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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는 사랑스럽다. 하루키의 것들 중 제일 쉽다. 물론 이 순간 기억나는 어떤 장면도 없다. 그의 이야기들은 무거운 일상 속으로 붙잡고 늘어지기엔 너무 가볍고도 고찰적이라서 곁에 머물지 못한다는 걸 수많은 경험을 통해 나는 안다. 그는 여전히 존재와 상실에 대해 얘기한다. 언제 어디서 만나도 그의 이야기란 걸 알아볼 수 있다. 이제는. 나는 등장인물 중 각자 아니 모두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라이카다. 이 사실은 변함 없다. 얇은 분량인데 꽤 오래 옆에 두고 읽었다. 그리스에서의 이야기는 절반 뿐인데 내내 그리스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설렘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스푸트니크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뮤와 스미레와 나의 이야기다.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면 알려주겠다. 둘은 여자고 나는 남자다. 스미레와 나는 친구 사이, 뮤는 스미레보다 열일곱 살 연상이다. 끝.
식당 밖으로 나오자 염료를 부어넣은 듯 선명한 저녁노을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공기를 마신다면 그대로 가슴속까지 물들어버릴 듯한 파란색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자그맣게 빛을 내기 시작하고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지역 주민들이 여름의 늦은 일몰을 기다렸다는 듯이 집을 나서서 항구 근처를 느릿느릿 걸어 다니고 있었다. 가족이 있고, 커플이 있고, 사이좋은 친구들도 있었다. 하루를 마감하는 싱그러운 바다 냄새가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p.160)
뮤는 스미레가 종종 얘기해서 처음 만나면서도 이미 알던 사람 같다며 나를 맞았다. 파란 물결이 새하얀 거품을 물고 팔랑거리는 그리스의 어느 섬에서. 그녀는 스물두살의 '내가 사랑하는 스미레'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여자다. 스미레가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나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튼, 나는 어젯밤 뮤의 급작스럽고 다소 무례한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곧바로 이 섬으로 오게 되었다. 스미레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조금 늦게 나를 마중나온 뮤는 올리브 오일과 흰 살 생선 요리, 화이트 와인을 대접하면서 용건을 얘기했다. '스미레가 사라졌다'고.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카자흐공화국의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에서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쏘아 올렸다. 직경은 58센티미터, 무게 83.6킬로그램인 이 인공위성은 96분 12초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그다음 달 3일에는 라이카라는 개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를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라이카는 우주 공간으로 나간 최초의 생물이 되었지만, 그 위성은 회수되지 못하고 우주에서의 생물 연구를 위한 희생으로 기록되었다.
(고단샤 발간 <<크로니크 세계전사>>에서)
하루키의 여느 소설이 그렇듯, 초반 100페이지를 스미레, 나 그리고 둘의 관계설정에 신경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들어간 대학의 문학부마저 관둘 정도로 열정이 상당한 스미레의 열렬 상담가이자 문학적 동반자는 나 뿐이다. 그녀는 늘상 새벽에 전화를 걸어 상황과 행동의 타당성 아니, 감정의 쓰나미를 멈춰줄 대답을 구한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화내거나 짜증 부리지 않고 성심성의껏 답하고 위로한다. 스미레에게 나는, 나에게 스미레는 언제나 그곳에 있는 움직이지 않는 인공위성 같은 존재다. 내가 스미레에 대한 애정을 깨달은 건 스미레가 연상의 뮤를 만나고, 그녀의 제안에 응해 사무실로 출근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다며 만지고 느끼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였다. 스미레는 뮤와의 밤을 궁금해했고, 나는 스미레에게 정말로 사랑인 것 같냐고 반문했다. 그리스의 어느 섬으로의 여행은, 간혹 떠나던 뮤의 출장에 스미레가 동행한 것 이상이 아니었다. 새벽에 뮤에게 그리스로 와달라는 다급한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나는 스미레가 흔들리거나 좌절할 때 이렇게 말해준다. 나로서는 위로가 격려가 아니라 솔직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것에는 거짓말을 하진 않아. 네가 지금까지 쓴 문장 안에는 멋지고 인상적인 부분이 많아. 예를 들어, 네가 오월의 해변을 묘사하면 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리고 바다 냄새가 나. 따뜻한 태양이 온기를 두 팔에 느낄 수 있어. 또 네가 담배연기로 꽉 찬 좁은 방에 대해서 쓰고, 그걸 읽고 있으면 정말로 숨이 막히고 눈이 아파져. 그렇게 생명이 느껴지는 무장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냐. 네 문장에는 그 자체로 호흡하고 움직이고 있는 듯한 자연스런 흐름과 기운이 있어. 지금은 그것들이 아직 하나로 제대로 연결되고 있지 않을 뿐이야. 피아노 뚜껑을 닫을 필요는 없어." (p.87)
그리고 덧붙였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가끔 대단히 상냥해질 때가 있어. 마치 크리스마스와 여름방학과 갓 태어난 강아지가 함께 있는 것처럼." (p.88)
나에게 스미레는 불안과 평온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상실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그런데 지금 나는 그리스의 어느 섬에 있는 것이다. 뮤와 앉아, 스미레의 실종 얘기를 들으며.
잠시 다른 이야기.
그리스의 섬에 머물며 영감을 받아 작품을 완성하여 자국으로 돌아가 유명해진 수많은 예술가들이 과연 당시 부서질 듯 아름다운 그리스의 혼란함, 전쟁, 독립에 관심이나 가졌을까. <코렐리의 만돌린>이 그리스에서 벌어진 전쟁(독일군과 무솔리니가 손잡고 연합군과 벌인 2차대전)을 그리고, 그리스의 섬에서 아름다운 시를 썼던 칠레 시인 네루다의 시는 오늘날까지 유명하다. 그보다 이전에는 터키(오스만투르크제국)를 상대로 힘겨운 독립전쟁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이 평온한 그리스의 섬 이면에 숨겨진 역사와 아픔을 사람들은 볼 줄 모른다. 하루키는 이것에 대해서도 잊지 않는다. <먼 북소리>를 쓸 정도로 그리스를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본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또 스미레가 걷는 유야무야한 작가로서의 길은, 문학부에 들어가 세속적 분위기에 박차고 나올 정도로 깊게 갈망하는 문학의 길을 나 또한 고민하게 한다.
스미레는 어디로 갔을까. 스미레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는 뮤의 얘기는 스미레가 나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 다음 시점부터 시작된다. 부르고뉴에서 만난 영국인이 그리스에 있는 별장을 빌려주었고 둘이 함께 세상의 끝과도 같은 이곳에서 꿈결처럼 평온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는 스미레가 사라진 사흘 전까지.
계속 쓰려고 했다. 하지만 사흘 전의 일과 그 이후의 일들을 찾아가는 건 각자의 몫인 것 같아 여기서 접기로 한다. 나 또한 언젠가 훌쩍 사라지고 싶은 충동이 없는 건 아니니 스미레의 사라진 그림자를 추적하는 건 뭔가 옳지 못한 느낌이다. 내가 싫어하는 건 그녀도 싫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지구로 내던져졌고 이 행성이 어디든, 누가 곁에 있든 없든 나는 살아야 한다. 라이카도 그랬을 테니까. 최선을 다해 살아있었을 테고, 살아있고 싶었을 테니까. 자기연민이 기본적으로 나는 없다고 생각해왔다. 원래 많은 것에 계획적인 타입이 아니라서 언젠가 계획을 세우고 나면 그 계획을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 쓴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그런 게 없다. 내가 나를 위로하는 방법은 그냥 두는 것 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 아무 것 하지 않은 채로 그냥 두는 건 나를 지구라는 행성에 내던진 조물주가 아니라 목적을 위해 인간에 의해 스푸트니크에 탄 채로 사라져버린 라이카에게 미안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관둬야겠다. 더이상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은.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도 뭘 하지 말아야 할지는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사랑에 관한 한, 하루키의 이 문장은 시작이자 끝이다. 소설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게 펼쳐지는 파노라마다. 자, 이것이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이자 모든 것이 끝난 이유다.
사랑이란,
스물두 살의 봄, 스미레는 난생처음 사랑에 빠졌다. 광활한 평원을 가로지르며 돌진하는 회오리바람처럼 격렬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나가는 땅 위의 형태가 있는 모든 사물들을 남김없이 짓밟고, 모조리 하늘로 휘감아올리며 아무 목적도 없이 산산조각 내고 철저하게 두들겨 부수었다. 그리고 고삐를 추호도 늦추지 않고 바다를 가로질러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무너뜨리고, 가련한 한 무리의 호랑이들과 함께 인도의 숲을 뜨거운 열로 태워버렸으며,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폭풍이 되어 어느 곳엔가 있는 이국적인 성곽 도시를 모래 속에 통째로 묻어버렸다. 그것은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는 스미레보다 열일곱 살 연상으로, 결혼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덧붙인다면 여성이었다. 그것이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이자 (거의) 모든 것이 끝난 장소였다. (p.7)
실제로는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이자 모든 것이 끝난 장소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하려 할 때, 결국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다.
나는 어디 있을까.
나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나는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라져버린다면 그것 또한 일상적이었으면.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을 함께하고 있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멀리서 보면, 그것은 유성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수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거죠. 두 개의 위성이 그리는 궤도가 우연히 겹칠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고 어쩌면 마음을 풀어 합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잠깐의 일이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타버려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p.197)
자유는 위험을 동반하는데, 내 손을 떠나 행복하길 바라며 세상 속에 던져놓고 상실을 견디는 마음과 구속이 사랑이라 착각하며 내 책임감을 내세우는 마음 중 어느 것이 더 이기적인 생각일지 몰라 언저리를 서성대는 날들이다. 나를 떠난 것이 불행할 거라고만 생각하는 건 내 오만이 아닐까. 대신 너는 자유를 얻을텐데. 내일 죽을 지라도. 사랑해서 보내준다는 대사를 이해할 것도 같다.
답이 들려올 리 없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