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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평점 :
지난해 말쯤 쓴 헤밍웨이 저작권 만료 페이퍼 후에 딱 두 권을 샀다. <무기여 잘 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가지고 있는 옛날 전집에 있긴한데 관심 밖이었다. 예전에 읽은 건 <노인과 바다> 뿐인데 사실 그것도 기억에 없긴 마찬가지다. 읽으나마나. 어쨌거나 처음부터 장편 초기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 관심이 있었다. 첫 아내 해들리와의 추억을 담아낸 소설 <헤밍웨이와 파리의 아내>에 나오는 여인이 바로 이 회고록에 나오는 아내일 것이다. 폴라 매클레인은 헤밍웨이가 쓴 1920년대 파리 시절에 대한 회고록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축제(A Moveable Feast)>를 읽다가 해들리 엘리자베스 리처드슨을 두고 말한 대목, "해들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를 마주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해들리에 대한 전기 작품을 읽기 시작했고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 <헤밍웨이와 파리의 아내> 도서상세페이지에서) 그가 계기로 삼았다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또 한 권은 <킬리만자로의 눈>인데 이건 아직이다.(중,단편 편식이라서) 초기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번갈아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은 산문체라 더 빨리, 더 현실적으로 잘 읽혔다. 개인적으로 재미는 별로였지만(여긴 파리도 아니고, 파리에는 헤밍웨이를 능가하는 나만의 눈부신 추억이 있으니 상대적으로 감정이입이 힘들 수밖에) 흥미를 능가하는 소소하지만 특별한 그 무엇이 여기에 있었다.
제목은 얼마나 아름답고 눈부신가. 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과의 친분과 그녀 집에 드나들던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 피카소가 있었던 것, 뒷부분에 자세히 할애되는 스콧과 젤다와의 인연 등은 이미 우디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봤던 바, 아, 이 책을 토대로 파리에서의 헤밍웨이를 생각하면 당시(1920년대) 거리마다 카페마다 반짝였던 수많은 예술가들의 혼이 파리를 떠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속에서 헤밍웨이는 작품을 위해 고뇌하는 외로운 영혼이었지만 이 책에서는 아내 해들리가 언제나 함께 있으므로 가난과 고독, 무료한 일상을 더욱 풍부하게 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아들도 태어난다. 그야말로 평화로움 속에서 일렁이는 풍요로운 삶이다. 경제력으로만 보면 그럭저럭이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야 한다는, 써야 한다는 일념이 있었기에 단 한 번도 삶의 지위에서 바닥인 적이 없었다. 헤밍웨이의 육성으로 직접 듣는 다양한 파리의 인간군상과 경마 혹은 경륜에 대한 단상, 좋아하고 또 영감받은 여러 명의 작가에 대해 들을 수 있어 유익했다.
우리는 값싼 음식으로 잘 먹고, 값싼 술로 잘 마셨으며, 둘이서 따뜻하게 잘 잤고,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p.51)
화려하지 않지만 특별한 일상은 더 큰 화려함보다 더욱 수려하게 휘어잡는다. 걷고, 사색하고, 글쓰고, 책읽고, 다른 작가나 화가를 만나면서 얻은 소소한 영감을 그는 소중히 여긴다. 호오로 가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인정해주는 것이 글쓰는 이의 미덕이기도 할터,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다 축제처럼 다정하고 아름다웠다. 가난한 것마저도 탐스럽게 느껴졌다. 배고플 때 빵냄새가 더 고소하게 느껴지고, 세잔의 그림이 더 또렷이 보인다는 헤밍웨이가 뤽상부르와 여느 카페들을 오갈 때, 나도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관심은 작가에 한하지 않고 음악과 그림에까지 미친다. 에밀 졸라, 에즈라 파운드, 스타인 여사,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투르게네프, 고골, 톨스토이, 캐서린 맨스필드, 장 콕토, 콜 포터, 제임스 조이스, 헨리 제임스 등에 대해 얘기하는 모든 의견들이 한 줄기 빛처럼 독서의 밑거름이 되어주기도 한다. 헤밍웨이니까, 파리니까 이 모든 것이 축제다.
나는 장편 소설을 써야 한다. 그러나 정제된 문장으로 소설을 완성하려고 애쓰다 보니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장거리 달리기를 연습하듯이 우선 조금씩 조금씩 긴 글을 쓰는 훈련이 필요했다. 전에 리옹 역에서 가방과 함께 원고를 잃어버린 그 소설을 썼을 때 나는 앚기 젊음 그 자체만큼이나 허망하고 변덕스러운 젊은 나이의 순진한 정서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원고를 잃어버린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새로 소설을 써야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절대로 생계의 수단으로 소설을 써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을 때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 따라서 나는 더 많은 압박이 쌓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은 우선 내가 잘 아는 주제에 대해 긴 글을 써봐야 할 것이다. (p.87)
파리의 거리마다 책을 파는 노점상이 있고, 무엇 하나 허투루 보는 법 없는 이 젊은 미래의 소설가 헤밍웨이는 당시 캐나다와 미국의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원고료로 아내와 함께 알뜰살뜰 살았다. 넘치는 돈은 아니었지만 부족하다면 부족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럭저럭 함께 의논하고 나누며 좋아하는 것들을 사고 하고 즐겼다. 진정한 예술가들의 의미 그 자체로. 그는 파리에 체류했던 20대(1921-1926)를 1957년 가을에서 1960년 봄 사이에 회고록으로 썼다. 그리고 1964년 출간되었다. 덧붙여진 헤밍웨이의 상세한 연대기는 혀를 내두를 정도지만 사진 컷을 구경하면서 비로소 환상의 그가 실제의 그로 환생하는 느낌이다. 작품을 읽는데 작가를 꼭 알아야 한다고는 생각 않는다. 영화를 보는데 배우를 반드시 알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작가를 먼저 알고 작품을 읽는 것과 작품을 읽고나서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많이 다를 것이다. 그리고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자를 실행하려 한다. 기억나지 않는 <노인과 바다>를 뒤로하고 장편소설 대신 회고록의 에세이를 먼저 고른 건 분명 의지였지만 한편 그를 만나는 가장 쉽고 아름다운 방법이긴 했다. 헤밍웨이의 화양연화.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내라는 헤밍웨이의 말 전에 나는 이미 어느 교수님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파리에 가서 여전히 또렷하지만 약간은 빛바랜 추억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앞으로의 내가 어떨지 모르지만 내게 파리도 헤밍웨이 못지 않은 나의 화양연화다.
가난했다. 모든 것이 없었다. 젊었다. 가장 행복했다. 가진 게 없어 모든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간절히 바라고 느낄 수 있었다. 한때 지독하게 글과 책에 매달렸던 젊은 날의 순간이 바로 나의 화양연화였다. 비록 파리는 아니지만 내게도 그렇게 지금을 표현할 날이 과연 올까.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벗은 채 오롯이 과거로만 쓰인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가 더 크다. 아무 것도 없어서 모든 것이 있었던, 가난과 고독이 인생 가장 혹독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될 그런 날들을 나는 지금 만들고 있을까. 후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야겠다. 노트르담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생루이섬과 시테섬, 센강의 차가운 반짝임이 아름답다고는 느꼈지만 대부분의 경우 파리는 내 것이 아닌 적이 많았다. 마레 지구로 들어섰다 길을 잃었고, 작가(및 예술가)들의 아지트를 찾아다니다 지쳐 나가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 지금도 제 2의 헤밍웨이들이 파리의 어느 대로와 골목에 늘어선 노천카페와 술집을 어슬렁거리고 있을까. 간절히 쓰여지길 바라는, 쓰고싶은 어떤 글 한 줄기를 생명줄처럼 붙잡고서.
주류를 꽉 잡은 미국문학보다 선호해온 건 늘 유럽문학이었다. [외국문학감상]이라고 이름 붙여진 대학 때 전공수업은 그래서 지금까지 어쩌면 먼 훗날까지 여전히 유용할텐데 '이방인, 호밀밭의 파수꾼, 데미안, 금각사'를 능가하는 문학이 내게는 오랫동안 드물었다. 작가편식이 뿌리 깊었던 탓에 박혀있는 기억이 쉽게 순위를 내어주지 않았던 것. 샐린저보다 헤밍웨이를, 헤밍웨이보다 피츠제럴드를 좋아하게 될 날이 올 수도 있다. 헤밍웨이의 파리. 기호야 어쨌든 문학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만큼은 국가,지역,시대를 따지지 않았던 문학의 거장들. 그들의 한때와 헤밍웨이의 20대를 들여다보는 여정은 즐겁다.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내는 기회와 영광, 나는 분명 파리에 있을 때조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곳이, 추억이 앞으로 나를 얼만큼 괴롭히고 또 살게 할 지를. 그때도 지금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덮으며 엉뚱하게도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글쓰기 열정을 가능하게 하는 그 힘. 언제쯤 온전히 그것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을까. 잘 사는 것 그리고 잘 쓰는 것. 나는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