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전주에 심어둔 뿌리깊은 아픔처럼 유재하의 가사들이 딱 그랬다. 아무리 그리워해도 찾아갈 용기같은 것은 내지 못할 터였다. 그때마다 누구에게 얘기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걸레가 물을 머금는 것마냥 가만히 시간을 훔친 것도 여러 번. 추억? 음악? 어느 것이 어느 것 앞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딱 한 번 우연히 만나도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종국에는 쿵하고 내려앉는 마음을 추어올리게 만들었다.「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다시 들은 건 나가수 2의 생방 두 번째 무대 김건모를 통해서였다. 노래는 곧, 유리에 내 모습을 비추며 어딘가로 가려했던, 신은 구두가 데려다줄 것으로 믿었던 모든 시간들을 폭풍처럼 몰고 오고 있었다. 김현식-유재하-김광석으로 이어지는 이 비련의 거인급 뮤지션들을 의도적으로 멀리해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존재는 그들의 태생이 아니기에, 제때 그들을 탐내며 살지는 못한 세월의 차이가 컸기에, 멀리할 수도 가까이할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는데 이건 분명, 운명이었다.

 

 

 

 

 

 

 

 

 

 

 

 

 

 

붙들 수 없는 꿈의 조각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쳇바퀴 돌 듯 끝이 없는 방황에
오늘도 매달려 가네

거짓인 줄 알면서도 겉으론 감추며
한숨 섞인 말 한마디에 나만의 진실 담겨 있는 듯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 가리

엇갈림 속에 긴 잠에서 깨면
주위엔 아무도 없고
묻진 않아도 나는 알고 있는 곳
그 곳에 가려고 하네

근심 쌓인 순간들을 힘겹게 보내며
지워버린 그 기억들을 생각해 내곤 또 잊어버리고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 가리

 

유재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가사가 시네, 시. 다른 가사도 그랬지만 세어보니 스물 여섯의 첫 음반에 담긴 곡이므로 더더욱 시네, 시. 감수성이 말랑말랑 터질 것 같은 어느 때. 그 시절 그 때를 참지 못해 폭발시키는, 하지만 여전히 누르고 억제하는 어떤 것들이 이 곡에 숨어 있다. 1990년대의 20대를 영화 <건축학개론>이 그린다면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은 1980년대의 20대를 더 내밀하고 정교하게 불러내고 있다. 이 곡에서 나는 우리 엄마도 보고 우리 아빠도 본다. 그들이 찾던 꿈과 세상을 접한다. 그래, 순간이 쌓여 세월이 되어 여기까지 흘러흘러 온 것을. 비로소 다시 듣는 추억. 이 곡은 반드시 우리보다 훨씬 오래 된 먼지쌓인 추억을 들려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나는 너무 젊고, 젊음은 쌓여진 시간을 절대 이길 수가 없다. 훌쩍 나이들고 싶다고 썼었다. 정말이다.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들으며 온갖 만물이 활짝 깨어난다는 바로 그 봄을 견뎠다. 어디선가 이름모를 향을 묻힌 바람이 불어오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내가 가지 않아도 괜찮은 게 좋았다. 항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도 좋았다. 좋아서 아무에게도 말 못했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달려가 그곳에 가자고 말했다. 묻지 않아도 알고 있는 곳에, 함께. 이어폰을 나눠끼고 이 곡들을 들을 것이다. 배낭 매고 기차 타고 손 놓지 않은 채 깊은 산 속 계곡숲으로 놀러가던 어느 여름 오후처럼 이번에는 계획이 없었다. 살짝 건드리고 가는 공기가 바람이라는 걸 알려주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한 여정일 터였다. 극한으로 몰고가지는 말라는 말에 더이상 가혹해지지는 않으련다.

 

머리가 멍멍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 순간이 바로 사랑하는 순간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달려왔다. 혼자 착각해서 내게 위험이 닥친 줄 알았단다. 그러면 먼저 전화를 했어야지. 바보같아. 무슨 일이 생길 게 뭐가 있다는 거야. 어제는 웃었고 오늘은 비가 온다. 이 앨범들을 몇 번째 재생중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5-14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이 유재하와 김광석을 듣는구나....중학교때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들었어요. 늘어져 소리가 이상해지면 또 하나를 사야했죠^^ 나도 그때 어렸어서 이 시들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그 시절의 냄새를 맡으며 그 시절을 살아냈던 위로의 노래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립다....

아이리시스 2012-05-16 16:38   좋아요 0 | URL
그 정도 감성은 아니고.. 어쩌다가요, 현맘님.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으하하. 정말로 그럴 때가 있었죠. 저 중학교 때 룰라 엄청 좋아했는데.. 고영욱이.. 그러고보면 사람 좋았던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노래 정말 좋아요!

댈러웨이 2012-05-1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동영상 보고 폭풍같은 회한이 밀려오던 참이였는데... 아, 태그가 저렇게 가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마지막 문단 읽으면서 미소를. 요즘의 아이님. ^^

아이리시스 2012-05-16 16:32   좋아요 0 | URL
결혼식이요, 6월이라서 코디를 벌써 하려고 해요, 푸하하. 동갑내기 사촌오빤데 저한테 들어올 압박 생각해서 이쁘게라도 하고 가야한다는 압박감이.. 이건 반농담인데,

정말정말 옷이 너무 이쁘더라고요. 욕심이 좀 많아서 눈을 안 돌리려고 하는데 봄옷은 정말로 봄바람 나라고, 카드값 폭탄을 부르는 것 같더라고요. 괜히 보고 왔어,,ㅠㅠㅠㅠ

2012-05-14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6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5-1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좋아라~ 아이리시스님^^
주말에 김건모가 저 노래를 골라 부를 때 너무 좋았어요.
그리곤 넣어뒀던 유재하 음반 찾아 계속 듣고 있어요. 부르면서요.ㅎㅎ
80년대를 보낸 20대^^ 훌쩍 나이들고 싶은가요?^^ 천천히 드셔도 돼요.
그래도 나중 느끼기엔 훌쩍 들었다싶으실 거에요. 적요한 봄밤이에요, 아이리시스님^^

아이리시스 2012-05-16 16:2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댓글이요, 봄노래처럼 폴폴 좋은 공기로 들려왔어요. 저 노래 1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김건모 좋아한 적이 없는데 노래가 엄청 색다르게 다가왔어요. 사실은 저는 나가수랑 불후의 명곡2 엄청 좋아해서 넋 놓고 맨날 봐요.하하하. 프레이야님 노래 듣고 싶다..아아..^^

또 재생시켜요, 유재하 음반. 근데 몰랐는데 왜 앨범이 통째로 다 곡이 좋아요? 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