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무리 아티스트를 동경한다고 해도, 예술가의 삶을 통째 욕심낸 적 많았어도, 자칭 예술애호가이긴 해도, 이 책은 궁극적으로 내 '과'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나는 언제나 내 편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는데 누가 내 편이 아닌지는 본능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사람도 책도. 그리고 여기서 아니라는 건 어딘가에서 보지 않거나 어떤 촉매가 없었다면 혼자서는 알지 못하고 넘어갔을 책이라는 뜻이다. 내가 싫어하거나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차라리 과학책이 가깝지, 이 책을 들게 된 이유는 TV에서 하는 유일한 책 프로그램 <즐거운 책 읽기>를 우연히 봤는데 추천책으로 나오기에. 더불어 지난 방송에서 다룬 책들을 이리저리 뒤져 몇 권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당장 사서 읽기에는 읽던 책이 많았다.
여기서 말하는 '아티스트'는 아마 화가/소설가/시인/디자이너 등 프로들만을 일컫는 건 아닐 것이다. 누구나 가슴 속에 품은 뜨거운 열망 한 조각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굳이 예술이라 이름 붙이지 않고도 창작과 열정을 통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긍정적 마인드를 갖게 하는 책이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엄청난 고뇌로 갖지도 못한 드로잉 실력으로 화가의 세계를 평정하겠다거나 독자적 시세계에 빠져 세상을 뒤집을 시를 써보이겠다 이런 꿈 애초부터 꾸지도 못한다. 어렵다. 내게 예술로서의 모든 것들은 먹고 이야기하고 자는 사이사이 일상을 비집고 들어와 무언가를 볼 때 좀 더 깊고 넓은 눈으로 '재밌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통로가 되어줄 뿐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양분하면 전자가 훨씬 큰 구성비율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하나를 하면 둘이 달려들고 둘을 하면 셋이 보여 결국 원망하거나 신세타령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못한 채 주저앉기 십상인 게 내 삶이고 보통 사람의 삶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 중에는 같은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이것도 해내고 저것도 해내면서 소소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분명 있다. 나는 그들처럼 되고싶은 것이다. 이왕이면 책도 좀 읽고, 영화도 좀 보고, 사람들 얘기도 듣고, 여행도 하면서 골고루 관심 좀 가져보고 싶은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샌델 교수는 셰익스피어와 심슨 가족 중 어느 쪽이 더 고차원적인 취미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학생이 심슨을 즐긴다고 말하면서도 반대로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을 더 고상한 취미로 꼽는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이 모든 현상들을 이론화하거나 철학자들의 입을 빌어 예를 들며 상세히 설명하지만 결국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나도 일상에서 한 번쯤 생각해봤던 것들이다.(우연찮게 이 페이퍼를 쓰기 시작하면서 마이클 샌델을 읽었다, 뒷북치는 건 민망한데 그래도 요즘 인문학적 사고를 하려고 노력중이어서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후딱 읽었다, 쉽긴 쉬웠다, 그런데 일 년에 한두 권 책 사보는 사람에게도 쉬운 책인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이게 결론!) 그러면서 깨달았다. 일반인들의 모든 판단은 거의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내려진다는 걸. 어째서 심슨보다 셰익스피어냐 물으면 상대를 설득시킬 요령있는 답변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부터 내가 좀 속물적으로 느껴졌다. 어쨌든 심슨보다는 셰익스피어다!
아무도 어떻게 가는 길이 올바른 지를 알려주지 않는 것처럼, 숲을 보려는 노력 정도는 기울일 수 있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국은 내 능력치에서 보는 세상은 숲보다는 나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어느 책에서도 예술가가 되는 법이라든지 예술가로 성공하는 법 따위의 지름길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앞서 예술의 길을 걸었던 어떤 사람에게서 그 길에 대한 이러저러한 얘기를 듣는 것 뿐이다. 그런데도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뭉클함을 예술적 열망이 아니라고 부인하기란 어렵다. 그래, 예술이든 정의든 찾아가는 길은 어렵고, 미로를 헤매다 돌아나오는 길을 찾아야 하는 유일한 사람은 나 뿐이야. 이런 쉬운 결론이 이 많은 페이지를 읽고나서야 비로소 나오다니.
나 요즘 이런 영화들을 감상하고 있다. <까미유 끌로델>이나 <클림트>, <아르테미시아>, <라 비 앙 로즈> 정도는 봤어도 이런 류의 전기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의외로 봐야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아.. 만삭의 몸으로 모딜리아니의 뒤를 따라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던 잔느가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보다 더 아니, 세간에 알려진 게 몇 년 되지도 않은 헌신적 사랑의 대명사로 꼽히는 프랑스 여류화가. 모딜리아니의 아내로 더 알려지는 게 그녀에게는 행복한 일일 듯 싶다. 영화 평점이 엄청 높은데 상상만으로도 사랑이 눈부시다. 그녀는 어렸고 자기 또한 화가지망생이었는데 까미유와는 달랐다. 물론 모딜리아니도 로댕과 달랐을 것이다.(여자는 남자하기 나름) 아무리 사랑해도 배우자의 광기 어린 예술의 혼과 좌절을 나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빔 벤더스는 독일의 세계적 무용수 피나 보쉬의 춤을 실제인 것마냥 생생하게 카메라로 잡아낸다. 이렇게 얘기하는 나는 <블랙 스완>을 보기 전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탈리 포트만이 좀 부담스럽다. 페이스 자체는 좋아하는 상이 아닌데, 그래서인지 기대 되면서도 작품이 나올 때마다 자꾸 피해가는 듯. 그래도 <클로저>랑 <브이 포 벤데타> 때 좋았는데.
그녀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어록에 남아있을 정도니까 내가 들은 말은 아니다. 영화에 내 인생을 한정시키기엔, 이 세상엔 영화 이외의 것이 너무 많다. 나탈리 포트만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티스트 웨이가 꼭 이들처럼 대단한 인생을 살거나 대단한 작품을 남기거나 대단한 사랑을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아프게 눈부신 이 모든 시간들을 가만히 앉아 폭풍감상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외부와 내부 에너지 모두가 달리는 느낌이다.
대체 뭐가 더 필요한 걸까. 잃어버린 게 뭘까. 비교적 상실감에는 무통증으로 지내고 싶은 편이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지금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원히 아티스트 웨이에 대해서는 나는 알 수 없는 걸까.
뭘 더 알아야 한다는 사실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너무 어렵다.
그리고 우연히 보게 된 천경자를 다룬 다큐를 보고, <스타 인생 극장>의 구혜선이 드로잉을 검사받는 수업시간을 보고, 한 송이 꽃 주위를 팔랑거리는 얼룩덜룩한 무늬의 나비를 보았다. 머물 곳을 찾지 못하는 나비의 날갯짓을 보며 아직 보지 않은 두 작품을 떠올렸다. 어떤 상관관계가 작동했는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