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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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삶을 지탱한 그 고약한 것에 관해

 

 

 모임에서 권여선 작품을 기성작으로 하여 품평을 하자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분홍 리본의 시절에서 보여주었던 깔끔한 문장과 문체, 무언가 여자, 여자 하면서도, 조금 짙었던 청춘의 고뇌 등이 떠올랐다. 그런데 작품집이 안녕 주정뱅이에 그중 최고의 작품이 이모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무언가 선명한 이미지가 잡히질 않았다. 너무 걸쭉한 느낌의 어감들과 신파적일 것 같은 막연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 듣자 하니, 권여선 작가가 술을 좋아해서 그런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작품이라고 했다. 어차피 내가 아는 권여선 작가 작품이라고 해봤자, 거의 10년 전에 읽은 분홍 리본의 시절이 전부이고, 그것도 기억이 거의 없기에, 새롭게 다시 보자는 의미로 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아니나 다를까, 첫 작품 봄밤부터가 다소 신파적인 작품이었다. 물론, 아름다운 신파이고, 다소 감동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가 작가들에게 기대하는 건 항상 그 이상이다. 그런데 그다음 작품인 삼인행은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종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혼을 앞둔 남녀와 친구가 셋이서 여행하면서 술 처먹고, 농담 따먹고, 싸우고, 지지고 볶고, 대사는 많은데 의미는 없고, 무슨 홍상수 영화도 아니고, 정말 기대 이하였다. 드디어 이모차례가 되었다. 이제는 정말 아무런 기대도 없이 책을 넘기는데, 다 읽고서, 코끝을 찡하게 하는 무언가에 그만 당혹하고 말았다. 대체 무엇이 내 가슴 속에 파장을 일으켜, 먹먹한 감동을 준걸까?

 

 화자인 주인공은 작가이다. 그녀는 결혼 후 자신의 남편에게 시이모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이모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뭐 굳이 숨길 일도 아닌데, 숨긴 것일까? 알고 보니, 시이모님은 남편의 가족과 다소 척지고 지낸 모양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주인공은 시어머님과 함께 병문안을 가게 된다. 이를 통해서 주인공은 시이모님이 그동안 외가의 모든 생계를 홀로 책임지다가, 2년 전 돌연히 사라진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시어머님의 이야기가 묘했다. 시이모님이 떠나면서 남긴 편지가 그냥 별 내용 아닌데, 이상하게 무섭고 으스스한 게 서럽게 느껴지더란다. 하지만 병원에서 마주한 시이모님은 그저 평범한 늙은이이었다. 다소 차갑고 퉁명스러운, 그렇지만 무언가 고집스러운 면모가 보이는 그런 늙은이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늙은이가 주인공의 어떤 면이 맘에 들었는지, 아니면 주인공이 작가라는 직업 때문이었기에 그랬는지, 퇴원 후 주인공을 바로 집에 초대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자연히 주인공과 시이모님은 가까워진다.

 

 시이모님의 삶은 수녀와 같은 정말 간결하고, 규칙적인 삶이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담배를 피우고, 동네 도서관에 간다. 담배는 하루에 네 가치 정도로 제한하고, 술은 일주일에 한 번에 두 번으로 정한 날에만 먹는다. 그렇게 하루에 드는 돈이 5천 원 정도이다. 일주일에 한 번 술 마실 때 약간의 사치를 부린다 해도 고작 한 달에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35만 원 안팎이다. 여기에 관리비 포함한 월세 30만 원을 더하면, 실질적으로 한 달에 쓰는 돈은 65만 원이 전부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제된 삶이 가능할지도 의문스럽지만, 더 이상한 점은 그녀가 원래 집을 나온 이유와 이런 삶이 조금 모순된다는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책임지느라 그동안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는 이유로 나왔기 때문이다. 동생들의 학비를 다 대고, 남동생이 사업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 빚을 다 갚는데 꼬박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도 또 동생의 사업이라 일컬어지는 도박 빚을 갚아달라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없이 편지만 남긴 채 집을 나와버린 것이다. 그러면 이제 자신을 위해 맘껏 즐길 만도 하련만, 고작 한 달에 35만 원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어불성설이란 말인가?

 

 최근 나는 일자리를 그만두고, 생애 처음으로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쉬고 있다. 30대까지는 거의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살아왔기에, 겪어볼 수 없던 경험이다. 그런데 40대 들어서 은행에서 청원경찰로도 일하고, 구청 소속으로 공원에서도 일하니까, 8개월의 실업급여가 지급된단다. 150만 원 정도 되는 금액이다. 아무래도 내가 늘 최저임금으로 살았기 때문에 책정된 금액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다. 50만 원은 부모님 생활비, 50만 원은 빚을 갚기 위한 저축, 그리고 남은 50만 원에서 내가 한 달 동안 쓰는 금액은 약 20만 원 정도이다. 물론, 내가 부모님과 같이 사는 이유로, 식비라든지, 여타 다른 생활비는 따로 들지 않는다. , 아파트 한 채를 가지고 있어서 분기별로 재산세를 내야하고, 요새는 치아 치료비용 때문에 거금 110만 원이 따로 들기는 했지만,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적은 생활비로 내 개인은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책에 나온 이모와 같이 일주일에 며칠을 정해놓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담배는 하루에 네 가치 정도, 술은 어차피 지병 탓에 이제 더는 할 수 없기에 금주를 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나온 이모처럼 나는 수녀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일주일에 내가 정한 5일 정도의 도서관 출입을 늘 지키지 못하고 있고,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면서 집구석에서 퍼질러서 있기 일쑤이다. 다만, 그런데도 내가 이 삶에 만족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이다. 처음으로 돈에서 자유로운 시간, 나만을 위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런 외부의 방해도 없이, 구속도 없이. 그런데 사람이란 참 이상하다. 이런 삶에 대한 만족 탓인지는 몰라도, 내 성격은 예전에 비교해 몰라보게 변했다. 점점 인간관계를 귀찮게 여기고,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물론, 나와 정말 친한 지인들의 경우는 예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지인의 경우라도 내가 만나는 횟수는 일 년의 한두 번이 고작이다. 그러니 거의 일 년 내내 나는 한 달에 한 번 나가야 하는 문학 모임을 별도로 두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극히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갑자기 일하는 곳에서, 갑자기 친한 척하며 다가온 초등학교 때 친구 때문에 당혹한 적이 있었다. 분명, 친했던 것 같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말이다. 그런데 그게 이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갑자기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고, 자신의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 내 언어 능력을 살려보자고 제안하고, 자꾸자꾸 나를 귀찮게 한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여러 번은 아니고 그저 한두 번이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귀찮고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나는 그만 한마디하고 말았다.

 

 “, 왜 자꾸 친한 척하려고 하냐? 우리 별로 안 친하잖아.”

 

 이 소설 속의 이모도 그랬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일상에 균열을 준 얼어버린 수도 배관 탓에 엮이게 된 늙은 노숙자와 그녀를 할머니가 부른 물고기 눈의 여자와 그 남편, 그리고 관리실의 늙은 당직자와 죽이 잘 맞던 두 기사 때문에 예전 추억의 상념 속으로 그만 빠져들고 만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간절하고 처량한 눈길로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내밀고 있다.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아마 그것은 그녀를 향한 구애의 손길이거나, 관계에 대한 애절한 몸짓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 손바닥에 자신이 피던 담뱃불을 지져버린다. 왜 그랬던 걸까? 단순히 그녀는 그때 그것이 귀찮고, 성가셨던 것뿐이었다. 그랬으면 이제 그만인 것을 왜 그녀는 죽기 전 다시 그 일이 떠올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 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대체 무엇일까? 지금 현재, 나를 지탱하고, 살아가게끔 하는 그 고약한 것은? 사람들에게 가닿지 못하고, 가닿을 수 없게 만드는, 나의 불가촉천민의 기질은 대체 무엇이고, 가닿은 사람들마다 데인 자국들은 과연 그 사람들의 상처였을까? 아니면 나의 상처였을까? 그 고약한 자국들이, 아니 그 고약한 상처 자국들을 바라는 외로운 마음들이, 우리를 모두 불가촉천민으로 규정짓게 하는 건 아닐까? 그래도 자꾸 손을 내밀어 보고 싶다. 그 누군가에게. 그리고 아물 수 있는 만큼의 깊이로 다시 한번 진하게 데이고 싶다. 그 누군가에게. 그리고 만약 나에게도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누군가를 깊게 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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