 200원짜리 자판기 밀크커피에 담배 한 대 같은 느낌이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가 박민규를 결코 무시한건 아니다. 왜냐하면 난 그 느낌 때문에 한동안 잊고 살았던 시를 다시 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렇지만 그 정도의 독서로 박민규에 관심을 갖고 알고 있다고 하기엔 무리라고 이야기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스터디 누군가의 필사본을 통해 난 이번 기회를 통해 진짜 박민규를 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느낀 점은 박민규를 단순히 비오는 날 당기는 200원짜리 싸구려 커피와 담배 한 대만으론 취급할 순 없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같은 죽음의 문제를 다뤘어도 그의 소설 ‘근처’에선 근처라는 문학적 뉘앙스를 통해 죽음의 문제를 색다르게 접근하고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누런 강 배 한 척’과 ‘낮잠’에선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를 끈끈하고도 풋풋한 노년의 로망스와 인간애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그런데 ‘아침의 문’에서 선택한 방법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앞에서 잠깐 밝혔듯이 무언가 정공법을 택한 것 같은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듯 끼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기왕지사 정공법을 택했다면 좀 더 치밀함과 처절함을 가지고 질문해 들어가는 것이 맞을 텐데, 이 글속에선 난 그런 끈끈함을 도저히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문학성 또한 정공법을 택한 까닭인지 단순한 도식과 구조를 이용해 죽음과 생명에 대해 표현을 한 것으로밖에...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이 번 기회를 통해 박민규라는 작가를 알게 된 이유 때문인지, 그래서 더욱 그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의 글 중 이렇게 가장 떨어지는 그답지 않은 글을 이상 문학상을 준 이들에게 솔직히 독설을 퍼붓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굳이 꼭 이렇게 진부한 방식으로 그것도 쉽게 다룰 수 없는 삶과 죽음이란 거창한 문제를 다뤄야지만 작가로서 인정을 해주는 건지, 이렇게 굳이 깊이에의 강요를 통해 자유롭고 번뜩이는 한 작가의 어깨에 힘을 잔뜩 실어줘야만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질문 한 가지를 더 던지고 싶다. 문학이란 게 과연 무엇일까? 삶과 죽음 이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이라면 철학도 있고, 심리학도 있고, 예술도 있는데, 왜 꼭 우리는 문학이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어떤 문학이 지닌 특유의 문학성이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문학성이란 걸 꼭 하나의 천편일률적인 틀과 잣대로 들이밀어야만 하는 것일까? 무언가 또 아쉽고 아쉬워 의문이 내내 남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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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나뉘어라 - 2006년 제3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정미경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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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나뉘어라 - ‘이상’에 관한 진실과 거짓 혹은 고백과 부인

 

 

  글이란 왜 쓰는 것일까? 근래 잘 써지지 않는 글을 억지로 쓰면서, 또 지워가면서 나는 혼자서 되뇌어보곤 한다. 다가설 수 없는 먼 수평선에 대한 동경? 혹은 너무 가까워서 감지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가령 예를 들면 늘 쓰고 있어서 손이라 평소에 지칭하기 쉽지 않은 그런 대상에 관한, 치열한 도리깨질? 내 내면 속에서 오랫동안 존재했던 이 두 가지 물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질문이다.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 내부의 고유의 속성, 영원히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치열하게 부서뜨려 자연적인 그 형태를 자신만의 자의적 형태로 바꾸어내고 싶은 본능들... 물론, 여기서 나는 이런 고차원적인 글쓰기에 관한 본질에 관해 정의를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눠진 밤의 사이를 가로질러 부인하고 싶지만, 차마 세 번 부인할 수 없던 어떤 대상에 관한 보고서인 이 글에 대해 막연히 내 감정을 써내려가고자 할 뿐이다.

 

 

  북구의 습기를 한껏 머금은 예테보리나 항구에 당도하여, 국경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초소를 지나, 한없이 북쪽으로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디 안데르센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운자 크레보’란 천국보다 아름다운 곳에 P는 천사 같은 그의 부인 M과 함께 살고 있다. P, 언제나 나에게 있어서 넘어설 수 없는 대상이었던 그, 그가 존재했기에 나는 항상 학창시절 2등이었고, 같은 외과의로서 그가 보여준 정점을 통해 나는 스스로 자신이 위치한 자리에 대한 자각을 할 수가 있었다. 때문에 그가 사라졌을 때, 나는 손쉽게 외과의라는 자신의 존재 위치를 벗어나, 영화판이라는 전혀 새로운 곳에 뛰어들 수가 있었다. 아니,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임과 동시에 이정표였던 그가 사라지게 되자, 나는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그는 미국에서 또 다시 외과의로서 정점을 찍으며, 독창적인 논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나는 나름의 작가주의 영화를 만들어 외국에서 인정받는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의뭉스럽게도, 그는 또 갑자기 모든 정점을 찍었던 미국의 생활을 접고, 이곳 너무나도 낯설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북구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외과의였던 그의 전공을 ‘면역학’으로 바꾸면서, 이제는 환자들을 수술하는 의사가 아닌 새로운 의학 프로젝트를 개발하는 연구의로서... 그리고 마치 그 모든 삶이 농담이라도 되는 듯 그의 찌든 가난을 보여주는 자동차란? 글쎄, 삶에 모든 정점을 찍었기에 가능한 그만의 농담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그 농담 같은 삶의 표징을 넘어서 그가 착수하고 있는 ‘러브피아’라는 프로젝트는, 마치 무슨 영원히 사랑을 지속시켜 주는 콘돔 광고 같은 이름이지만, 영원한 사랑을 가능하도록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는 프로젝트라고 하는데, 말하는 모양새가 사뭇 진지하여 차마 농담이라 폄하할 수가 없다. 아니, 그의 삶과 그 아우라는 늘 그 모든 허공에 뜬 이상들을 진짜처럼 바꾸어왔기에, 그 누구도 그렇게 폄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내가 여기 북구에 온 것은 영화 시사회와 대학 강연이라는 허울 좋은 푯말이 있었지만, 실은 순전히 그를, 온전한 내 삶의 표징이었던 그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였다. 그리고 그에게 그 10년이란 세월을 통해 변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영화를 통해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대화하고 싶은 욕망이 분명히 내부에 강렬하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의 영화에 별 관심이 없다. 자신의 영화시사회를 같이 가길 바랐지만, 그는 그저 전날 메이킹 필름을 보는 둥 마는 둥 할 뿐이다. 그리고 감추는 법 없이 모든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비평을 해댄다. 그런데 거기에 단 한 마디도 보탤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 나는 감출 수 없었을까? 왜 그가 생각한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다시금 나는 그에 대한 한없는 콤플렉스를 느낀다. 개성적인 영화로 한국보다 유럽의 세간에 더 널리 이목을 끌어온 내 영화가 한 순간에 보잘 것 없는 삼류영화로 전락해버리는 순간이다. 이렇게 그 앞에 서면 나의 모든 존재는 한없이 위축되기만 한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서, 아니 그의 아내 M에게서 감춰진 비명의 소리가 들린다. M, 처음으로 자신이 감정을 느꼈던 대상, 그러하기에 어쩌면 10년 동안 P를 보지 아니한 것은 P에 대한 자신의 콤플렉스보다는 M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P였기에 그는 아주 간단히 M을 포기할 수 있었다. 아니, 오직 P만이 M과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숨길 수 없는 M의 절규는 뭉크의 화실을 통해 들려온다. 대체 무엇이 M에게 비명을 지르게 만든 것일까? 그는 이야기한다. 뭉크의 화실에서 훔쳐온 ‘절규’와 ‘마돈나’에 관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뭉크 자신을 빗댄 절규의 표정을 흉내 내며, 절정에 이른 M의 표정은 마돈나와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스러운 마돈나와 섹스를 할 수 없는 자신이 내어줄 건 자신의 마돈나 밖에 없다고. 그는 술에 잔뜩 취해 계속해서 그렇게, 절규의 표정을 흉내 내며, M을 비하함으로써 동시에 나를 비하한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가 왜 이렇게 취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그 취기어린 농담을 그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의 삶에 대한 가벼운 농담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기엔 그는 너무 취해, 이제 그의 삶 그 어떤 것도 되돌릴 수가 없게 변해버린 것이었다. 아니, 모든 것은 취기에 불과했다. 그의 ‘러브피아’란 프로젝트도, 그의 마돈나인 ‘M’도, 결국 모두 취기어린 어릿광대짓에 불과하다는 그 사실을 대체 어떻게 갑자기 믿고서, 받아들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M의 끊임없는 비명은 P의 취기 속에서 비집고 새어나와, 결코 멈출 수가 없는 부피의 현실이다. 그리고 결코 내가 간여할 수 없는 비명과 절규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그 비현실적인 북구의 풍경을 담은 그림과도 같은 P와 M의 집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술에 취해 여전히 자신을 찾는 P를 부인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것을 부인할 수 없는 나는 세 번씩이나 그를 부인함으로써 그 모든 존재를 지워낼 수 없기에, 수화기를 내린 채 혼자서 중얼거린다. 그를 만나지 못한지 오래되었다고.

 

 

  마지막 P를 세 번 부인하지 못한 주인공 ‘나’의 모습을 통해 내가 예수와 베드로의 설화를 떠올린 것은 비단 내가 신학생이었기 때문은 아니리라 잠시 믿어본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이러한 각도에서 해석하려는 우를 범하는 것은 내가 분명 그러한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P라는 존재를 통해 내가 본 것은 하나의 표징과 이상이었다. 실제로 P가 말하는 ‘러브피아’라는 그 자체가 그 얼마나 이상적인 표징이란 말인가? 하지만 언제나 이상이란 것은 하나의 표징으로써 존재할 때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일 때 그 씁쓸한 허무함이란... 아니, 놓지 못한 이상의 추구라는 현실은 주위를 비명과 절규로 물들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이상은 분명히 만족되지 못한 현실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글 속에서도 ‘러브피아’는 그러한 맥락의 복선을 깔아놓고 있다. 하나의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온도차, 그리고 지속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위기,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기반으로 P는 어쩌면 인간의 영역에선 함부로 꿈꿀 수 없는 ‘영원한 사랑’에 관해, ‘러브피아’에 관해 감히 발설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글 속에서 표현되었듯이 무슨 콘돔 광고처럼 허황되고, 씁쓸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하나의 가벼운 농담이었으면 좋았을 그의 삶이 M이라는 현실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게 연신 길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은 M으로 표상되는 그녀가 진짜로 마돈나이기 때문일까? 글 속에서 ‘나’는 어쩌면 그녀를, 그녀의 팔목을 통해 마돈나로 숭고하게 격상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P'인 그는 그런 마돈나의 존재를 섹스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폄하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뭉크의 마돈나는 그런 성스러운 마리아의 관능적인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다. 물론, M은 결코 그런 성스러운 관능을 간직한 마리아가 아닐 것이다. 그저 천국보다 아름다운 ‘운자 크레보’보다 서울의 텁텁한 공기가 그리운 하나의 평범한 여인일 뿐이다. 하지만 P라는 이상적인 표징의 존재와 더불어 그녀는 마돈나로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P는 영원한 사랑을 믿는, 이상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발상이며, 비현실적인 존재방식이란 말인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P'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바로 그런 존재였기에 그 존재가치를 주위에 인정받았고, 그 빛을 발하였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러한 빛이 언제까지 발할 수 있을까? 나는 부인한다. 망가져버린 P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아니, 나조차 이렇게 그를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세 번씩이나 부인할 수는 없다고 나는 고백한다. 왜냐하면 P의 존재는, ‘이상’이란 그 이름은, 비록 취기어린 어릿광대의 모습으로 현실 속에 존재할지라도 쉬 포기할 수 없는 이름인 까닭이다.

 

 

  두서없이 감정의 결대로 써내려온 품평을 이제 대충 정리해 보아야 할 거 같다. 아니, 맨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할 거 같다.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왜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의 구겨진 여백들을 놓지 못하는지... 나는 이 글의 ‘나’처럼 역시 쉬 대답할 수 없다. 아니, 쉬 부인할 수 없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이라면 부인해야 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라고도 쉬 이야기할 수 없기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제스처는 부인할 수 없는, 한두 번 쉽게 현실이라는 굴레 앞에서 부인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세 번 씩이나 그 모든 ‘이상’과 ‘꿈’들은 허황된 거짓에 불과하다고, 그런 놀음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밑도 끝도 없는 ‘글’이란 ‘이상’의 놀음을 하는 동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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