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도 사람도 다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또렷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것들이 있다. 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 아빠와 아빠의 삶에 대해 떠올리지는 않았다. 이 세상 부모들은 다 가여운 존재니까, 그래서 부모되기를 두려워한 이십대를 보냈지만 그 지독한 환멸은 사실 아이에 대한 나의 모자람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아이를 가진 주변인들의 뻔뻔한 자기과시로부터 올 때가 많았다. 물론, 아빠의 청춘에도 눈물 없이는 못듣는 사연이 제법 되지만, 그걸 글로 옮기지는 않으련다. 경험보다는 생각을 담고 싶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따라잡지 못하리라는 희미한 체념의지를 느낀다. '영원한 청년작가'의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이번 소설도 그 서정성을 한껏 드러낸다. 소금이 상처에 닿을 때의 쓰라림. 땀흘리며 일하는 늙은 등을 사랑한다. 정확히 말하면, 땀자국으로 시큼해진 우중충한 색 티셔츠와 쪼글쪼글한 손바닥과 시꺼매진 손톱이 말하는 세월, 까칠까칠 촉감을 나는 아버지라 여긴다. 나쁘게 말하면 세상을 아름답게 혹은 서정적으로 보려는 작가의 취향 혹은 의도이겠지만, 그래서 그를 현실적이거나 실체적이지 못하고 감성 안에 머무는 작가라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끔 읽는 그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그 감정과잉의 애절함을 좋아한다.  

 

스무살 생일파티를 앞두고 디지털카메라를 사오기로 한 그가 언덕배기에서 되돌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토록 오랫동안 찾아다녀야 할 줄은 몰랐다. 첫사랑, 청춘, 애착, 취미, 호오,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르는데 무엇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찾아서 뭘 어쩔 것인가. 왜 찾아야 할까. 찾아나서긴 했지만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라지고서야 비로소 통장잔고와 빈자리, 잊혀진 이름 세 글자로 뚜렷하게 남겨진 사람. 제 청춘과 시간을 잔뜩 바치고야 우리를 얻었던 사람. 유일하게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었을 사람. 평생 그래야 할 사람. 그래야 했던 사람. 그래서 당연했던 사람. 아무 것도 아니던 사람. 알려고도 하지 않던 사람. 자식을 위해 악착같이 세상의 치사함과 더러움을 참아낸 사람. 이름만으로도 심장 한 조각이 뭉텅 잘려나간 듯 그리움이 차오르게 하는 사람.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그땐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요즘은 알아. 그 양반이 당신의 꿈을 버리고 치사해져버렸기 때문에, 그나마 내가 배우고 굶지 않았다는 거.

 

알까. 숨바꼭질처럼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숨겨버린 그로 인해 세상을 배웠다는 걸. 스무살 어린 딸이 서른의 어엿한 여자로 자랄 때까지 아버지는 무엇을 해줘야 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아빠는 프린터 잉크를 갈아주기 위해 프린터를 들고 동네 문구점으로, 진통제를 얻기 위해 약국으로, 시골집에서는 갑자기 필요해진 생리대 패드를 사주기 위해 읍내로 뛰어가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다른 동네에 있는 학교까지 매일 등교를 시켜주었고, <인셉션>을 함께 보러간 남포동 극장에서 덥다며 하드를 함께 사먹고, 정작 상영중에는 뭔 영화가 저래, 라면서 계속 졸던 사람이었다. 우리 아빠가 특별히 살갑거나 따뜻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아빠들 속에는 다 저런 마음이 있는 거였다. 실패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릴 만들던 순간부터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 덜 여문 나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을 십 년간 찾아헤매는 이야기, <소금>은 자리를 뺏음으로서 비로소 이 시대, 이 가정, 이 관계의 아버지를 다시 써내려간다. 모든 부모들의 진혼곡. 그리고 소금. 바람과 햇빛의 밀도에 따라 그 맛과 형태를 달리하는 놀라운, 어렵게 얻어 더 소중한 한줌이다. 파도와 햇살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내고도 고유의 성질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흰 가루. 자식처럼 공들여 키워내지 않으면 안되는 예민한 물질. 소금이 만들어지는 자연과 과학의 놀라운 조화와 그가 소금이고자 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금이 음식에 그런 것처럼, 아버지에게 자식이 그렇다. 쓰게도, 달게도, 맵게도, 짜게도 하는 것. 그래서 애물단지가 되어버리는 것.

 

우리나라 소금, 천일염은 향과 미네랄이 실종된 중국산과는 한없이 다른 건강염 그 자체라는 것, 그런 국내산 대신 강제적으로 중국산을 구입할 수밖에 없는 슬픈 국제관계의 실상도 덤으로 알게 된다. (예전부터 그랬다고하니, 이게 아직 협상단계인 FTA의 실상일리는 없고 대체 뭣때문이더라, 책을 좀 오래전에 속성으로 읽어서-_-)

 

아버지는 수많은 해석의 길을 거느린 놀라운 텍스트였다.

 

감히 부르지 못하는 선.명.우. 그의 이름이다. 딸 셋에 억척스런 아내. 부잣집 딸이던 아내의 끈질긴 구애에 진짜 사랑하는 세희누나를 포기하고 체념처럼 결혼한 비운의 남자. 생산과 자본이라는 적 앞에 무력해진 아버지가 어째서 염전으로 걸어들어가 장애가족의 가장이 되었는지, 왜 끝내 돌아오지 않는지를 추적한다. 졸업식에 가기 위해 식사를 건너뛰고 소금을 길어올리다 쓰러져 눈감은 어떤 남자의 마지막을 가슴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하려면 어떤 재주가 더 필요할까. 

 

그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영원히 소유하기 위한 방법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어느 시대에나 자식은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의 또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삶 하나도 평온하지 않다. 큰딸 정애에게 장애를 가진 아내와 나머지 자식들을 떠넘기듯 가버린 아버지는 방관자인 동시에 실패자다. 남자가 실패했으므로 여자 역시 행운을 비켜간다. 그런 시대였다. 부조리에 대한 순응이 온 공기를 휘감은 뿌연 시대, 마지막 남은 선연한 광기가 비운의 주인공들을 타고 부유한다. 아버지가 가정을 내친데서 시작된 폭력은 한 가정과 개개인의 존엄을 연쇄적으로 망가뜨리며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철저히 유린한다. 울타리를 잃어버린 가족이 세상의 위협에 대항하지 못한 채 적을 늘려가다 쓰러진다. 세계는 이 가족들을 일으켜세우지 않는다. 순애는 동네 남자에게 몹쓸 일을 당하고 죽었다. 같은 일을 당했지만 순애는 죽었고 정애는 살았다. 살아있음과 죽음 사이에 일련의 인과관계가 없다. 묘자와 정애는 여자 힘으로 먹고사는 허망함, 치사함, 생활의 억척스러움을 유일하게 나누는 존재들이다. 무지의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가난한 자들의 운명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끝내고 싶은 이들의 간절한 외침이 새마을운동과 겹쳐지며 지역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춰낸다. 목표도 없고 애착도 없이 그저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관조도 낙관도 아닌 눈으로 비추는 작가의 문체는 해학적이면서도 뭉클한 상황을 통제하는데 효과적이다. 존재한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추궁당하는 이들, 늘 희생자와 가해자가 바뀌지 않는 세상을 물색하는데서 오는 비극이 썩 편하지는 않다. 그조차 명랑과 쾌활로 통과하려는 의지가 눈물겨워졌다. 산다는 것은 반쯤 미치거나 미친 노래를 흥얼거려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가난이 거듭 쌓이면 희망과 미래가 잊힌다. 삼켜지지 않는 울분이 구천을 떠돌며 미친 이들의 노래에 섞이거나 빗물을 가장한 눈물에도 섞였다.

 

어디로 가는지, 왜 왔는지 모르는 자들은 마지막 투혼으로 노래한다. 미치지도 못하는 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노래할 수도 없는 자들은 하루하루 말라가며 시간을 통과한다. 대다수가 성지를 찾아나섰지만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런 세상을 통곡하거나 원망했다.

 

 

*

물국수를 좋아하시는 아빠는 국수(고구마나 감자 아니고?)가 주식이라면 좋겠다고 하신 적도 있다. 국수 삶으면 막 맨국수에 김치 올려먹으면 맛있다고 시범 보여주시고 그랬는데, 라면이 그렇듯이 젓가락질 덜 배운 나는 국수에 김치를 올려 한입에 먹을 자신이 없;; 더군다나 후루룩 쩝쩝인데, 없어보여ㅠㅠ 그리고 캠핑, 태국관광 갔다오시고는 늙은이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기념품 가게에서 물건 사라고 강요당하는 거 말고 인도나 베트남처럼 못사는(응?) 나라가서 직접 느끼고 싶다고 하셨다. 아빠ㅠㅠ 우리는 언어도 안되고, 특히 아빠는 길치잖아요ㅠㅠ 

 

참, 스타렉스 짐칸을 침대로 개조해 밤낚시를 다니고 싶다고 하셨는데, 왜 스타렉스냐면 캠핑카는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으니까. (아빠 이제 스타렉스 캠핑카 나왔는데요ㅠㅠ 낚시 몇 번 다니기에는 너무 비싸죠, 붕어를 사드시는 게 낫겠어ㅠㅠ) 그리고 바다보다는 계곡물 흐르는, 우리 외갓집처럼 계곡이 흐르는 산골짜기 방갈로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하셨고, 아빠만 따르는 비글 닮았지만 비글은 아닌 짱이를 엄청 예뻐하신다. 아빠 닮아 생라면을 아작아작 씹어먹는 귀여운 그 짱이 예전에 내가 만만한지 폴짝 뛰어오르기에 뒤로 넘어가면서 기함할 뻔했던 내가 아빠 안보실 때 몇 대 때려줬다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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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5-3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 아이리님.... 너무 오랜만이죠? ^^

<남포동>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쫄면을 생각해내는 것은 무슨 심리인지...
남포동과 쫄면은 정말 관계가 없는데 말이죠.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물국수도 아니구. ㅋ

아버님이 참 매력적이시네요. 울 아빠는 요즘 상추 농사 짓느라고 정신 없으심... ^^

아이리시스 2013-06-04 16:17   좋아요 0 | URL
남포동에서 쫄면을 드셨어요? 근처에 백화점이 하나 생겼지만 요즘 그쪽으로 상권이 다 죽어버려서 아쉬운 게 많아요. 저도 안간지가 오래됐는데, 부모님은 아직 그쪽을 더 편해하시기도 하는 것 같아요. 자갈치에서 회 한접시 먹고 그렇게 시내나들이 하는게요.

많이 바쁘셨구나. 보고싶었다는 말도 못하게 엄청엄청 오랜만인 거 알아요? 저희 아빠는 열무를 그렇게 심으세요..하하. 거긴 풍경은 안그런데 희한한 청정지역이라 뱀이 마당에도 출몰해요. 저희집 짱이가 짖길래 나가보니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고 있었다고 했어요. 자연체험학습을 마당에서 할 수 있어요. 큭큭.

프레이야 2013-06-01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짠한마음으로 읽었네요. 자식은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의 또다른 이름! 이 글귀! 내일은 늙으신 아버지가 바람 쐬러 자주 가시는 양산천변으로 김밥 사서 동행할까 해요. 고마워요.^^

아이리시스 2013-06-04 16:1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어릴 때 내원사 통도사 엄청 다닌 부녀 여기 추가요! 정말 많이 갔었는데 오히려 자가용이 없던 아주 어린시절에 부모님이 앞뒤 배낭 매시고 동생하고 저 하나씩 챙겨서 대중교통 타고 걸어서 그렇게요. 예전에는 거기 취사,텐트가 다 가능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요즘은 환경이 워낙에..

벌써 주말 지났으니까 좋은 시간 되신 것 맞죠? ^^

2013-06-03 0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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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6: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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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2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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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2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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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2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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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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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2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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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6 0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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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6 1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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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9 04: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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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7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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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9 04: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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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1 08: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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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4 16: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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