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해 말쯤 쓴 헤밍웨이 저작권 만료 페이퍼 후에 딱 두 권을 샀다. <무기여 잘 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가지고 있는 옛날 전집에 있긴한데 관심 밖이었다. 예전에 읽은 건 <노인과 바다> 뿐인데 사실 그것도 기억에 없긴 마찬가지다. 읽으나마나. 어쨌거나 처음부터 장편 초기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 관심이 있었다. 첫 아내 해들리와의 추억을 담아낸 소설 <헤밍웨이와 파리의 아내>에 나오는 여인이 바로 이 회고록에 나오는 아내일 것이다. 폴라 매클레인은 헤밍웨이가 쓴 1920년대 파리 시절에 대한 회고록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축제(A Moveable Feast)>를 읽다가 해들리 엘리자베스 리처드슨을 두고 말한 대목, "해들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를 마주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해들리에 대한 전기 작품을 읽기 시작했고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 <헤밍웨이와 파리의 아내> 도서상세페이지에서) 그가 계기로 삼았다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또 한 권은 <킬리만자로의 눈>인데 이건 아직이다.(중,단편 편식이라서) 초기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번갈아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은 산문체라 더 빨리, 더 현실적으로 잘 읽혔다. 개인적으로 재미는 별로였지만(여긴 파리도 아니고, 파리에는 헤밍웨이를 능가하는 나만의 눈부신 추억이 있으니 상대적으로 감정이입이 힘들 수밖에) 흥미를 능가하는 소소하지만 특별한 그 무엇이 여기에 있었다.

 

제목은 얼마나 아름답고 눈부신가. 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과의 친분과 그녀 집에 드나들던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 피카소가 있었던 것, 뒷부분에 자세히 할애되는 스콧과 젤다와의 인연 등은 이미 우디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봤던 바, 아, 이 책을 토대로 파리에서의 헤밍웨이를 생각하면 당시(1920년대) 거리마다 카페마다 반짝였던 수많은 예술가들의 혼이 파리를 떠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속에서 헤밍웨이는 작품을 위해 고뇌하는 외로운 영혼이었지만 이 책에서는 아내 해들리가 언제나 함께 있으므로 가난과 고독, 무료한 일상을 더욱 풍부하게 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아들도 태어난다. 그야말로 평화로움 속에서 일렁이는 풍요로운 삶이다. 경제력으로만 보면 그럭저럭이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야 한다는, 써야 한다는 일념이 있었기에 단 한 번도 삶의 지위에서 바닥인 적이 없었다. 헤밍웨이의 육성으로 직접 듣는 다양한 파리의 인간군상과 경마 혹은 경륜에 대한 단상, 좋아하고 또 영감받은 여러 명의 작가에 대해 들을 수 있어 유익했다.

 

우리는 값싼 음식으로 잘 먹고, 값싼 술로 잘 마셨으며, 둘이서 따뜻하게 잘 잤고,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p.51)

 

화려하지 않지만 특별한 일상은 더 큰 화려함보다 더욱 수려하게 휘어잡는다. 걷고, 사색하고, 글쓰고, 책읽고, 다른 작가나 화가를 만나면서 얻은 소소한 영감을 그는 소중히 여긴다. 호오로 가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인정해주는 것이 글쓰는 이의 미덕이기도 할터,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다 축제처럼 다정하고 아름다웠다. 가난한 것마저도 탐스럽게 느껴졌다. 배고플 때 빵냄새가 더 고소하게 느껴지고, 세잔의 그림이 더 또렷이 보인다는 헤밍웨이가 뤽상부르와 여느 카페들을 오갈 때, 나도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관심은 작가에 한하지 않고 음악과 그림에까지 미친다. 에밀 졸라, 에즈라 파운드, 스타인 여사,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투르게네프, 고골, 톨스토이, 캐서린 맨스필드, 장 콕토, 콜 포터, 제임스 조이스, 헨리 제임스 등에 대해 얘기하는 모든 의견들이 한 줄기 빛처럼 독서의 밑거름이 되어주기도 한다. 헤밍웨이니까, 파리니까 이 모든 것이 축제다.

 

나는 장편 소설을 써야 한다. 그러나 정제된 문장으로 소설을 완성하려고 애쓰다 보니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장거리 달리기를 연습하듯이 우선 조금씩 조금씩 긴 글을 쓰는 훈련이 필요했다. 전에 리옹 역에서 가방과 함께 원고를 잃어버린 그 소설을 썼을 때 나는 앚기 젊음 그 자체만큼이나 허망하고 변덕스러운 젊은 나이의 순진한 정서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원고를 잃어버린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새로 소설을 써야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절대로 생계의 수단으로 소설을 써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을 때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 따라서 나는 더 많은 압박이 쌓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은 우선 내가 잘 아는 주제에 대해 긴 글을 써봐야 할 것이다. (p.87)

 

파리의 거리마다 책을 파는 노점상이 있고, 무엇 하나 허투루 보는 법 없는 이 젊은 미래의 소설가 헤밍웨이는 당시 캐나다와 미국의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원고료로 아내와 함께 알뜰살뜰 살았다. 넘치는 돈은 아니었지만 부족하다면 부족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럭저럭 함께 의논하고 나누며 좋아하는 것들을 사고 하고 즐겼다. 진정한 예술가들의 의미 그 자체로. 그는 파리에 체류했던 20대(1921-1926)를 1957년 가을에서 1960년 봄 사이에 회고록으로 썼다. 그리고 1964년 출간되었다. 덧붙여진 헤밍웨이의 상세한 연대기는 혀를 내두를 정도지만 사진 컷을 구경하면서 비로소 환상의 그가 실제의 그로 환생하는 느낌이다. 작품을 읽는데 작가를 꼭 알아야 한다고는 생각 않는다. 영화를 보는데 배우를 반드시 알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작가를 먼저 알고 작품을 읽는 것과 작품을 읽고나서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많이 다를 것이다. 그리고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자를 실행하려 한다. 기억나지 않는 <노인과 바다>를 뒤로하고 장편소설 대신 회고록의 에세이를 먼저 고른 건 분명 의지였지만 한편 그를 만나는 가장 쉽고 아름다운 방법이긴 했다. 헤밍웨이의 화양연화.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내라는 헤밍웨이의 말 전에 나는 이미 어느 교수님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파리에 가서 여전히 또렷하지만 약간은 빛바랜 추억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앞으로의 내가 어떨지 모르지만 내게 파리도 헤밍웨이 못지 않은 나의 화양연화다.

 

가난했다. 모든 것이 없었다. 젊었다. 가장 행복했다. 가진 게 없어 모든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간절히 바라고 느낄 수 있었다. 한때 지독하게 글과 책에 매달렸던 젊은 날의 순간이 바로 나의 화양연화였다. 비록 파리는 아니지만 내게도 그렇게 지금을 표현할 날이 과연 올까.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벗은 채 오롯이 과거로만 쓰인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가 더 크다. 아무 것도 없어서 모든 것이 있었던, 가난과 고독이 인생 가장 혹독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될 그런 날들을 나는 지금 만들고 있을까. 후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야겠다. 노트르담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생루이섬과 시테섬, 센강의 차가운 반짝임이 아름답다고는 느꼈지만 대부분의 경우 파리는 내 것이 아닌 적이 많았다. 마레 지구로 들어섰다 길을 잃었고, 작가(및 예술가)들의 아지트를 찾아다니다 지쳐 나가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 지금도 제 2의 헤밍웨이들이 파리의 어느 대로와 골목에 늘어선 노천카페와 술집을 어슬렁거리고 있을까. 간절히 쓰여지길 바라는, 쓰고싶은 어떤 글 한 줄기를 생명줄처럼 붙잡고서.  

 

주류를 꽉 잡은 미국문학보다 선호해온 건 늘 유럽문학이었다. [외국문학감상]이라고 이름 붙여진 대학 때 전공수업은 그래서 지금까지 어쩌면 먼 훗날까지 여전히 유용할텐데 '이방인, 호밀밭의 파수꾼, 데미안, 금각사'를 능가하는 문학이 내게는 오랫동안 드물었다. 작가편식이 뿌리 깊었던 탓에 박혀있는 기억이 쉽게 순위를 내어주지 않았던 것. 샐린저보다 헤밍웨이를, 헤밍웨이보다 피츠제럴드를 좋아하게 될 날이 올 수도 있다. 헤밍웨이의 파리. 기호야 어쨌든 문학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만큼은 국가,지역,시대를 따지지 않았던 문학의 거장들. 그들의 한때와 헤밍웨이의 20대를 들여다보는 여정은 즐겁다.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내는 기회와 영광, 나는 분명 파리에 있을 때조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곳이, 추억이 앞으로 나를 얼만큼 괴롭히고 또 살게 할 지를. 그때도 지금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덮으며 엉뚱하게도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글쓰기 열정을 가능하게 하는 그 힘. 언제쯤 온전히 그것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을까. 잘 사는 것 그리고 잘 쓰는 것. 나는 아직 멀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댈러웨이 2012-05-16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은 헤밍웨이를 읽기로 했었는데 다른 책들때문에 분명히 밀릴거에요.
그런데 위의 책은 아이님 리뷰때문에 먼저 읽어요.
'줄줄이 엮이는 작가들'때문에 도저히 미룰 수가 없겠어요.
(중학교때 무지 재미없어 하면서도 헤밍웨이 전작했어요. 음, 이제보니 번데기앞에서 주름잡는 격이군요. ㅎㅎㅎ)

아이님의 화양연화는 아직까지도 계속되는 것이기를 바래요. 그래야만 하니까.

잘 읽고 가요.

아이리시스 2012-05-17 17:38   좋아요 0 | URL
진짜 저 작가들도 제대로 읽은 게 없어요. 책읽는 사람이라는 게 살짝 민망한데 그래서 어디가서 책읽는다고 말 안하려고요ㅋㅋㅋ 오, 중학교때 헤밍웨이 전작하는 댈러웨이님이라니. 저는 아니예요, 번데기가 나 아닌 거죠?ㅠㅠ

화양연화. 그 영화 볼 때 참 어려워서 싫던데 이제 좀 알겠어요, 조금이지만 알게되긴 되더라고요. 그래야만 하니까. 이 말 좋다, 댈러웨이님. 당위성 부여.

프로필사진 저거 좋아요, 새삼 발견하고 기뻐함ㅋㅋㅋ

댈러웨이 2012-05-17 22:07   좋아요 0 | URL
1. 번데기'라는 표현 이제 보니까 잘못 쓴 것 같은데,,, 나쁜 뜻 아니었어요. ㅎㅎㅎ

제가 뭐 헤밍웨이 작품들을 알고 읽었겠어요?
4권인가 5권 두꺼운 전집으로 있었는데, 것도 세로줄. (집에) 읽을게 그것밖에 없었어요.
생각나는 건 파라과이 다리 나오는 거, 그거 하나.

2. 위에 올라온 <당신과 나 사이>,

나 또 첫 민망댓글 달기 싫어서 여기다 남김요.

밥 먹듯이 책을 읽었다니, 아이님,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또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다 한꺼번에 잘 할 수 있어요?

3. <에고트릭>, 심리학쪽인 줄 알았는데 철학이에요? 끄응...

4. 좋아하는 영화 딱 두 개, 그 중의 하나, 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그래도 또 보고 싶은 영화. 생각만 해도 어쩌지 못하겠는 영화.


아이리시스 2012-05-19 00:37   좋아요 0 | URL
좋은 뜻에서 번데기요.. '헤밍웨이 전작=번데기' 요게 저 아니란 거예요, 댈러웨이님.히히히.

이야, 다들(댈러웨이님 포함) 어릴 때 굉장히 독서를 하신 것 같아요. 저는 책 안 읽으면 다닐 수 없는 학과에 다녔기 때문에 그때 잠시만 밥 먹듯이 책을 읽었어요. 20대 중반은 아예 책과 거리가 멀었고 지금 생각하면 질에는 별로 신경을 안썼던 것 같아요ㅠㅠ

아, 그렇다면 다시 봐야겠어요, 화양연화. 저는 기무라 타쿠야 좋아해서 <2046> 좋아해요.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거의 다 좋지만요^^ 또 한 편의 영화는 뭐예요? :)

맥거핀 2012-05-1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정말 헤밍웨이 때문에 알라딘도 그렇고, 여기저기 이야기들이 많군요. 내년에는 포크너와 헤세라던데..이런 식으로 가면 매년 새로운 저작권 만료 작가들로 출판사들의 디자인경쟁, 번역경쟁이 이어질듯..좋은건가요?

아이리시스 2012-05-19 00:39   좋아요 0 | URL
아..포크너와 헤세요? :)

몰랐던 사실이에요.하하. 그럼 헤밍웨이 죽.. 돌아가신 후 다음 해에 포크너와 헤세가 죽.. 돌아가셨다는 거네요! 그래봐야 읽는 사람만 또 읽을 텐데요, 뭐. 개인적으로는 새 번역이 나오면 책 가격만 올라가기 때문에 고전은 별로 안 땡겨요.새 책이라도.하하하.

포크너는 잘 모르겠지만 헤세는 나올 것 다 나온 것 같아요, 민음사에서. 다른 출판사에서는 몰라도 읽을 책이 충분히 있어서 헤밍웨이만 할까 싶어요. 헤밍웨이는 사후에 유족들이 출간을 엄청 반대해왔다고 했거든요.

자목련 2012-05-1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를 만나보고 싶은 아주 맛난 글이에요.
이 책에 셰익스피어 &컴퍼니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어떤가요?
전 <킬리만자로의 눈>을 읽을까 해요. 알라딘에서 멋진 필통을 사은품으로 걸었기 때문은 아니에요.
한데, 그 필통이 탐나긴 해요.ㅎㅎ

아이리시스 2012-05-19 00:41   좋아요 0 | URL
네, 나와요. 셰익스피어&컴퍼니 이야기 나와요, 자목련님.

<킬리만자로의 눈> 사면 필통 줘요? 오오, 저 5년째 제주 테디베어 박물관에서 사온 필통 쓰는데 바꿀만큼 이뻐요? :)

프레이야 2012-05-18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댈러웨이님 페이퍼로 이미 끌렸는데
아이리시스님 리뷰로 완전히 불났어요. 땡스투유~
지름신을 부르는 리뷰 고마워요^^

아이리시스 2012-05-19 00:43   좋아요 0 | URL
파리를 회고하며 썼다면 헤밍웨이 아니었더래도 어느 작가라도 샀을 것 같아요.하하.
프레이야님께도 읽고 쓰는 것, 헤밍웨이의 젊은 시절이 고스란히 다가가야 할텐데!

책상 위에 두고 간혹 펼쳐볼 것 같아요^^
 

 

 

 

그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전주에 심어둔 뿌리깊은 아픔처럼 유재하의 가사들이 딱 그랬다. 아무리 그리워해도 찾아갈 용기같은 것은 내지 못할 터였다. 그때마다 누구에게 얘기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걸레가 물을 머금는 것마냥 가만히 시간을 훔친 것도 여러 번. 추억? 음악? 어느 것이 어느 것 앞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딱 한 번 우연히 만나도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종국에는 쿵하고 내려앉는 마음을 추어올리게 만들었다.「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다시 들은 건 나가수 2의 생방 두 번째 무대 김건모를 통해서였다. 노래는 곧, 유리에 내 모습을 비추며 어딘가로 가려했던, 신은 구두가 데려다줄 것으로 믿었던 모든 시간들을 폭풍처럼 몰고 오고 있었다. 김현식-유재하-김광석으로 이어지는 이 비련의 거인급 뮤지션들을 의도적으로 멀리해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존재는 그들의 태생이 아니기에, 제때 그들을 탐내며 살지는 못한 세월의 차이가 컸기에, 멀리할 수도 가까이할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는데 이건 분명, 운명이었다.

 

 

 

 

 

 

 

 

 

 

 

 

 

 

붙들 수 없는 꿈의 조각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쳇바퀴 돌 듯 끝이 없는 방황에
오늘도 매달려 가네

거짓인 줄 알면서도 겉으론 감추며
한숨 섞인 말 한마디에 나만의 진실 담겨 있는 듯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 가리

엇갈림 속에 긴 잠에서 깨면
주위엔 아무도 없고
묻진 않아도 나는 알고 있는 곳
그 곳에 가려고 하네

근심 쌓인 순간들을 힘겹게 보내며
지워버린 그 기억들을 생각해 내곤 또 잊어버리고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 가리

 

유재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가사가 시네, 시. 다른 가사도 그랬지만 세어보니 스물 여섯의 첫 음반에 담긴 곡이므로 더더욱 시네, 시. 감수성이 말랑말랑 터질 것 같은 어느 때. 그 시절 그 때를 참지 못해 폭발시키는, 하지만 여전히 누르고 억제하는 어떤 것들이 이 곡에 숨어 있다. 1990년대의 20대를 영화 <건축학개론>이 그린다면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은 1980년대의 20대를 더 내밀하고 정교하게 불러내고 있다. 이 곡에서 나는 우리 엄마도 보고 우리 아빠도 본다. 그들이 찾던 꿈과 세상을 접한다. 그래, 순간이 쌓여 세월이 되어 여기까지 흘러흘러 온 것을. 비로소 다시 듣는 추억. 이 곡은 반드시 우리보다 훨씬 오래 된 먼지쌓인 추억을 들려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나는 너무 젊고, 젊음은 쌓여진 시간을 절대 이길 수가 없다. 훌쩍 나이들고 싶다고 썼었다. 정말이다.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들으며 온갖 만물이 활짝 깨어난다는 바로 그 봄을 견뎠다. 어디선가 이름모를 향을 묻힌 바람이 불어오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내가 가지 않아도 괜찮은 게 좋았다. 항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도 좋았다. 좋아서 아무에게도 말 못했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달려가 그곳에 가자고 말했다. 묻지 않아도 알고 있는 곳에, 함께. 이어폰을 나눠끼고 이 곡들을 들을 것이다. 배낭 매고 기차 타고 손 놓지 않은 채 깊은 산 속 계곡숲으로 놀러가던 어느 여름 오후처럼 이번에는 계획이 없었다. 살짝 건드리고 가는 공기가 바람이라는 걸 알려주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한 여정일 터였다. 극한으로 몰고가지는 말라는 말에 더이상 가혹해지지는 않으련다.

 

머리가 멍멍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 순간이 바로 사랑하는 순간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달려왔다. 혼자 착각해서 내게 위험이 닥친 줄 알았단다. 그러면 먼저 전화를 했어야지. 바보같아. 무슨 일이 생길 게 뭐가 있다는 거야. 어제는 웃었고 오늘은 비가 온다. 이 앨범들을 몇 번째 재생중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5-14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이 유재하와 김광석을 듣는구나....중학교때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들었어요. 늘어져 소리가 이상해지면 또 하나를 사야했죠^^ 나도 그때 어렸어서 이 시들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그 시절의 냄새를 맡으며 그 시절을 살아냈던 위로의 노래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립다....

아이리시스 2012-05-16 16:38   좋아요 0 | URL
그 정도 감성은 아니고.. 어쩌다가요, 현맘님.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으하하. 정말로 그럴 때가 있었죠. 저 중학교 때 룰라 엄청 좋아했는데.. 고영욱이.. 그러고보면 사람 좋았던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노래 정말 좋아요!

댈러웨이 2012-05-1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동영상 보고 폭풍같은 회한이 밀려오던 참이였는데... 아, 태그가 저렇게 가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마지막 문단 읽으면서 미소를. 요즘의 아이님. ^^

아이리시스 2012-05-16 16:32   좋아요 0 | URL
결혼식이요, 6월이라서 코디를 벌써 하려고 해요, 푸하하. 동갑내기 사촌오빤데 저한테 들어올 압박 생각해서 이쁘게라도 하고 가야한다는 압박감이.. 이건 반농담인데,

정말정말 옷이 너무 이쁘더라고요. 욕심이 좀 많아서 눈을 안 돌리려고 하는데 봄옷은 정말로 봄바람 나라고, 카드값 폭탄을 부르는 것 같더라고요. 괜히 보고 왔어,,ㅠㅠㅠㅠ

2012-05-14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6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5-1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좋아라~ 아이리시스님^^
주말에 김건모가 저 노래를 골라 부를 때 너무 좋았어요.
그리곤 넣어뒀던 유재하 음반 찾아 계속 듣고 있어요. 부르면서요.ㅎㅎ
80년대를 보낸 20대^^ 훌쩍 나이들고 싶은가요?^^ 천천히 드셔도 돼요.
그래도 나중 느끼기엔 훌쩍 들었다싶으실 거에요. 적요한 봄밤이에요, 아이리시스님^^

아이리시스 2012-05-16 16:2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댓글이요, 봄노래처럼 폴폴 좋은 공기로 들려왔어요. 저 노래 1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김건모 좋아한 적이 없는데 노래가 엄청 색다르게 다가왔어요. 사실은 저는 나가수랑 불후의 명곡2 엄청 좋아해서 넋 놓고 맨날 봐요.하하하. 프레이야님 노래 듣고 싶다..아아..^^

또 재생시켜요, 유재하 음반. 근데 몰랐는데 왜 앨범이 통째로 다 곡이 좋아요? 으아,,
 

내가 아무리 아티스트를 동경한다고 해도, 예술가의 삶을 통째 욕심낸 적 많았어도, 자칭 예술애호가이긴 해도, 이 책은 궁극적으로 내 '과'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나는 언제나 내 편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는데 누가 내 편이 아닌지는 본능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사람도 책도. 그리고 여기서 아니라는 건 어딘가에서 보지 않거나 어떤 촉매가 없었다면 혼자서는 알지 못하고 넘어갔을 책이라는 뜻이다. 내가 싫어하거나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차라리 과학책이 가깝지, 이 책을 들게 된 이유는 TV에서 하는 유일한 책 프로그램 <즐거운 책 읽기>를 우연히 봤는데 추천책으로 나오기에. 더불어 지난 방송에서 다룬 책들을 이리저리 뒤져 몇 권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당장 사서 읽기에는 읽던 책이 많았다.

 

 

 

 

 

 

 

 

 

 

 

 

 

 

여기서 말하는 '아티스트'는 아마 화가/소설가/시인/디자이너 등 프로들만을 일컫는 건 아닐 것이다. 누구나 가슴 속에 품은 뜨거운 열망 한 조각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굳이 예술이라 이름 붙이지 않고도 창작과 열정을 통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긍정적 마인드를 갖게 하는 책이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엄청난 고뇌로 갖지도 못한 드로잉 실력으로 화가의 세계를 평정하겠다거나 독자적 시세계에 빠져 세상을 뒤집을 시를 써보이겠다 이런 꿈 애초부터 꾸지도 못한다. 어렵다. 내게 예술로서의 모든 것들은 먹고 이야기하고 자는 사이사이 일상을 비집고 들어와 무언가를 볼 때 좀 더 깊고 넓은 눈으로 '재밌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통로가 되어줄 뿐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양분하면 전자가 훨씬 큰 구성비율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하나를 하면 둘이 달려들고 둘을 하면 셋이 보여 결국 원망하거나 신세타령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못한 채 주저앉기 십상인 게 내 삶이고 보통 사람의 삶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 중에는 같은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이것도 해내고 저것도 해내면서 소소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분명 있다. 나는 그들처럼 되고싶은 것이다. 이왕이면 책도 좀 읽고, 영화도 좀 보고, 사람들 얘기도 듣고, 여행도 하면서 골고루 관심 좀 가져보고 싶은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샌델 교수는 셰익스피어와 심슨 가족 중 어느 쪽이 더 고차원적인 취미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학생이 심슨을 즐긴다고 말하면서도 반대로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을 더 고상한 취미로 꼽는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이 모든 현상들을 이론화하거나 철학자들의 입을 빌어 예를 들며 상세히 설명하지만 결국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나도 일상에서 한 번쯤 생각해봤던 것들이다.(우연찮게 이 페이퍼를 쓰기 시작하면서 마이클 샌델을 읽었다, 뒷북치는 건 민망한데 그래도 요즘 인문학적 사고를 하려고 노력중이어서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후딱 읽었다, 쉽긴 쉬웠다, 그런데 일 년에 한두 권 책 사보는 사람에게도 쉬운 책인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이게 결론!) 그러면서 깨달았다. 일반인들의 모든 판단은 거의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내려진다는 걸. 어째서 심슨보다 셰익스피어냐 물으면 상대를 설득시킬 요령있는 답변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부터 내가 좀 속물적으로 느껴졌다. 어쨌든 심슨보다는 셰익스피어다!

 

 

 

 

 

 

 

 

 

 

 

 

 

 

 

아무도 어떻게 가는 길이 올바른 지를 알려주지 않는 것처럼, 숲을 보려는 노력 정도는 기울일 수 있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국은 내 능력치에서 보는 세상은 숲보다는 나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어느 책에서도 예술가가 되는 법이라든지 예술가로 성공하는 법 따위의 지름길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앞서 예술의 길을 걸었던 어떤 사람에게서 그 길에 대한 이러저러한 얘기를 듣는 것 뿐이다. 그런데도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뭉클함을 예술적 열망이 아니라고 부인하기란 어렵다. 그래, 예술이든 정의든 찾아가는 길은 어렵고, 미로를 헤매다 돌아나오는 길을 찾아야 하는 유일한 사람은 나 뿐이야. 이런 쉬운 결론이 이 많은 페이지를 읽고나서야 비로소 나오다니.

 

 

나 요즘 이런 영화들을 감상하고 있다. <까미유 끌로델>이나 <클림트>, <아르테미시아>, <라 비 앙 로즈> 정도는 봤어도 이런 류의 전기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의외로 봐야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아.. 만삭의 몸으로 모딜리아니의 뒤를 따라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던 잔느가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보다 더 아니, 세간에 알려진 게 몇 년 되지도 않은 헌신적 사랑의 대명사로 꼽히는 프랑스 여류화가. 모딜리아니의 아내로 더 알려지는 게 그녀에게는 행복한 일일 듯 싶다. 영화 평점이 엄청 높은데 상상만으로도 사랑이 눈부시다. 그녀는 어렸고 자기 또한 화가지망생이었는데 까미유와는 달랐다. 물론 모딜리아니도 로댕과 달랐을 것이다.(여자는 남자하기 나름) 아무리 사랑해도 배우자의 광기 어린 예술의 혼과 좌절을 나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빔 벤더스는 독일의 세계적 무용수 피나 보쉬의 춤을 실제인 것마냥 생생하게 카메라로 잡아낸다. 이렇게 얘기하는 나는 <블랙 스완>을 보기 전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탈리 포트만이 좀 부담스럽다. 페이스 자체는 좋아하는 상이 아닌데, 그래서인지 기대 되면서도 작품이 나올 때마다 자꾸 피해가는 듯. 그래도 <클로저>랑 <브이 포 벤데타> 때 좋았는데.

 

그녀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어록에 남아있을 정도니까 내가 들은 말은 아니다. 영화에 내 인생을 한정시키기엔, 이 세상엔 영화 이외의 것이 너무 많다. 나탈리 포트만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티스트 웨이가 꼭 이들처럼 대단한 인생을 살거나 대단한 작품을 남기거나 대단한 사랑을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아프게 눈부신 이 모든 시간들을 가만히 앉아 폭풍감상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외부와 내부 에너지 모두가 달리는 느낌이다.

 

대체 뭐가 더 필요한 걸까. 잃어버린 게 뭘까. 비교적 상실감에는 무통증으로 지내고 싶은 편이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지금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원히 아티스트 웨이에 대해서는 나는 알 수 없는 걸까.

뭘 더 알아야 한다는 사실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너무 어렵다.

 

그리고 우연히 보게 된 천경자를 다룬 다큐를 보고, <스타 인생 극장>의 구혜선이 드로잉을 검사받는 수업시간을 보고, 한 송이 꽃 주위를 팔랑거리는 얼룩덜룩한 무늬의 나비를 보았다. 머물 곳을 찾지 못하는 나비의 날갯짓을 보며 아직 보지 않은 두 작품을 떠올렸다. 어떤 상관관계가 작동했는지는 모르겠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5-10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얼렁 토끼드롭보고 소감을 남겨줘요.
난 어제 다봤는데 도저히 쓰려해도 쏟아지는 잠 때므네...
지금도 막 자려던 참! 아이님 굳밤 :---))

아이리시스 2012-05-10 18:55   좋아요 0 | URL
이름 뭐였지, 하여튼 귀여운 꼬마소녀 사랑하는 소이진님이 리뷰 써야죠^^
요즘 나는 오드리 햅번의 영화들을 감상하고 있어요. 감상이래봐야..( '')

소이진님 진짜 잠오는데 썼나 봐요ㅋㅋㅋ

비로그인 2012-05-10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 저도 졸리네요. 해야할 일의 비율이 하고 싶은 일의 비율을 크게 압도한다는 건... 정말 원망스럽지만 현실이네요. 그래서 자꾸 늦게 자게 되나봐요. 어떻게든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자야지 직성에 풀리거든요. 예술적 열망! 천재라고 불린 사람들은 과연 날때부터 그렇게 태어났을까요? 요새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천재들은 미래의 에너지까지 땡겨와서 화르르 불타오른 거라구요. 근데 오래 살면서 천재처럼 잘 해나가는 사람도 있으니 그저 낙담할뿐 ㅠ
또 내일 꾸벅꾸벅 졸텐데... 새벽시간을 도저히 포기 못하게써요 아이리시스님 ㅠㅠ

아이리시스 2012-05-10 18:58   좋아요 0 | URL
스무살 때부터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다는 걸 알았고, 덕분에 졸업하고 출근해야할 때 날마다 죽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뭐 죽으면 죽는 거고 이런 마인드로ㅋㅋㅋ 잘 살고 있어요. 수다쟁이님, 미쳐야 한다고 말했잖아요. 딱 수다쟁이님 나이에 감수성 돋는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거니까 잘 새겨들어야 해요!

오래 살면서 천재면 어딘지 모르게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아요? 꾸벅꾸벅 졸면서 오늘 하루도 잘 보냈습니까? 오늘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빌려왔나요? 진짜 궁금.

cyrus 2012-05-10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가들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이들의 사랑이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독특하면서도
정말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느낄 때가 있어요, 특히 로뎅과 까미유 스토리 같은 경우에는
까미유가 너무나 불쌍하더라고요, 까미유에게 남동생도 있었는데 그마저도 까미유를 정신이상자로
여기더군요. 그리고 모딜리아니와 잔느 에뷔테른 스토리는 미술가 사랑 이야이 중에 너무 비극적이면서도
슬픈거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2-05-10 19:01   좋아요 0 | URL
아.. 나는 막 뱃속의 아이 슬퍼서 못 그랬을 거 같고.. 혼자 키우는 것도 너무 겁났을 거예요. 이런 상황 자체가 비극적이에요ㅠㅠ 일반인들도 물론 가슴 아픈 사랑과 견디기 힘든 좌절,고독 같은 것들을 겪는 영화같은 삶이 있지만 예술가들은 사연 하나 없는 사랑이 없네요. 그래서 로댕과 까미유도 모딜리아니와 잔느도 너무 슬퍼요. 이제 너무나 유명해졌지만 그럴 수록 더 영화 같아요. 이미 영화지만..( '')

댈러웨이 2012-05-10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이런 페이퍼 고마워요. 이렇게 딱 한마디만 남겨요, 라고 오전에 댓글 달려다가 대문에 너무 크게 난 포스트라 도망갔어요.
이런 페이퍼 정말 고마워요. 이번엔, 소개해 주신 영화들에 꽂혔어요.

p.s. [젊은 예술가의 초상], 김종건 교수 역 /범우사 편 가지고 있는데, 글 흐름 유려하고, 역주, 책 읽기 좋은 편집 등 나무랄게 없다는. (번역이 좋다는 얘길 제가 어디서 들었겠죠? ^^) ([율리시스]/생각의 나무에서 펴낸 것도 김종건 교수 역이죠.) 뭐, 참고하시라는. ( ")

아이리시스 2012-05-10 19:05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이 신간인지 몰랐어요. 무서운.. 저 책도 그런 것 같은데. 여튼 큰 대문 거기 올라가면 주눅 들어요ㅠ 선별 좀 했으면 좋겠어요 엉엉ㅠ

댈러웨이님과 잘 어울리는 영화들 같아요. 느낌이요.. 영감에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에요^^

p.s. 아, 그렇군요. 잘 몰라서 그냥 깔맞춤으로 민음사 사려고 했어요. 번역 좋다고 소문나고 댈러웨이님이 참고하라면 당연히 참고해야죠! [율리시스]와 같군요! 둘 다 눈독들여야겠네요. 도서관을 이용해도 안 읽히고 사도 안 읽히는 [율리시스]겠지만 여튼 뭐 베개로 쓰든지 하겠죠. 고맙습니다^^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5-10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군요..ㅎㅎ
예술가는 정말 어려워요.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도 어려운데...ㅋㅋㅋ.
예술가들에게는, 혹은 예술의 길을 걷는 사람에겐 가끔 '정의'보다 '도덕'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뭘까요? 전 제가 그림을 어렸을 때 그렸어도 그걸 이해 못했기에 지금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그 '과'가 아닌 것 같은. 근데 웃긴게 그걸 인정하면서도 일종의 소외감이나 상대적 빈곤감을 느낀다니까요. 마치 모짜르트를 질투했던 살리에르처럼.

아이리시스 2012-05-11 17:09   좋아요 0 | URL
현맘님이 그림/디자인 하시는 걸 저 꼭 보고 싶어요. 예술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다들 그런 걸 느끼지 않을까요? 일상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그 지점이 바로 예술가를 예술가답게 하는 신비전략이기도 하니까요. 평범한 삶보다는 비극적인 삶이 더 부각되고, 문창과에도 미대에서 음대에도 오로지 예술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몇 안되니까요. 제가 본 국문과 친구들이 누구나 어려운 책을 아주 많이 읽는 것도 아니고요. 더 중요한 무언가가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일 때 그들은 진정한 예술을 탄생시키는 건가 봐요. 뮤지컬 모차르트가 여름에 시작하던데요. 문득 그거 현맘님이랑 보러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캐스팅이 뭐 좀.. 뮤지컬은 정말로 전문분야로 남겨둬야 하는데 요즘은 아이돌, 가수, 배우 인기에 기대 섣불리 캐스팅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하여튼 뭘 말만 시작하면 이야기가 산으로..-_-;)
 
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는 사랑스럽다. 하루키의 것들 중 제일 쉽다. 물론 이 순간 기억나는 어떤 장면도 없다. 그의 이야기들은 무거운 일상 속으로 붙잡고 늘어지기엔 너무 가볍고도 고찰적이라서 곁에 머물지 못한다는 걸 수많은 경험을 통해 나는 안다. 그는 여전히 존재와 상실에 대해 얘기한다. 언제 어디서 만나도 그의 이야기란 걸 알아볼 수 있다. 이제는. 나는 등장인물 중 각자 아니 모두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라이카다. 이 사실은 변함 없다. 얇은 분량인데 꽤 오래 옆에 두고 읽었다. 그리스에서의 이야기는 절반 뿐인데 내내 그리스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설렘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스푸트니크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뮤와 스미레와 나의 이야기다.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면 알려주겠다. 둘은 여자고 나는 남자다. 스미레와 나는 친구 사이, 뮤는 스미레보다 열일곱 살 연상이다. 끝.

 

식당 밖으로 나오자 염료를 부어넣은 듯 선명한 저녁노을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공기를 마신다면 그대로 가슴속까지 물들어버릴 듯한 파란색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자그맣게 빛을 내기 시작하고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지역 주민들이 여름의 늦은 일몰을 기다렸다는 듯이 집을 나서서 항구 근처를 느릿느릿 걸어 다니고 있었다. 가족이 있고, 커플이 있고, 사이좋은 친구들도 있었다. 하루를 마감하는 싱그러운 바다 냄새가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p.160)

 

뮤는 스미레가 종종 얘기해서 처음 만나면서도 이미 알던 사람 같다며 나를 맞았다. 파란 물결이 새하얀 거품을 물고 팔랑거리는 그리스의 어느 섬에서. 그녀는 스물두살의 '내가 사랑하는 스미레'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여자다. 스미레가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나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튼, 나는 어젯밤 뮤의 급작스럽고 다소 무례한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곧바로 이 섬으로 오게 되었다. 스미레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조금 늦게 나를 마중나온 뮤는 올리브 오일과 흰 살 생선 요리, 화이트 와인을 대접하면서 용건을 얘기했다. '스미레가 사라졌다'고.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카자흐공화국의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에서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쏘아 올렸다. 직경은 58센티미터, 무게 83.6킬로그램인 이 인공위성은 96분 12초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그다음 달 3일에는 라이카라는 개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를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라이카는 우주 공간으로 나간 최초의 생물이 되었지만, 그 위성은 회수되지 못하고 우주에서의 생물 연구를 위한 희생으로 기록되었다.

(고단샤 발간 <<크로니크 세계전사>>에서)

 

하루키의 여느 소설이 그렇듯, 초반 100페이지를 스미레, 나 그리고 둘의 관계설정에 신경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들어간 대학의 문학부마저 관둘 정도로 열정이 상당한 스미레의 열렬 상담가이자 문학적 동반자는 나 뿐이다. 그녀는 늘상 새벽에 전화를 걸어 상황과 행동의 타당성 아니, 감정의 쓰나미를 멈춰줄 대답을 구한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화내거나 짜증 부리지 않고 성심성의껏 답하고 위로한다. 스미레에게 나는, 나에게 스미레는 언제나 그곳에 있는 움직이지 않는 인공위성 같은 존재다. 내가 스미레에 대한 애정을 깨달은 건 스미레가 연상의 뮤를 만나고, 그녀의 제안에 응해 사무실로 출근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다며 만지고 느끼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였다. 스미레는 뮤와의 밤을 궁금해했고, 나는 스미레에게 정말로 사랑인 것 같냐고 반문했다. 그리스의 어느 섬으로의 여행은, 간혹 떠나던 뮤의 출장에 스미레가 동행한 것 이상이 아니었다. 새벽에 뮤에게 그리스로 와달라는 다급한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나는 스미레가 흔들리거나 좌절할 때 이렇게 말해준다. 나로서는 위로가 격려가 아니라 솔직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것에는 거짓말을 하진 않아. 네가 지금까지 쓴 문장 안에는 멋지고 인상적인 부분이 많아. 예를 들어, 네가 오월의 해변을 묘사하면 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리고 바다 냄새가 나. 따뜻한 태양이 온기를 두 팔에 느낄 수 있어. 또 네가 담배연기로 꽉 찬 좁은 방에 대해서 쓰고, 그걸 읽고 있으면 정말로 숨이 막히고 눈이 아파져. 그렇게 생명이 느껴지는 무장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냐. 네 문장에는 그 자체로 호흡하고 움직이고 있는 듯한 자연스런 흐름과 기운이 있어. 지금은 그것들이 아직 하나로 제대로 연결되고 있지 않을 뿐이야. 피아노 뚜껑을 닫을 필요는 없어." (p.87)

 

그리고 덧붙였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가끔 대단히 상냥해질 때가 있어. 마치 크리스마스와 여름방학과 갓 태어난 강아지가 함께 있는 것처럼." (p.88)

 

나에게 스미레는 불안과 평온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상실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그런데 지금 나는 그리스의 어느 섬에 있는 것이다. 뮤와 앉아, 스미레의 실종 얘기를 들으며.

 

잠시 다른 이야기.

 

그리스의 섬에 머물며 영감을 받아 작품을 완성하여 자국으로 돌아가 유명해진 수많은 예술가들이 과연 당시 부서질 듯 아름다운 그리스의 혼란함, 전쟁, 독립에 관심이나 가졌을까. <코렐리의 만돌린>이 그리스에서 벌어진 전쟁(독일군과 무솔리니가 손잡고 연합군과 벌인 2차대전)을 그리고, 그리스의 섬에서 아름다운 시를 썼던 칠레 시인 네루다의 시는 오늘날까지 유명하다. 그보다 이전에는 터키(오스만투르크제국)를 상대로 힘겨운 독립전쟁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이 평온한 그리스의 섬 이면에 숨겨진 역사와 아픔을 사람들은 볼 줄 모른다. 하루키는 이것에 대해서도 잊지 않는다. <먼 북소리>를 쓸 정도로 그리스를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본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또 스미레가 걷는 유야무야한 작가로서의 길은, 문학부에 들어가 세속적 분위기에 박차고 나올 정도로 깊게 갈망하는 문학의 길을 나 또한 고민하게 한다.

 

스미레는 어디로 갔을까. 스미레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는 뮤의 얘기는 스미레가 나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 다음 시점부터 시작된다. 부르고뉴에서 만난 영국인이 그리스에 있는 별장을 빌려주었고 둘이 함께 세상의 끝과도 같은 이곳에서 꿈결처럼 평온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는 스미레가 사라진 사흘 전까지.

 

계속 쓰려고 했다. 하지만 사흘 전의 일과 그 이후의 일들을 찾아가는 건 각자의 몫인 것 같아 여기서 접기로 한다. 나 또한 언젠가 훌쩍 사라지고 싶은 충동이 없는 건 아니니 스미레의 사라진 그림자를 추적하는 건 뭔가 옳지 못한 느낌이다. 내가 싫어하는 건 그녀도 싫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지구로 내던져졌고 이 행성이 어디든, 누가 곁에 있든 없든 나는 살아야 한다. 라이카도 그랬을 테니까. 최선을 다해 살아있었을 테고, 살아있고 싶었을 테니까. 자기연민이 기본적으로 나는 없다고 생각해왔다. 원래 많은 것에 계획적인 타입이 아니라서 언젠가 계획을 세우고 나면 그 계획을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 쓴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그런 게 없다. 내가 나를 위로하는 방법은 그냥 두는 것 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 아무 것 하지 않은 채로 그냥 두는 건 나를 지구라는 행성에 내던진 조물주가 아니라 목적을 위해 인간에 의해 스푸트니크에 탄 채로 사라져버린 라이카에게 미안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관둬야겠다. 더이상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은.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도 뭘 하지 말아야 할지는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사랑에 관한 한, 하루키의 이 문장은 시작이자 끝이다. 소설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게 펼쳐지는 파노라마다. 자, 이것이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이자 모든 것이 끝난 이유다.

 

사랑이란,

 

스물두 살의 봄, 스미레는 난생처음 사랑에 빠졌다. 광활한 평원을 가로지르며 돌진하는 회오리바람처럼 격렬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나가는 땅 위의 형태가 있는 모든 사물들을 남김없이 짓밟고, 모조리 하늘로 휘감아올리며 아무 목적도 없이 산산조각 내고 철저하게 두들겨 부수었다. 그리고 고삐를 추호도 늦추지 않고 바다를 가로질러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무너뜨리고, 가련한 한 무리의 호랑이들과 함께 인도의 숲을 뜨거운 열로 태워버렸으며,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폭풍이 되어 어느 곳엔가 있는 이국적인 성곽 도시를 모래 속에 통째로 묻어버렸다. 그것은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는 스미레보다 열일곱 살 연상으로, 결혼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덧붙인다면 여성이었다. 그것이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이자 (거의) 모든 것이 끝난 장소였다. (p.7)

 

실제로는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이자 모든 것이 끝난 장소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하려 할 때, 결국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다.

 

나는 어디 있을까.

나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나는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라져버린다면 그것 또한 일상적이었으면.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을 함께하고 있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멀리서 보면, 그것은 유성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수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거죠. 두 개의 위성이 그리는 궤도가 우연히 겹칠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고 어쩌면 마음을 풀어 합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잠깐의 일이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타버려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p.197)

 

자유는 위험을 동반하는데, 내 손을 떠나 행복하길 바라며 세상 속에 던져놓고 상실을 견디는 마음과 구속이 사랑이라 착각하며 내 책임감을 내세우는 마음 중 어느 것이 더 이기적인 생각일지 몰라 언저리를 서성대는 날들이다. 나를 떠난 것이 불행할 거라고만 생각하는 건 내 오만이 아닐까. 대신 너는 자유를 얻을텐데. 내일 죽을 지라도. 사랑해서 보내준다는 대사를 이해할 것도 같다.

 

답이 들려올 리 없어 눈을 감았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2-05-10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쉽나요? 저는 <상실의 시대>는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었는데
나머지 다른 소설들은 이상하게 크게 와닿지 않았어요.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는데
가깝지만 먼 사이라고 해야되나요..? ^^;; 표현이 애매하네요. 그니깐 쉽게 말하면
처음에는 맞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읽어나갈수록 점점 이해불가해지는,, 그런 느낌이에요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5-10 19:12   좋아요 0 | URL
저는 하루키 소설 중 <1Q84>는 비교적 뚜렷한 편이었다고 생각해요. 달이 두 개라고 말도 하고 결국 아오마메와 덴고는 만나지 못했다고 봤거든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까. 어제 이 책 뒤적이다 보니까 이제 장편은 제가 안 읽은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런데 옛날을 생각해보면 나이 탓인지 그때는 다른 세계를 말하는 하루키가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제 어렴풋하게는 어떤 얘기를 하는지 알겠다고 생각했어요. 알겠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주 아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짧아서 내용파악하고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와 관념의식의 장을 잘 읽어내리면 이 책은 하루키 소설 치고는 쉬운 편이에요. <상실의 시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잇는 연애소설이라고 하거든요. 연애소설이니까 연애소설로 읽으면 확실히 다른 것들보다는 명확할 거예요.

어느 정도는 느낌으로 맞춰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에 대해 이해하는 느낌으로요. 저는 맞다고 생각했는데 쓸 수록 내 말을 내가 모르겠는 그런 느낌이에요ㅋㅋㅋㅋㅋㅋ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5-10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소설의 <1Q84>는 유일하게 읽은 하루키 소설인데...
결국 그들은 만나지 못한걸까요? 전 나만 이쪽 세상에 남겨둔 채 그들 둘은 저쪽으로 가버렸다는 생각이 들던데 말예요. 제가 워낙 소설을 안 읽다보니 전 이거 읽는것도 머리에 쥐나는 줄 알았어요...
일단 시작을 했으니 끝은 봐야겠고 말예요..ㅎㅎㅎ

연애소설인데, 어려워 보여요. 전 요새 모든게 귀찮아져서 그냥 마냥 쉬운게 좋더라구요. 저도 쉬운 여자가 되는 것 같은데...(뭐 이젠 누가 여자로 봐주지도 않지만요.ㅋㅋ)

아이리시스 2012-05-11 16:55   좋아요 0 | URL
제가 완전 좋아하는 현맘님도 읽으신 유일한 하루키군요, 1Q84. 이제 기억도 희미한데, 그럴 수도 있어요.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잖아요. 그들만 저 세상에 있고 나만 이 세상에 있는 것도요. 지금도 그런 지는 확실히 모르겠어서 예전 리뷰를 읽어보니까 저는 둘이 만나지 못했다고 보고 썼더라고요. 그래서 그랬나보다 그랬죠. 읽는 도중에는 정말 제각각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던 책인데..

책도 사실은 뭔가를 받아들일 수 있거나 흥미와 관심사, 시간이 딱 맞아떨어져야 즐길 수 있는 것 같아요. 요즘 걱정거리 있어서 체한 게 며칠 째 가고 있고 머리도 아프고 아, 진짜 총체적으로 짜증나요. 흑흑ㅠㅠ

다양한 이유에서 현맘님은 완전 매력적인 여자.(진심임)

댈러웨이 2012-05-1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건 언제 또 올라온 글이에요? 이 책 정말 재미있게 읽고 리뷰까지 썼던 기억이 새삼나네요. 일단 먼저 아이님 것부터 읽고. 흥분해서 읽지도 않고 댓글부터 달고 있어요.ㅎㅎ

아이리시스 2012-05-11 16:57   좋아요 0 | URL
이건 원래 있던 글이요, 댈러웨이님ㅎㅎ 요거 쓰고 천천히 읽으려고 지금 하루키 글 아껴놓고 온 거예요. 밤에 잠 안들면 모바일 알라딘으로 읽으려고요. 요즘 서재글들 거의 못 읽고 있는데 그래도 이웃분들이 꾸준히 써주시는 게 너무 좋아요!

맥거핀 2012-05-1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을 읽었던가, 아니던가..기억이 잘 나지가 않아요. 예전에 도서관에 있던 하루키 소설을 꽤 읽었었는데, 이 책도 거기 들어가 있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용을 보니 거의 처음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공기를 마신다면 그대로 가슴속까지 물들어버릴 듯한 파란색이었다." 참 하루키스러운 문장이네요. 어떻게보면 좀 유치해보이기도 하는데, 그런게 하루키의 매력이죠.

아이리시스 2012-05-11 17:00   좋아요 0 | URL
저는 맥거핀님은 영화만 많이 보시는 줄 알았는데 하루키에 인문 신간평가단.. 역시 신비주의였어..( '') 저는 이 책을 빼먹었는지 본 걸 또 본 건지도 모르겠어요. 이 책 서점 갔는데 우연히 보고는(신간도 아니잖아요) 알라딘에 들어와서 검색했더니 중고책 한 권 나와있기에 같이 주문한 건데.하하하.

저는 낭만적이고 비일상적이고 환상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짚어주신 문장 좀 오글거리기도 하는 듯. 이제 하늘하늘하는 문학소녀는 아니니까요(좌절) ㅠㅠ

에세르 2012-05-11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1999년도 사서 읽었습니다. 하루키가 책을 내면, 1주일내 사던 버릇은 여전했지만, 이미 그에 대한 열정이 많이(아마 가장) 식었던 무렵이라, 가장 성의없이 읽었던 하루키의 책이 아닌가 싶네요. 하루만에 딱 한 번 읽었죠. (그가 쓴 수필집조차 며칠에 나누어 아껴 아껴 읽던, 그것도 네번이상 읽던 시기와 비교하면, 하루키에게 미안할 정도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그 뒤로 두고 두고 여러번 읽으면서 다시금 진가를 느꼈답니다.^^ 일단 음미해 볼만한 구절이 많더라구요. 말씀처럼 비교적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는..(전 어려우면 싫어합니다.)ㅋㅋ
[먼 북소리] 읽으면서 언젠가, 그리스를 배경으로 작품이 나오겠군 했었는데, 바로 이작품이었더 기억이..ㅋ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주인공 남자(초등학교 선생님)가 물건을 훔치다 경비원에게 걸린 홍당무라는 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엇에 비할바 없이 좋았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나중에 자식이 생긴다면, 자식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느꼈을 정도였습니다.

댓글이 너무 두서없는데, 아무튼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라고 말하시며 다른 글자색으로 쓰신 부분이 인상적이라 여러번 읽었네요..

아이리시스 2012-05-13 17:21   좋아요 0 | URL
그렇죠? 항상 앞서가고 지금 이것을 쓰면서 내일의 무엇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작가이고 예술가들인 것 같아요. 제가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고 우스갯소리로 제가 좋아하는 도시 로마 이야기를 꼭 다시 이런 식으로 해줬으면 하고 노래 불렀었는데 지금까지 몰랐다가 이제야 알았는데 정말로 로마를 배경으로 한 [투 로마 위드 러브]가 4월에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개봉했다더라고요. 그의 유럽정복은 한 번으로 끝날 예정이 아니었던가 봐요. 그러니까 제 생각은 언제나 누군가 해봤거나 계획하고 있는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하하하. 그 전부터 저걸 알고 있던 사람은 절 보면 되게 웃겼겠네요. 하여튼 오늘날은 아예 모르든가 무관심할 게 아니라면 반드시 정보력을 키워야..( '') 하하. 저 뭐라는 건지ㅋㅋㅋ

저는 이 작품 좋았어요. 예전에는 [양을 쫓는 모험]과 [태엽 감는 새]를 좋아했는데 너무 오래돼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할 것 같아요. 저도 말씀하신 장면 좋았어요. 홍당무라는 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요. 그렇게 우회적으로 진짜 할 얘기를 드러내는 하루키 스타일을 이제야 이해하는 것 같아요.

다만 이러는 저는 [먼 북소리]를 못 읽었거든요. 이제 그 작품을 읽을까 해요. 댓글 좋았어요, 에세르님^^

Shining 2012-05-16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없는 동안 아이님이 쓰신 글을 저는 언제 다 읽을까요ㅠ 일단은 이 글부터 시작했습니다ㅠ
이 책은 제가 친구를 기다리며 코엑스 반디 앤 루니스(맞나;)에서 다 읽은 책, 이라는 것 밖에 기억이 남지 않아요ㅎ
읽을 때는 음, 좋군_- 했는데 기억을 송두리채 사로잡을 문장은 없었나봐요; 하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처음 읽었을 땐 왕왕 좋았는데 작년엔가 다시 읽으니 별로 안 좋잖아! 충격을 받았죠ㅠ
타이밍이 전부에요, 정말. 전 <1973년의 핀볼>이 좋아요, 그냥. 그냥 좋아요.

아이리시스 2012-05-16 16:20   좋아요 0 | URL
샤이닝님 그렇잖아도 오늘은 인사하러 갈랬는데 글 있어서 아껴뒀어요. 하하하. 왜 아껴읽게 만듭니까!!!
저는 요즘 써논 글 한참 후에 정리해서 올리기 땜에 독서와 글에 시차가 좀 있어요. (그래서 어쩌라고_-;)
근데 친구 기다리며 하루키 읽는 샤이닝님은 진정 멋져요 @.@ 본받아야 돼. 저는 서점에 가면 멍때리고 앉아서 커플들 구경하는데요. 다른 사람들 막 무슨 책 읽나 몰래몰래 훔쳐보고. 푸하하.

좋다고 말해도 기억이 전혀 안나므로(그래도 하루키 책은 집에 다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호호) 왜 좋은지 유추조차도 해볼 수가 없네요ㅋㅋㅋ
 

 

 

 

시작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아니, 이승기와 하지원이 나오는 <더킹 투 하츠>였다. 형의 목숨을 앗아가고 여동생을 하반신 마비로 만든 악당에 대한 왕(이승기)의 대응을 체제론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때마침 <군주론>과 <국가론>은 군주제를 이해시켜줄 좋은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왕(이승기)의 고민이지만 좋은 왕을 고를 수 있는 눈은 내 노력으로 얻어야 하는 필수적 능력이라고도 생각했다. 때로 드라마는 호기심 많은 나를 새롭고 낯선 세상으로 안내한다. <패션왕>은 관심도 없던 <언터처블-1%의 우정>을 보게 만들었고, <타이타닉>이 재개봉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물론, 호기심 동한 나는 둘 다 보았다. 극중 정재혁(이제훈)이 VIP관에서 혼자(신세경과 같이) 보는 장면이 나온다. <타이타닉>의 갑판 위 키스는 15년이나 지났어도 여전히 설렜다.

 

 

 

 

 

 

 

 

 

 

 

 

 

 

 

한때 르네상스 사조에 빠져 도서관에서 찾아읽던 로마, 그리스 왕정시대의 이탈리아를 다룬 저서들. 시간을 거슬러 고대, 중세 역사를 다룬 여러가지 책들을 겉핧기 식으로 닥치는 대로 접하면서 절반의 20대가 지나갔다. 그땐 도서관에 가까이 있었다. 체계를 갖추고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나아가면서 강제와 자율이 적절히 매치되어야 어느 한 분야라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법인데 그때는 그런 게 없었다. 사학과는 거리가 멀었고 매일 작품읽기와 해석, 매 학기마다 창작물 과제에 쫓기고 있었으니 어쩌면 인풋보다 아웃풋을 더 많이 요구하던 그때, 생애 가장 많은 지식에의 갈구를 느꼈던 것 같다. 요즘 기본적 고전(군주론, 국가론, 자본론이 현재 계획)과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한 시오노 나나미의 이탈리아를 다룬 저작들을 '다시' 읽고 있다. 걸음마 수준이다. 그나마 읽는다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여전히 시작이 반을 채워주기에 나는 반만 더 가면 된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무궁한 꿈을 안고 피렌체에 갔다. 피렌체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는 그 작은 영광의 도시가 사방으로 캄캄해진 해저문 늦은 저녁이었다. 중앙역에서 한국에서 대충 몇 개 적어온 숙소로 전화를 걸었지만 예약자가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세상에, 말도 안 통하고 길도 모르고 해외도 처음인데 달랑 몇 개 있는 한국인 운영 게스트하우스가 우리를 거부하니, 세상에서 버려진 것처럼 절망스러웠다. 이 낯선 땅에서 누구를 어떻게 믿어야 하나.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소개에 소개를 거듭해 조선족 모녀(물론 내게는 할머니와 엄마뻘)의 작은 집에 이틀 묵었다. 돌아와서는 내가 그곳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여행 도중에 만난 피렌체는 반나절에 도시 전체를 돌아볼 정도로 작은 곳이었기에 이틀 이상 할애할 필요도 없어서 바로 로마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과거의 영광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중세의 도시 피렌체의 골목이 성큼 다가서는 생각만 해도 땀이 흥건해지는 밤이었다. 골목은 골목으로 통한다. 돌아올 때는 미켈란젤로 광장까지 가서 샌드위치 먹고 놀다가 숙소를 찾지 못해 기차를 놓칠 뻔 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골목이 수십 개는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익숙해지면 별 것 아니겠지만 이틀 만에 그곳에 통달하기란 어려웠다. 아르노 강의 베키오 다리, 단테와 베아트리체, 두오모에만 관심이 쏟아졌었다. 헤매던 길을 찾게 해준 건 묵던 게스트하우스 건물 1층에 있는 빵가게의 빵 냄새였다.

 

<군주론>은 15-16세기를 살았던 이탈리아 정치학자 마키아벨리에 의해 씌어졌다. 모두 동의할 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며, 배경지식이 뒷받침 되어야만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분량이 짧고 어렵지 않지만 정신줄 놓고 읽었던 처음에 나는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한 권 읽기 위해 몇 십 배의 자료와 책을 읽어야 하는 대표적 텍스트. 이번에는 어떤 상황에서의 마키아벨리는 그런 통찰을 할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는 중이다. 다음 번에는 그런 그를 비판하거나 더 좋은 대안을 찾아가며 스펙트럼을 넓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간 당연시되던 정치와 종교의 유착을 비판하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인간은 본래 사악한 존재이므로 정치영역을 종교의 윤리적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이상적인 정치상일 뿐이라는 것), 당시 도시국가로 이뤄졌던 이탈리아의 도시 중 하나인 피렌체의 통치자(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치는 헌정 형식의 정치철학서를 썼다. 메디치 정부 하에서 공직에 입문하려는 목적으로 집필한 것으로 전해지는데(집필목적이 이처럼 정확했는지, 후세대가 중요한 정치철학서로 둔갑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치가는 필요에 따라 일체의 도덕적 구속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도 논란이 되며, 오늘 날 그를 권모술수에 능한 책략가로 굳혀지게 만들었다. 몇 세기가 지난 지금, 그의 이론을 당시로 국한시켜 이해하는 것도, 오늘 날의 기준으로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대상에 대한 판단은 일방향을 띠는 단순한 문제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정치학 이론들이 이상적 정치공동체로만 지나치게 흘러간다고 생각한 그는 초점을 권력의 획득과 유지의 방안으로 돌리면서 정치가의 권력(힘과 능력)과 조직공동체를 중요하게 인식한 것이다.

 

"군주된 자는, 특히 새롭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곧이곧대로 미덕을 지키기는 어려움을 명심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려면 때로는 배신도 해야 하고, 때로는 잔인해져야 한다. 인간성을 포기해야 할 때도, 신앙심조차 잠시 잊어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운명과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적절히 달라지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면 착해져라. 하지만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다. 일단 그렇게만 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든 칭송 받게 되며,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로서 작은 도시들로 분열된 쪼개진 케익 같았고 마키아벨리는 이런 이탈리아의 분열된 상황을 좋지 않게 보고 비판하려 했던 걸로 보인다. 악을 행해서라도 선한 목적을 관철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지만, 일단 선하고 안정된 사회제도(국가)가 뒷받침 되어야만 세분화된 정책의 정당성을 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자를 행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선(善)과 윤리를 잠시 내려놓고 달려가도 괜찮다는 의미는 옳기도 한 것이다. 그는 '불가피하게' 그럴 수도 있음을 인정한 것이지, 윤리를 아예 배제시켜야 한다는 극한의 의미가 아니었다. 또한 관용과 도덕 만으로 공화정을 묵인한다면 혼란한 이탈리아에 혼란함을 더 가중시킬 뿐이라고 했으며, 불가피한 경우에는 전제정치나 권모술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주사회가 중요하긴 하지만 일단 분열된 도시국가들을 하나로 통솔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새삼 피렌체 공화정의 메디치 가에 대해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얼마 전 미켈란젤로 관련 미술사 다큐를 보면서 또 한 번 당시 피렌체의 활짝 꽃피운 르네상스 문화를 동경한 후 읽은 책이라 자연스럽게 '군주'가 아니라 '번영'에 관심이 기우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선한 목적을 위해 악한 절차를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군주에게 가장 어렵고 힘든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아닐까 싶다. 선의의 거짓말도 있고, 다수의 이해관계가 공존하는 한미 FTA 같은 상황도 있는데 나는 늘 그런 결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목적이 모든 악행을 타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까웠다. 실제로도 악행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오늘 날의 도덕 아닌가. 당시 이탈리아의 혼란과 분열 사이에서 느낀 공화정에 대한 답답함을 마키아벨리만큼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답답함이 느껴지기는 한다. 도덕은 거쳐야 할 과정이지, 도덕이라는 절차에 얽매이면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모든 정당성을 일일이 검사받아야 한다면 특히 이해관계를 극복해야 하는 정치의 영역에서는 엄청난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래서 대사의 공관 불가침/문서 불가침/민형사 관할권으로부터의 자유(물론 예외도 있다!)도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이들은 해당국가에서 공적임무를 처리하는 동안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자격으로 이 모든 것들을 누린다. 한마디로 공적임무 처리기간 내에는 어떠한 개인적 잘못도 묻지 않는다. 도덕에 얽매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가장 큰 반증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책임은 또 다른 문제다. 선한 목적을 타당화시키기 위해 과정이나 절차를 불가피하게 묵인해준다고 치자. 행여 선한 목적이 변질되어 악한 결과로 나타났을 때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마키아벨리의 이론에는 이 또한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었겠지만 오늘 날 이 문제는 단순히 넘어갈 수가 없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게 재밌다. 결론은 항상 엉뚱한 생각으로 가지만 내가 이들 시대에 태어났어도 이렇게 생각했을 거야,라면서 자화자찬하면 더 재밌다. 아프리카를 버릴 만큼. 그래서 독서가 갑자기 옛날에 읽다만 이제 존재조차 옛날 이야기가 된 <로마인 이야기> 읽기로 건너뛰었다. 여러 권을 동시에 읽지만 관심사가 제일 깊은 책이 더 자주 손에 잡힐 수밖에 없다. 로마, 르네상스, 이탈리아가 내 로망의 정점을 찍는 단어들이긴 한데, 뭔가에 빠지기에 날이 점점 더워진다. 세상에, 더워더워더워더워더워. 날씨를 움직이는 건 군주가 할 수 없는 일일까. 쫌 해달라고 해보지. 미실처럼 하늘이시여, 하면서 제사라도.. 덥지 말라고, 쫌만 더우라고.. 이 책을 읽어서 이승기의 국가(?)가 이해되지는 않았다. 애초 독서의 시작이 불순했기 때문에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거겠지만. 뭐든 이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끝까지 갈 수 있는 저질 의지력이라는 점은 반성한다. 내 몰입이 지속적이지 못한 건 프로이트식으로 볼 때 성적억압과 결핍 때문..( '') 다음 차례는 플라톤의 <국가론>인데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더 끌린다. 언젠가 찜해뒀던 거다. 그치만 아아, 진짜 생각만 해도 정신이 덥다. -_-;; 아이스크림 사러 가야겠다.

 

 

 

 

 

 

 

 

 

 

 

 

 

 

 

 

 

 


댓글(10) 먼댓글(2)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로마제국, 영광의 날들에 바치는 글
    from 너의 의미 2013-06-27 06:55 
    시오노 나나미의 <살로메 유모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원래는 읽다만 <로마인 이야기>를 끝까지 보려고 했지만 워낙 스펙타클한데다 길기도 길고 다양한 캐릭터의 복합적이고 연속적인 등장으로 심심할 틈 전혀 안 주는 이 책도 어쩔 수 없는 인문서이다보니, 한 눈 안 팔고 들입다 끝까지 팔 수는 없었다. 20대 초반에 읽으려던 것보다 확실히 편해지고 이해의 폭도 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읽는대로 꿀꺽꿀꺽 소화가 잘 되는 건 아니었다.
  2. 딸기향 베네치아
    from 너의 의미 2013-06-27 06:56 
    세상에 단 하나, 혼자 떠나도 심심하지 않을 것 같은 소도시가 있다면 그건 베네치아다. 산타루치아역으로 통하는, 들어서자마자 짠 비릿내가 훅 끼쳐오는(나는 부산을 떠나본 적 없는 부산사람이라 다른 지방 사람들이 부산역에 내릴 때 그렇더라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정말로 그랬는데 이건 과장이 아니라 그곳은 기차역 바로 앞이 바다니까 당연한 것이다) 리알토 다리와 바포레토와 곤돌라, 산 마르코 성당과 카사노바의 도시. 마지막으로 물의 도시
 
 
비로그인 2012-05-0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정말이지 무게감 넘치는 고전들이네요. 책장에 장식용으로 꽂아놓는 책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듯한 ㅋㅋ 아직까지 저의 독서는 취미생활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창작의 밑거름이 되고 지식의 재료가 되겠지만, 그래도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읽을 필요가 있겠어요. 저는 요새 도스도예프스끼를 읽는데 진도가 팍팍 안 나가서 (재미는 있는데 너무 두꺼워요!) 다른 책에 눈동냥하고 다시 돌아오고 문어다리 비슷한 형국이랍니다 ㅎㅎ 또 요새는 시집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소설보다 시가 더 좋다니까요! :)

아이스크림은 뭘로 사오셨어요? 저는 쿠앤크가 제일 좋아요. 제 동기는 서주 아이스바? 우유맛 나는 그게 최고라고 하더라구요. 제가 무슨 우유를 얼려서 먹어? 이랬더니, 아이스크림은 순수한 맛이 제일이라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그러대요. ( '').. 아, 저도 목이 타네요.

아이리시스 2012-05-08 00:04   좋아요 0 | URL
안 갔어요. 이제 가기엔 나는 소중하니까..( '') 밤 12시에 아이스크림 사러가는 여자는 좀.. 술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저는요, 스물한 살의 봄에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수다쟁이님이 더 멋진 것 같아요. 제 생각엔 목적의식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입맛에 맞는 것만 읽는 건 직업 생기고 진짜 취미생활일 때는 좋은 것 같은데 수다쟁이님은 어리고 또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니까요.. 여러가지 의미에서.. 제가 지나고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시가 좋죠! 시세계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공감)

근데 저는 읽는 나도 즐기기 때문에 시보다는 지식이..( '') 지식보다는 내 글이..( '') 아, 진짜 막 이래요ㅋㅋㅋ 아이스크림은 요즘 월드콘 먹고 있는데, 그때그때 달라요. 더울 때는 수박바나 메로나, 호두마루도 좋고 저도 쿠앤크 좋아해요. 우유맛 나는 것도 좋고 아, 다 좋네ㅋㅋㅋ

마녀고양이 2012-05-08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마인이야기는 카이사르 읽고 멈춤 상태인데,,, ㅠㅠ,
아이리님은 군주론을 읽으셨나 보네요. 저는 정치 관련 서적은 멀~~리 하고 싶어져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희망이 별로 없다 머 이런 짜증이랄까. ^^

배고파요, 학교 다녀오니까 더 고파... ㅠㅠ.
아이리님 아이스크림 안 샀다구요? 에잇, 나랑 똑같은 시간대에 먹고, 함께 굴러다녀야하는데!

아이리시스 2012-05-08 00:40   좋아요 0 | URL
지금 마고님 서재에서 답글 없이 돌아오는 길임ㅋㅋㅋ 저는 아직 로마는 시작도 안하고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하기 전이라던가 뭐라던가 1권 시작중인데요, 히히히(뭐냐, 이 읽은 척은_-) 멀리하고픈 마음 공감 백배! 오늘 재단에서 5월 3주기 기념행사 알림책자 날아와서요, 아까 잠깐 침울해서 또 눙무리ㅠㅠㅠ 나려고 했지만 울지는 않았어요. 어쩐지 서러워요. 좋은 봄날을 정치적으로 싸우면서 이렇게 보낸다는 게! 그러는 정치인들을 보는 게!!

이제 오셨어요? 완전 학구파 으하하 부러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얼른 식사하세요! 아이스크림은 낼 꼭 한보따리 사다놓을 거예요!!! 저는 아이스크림 안먹어도 집에서 굴러다녀요. 걱정마세요! ㅋㅋㅋㅋㅋ

맥거핀 2012-05-0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은 정말 책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시는 군요. 마키아벨리든 뭐든 간에 그 자체보다는 그 사상을 자기나름대로 대강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주장(혹은 정책)을 합리화하는 도구로서만 삼는 후세들이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랫동네는 날씨가 어떤가요? 여기는 왠지 꾸물꾸물하고 뭔가 기분이 살짝 나빠지는 날씨군요.^^;

아이리시스 2012-05-09 18:11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책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고 맥거핀님도 좋아해요. 와우. 사실은 철학이나 과학 같은 거 왜 그렇게 사상 싸움을 해대나, 그걸 우린 왜 읽고 아는 체 하고 연구하고 그러나 저는 항상 궁금했는데요. 누가 먼저 말했는데 내가 먼저 말한 척 하면 부끄러우니까 알기 위해서 그러는 건가.. 그들도 그 시대에서 보면 모두들 스스로 극복 못한 모순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게 뭐 대단하다고,가 제 생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건 대단한 거고 그래요.(뭐라는 거지..)

날씨 안 좋아요! 기분도 안 좋아요! 꾸물꾸물 흐리고 황사처럼 누런 세상인데요.으흐흐.

이진 2012-05-0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나 시험 끝났어요 :)
꺄아~ 시험끝나고 나서 처음으로 친구들과 부둥켜안고는 방방 뛰며 소리를 질렀답니다. 시험이 끝나서도 있지만 내일이 학교 개교 기념일이라 하루 쉬거든요! 친구들은 시내로 놀러가는 계획을 모두 짜놨던데 저는 모자란 잠을 보충할겁니다. 푹 자야죠 푹.
나는 저런 책 못읽겠어요. 지금 나이에 못 읽는 건 당연한 거 맞죠? ㅎㅎㅎㅎ 그런데 서울 사는애들은 읽을텐데... 하면서도 안 읽고 있답니다. 그냥 소설도 이해하기 힘든걸요.

참, 전국 일등의 꿈은 물건너 갔습니다. 백점을 노렸던 사회와 국어는 각각 1문제 2문제씩 틀렸고(사회는 정말 만점이었는데 마킹실수... 하 듣고나서 엄청난 멘붕을 경험했습니다. 어차피 시험 내내 멘붕상태였지만요) 수학은 무려 ... 상상도 못할 1/5사태가..............................

아이리시스 2012-05-09 18:14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원래 시험은 사흘 정도 가는데 이틀 만에 끝났네요? 아.. 또 있는 건가.. 개교기념일 지나고! 그럼 오늘 쉬고 내일 또 시험 치는 건가? 으하하. 여튼 신나겠어요. 끝난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 생각나서 부러워요. 네, 지금 나이에 못 읽는 거 당연한 거.. 서울 사는 애들은 읽어요? 히히히. 서울 사는 애들도 안 읽어요! 걱정마요.푸하하.

참, 그래도 전국 이등은 할 수 있겠죠? 근데 사회랑 국어는 엄청 잘했네요. 김태희는 중학교 내내 올백을 맞았다고 했지만 고등학교에서는 그렇지 않았겠죠?( '') 그러니까 안심해요. 수학은 그럼 20점인 거예요?ㅋㅋㅋ 미안.

에세르 2012-05-09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친구"에서 준석(유오성)이 상택(서태화)에게 하는 말이 결국 마키아 벨리가 했던 말이라는 것을 최근 어떤 글을 읽다가 깨달았습니다. " 타인을 손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에는 그 복수를 겁낼 필요가 없을 만큼 통렬하게 가하지 않으면 안된다.(군주론)" 과연, "통치자가 민중을 이끌려면 존경의 대상이 되거나 공포의 대상이 되어라. 존경을 받기 어렵거든 차라리 공포의 대상이 되라."라고 말한 마키아벨리답다고 느꼈습니다. 군주론에 대해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아이리시스 2012-05-09 18:18   좋아요 0 | URL
네! 에세르님 댓글 보면서 생각해보니까 저희 아빠도 예전에 다음 대통령 얘기하면서.. 차라리 공포의 대상이 되는 독재자를 뽑아야 한다고..( '') 마키아벨리다운 거였네요!!! 으하하. 이해는 되는데요, 집에 식구가 많은데 각자 다른 음식 먹겠다고 하면 통일시키기 어렵잖아요? 요리하는 엄마만 피곤해지고.그럴 때는 충분히 이해가 돼요!! 공포로 단결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그래도 좀 무섭긴 해요. 저도 평소에는 사람은 봐주고 잘해줄 수록 기어오르기 때문에(실제로 많이 당해봐서) 처음부터 딱 잘라 거절하고 안되는 건 안되는 거란 걸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조직은 오죽할까요. 저는 인정에 끌리는 선택을 잘 하는 편인데도 머릿속으로는 늘 그렇게 생각하고 말도 그렇게 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많아요.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