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여행>은 잘못 고른 책이다. 책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목적에 맞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히려 캐주얼하고 약간은 뻔한, 샌프란시스코 해변과 LA 디즈니랜드, 할리우드, 서부개척 같은 얘기를 할 줄 알았던, 제목만 보고 골랐던 이 책이 서부 그것도 캠핑 여행자에게 적합한 실용서였다니, 충격이 컸다. 간접여행도 말이 간접여행이지, 여행에세이 말고는 실용여행서를 본 적이 없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랬든 저랬든 어차피 미국여행 갈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아주 유용하다. 알게된 게 많다. 신이 내려준 황홀한 자연풍경을 직접 마시고 느끼기 위해 온 세계 여행자들이 한 번쯤 꿈꾼다는 미국 국립공원 여행을 전혀 몰랐었다. 미국 서부 캠핑여행을 한 번 꿈꿔볼 정도로, 이 순간 이보다 자세한 책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책으로 여행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 어느 곳도 책보다 더 흥미롭지는 않을 것이다. 표지에서 느껴지듯, 깎아지른 황토색 폐허의 산이 다소 허망하게 보여도 목적이 분명하고, 그에 맞게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가 닿도록 쓴 세심한 서술이 돋보인다. 미국, 서부, 국립공원, 오토캠핑. 저자가 얼마나 많은 밤들을 캠핑에 최적화 되어있는, 이보다 더 자연다울 수 없다 자랑하는, 미국 서부 국립공원 캠핑장에서 보냈는지 충분히 짐작될 정도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읽다가 충동적으로이긴 해도 동부 보다는 서부, 뉴욕 주 보다는 캘리포니아 주, 도심보다는 자연, 호텔보다는 캠핑, 자동차(자가용) 보다는 버스나 기차가 취향이던 로망이 떠올랐다. 떠나기엔 아는 게 너무 많고, 고생길도 훤하고, 그만큼 또 아는 게 없고, 그래서 두렵고 무섭고 엄두가 나지 않긴 하지만, 왜 하필 미국, 그것도 황량한 서부, 국립공원이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잭 케루악은 초반 동부에서 서부로 건너가기 위해 온갖 날들을 히치하이킹에 쏟는다. 다소 지겨울 정도였지만(그가 이 차를 타든 저 차를 타든 독자인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다) 마침내 그렇게 힘들여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나마저 희열을 느낄 정도였다. 비행기 티켓만 끊어 떠나는 자유관광 혹은 배낭여행은 젊.으.니.까. 가능하다던 어른들의 말은 맞았다. 읽기만 하는 데도 숨이 찰 정도였다. 냉정히 말해 아직 그럴 정도는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책을 펼쳐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영국 BBC 방송이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50곳' 중에서 1위를 차지한 애리조나 주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이다. 시작은 미국의 국립공원 '퍼주기'의 탄생이다. '멋진 자연을 모두를 위해 남겨놓는다'는 취지에서 기획된 국립공원 지정노력은 자연주의자 존 뮤어, 국립공원 관리공단 초대 이사장 스티븐 매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등의 끈질긴 개척과 노력 끝에 탄생된 고귀한 정신이었다. '사적 소유'가 건국이념인 미국에서 누군가 '개척'하고 '소유'한 땅을 국립기념지로 지정하는 것은 재산권 침해에 해당하기 때문에, 초기(미국 최초 동시에 세계 최초) 국립공원인 주인 없는 옐로스톤(직접 개척)을 제외하고는 죄다 힘들었다. 하지만 뜻에 반하던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었던 건, 국립공원이 가진 생태적 가치와 공원 관리체계에 감동한 이들이 스스로 후손을 위해 이 땅의 일부를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원 입구의 지도, 방문객 센터에서 보여주는 정보, 캠핑장과 캠프파이어 등 체계가 분명한 관리에 안정감을 느끼며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장점 덕에 이젠 국립공원 캠핑이 하나의 휴양을 넘어 소중한 한때의 축복처럼 여겨질 정도라고 한다. 캠핑장과 캠핑카가 마련된 국립공원 안은 철저히 보존된 동시에 철저히 관리되고 있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에 자연이 주는 치유의 힘을 받는다는 숭고함이 더해져 어느 여행보다 환영받는다.

 

큰 제목은 빙하와 화산이 공존하는 로키 산맥, 트레일과 만년설을 만날 수 있는 시에라네바다 산맥, 화려한 색의 암석과 기묘한 지형의 전시장인 그랜드 서클, 리오그란데 강의 정취와 멕시코 인들의 설움이 느껴지는 뉴멕시코와 텍사스 등 지역별 산줄기를 통해 나눴고, 각각 옐로스톤, 그랜드티턴, 글레이셔/ 오세미티, 세쿼이아&킹스캐니언, 레드우드/ 그랜드캐니언, 브라이스캐니언, 자이언, 아치스, 데스밸리, 그랜드서클/ 화이트샌즈, 칼즈배드 동굴, 빅벤드 등 각 지역에 자리한 국립공원 단락으로 이뤄진다. 첫 장마다 지도를, 뒷장은 국립공원만의 특성과 매력, 역사, 구경할 곳 등을 사진과 배열해 보기좋게 살려놓았다. 산, 폭포, 후두(침식 작용으로 인해 생긴 기괴한 모양의 바위기둥을 일컬음), 나무, 절벽이 진짜 자연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사진만으로도 아찔할 지경.

 

네 가지 테마 속 국립공원 15곳이 이 책의 정보, 더불어 효율적 여행동선과 알찬 캠핑정보가 덤이다. 군데군데 사색이 엿보이는 건 선물이다.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는 적막하고 어두운 곳에서의 하룻밤을 상상해본다면 오토캠핑의 매력을 알 듯도 하다. 미국 서부 국립공원에서의 오토캠핑은 자율적이긴 하나, 체계적으로 국가에서 잘 관리하는 안전한 자연체험이다. 별밤 텐트 사이로 머리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만나는 별빛도 적막함을 채워줄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유일한 방법이다. 혼자가 아니지만 혼자만 존재할 수 있는 단연코 가장 아름다운 여행법이며, 먹고 입고 자는 것과 자연이 인간과 공존한다는 사실이 경이로워지는 순간이다. 이곳에 있으면 가장 익숙한 것이 가장 새삼스러운 일이 되고, 일상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예를 들어, 불을 구한다던가 물을 마신다던가 하는 일들)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새로운 체험일 수밖에 없다. 일부러라도 겪고 싶은 아름다운 고생일 수밖에 없다. 자국의 땅에서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황혼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이 나라의 기쁨이라고 하니, 여행이 젊음의 것이라던 수없이 많은 오만한 이들의 언어는 수정되어야 한다. 참, 국립공원 여행(캠핑)은 반드시 차가 있어야만 유용하게 할 수 있단다. 버스나 기차로 주변 지역까지 가더라도 국립공원을 한 바퀴 도는 일은 직접 모는 차가 있어야만 가능하단다. 넓은 국립공원을 걸음으로 정복하기엔 무리가 따른다고. 자동차를 권유하는 여행은 처음이라 신기하다. 대부분의 여행은 길 위에서 이뤄진다고 잭 케루악이 말했기 때문이다. 홀로 자가용으로 달리는 길은 고독의 사유 외에는 배울 게 없다고 여겼으리라. 국립공원 캠핑의 자동차는 어떤 의미에서 길 위에서 청춘을 뽐내며 젊음을 마시라던 잭 케루악의 그것과 같다.

 

 

어릴 때 주로 계곡에서 완전 자유캠핑을 자주 했었다. 아빠가 좋아하셔서. 그리고 우리가 좋아해서. 여름 중 절반은 늘 그럴 정도였으니 어른은 아니었지만 나도 캠핑키드였다. 텐트치고 버너에 밥 해먹으며 물놀이 하고 파라솔에 앉아 라면 끓여먹거나 수박을 쪼개먹고 텐트에 들어앉아 라디오 듣고 일기 쓰고 하루를 마감하는 완벽한 캠핑은 이곳저곳 주말마다 가족들과 나들이가기를 꺼리지 않는 부지런한 아빠가 계셔서 가능했다. 열여덟, 고3이 되기 전 여름방학, 그때가 자유캠핑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커서 그런 추억은 아무에게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게는 대부분이었던 그 추억이 새삼 고마워 눈물을 글썽였다. 캠핑할 때는 장소가 어디냐 보다는 아빠가 언제 튜브와 보트에 바람을 넣어줄 지, 그걸 밤에 누가 몰래 훔쳐가면 어떡할 지, 무얼 해먹을 지, 무얼 들을 지, 무슨 이야기를 나눌 지, 오늘은 밤하늘의 별이 얼만큼 보일 지, 밤에 켜둔 등에 벌레가 얼마나 모일 지, 반딧불이는 또 어딨을 지, 벌에 쏘일까봐 겁먹고, 밤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면 어떡하고, 화장실이 푸세식일 수밖에 없는 야외 특성상, 배탈이 날까봐 두렵고, 어떻게 편한 잠을 잘 지, 젖은 옷과 속옷은 어떻게 갈아입을 지 같은 것들이 더 문제다. 자연은 그저, 해가 뜨고 볕이 뜨겁고, 달과 별이 뜨고, 비가 내리는 것 같은 것들이 중요했지, 다른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롯이 자연에게만 모든 정신이 집중되는 날들. 그것이 캠핑의 삶이었다.

 

요즘은 그때와는 다르다. 우리나라에도 곳곳에 캠핑장이 마련되어 계절 가리지 않고 캠핑이 가능하며, 캠핑장이 마련된 곳은 잘 닦인 평지라 늘 냇가를 점령한 자갈과 돌멩이를 골라내고 종이박스를 깔아야만 남보다 평평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그때와는 달라졌다. 아, 한낮에 그늘지는 나무 아래 위치하는 자리는 신이 내려준 장소다. 앞서 지나간 사람이 편하게 골라둔 자리라면 더 ok. 하지만 주위에 돌멩이에 묻힌 배설물은 각오해야 한다. 어릴 때 캠핑은 더운 여름에나 하는 물놀이의 연장선이었지만, 이제 캠핑은 자연에서 해보고 달보고 별보며 밥 해먹고 돈독한 정을 나누는 여행의 또다른 이름으로 변모했다. 물론 예전의 그 캠핑이 나는 더 좋고, 그 캠핑 스타일이 사라진 것도 아니지만, 이름모를 산이나 계곡에 들어설 때마다 인간들이 남긴 쓰레기와 오염은 다소 우려스럽다. 자연은 지키는 만큼 더 큰 것을 해줄 것이다.

 

밤하늘의 달빛 속에 별을 보며 잠드는 이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유일함, 자연에 대한 예찬의 다른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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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9-03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여행을 하게 된다면 가고 싶은 곳이 많지만 저는 먼저 그랜드캐넌에 한 번 가고 싶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사람이 북적북적 거리는 도시 같은 곳보다는 사람 발길이 드문, 자연 경관이 좋은 곳에 여행 가고 싶어요. ^^
여름 방학 때 캠핑하지 못한 게 아쉬워요. 오늘 2학기 개강했어요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9-04 02:21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은 일단, 그랜드캐넌 갈 때 저를 데리고.....캐리어에 넣어서 질질 끌고가도 좋아요!
그럼요, 하지만 저는 언제나 뉴욕 보다는 파리, 파리 보다는 밀라노..................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대한 로망이 도심의 화려함에 대한 욕망보다 언제나 더 커요.
루 살로메 스타일...............(여기서 이게 왜 나옴?)

물놀이 갔었잖아요, 계곡 좋던데, 하룻밤 자고 오죠 왜..
개강 축하해요, 내가 그걸 안 했었구나...................( '')

댈러웨이 2012-09-04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렸을 때 캠핑 많이 갔어요. 요즘 사람들 가는 그런 캠핑은 아니였지만, 그러고보면 그런 기억을 남겨준 부모님한테 새삼 감사하네요.
참, 첫문장부터 저렇게 써놓으면 누가 읽어요? ㅎㅎ 네거티브? 막 이러면서 고개 갸우뚱했어요 첨엔.

그리고, <길 위에서> 좋았어요? 저 그 책 좋았어요. 그래서 오늘 아이님한테 러브레터 보냈어요.
안녕요, 저 자러 갈 거에요. 우리 진짜로 내일 봐요. ^^

아이리시스 2012-09-04 02:35   좋아요 0 | URL
그쵸....... 좋은 책인데........ 앞문장을 바꿔야겠어요. 좋은책!!!

네, 저 책은 완전 좋은 책입니다!!!!!!사진은 얼마나 멋진데요!!!!!!!! 미국캠핑 갑시다!!!!!!!!!
(책 호객행위 중)

요즘 밤에 잠이 안와서 죽어요. 그래서 혼자 창문 열고 별세다가(응?) 어제는 이병률 시인의 산문집을 읽었더니 밤에 멜랑꼴리해져가지고 밤엔 이런 짓을 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길 위에서>는 출간됐을 때 받은 책인데 그때는 좀 아닌 것 같았는데 좋아요, 이번엔. 곱씹으면서 따라가게 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여행이 진짜 여행인 것 같아요. 비트 세대도 모르고 재즈도 모르지만, 젊음은 제가 좀 아니까(!) 전에 부부가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한 책을 읽었는데 그것만큼이나 따라하고 싶은 여행이었어요. 증거가 떡하니 있잖아요, <미국 서부 여행>......그것도 캠핑ㅋㅋ

저 러브레터는 실제로 날아오는 겁니까? 사랑엔 실체가 있어야 해요♡
굿나잇, 댈러웨이님.

transient-guest 2012-09-04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캠핑은 정말 로망이에요. 꼭꼭 save만 해놓고 있는. 시간도 그렇고해서 캠핑만큼은 아니지만, 하이킹이나 그냥 주립공원 숲에서 BBQ하는건 조금씩 다니고 있습니다. 하루만 다녀와도 스트레스가 확 풀리더라구요.

아이리시스 2012-09-04 17:31   좋아요 0 | URL
아니, 닉넴 왜 이러십니까!(초면에 이런..) 오래오래 계셔야지 단기체류 손님이라니, 오래오래 좋은 글 많이많이 보여주셔야 됩니다^^

미국 계시잖아요, 어느 쪽에 계세요? 거긴 덥지 않나요? 국립공원이 그렇게 좋아요?

미국생활 얘기 들려주세요, 특히 하이킹 일기 쪽으로...재밌을 것 같아요^^(멋대로 주제도 정해드림)
ㅋㅋㅋ, 책 보니까 여자에게는 추천할 수 없겠지만 남자와 함께라면, 가능하고 또 즐거울 것 같아요.

자연치유여행이란 말 믿지 않았는데 충분히 그럴 만 해요, 저는 그저 t-g님 부러울 따름. 하이킹이라니요ㅠ.ㅠ

맥거핀 2012-09-05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차를 타고 장시간 가는 것을 상당히 못견뎌 하기 때문에 미국 같은 데를 차로 여행하고 싶다거나, 버스여행을 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별로 없어요. 영화에 나오는 그런 느낌이 좀 궁금하기는 하지만. 허허벌판에 가방 하나 가지고 내리고 버스는 등 뒤에 붕하고 떠나고 그런 거 말이죠. 저는 스케일이 작은 사람이라 아기자기한 동네가 좋습니다. 읽다보니 어렸을 때 보이스카웃에서 캠핑하던 추억이 생각이 나네요.

아이리시스 2012-09-06 00:22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저는 자라면서, 학교 때도, 여행을 갈구하는 사람들만 두고 살아서, 잘 몰랐어요. 아무래도 성향들이 다들 몽상가적 기질이 함유된, 예술가 타입만 두고 살아서 그런가 봐요. 근데 저 대부분 공대나온 친구들인데, 웬 헛소리............( '') 기차타고 정동진 가려고 생각 중인데, 남쪽에서 올라가는 기차가 예전에는 새벽에 한 대 있었는데 요즘도 그런 지 모르겠어요. 그럼 맥거핀님은 애인하고 손잡고 기차여행 그런 것도 별로예요?

버스에서 내리고 제 뒤로 붕하고 떠나는 그런 거 저는 좋아요. 바그다드 카페 오프닝이요!

언젠 한 번 캠핑장에서 만나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띄엄띄엄 읽는 여름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에는 한 권이라도 끝내보겠다는 결심이 다른 책을 쉬게 한다는 것. 무거워서 누워선 꿈도 못 꾸고 그저 책상에 좀 삐딱한 자세로 앉아 설렁설렁 넘겨본 지 어언 6년 쯤인가, 그러고 보면 학부 땐 참 좋았다. 도서관의 문학, 철학, 미학 코너를 특히 좋아했다. 미술사와 역사를 좋아한 건 한참 후였다. 온갖 책을 빼들고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마구잡이로 넣긴 했어도 책냄새 가까이에 있었고, 그 무엇보다 책이 고귀하다는 걸 알았다. 책이 좋았지만 책보다 좋은 것들도 많았다. 강의와 강의 사이에 학교 밖을 나가 먹는 순대국과 소주라든가, 쉬림프 피자와 과일 에이드의 럭셔리한 런치세트라든가, 토마토, 바나나, 딸기, 오렌지 등등 날마다 메뉴가 바뀌는 인문대 매점 옆 생과일 주스라든가, 통학 1시간 30분 걸리는 버스 안에서 절반은 언니와 도란도란, 절반은 꾸벅꾸벅(차 안에서 절대로 독서 따위는 안해) 졸다 내려 고지대 아파트인 우리 집까지 외롭고 쓸쓸하게 걸어오던 별밤들 중 절반은 또 혼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함께 잡은 손도 있었고, 한쪽 어깨가 다 젖도록 우산을 씌워주는 든든한 팔이 있었고, 우릴 비추는 별빛도 있었다. 조금씩 커가기 시작한 어떤 커플은 이제 같은 거리를 자동차로만 다닌다.  

 



 

 


 







 

2009년 타계한 인류학의 대가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 국적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상파울루 대학의 사회학 교수직을 맡게 되어 건너간 브라질에서 방학기간을 이용해 원주민들과 함께 거주하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슬픈 열대>는 1937-1938년 브라질 거주체험을 토대로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 등 원주민 사회의 문화를 소개하고 분석하는 데 초점이 있다. 하지만 처음 가는 땅을 밟을 결심에 찾아가는 곳이 신대륙인 것마냥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아주 어려운 고전 같지만 인문학과 수기가 고루 섞인 전방위적으로 편안한 책이다. 그럼에도 레비-스트로스가 남긴 어떤 저작보다 유명하며, 한 권으로도 그의 사상과 철학, 일생을 바쳐 탐구했던 주제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 발전한 사회를 문명, 미개한 사회를 야만으로 재단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반기를 드는 한편, 두 사회는 그저 다른 종류의 모습일 뿐 더 우월한 사회를 가려낼 수 없음을 주장한다.


구조주의 사상/철학인들은 많다. 그래도 여러 사람들 중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것도 레비-스트로스다. 그의 업적을 평가절하해 오늘날 <슬픈 열대>를 남아메리카 대륙의 흔한 기행문으로 치부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상의 질을 재단하며 우월함을 표식으로 삼는 서구의 지성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식인풍습을 절절히 묘사하면서 자신들의 전통에서 절도와 규칙을 잊지 않는 원주민들이 우리의 그것과 다를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오직 외부인만을 그것도 다른 사람을 받아들여 동일화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는 끔찍하기도 하지만 이해못할 것도 없다. 1937년의 체험을 회상하며 1954-1955년 집필한 책. 누구나 오늘 했던 생각은 내일과는 다른 법이니 구시대적이라거나 기행문이라거나 그런 식으로 매도하는 대신 브라질의 원주민들을 보며 왜 그곳을 '슬픈 열대'라고 칭했는지, 지금은 다른지 그것만이라도 의식했으면 한다.

 

 

 

 

 

 

 

 

 

 

그 후 다시 <미션>의 오보에 소리를 듣는다면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흥미나 관심사가 아니라 교육으로 감상해야 느껴진다. 어느 밤, 아주 오랜만에 묵직한 작품을 틀어둔 거실은 쩅쨍하게 울려 이 세상이 아닌 듯했다. 총과 폭탄에 창과 방패로 대응하는 오프닝 장면에 사로잡혀 충격의 대치에 무기력해야 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고, <제노사이드>에 묘사되는 문명과 야만의 기막힌 전복은 전율적이다. 시대가 달라져도 어느 대치점에서 반복되는 서구와 비서구, 문명과 야만, 우월과 원시 등 이분법적으로 결단내는 인간의 이기심과도 연통되고 있다. 초인류에 의해 전복되는 인류를 다루는 팩션까지 갈 필요도 없이, 동시대 지구를 살면서 밤낮없이 피흘리는 전쟁을 슬픈 지구라 명명한다. 아무리 구시대적이라고 해도 변화가 없다면 여전히 현재의 일이다.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 약 80년 전에도 일어나고 있었다는 뜻.

 

브라질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 중 유일하게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당시 브라질 영토 자체가 아마존강을 낀 절반이 삼림으로 우거진 무인지대에 가까워서 주로 해안가의 무역지가 개발대상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는 내륙지방의 아마존 원주민들과 강의 생물들까지 수난의 대상이 되는 몹쓸 광경을 본다. 자국의 자원을 흥청망청 써댄 결과, 대체품을 찾기 위해 숨겨진 남미나 아프리카 대륙을 들쑤시는 국가 선두에 단연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와 비서구, 문명과 야만의 전복을 주장했지만 말처럼 쉬운 전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희망봉이나 킬리만자로의 눈, 아마존의 원시성을 상품화 해온 관광개발청과 여행객의 사상은 쉽고 빠르게 변하는 종류의 것이 아닐 수밖에 없다.

 

 

 

 

 

 

 

 

 

<제노사이드>를 읽으며 콩고를 여행하겠다는 다짐은,  K.A.가 아프리카 직항노선을 단독 운행한다고 해도, <미션>을 보며 파라과이와 브라질의 국경을 넘어보겠다는 소망은, <슬픈 열대>를 읽으며 브라질 원주민들의 삶과 풍속을 체험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얼마나 슬픈 지를 알았다. 손 꼭 잡고 더운 여름밤 좁은 골목길을 걸어 집앞까지 데려다주고선 무슨 일이 날까 들어갈 때까지 현관 계단에서 지켜보고 서 있던 스물 몇 살의 청년은 이제 없다. 대신 아파트 마당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라인 현관에서 집 현관까지 들어가 베란다에 불이 켜지는 걸 확인하는 서른 살의 청년이 생겨났다.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어도 추억할 수는 있는 것처럼, 오래 전 일이지만 전혀 달라지지 않은 현실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한때 공정무역에 이토록 공들였던 걸까. 커피를 제값 주고 사면 아름다운 거래를 하던 거라던 그 말에 속아 좀 더 지불하는 나는 좋은 사람이라며 자위하는 것인가. 세계 4대 박물관에 전시된 것들은 약탈의 역사라는 진실과도 상통하는, 달콤한 공정무역의 속삭임이 비정열의 위선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공정무역의 토대는 결국, 경제우월주의를 인정한 후에 받아들인 대비책에 불과하다. 당연한 걸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라고 할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하리.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커피와 초콜릿을 끊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 인생 통틀어 별다방 같은 프랜차이즈 커피점에서 우아떨어본 건 열손가락 이내. 시내를 꽉 채운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이 거리 저 거리 하나둘씩 늘어나면 날 수록 그곳을 더 멀리하게 되었다. 그건 내가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국제적(지구적), 경제적, 개인적 사정이고 자존심이었다. 자존심과 고집을 지켜야 할 대상이 좀 변했을 뿐이다. 다른 하나는 동물보호다. 보호라기 보다는 사랑이고, 고기를 원래보다 덜 먹자는 것일 뿐이지만.

 

책은 광장에서 읽어도, 학교 도서관에서 읽어도, 집 가까운 대학 캠퍼스 통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읽어도 좋았다. 두 시간의 시급보다 비싼 커피와 디저트를 서구의, 젊음의, 쿨함의 인식인 양 즐기는 게 그때는, 싫었을 뿐이다. 그저 제철과일 주스를 길에서 마시고 되도록이면 먹고 마시는 건 좀 줄이고 절약하는 것. 먹지 않아도 소화를 잘 못 시키는 몸상태와는 별개로 세 끼 밥만으로도 딱히 S자 몸매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초콜릿은 못 끊었다. 초콜릿은 너무, 그러니까 너무, 여자에게 필요하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의 다소 감상적이고, 스물 일곱 살 먹은 유럽 청년의 남미 방랑기는 신대륙 체험인 동시에, 프로이트 이론과 언어학 그리고 맑스주의에 빠져들었던 영향과 맞물려 문화우월주의를 거부하는 문화상대주의자의 면모로 나타난다. 1930년대 브라질 원주민 시대를 회상하는 1950년대 글이라 대단한 상업주의나 경제주의보다는 문화적 차이와 전통의 서술에 그쳐, 더이상 분노가 치밀지 않는다는 건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슬픈 열대>는 가벼운 수기로 읽어도 좋지만 전공자 아닌 독서가에게는 사상적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발단이 된다. 문화 상대주의의 예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비교대상이 충만하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식인풍습과 형벌제도를 다른 방식의 문화라고 인식하는 점에서는 기발하기까지 하다. 식인풍습이 대상의 힘을 끌어안는 걸로, 형벌제도가 대상의 힘을 꺾어버리는 것으로 이해하면 모든 현상에 저마다의 이유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거꾸로 가지 않는다. 소중한 이가 죽으면 홀로 땅에 묻어놓은 게(뿌려놓은 게) 미안해 인간은 자연에서 속세로 여행 왔다가 다시 자연으로 가는 거라고 해도, 물이 온도에 따라 얼음이 됐다가 수증기가 될 수는 있는 거여도, 한 번 약탈하고 빼앗은 것을 다시 돌려준다 해서 빼앗기 전 상황으로 완벽히 복귀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다. 하물며 이런 바람 속에 비가 내리면 한 번 가지고 나간 우산 또한 그 이전의 우산과는 다른 법인데, 그런 생각하기 시작하자 어쩐지 좀 슬펐다. 슬픈 젊은 날 같은 것만 슬플 줄 알았는데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지켜져야 할 것들이 그러지 못하는 상황만큼 슬픈 것도 없다. 


누군가는 유명한 사회학자의 인기도서로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게는 인류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를 몰랐을 뿐이다. 법의학과 수사집, 판결문을 읽는다고 내가 검시관이나 형사, 검사가 되는 건 아닌 것처럼 인류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닌 내가 인간, 나아가 인간을 구성하는 사회, 사회의 문화와 전통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서부터 왜 이렇게 사는지에 이르기까지 알기 위해서 무얼 해야 할 지를 몰랐다. 직접 체험에서 오는 풍부한 수기는 흥미로웠는데, 식민과 원주민, 문화와 풍습의 진화는 놀라운 것과 이미 알던 것이 혼동되지만 유익했다. 내가 그곳에서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능력이나 진화의 차이가 아니라 습관이나 생각의 차이일 뿐, 어렵게만 보이던 <슬픈 열대>를 아득한 슬픔으로 기억하는 지금, 레비-스트로스의 타계는 3년 전이 아닌 지금 내게 아.프.다. 아.쉽.다. 누군가의 일생을 오롯이 이해한다는 건 아주 어렵고 고귀한 일 같다. 업적이라면 그보다 좀 덜하겠지만 일생 바쳐 이룩하거나 조사하거나 매달린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 누군가 부러워지는 날들이다. 내 질투는 주로 추상성에 기초하고 있다.

 



 

 









 

이 책으로 구조주의를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치 소설을 어느 정도 읽으면 자연스럽게 보게 되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마냥 눈에 들어왔다. 입문서조차 낑낑거리며 보게 생겼으니 지금 이 순간부터 독서일기는 모조리 다시 씌어야 할 것 같다. 레비-스트로스는 기행에 버금가는 사상철학체험을 총망라한 인문서를 내밀었다. 인문서는 딱딱하다는 편견을 씻어주고, 인문서도 감상적(감성적)으로 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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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8-28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풍에 무사하신거죠?^^

2012-08-28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8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30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30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9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30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9-05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조주의..사실 처음에는 상당히 놀랐어요. 푸코, 레비스트로스, 소쉬르..어떻게 그렇게 절묘하게 딱 맞아떨어지는지..이거 정말 대단한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근데 그 이후에 구조주의의 문제점, 폐해 등을 다룬 강의를 들으면서 인식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습니다만, 아직도 그 도식들을 보면 꽤 감탄하게 되요.

근데 요즘에 매일 글을 한개씩 쓰시네요. 허허허..반성합니다.

아이리시스 2012-09-06 01:21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 웃기죠? 서구가 비서구를 보는 방식에서 라다크 갔다가 공정무역 찍고 약탈갔다가 유전갔다가 구조주의, 쓰고나서 내가 미쳤었구나..... 뭐 방향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용감했습니다ㅋㅋㅋ

그러니까 지금으로선 저 크게 넣은 최근 책이 제일 쉬운 책일까요?(전문가 도움이 필요해요)
여느 학문은 서로가 서로를 엎으려고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니까요.

매일 한 개씩이면 좋겠지만, 잘 보면 뜸했을 때 있어요, 그때 써뒀던 글입니다. 하루에 저 긴 글이 뚝딱 완성되지 않..않을 뿐더러.. 요즘은 시간도 없..없어서 하나하나 리뷰써야 하는데 것도 귀찮아서 편법을 쓰는 거예요. 이걸 뭐하러 털어놓는지 모르겠네요. 가만있으면 중간은 갈텐데.(후회중)

맥거핀님, 이삿짐 정리는 끝내셨나요, 이제 극장 가시면 되는 거예요? 피에타 보러?

맥거핀 2012-09-06 22:02   좋아요 0 | URL
어..그니까 그게 대단한 거에요. 뜸했던 때도 사실 뭔가를 쓰고 있었다니..그리고 그것을 바로 올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다니..

아..피에타 개봉했나요.(개봉했는지도 모름..;;) 베를린에서 엄청 호평이라는 소식만 듣고 있습니다.
 

 

 

 

 

 

 

 

 

문득 <조선 왕조 실록>이 떠올랐다. 삼국사도 좋고 고려사도 좋고 근현대사는 더할 나위 없이 분노하면서도 재미가 쏠쏠하지만 특히 조선은, 뭐랄까, 우리나라 이야기로 읽는 성서 같다. 모든 왕들에게 이야기가 있고, 모든 왕들의 특징과 개성이 살아있고, 권력과 권모술수와 탐욕과 전쟁 그리고 시대가 살아숨쉰다. 그래서 야금야금 좋아하는 왕의 업적과 일대기를 읽을 수 있는 이 책을 내가 많이 좋아한다. 펼칠 때마다 다른 이야기가 보이고, 읽을 때마다 다른 시대로 간다. 타임머신을 타고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소복히 쌓인 곳으로 여행한다. 하지만 저 책이 썩 재밌는 구성이나 스토리는 아니란 걸 나도 안다. 사전식으로 썼을 때 얘기지 저 책 한 권 들고 산에 박히면 안드로메다가 아니라 골로 갈 수도 있다.

 

지금 드라마 <닥터 진>에서는 병인양요가 한창이다. 일요일 밤 포털 네이버에서 '병인양요'가 검색순위 10위 안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새로운 일은 아닌데 신기해보였다. 이 드라마가 아니었음 언제 일시적으로나마 동시다발적으로 병인양요를 검색하겠는가. 얼마 전 <석파란>이란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벤트 당첨의 결과물이다. 받기만 하고 입 닦은 게 아니고 읽을 엄두가 안나다가 다시 그 시대가 궁금해져서 해치우기로 한 거다.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치환해 고종의 섭정을 대신한 군주의 심술궂은 아버지나 명성황후의 시아버지로서 며느리의 명석함을 참지 못해 맞서 싸운 욕망의 화신으로 기억하기에 이 인물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가까이 애정과 연민을 느꼈다. 드라마 속에서 송승헌 그러니까 닥터 진이 처음 조선으로 타임슬립했을 때 그는 임금의 아버지도 아니었고, 아들이나 자신이 왕좌에 오를 수 있는 지위도 아니었다. 몰락 왕족이라 왕좌에서는 한참 멀어진 바깥선에 있었다. 이하응이 그랬기에 그 아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하응의 자기소개를 듣던 닥터 진이 '아, 그럼 흥선대원군..' 이라며 혼잣말 하자 그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봐 쉿, 그런 말은 반역이라며 닥터 진을 꾸짖는다.

 

역사를 아는 닥터 진과 역사를 사는 이하응의 삶은 그렇게 대비됐다.

 

<석파란>은 제1회 황금펜 영상문학상 금상 수상작으로 우리에게 고종의 아버지와 명성황후의 시아버지로만 널리 알려졌던 이하응의 다른 면목을 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가 어떻게 세도정치가 만연한 시대에 안동김씨 가문과 대적하며 자신의 위치를 지켜왔는지 같은 건 사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그에 대한 정보일 것이다.

 

온갖 서양세력들이 문호개방이란 명분으로 조선의 문을 두드릴 때,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거부해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을 샀고, 천주교 박해(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를 죽이는 바람에 프랑스가 쳐들어오는 발판을 마련한다. 바로 병인양요다. 이후에는 며느리 명성황후와 사사건건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하다못해 흥선군은 일본을, 명성황후는 청의 세력을 이용해 서로를 견제하려 했으니 말 다했다. 임오군란은 신식군대(별기군)를 우대하는 민씨정권에 대한 반발로 구식군대와 하층민이 봉기한 것이다. 신식군대 vs 구식군대, 민씨정권 vs 흥선대원군, 일본 vs 청 그리고 진보 vs 보수의 대립이었다. 그는 왜 아들을 왕위에 앉혀놓고 자신이 조정하려 했을까. 어째서 그토록 권력에 집착을 보였을까. 그는 원래부터 탐욕스러웠을까.

 

하지만 이 소설이 얘기하고자 하는 건 정치나 군사적 얘기가 아니다. 아들과 며느리를 두고도 그 권력을 가지려 했던 왕의 아버지 얘기도 아니다. <석파란>은 그가 남긴 '묵란'을 통해 이하응이라는 인물의 예술적 삶을 조명하고, 그 속에 나타난 정치적 이상과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간파한다. 흥선군이 서양문물의 개방을 반대하는 바람에 근대 발전마저 늦췄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 이미지로는 그가 난을 그렸다는 게 의아하게만 여겨진다. 정치적 집념과 이상을 난을 치면서 다듬었다는 것도 예상 밖이다. 지금까지 그가 난을 그렸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소설 속에 실린 묵란을 구경하는 것도 의심스러울 만큼 의외다.

 

 

 

아주 어릴 때 <조선왕조실록>을 읽었다. 철종까지만 나온다는 것, 의외로 재미있다는 것, 하지만 세분한 지식이 없으면 한 권을 읽어내는 게 의미가 없다는 것까지 한 권의 책으로 깨달았다. 그때 <조선 왕을 말하다> 같은 책이 있었으면 더 재밌었을 거란 건 두말할 나위 없다.

 

태종, 세조, 연산군, 광해군, 선조, 인조, 성종, 영조까지 내가 생각해도 비교적 할 말이 많은 왕들로만 구성됐지만 한 권의 책이 주는 유익함이 어디까지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 오랫동안 책장에 묵히다가 왕 얘기가, 지난 세기가 궁금해질 때를 기다려왔다.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는 왕들이라 드디어 '역사적 시각' 같은 것에 신경 쓸 수도 있을 것 같고, 이런 자신감이 좀 위험하다는 것도 알겠다.

 

 

 

 

조선 왕들에 대한 얘기는 이불 뒤집어쓰고 듣는 할머니 옛날 얘기처럼 언제나 새롭고 또 흥미롭다. 

2권의 목차는 이렇다.  

 

 

♡삼종 혈맥의 시대를 연 임금들-효종, 현종, 숙종

♥독살설에 휩싸인 임금들-예종, 경종

♡성공한 임금들-세종, 정조

♥나라를 열고 닫은 임금들-태조, 고종

 

 

 

그리고 가을의 문턱에 이 영화가 기다리고 있다. 그렇잖아도 얼마 전 종편채널 중 한곳에서 하는 사극 <인수대비>를 보면서 연산군에 대한 연민을 다시금 확인한 데 이어 광해군 생각이 났더랬다. 선조와 개똥이와 광해군이 나오는 사극을 어릴 때부터 몇 편 봤지만 연산군에 비해 많이 멀어진 듯 했었는데 잊지 말라고 이병헌이 영화를 찍어줬다. 찍은 건 추창민이라는 감독님이지만. <마파도>로 장편 데뷔해 <사랑을 놓치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만들었다.

 

 

 

 

 

 

 

 

 

 

 

 

 

 

송승헌은 사극에 엄청 안 어울리던데(미안;;) 왕이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왕 포스도 아닌 것 같다. 이병헌은 포스터만 봐도 어울린다. 무거운 말투도, 중후한 목소리도 왕 역할에 어울릴 것 같다. 안 어울리는 역할이 별로 없고 안 해본 역할도 거의 없을 듯한 배우이긴 하지만. 나는 조선 왕 중 딱 한 명과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과감히 광해군을 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엄청 오래 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와서 생각에 생각이 함몰됐는지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는 떠오르지 않는다. 굳이 지어내자면 광해군이 부드러움과 터프함이 공존하는 순정마초 이미지일 거라고 본 것 같다. 그래서 모성애를 마구 자극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연약함 속의 강인함이 여자의 마음을 잡아챌 거라고. 그런 남자 그것도 왕을 품으려면 혹은 사랑을 받으려면 더 강해야 하고 더 연약해야 하니까 많이 떨리겠지만 여자도 계속 노력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그가 왕이 아니라도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갈 거야 그런 생각. 도포 걸친 이병헌은 이병헌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멋있다. 저 사람은 이병헌이 아니라 광해군이니까.

 

아버지(선조)의 정비(인목대비)가 낳은 이복동생을 대신해 서자로서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선조) 대를 이어 양난 이후의 재정과 민심을 수습하고 중립외교를 지향하고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의 업적을 이뤘지만 자기 세력을 강화하고 지키기 위해 새어머니 인목대비의 아들이자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을 방에 가두고 뜨거운 불을 쬐어 죽게 했다는 오명을 씻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광해군을 추대하는 동인과 영창대군을 추대하는 서인의 당파싸움에 의해 다친 희생자들에 불과하다. 나중에 인목대비의 세력을 등에 업은 서인이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이를 인조반정이라 부른다. 인조는 광해군의 조카였다. 이후 광해군은 18년간 강화에서 제주로 유배를 갔고, 유배지에서 아내와 아들, 며느리를 모두 잃는다. 광해군은 불운한 왕이었다. 옳기만 한 사람 드물고, 그르기만 한 사람 드물듯, 그런 점에서 그 또한 조선시대 다른 왕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를 폭군으로 만든 요소들은 대부분 불운한 시대와 패권적 당파싸움이 부른 재앙이었다.

 

이 영화의 초점은 어디에 가 있을지 모르지만 기대된다. 광해군이 딱 이병헌처럼 생겼을 것 같네. 설레게.

 

그렇지만 나는 조선시대에 태어났어도 평범한 서민가의 딸로 태어나서 왕과는 전혀 상관 없는 여자로, 왕의 얼굴도 모른 채로, 그럭저럭 성실하고 착한 보통남자 만나가지고 예쁜 아이들 낳고 알콩달콩 살았겠지. 이왕이면 광해군의 여자로 태어나는 꿈 한 번 꿔보자. 살고싶은 세상은 사도세자가 왕인 곳인데 결혼은 광해군이랑, 하지만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같은 전쟁은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하지만 광해군이 뿜는 카리스마가 그런 아픔과 불안을 겪어야만 가질 수 있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 광해군 버리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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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8-07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광해군이 아이리시스님을 선택했을 수도 있죠뭐...그래서 사도세자가 왕인 세상에서 아이리시스님 때문에 왕위를 버린 광해군과 알콩달콩...흠...^^;;
어쨌거나 이병헌이 왕도 하는군요. 전 이병헌 같은 외모를 참 안 좋아하지만, 이 배우는 나이 들면서 더 나아지는 것 같아요. 저에게는. 왠지 젊었을 때는 너무 무게가 들어가고 힘이 들어가고 끈적거렸지만, 지금은 그게 더 어울리는 나이인 듯. 아님..제가 나이가 들은 티를 내는 것일지도.

밤이 되니 조금 바람이 부네요. 정말 미치도록 덥네요. 지구가 걱정 될 정도로^^
지나가겠죠 이것도?^^

아이리시스 2012-08-09 00:09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이상하게 계속 광해군이 아니라 이병헌을 버린 것 같아가지고 꿈에도 나올 것 같고 그랬어요. 날 버리지 마~ 이럴 것 같아요. 얼마 전에는 꿈에서 박유천이 고백했는데ㅎㅎ 저는 대체 그런 꿈을 왜 꾸는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저 그 아이(!) 좋아하지 않아요. 배우로서 좋은 것과 고백 받는 것은 다른 거잖아요.

현맘님, 광해군이 절 선택해서 사도세자가 왕인 나라로 타임슬립해가지고 저랑 살았으면 좋겠어요. 광해군이 이병헌처럼 생겨도 좋아요. 너무 힘이 들어가고 끈적거린다는 거 알 것 같아요. 그게 좋았을 때도 있지만 제가 이병헌을 싫어하기 시작한 건 이상한 스캔들과 소문이 나고부터예요. 돈 많은 남자가 눈도 얼마나 높을까, 그러면 그 돈으로 여자를 얼마나 고를까ㅎㅎ (아 이건 아니구나)

현맘님은 차승원 좋아하시잖아요. 차승원 오빠ㅎㅎ 둘 중에 누가 더 좋아요? 한 명은 완전 유부남이고 한 명은 어쨌든 미혼인데?!

아아아아아아악, 머리를 괜히 감았어, 마르지가 않아서 잠을 못 자겠어요. 졸려요. 광해군이고 뭐고 저에게 잠을.....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8-09 12:03   좋아요 0 | URL
당연히 차승원이죠! 완전 유부남이지만, 그게 더 좋은걸요! 유부남인데 멋진게 더 섹시한걸요!
(그리고 어짜피 남의 떡이예요..)
전 이병헌에 대해선 무관심인 편이예요.ㅎㅎ 스캔들 많은 남자. ㅎㅎ

꿈에서 누군가 나에게 고백하는거, 꿈이라서 더 아련하고 좋잖아요.
이 더운 한여름밤에 그런 꿈이라도 꿨음 좋겠네요. 오늘은 더 온도가 낮아진다고 해서 좋아했더니만
습도가 장난이 아니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잘 이겨내요 우리!

아이리시스 2012-08-16 23:11   좋아요 0 | URL
이병헌이 아니라 광해군이라니까. 배우들은 다들 멋져요.(로 귀결됨)

아참, 저 꿈에 대한 투덜거림의 정체는요, 사실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꿈에서 만나도 황홀할 사람ㅎㅎ 근데 왜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 매번 나와서 고백하냐는 거죠, 제 말은. 에잇. 또 아쉬울라 하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yrus 2012-08-07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병인양요가 검색어 순위에 오르게 될 줄이야..ㅋㅋㅋ 그런데 사극이나 대중 역사책은 좀 재밌는데
공무원 국사는 왜 재미없는걸까요? ㅡ,ㅡ;; 연표를 이해하라는데 결국은 나도 모르게 암기를.. ㅠㅠ
참고로 <궁녀>라는 책을 읽어봤는데 왕의 여자 되는거 아무나 되는게 아니더군요. 줄을 잘 서야해요 ^^;;

아이리시스 2012-08-09 00:14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원래 공부는 뭐가 됐든간에 재미가 없을 겁니다. 프르노 보는 것도 그럴 거예요!(응?) 댓가를 바라는 것들은 재미가 있을 수가 없어요. 근데 그런 신기한 사람들이 있긴 있죠.

제가 그 부류에 속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지가 않잖아요. 공부가 재밌었음 제가 벌써 20개국 언어쯤은 통달했게요?! 나 줄 잘 설게요, <궁녀>라는 책에 광해군의 이상형 같은 건 안 나와있었어요?(응?)

댈러웨이 2012-08-07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저를 이제 마법에서 좀 풀어줄 때가 되지 않았어요? 어우 근데 미치겠다. 이 마법 절대 안 풀릴 것 같애. ㅎㅎ
이 페이퍼 어제 밤에 읽으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당장 아이님의 광해군이 되어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요. (모래는지...) 우리 절대 만나지 마요. 마르지 않는 지식의 샘 앞에서 저는 너무 부끄럽겠어요. 그러고보니 저는 학생 때 뭐 하나 제대로 잘 한게 없었나봐요. 역사도(!) 그게 어디가 됐든 하나도 모르겠어. 정말 다 알고 싶은데. ㅠ.ㅠ(막 운다.) 이 페이퍼도 정말 고마워요.

보고 싶었어요. ♥♥♥ (아 나 하트 남발하면 안되는데... 이미 프레이야님한테 하트 뿅뿅했는데... --)

아이리시스 2012-08-09 00:24   좋아요 0 | URL
광해군이 되어줘요, 댈러웨이님. 어딘가에 광해군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병헌처럼 생겨도 좋아요. 근데요, 요즘은 베컴ㅠㅠ 베컴처럼 생겨줘요ㅠㅠ 저는 런던올림픽 개막식을 가보로 볼 거예요. 어찌됐건 정말 멋진 개막식 그리고 런던이었어요. 살아있는 런던ㅎㅎ(여기서 이 시간에 왜 런던예찬론을 펼치고 있는지ㅎㅎ)

그리고 마법은 한 번 걸면 안 풀리는 거예요. 꼭 풀려나야 해요? 그럼 킹스크로스에 가서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해리포터 찾아가지고 똑똑한 헤르메온느에게 마법을 푸는 약을 만들어달라고 해볼게요.(응?) 근데요, 제가 정조대왕님도 좋아하거든요. 광해군만 좋아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트는 남발해도 참아줄게요. 나도 양다리니까(-_-) 으하하하하. 자야 돼..

그럼 이따가 심심해지면 마르지 않는 지식의 샘 좀 파봅시다! 금방 마른 땅이 보일텐데 그때 가서 저를 버리시면 안됩니다. 기다렸어요.♥♥♥♥ (제가 하트 하나만큼 더 사랑하는 거예요) I win!

이불 잘 덮고 주무세요, 댈러웨이님. 굿나잇.

2012-08-08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09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8-10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병헌 연기 하나는 정말 압권으로 잘 하잖아요.
그다지 이병헌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가 기대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시 광해군을 좋아하기란, 으으, 괜히 폭군이겠어요,
아마 매우 외롭고 어린 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면을 가진 사람이겠지요, 카리스마와 매력은 있겠지만.

그런데, 제가 요즘 알라딘 추천 수치 올리기 비밀에 폭 빠져있거든요.
제 서재만 그런줄 알았는데, 아이리님도 그렇네요. 방금 17 추천이었는데, 제가 하나 누르자마자 20이 되었어요.
다른 사람이 동시에 추천해서 그런건 아닌거 같아요. 제 서재에서 몇번 테스트해봤거든요...
참 재미있는 시스템이예요, 알라딘 서재는. ^^

절 계셨죠?

맥거핀 2012-08-10 22:23   좋아요 0 | URL
근데 저도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수치 이상이 올라가면, 한번에 추천이 2개, 3개씩 뛰는 것 같아요. 그냥 제 서재의 추천수는 자체적으로 디스카운트해서 보고 있습니다.ㅋ

아이리시스 2012-08-16 23:16   좋아요 0 | URL
왜 갑자기 달사막여우님이 되신 겁니까! 고양이보다 여우입니까 :)
저 영화 한효주..제가 한효주를 광적으로 싫어해요. 그래서 뭐?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ㅠㅠ
그죠, 광해군을 좋아해봐요, 왕들은 다 미쳤는데 그래도 저는 정적으로 인자하신 세종이나 정조보다는 광해군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단점을 고쳐가면서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살아갈 재미가 있잖아요.

그런데요, 저는 추천수가 3인 페이퍼를 추천하니까 순식간에 10이 되더니 한 번 더 새로고침 하니까 11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내 추천의 위력은 8이구나.............룰루랄라. 이랬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3이 아니라 8이 아니었을까요............... 뭐 그거나 그거나.

동시에 추천은 아닌 것 같고, 누적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사람이 누를 때마다 누적되면...^^

저는 디스카운트는 안하고 좀 더 더해서 자체적으로 무한칭찬모드로 보고 있습니다, 맥거핀님ㅎㅎㅎㅎ

맥거핀 2012-08-10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닥터 진'은 의학드라마에요, 아님 역사드라마에요? 저도 가끔 채널돌리다가 봤는데, 이소연 이쁘다 이 생각만 했어요.ㅋ 예전에 어렸을 때 드라마로 하는 조선왕조실록 상당히 좋아했는데, 진짜 그 드라마보면 뭔가 역사공부하는 느낌..갑자기 뜬금없이 성우가 튀어나와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하는 것도 재밌었고..(그런 의미에서 공화국 시리즈도 좋아했는데, 제4공화국에 박정희 역으로 나오셨던 배우분이 생각이 나네요.)

그냥 드라마 얘기한김에 한 가지 더 얘기하면, 전 요즘에 유일하게 골든타임 이 드라마만 봐요. 이성민 씨 연기가 너무 쩔어서 안 볼 수가 없음...본방사수에 가끔 재방도 넋놓고 봄..

아이리시스 2012-08-16 23:21   좋아요 0 | URL
[닥터 진]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타임슬립 드라마 아닐까요. 역사드라마라기에는 왜곡이 워낙 심하니까 당연히 아니고(역사를 되돌리고 고치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저 시대극일 따름이죠. 초반에는 의학드라마인 척도 좀 하더니 그것도 가면서 흐지부지.. 안동김씨 가문과 이하응의 싸움이랄까........뭐 그런 거죠. 그..제4공화국..제5공화국..그런 거 우리 아부지가 좋아하시는 거예요. 저도 언젠가 현대사에 빠져가지고 미친듯이 다운을 했지만 그..그..화질이..( '')

골든타임을 자꾸만 놓쳐서 못보고 있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면 곧............^^

알로하 2012-08-16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순정마초일까요ㅋㅋ 이병헌은 연기를 잘 하니까 기대해봅니다.

아이리시스 2012-08-16 23:23   좋아요 0 | URL
알로하님, 이병헌은 모르겠고 광해군은 그랬으면 좋겠어요. 근데 저는 본능적으로 트라우마가 감지되면서 저한테 자꾸 기대오는 사람은 부담스러운데 어쩌면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겠어요.

이병헌은 여기서 왜... 그래도 연기 못한다, 보기 싫다는 분은 한 분도 안계시네요ㅋㅋㅋ
 

 

 

 

오전 9시 이전의 외출길조차 벅차 집에 돌아와 사흘이나 꼬박 컨디션 관리를 하다가 정신차려보니 제대로 뒹굴거리는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잘 놀고 있으면 된거다. 그 와중에 동생은 뚜껑 열리는 빨간색 차와 새로나온 갤럭시 노트를 갖고 귀환했다. 이 시대 화려한 청춘은 노예계약과 할부로 꾸려가는 삶을 말하는 거구나. 푸핫. 그러거나말거나 '화차'만 안되면 된다. 어쨌든 너는 황금기를 살고 있는 거구나. 며칠은 토스트와 비빔면, 쫄면 같은 밀가루 음식과 그애가 죽고 못 사는 순대국과 고기류를 달고 살아야 한다. 책은 일 년에 한 권도 안 읽는 애가 안철수의 생각 안 사냐고 꼬드기지만 안 넘어갈 거다. 이분이 아무리 좋은 얘길 해도 내 표는 다른 곳에.. 아주 예전부터 그분이 안 나오시면 좋지만 나오시면 그리로.. 그래서 혼란올까봐 못본다! 혼란 자체가 오지 않을 상황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목표는 투표 아닙니까. 투표만 잘하면 됩니다.. (근데 딱히 정치성향 똑같을 거면서 왜 굳이 책을 사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 

 

쓸 얘기가 없지만 글 게시와 게시 사이의 간격이 길어지는 건 옳지 못하다. 올림픽 개막 이후 내내 결과에 열올리면서 정작 제대로 경기를 본 건 거의 없다. 때론 더위를 때론 잠을 때론 기다림을 나는 이기지 못했고, 수많은 선수들의 피와 땀, 영광의 순간을 놓쳤다. 다시 본 건 몇 개 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분노유발자 올림픽 같으니라고.

 

이 앨범에 대한 얘길 해보자.

 

 

 

 

 

 

 

 

 

 

 

난 요즘 이 드라마 보면서 많이 운다. 때론 억울해서, 때론 기뻐서, 또 슬퍼서, 또 마음 아파서, 어쩔 땐 벅차서, 어쩔 땐 너무 우리들 얘기라서 이유없이 설레고 감동한다. 여기는 서른 셋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존재한다. 쉰, 예순, 일흔에는 미래가 없겠는가. 그들도 마찬가지일테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리지 않은 청춘의 솔직한 이야기는 도움이 된다. 어떻게? 그냥.

 

솔직히 일과 사랑 어느 부분에서 공감해야 하는지, 공감하고 있는지 자각이 없지만 매번 울컥 아니 울먹이는 걸 보면 이 시대 사랑, 분명히 마음 속에 기생하고 있다. 쿨하고 진심이 없는 듯해도 다들 얼마나 벅차게 몸과 마음 바쳐 사랑하고 있을까. 세상의 청춘들이 꿈꾸는 혹은 현재진행의 사랑이 합쳐지면 지구는 온통 사랑으로 뒤덮일 것이다. 어제는 치즈케익을 먹었다. 티스푼으로 두 입이면 더이상 못먹을 것처럼 느끼한데 이상하게 다음 한 숟갈, 또 한 입 그러다보면 어느새 한 조각 뚝딱. 초코, 고구마, 생크림, 모카. 종류도 많은데 하필 그 흔한 데코레이션 하나 없는 치즈케익이라니 멋없이. 그러니까 로맨스는 담백할 수록 좋지 않은 거잖아. 나는 치즈케익 같은 연애는 싫다. <로맨스가 필요해 2012>에는 많은 사랑의 줄기가 등장하지만 카페 사장 남자친구를 둔 음악감독 주열매가 주인공이다. 남자는 여자의 일률적 빙수 거부에 얼음 한 그릇과 온갖 재료가 '따로' 나가는 '열매빙수'를 개발했다. 카페 메뉴에 여자친구 이름을 붙이는 남자친구라니. 사실 여기 나오는 두 남자는 둘 다 매력이 넘쳐서 진심으로 저런 상황이 안 오기만을 빌면서 본다. 도대체 무슨 복이지. 나이 서른 셋이나 돼서.

 

어쨌든 원하는 것만 덜어 쓱싹쓱싹 비벼먹을 수 있는 시원하고 달콤한 빙수는 카페에서 인기만점(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이 뜨겁고 때로 차가운, 냉온탕을 번갈아 넘나드는 이들의 청춘을 대변하는 제멋대로식 메뉴가 아닐까. 연애는 아무도 뭐랄 수가 없는 것. 오로지 자기만의 세상 안에 존재하는 것. 아무도 연애가 삐걱거리거나 좋은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아바타 같다.

 

바깥 세상에서는 어른을 강요당하고, 내면으로는 기대만큼 크지 못해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정없이 흔들리는 살만큼 살았는데도 여전히 모르는 청춘들의 아바타. 

 

 

 

...

후회하니 미안 했었니
왜 그땐 내 옆에 없었던 거니 어느 날
한번쯤은 물어봐줄래
그때는 내게 무슨 일 있었냐고

그렇게 나보다 너의 기억이 많은
그 시절 그때 그 자리 또 너의 손끝에 남겨진
따뜻한 아직도 따뜻한 기억이 모두 아픈 날들이
...

 

 

 

...

나의 시간 속에 지워진 듯 보인대도

멈춰버린 꿈을 위한 눈부신 우리의 추억들

아름다웠기에 끝없이 펼쳐질 이야기

 

바람을 타고 난 저 멀리

바람을 타고 난 저 멀리

우리의 태양은 가득히

...

 

 

사랑법은 모두 다르다. 강요해서도 안되고 강요할 이유도 없다. 강요가 아니라 마음이었겠지만 상대방에게 마음과 진실은 너무 늦게 당도한다. 닿았을 때는 이미 함께가 아닐 수도 있는데. 열매와 석현은 지금 그런 관계가 아닌데, 뒤늦게 깨달은 일방 당사자로 인해 알콩달콩한 다른 당사자의 행복한 연애가 깨어지려는 참이다. 이제 정말로 짝을 찾았다고 믿는 열매에게 아직은 모르지만 분명 위기다. 사랑은 저울에 올려질 거고 시험당할 것이다. 누가 일처다부가 나쁘다 했나ㅜㅜ

 

그녀가 만든 노래는 모두 그와의 추억 속에서 나온 감정들로 버무려진 비빔밥이다. 과거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헤어짐을 부르는 결혼생활들, 그들은 지금 자신과 마주보고 있는 상대가 자기가 용서할 수 없는 그 '과거'로 인해 성장했다는 사실과 현재의 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왜 잊는 걸까.

 

 

 

 

 

 

 

 

 

 

 

 

 

 

 

 

 

언제나 귀로 듣는 선율은 늘 말이나 마음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드라마 속에서 열매의 직업이 음악감독이듯, 좋아하는 영화의 LP판을 찾아다니다 어느 희귀 LP판으로 인해 지훈을 만난 것처럼 영화 <듀엣>의 어린 감성도 그렇게 부딪쳤을 거라 믿는다. 낯선 이와 친구가 되는 것이 낯선 풍경 안에서는 전혀 아무렇지 않다.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부족함과 모자람의 미학을 이국적 풍경으로 승화시킨다.(뭔가 부족할 걸 알면서도 보는 이 자신감은 자연적 휴식이다, 풀어져도 좋다는)

 

 

책은 두 권.

 

 

 

 

 

 

 

 

 

 

 

 

 

 

<토막난 시체의 밤>은 오싹한 표지와 제목에도 별로 무서운 소설은 아니다. 이 비현실 같은 현실이 토막나서 차라리 우스워지는 그런 이중적 매력의 이야기다. 밑바닥 인생들의 사채 돌려막기, 책임전가, 섹스와 협박, 마지막은 죽음이지만 말하지 않는 게 낫겠다. 어떤 사람이 너무 외로워서 옛날에 살았던 작은 다락방으로 기어들어와 그곳에 살고있는 또다른 누군가와 섹스를 한다. 한 번이 두 번, 두 번이 세 번, 이들은 무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견디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을.

 

둘은 몰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가난했고, 가난하지 않았으나 부모로 인해 가난해진 것. 갈 곳이 없었던 것. 가진 것과 갈 곳이 없을 때 세상이 주는 비릿한 슬픔으로 인해 느끼는 좌절, 견디기 위해 했던 과거의 행동이 하나둘씩 지금의 나를 화롯불로 던져넣을 것 같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누군가를 협박하거나 포기하기. 죽거나 살기. 그러면 된다. 쉽진 않지만.

 

<굿바이 동물원>의 추천사는 엄청나다. 한겨레 수상작을 읽어본 적이 없고, 그 외의 수상작품집을 멀리한 지가 꽤 돼서 사실 이번에도 쿨하게 넘길 자신 있었지만 '동물원'과 엄청난 추천사들 덕분에 걸려들었다. 운이 좋다, 이 책은.('내'가 아니다)

 

아내가 있는 남편이 회사에서 구조조정 당한다. 집안에 틀어박히지만 여자와는 달리 할 일이 없다. 젊고, 돌도 씹을 나인데 할 일이 없다. 그러던 차, 이웃 아주머니가 소개해준 부업으로 봉투 붙이기, 인형 눈깔 붙이기, 동물원 인형탈 쓰기까지 온갖 알바로 연명한다. 인형 눈깔 붙이다가는 본드도 흡입해보고, 인형탈을 쓰고부터는 정말로 고릴라가 된다. 처음에 너무 적나라하게 멋없던 소설로 차츰 빠져들어갔다. 고릴라의 탈을 쓴 그는 점점 인간세상에 존재하는 고릴라가 된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 그런 고릴라. 능숙하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차츰 고릴라도 빈틈이 있다. 맞으면 아프고, 넘어지면 창피하고, 비웃음 당하면 부끄럽다. 잘 살고 싶고 잘 먹고 싶고 잘 자고 싶다.

 

사랑을 하고 싶고 이별은 벅차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그럴 것이다.

 

뭘 많이 한 것 같아도 정작 제일 많이 한 일은 샤워 뿐이다. 씻고 돌아서면 또 덥지만 죽을 걸 알면서도 안 살 수가 없는 것처럼 여름을 나고 있다. 하지만 올림픽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라고는 못하겠다.(더위와 상관이 없잖아)

 

하지만 <로맨스가 필요해 2012>가 있어서 좋다. 늘 자투리로 다운받아 듣던 음반이 발매되어 좋고, 여름날에도 여전히 뜨겁게 혹은 차갑게 살아있는 감수성이 좋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영화 <후궁>과 <방자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혈의 누>를 세트로 역감상했다. 오랜만의 사극세트랄까, 거실에 누워 듣기만 해도 알겠는 우리 영화를 섭렵하는 일은 신났다. 대충 봐서 감상을 쓸 수 없다.

 

 

 

 

 

 

 

 

 

 

아, 대신 이 엄청난.. 이들에 대한('소설'이 아니다) 이야기를 쓸 수도 있을까. 사실 그동안 각각 두 권짜리 소설 <울프 홀>과 <순수 박물관>을 읽느라 시간이 다갔다. 드라마가 줄줄이 결방이어서 밤시간을 잠 아니면 책 한 글자로 끝장냈다. 여름에는 잠이 별로 오지도 않는다. <흑산>은 겨울에 반쯤 읽었지만 여름에 읽는 것도 나름 운치 있다. 칼을 벼리듯 써내려간 날카로운 문장과 아픈 시대 그리고 냉혹하면서도 따뜻한 배경묘사가 띠지 말대로 진짜 축복처럼 벼락친다. 내가 그동안 '문장'에 메말라 있었나 보다. 이럴 땐 김훈 아니면 오정희. 또는 김승옥. 아아아, <무진기행>을 또 읽어야 할까. 이들의 소설을 읽으면 덥지가 않다. 나는 그걸 알고 있고 약발 잘 받게 참다참다 도저히 못참아서 써먹는 중이다. 시작이 노래 시리즈 첫 번째 주자 칼~

 

스물 세 살이었나, 네 살이었나 그때 노래 시리즈 한창 베스트셀러였을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으면서 혹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서 모두들 뒤에 꼭 이 말을 붙였다. 노래 시리즈 말고. 으하하. 그래서 이렇게 재밌고 숭고한 걸 지금껏 못 읽고 있었다. 우린 그때 베스트셀러는 '보통'사람 책이라 읽지 않았다. 지드나 헤세를 들고 철학수업에 몰래 들어가거나 쇼펜하우어나 비트겐슈타인을 과수업 맨 뒷자리에 앉아 책상에 머리 박고 읽을 때였다. 사실 대부분은 토론수업에 읽어가야 할 서로의 작품들을 카페에서 다운받아 출력하는데 온 시간을 다 보냈다고 봐야 맞지만. 그때 그들이 김훈 아니 노래 시리즈를 다 읽고 나서 그토록 거부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나는 안 읽고 거부한 1인. 이제는 본 걸 또 보지 않아서 너무 행복한 1인.

 

윤동주도, 정약전도, 이순신도 만나는 이런 여름이라니!

 

 

 

 

 

 

 

 

 

 

 

 

 

 

 

아무래도 음반 한 장에 데코레이션을 너무 많이 얹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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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8-02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더위 장난 아니네요. 제가 사는 대구도 더운 지역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매일 찾아오는 열대야의 고통을
견뎌내기가 힘들어요. 더워서 잠을 못 자요 ^^:; 시원한 맥주캔 마시면 잠은 잘 오는데 더워서 새벽에 잠깨기 마련이에요. 지금은 태풍 북상해서 그런지 바람이 불어서 시원하긴한데 그래도 대구의 무더위는 피차일반이네요. ㅠㅠ 게댜가 새벽에 올림픽 경기까지 본방사수하고나면 새벽 4시. 2박 3일 휴가 제외하면 제대로 잠도 못 자는 형편이에요. 불면으로 인해 생긴 잉여 시간은 그냥 독서로 때우고 있어요. ^^

아이리시스 2012-08-03 16:32   좋아요 0 | URL
대구는 밀양과 동급이잖아요. 우리나라 아닌 걸로 하겠어요. @.@
맥주캔은 더워서 아니고 화장실 땜에 깨는 거 아닙니까! 잠자려면 맥주가 최고죠!ㅎㅎ
그래도 저는 수박............( '')

그러면 시루스님에 비해 제가 좀 더 잘 자는 것 같아요. 저는 어제 완전 잘 잤어요. 곰 같아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8-02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어떻게 지내시나요? 내일도 36도라는 일기예보에 두렵기까지한 여름이네요ㅠㅠ 전 오늘까지 가열차게 놀았어요. 휘영청 밝은 여름날 밤 산 밑에서 바베큐 해 먹고 두런두런 여름밤 보내고 왔어요. 뭐니뭐니해도 그래도 집이 최고예요!! 남은 여름은 좀 편했음 좋겠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게시글 간격이 너무 길어지면 안 좋다는 말씀에 좀 찔리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ㅎㅎ 너무 더워요~~

아이리시스 2012-08-03 16:29   좋아요 0 | URL
바베큐...!@#$%^&* 저도 해먹고 싶어요! 두런두런 여름밤. 귀신얘기 하고 싶어요. 아님 브루마블.. 잘 놀고 오셔서 집이 최고라니, 뻥 아닙니까! (사실 넘 더우니까 일단 가기가 귀찮아요, 그게 어디든 가면 잘 놀텐데요..)

현맘님은 바쁘시고 저는 한가해서 제 간격은 현맘님 간격과 다릅니다. 게을러서 그런 겁니다!

비로그인 2012-08-0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라니, 선영아. 갑자기 그 책 제목이 생각나네요. 영화든 드라마든 사랑 이야기만 나오면 뭉클한 걸 보면 저도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는 건데, 몸과 마음이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어요. 그냥 아직 사랑에 대해서는 어린이인 듯한 ( '')... 그런 느낌이에요. 아이님은 요새 뒹굴거리며 지내시는군요. 맞아요, 잘 놀고 있으면 된 거에요 ㅎㅎ 저도 요새는 마음에 여유가 넘친답니다. 그래도 알 수 없는 불안은 여전하지만요.

ps. 치즈케익 떠먹는 아이님의 모습, 저랑 닮아있을 거 같아요. 느끼한데? ... 그러면서 계속 떠먹기!

이진 2012-08-03 12:3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너무 귀여워요. 저는 배부른데?... 그러면서 계속 먹어요. 친구들이 그렇대요. 제가 배부르다고 하면 아직 닭 한 마리는 더 먹겠구나, 하는 싸인이라고. ㅋㅋ

비로그인 2012-08-03 15:08   좋아요 0 | URL
^^ 배부른데? 그러면서 닭 한 마리 추가로 뚝딱. < 이게 더 귀여운데요? ㅎㅎ
그나저나 소이진님의 '소설'은 어떻게 된 겁니까 대체!! ㅠㅠ

아이리시스 2012-08-03 16:26   좋아요 0 | URL
제가 그 말을 하고 싶었구나 그랬어요. 수다쟁이님 댓글 보니까 그랬나 보네요. 아무리 쿨해지려고 해도 뭉클하다면 바라거나 원하거나 뭐 그런 것 같아요. 올 거예요, 사랑은. 수다쟁이님에게는 더 특별하게요. 저 요즘 완전 놀아요. 밖에서도 집에서도 완전 놀고, 잘 놀다보면 여름이 가겠지 생각해요. 알 수 없는 불안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요.. 토닥토닥..

치즈케익은 만 하루만에 제가 다 해치워버렸어요! 이제 남은 건 토스트와 엄마가 한 냄비 끓여주신 김치찌개.. 담번엔 모카로 사먹어야겠어요!

소이진님 남쪽나라로 왔어요? :) 닭 한 마리 추가요.
소설은 어떻게 된 겁니까 대체!! 222

꿈꾸는섬 2012-08-04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요새 어찌 지내시나 궁금했는데......무더위에도 끄덕없이 잘 지내고 계시는군요.^^
이 밤중에 치즈케잌이 갑자기 먹고 싶어졌어요.ㅋㅋ

아이리시스 2012-08-05 22:23   좋아요 0 | URL
꿈섬님 엄청 오랜만인 거 알아요? 한 번씩 오셔도 잠깐 오셨다 가시니까 엄청 오랜만 같아요.
끄떡없어요. 널부러져 있어요.

치즈케잌 원츄. 막 쟁여놔야 할까봐요.ㅋㅋ
 

 

 

 

지금부터 쓰려는 얘기의 주제는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그로부터다. 이 추리소설 한 권으로 안중에도 없던 포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지못해 한 편씩 읽어오던 포가 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흔히 책 속에 길(답)이 있다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책 속에는 모든 것이 있(을 것 같)지만 길은 없다. 그런 게 진짜로 있다면 책을 무기삼아 타당성을 일축하고 억지쓰는 이들이 많아질 거란 건 불보듯 뻔한 일이지.

 

책을 잘못 읽는 예에 대해 안철수 원장이 힐링캠프에서 얘기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얻을 건 그것 뿐이었다. 나는 그분이 연습장에 빽빽히 분 단위 스케줄을 적어놓고 제 시간에 실천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내의 이야기도 그렇고, 미국유학 때 세 식구가 매일 도서관에서 머리 맞대고 각자의 공부를 했다는 것도 알았다. 지난해 말인가 한창 꽂혀서 출연하신 모든 프로그램을 싸그리 봤는데 사실 같은 사람이 공식적으로 자기 인생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힐링캠프에서 한 얘기는 이미 알던 것과 별다를 게 없어 좀 실망했다. 나는 그분이 이룬 팩트보다 하고 계신 생각이 더 궁금했는데 예능이 그렇게 해주진 못했다. 정치얘기를 많이 할 거라고 생각한 건 내 바람일 뿐이었다.

 

길을 찾아낼 수 있는 지혜나 지도가 있을 뿐이다. 그 길은 내가 선택해서 시작하고 또 끝낸다. 독서가 지극히 개인적 행위이듯 소설도 대부분 그런데, 그 개인적인 것들이 어느 순간 모두의 것인듯 튀어오를 때가 있다. 개인보다 개인이 속한 사회, 사회를 받치고 있는 더 큰 세계, 그렇게 한 단계씩 늘려가다보면 어느 순간과 마주한다.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을 얼마 전에 읽었다. 이 페이퍼를 쓰는 중에는 [도둑맞은 편지]를 읽었다. <우울과 몽상>은 여러모로 좋은 책이다. 받침대로도 좋고 베개로도 좋고 심심풀이로 읽기에도 부담 없는데, 읽고나면 부담이 안긴다. 몇 장의 짧은 단편에도 삶의 철학이 들었다. 사건해결을 통찰로 행한다. 에드거 앨런 포는 소현세자나 사도세자만큼이나 많은 죽음에 대한 '설'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그는 늘 미쳐있었고, 정신착란 상태에서 숨을 거뒀다는 건데 <우아한 제국>은 이 가정으로부터 시작하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물론 이 사실은 배경도 아니고 해답도 아니고 그 일부도 아니며 당연히 스포일러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정신착란이 예술가나 살인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의외로 다르지 않고, 그것이 촉발되는 양상도 비슷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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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는 되도록이면 줄거리 설명을 아껴야 한다. 어쩔 때는 책정보를 읽는 것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단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이 책의 제목이 내용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배경은 스웨덴의 한 도서관과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 박물관이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두 국가에서 비슷한 모양새를 갖춘 사체가 발견된다. 누가 봐도 살인이고,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광경이다. 그리고 1500년대 베네치아의 한 수사와 이발사 그리고 사제에게로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발사는 머리카락을 깎는 사람이 아니라 칼잡이였다. 해부학자였고 의사였다. 그의 손끝에서 칼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은 사람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모든 것은 기록되었다.

 

외르켄 브레케는 전통과 문화와 시대를 거스른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지만 살인범이 누구인가 보다 왜 살인을 저질렀나가 중요한 내게는 괜찮았다. '고서(古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와 살인음모는 당연하게도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킨다. 그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대한 탄탄한 지식을 자기화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읽었기에 금서에는 손대지 말라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알만큼 알지만 에코의 것이 사회학적 음모(비극만 남기고 희극을 사라지게 하려는 자들의 음모)라면, <우아한 제국>은 있을 만한 역사 속 사건의 팩션에 불과하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속을 알기 위해 살인하거나 공동묘지의 시체를 훔치려 땅을 파는 일련의 과정들이나 양피지로 만들던 책의 겉가죽을 사람가죽으로 만들어 글을 새긴다는 설정은 있을 수도 있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다. 암흑의 중세가 아무리 살인과 음모의 시기였다고 해도 두눈으로 확인 불가능한 이상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중세인들이 골몰했던 해부학, 당시 원형 해부극장이 만들어질 정도로 암암리에 성행했던 인간에 대한 해부를 인간 스스로 몸에 대한 자각과 궁금증을 품고 시작했던 첫 의학적 기록으로 본다면 충분히 추적해봄직한 일이 된다. 그래도 에코만큼 많은 문학적 장치와 인문학적 사고를 곳곳에 배치하지는 못했으므로 단지 추리파 소설로 분류되겠지만 말이다. 단지 정신착란, 대상에 대한 지독한 갈망과 호기심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까. 옛책의 가치를 역사와 돈으로나 찾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해당사항이 없는 듯하지만 누군가는 살인을 해서라도 얻고 싶은 혹은 재현하고 싶은 열망이 있는 것이다. 부정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생애는 한 줄로 말해질 수 없다. 여름밤 지구 반대편의 나라 어느 방에서 흥미진진하게 읽기에 좋았다. 깊지는 않았지만 꽤 탄탄했다. 시리고 차가운 느낌의 오싹한 한기의 느낌은 없지만 이 소설은 분명히 스칸디나비아 지방으로부터 왔다. 여기는 추리소설 매니아로 읽을 때마다 제목과 작가, 범인과 범인이 등장하는 페이지를 목록으로 작성하는 어떤 여자가 나온다. 여기는 캐릭터가 많다. 도서관과 박물관 직원들 그리고 경찰들. 모두가 뚜렷한 성향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는 건 아니지만 범인을 찾기로 맘만 먹으면 압축하기가 쉽다. '왜' 살인을 했는가는 '누가' 살인을 했거나 '어떻게' 살인을 했는가 보다는 중요한데(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우아한 제국>은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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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된 소설 몇 권을 알지만 읽기가 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매번 화자와 청자가 달라지고, 시기도 구별해야 하며, 무엇보다 나는 받는 이가 아니기 때문에 상상력 빈곤을 고스란히 체험하곤 했다. 작가는 영국여행 중 알게된, 채널제도의 일환인 건지 섬을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소생시킨다. 건지 아일랜드라면 이 소설을 만나기 전에 알던 바로는 위고가 망명하여 살았다던 곳 아닌가!(위고는 카뮈 다음으로 좋아하는 몇 안되는 작가다) 루이 나폴레옹 정권을 비판하다 반정부 인사로 찍혀 망명한 그는 이곳에서 <레 미제라블>과 <웃는 남자>를 집필했고, 이후 프랑스로 돌아가서도 녹록치 않자 다시 건지로 가서 말년작 <93년>을 집필한다. 건지 섬은 제2차 세계대전 중 5년간 독일이 점령했었고, 한 번도 자국영토를 뺏겨본 적 없던 영국으로서는 아픈 손가락일 터, 문학적으로 승격되는 이 섬의 고립과 외로움을 편지라는 매개체로 읽는 순간 그곳에 대한 애틋함이 살아난다. 건지 섬에 있는 한 남자와 런던에 사는 한 여자의 편지가 서로에게 닿게 된 건 책 때문이다. 여자는 작가고, 남자는 그곳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문학회에 참여중이다. 육지 소식이 잘 가닿지 않는 섬에 있는 남자(도시)는 우연히 여자(줄리엣)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 선집>을 갖게 되어 그녀에게 편지를 띄운다. 그들을 오가는 편지 속에서 매개체가 된 책 뿐 아니라 뭍과 육지의 소식이 서로 고루 섞인다.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예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줄리엣과 도시의 편지를 시작으로 대륙과 건지 섬 사이, 줄리엣의 친구 소피의 오빠이자 편집장 시드니, 줄리엣과 소피의 연인들, 하지만 전쟁을 겪고난 이들의 멀쩡한 삶이 주제인 만큼, 건지 섬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아 자신들을 지켰는지, 돼지 파티가 북클럽으로 변모한 이유가 뭐였는지, 북클럽에 대한 사연을 줄리엣이 쓰는 칼럼에 싣기로 하면서 이야기 보따리가 풀린다. 나는 정적인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추천사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저 그랬다. 전쟁의 절박함을 따뜻하게 회상하고 새롭게 삶을 일궈보려 한 진정성 어린 소설이지만 보통 이상의 감동이 오지는 않았는데, 얼마 전 읽었던 <안네의 일기>나 <굿바이, 안네>도 같았다. 절박한 상황의 담담한 서술에는 나도 한 발 빼게 돼서 그런가. 다양한 인물이 자신들의 사연을 들려주는 점은 귀기울일 만하지만 역시 채널제도를 겪은 역사적 순간을 건지 섬의 누구보다 위고로 기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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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방영중인 주말 사극 [무신]의 주인공이 무신정권에서 막강한 힘과 재산을 가진 두 부자(父子) 최충헌, 최우가 아니라 최충헌가의 노예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최우의 눈에 든 '김준'이듯, 2009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울프 홀>의 주인공은 헨리 8세가 아니라 16세기 튜더 왕조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힘을 얻기 위해 온갖 음모에 휘말리며 목숨을 걸었던 '토머스 크롬웰'이다. 이 원칙은 견고하다. 왕보다는 왕의 주변부를 주인공으로 삼아야 더 많은 이야기를 불러올 수 있지 않겠는가. 역사소설은 대부분 이 공식을 답습하지만 헨리 8세를 소재로 한 수많은 텍스트가 존재하는 지금은 확신할 수가 없다. 대부분 앤 불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태반이다. 권력을 얻기 위해 왕을 유혹하는 여인이 그녀 뿐만은 아니었건만, 유난히 잦은 영화 탄생은 튜더 왕조 전체가 아니라 한 여인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권모술수를 얕게 구경하게 하는 데서 그친다. 유명한 영화 <천일의 앤>을 비롯 <천일의 스캔들>, <엘리자베스>, <골든 에이지>는 모두 1485년부터 1603년 3대 다섯 명에 걸친 118년의 튜더 왕조배경으로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헨리 8세와 두 번째 부인 앤 불린, 그들의 딸 엘리자베스 1세에 초점이 가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으로부터 간통과 근친상간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앤 불린은 단 3여년을 왕가에 있었다. 전 왕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해 앤 불린과 혼인했는데 역시 아들을 얻지 못하자 헨리는 또다시 왕비를 버린다.

 

어머니가 보낸 천일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엘리자베스는 처녀여왕으로 생을 다해, 처형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피의 메리'할 때 그 메리 아님. 그 메리의 본명은 메리 튜더로 엘리자베스와는 이복자매)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동 왕이 되는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로는 제임스 6세)가 즉위할 때까지 다사다난한 업적을 남긴다. 후사가 없었던 그녀와는 전혀 상관 없지만 엘리자베스 2세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현재 53개국 영국연방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여왕이다. 역사를 단편적 사건으로 훑어보면, 잉글랜드 왕권을 놓고 랭커스터가(家)와 요크가(家)가 싸웠던 장미전쟁이 튜더왕조 시작의 배경이다. 장미전쟁이라 부르는 이유는 두 가문의 상징이 장미였기 때문이다. 색은 붉은 것, 흰 것으로 각각 달랐지만. 이 전쟁은 자그마치 30년이나 진행됐고, 랭커스터계의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즉위하며 마침내 튜더 왕조의 시대를 연다.

 

주드 로가 영국의 섹시가이라면, 비슷한 눈빛을 지닌 아일랜드 출신의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역시 내눈에는 주드 로만큼 섹시하다. 키는 작지만..( '') 배우에게 기대하는 키의 기준치가 어느새 180이 되어버린 이런 눈높이ㅜㅜ 그가 절대군주 헨리 8세로 분한 시리즈 [튜더스]는 앤 불린과의 로맨스 뿐 아니라 그녀를 비롯한 여섯 부인의 이야기를 그린다. 물론 왕가의 음모와 튜더 왕조의 흥망사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치 스릴러가 아니라 로맨틱 역사물이기 때문에 앞서 말한 많은 영화와 비슷하다. 단숨에 끝내기에는 아쉬운 긴긴 역사 속으로 데려가는 몰입감과 시대물 로맨스로는 확실히 기대하게 만들지만. 반면, <울프 홀>은 헨리 8세에게 다가가는 '토머스 크롬웰'이 주인공이므로 좀 다를 거라는 기대를 가졌다. 주변부의 시선으로 권력을 말하는 것. 원래 시대와 역사, 사건의 소용돌이 안에 있는 사람은 제대로 현실을 직시할 수 없는 법이지만 역사소설에 있어 아무도 객관적 시선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는 것 또한 한계인 동시에 장점일 수도 있다.

 

 

 

 

 

 

 

 

 

 

 

 

 

 

 

 

우려먹어도 너무 우려 먹었다는 느낌을 숨길 수 없을 정도의 대형군단이다. 헨리 8세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이어지는 영국 정치사가 더 재밌을 지도 모른다. 왕조의 자리다툼은 늘 권력욕 아니면 지위욕, 치정에 얽힌 것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남편없이 '나는 조국과 결혼했다'던 엘리자베스 1세의 결단은 얼마나 훌륭하면서도 덧없는가. 자기 시대는 곧 가버리고 늙고 병든 나를 대신할 자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권력과 지위에 목매는 이들이 간과하는 것이다. 후손 하나없이 먼 사촌조카뻘에게 왕위를 물려준 그녀의 슬픔에 비하면 평범한 행복이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는지 감히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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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은 1931년 9월 18일부터 이듬해 2월 18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이 결과로 만주 땅에는 일본이 지배하는 괴뢰정부 '만주국'이 들어선다. 중일전쟁은 1937년부터 이듬해까지 계속된다. 이유가 어쨌든 모두 일본국의 침략으로 벌어진 전쟁이다.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태평양 전쟁은 1941년부터 5년간,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로, 역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되었다. 나중에는 싹싹 빌었지만, 전쟁 중 모든 문서와 장부를 스스로 소각시킴으로서 본인들의 도발과 패배를 정당화하려 했다. 이 나라 또라이 같다.(나름 순화한 표현이다) 

 

김약연은 북간도 지역의 한인사회 지도자였고, 윤동주는 이 혼란한 틈에 북간도에서 태어난다.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활발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피신 겸 개척된 북간도가 만주 땅으로 편입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곳은 지금 연변이라 불리는 조선족 자치주였다.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이 유명한 곳. 이후 북간도의 수난은 만만찮다. 근현대사는 대부분 눈물과 분노로 점철되었지만 특히 근대사(구한말-일제시대)가 심하다. 윤동주가 일본으로 유학가기로 마음 먹은 때(1941년 말)는 민족말살통치가 이뤄지던 시기로, 유학하려면 반드시 창씨개명을 해야했다. 이를 두고 오늘날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죽을 때까지 정식 시인이 아니었던 그가 사후 출판된 시집으로 민족시인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다. 유학 후(얼마나 큰 꿈을 품었겠는가) 1943년 귀국길에 오를 무렵 민족항일운동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붙잡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다. 여기까지는 팩트다. 그의 삶은 짧았고, 그래서 더 정리가 쉬워진 건 아니지만 더 큰 의미를 갖는 건 확실하다. 1943년 7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중이었으니 1945년 8월즈음 출소했다면 그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2월 16일. 그는 6개월을 참지 못하고 숨을 놓았다. 형무소 의무실에서 주사한 의문의 약 때문에 생체실험의 희생자였다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 이는 패망한 일본이 전쟁 후 모든 문서와 서류를 소각함으로서 말살하려 했기에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태평양 전쟁 당시(1945년) 구주지방에 불시착한 미국 B29 전투기 조종사 8명을 구주대학에서 생체해부하고 살해한 사건이 조서로 보고되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일본이 전쟁 중 자국 병사들의 혈액을 보충하기 위해 혈장 대용 생리 식염수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미국인은 물론 윤동주를 비롯한 건강한 수감자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았음이 드러났다. 더불어 이들은 조종사 8명에게 살아있는 상태에서 신장과 폐, 간 같은 장기적출을 시도한 한편, 나중에는 인육파티까지 했다고 보고서는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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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벌써 이만큼이나 되는 아프리카 관련서들을 읽었고, 내용이 살상, 학살, 전쟁, 분쟁과 동떨어지지 않아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할 즈음 또다시 시리아 내전이 국제뉴스를 타고 들려왔다.

 

<제노사이드>는 아프리카 어느 소수민족의 대를 끊어 멸종시키려는 백악관의 음모로부터 시작된다. 이 소설이 너무 정치적으로 보인 이유는 '진행중'의 위험성을 간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을 미국 뿐 아닌 다양한 국제사회가 시도하고 있고, 그들의 목적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자기 배 불리기라는 점은 명백하다. 노예제도와 식민화 때문에 발전이 더뎠다는 검은 대륙 뒤에는 언제나 살상무기를 가지고 고도의 지력으로 협박에 협박을 거듭하는 선진국(미국)의 음모와 지략이 있고, 이에 맞서는 덜 문명화 된 이들은 장렬하게 싸워보지도 못한 채 전사한다. 아무 연관 없는 마을 전역이 불타 여자와 아이마저 학살 당하고, 수류탄이 터지고 가해자, 피해자랄 것도 없이 한꺼번에 죽어간다.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어느 국가의 수장이나 결정권자다. 정작 싸우는 이들에게는 본인 목숨에 대한 결정권이 없으며, 만약 살아 돌아간다면 알량한 돈 몇 푼(윤리적으로 생명 앞에 돈은 늘 알량하다)으로 보상 받는다. 이 소설을 읽는 일은 사실상 아프리카 콩고, 백악관, 일본까지 시공간이 다른 세 곳의 주인공들이 얽힌 인프라를 따라가야 하는 고도의 전략전이다. 콩고 탈출을 시도하는 내전상황을 생생히 그리고, 용병과 초인류를 등장시켜 신과 인간이 만난 듯한 숭고한 긴장을 주고, 의자에 앉아 손만 까딱하면 지구 반대편 평화로운 누군가의 삶을 통째 파괴하고 목숨도 끊을 수 있는 백악관 테이블의 권력에 분노하게 하며, 일본의 철거 아파트 안에 갇혀 아버지 대신 현 인류를 구할 신약 개발에 몰두하는 청년을 응원하게 한다. 끊기도 잘한다. 중요한 순간에 화면전환. 영화가 따로없다. 

 

흡인력 굉장하고 흠 잡을 데 없이 잘 씌어진 근래 보긴 드문 작품인데 문제는 평소 아프리카 역사와 내전에 관심이 많았던 나머지,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보고 듣고 읽어 최대한으로 받아야 했던 충격의 임팩트가 현저히 낮아졌다는 사실이다. 온갖 지식을 짬뽕하면 쓸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순간적으로 날 감쌌다. '살기 위해' 신의 저항군에 세뇌당한 소년병의 살육에 영화 <머신 건 프리쳐>가 생각났고, ICC에 제소되어 국제악질범 1위로 인터폴에 수배되어 있다던 그 놈도 누군지 알겠고, 왜 소년병이어야 하는지, 얼마나 더 끔찍하게 여자와 아이들을 죽여나갔는지도 알았다. 그밖에 수많은 국제법 조항들.. 주로 명분에만 머무는 유엔평화유지군 활동.. 거기다 화학융합까지 화학에서 아프리카사, 네안데르탈인에서 초인류까지 건드리고 지나가는 소재의 스펙트럼에 짓눌리며 생각했다. 다 아는 것들인데 이 소설을 쓴 건 내가 아니야. orz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던 건 E.H.카였다. 미래가 아니다. 우린 역사가 단면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일과 저 일 사이에 어떤 구분이 없다. 벽도 없다. 역사는 좌표 속에 존재한다. 카뮈가 살았던 프랑스와 내가 놀러간 프랑스는 완전히 다른 프랑스다. 시간은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이름 앞에 변하지 않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는 씌어지고 있다는 것. 방에 앉아 글을 쓰는 나는 물론, 잠을 자는 이에게도 흔적이 남는다는 것. 역사는 일방향성을 가진 채 시간적으로 앞으로만 향한다는 것. 누구도 시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것이다. 타임슬립이 유행한다고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조선시대로 가거나 미래로 가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소 재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러면 역사의 공간을 넓히면 된다. 시간이 수평이라면 공간은 수직. 내 발걸음 닿는 이곳 뿐 아니라 저곳이나 그곳에도 관심을 가져보자. 방법은 여행 아니면 독서. 직접 발품을 팔거나 누군가 발품 팔아 내놓은 경험담을 책이나 영화로 보고 듣거나. 그러면 그곳에 없었지만 생생하게 다가오는 역사의 한 순간을 만날 것이다.

 

지금 누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는 인생 전체에서 역사적 사건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그게 바로 역사의 묘미.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역사에 기록될 일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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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역사다
    from 너의 의미 2013-06-27 07:02 
    파리에서 루브르 보다 오르세가 사실상 더 인기있는 것처럼 런던에서 대영 박물관보다 내셔널 갤러리의 작품들이 더 익숙한 것은 상대적으로 친숙한 작가의 작품들이 많고 시대적으로도 가까워서다. 내셔널 갤러리와 트라팔가 광장의 해질녘 풍경과 비에 젖은 연하늘빛 세상을 좋아했던 만큼 오래 그리웠지만 몸통을 나란히 붙이고 있는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는 들어가보지 않았다. 포트레이트만 걸려있다는 게 그다지 발길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업적 모르는 인물의 얼굴만
 
 
2012-07-26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7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8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02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로하 2012-08-0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렇게 알찬 글을 올려주시다니~ 전 나름 추리소설 매니아인데, <우아한 제국>, <울프홀>은 처음 보네요. 주로 고전적인 것이나 수사물에 가까운 것만 보다보니 추리소설도 요렇게 다양한 결이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았네요. 이 참에 한번 훑어봐야겠어요!

아이리시스 2012-08-02 19:42   좋아요 0 | URL
알로하님 오랜만이에요. <우아한 제국>이 평은 별론데 스웨덴에서 인기가 많았대요. 그런 소식을 저는 잘 모르지만.. 그래요! 전에 우리 <스트로베리 나이트> SP 공감하고 있었잖아요. 이제 그거 끝난지도 어언......... 시간이 총알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