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문호 괴테(1749-1832)는 계속된 궁정생활로 창작력과 상상력의 한계를 느낀 나머지 1786년 9월에서 1788년 6월까지 20개월간 이탈리아를 여행한다. <이탈리아 기행>은 여행 중 독일의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일기, 메모와 보고를 손질하여 1829년에 엮은 책이다. 스물 일곱의 청년이 바이마르 고문관으로 10년을 일했으니 문인의 피가 흐르는 그에게 몰래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는 것 정도야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베로나와 비첸차의 고대 건축에 매료되고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에 반해, 로마에서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경유해 다시 로마에 머물며 자유로운 방랑자 생활을 한껏 즐긴다. 철저히 익명의 여행자로 머물며 체험을 극대화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사상을 가다듬던 그가 바이마르로 돌아와 실러와 손잡고 고전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일생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1774년, <파우스트>가 1831년에 출간된 걸로만 봐도 이탈리아 여행에서 시작된 고전주의의 열망과 확신을 읽어낼 수 있다. 스물 여섯의 청년과 여든 넷의 괴테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이 존재하지만 그가 남긴 두 작품은 동일한 명성으로 여전히 감동적으로 읽힌다. 죽음 직전에 <파우스트> 2부를 탈고했으며, 이는 스물 세 살 때부터 쓰기 시작한 생애의 대작이었다. 충동적으로 시작된 이탈리아행이 훗날 그의 창작력과 감수성에 큰 영향을 줬음은 분명하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부터 베네치아의 곤돌라와 로마의 전경, 아버지의 여행지도 등을 접했던 그에게 어째서 이탈리아였냐고 묻는 것은 그다지 의미없어 보인다.
김은숙 작가가 쓴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그녀가 그에게 묻는다. 여기서 그녀는 전도연이고 그는 김주혁이다. 처음 프라하를 방문하면서 프라하 노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에게, 도착하기 전부터 프라하에서만 구할 수 있는 티셔츠를 입은 그에게, 여기 오기 전부터 당신은 이미 지금 입은 티셔츠 만큼이나 프라하의 많은 것들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냐고. 그는 유학 보낸 애인의 변심에, 제대로 끝내기 위해 프라하로 향한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게 메일로 받은 사진 속 거리와 풍경과 티셔츠는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것이다. 비로소 사랑이 끝났을 때, 그것들은 같은 온도로 느닷없어졌다. 편지를 찢고 티셔츠를 버리는 대신, 그는 프라하로 간다. 납득하지 못한 채 끝내는 작별은 그에게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므로, 유일한 주소를 들고, 여자가 보내준 티셔츠를 입고, 처음 보는 거리를 떠돈다. 수많은 작가들이 이탈리아를 사랑했지만 그들의 이탈리아가 모두 달랐던 것처럼, 괴테와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가 그런 것처럼, 내가 아는 이탈리아 역시 마찬가지로, 프라하 역시 이 가여운 남녀에게 서로 다른 과거와 미래를 보여준다. 서로 다른 추억을 동봉하고 봉인한다. 그의 대책없는 프라하행이 다시 새로운 사랑으로 안내한다. 그들의 만남이 프라하에서는 우연이었고, 서울에서는 필연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사랑을 끝내야 하는 한 남자는, 떠나간 여자의 흔적을 찾기 전에는 마침표를 제대로 찍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 어느 도시는, 가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추억과 그리움 혹은 기다림의 흔적 같은 것이다.
2부작의 [셰익스피어와 함께하는 이탈리아 기행]은 그즈음 운명처럼 보게 되었다. 셰익스피어 전집이 출간물결을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적어도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은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달빛 프린스]에 셰익스피어가 등장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리어왕을 소개했는데 평소 맥베스와 파우스트를 동시에 읽겠다고만 생각하던 내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불만 밝혀준 셈이었는데, 어쨌든 셰익스피어가 사랑과 신화, 운명과 복수, 희극과 비극의 거의 원형적인 모습을 띠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지만, 같은 이유로 내가 셰익스피어 보다는 그리스 비극을 더 좋아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1564-1616)가 자국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그토록 여러 편 썼는지, 베네치아(베니스의 상인), 베로나(로미오와 줄리엣, 베로나의 두 신사), 밀라노('템페스트'에는 밀라노 대공이 등장) 등 그 배경이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있다는 사실에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을까. 물론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시대가 르네상스를 관통하고 있었고, 이탈리아가 그 중심에 있기는 했어도 이탈리아 배경이 한두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 사랑이 굉장했고, 괴테 못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토대가 된다.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로미오와 줄리엣, 4대 비극, 템페스트 외에는 상당량의 작품들을 읽지 못해서 제대로 말하기 어렵지만, 이 다큐에 나오는 시칠리아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인이었고, 그래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상당수 썼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특별할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다. 대항해 시대, 식민통치가 만연한 유럽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있었든 그건 그 후손들의 문제일 뿐이다. 알려진 바대로라면, 셰익스피어가 영국을 떠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는데 그렇다면 시칠리아 사람들은 그저 셰익스피어의 명성이 탐나서 제 지역 출신이라고 우기고 있을 뿐일까.
셰익스피어는 5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현실로 존재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답고 고풍스런 도시 베로나. 시에서 운영하는 '줄리엣 클럽'에는 여전히 해마다 오천 통이 넘는 편지가 도착한다. 다양한 국적을 지닌 손편지들 속에는 사랑에 관한 다양한 희비극과 사랑에 관한 고백이나 고민이 담겨있으며, 주최측에서는 매년 처치곤란이면서도 여전히 신화적인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들로 인해 낭만성을 획득하는 이 도시를 포기하지 못한다. 사랑에 가슴 설렌 이들과 사랑에 눈물짓고 아픈 이들을 동시에 위로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말을 들어주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이 이들에게는 그리움을 내려놓을 곳이 생긴다. 줄리엣 클럽은 아마도 사랑에 절망한 청춘에게 거의 유일한 소통의 통로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랑은 환하게 피는 반면, 어떤 사랑을 어둡게 저물고 있으며, 저무는 것이 새로 피어날 미래를 위함이라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추억을 재산처럼 여기게 될 언젠가를 위해 이 도시는 사랑을 보관한다. 한 도시를 영원히 낭만과 비극의 땅으로 만드는 힘. 문학의 힘이자 대문호의 힘이자 도시의 힘. 셰익스피어를 읽고 괴테의 시대로 돌아가 그의 이탈리아 여행을 고스란히 따르겠다는 다짐이 지나치게 길어졌다. 책이 죄다 새빨간 이유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