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를 쓰려고 했지만 페이퍼로 변질된 이야기. 이유는 에피쿠로스와 인문주의자들, 에라스무스와 토머스 모어 그리고 몽테뉴 덕분이다. 그런데 이 이름들은 정말이지 이 책을 대하는 아주 쉬운 일부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기원전 1세기, 사물의 본성에 대해 쓴 로마 시인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루크레티우스였다. 에피쿠로스의 계승자였던 그의 원자론은 중세의 세계관으로 볼 때 위험천만한 내용이었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은 고결하고 끈기 넘치는 한 책사냥꾼에 의해 발견되어 그간 지켜져온 총체적 우주질서와 종교적 신념을 뒤엎는다. 제목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학자들은 이 책이 발견된 순간을 근대의 탄생이라 표현한다.

 

 

 

 

 

 

 

 

 

 

 

 

 

 

 

이렇게 서로를 소유하는 동안에도 연인들의 열정은 불확실성 속에서 솟구치며 방황한다. 자신의 눈과 손으로 먼저 무엇을 즐길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의 욕망의 대상을 강하게 움켜쥐면서 육신에 고통을 가져오고, 대부분의 경우에 상대의 입술에 이를 들이밀면서 서로의 입을 거칠게 부딪친다.  -루크레티우스

 

-<1417, 근대의 탄생>, p.247

 

 

이 순간도 언젠가 역사가 될 것이다. 30세기에도 지구가 굳건하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겠지. 그치만 개인적으로 30세기에 지구와 인간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책이 발견되든 괴생명체가 나타나든 세계는 변화한다. 고대의 희귀본 하나를 발굴한 중세의 책사냥꾼이 르네상스(근대)를 연 것처럼 말이다. 철학과 사상을 쭉 공부해왔다면 다르겠지만 생소한 고대 철학자와 정치가는 물론이고, 고대 문헌의 철학적 내용까지 사유해야 한다는 게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크게 보면 라틴어(중세 로마어)를 잘 배운 한 남자의 책사냥기, 사실상 고대중세와 근대의 핵심을 이해해야 하며, 포조와 루크레티우스를 비롯한 철학사상가들을 알아야 한다.

 

1390년대 말 청년 포조 브라촐리니가 발들인 어두침침하고 좁은 도시, 페스트의 그림자가 주기적으로 덮쳐오던 중세의 피렌체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어떻게 기회의 도시 로마로 진출했는지, 중세에 '책'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필사가의 지위란 얼마나 경이로운지, 교황청 공증인이자 필사가로서 권력 제일 가까이 다가갔던 포조가 혼란한 정치상황 중 어떻게 일자리를 잃었는지 알아야 한다. 발굴한 후 정작 필사본을 소유하지도 못하고 그 소유의 첫 필사본이 후대에 전해지지도 못하지만 그로인해 개인적, 문화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포조의 중년과 말년이 어땠는지, 그가 원한 사회는 어떤 것이었으며 인문주의자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어떻게 고수할 수 있었고 또 희망은 어떻게 깨어졌는지.

 

 

교회는 세상의 중심이었고 극단적이었으며 맹목적 믿음을 요구했다. 포조보다 몇십 년 앞섰던 시인 페트라르카와 살루타티의 인문주의는 단순히 괜찮은 고대 양식의 모방이 아니라 그를 넘어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더 큰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면에서 폐허와 치부를 드러낸 채 부패하고 있었는데, 페트라르카를 이은 포조와 교황청 사무국의 인문주의자들은 살아있는 장(場)에서 비로소 냉소, 혐오, 염세주의, 비관주의와 대치하기 시작한다. 수도원은 면죄부를 남발하며 각종 음모와 속임수, 위협과 고문을 서슴지 않았고 신의 이름으로 살인마저 묵인한다. 포조는 어리석음과 사악함으로 가득 찬 이 시대를 로마 옛 영광의 애처로운 그림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교황청의 계속되던 권력 다툼 아래 발다사레 코사가 수십 가지의 혐의로 고발 당하고 공식적으로 퇴위된 1415년, 주인 잃은 포조는 실직자가 된다. 근근이 같은 일을 이어갈 수는 있었지만 과감히 거절하는데 이는 다른 꿈이 있었고, 더 이상 방관자로 비굴하게 지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독서와 사라진 고전 문헌에 대한 열정이 다시 한 번 책사냥꾼의 기질을 발휘하게 하면서 1416년 갈렌 수도원에서 퀸틸리아누스의 <연설 교육론> 전권을, 1417년 풀다 수도원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찾아낸다.

 

강렬한 서정적 아름다움의 순간, 종교에 관한 철학적 명상, 쾌락, 죽음, 물질계, 인간 사회의 발전, 성의 위험과 즐거움, 그리고 질병의 본질 등에 관한 복잡한 이론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다. 시의 언어는 대체로 까다롭고 어려우며, 구문은 복잡하고, 전체적으로 놀랄 정도로 수준 높은 지적 야망으로 가득하다.

 

-<1417, 근대의 탄생>, p.229

 

그렇다면 이 시인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표현했기에 '발견한 일'만으로 암흑기를 닫고 재생의 시대를 여는 일이라고 했을까. 설명과 함께 잘 정리된 챕터가 있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주장 - 펼치기

 

 

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만들어진다.

물질을 구성하는 기초 입자인 '사물의 씨앗들'은 영원하다.

기본이 되는 입자들은 그 수는 무한하나 형태와 크기에는 제한이 있다.

모든 입자는 무한한 진공(void)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

사물은 일탈(swerve)의 결과로 태어난다.

일탈은 자유의지의 원천이다.

자연은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우주는 인간을 위해서 혹은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인간 사회는 평화롭고 풍부하던 황금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원시의 전쟁 속에서 시작되었다.

영혼은 죽는다.

사후세계는 없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모든 체계화된 종교는 미신적인 망상이다.

종교는 일관되게 잔인하다.

천사니, 악마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은 없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쾌락에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 아니라 망상이다.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깊은 경이로움을 낳는다.

 

펼친 부분 접기 ▲

 

 

 

 

영국의 왕정복고기 대표문인 존 드라이든(1631-1700)은 만족할 줄 모르는 성욕의 성질, 동일한 사랑행위의 반복, 반복된 행위에서 오는 쾌락, 사랑의 감정적인 고통을 공격적인 충동과 황홀경 사이의 갈망으로 이해한다. 첫문단에서 인용한 루크레티우스의 성과 즐거움(사랑이든 아니든)이 그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나면 더 아름다운 표현으로 변한다.

 

...젊은 한 쌍의 연인이 더욱 가깝게 결합할 때,

손과 손을 마주 잡고, 허벅지와 허벅지를 휘감을 때,

가득 찬 욕망은 부글대는 거품처럼 끓어오르고,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누르고, 함께 속삭이고, 함께 숨을 내쉴 때,

그들은 움켜안고, 꼭 짜내듯 쥐고, 촉촉한 혀로 서로를 찌르니

서로 상대의 심장을 향해 나아가지만 헛되도다.

그들은 단지 주변만 유람할 뿐이니,

육신은 꿰뚫을 수 없고 서로의 육신 안에서 어쩔 줄을 모르나니

아무리 그러려고 애써도, 둘이 엮인

격동적인 순간의 분노 속에서 더 확연해질 뿐이라.

그들이 누운 사랑의 둥지 속에 그렇게 뒤엉켜

넘치는 즐거움 속에 녹아내릴 때까지 그러하리. -1685, 존 드라이든

 

-<1417, 근대의 탄생>, p.248

 

 

 

 

중세인들은 비로소 전지전능한 신, 우주의 중심이자 만물의 기원인 인간, 정통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과학, 잘못된 환상, 쾌락과 관능의 마법에서 풀려난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해낸 일이었다. 물론 우여곡절이 많았다. 영혼의 존재와 사후세계를 부정하고, 우주가 원자와 진공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지전능한 존재는 없고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주장은 충격적이면서 지금까지의 우주질서와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를 모조리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루크레티우스의 책은 아주 오랫동안 금서 혹은 숨어서 몰래 보는 책으로 정의되었다. 포조가 발견했을 때 당연하게도 수도원에서는 이 책을 빌려주지 않았다. 필사가를 구하라는 닦달이 있을 뿐이었다. 힘겹게 필사한 결과물을 포조가 피렌체의 니콜로 니콜리에게 보냈고, 니콜리 역시 필사한다. 니콜리의 필체가 예술적이었는지 그의 사본은 이후 수십 여 개의 필사본의 기초가 되었다. 포조가 니콜리에게 전하기 전 독일인 필사가를 고용해 만든 최초 사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니콜리의 것은 9세기의 필사본을 베낀 포조의 것을 필사한 것으로 로렌치아나 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책은 그 이후로도 10년 이상 니콜리의 책장에 잠자다가 필사본 제작, 인용, 책의 내용을 암시하는 글귀, 미묘한 영향력을 나타내는 표시로 나타나기 시작해 곧 다른 곳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다가 금서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 채 인쇄술이 발달할 때까지는 필사본으로, 인쇄술 후에는 기독교 눈을 피해 읽히던 책을,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서 서점으로 주문 한 통만 넣으면 받아볼 수 있다.

 

 

'죽음이 운명의 굴레에서 우리를 구출한다'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는 루크레티우스에게로 계승된다. 여기서 쾌락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무한대의 욕구충족과 거리가 있는, 더이상은 갈증이 없는 상태/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의 그것이다. 물을 마시거나 배터지게 먹음으로서의 향락이 아닌 갈증과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 고통의 부재, 정신적 쾌락을 의미한다. '절제'의 측면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도 연결되며, 아타락시아(ataraxia)로 통한다. 충분한 것을 적다고 여기거나, 오늘 배터지게 먹고 내일 다이어트하는 현대인들을 이 이론으로 비판할 수 있다. 신과 교회(교황)가 곧 모든 것인 중세에 죽음과 사후세계를 부정하고, 종교와 지배계급에 비난의 여지를 남기는 회의주의가 환영받았을 리 없다. 추종자들의 수가 적지 않았지만 늘 수면 아래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던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는 낙원,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죄 없는 사회를 주장하던 중세의 세계관으로 볼 때 이단이었고,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처럼 처형될 가능성도 있었다. 포조는 그런 가운데 한 권의 책을 찾아냄으로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미니쿠스회 소속 수도사 조르다노 브루노는 바로 이 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로 인해 세계관과 믿음을 바꾸었고, 얼굴에 십자가형을 당한 채 화형되었다. 믿음과 신념은 목숨보다 강했고, 그럴수록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더욱 강력한 힘으로 세상에 울려퍼졌다.

 

브루노의 표현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눈멀고 악의적이며 거만하고 시기심 많은 무지의 동굴 아래 파묻혀 있던 고대의 진정한 철학이라는 태양이 떠오르기에 앞서, 새벽을 알리는 자가 되도록 신들이 임명한 사람이다.

 

-<1417, 근대의 탄생>, p.298

 

 

 

포조와 루크레티우스 사이에는 무려 1500년 이상의 강이 흐른다. 중세의 필사가들, 현대의 독서가들과 닮았다. 책을 수집하고 모으고 진열하고 먹는다. 책벌레, 습기, 곰팡이, 양피지와 라틴어, 희랍어와 싸우던 고대 중세에 비하면 더 많은 책, 더 난해한 책을 우걱우걱 씹어먹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야 한다. 책은 때로 나이와도 비례하지 않는다. 당연한 게 조금 두렵다. 쉽게 따라잡기도, 따라잡히지 않기도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인가. 책 한 권을 발견하고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걷고 달려 발견, 필사, 전도했을 때의 즐거움을 현대인들은 잊은 지 오래지만, 인쇄술이 발달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만큼은 행운이다. 나는 책구입증이나 책보관증에 걸린 욕심쟁이는 아니다. 뿌듯한 건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의 희열이지 책을 사는 순간 자체는 아니다. 다행이다. 책 둘 공간이 없어 가족을 죽이거나 무게에 못 이긴 바닥이 폭삭 내려앉을 염려는 없으니. 그러나 이와 비슷하거나 행여 다른 이유로 오늘도 쌓인 책 사이 어디쯤에서 괴로워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열린 이후로 책이 없는 시절은 존재하지 않았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살았을 뿐.

책은 그렇게 인간 역사 너머로부터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세상을 오갔다. 그것이 책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6-21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3 0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간도 사람도 다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또렷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것들이 있다. 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 아빠와 아빠의 삶에 대해 떠올리지는 않았다. 이 세상 부모들은 다 가여운 존재니까, 그래서 부모되기를 두려워한 이십대를 보냈지만 그 지독한 환멸은 사실 아이에 대한 나의 모자람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아이를 가진 주변인들의 뻔뻔한 자기과시로부터 올 때가 많았다. 물론, 아빠의 청춘에도 눈물 없이는 못듣는 사연이 제법 되지만, 그걸 글로 옮기지는 않으련다. 경험보다는 생각을 담고 싶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따라잡지 못하리라는 희미한 체념의지를 느낀다. '영원한 청년작가'의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이번 소설도 그 서정성을 한껏 드러낸다. 소금이 상처에 닿을 때의 쓰라림. 땀흘리며 일하는 늙은 등을 사랑한다. 정확히 말하면, 땀자국으로 시큼해진 우중충한 색 티셔츠와 쪼글쪼글한 손바닥과 시꺼매진 손톱이 말하는 세월, 까칠까칠 촉감을 나는 아버지라 여긴다. 나쁘게 말하면 세상을 아름답게 혹은 서정적으로 보려는 작가의 취향 혹은 의도이겠지만, 그래서 그를 현실적이거나 실체적이지 못하고 감성 안에 머무는 작가라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끔 읽는 그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그 감정과잉의 애절함을 좋아한다.  

 

스무살 생일파티를 앞두고 디지털카메라를 사오기로 한 그가 언덕배기에서 되돌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토록 오랫동안 찾아다녀야 할 줄은 몰랐다. 첫사랑, 청춘, 애착, 취미, 호오,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르는데 무엇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찾아서 뭘 어쩔 것인가. 왜 찾아야 할까. 찾아나서긴 했지만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라지고서야 비로소 통장잔고와 빈자리, 잊혀진 이름 세 글자로 뚜렷하게 남겨진 사람. 제 청춘과 시간을 잔뜩 바치고야 우리를 얻었던 사람. 유일하게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었을 사람. 평생 그래야 할 사람. 그래야 했던 사람. 그래서 당연했던 사람. 아무 것도 아니던 사람. 알려고도 하지 않던 사람. 자식을 위해 악착같이 세상의 치사함과 더러움을 참아낸 사람. 이름만으로도 심장 한 조각이 뭉텅 잘려나간 듯 그리움이 차오르게 하는 사람.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그땐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요즘은 알아. 그 양반이 당신의 꿈을 버리고 치사해져버렸기 때문에, 그나마 내가 배우고 굶지 않았다는 거.

 

알까. 숨바꼭질처럼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숨겨버린 그로 인해 세상을 배웠다는 걸. 스무살 어린 딸이 서른의 어엿한 여자로 자랄 때까지 아버지는 무엇을 해줘야 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아빠는 프린터 잉크를 갈아주기 위해 프린터를 들고 동네 문구점으로, 진통제를 얻기 위해 약국으로, 시골집에서는 갑자기 필요해진 생리대 패드를 사주기 위해 읍내로 뛰어가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다른 동네에 있는 학교까지 매일 등교를 시켜주었고, <인셉션>을 함께 보러간 남포동 극장에서 덥다며 하드를 함께 사먹고, 정작 상영중에는 뭔 영화가 저래, 라면서 계속 졸던 사람이었다. 우리 아빠가 특별히 살갑거나 따뜻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아빠들 속에는 다 저런 마음이 있는 거였다. 실패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릴 만들던 순간부터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 덜 여문 나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을 십 년간 찾아헤매는 이야기, <소금>은 자리를 뺏음으로서 비로소 이 시대, 이 가정, 이 관계의 아버지를 다시 써내려간다. 모든 부모들의 진혼곡. 그리고 소금. 바람과 햇빛의 밀도에 따라 그 맛과 형태를 달리하는 놀라운, 어렵게 얻어 더 소중한 한줌이다. 파도와 햇살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내고도 고유의 성질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흰 가루. 자식처럼 공들여 키워내지 않으면 안되는 예민한 물질. 소금이 만들어지는 자연과 과학의 놀라운 조화와 그가 소금이고자 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금이 음식에 그런 것처럼, 아버지에게 자식이 그렇다. 쓰게도, 달게도, 맵게도, 짜게도 하는 것. 그래서 애물단지가 되어버리는 것.

 

우리나라 소금, 천일염은 향과 미네랄이 실종된 중국산과는 한없이 다른 건강염 그 자체라는 것, 그런 국내산 대신 강제적으로 중국산을 구입할 수밖에 없는 슬픈 국제관계의 실상도 덤으로 알게 된다. (예전부터 그랬다고하니, 이게 아직 협상단계인 FTA의 실상일리는 없고 대체 뭣때문이더라, 책을 좀 오래전에 속성으로 읽어서-_-)

 

아버지는 수많은 해석의 길을 거느린 놀라운 텍스트였다.

 

감히 부르지 못하는 선.명.우. 그의 이름이다. 딸 셋에 억척스런 아내. 부잣집 딸이던 아내의 끈질긴 구애에 진짜 사랑하는 세희누나를 포기하고 체념처럼 결혼한 비운의 남자. 생산과 자본이라는 적 앞에 무력해진 아버지가 어째서 염전으로 걸어들어가 장애가족의 가장이 되었는지, 왜 끝내 돌아오지 않는지를 추적한다. 졸업식에 가기 위해 식사를 건너뛰고 소금을 길어올리다 쓰러져 눈감은 어떤 남자의 마지막을 가슴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하려면 어떤 재주가 더 필요할까. 

 

그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영원히 소유하기 위한 방법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어느 시대에나 자식은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의 또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삶 하나도 평온하지 않다. 큰딸 정애에게 장애를 가진 아내와 나머지 자식들을 떠넘기듯 가버린 아버지는 방관자인 동시에 실패자다. 남자가 실패했으므로 여자 역시 행운을 비켜간다. 그런 시대였다. 부조리에 대한 순응이 온 공기를 휘감은 뿌연 시대, 마지막 남은 선연한 광기가 비운의 주인공들을 타고 부유한다. 아버지가 가정을 내친데서 시작된 폭력은 한 가정과 개개인의 존엄을 연쇄적으로 망가뜨리며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철저히 유린한다. 울타리를 잃어버린 가족이 세상의 위협에 대항하지 못한 채 적을 늘려가다 쓰러진다. 세계는 이 가족들을 일으켜세우지 않는다. 순애는 동네 남자에게 몹쓸 일을 당하고 죽었다. 같은 일을 당했지만 순애는 죽었고 정애는 살았다. 살아있음과 죽음 사이에 일련의 인과관계가 없다. 묘자와 정애는 여자 힘으로 먹고사는 허망함, 치사함, 생활의 억척스러움을 유일하게 나누는 존재들이다. 무지의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가난한 자들의 운명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끝내고 싶은 이들의 간절한 외침이 새마을운동과 겹쳐지며 지역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춰낸다. 목표도 없고 애착도 없이 그저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관조도 낙관도 아닌 눈으로 비추는 작가의 문체는 해학적이면서도 뭉클한 상황을 통제하는데 효과적이다. 존재한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추궁당하는 이들, 늘 희생자와 가해자가 바뀌지 않는 세상을 물색하는데서 오는 비극이 썩 편하지는 않다. 그조차 명랑과 쾌활로 통과하려는 의지가 눈물겨워졌다. 산다는 것은 반쯤 미치거나 미친 노래를 흥얼거려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가난이 거듭 쌓이면 희망과 미래가 잊힌다. 삼켜지지 않는 울분이 구천을 떠돌며 미친 이들의 노래에 섞이거나 빗물을 가장한 눈물에도 섞였다.

 

어디로 가는지, 왜 왔는지 모르는 자들은 마지막 투혼으로 노래한다. 미치지도 못하는 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노래할 수도 없는 자들은 하루하루 말라가며 시간을 통과한다. 대다수가 성지를 찾아나섰지만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런 세상을 통곡하거나 원망했다.

 

 

*

물국수를 좋아하시는 아빠는 국수(고구마나 감자 아니고?)가 주식이라면 좋겠다고 하신 적도 있다. 국수 삶으면 막 맨국수에 김치 올려먹으면 맛있다고 시범 보여주시고 그랬는데, 라면이 그렇듯이 젓가락질 덜 배운 나는 국수에 김치를 올려 한입에 먹을 자신이 없;; 더군다나 후루룩 쩝쩝인데, 없어보여ㅠㅠ 그리고 캠핑, 태국관광 갔다오시고는 늙은이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기념품 가게에서 물건 사라고 강요당하는 거 말고 인도나 베트남처럼 못사는(응?) 나라가서 직접 느끼고 싶다고 하셨다. 아빠ㅠㅠ 우리는 언어도 안되고, 특히 아빠는 길치잖아요ㅠㅠ 

 

참, 스타렉스 짐칸을 침대로 개조해 밤낚시를 다니고 싶다고 하셨는데, 왜 스타렉스냐면 캠핑카는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으니까. (아빠 이제 스타렉스 캠핑카 나왔는데요ㅠㅠ 낚시 몇 번 다니기에는 너무 비싸죠, 붕어를 사드시는 게 낫겠어ㅠㅠ) 그리고 바다보다는 계곡물 흐르는, 우리 외갓집처럼 계곡이 흐르는 산골짜기 방갈로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하셨고, 아빠만 따르는 비글 닮았지만 비글은 아닌 짱이를 엄청 예뻐하신다. 아빠 닮아 생라면을 아작아작 씹어먹는 귀여운 그 짱이 예전에 내가 만만한지 폴짝 뛰어오르기에 뒤로 넘어가면서 기함할 뻔했던 내가 아빠 안보실 때 몇 대 때려줬다 히히히.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3-05-3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 아이리님.... 너무 오랜만이죠? ^^

<남포동>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쫄면을 생각해내는 것은 무슨 심리인지...
남포동과 쫄면은 정말 관계가 없는데 말이죠.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물국수도 아니구. ㅋ

아버님이 참 매력적이시네요. 울 아빠는 요즘 상추 농사 짓느라고 정신 없으심... ^^

아이리시스 2013-06-04 16:17   좋아요 0 | URL
남포동에서 쫄면을 드셨어요? 근처에 백화점이 하나 생겼지만 요즘 그쪽으로 상권이 다 죽어버려서 아쉬운 게 많아요. 저도 안간지가 오래됐는데, 부모님은 아직 그쪽을 더 편해하시기도 하는 것 같아요. 자갈치에서 회 한접시 먹고 그렇게 시내나들이 하는게요.

많이 바쁘셨구나. 보고싶었다는 말도 못하게 엄청엄청 오랜만인 거 알아요? 저희 아빠는 열무를 그렇게 심으세요..하하. 거긴 풍경은 안그런데 희한한 청정지역이라 뱀이 마당에도 출몰해요. 저희집 짱이가 짖길래 나가보니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고 있었다고 했어요. 자연체험학습을 마당에서 할 수 있어요. 큭큭.

프레이야 2013-06-01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짠한마음으로 읽었네요. 자식은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의 또다른 이름! 이 글귀! 내일은 늙으신 아버지가 바람 쐬러 자주 가시는 양산천변으로 김밥 사서 동행할까 해요. 고마워요.^^

아이리시스 2013-06-04 16:1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어릴 때 내원사 통도사 엄청 다닌 부녀 여기 추가요! 정말 많이 갔었는데 오히려 자가용이 없던 아주 어린시절에 부모님이 앞뒤 배낭 매시고 동생하고 저 하나씩 챙겨서 대중교통 타고 걸어서 그렇게요. 예전에는 거기 취사,텐트가 다 가능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요즘은 환경이 워낙에..

벌써 주말 지났으니까 좋은 시간 되신 것 맞죠? ^^

2013-06-03 0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4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5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6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6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9 0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7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9 0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1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4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너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간절한 구원을 바란 적도, 애틋한 감동을 갈망한 적도, 시기와 질투에 시간을 낭비한 적도, 타인의 기회를 뺏은 적도 없다. 하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다. 잘못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시간의 구렁텅이에 한 번 빠지면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간과했고, 초강속으로 내려친 번개에 맞고도 무엇이 어긋났는지, 왜 그런 건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전쟁이 지나갔다. 부모님을, 언니오빠를, 쌍둥이 동생을, 그것도 모자랐는지 기어이 꽃다운 시간 전부를 할퀴더니 인생 전부를 나락으로 처박았다. 시작부터 끝을 굳이 계산해도 고작 삼 년이면 사라질 신기루 같은 총알의 시간이 추억과 미래를 짓밟고 감정을 앗아갔다. 준이 물 대신 진흙을 오물거리다 더 견디지 못하고 길가에 철퍼덕 주저앉았을 때 퇴역참전군인 헥터가 근처를 지나고 있었던 것, 그에게 발견된 건 행운이었다. 슬프고 가혹한 운명으로 한걸음 더 들어갈지언정, 다시 없을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줄 기회.

 

 

 

 

 

 

 

 

 

 

 

 

 

 

나는 써야했다. 이 숨막히는 먹먹함을 서툴게나마 표현하는 게 오래도록 애정을 가졌던 세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숭고한 빛줄기만으로는 아픔을 용서로 승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어감 이상의 연민과 최소한의 예의를 가장하여 늘어놓을 수도 없을 것이다. 박수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영광은 견딘 자들에게 바친다. 여기서 꼼짝할 수 없는데 처절한 상황에 맞닥뜨렸고, 불가항력이 자꾸만 나락으로 떠미는데도 혼자 힘으로는 절대 살아나지도, 아니, 남의 손에 아직은 팔딱이는 나의 숨을 맡겨야 한다면 당신은 어쩔 것인가. 무례한 질문이다. 그저 눈을 감고 처분을 기다리겠는가. 당신의 어느 시절에 뜨거운 피와 심장을 넘겨준 적이 있던가. 특수상황은 말그대로 특수하다. 선택이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눈앞에서 부모님을 일본군의 무자비한 폭력 아래 처참하게 잃은 기억이 있는 실비는 그 후로 오랫동안 세상과 연결된 한가닥의 실조차 붙잡지 못한다. 1935년 만주에서의 필름 같은 기억은 눈물 없는 울음과 소거된 아우성, 육체에 대한 혐오로 무력과 허무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서서히 영혼을 갉아댄다. 피폐한 영혼으로 지친 실비를 더한 허무와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민다.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었다. 철저한 타락과 방종으로 일관, 쾌락조차 고통으로 다가오던 사랑, 선교사 남편에게 정착해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몇 년. 1950년대, 비탈에 세워진 자그마한 고아원. 

 

전쟁을 혐오하는 아버지를 향한 애증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하게 했고, 그를 거리로 내몰았다. 하필 그때 전쟁이 진행중인 땅으로 온 건 죄책감 때문이지만 죽이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려운 일이어서, 포로로 잡힌 소년을 죽여야 하는 상황과 만나 허리춤 수류탄을 빼앗기고는, 그나마도 살아있는 목숨과 관련없는 전사자처리반에서 일한다. 그조차 적응 못해 부대로부터 퇴출되기 전까지는. 그들이 작은 고아원에서 보낸 시간, 쌓아나간 우정도 사랑도 아닌 희미한 의지는 모두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하지만 같은 전쟁의 피해자들, 준과 실비, 헥터는 한곳에서 만난다. 번뇌에 사로잡히기 싫어 몸을 혹사하고, 지키기 위해 남을 공격하는 성향의 헥터와 준은 닮았다. 몇 번이나 유산을 거듭한 실비의 상처는 똑 소리나는 내조와 버려진 아이들을 돌봄으로서 상쇄되는 듯 보인다. 그녀가 가진 또렷한 흉터, 보이지 않는 외상이 극의 분위기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헥터가 실비의 과거를, 준이 실비의 관심을 갈구하게 되기 시작한 이후, 그들은 서로를 인지하는 동시에 타인을 통해 나를 비춰본다. 필연적인 애상 아니면 자상 같은 안타까움으로.

 

중년이 된 준은 과거를 악착같이 붙든다. 그토록 도망치고 싶은 기억을 시도때도 없이 회상한다. 마치 삶의 전부인양 복기하며 죽어가고 있다. 참상 중에 가졌던 애정, 살아있음을 확인하던 순간을 그리워라도 하는 듯, 시간의 타래를 감고 또 감는다. 마약에 고통을 얹고, 헥터가 막 이룬 사랑을 산산조각 내면서까지 실비가 남긴 책, 고아원에서 그녀가 늘 끼고 다니며 읽거나 읽어주곤 했던, 그럴 때면 가녀리면서 총총한 눈빛이 아름다운 슬픔이란 걸 알게 하던, '솔페리노의 회상'과 함께 사라진 아들을 찾아 나선다. 마침내 솔페리노의 성당, 준과 헥터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까. 가슴 가득 들어찬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만주사변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원형으로 사용된 1859년 이탈리아 북부의 솔페리노에서 일어난 참상은 앙리 뒤낭의 회상으로 실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전쟁과 합쳐진다. 상처가 그런 것처럼 회복이라는 말은 언제나 이르다. 지금 평온하다면 전쟁은 끝난 것인가. 끝난 전쟁이 왜 이다지도 누군가의 발목을 그악스럽게 붙드는가. 고아원에 치솟는 불길은 작별, 돌덩이같던 마음과 시간에 대한 복수같은 것이다. 솔페리노의 성당에서 준은 언제까지나 집나간 아들을, 잃어버린 가족을, 떠난 실비를 떠올릴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과 떠나온 고향을 기다릴 것이다.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준 구원, 강박, 도덕, 의지, 인간애의 종말이다.

 

 

 

 

 

 

 

 

 

 

 

 

 

 

 

 

#2.

 

인도 바닷가 마을 방갈로에 살던 아할리아와 시타는 쓰나미에 가족을 잃고 천애고아가 된다. 도시로 가기 위해 차를 얻어탔다가 뭄바이 매음굴에 이른다. 지하, 칠흑같은 어둠과 퀴퀴한 냄새,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신음과 비명, 폭행과 강간의 현장. 자매는 미성년이어서 비싼 값이 매겨져 지하방에 갇힌다. 손을 타지 않아 특별관리된다.

 

한편, 워싱턴의 잘나가는 변호사 토머스는 휴직권고를 받고 아내 프리야가 사는 뭄바이로 온다. 새로 얻은 인권단체의 일자리는 매음굴의 성노예를 구출하는 임무를 맡은 곳.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 각지에서 행해지는 아동매매, 성노예 문제를 담아내는 소설로, 법의 사각지대에서 인권이 어떻게 유린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아할리아는 운좋게 구조되지만, 마약이 담긴 콘돔을 삼킨 시타가 파리로 갔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추적은 언제나 한발 늦고, 악은 번식력 강한 효소처럼 뻗어나간다. 적발 위기, 시타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인터넷 채팅 포르노 업체에 팔린다. 꼬리를 무는 악, 어린 소녀의 인생을 순식간에 망가뜨릴 수 있는 몰가치, 비도덕, 반인류적 행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경찰, 무능한 정부, 만연한 무지와 악, 비사법제도는 아이들을 조금도 구해내지 못한다. 잘못을 따지기도 묻기도 불합리하다. 부조리가 일상이 되어버린 곳에서 시타는 견딘다. 의연함과 끈기, 지칠 줄 모르는 용기를 보여준다. 빈번한 탈출 실패와 옥죄는 감금에도 초연한 기다림이 비로소 빛을 발한 건 시타 같은 행운아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그레샴 법칙이 소설을 철저히 관통한다. 악은 쉽게 적발되지 않고, 낙관은 동아줄을 내려주지 않는다. 지하에서든 지상에서든 어른은 아이를 갉아 제 욕망을 채우는 악마의 존재들이다. 이런 순간조차도 아이의 낙관은 위대하다. 태양을 홀로 건너 저 너머를 비추는 빛처럼.

 

#3.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해발고도 2400미터에 세워진 나라의 고원지대 '미싱' 병원에서 1954년 늦은 오후, 죽어가는 엄마의 자궁을 빌어 쌍둥이 형제가 태어난다. 어떤 나라는 태양이 저만 비추는 것 같다. 3000년의 긴 역사, 독재와 내전으로 얼룩진 현대사, 핍진한 역사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버텼던 국민들의 질긴 생명력, 그런 곳에서 피어나는 휴머니즘은 차라리 감동이다. 반복되는 폭격으로 폭삭 무너져내린 인프라, 꾸물대는 태동은 그럼에도 이 세상을 지구상 단 하나의 역동하는 아득함으로 비춘다.

 

인도에서 온 의사부부에게 입양되어 길러지는 매리언과 시바, 어떤 가족은 마치 선택된 것처럼 운명으로 엮어진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와 정치분쟁으로 피폐해진 이곳에서 더욱 강한 생명력을 꽃피운다.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으로부터 정복당했다는 공통된 아픔을 가진 가운데 식민과 지배, 문명과 비문명, 탄생과 소멸, 사막과 오아시스 같은 반대적 물질을 모두 끌어안고 덤벼댄다. 사람이 칼을 들고 목숨을 구하겠다는 아이러니에서 탄생한 의학, 외과술은 숭고한 대서사시를 달려나가는 또다른 공통분모다. 발전이라는 환상을 명분으로 생명을 앗아가고, 전쟁으로 인해 기아에 허덕이고, 최소한의 보금자리조차 꾸리지 못하는 이들의 처절함이 여기저기 스며들면, 그제서야 여기와 저곳의 미묘하게 닮아있는 상실과 운명에 굴복한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존엄과 열정은 어쩌면 목숨과 생존을 위협받는 극악무도한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현되는, 무거운 질량의 것인 모양이다.

 

종교, 인종, 종족, 권력,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며 분쟁하는 현대인들이 이 광활한 자연을 향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명이 태동하고 빛이 저무는 일련의 진리 안에 머물기를 악착같이 거부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의학의 발전은 죽음의 이유를 늘려주었고, 타당화했고, 존엄을 하락시켰다. 아이와 어른, 환자와 기아, 적군과 아군이 무슨 소용일까. 살아남는 게 사는 것보다 이미 백만배쯤 중요해진 세상에서. 탈선한 열차처럼 전복된 삶의 기구한 운명이 한데 모인들 어떤 역성혁명을 기대할 수 있나. 매리언과 시바가 가족을 만나 의사로 성장해간 것, 자라면서 아픈 에티오피아의 현대사와 혁명을 고스란히 겪은 것, 아버지를 찾아나선 것, 신을 향한 간절한 기도는 하늘 아래 존재하는 작은 땅을 단숨에 성소로 부상하게 한다. 죽음과 파괴의 전조가 가득한 세상에서 희생과 용서, 화해의 의미를 알아간다. 신화와 종교, 믿음과 광기 속에서 공포로 인한 섬멸을 만날 때마다 지나치게 담담하여 되려 두려워지는 이 책을 원망했다. 인정한다. 상당수는 내전의 땅 아디스아바바를 짐작하지 못하고 책으로 배우는 바람에 가질 수밖에 없는 그들에겐 잔인한 곡해였을 거다. 아니면 생동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의 개척을 향한 환영이었는지도. 그것도 아니면 식민과 의학의 상관관계, 현대사와 신화가 어우러지는 낯선 땅을 사랑했을지도. 인간은 운명보다 강하다.

 

*

저기 별이 걸어간다.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상태다. 별이 반짝인다. 아이가 비로소 뒤돌아본다. 달려오너라. 두 팔을 활짝 벌리면 아이가 빛의 속도로 달려온다. 나는 엄.마.다. 신이 모든 아이를 지켜보고 계시지만 이 세상에서 아이를 지켜야 하는 존재는 엄.마.다. 너를 지.켜.줄.게.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난다. 오래 전 잊었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평화로부터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reamout 2013-05-26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만만치 않은 감정의 무게를 느낄 것 같은 작품들이라서, 읽기가 망설여졌는데..
하나의 포스팅에서 보게 될 줄이야!

아이리시스 2013-05-28 02:52   좋아요 0 | URL
드림아웃(영어힘들어-_-)님은 더한 책들도 후딱 읽으시는것 같은데, 뭘요!
저는 감정이입이 좀 덜한가봐요, 끔찍할수록 잘 읽는다는..^^

댈러웨이 2013-05-2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의 지문이 묻어 있는 글이에요. 어디에다 내놔도 알겠어요. 잘 읽었어요!

아이리시스 2013-05-28 02:50   좋아요 0 | URL
줄거리요약을 했으니까, 자족적인 글이에요. '어디에다 내놔도' 창피하지 않도록 노력해서 쓸게요!

2013-05-26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은 늘 굉장히 진지한 독서를 해요. (주제 면에서..) 놀라워요! -전 못 그러거든요.^^

아이리시스 2013-05-28 02:48   좋아요 0 | URL
상대적으로 그렇긴하지만 별로 어려운 소설이 아닌걸요, 섬님. 모두 관심키워드가 있는데 저는 아마도.. ^^

2013-05-29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30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30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30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30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단과 유일이 절대권력으로 작용하던 시대, 구체제를 향한 의문과 전복을 위해 찾아든 회의주의, 그 중심에 16세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가 있었다. 몽테뉴는 에세이(수상록)에서 '유일한 확실성은 불확실성뿐이다.'라고 말하며 회의론과 다양성에 무게를 싣는다. 판단에 있어 독단은 무지와 다르지 않으며, 아는 것이 적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배워야 한다고 했다. 여기, 감히 도전하지도 말았어야 할 것에 도전한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 한 편(아직 진행중인데, 쏟아지는 평과 기사들처럼 정말 이렇게 예상불가능한 드라마도 처음!). 공교롭게도 초능력(그래, 뜬금없지만 초능력이다), 초능력을 가진 이들이 벌이는 대결을 주제로 하는 두 권의 책. 솔직담백히 말하자면, 세 편의 텍스트들은 어떻게 봐도 대충 잘 받아들이는 내가 보기에도 참 재미있다. 일단 한국판이라는 사실도 그렇지만, 종이는 문학성을, 영상은 장르성을 추구하는 기존 스토리텔링의 틀을 깨부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신을 이겨보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없었음에도 그렇게 되어버렸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보겠다고 시작한 실험이 인생을 뒤흔드는 광경. 신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한계를 너무나 잘 아는 자들이 만든 이야기.

 

니 말대로 향은 선물이 아니라 저주였고,

선악과는 애초에 먹지 말았어야 했고,

비밀은 비밀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고,

죽은 자를 살리는 건 감히 인간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그걸 꼭 부딪치고 깨지고 내 눈으로 확인해야 깨달으니

난 얼마나 어리석은지. - <나인-아홉번의 시간여행, 8회>

 

1년만에, 실종된 형의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포카라로 향한 선우는 늘 조금은 불안하고 떨렸던 형의 인생을 떠올리며,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형이 왜 아무도 모르게 히말라야를 오르려다 눈사태로 죽어갔는지 이해하고 싶다. 지상에 다시없을 낙원처럼 투명하고 청명한 공기, 푸른 산과 흰 구름은 사람이 죽어나가기에는 어딘가 불완전한 기시감과 위화감을 동시에 전달한다. 기자이자 앵커인 선우는 마침 히말라야 취재차 나가있는 후배 민영에게 키스하며 삼개월의 계약연애를 제안하고, 민영은 장난반 진담반으로 진행된 대화 속에서 오랫동안 동경해온 그를 향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구걸해서 만나고, 혼나면서 데이트 할' 이들의 앞날에 어떤 가혹한 판타지가 숨겨져 있을지 꿈에도 모른 채. 포카라에서의 낮과 밤은 사랑을 시작한 연인에게 부족함이 없다.

 

형이 죽기 직전 피우려했던 향 한 개, 이십년전으로 이어주는 통로. 향 하나는 삼십분간의 시간여행을 허락하며, 조건은 미치오 카쿠가 말한 평행우주, 즉 이십년전과의 교집합, 평행이론. 선우는 우연히 주운 삐삐에 뜬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가 1992년의 저와 마주하면서, 그 세계로 뛰어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이 결혼한, 아버지의 병원이 통째 악마의 손아귀로 넘어가버린 날의 진실을 찾기 위해. 그는 간과한다. 이십년전의 진실이 변하면 현재의 진실 역시 변한다는 걸. 형이 죽음을 무릅쓰고 피우려했던 향, 돌이키고 싶은 과거가 하염없이 많아 전설 하나만을 믿고 나머지 향을 구하러 떠났다가 변사했다는 걸 선우가 알게됐을 즈음, 그에게도 이상징후가 찾아온다. 과거로 가서 진실을 보고, 그날 밤 있었던 사건을 막아 아버지를 살리는 일. 그는 가능할 거라고 믿는다.

 

진실은 역사가 되어버린 신념같은 거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도, 변해버린 후가 전보다는 훨씬 가혹하다. 아버지의 마지막은 완벽한 조작이었고, 아버지의 죽음은 누군가의 양심과 맞바꿔질 수 없었다. 아버지가 죽고나서 비로소 아버지가 반대하던 여자와 결혼한 형은 평생 불안과 우울에 시달린다. 게다가, 사랑을 잃어야 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혼자만 기억하는 병. 그는 원래 기억과 뒤바뀐 조작된 기억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두 개의 기억. 그중에 하나는 물리적으로는 소멸된, 불가능한 기억. 선우는 형의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고, 사랑하는 여자의 웨딩드레스 입은 사진을 전송받으면서, 이 판타지를 스스로 끝내야겠다는 결심에 이른다. 모든 것을 아는 유일한 친구의 걱정근심을 무마시키기 위한 말. 

 

"버리고 왔어. 1992년에. 원점으로 돌아온 거야. 한달 전 향 같은 건 모르던 때로. 판타지가 없던 시절로.

너는 죽어도 못 찾을껄. 지도 검색에도 안나오는 곳이니까." - <나인-아홉번의 시간여행>

 

매번 우주를 뒤흔드는 경험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작은 균열 하나가 인생 전체를 뒤바꾸는 그런 경험을, 어디로 튈지 모를 시간 한줌을 붙잡기 위한 처절한 노력을 구경한다. 사람은 늘 원하는 것보다 더 원하는 것을 하거나 되기 위해 애쓴다. 생성과 소멸에 대한 고찰, 결국 뒤집을 수 없는 한계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에서 기억도, 유물도, 통증도 그대로인 삶이 과연 끝나기는 할 것인가. 질문이 많은 사람은 결코 평온해질 수 없다. 그는 주어지지 않거나 알 수 없는 것이 궁금해질때쯤, 손에 들어온 기회를 사용함으로서, 감히 단 한 번 신 행세를 하다가 된통 당한다.

 

 

 

 

 

 

 

 

 

 

 

 

 

'모든 정보는 추상적이다. 메타포가 들어있지 않은 정보란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다. 사실이라고 믿는 구체적이고 계량화된 정보 대부분은 사라지고, 오직 인간의 은유적이고 불분명한 꿈의 기록만이 보존될 것이다' - <중화의 꽃, 1권>

 

대한민국 서울. 중국과 일본의 초능력자들이 창세기의 돌, 제네시스 록에 반응하는 '중화의 꽃'을 찾기 위해 몰래 잠입한다. 하늘, 바다, 육지를 관할하는 개별 국가기관 소속의 국정원, 군인, 경찰은 외계인에게 납치당했었다고 주장하는 이십대 여성들의 증언에 따라, 그들이 어딘가로 끌려갔다가 알몸으로 도포에 싸여 버려진 연유를 추적하는데, 실상 강간이나 폭행의 흔적은커녕, 아무 증거나 단서가 없는데다가, 여성들이 한목소리로 외계인을 봤다고 주장하면서 미궁으로 치닫는다. 소재가 초능력자라기에 판타지나 SF 액션에 나오는 유토피아/디스토피아 같은 영 낯선 세계를 떠올리고는 기겁했다. 착각이고 함정이었다. 초능력자들의 대결로 이 책을 홍보한 건 마케팅측의 오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초능력자를 소재로 한다는 얘기에 흥미진진한 소설 한 편을 근거도 없이 배제할 뻔한 나에 의하면. 초능력자는 겉으로 나, 초능력자요, 붙이고 다니지 않는다. 멀쩡하다. 숨겨져있다. 장르로 치면, 차라리 첩보에 가깝다. 모든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만을 잘한다. 훈련되었을 수도, 타고났을 수도 있다. <중화의 꽃>에는 과거나 미래를 보는 자, 도공으로 상대의 심장을 멎게 하는 자, 장소나 물건에 대한 사이코메트리들이 나온다. 이중에 제일은 미래를 보는 자, 중화의 꽃이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단서는 충분한 그녀를 두고 벌이는 아시아 3국의 대결이다.

 

<궁극의 아이>에도 중화의 꽃처럼 미래를 보는 남자가 나온다. 생식력이 현저히 떨어져 대부분 스무살 이전에 죽는다는 궁극의 아이. 최초는 아니나 마지막도 아닐 궁극의 아이 중 하나인 신가야는 한국출신으로 범죄기록이 있음에도 불구, 인류의 미래 보고서라고 불리는 카이헨동연구소로 발탁된다. 범죄경력에도 타당하게 획득한 영주권에 대한 의문에 맞서듯, 그의 존재는 유일하게 사랑한 엘리스에게 역시 비밀과 환영으로 남아있다. 지금, 어떻게, 왜, 연결되었는지 모르는 세계의 다섯 거물들, 나다니엘 밀스타인, 안톤 쉬프, 조지프 체임벌린, 조나단 킨데마이어, 오귀스트 벨몽에게 차례로 한 통의 편지가 도달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거대한 테러, 죽음을 알리는 편지, 까마득한 기억들. 십년 전에 죽은 자로부터 어떻게 복수가 자행될 수 있을까. 형사 사이먼은 추적에 나선다.

 

"십년 전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 <궁극의 아이>

 

악마개구리문양, 바다에 사는 뿔 달린 개구리로 불리는 어떤 모임. 그들은 손아귀 아래 세계를 장악한 신 같은 존재가 되어있다. 한 나라의 운명이 그들 손끝에 달려, 되살아날 수도, 의미없이 죽을 수도 있었다. 정보가 곧 힘이었다. 그들은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고, 한층 더 강력한 부와 권력을 움켜쥐길 바랐으며, 세계를 휘둘렀다.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고싶은 걸 위해서라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도 남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공리주의는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신가야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한사람이었다. 가야처럼 '궁극의 아이'로 판명난 아이들이 카이헨동연구소로 잡혀와 기억을 세뇌당하고 자유를 빼앗긴 채로, 온갖 실험과 업(카르마) 속에서 미래를 예견하다 죽어갔다. 모든 사실을 밝힐 사람은 사이먼 뿐이고, 사이먼은 아내 모니카의 죽음과도 연관있을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신가야가 사랑했다는 여자, 뚱뚱해서 제발로는 밖으로 나와 걸어다닐 수도, 앉았다 일어날 수도 없는 엘리스와 딸 미셸을 찾아가 모든 것을 털어놓고 질문한다.

 

엘리스는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다. 일곱살 이후 벌어진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엘리스는 제 눈앞에서 연기처럼 죽어간 가야와의 추억 대신 미셸을 안았다.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 많은 것을 약속했지만 단 5일만이 허락되었던, 그들의 슬픈 마지막. 의문투성이 이별은 가야를 잃은 십년간 그녀를 허무와 체념에 뒤섞여 살게 했다. 사이먼은 신가야의 물음에 따라 엘리스로부터 사랑한 남자에 관한 모든 기억을 요구한다. 숨막힐 만큼 아름답고 애처로운 닷새의 기억 속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살인사건을 해결할 단서가 포착된다.

 

"당신은 머릿속이 온통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예요. 그건 평생 과거라는 철창 속에 갇혀사는 거라고요." - <궁극의 아이>

 

눈치챘겠지만 모든 이야기의 핵심 그리고 권력은 미래를 보는 눈에 있다. 미래는 예측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 그들의 능력은 좋게 사용될수도 그 반대일수도 있지만, 궁극의 아이들은 늘 거의 언제나 이용당하다 가치가 다해지면 버려졌다. 미래를 말하기 위해 온갖 약물주사와 뇌실험으로 너덜너덜해진 삶을 붙잡고 가야는 엘리스를 만났던 것이다. 그는 엘리스와 미셸의 미래를 보았다. 서로를 다주어도 아깝지 않은 오백년같은 오일의 사랑이, 십년 후 여자와 딸을 살리는데 이용된다. 엘리스의 기억 곳곳에 남겨진 가야의 단서가 사이먼에게로, 사이먼이 잃어버린 모니카에게로. 주가를 예측하고, 전쟁을 예측하고, 이득과 손실을 예측하고, 방향을 예측하면 누군가의 손아귀에는 세상을 주무를 강력한 힘이 생긴다. <궁극의 아이>가 개인적인 사랑으로, <중화의 꽃>이 동북아 세계정세의 삼키고 뱉는 숨가쁜 역사현장으로 연결된다는 점이 다를 뿐, 두 소설은 같은 얘기를 하고있다.

 

누가 들어줄리도 없지만, 새삼 뒷짐지고 몽테뉴처럼 모럴리스트 노릇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자연스럽지 못한 욕망은 결국 파멸을 향해 달려가기밖에 더할까. 슬픔과 아름다움이 마치 처음 본 풍경처럼 공존하는 눈부신 이야기들 앞에 주춤할 필요는 없다. 소설이 소설로 기능하며 역할을 다할 때, 세상은 아무런 흔들림 없을 것이다. 문제는 소설 속 모습이 미래, 초능력, 시간여행 같은 흔적만 살며시 지우면, 놀랄 만큼 현재와 닮았다는 게, 소설과 문학이 우연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예견한 이슬람 세력과 중국의 부상은 여전히 진행중이고, 얼마전에는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가 분명 다르며, 정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책을 읽었다.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가 다른 걸 알지만 이제 세계의 의식속에서 '주의(-ism)'와 '교리'는 거의 한목소리처럼 들려온다. 아랍권, 중동국 출신들의 반인류적인 테러, 반서양주의를 반자본주의로 해석하는 것, 사회적문화적 다양성을 경제적정치적 영역으로까지 확대시키면서 나타난 세력의 갈등과 내분에서 전쟁까지.

 

요즘 나는 북한이 제일 무섭지만 나아가 북한만 적으로 여기는 대한민국 사람들도 무섭고, 한편 중국의 거대한 힘이 두렵다.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독특한 체제도, 법(외국인에게 참정권을 허하면!) 하나만 갈아치우면 가능한 중국의 세계권력 지배구도 장악(을 뜻하는 엄청난 수의 인구)도, 아무거나 다 먹는 식습관도, 무력에는 무력으로 맞서는 거라며 위협에 위협으로 무장하는 일본도. 내가 아는 과거 어느 시점도 동북아가 평화로운 적 없지만, 잘 살아있어야겠다. 죽기 전까지!

 

 

 

 

 

 

 

 

 

 


댓글(25)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4-24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4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5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6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4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6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6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6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5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6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6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6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6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6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6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6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7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3-04-2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들과 드라마를 후루루룩 연결하는 솜씨에 감탄을 표합니다. 신과 시간여행으로 시작해서, 잘 살아있어야겠다,로 끝나는군요. 신이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관점에서는 신도 결국 인간이 잘 살기 위해서 탄생한 것이고, 시간여행도 결국 인간이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겠죠. 그 드라마를 저는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쩐다면서요?)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결국 이 현재에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어제 간만에 <오블리비언>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거기에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내가 네 신이다! 그리고 그 신은 어떻게 되었냐면...뭐 아무튼 나 초능력이든, 시간여행이든 이런 거 되게 좋아해요. 요즘에 <임사체험>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엄청 재밌어요(그래서 요즘 제 리뷰에는 심심하면 임사체험이라는 말이 등장. 또 써먹을 예정).

아이리시스 2013-04-27 23:15   좋아요 0 | URL
우아, 맥거핀님 되게 반가워! 뭔가 계속 징징대다가 맥거핀님 안계시니까 징징댈 언덕이 없어진것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어디갔었어! 저도저도저도 초능력이든, 시간여행이든 완전 좋아죽겠어요. 제가 읽은책이 아무리 없어도 이것만읽진 않았는데, 전에 한번썼는데 또 굳이 쓴걸보니 제가 이걸 되게 좋아한다는걸 알겠어요. 그리고 지금 보니까 나인, 보다 궁극의 아이, 궁극의 아이보다 중화의 꽃, 이렇게 보는족족 차례대로 더 재밌어서 신났어요. 결국 현재에 잘 살기 위해서. 그말이 맞네요. 정답이다..

<오블리비언> 톰 아저씨 나오는거죠? 전에 찜했는데 재밌어보였는데 개봉했나보네요. 내가 네 신이다! 으흥!! <임사체험>까지는 아직 진도를 못나갔; 는데 지금 그 임사체험, 이 검색하면 나오는 그 두권짜리 일본작가이름 책인가요?(검색해봤음!) 재밌겠어요. 뭔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다 이러면 그냥그런데, 저는 예전에 <아랑사또전>도 재밌게봤고, 환생에도 관심있고, 뭔가 거시적인게 좋아요. 감히 인간이 도전못할 신의 세계, 신의 영역 그런게 진짜 있는지 의문이긴 해도 재밌어요. <나인>의 이진욱은 짱이죠!!

임사체험, 얼른 읽고 또 써먹어요. 꼭이요!! 약속도 지켜요!!! (제가 안지킨다고 똑같이 하지말고요!!) =3=3=3

좋은 주말, 좋은 밤!!

ICE-9 2013-04-27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랬어요^ ^ 제가 보는 드라마, 제가 보는 책(중화의 꽃)을 같이 보고 읽고 계셔서...
'나인'은 예전에 보았던 영화 '도니 다코'나 '나비 효과'가 참 많이 생각나더군요. 그러고보면 최근에 나온 '루퍼'도 그런 영화중 하나네요. 흥미로운 것은 시간을 적극적으로 바꾸려 드는 이 세 영화의 결론이 모두 똑같다는거죠. 그렇게 어쩌면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일 수 밖에 없을 것 같고 그래서 '나인'의 결말 역시도 어느정도 예상되기는 합니다. 그러고보니 이런 주제에 대해서 이미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정확히 예견했네요. 그는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죠. 물론 신이 얼마든지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었지만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세계가 가장 적합했기에 이런 식으로 만든 것이다라고. 그렇게 그는 지금 현재를 언제나 모든 가능한 것 중의 최상의 상태로 보았었죠. '나인'이든 그 세 영화든 결국은 라이프니츠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해요. 축복처럼 주어진 향이 저주가 된다는 이야기 역시 샘 레이미가 즐겨 다룬 주제였죠. 대표적인 게 예언하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기프트'였고 사실 바로 그 후에 나온 영화 '스파이더 맨'은 기프트의 주제를 보다 확장한 영화였고 기프트 이전에 그를 재기할 수 있게 만든 결정적인 작품인 '심플 플랜' 역시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였죠. 아마도 자신의 영화 인생 역정이 정확히 축복이 저주가 되었었기에 더욱 그 주제에 대해 민감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제가 이거 너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네요. 같은 걸 보고 읽고 하는게 반가워서 그만 수다를 떨게 되었습니다^ ^ 중화의 꽃에 대해 쓰시면 또 와서 떠들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잔뜩 늘어놓아도 내치지 말아주시기를 빕니다. 하하^ ^


아이리시스 2013-04-28 15:31   좋아요 0 | URL
이런 댓글이라면 항상 좋죠. 요즘 대화를 나누고싶은가봐요. 양방소통의 긴글이 좋아졌어요. 보는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저는 괜찮아요. 같은 주제로 자꾸 만들어지는 이야기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죠. 지금 특수사건전담반 텐, 보는중인데, 방금도 '중화의 꽃'을 읽었더니 별로 재미가없네요. 가질수없는 현실이니까 이야기가 되면 관심이 가져질수밖에 없는것 같은데, 샘 레이미 말씀하시니까 말인데, 왔다갔다하는선에서 이제는 더 새롭고 신선한 얘기를 고민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가족 아니면 사랑을 구하기위해서인데, 현실에서 그것들이 풍족하게 가능하다면 그런일이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심플플랜,은 못본 영화라서 찜해둡니다^^

헤르메스님도 뭔가 인생에서 바꾸고싶은 일이 있나요? :)

달사르 2013-04-2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댓글은 다른 사람도 좋네요. ^^
댓글이 길어지면 왠지 '정'도 더 담뿍 담기는 듯? ㅎ


저도 최근에 비슷한 류의 만화를 봤어요. 힛. 은근 만화가 쉽고 좋다니까요. 제가 본 내용은 주인공이 어떤 보석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이었어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지금처럼 계속 여행을 다니며 친구들과 잘 지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담긴 소원을 말했는데 그 소원이 그만 이루어진 거에요. 10년이 지나도 주욱. 어느날 문득 돌아보니 동료들은 점점 늙어가는데 혼자만 그대로. 게다가 다음 소원으로 만든 동생 역시 자라지 않고. 경악을 한 주인공은 동생을 자라게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보석을 찾으러 나섰죠. 그 와중에 동생이 다쳐 죽게 생겼는데 그순간 눈앞에 나타난 보석. 주인공은 딴 맘을 먹죠. 그 보석으로 동생을 살리지 않고 "우리 일가만 보석을 찾을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결국 동생은 죽고..ㅠ.ㅠ 주인공은 보석을 다시 찾아 죽은 동생을 살리는데. 동생을 죽기 직전에 살리는 것과, 이미 죽은 동생을 새로 살리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지 주인공이 자꾸 동생을 낯설어 합니다. 과거와 겹치는 사건이 일어나면 자꾸 첫번째 동생이 떠오르는 거죠. 그러다보니 동생이 동생 같겠어요? 이 와중에 동생은 동생 나름대로 소원을 빌러 보석을 찾으러나서고.

암튼, 이런 내용인데요. 무척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위 소설들은 더 재미있어 보입니다!!!!
'중화의 꽃'이 눈에 더 들어옵니닷! >.<
과잉기억증후군의 엘리스는 ㅠ.ㅠ 너무 불쌍하네요. 소설을 위한 장치로는 아주 잘된 설정같은데 그런 걸 떠나 심적으로 너무 불쌍해요..돌아서면 까먹는 제가 차라리 낫네요. 기억력이 자꾸 떨어져 툴툴거리는데 그러지 말아야겠어요. ^^

아이리시스 2013-04-29 00:53   좋아요 0 | URL
그 만화 제목뭔가요? 어쩐지 재밌을것 같아요. 동생을 살리는거랑 <나인>의 주인공이 아버지를 살리러가는거나. 근데 살려놔봐야 두시간후에 또 죽더라고요. 저 드라마에서는요. 사람은 언제 죽을지, 언제 무슨일을 당하게될지 전혀 모르면서 사는게 곧 행운이라고 봐야할것같아요. '중화의 꽃'에서 항공관제사가 비행기충돌을 막고, 경마의 1등을 예견하고, 사람과 말이 죽어나갈때, 미래를 본다는게 얼마나 두려운일인지 알것같았어요. 모르니까 살지, 알고는 갈수없을길이 많을듯해서.

과잉기억증후군의 엘리스가, 결국 그 기억으로 딸을 구하는걸 보면 설정은 멋지고요, 심적으로는 힘들것 같아요. 저는 초단감정소유자라, 어제 싸우고 오늘되면 풉니다. 앙금같은게별로 없는것 같아요. 하루지나면 왜싸웠는지 모르겠어요. 기억도 안나고 남아있지도 않고. 나쁜걸 오랫동안 되새기지않는 버릇이나 습관은 삶에 좋은기능으로 작용하는것 같아요. 기억은 붙잡고 살되, 툴툴거리지는 말아요, 달사르님! ^^

2013-04-29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29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1749-1832)는 계속된 궁정생활로 창작력과 상상력의 한계를 느낀 나머지 1786년 9월에서 1788년 6월까지 20개월간 이탈리아를 여행한다. <이탈리아 기행>은 여행 중 독일의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일기, 메모와 보고를 손질하여 1829년에 엮은 책이다. 스물 일곱의 청년이 바이마르 고문관으로 10년을 일했으니 문인의 피가 흐르는 그에게 몰래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는 것 정도야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베로나와 비첸차의 고대 건축에 매료되고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에 반해, 로마에서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경유해 다시 로마에 머물며 자유로운 방랑자 생활을 한껏 즐긴다. 철저히 익명의 여행자로 머물며 체험을 극대화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사상을 가다듬던 그가 바이마르로 돌아와 실러와 손잡고 고전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일생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1774년, <파우스트>가 1831년에 출간된 걸로만 봐도 이탈리아 여행에서 시작된 고전주의의 열망과 확신을 읽어낼 수 있다. 스물 여섯의 청년과 여든 넷의 괴테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이 존재하지만 그가 남긴 두 작품은 동일한 명성으로 여전히 감동적으로 읽힌다. 죽음 직전에 <파우스트> 2부를 탈고했으며, 이는 스물 세 살 때부터 쓰기 시작한 생애의 대작이었다. 충동적으로 시작된 이탈리아행이 훗날 그의 창작력과 감수성에 큰 영향을 줬음은 분명하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부터 베네치아의 곤돌라와 로마의 전경, 아버지의 여행지도 등을 접했던 그에게 어째서 이탈리아였냐고 묻는 것은 그다지 의미없어 보인다.

 

 

 

 

 

 

 

 

 

 

 

김은숙 작가가 쓴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그녀가 그에게 묻는다. 여기서 그녀는 전도연이고 그는 김주혁이다. 처음 프라하를 방문하면서 프라하 노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에게, 도착하기 전부터 프라하에서만 구할 수 있는 티셔츠를 입은 그에게, 여기 오기 전부터 당신은 이미 지금 입은 티셔츠 만큼이나 프라하의 많은 것들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냐고. 그는 유학 보낸 애인의 변심에, 제대로 끝내기 위해 프라하로 향한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게 메일로 받은 사진 속 거리와 풍경과 티셔츠는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것이다. 비로소 사랑이 끝났을 때, 그것들은 같은 온도로 느닷없어졌다. 편지를 찢고 티셔츠를 버리는 대신, 그는 프라하로 간다. 납득하지 못한 채 끝내는 작별은 그에게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므로, 유일한 주소를 들고, 여자가 보내준 티셔츠를 입고, 처음 보는 거리를 떠돈다. 수많은 작가들이 이탈리아를 사랑했지만 그들의 이탈리아가 모두 달랐던 것처럼, 괴테와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가 그런 것처럼, 내가 아는 이탈리아 역시 마찬가지로, 프라하 역시 이 가여운 남녀에게 서로 다른 과거와 미래를 보여준다. 서로 다른 추억을 동봉하고 봉인한다. 그의 대책없는 프라하행이 다시 새로운 사랑으로 안내한다. 그들의 만남이 프라하에서는 우연이었고, 서울에서는 필연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사랑을 끝내야 하는 한 남자는, 떠나간 여자의 흔적을 찾기 전에는 마침표를 제대로 찍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 어느 도시는, 가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추억과 그리움 혹은 기다림의 흔적 같은 것이다.  

 

 

 

 

 

 

 

 

 

 

2부작의 [셰익스피어와 함께하는 이탈리아 기행]은 그즈음 운명처럼 보게 되었다. 셰익스피어 전집이 출간물결을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적어도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은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달빛 프린스]에 셰익스피어가 등장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리어왕을 소개했는데 평소 맥베스와 파우스트를 동시에 읽겠다고만 생각하던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불만 밝혀준 셈이었는데, 어쨌든 셰익스피어가 사랑과 신화, 운명과 복수, 희극과 비극의 거의 원형적인 모습을 띠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지만, 같은 이유로 내가 셰익스피어 보다는 그리스 비극을 더 좋아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1564-1616)가 자국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그토록 여러 편 썼는지, 베네치아(베니스의 상인), 베로나(로미오와 줄리엣, 베로나의 두 신사), 밀라노('템페스트'에는 밀라노 대공이 등장) 등 그 배경이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있다는 사실에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을까. 물론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시대가 르네상스를 관통하고 있었고, 이탈리아가 그 중심에 있기는 했어도 이탈리아 배경이 한두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 사랑이 굉장했고, 괴테 못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토대가 된다.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로미오와 줄리엣, 4대 비극, 템페스트 외에는 상당량의 작품들을 읽지 못해서 제대로 말하기 어렵지만, 이 다큐에 나오는 시칠리아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인이었고, 그래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상당수 썼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특별할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다. 대항해 시대, 식민통치가 만연한 유럽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있었든 그건 그 후손들의 문제일 뿐이다. 알려진 바대로라면, 셰익스피어가 영국을 떠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는데 그렇다면 시칠리아 사람들은 그저 셰익스피어의 명성이 탐나서 제 지역 출신이라고 우기고 있을 뿐일까.

 

셰익스피어는 5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현실로 존재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답고 고풍스런 도시 베로나. 시에서 운영하는 '줄리엣 클럽'에는 여전히 해마다 오천 통이 넘는 편지가 도착한다. 다양한 국적을 지닌 손편지들 속에는 사랑에 관한 다양한 희비극과 사랑에 관한 고백이나 고민이 담겨있으며, 주최측에서는 매년 처치곤란이면서도 여전히 신화적인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들로 인해 낭만성을 획득하는 이 도시를 포기하지 못한다. 사랑에 가슴 설렌 이들과 사랑에 눈물짓고 아픈 이들을 동시에 위로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말을 들어주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이 이들에게는 그리움을 내려놓을 곳이 생긴다. 줄리엣 클럽은 아마도 사랑에 절망한 청춘에게 거의 유일한 소통의 통로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랑은 환하게 피는 반면, 어떤 사랑을 어둡게 저물고 있으며, 저무는 것이 새로 피어날 미래를 위함이라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추억을 재산처럼 여기게 될 언젠가를 위해 이 도시는 사랑을 보관한다. 한 도시를 영원히 낭만과 비극의 땅으로 만드는 힘. 문학의 힘이자 대문호의 힘이자 도시의 힘. 셰익스피어를 읽고 괴테의 시대로 돌아가 그의 이탈리아 여행을 고스란히 따르겠다는 다짐이 지나치게 길어졌다. 책이 죄다 새빨간 이유가 뭘까.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꾸는섬 2013-03-1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저 오늘도 1등 댓글이요!!!
아이리시스님 정말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그걸 죽을때까지 다 읽어낼 수 있을지...살짝 고민 좀 하고 있어요.ㅎㅎ
괴테와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고 싶다는 욕심은 앞서는데....ㅜㅜ 과연 읽을 수 있겠죠?ㅎㅎ
멋진 글이에요.^^

아이리시스 2013-03-13 16:47   좋아요 0 | URL
꿈섬님, 오늘 날씨 귀신나올 것 같아요. 재밌겠죠? 귀신나오면. 으흙으흙. 일단 쓰고 틀린 건 내일 고치자고 내버려두었는데 보니까 많아서(엄청 많아서) 수정을 좀 하고 그러고보니 꿈섬님 댓글 보여요 히힛.

네! 우린 죽을 때까지 읽고 싶은 책만으로 숨이 막히고 말 거예요. 저는 그럴 거란 확신이@.@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아주아주 두껍고 어려운 책 몇 권 사서 죽을 때까지 이해하기 위해 낑낑대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그 사람은 독서가일까요, 아닐까요. 셰익스피어 다큐 엄청 좋았는데 그거라도 보시면 좋을 거예요. 해브어굿데이!!

맥거핀 2013-03-14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책이 다 새빨갛네..별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지만, 지하철에서 들고 있으면 포스 나오겠어요. 아침 지하철에서 고전 같은 거 들고 있는 처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외모점수*3의 가점을 드립니다(라는 개드립). 좀 다른 얘긴데, 얼마전에 지하철에서 최근에 나왔던 밀란쿤데라 전집 중에 한 권 들고 계신 수녀님을 뵜었는데, 어찌나 멋있던지.

아이리시스 2013-03-16 01:13   좋아요 0 | URL
어느 전집이든 예쁜데 아직 구입은 안했어요. 뭘 쌓아두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옷장의 옷과 빽 뿐인데요 큭큭;;

지하철에서 책 읽는 분들이 꽤 있나봐요. 저 지하철 탈 일 거의 없긴한데 못봐요, 독서하는 사람. 지하철은 항상 너무 붐비고 저는 대체로 멍때리고 있어서ㅋㅋ 쿤데라 전집 중 한 권을 든 수녀님이라.. 외모*3 해서 몇 점?(...) 수녀님 예뻤습니까.

맥거핀 2013-03-20 14:33   좋아요 0 | URL
근데 저기에 함정이 있는데, 외모점수가 0이면 아무리 *3을 해도 0점이라는...은 두번째 개드립이구요, 그 수녀님은 여러모로 미인이셨습니다. 정말로.

아이리시스 2013-03-21 18:12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하하하 곱하기 할 게 없어..없으면..으하하하하하하 계속 웃기네 그럼 다음에는 더하기를 해봐요 곱하기 하지 말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

Shining 2013-03-18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전 정말 본 드라마가 없네요. 하지만 저것도 라인업과 스토리는 알아요ㅋ 신기하네요, 저 이번에 템페스트 구입했거든요ㅋ 헨리5세도 읽고 싶은데(예전에 흥미로운 글을 읽은 후 기억만 해두고 여지껏...) 그 책 판본이 너무ㅠㅠ 아는 사람 말이, 셰익스피어는 전자책으로 사서 필요할 때마다 본다고 했는데 저도 그렇게 해야하나.. 끙. 고전을 읽고 샆어요 아이님. 이 페이퍼 읽으니까 더욱! 어흥!

아이리시스 2013-03-20 01:22   좋아요 0 | URL
어흥! 리처드 파커 같아요ㅋㅋㅋ

셰익스피어와 함께하는 이탈리아 기행이라니 BBC에서 만들다니 이러면서 보는 동안만큼은 전집 통째로 읽을 기세에 전투력이 상승했었지만 이틀만에 셰익스피어란 무엇인가..누구인가..더군다나 희곡..몰리에르 이후로는 처음.. 졸업하고 처음인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겨서.. 무방비 상태로 맞은 돌 같아요. 지금 Shining님이 부추겨서 헨리5세가 눈앞에 아른아른거려요. 습관이란 게 무섭게 빨라요. 한국소설 읽고 나니까 번역체를 읽질 못하겠고, 장르문학 읽다보니 페이지 안 넘어가는 순문학 읽던 제가 저 아닌 것 같아요. 나누기 싫어도 자동으로 나뉘는 문학 스펙트럼 체험중..으흙흙.

이제 자요? 자는 거죠? 내일 봐요, 굿나잇, Shining님^^

2013-03-23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23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