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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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 벽이란 화두 혹은 신이란 벽 그리고 천국에 관한 물음

 

 

  어릴 적 문고판으로 접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 제대로 된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접한 것은 21살 적 성공회 수도원에서였다. 당시, 종교와 사랑문제 등,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나는 성공회 수도원에서 몇 개월 동안 머물렀었다. 그렇지만 1달 앞으로 나가온 군대영장 때문에 결국엔 그곳에서도 떠나야만 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쉬 떠날 수 없는 발걸음 때문에 나는 2박 3일 정도의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한 피정을 신청하고, 홀로 방안에 틀어박혔다. 말이 수도원이긴 하지만, 일종의 기독교 수도공동체와 가까운 그곳에서 피정, 그것도 혼자서 방안에 틀어박혀서 금식에 가까운 피정을 하는 일은, 그 당시 30년 가까운 그곳의 역사에서 처음이었다고 한다. 뭐 여하튼, 막상 피정을 신청하긴 했는데 그 좁은 방안에 혼자서 무얼 해야 할지, 당최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막연하게 보내고서, 문득 책장에서 눈에 보이는 책 한 권에 눈길이 갔다. <죄와 벌>, 그 수도원에 들리기 전 혼자 여기저기 방랑을 하면서 무작정 사두었던 책들 중 하나였다. 약 800페이지의 빽빽한 글씨들, 그 당시 갈 곳 없던 내 마음과 뒤섞여, 너무나 길고 길었던 그 하루 흡사 사투를 벌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렇지만 고통을 쾌락으로 즐길 수 있다는 인간의 권리와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은 당시 감수성 예민했던 내게 막연하게나마 알알이 박혔고, 후에도 끊임없이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던 듯싶다. 때문에 군대를 제대하고서 나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카라마조프가 형제들>과 그의 단편 중에 가장 그를 잘 대변하고 있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찾아 읽게 되었다.

 

 

  아마 신학을 전공했고 아직도 그 선상에서 헤매고 있는 내 개인의 관점이기에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대한 해석은 지극히 종교적일 것이란 예상과 전제를 먼저 해두고 싶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사상서 비슷한 아니, 사상 나부랭이 비슷한 1부 <지하>에 대한 내 개인의 해석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벽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두고 싶다. 벽!! 실제로 소설 속에서도 등장하는 벽에 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은 일종의 화두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잠깐 생각해 본다. 물론, 소설 속에서 벽은 신 혹은 자연의 진리와 가까운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 벽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인간 군상들이 더불어 표현된다. 벽을 부수려는 자, 벽에 기대어 안주하는 자, 혹은 벽 주위를 한없이 맴도는 자... 그리고 결코 부셔질 수 없는 벽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러한 까닭으로 끝까지 품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자들... 아니, 어쩌면 지금의 나의 이런 묘사에도 모순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벽을 부수길 원하며 동시에 부술 수 없음을 수긍하며, 벽에 기대어 안주하길 원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하며, 벽 주위를 쥐새끼처럼 한없이 맴돌면서도 동시에 벽 앞에서 면벽하면서 벽의 의미를 묻는, 그런 복잡한 유형의 인간일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에게 있어 벽은 ‘신이란 화두’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는 왜 그 신이란 화두를 가슴속에 깊이 떠안고 고통스러워하면서, 동시에 그 고통의 쾌락을 즐기면서도, 마지막 순간엔 침 뱉을 수밖에 없던 것일까? 그리고 지하로, 히키코모리라기보다는 반항자로서 언더그라운드로 침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2부 <진눈개비에 대하여>서 그는 1부 <지하>로 가게 된 그 이유에 대해 문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주인공인 <나>는 당시 24살의 나이로 관청에서 말단관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심술궂은데다 자기의 지적인 능력으로 인해 남을 깔보는 경향마저 있기에 주위에 친구가 없다. 게다가 그 나이에 벌써 몽상가로서 혼자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취미마저 있어, 그가 남들을 먼저 찾는 일도 거의 드물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도 인간인지라, 내리 몇 달 혼자 공상에 처박혀 살 순 없는 까닭에, 그의 직장상사인 안톤 안토니치라는 지인과 그의 동창생인 시모노프라는 지인이 있기는 했다. 이야기는 바로 이 중 시모노프라는 그의 동창생을 찾아가면서 부터 시작된다. 지겨운 몽상의 나날 끝에 찾아온 고독을 참지 못하고 찾은 그의 예정 없던 이 방문은 우연히도 주인공 자신이 배제된 일종의 동창회 자리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동창생 중 가장 그의 증오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즈베르코프의 환송회에 대한 기획회의 자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서 그냥 돌아서면 될 것을, 어떻게 돼먹은 인간인지 이 주인공 <나>는 기어코 그 환송회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사실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란 사실은 논외로 치고, 관청의 일개 말단관리로서 그 자리에 참석한다는 자체가 경제적으로도 그의 한 달 치 봉급이 드는 무리한 자리였다. 그럼에도 가불까지 받아가면서 그가 기어이 그 자리에 참석한 이유는 그의 숙적 즈베르코프를 골탕 먹이고 싶은 그의 못돼먹은 심술 때문이었다. 그런데 골탕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골탕에 무시까지 당한 쪽은 주인공 그 자신이었다. 때문에 1차로 비싼 레스토랑에서 자리 이후 2차 기방까지 갈 돈이 없던 그는 시모노프에게 일종의 구걸과도 같이 돈을 빌려 그 자리를 쫓아간다. 그리고 쫓아가는 마차에서 1차 자리에서 모욕 받았던 순간을 내내 곱씹으며 즈베르코프의 따귀를 갈긴 후 결투신청을 할 몽상에 빠진다. 하지만 기방에 들어섰을 때 이미 그들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 이후였다. 그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가 원하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사실 따귀를 갈길 용기도 결투를 할 자신도 없는 그런 비겁한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그런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기방 안으로 들어가 처음 보는 창녀와 뒹구는 일일 뿐일 게 분명하다. 아니, 자신을 모욕할 용기도 없기에 창녀를 흠씬 모욕하고 경멸하는 행위가 그런 부류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만난 창녀인 리자는 그가 쉬 모욕할 수 있는 부류의 창녀가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일한지도 얼마 안됐을 뿐더러, 무언가 창백하면서도 고통을 머금은 표정은 그녀를 모욕하겠다는 그의 첫 의도와 달리, 그녀를 진심으로 교화하는 일로 전도되어버리게끔 만들어버린다. 게다가 그와 같은 인간에게도 일말의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지 그는 그의 집주소를 그녀에게 남기기까지 한다. 때문에 그녀는 며칠 뒤에 그의 집을 찾아온다. 그런데 그 시점과 상황이 적절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로선 가장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던 그의 본질을 들키게 되었으니까... 그의 하인에게 월급을 줄 돈이 없어 무시 받으면서도, 한없이 비겁한 이유로 자존심을 내세우는 옹졸하기 그지없는 그의 본질을... 그런데 오히려 거기서 그녀는 그녀 자신보다 불쌍한 그의 그러한 본질을 봄으로써 그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의 온 마음을 담아 바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음에도 아니, 앞으로 그녀를 통해 얻을 그 자신의 구원까지 충분히 예감하고 있음에도 그는 그녀에게 화대를 지불하면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아마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짧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과 문학에 대해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1부 <지하>에서 거의 직선적으로 그의 사상을 피력한 후, 2부 <진눈개비에 대하여>에서 그의 사상의 실험으로써 문학의 특질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밝힌 동어반복이 될지 모르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1부에서 벽이란 화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벽이란 화두는 동시에 신 혹은 천국이거나 구원이란 화두에 관한 비유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이 책 속에서 이미 표현했듯이 인간의 모든 모순과 절망이 통제된 완벽한 천국이란 장소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곳이 존재한다면 그곳에서 인간은 침 뱉을 권리조차 없는 그런 존재여만 하는 것일까? 물론 그러한 완벽함을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이 그곳에 대해 상상하고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상상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는 순간, 그러한 장소 혹은 그러한 존재는 인간의 오성을 넘어버려 판단불가라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즉,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것의 존재를 신이라 규정짓고 그곳에 귀의한다. 아니, 그 품에 안착한다. 하지만 인간의 것이 아닌 것을 어떻게 인간이 규정하고 안착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논리적 모순을 누군가는 이율배반이란 철학적 용어로 해결하고, 신 존재의 당위성에 관해 말하려 했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 자체가 이율배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이 또한 지극히 인간적인 언어란 이성의 판단범위에서 이루어졌고, 신의 당위성이란 말 자체가 이미 신 존재의 물음에 관해 배제한 채 <신은 인간의 이성과 질서를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논리인 까닭이다. 한 마디로, 너무나 인간의 경험과 이성적 한계치를 무시한 허공에 붕 뜬 논리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간경험과 이성적 한계치 안에서 신과 구원에 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소설 속에서 앞의 이율배반이란 논리를 펼친 칸트에 관해서 언급한 글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이러한 논리의 역방향으로 그 자신의 사상을 구축했는지 솔직히 단언할 자신은 없다. 그렇지만 칸트가 그보다 1세기 앞선 사람이고, 그를 통해 유럽의 사상적 방향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을 떠올려 볼 때, 도스토예프스키가 칸트의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했으리란 점은 쉬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유럽의 정황과 기독교에 관해 오랜 전통의 뿌리를 지니고 있던 러시아적 상황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전까지의 전제와 달리 인간의 경험과 이성치 안에서 <만약 신이 없다면 인간이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란 물음을 문학을 통해 던지고 실험해 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고 싶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한 장르가 철학이 아닌, 다름 아닌 문학인 까닭이다. 만약 그가 철학이란 장르를 선택했다면 신에 관한 문제에 대해 풀어가기 위해 아무래도 인간의 경험보다는 이성이라는 논리에 기댔을 것이다. 즉, 논리의 기본인 대전제를 통해 지극히 관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경험을 더 중시할 수밖에 없는 문학이란 장르를 택함으로써 인간의 경험치 안에서의 이성으로 신의 문제에 관해 생각하고 한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왜냐하면 2부에서 그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구원과 신의 세계를 ‘리자’라는 존재를 통해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리자’라는 존재의 사랑을 그는 화대를 줌으로써 거절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신이란 존재 혹은 천국이란 완벽한 장소가 있을지라도 인간이 그곳에서 침 뱉을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이란 존재가 그러한 모순덩어리일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인간의 모순이 동시에 신과 구원이란 불가해한 존재와 개념을 가능케 한다고 그는 믿고 있는 듯싶다. 왜냐하면 소설 마지막에도 나와 있듯이 그 스스로 원해서 들어간 지하임에도 그는 지하에서 탈출하기를, 어쩌면 다시 ‘리자’라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기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단 이는 그의 이 소설 뿐 아니라, 여러 작품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죄와 벌>에선 노파를 죽인 죄를 지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라는 존재를 통해 그의 죄를 회개함으로서 구원을 얻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의 형벌을 의미함으로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는 친부살인을 통해 <신이 없는 자유>를 꿈꾸었던 이반의 모순과 정작 이반의 사상을 실행해 옮긴 스메르코자프의 자살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사상의 문학적 실험이 지속적으로 보인다.

 

 

  이제 내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허공의 붕 뜬 말들로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인 이야기를 대충 정리하고 싶다. 왜 하필 또 다시 17년 만에 예전의 성공회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고서 이 소설을 떠올렸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처음에도 밝혔듯이, 내 이십대의 모든 화두는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 내가 천국이라고 상정해둔 그곳에 다시 돌아갈 때 어떤 화두를 가지고 가야할지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던 거 같다. 그리고 거의 흐릿한 기억이었지만 다행히도 이 소설을 택한 것은 내 개인적인 물음들을 정리하는데 다소간의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과연 그곳에서 내가 침 뱉을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이 과연 아직도 여전히 내게 17년 전처럼 천국일 수 있을지도 나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반드시 가지고 들어가야만 할 거 같다. 그곳이 내게 천국이라면 내가 과연 침 뱉을 수 있을지, 없을지... 과연 천국이란 건 내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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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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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의 미의식에 관한 화두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접한 지는 어언 10년이 지난 듯하다. 당시 문창과인 동생의 권유로 읽게 되었는데,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그대로 함몰하여 책을 놓을 수 없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그 이전부터 한국문학보다는 외국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를 시작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 등의 책을 제법 적지 않게 읽어 보았고,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시대별 일본단편전집도 사서 읽었을 정도로 일본소설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오에 겐자부로의 경우는 이십대 초중반의 내 사상적인 궤를 다지는데 좋은 단초를 제공하여, 지금도 손에 꼽는 작가 중에 하나이다. 그렇지만 그의 그 어떤 소설도 아니, 일본 소설 중 그 어떤 소설도 ‘금각사’만큼 나에게 충격을 준 소설은 없었다. ‘금각사’ 이전에 랭보나 보들레르와 같은 시인들, 그리고 까뮈와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소설가들을 통해 어느 정도 사상적인 진일보와 문학적인 정수를 느꼈다고 자부했던 나였음에도 ‘금각사’는 또 다른 충격으로 내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 나에게 그토록 ‘금각사’란 소설을 통해 강렬한 충격으로 내 무의식에서 의식의 수면으로 파장을 울린 것일까?

 

 

  이십대에 많은 방황을 통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던 나는 동시에 지적인 모험도 결행해야만 했다. 기존에 읽어왔던 철학서와 신학서적을 탈피하여, 많은 불경들과 노장자 사상이 담긴 책들을 접한 것도 그러한 모험의 일종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 불경의 ‘금강경’과 노자의 ‘도덕경’은 당시에 내 서구적인 정신세계에 일종의 경종을 울리는 울림이며 떨림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 때의 감정을 재구성하여, 그 때 알게 된 얕은 동양적 사상을 가지고 ‘금각사’에 대해 접근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오히려 후에, 내 신학적 세계관과 문학적인 세계관의 조화를 시도하기위해 집착했던 ‘신학적 미학’이란 관점에서 내 접근방식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정직하고, 내 개인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글을 통해서 나는 ‘금각사’가 지닌 많은 단층 가운데 미적인 질문에 국한하여 내 개인의 질문을 던져보고, 글을 통해 미시마 유키오가 드러내려고 했던 지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내 개인에게 있어서 미적인 의식이란 것을 처음 갖게 된 것은 -의식적인 표피로 끌어내서 화두로 삼기 시작한 시점은-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의 경구를 통해서 일 것이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당시, 신학적인 딜레마에 빠져있던 나에게 이 경구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을 뇌리에 심겨다 놓았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름다움이 주는 표피적인 언어는 내게 있어 여자, 꽃 혹은 자연의 엄청난 풍광들, 고작 이런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지 지금도 나는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아름다움은 이런 표피적이고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영원성과 숭고성을 간직한 아름다움이어야 할 텐데, 그러한 아름다움이 어떻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 말인가? 결국, 여기서 아름다움은 다시 형이상학적인 논제로 탈바꿈해 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철학적인 문제로 넘어가 진리와 아름다움의 구분이 다시 모호하게 되어버린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다시, 이 세상 것이 아닌, 저 멀고 먼 누구도 가 닿아 보지 못한 세계의 것으로 영영 손에 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대상이 없는 아름다움의 논리는 이러한 자가당착에 빠질 공산이 크다. 결국,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에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것이 심각한 자기투영이든 혹은 왜곡이든 간에, 반드시 아름다움은 대상을 필요로 한다.

 

 

  시골에서 중의 아들로 태어나 말더듬이라는 외형적 장애를 통해 심각한 자기비하란 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어릴 적 막연하게 아버지로부터 ‘금각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듣는다. 이를 통해 그는 막연하게 ‘금각사’를 동경하며,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와 대비되어 소설 첫 장엔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장까지- ‘우이코’라는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이코에게 있어서 그는 한낱 말더듬이에 불과한 미미한 존재이다. 아니,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소설 전반에 걸쳐 그는 우이코로 되살아나는 여성들과 불협화음을 내며, 심지어 그 앞에서 무능한 자기 자신에 대한 도취감에까지 젖어든다. 그렇지만 금각사는 다르다. 비록 첫 대면에서는 그가 상상해온 금각사와 달라, 조금은 실망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생생히 되살아나 그의 뇌리에 각인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아, 여성과 관계를 맺으려 할 때에도 나타나 모든 관계를 망치고, 오직 스스로만 그 아름다움을 뽐내기까지 한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그 아름다움이 가장 절정을 발하던 때이다. 주인공에게 있어서 금각사가 가장 아름다웠던 때는 다름 아닌 교토 공습이 곧 있을 것이라는 풍문과 함께였을 때이다. 즉, 곧 파괴되어질 가능성을 품고서 영원을 가장한 채 그 자리에 고요히 서 있는 금각사의 모습이 주인공에게 있어 가장 절정의 풍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교토 공습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금각사는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 어쩌면 이때부터 막연하게 주인공의 내부에선 금각사에 대한 방화의 꿈이 꿈틀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과정으로 가기 위해서 그는 ‘가시와기’라는 그의 또 다른 내면을 만나야 했다. 가시와기는 심각한 안짱다리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는 장애를 가진 이다. 그러하기에 그 또한 주인공과 같은 심각한 자의식에 사로잡힌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주인공과 달리, 그러한 자의식을 외부적으로 표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안짱다리임을 통해 자신이 다른 이와 다른 특별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그를 통해 여자를 유혹한다. 그에게 있어 세계는 한낱 실체가 없는 미몽일 뿐이다. 즉, 실체가 없는 인식의 대상일 뿐인 세계 속에서 그의 치기어린 행위들과 실험들은 그 근거를 보장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공에게 있어서 세계는 현존하고 있다. 아니, 현존하고 있는 금각사 그 자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모든 목전에서 생생하게 드러나, 그의 진짜 생을 소멸케 한다. 그렇다면 결국, 인식의 대상이 아닌 금각사를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완전하게 소유하든가, 아니면 파괴하든가. 결국, 그는 파괴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은 기이하게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불경의 글귀로부터 그 행위의 근거를 삼고 있다. 어쩌면 이런 맥락에서 그에게 있어 금각사는 부처 그 자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금각사’란 확연한 대상이 없는 내게 있어서, 그리고 말더듬이라는 특수성이 없는 내게 있어서 이 소설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쓴 미시마 유키오 역시, 금각사의 내부를 실제 본 일이 없었고, 말더듬이가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서두에 언급했던 나의 화두로 이 글을 접근하는 방식이 어쩌면 더욱 ‘미시마 유키오’스러운 방식이고 결국은 문학적 방식이 이런 것이 아닌가, 잠시 생각해 본다.

 

 

  문학회 동아리 활동을 하던 신학교 시절, 동아리에 한 선배가 갑자기 화두 하나를 던져 놓고 모임을 탈퇴하였다. ‘시가 그리스도를 죽였다.’ 시와 선배 그 자체가 등가처럼 여겨질 정도로 우리에게 정신적 지주였던 선배의 경구였기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었다. 특히, 가장 친했던 후배로서 나는 선배의 그 말에 한 학기 이상 고민하며 씨름하여야만 했다. 그렇지만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언어 자체에 있지 않았다. 그 이후의 선배의 행적이 우리들에겐 더욱 충격이었다. 술, 담배를 잠깐 절제한 것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신학이라는 길을 포기하고 사회인으로서 발을 내딛은 행위를 시작으로, 이전과 확연히 다른 여러 선배의 언행은 부지불식간에 선배의 삶과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때문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독교 자체에 대해 커다란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대체 무엇이 내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를 그렇게 치닫게 만든 것일까? 원래 선배에게 있어서 ‘시’와 ‘그리스도’는 양립 가능한 ‘미’와 ‘진리’의 대상 그 자체였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분명히 ‘미’와 ‘진리’가 일치하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틈새가 발생한다. 특히, 인식의 무한한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시’가 ‘그리스도’에게 갇힌다는 문제는 당시 우리 문학동아리 내에선 일정부분 수긍하고 들어가는 지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시’가 우리 인간의 부조리한 삶 그 자체를 대변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시’의 자리를 내줄 수 없다고 은연중에 모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선배는 그 와중에도 꾸준히 혼자서 나름 그 일치의 지점을 찾으려고 했었던 거 같다. 그러다가 결국 ‘시’와 ‘그리스도’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시가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화두를 꺼내놓고서, 우리 곁을 떠났다. 아니, 내 곁을 떠났다. 대체 무슨 연유로 ‘시’가 ‘그리스도’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왜 글속의 말더듬이 주인공은 ‘금각사’를 불태워야만 한단 말인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단 말인가?

 

 

  지금 나는 기독교와 불교라는 어쩌면 근본적으로 너무나도 다른 두 종교에 거기다 문학적 화두까지 곁들어, 무리한 화두의 재구성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소 무리하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질문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먼저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에 대한 의미 해석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부처라는 대상의 한계에 직면한 이에게 던지는 화두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부처라는 대상은 의미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부처를 공부하고, 부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한계를 규정짓고 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부처에 대해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진정한 부처의 의미에 대해 잃어버리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당연히 그들이 그들 안에 재구성한 부처의 틀을 깨부숴야만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의미는 자기 안에 상정한 부처의 틀을 깨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대중들은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대다수 대중들은 자기 안에 상정한 부처란 틀조차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부처라는 조각상이라든가 혹은 부처에서 비롯된 수많고 현란한 신들의 이름에 현혹되어 그저 일신상 관련된 자기 안위만을 허공에 대고 염불할 뿐이다. 누가 잘 되게 하소서, 혹은 우리 아들 이번 대학시험에 꼭 붙게 하소서, 등등. 그렇다면 부처란 외부의 신을 부수는 의미 또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금각사’의 글속의 주인공은 왜 ‘금각사’를 불태운 것일까? 이 두 가지 의미이거나 아니면 다른 의미로써 그는 ‘금각사’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금각사’의 주인공의 미의식에 대해 이 글에서 해석하는 것은 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첫째는 그 의식의 폭과 깊이가 글속에서 거의 독자가 따라잡기 어렵게 확장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그러한 의식의 폭과 깊이가 내가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수준에서는 가닿기 어려운 지점이기 때문이다. 다만, 3번 정도 ‘금각사’를 읽으면서 내가 잡을 수 있었던 글속 주인공의 의식은 ‘금각사’에 대한 병적일 정도의 집착이다. 그리고 그 집착은 그것이 외향적인 것인지 혹은 내향적인 것인지 구분하기 모호하지만, 주인공에게 있어서 부처에게 가닿는데 분명히 장애가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집착을 포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종교가 불교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는 분명히 모순이 된다. 즉, 주인공에게 있어서 ‘금각사’는 미의식 그자체이지만 동시에 그 까닭으로 ‘부처’와는 양립할 수 없는 ‘집착’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주인공은 ‘금각사’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처란 진정한 미의식 그자체에 도달하기 위해. 어쩌면 나의 가장 존경하던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지만 아직도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글속 주인공이 ‘금각사’를 불태움으로써 정말로 그가 원하던 부처에게 가닿을 수 있었을까하는 점이다. 왜 ‘금각사’도 ‘부처’도 함께 양립할 수 없는가? 왜 일반대중이 그리고 그 일반대중의 하나인 내가 내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허공에 대고 기도를 하고 염불을 외우는 것이 잘못됐단 말인가?

 

 

  여기서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내 선배에 대해, 그리고 내가 다시금 반문을 던진 질문에 대한 방향으로 더 확장해 나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처음 질문하기 전 밝힌 것처럼 절대적인 미의식이란 대상이 현재 없는 내게 있어서, 그리고 말더듬이라는 특수성이 없는 내게 있어서, 이런 질문은 애초에 양극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달리 길이 없기 때문이다. 또, 내가 아직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온전하게 품을 만큼의 지적인 폭과 깊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정반대 급부에 있기 때문일까? 나는 여전히 나의 선배를 존경하고 있고,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에 나오는 미의식에 관해 환상을 품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바라본다. 내가 언젠가 이 버거운 화두에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기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품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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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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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소설과 작법 -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대성당>이란 작품의 자자한 명성 때문에 이전부터 읽어보고 싶던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이 번 기회에 읽을 수 있게 되어 처음부터 나는 매우 기대가 컸다. 아마도 제목에서 오는 아우라와 더불어 얼핏 들었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인상이 내게 크게 각인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자했던 명성의 <대성당>을 구입하여, 첫 장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부터, 기묘한 예감에 휩싸였다. 왠지 이 작가의 작품이 내가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별 것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그의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대부분의 작품을 읽은 지금, 애석하게도 나는 나의 그 첫 예감이 적중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물론, 그 숱한 작품 가운데 인상에 남았던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성당>을 포함하여 몇 작품은 내게 어떤 여운 비슷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간결하면서도 디테일한 묘사 가운데 풍겨오는 현대적인 감각에서 내게 부족한 무언가가 있음 또한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뭐랄까... 이건 정말 하루키의 단편을 접했을 때 느낌과 흡사하다. 소년의 감성으로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읽고 그 여운에 한껏 취해 기대했던 하루키의 작품들은 내 기대를 무참히 산산조각 내버렸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물론 10년이 훨씬 넘게 지난 지금, 그리고 그 동안 단 한 편의 하루키 작품도 읽지 않은 내가 하루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하기에 그저 지금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오래된 기억의 편린일 따름이다. 아니, 어쩌면 그 때문에 내가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레이먼드 카버일 것이다.

 

 

  먼저, 그가 이야기하는 문장의 간결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사실, 이 부분에 관해선 딱히 할 말이 없다. 아마 작가라면 누구라도 문장을 간결하게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한 작품 내에서 간결한 문장과 길게 늘어지는 문장의 배치를 구사하는 것은 작가적인 선택의 자유이다. 동시에 그러한 이유로 어떤 문장에 관해 기호를 가지는 것은 또한 독자의 선택의 자유이다. 만약에 간결한 문장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두 가지 점 정도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작가들이 더 이상 만연체나, 화려체에 대한 집착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측면에서 분명 긍정적인 기능으로 작용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상에 대한 집착이라든가,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에 대한 회의가 만연하다는 반증이라고 내 개인적으론 분석해 본다. 둘째로, 대중의 집중력에 대한 부재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작가는 실험적이고 어려운 작품으로 대중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러한 작품들의 추구를 중단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 지금은 대문호라고 일컬어지지만, 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등이 만약 그들의 문체와 정신을 글을 통해 실험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근대의 정신적인 풍요에 대한 역작용으로 나타난 오늘날의 정신적인 것들에 대한 평가절하조차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문학이 그리고 예술이 그 정신적인 선도자 위치에 대한 자리를 스스로 포기해야할 아무런 까닭이 없는 것이다. 물론, 쉬운 것을 추구하는 대중에 발맞추어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동시에 그러한 대중의 기호를 끌어올려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위의 이야기에 연장성상으로 묘사에 대한 중요성에 관한 부분이다. 하루키의 단편은 이제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카버의 경우 서두가 간결하면서도 세세한 묘사를 축으로 이루고 있다. 아니, 내 개인적으론 소설의 절정에서 결론까지, 거의 전반적으로 묘사를 축으로 두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던 거 같다. 카버의 소설이 묘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눈에 생생하게 그려지지 않은 아이러니한 이유가. 물론, 이 말은 약간의 과장과 풍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의 뼈는 존재한다. 왜 소설이 이렇게까지 묘사에 집착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 그리고 이렇게까지 현대소설이 묘사에 집착하는데 왜 영화에게 그 문화의 왕좌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문 등등. 위의 두 의문은 분명 아이러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이다. 물론, 많은 소설들은 묘사를 통해 분위기를 자아내고, 어떤 복선과 암시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현대소설, 특히 카버의 소설에서 그런 작품들은 많지가 않다. 그렇다고 어떤 <의미>에 천착한 것도 아니다. 때론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하는 의문을 충분히 줄 만큼 아무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사건과 정황에 대한 묘사로만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건과 정황이 카프카 식으로 어떤 현대적 우화의 감각을 띠었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봐도, 난 그 연결고리를 쉽게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묘사에 천착하는 것일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어서 소설의 축으로 삼은 것일까? 재차, 삼차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의미>에 관한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의미에 천착하는 성향이 있지만, 동시에 그런 이유로 소설이 의미에 천착할 까닭은 없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소설이란 것이 앞에서 말한 단순히 사건과 정황에 대한 묘사로 끝나는 것도 안 될 상황이겠지만, 의미를 캐기 위한 수단과 도구가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기록일지도 아니고, 어떤 의미의 설파를 위한 선전도구도 아니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소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만 할까? 어떤 의미에서든, <의미>라는 이면을 가지고 있는 언어가, 그리고 그 언어작업의 결정판인 소설이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뭐랄까... 마치 내게는 소설의 궁극인 시와 소설이 합일된 작업처럼만 느껴진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존재 불가능한, 존재한다면 그러한 이상 속에서만 가능한 작업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견해일 따름이다. 누구도 시와 소설이 합일되는 따위의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또 그래야할 까닭도 없다. 하지만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 믿음 때문에, 의미에 대해 자유로운 소설에 대해 나는 쉽사리 인정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매양 소설을 추구한 어떤 기록일지일 뿐이다.

 

 

  빙빙 돌아갔던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다. 앞에서 말한 대로 카버의 소설이 그렇게 간결하기만 하고, 묘사만 추구하는, 아무 의미 없는 기록일지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많은 소설이 그런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느껴진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 또한 하나의 경향이고, 하나의 글쓰기일 것이다. 하지만 의미라고 표현하기엔 한정적인 정신적인 무엇과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시적인 무언가를 이상으로 추구하는 내 개인으로선, 그의 소설의 경향과 작법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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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조네 사람들 김소진 문학전집 1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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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조네 사람들 - 똥뚯간에서 반짝이는 별 이야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다는 속담이 있다. 아마도 이러한 속담이 나오게 된 그 저변은 무언가 기대치가 높을 때 그 기대만큼 채워지지 않는 우리들의 심리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장석조네 사람들’의 경우, 예전부터 많이 들어오던 작품이라 내게도 이러한 기대치가 작용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작품에게서 만큼은 이 속담이 내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만큼 읽는 재미가 쏠쏠하였고, 아직 이 작품을 되새기기엔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무언가 가슴 속에 남는 작품이었던 거 같다. 뭐랄까... 걸지게 한 판 놀아재낀 기분이라고 하면 맞을까? 그러면서도 가슴 한 편에서 짠하게 남아 있는 여운은 우리네 특유의 해학과 설움이 곁들어진 마당놀이라도 본 기분마저 들게 한다.

 

 

  자기보다 곱절은 어린 성금 어매를 얻어 전전긍긍 눈치 보며 살아가는 오영감, 흑산도에서 논다니를 하던 여자를 들어앉혀 놓고 의처증에 걸린 겐짱 형제, 똥을 푸며 살고 있는 광수 애비와 비운의 육손이 광수형, 왕년에 갱도에서 광부로 일하던 폐병쟁이 진씨, 노름에 빠져 허망하게 돼지꿈을 날린 양씨, 반병신이 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쌍과부집 택이 엄마, 양공주 딸내미 때문에 코쟁이 사위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욕쟁이 함경도 아즈망, 일찍 지아비를 여읜 며느리와 함께 사는 길노인 그리고 양은 장수 끝방 최씨와 나주댁까지, 장석조네 아홉 집 식솔들의 이야기는 집안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변소에 아침이면 줄줄이 서서 기찻길을 만드는 우스꽝스런 풍경처럼 체면과 비위를 따지지 않는 원초적이고 진솔한 이야기이다. 그러하기에 어떤 의미에서 이 소설을 꿰뚫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은 전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변소라는 본능적인 장소 앞에선 누구나 각자 나름의 치열한 이유가 있고, 급박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이야기한다. 얘들 먼저 변소에 보내야 한다고. 그렇지만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더 깨끗하고 정돈된 변소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지저분하고 더러운 변소는 어른들의 몫이면 족할 일이다. 즉, 그들의 시대로 끝을 맺어야 하는 바로 변소 같은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장석조네 사람들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변소 같이 더럽고 추접한 삶이라고 해도 꿈도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여기에도 다른 하늘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별이 뜨고, 별이 진다. 그리고 지금부터 나는 그 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돌산 아래 채석장에서 채석장이 일을 하고 있는 박씨와 똥지게꾼 광수 애비 그리고 양은 장수 끝방 최씨가 모여, 나름의 사연을 갖고서 술 한 판을 벌인다. 박씨는 여름내 짬짬이 일군 무밭이 얘들 서리에 엉망이 되어 말짱 도루묵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심정으로다, 최씨는 오영감네 성금 어매를 길쌈했을 때 품었던 흉금스러운 마음 때문에, 그리고 광수 애비는 장석조네 아랫집 갑석 아범네서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있는 굿판의 가짜 무당과 벌인 낯 뜨거운 정사와 밀약 때문에 무언가 켕기는 심정으로다 술을 마시고 있다. 그런데 이 게 일이 꼬일라믄 꼬인다고 그저 그 여편네와 다시 한 번 살갗이나 부빌 심산으로다 시키는 대로 한밤에 택이네에 몰래 사람 모양의 제웅을 파묻은 건데, 그걸로다 이 여편네가 지가 무신 영험한 신이라도 씐 양 무당 행세를 하는 것이다. 거기다 굿을 한답시고 그 집안사람들 몽땅 바깥으로 물리고선, 쇠붙이들을 모아 이불에 덮어두라고 하더니, 돈 되는 건 죄다 들고 튀어버린 게 아닌가! 그런데 요거일랑 상황이 매우 재미있다. 보통 다른 소설 같으면 여기서 켕기는 게 많은 광수 애비가 제 몸 하나 집어넣기 힘든 쥐구멍에 긴 꼬랑지랑 늘어뜨리고 숨던가, 가타부타 다른 상황이 주어져야 하는데, 되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게 아닌가! 그것도 전혀 켕기는 거 없는 사람만치로. 이쯤이면 남사시럽기라도 해야 할 텐데... 한 술 더 떠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별을 안주삼아 이바구를 까대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 남부끄러울 거 없는 박씨는 그저 무수한 별을 헤아리며 감탄만 할 뿐인데, 이 잡것들 같은 두 인사는 여기다 개똥철학까지 덧입히는 꼴이 제깐엔 여간 시답다. 양은 장수 최씨는 별은 자기 쟁개비들이라믄서 지가 물건 하나를 팔아도 그게 시시껍절하게 파는 게 아니라, 솥아! 국자야! 잘 가그래이, 가서 그 집 살림살이 본때 있게 빛내거라고 빌고 또 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파는 쟁개비들은 모두 그냥 국자나 솥이 아니라 오롯이 빛나는 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보태서, 똥지게꾼 광수 애비는 별을 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거름으로 뿌린 똥을 먹고 자란 배추랑 무들이 밤새, 별이 내린 이슬을 먹고, 바람을 먹어가며 물이 차오르는데, 그런 별의 선물을 먹고 우린 또 똥을 누니까 별이 똥이라고 박박 우겨대는 것이다. 참 기가 찰 노릇이다. 그렇지만 그 밤 아이러니하게도 하늘에서 별똥 같은 별똥별이 떨어지고, 이에 셋은 기분이 달떠, 누구랄 거 없이 함성을 내지르며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쯤 되면, 아마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대강은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네 오만군상들이 각자 하나쯤은 숨기고 싶은 더러운 똥둣간 같은 이야기들을 품고 살지만, 여기선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찍찍 휘갈겨 쌓은 똥들이 이곳에선 별이 되어 하늘에서 총총거리며 되살아나는 까닭이다. 사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 숱한 별들을 다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수많은 별들은 우리들이 찍찍 갈겨놓은 똥인 동시에 우리들에게 되돌아온 별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헤아린다 하여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숱한 사연들을 다 모른다고 해도 누구도 탓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유독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 왠지 모르게 달떠오는 우리네 심정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별에 환히 내비쳐진 자신의 사연들이 그 수많은 별들 중 하나 밖에 지나지 않는 실은,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위안을 얻는 까닭이 아닐까? 그러니 누가 돈을 갖고 튀고, 흉금스러운 마음을 품었다고 하여, 문제가 될 이유는 별로 없다. 오히려 그러한 사연들은 이곳에선 별처럼 반짝거리고 달떠 오른다. 비록 그것이 씻을 수 없는 것이라도 그 밤 그 순간만큼은 별똥 같은 별똥별이 되어 사라져갈 것이다. 그러면 그 밤 우리는 아무 이유도 없이 좋아서 거리를 내질러 보는 것이다. 비록 다음날이면 다시 그 아름다웠던 별똥별이 그득한 똥뚯간에 기차 모냥으로다 전전긍긍하며 줄을 서겠지만, 그 날 그 순간만큼은 잠시 내려두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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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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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 도발에 관한 변명 혹은 예찬

 

 

  2001년 신경숙의 부석사를 끝으로 이상문학상 작품집과 작별을 고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달리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거 같지는 않다. 그저 그 때 내 자신은 졸업이란 믿겨지지 않는 현실 때문에 당면한 내 문제들로 자기똬리를 틀기에도 버거웠다. 물론 일종의 한국문학에 대한 내 개인적 매너리즘이 작용했던 것도 분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할 여유조차도 없이 지금까지 10년을 내 스스로의 문제에만 쫓겨 살아 온 것이 더 자명한 진실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10년 만에 접한 이 번 이상문학집은 내게 매우 낯설고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일단 표지부터 전혀 눈에 익지 않았고, 안에 작품을 풀어 놓은 배열순서마저도 생경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올해부터 적용된 것이라면 나뿐아니라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대상 수상작이 김영하였기에 이런 단순한 편집방식마저 내겐 이채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김영하를 처음 접한 건,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였다. 그러니까 김영하란 작가의 작품이 열풍처럼 문학계를 강타한 후, 그 열기가 조금은 식어있을 때였다. 모두가 그렇게 느꼈겠지만 그의 등장은 그 시대의 분위기와 함께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이었다. 운동권 문학에서 후일담 문학으로... 그리고 나서, 그 다음 대안은 그러한 문학의 시대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길밖엔 남아있지 않았다. 마침 시대 또한 모두 탈근대를 넘어서 탈현대를 부르짖고 있었던 차라, 한때 문화의 선두주자라 자부하던 문학에서 1996년이 되어서야 김영하 같은 작가가 나왔다는 사실은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물론 그 전에 조금은 돌연변이 같은 유하라든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그러한 작업을 시도해보려고 숱한 자맥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에 잘 편승했으리라고 추정해보는 우리의 문학계는 그들 보기를 돌같이 하였던가, 혹은 돌같이 그들을 바라보았던 거 같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우리의 금강석과도 같이 단단한 문학계가 발칙한 김영하를 선택한 것일까? 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작품에 손을 들어준 것일까? 아니, 내가 전혀 모르는 문학계는 논외로 치고, 왜 우리 세대는 김영하에게 열광했던 것일까?

 

 

  비록 지금 나는 김영하란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지만, 실은 그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내 개인이 추구하는 바와 너무나 방향이 다른데다, 그가 논지를 이끌어 내는 방식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늘 도발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글은 전혀 진지하지 못하고, 현란한 현학들로 가득차 보일 때가 많다. 이번 작품에서 그의 표현을 빌자면, 주인공의 철학하는 친구가 섹스파트너에 대해 정의 내렸던 것처럼 무언가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것이 그가 그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도발은 항상 대중에게 어필한다. 그런 이유로 그 다수의 대중의 하나인 나 또한 그의 작품에 쉽게 도발당하며, 유혹된다. 왜냐하면 그의 도발은 바로 앞서 표현한 것처럼 달콤한 소비라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어떤 고매한 정신도 정치적 목적도 특별한 신념도 필요 없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실상을 더 적나라하게 파고들면, 그의 도발은 단순히 섹스어필할 뿐인데다, 거기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엔 또 교묘하게도 어떤 엑스터시가 존재한다. 어떻게 이런 발칙한 도발과 자기파괴 속에서 영적인 황홀경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번 그의 작품 ‘옥수수와 나’는 그러한 지점을 슬며시 독자에게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이 소설은 모르긴 몰라도, 매우 자전적인 작가 개인의 욕망이 투사된 소설이라고 여겨본다.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글속에 ‘나’라는 인물이 그러한 욕망을 글속에서 ‘글쓰기’의 과정을 통해 그대로 투사하고 있다. 자신의 광적인 팬인 편집장의 절세미녀 부인과의 섹스는 이 소설에서의 이러한 지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여기서 그의 욕망은 머물지 않고, 한 차원 더 나간다. 글쓰기란 관념을 통해 소설이란 가상의 공간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발기하고, 그것을 매개로 여자와 끊임없이 섹스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가장 기이한 것은 열흘이란 기간 동안 그는 잠도 자지도 않고 그러한 행위를 반복하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관념이란 또 다른 짐승의 냄새를 펄펄 풍기며 그의 여신이자 섹스심벌인 편집장의 아내와 질펀한 정사를 열흘 동안 벌인 후, 그는 깊은 잠속에 빠져들기를 꿈꾸는 것이다. 마치 다음에 펼쳐질 죽음의 위기를 예견하듯이.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아이러니하게도, 늘 되풀이되는 그의 이러한 자기 파괴적인 권리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소설 서두부터 자신은 더 이상 옥수수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런데 닭들과 새들이 자신이 옥수수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여전히 옥수수란 말인가? 아니면 더 이상 아니란 말인가? 그의 도발은 이제 끝났단 말인가? 아니면 도발에 대한 변명을 하길 원하는 것일까?

 

 

  결국, 그가 서두부터 늘어놓은 옥수수 우화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파괴에 대한 철저한 변명이란 생각을 문득 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꿈꾸는 도발과 파괴는 열흘간의 관념과 실제의 섹스를 오가며 맛본 엑스터시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와 같은 엑스터시를 맛볼 수만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아무 미련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이다. 그냥 잠들면 모두 끝인 줄 알았는데, 그는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의 광팬이자 여신의 남편인 총을 든 편집장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총을 든 인물이 그의 광팬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의 부인과 그는 섹스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여기서 잠깐 떠올려보면 이 인물들이 실제 작가의 현실을 은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창작이란 작업을 통해 그것이 자기파괴가 되었든 혹은 엑스터시가 되었든, 일단락 지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미련하게도 독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허상과 거짓 위에 쌓여진 모래성인 것을 까맣게 잊고서, 작가에게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총을 들이미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닭이 되어 당신은 옥수수여만 한다고 강요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황홀하고 아름다웠던 자기파괴는 사라지고, 흉폭하고 잔학한 파괴만이 남겨지게 된다. 작가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결국, 독자가 강요한 약을 먹어야만 한다. 그리고 종국엔 파괴되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가 옥수수가 아니라고 부르짖더라도.

 

 

  이제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해야 할 거 같다. 이 번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는 그의 글쓰기에 대한 나름의 고뇌와 고백을 담은 소설이라고 말해야 할 거 같다. 비록 그 방식이 여전히 도발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고, 심지어 비겁한 변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아직 끝나지 않은 그의 저항을 표명하고 싶은 건지도, 그렇게 독자를 저주하며 스스로를 예찬하고 싶은 건지도,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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