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에서 올해 봄까지 이 불온해 보이는 소설들을 사랑했었다. 꿈은 자본주의 사회의 훌륭한 부품인데, 꿈이 곧 혁명으로 치부되는 사회라니. 나는 사랑과 혁명 사이를, 삶과 죽음 사이를 유랑하다 흔들리던 추가 멈춘 듯 갑자기 정지했다. 계절이 두 번 지났다. 어느새 어떤 계절이 가장 좋으냐는 물음에 명확히 답을 할 수 없는 애매한 나이가 되었다. 나이 탓이다. 봄이면 봄이, 여름이면 여름이, 가을이면 가을이, 겨울이면 겨울이 좋은 건 모든 계절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계절마다 추억할거리가 적지 않은, 적지도 많지도 않은 다소 오만한 나이 탓이다. 이미 많은 가능성을 잃었지만 또 수 개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모호함에 갈팡질팡하는 때. 과거에 심취한 책등을 쓸어내리면 최초의 계절에 내려앉은 의지가 만져진다. 꿈으로 써내려간 현실은 절망과 의지의 경계를 넘나든다. 더없이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로 그려졌지만 현실의 황홀을 말하지는 못한다. 어느 날 비로소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그들은 털어놓을 것이다. 고백은 가닿지 않고 시간은 정처없이 흘러간다. 미처 꺼내지도 못한 마음은 실패한다. 다시는 그날이 오지 않는다. 한 번 뿐이고 각자 다르다.


그럼에도 시대와 제도의 틀에서 결코 벗어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나라는 사랑과 혁명을 동의어로 여긴다. 사랑은 조용히 혁명하고, 진실은 추억에 갇혀 경련한다. 아무도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사실에 다가갈수록 진실을 알게 될수록 더욱 선명하고 견고해지는 붉은 덩어리. 성애는 끈적대지만 애착은 역동적이다. 탐함의 미학 앞에 부드럽게 녹아드는 환상적 리얼리즘. 감출 것 없는 비밀들 틈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서러운 욕망도 있다. [물처럼 단단하게]의 두 주인공은 경계, 가치, 금기를 뛰어넘어 몸을 섞는다. 시도때도 없이 어떤 환영 속에서 뒤엉키는 몸과 몸, 영혼과 영혼이 애닳토록 강렬하고 숨가쁘게. 운명에 지배된 자들의 외침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쿠코츠키의 경우]를 혁명의 축소판, 가족이라는 이름의 진혼곡으로 읽는다. 억압과 불통이 소비에트 체제 하의 쿠코츠키 가족에게 미친 영향과 소박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가치를 탄생과 소멸, 세대교체와 연대책임의 뜨거움으로 그려내고 있다.





 














[열세 걸음]에서 국가는 절대적이다. 국가가 가난과 존엄을 해결하지 못하자 좀비같은 인민들이 새장 안에서 목숨을 다한다. 교사 팡푸구이는 턱도 없이 적은 봉급과 시도때도 없는 야근에 의한 피로누적으로 교단에서 쓰러진다. 팡푸구이의 불행은 정부가 지배를 견고히 할 재도약의 기회로 이용된다. 매일 밤 옆집에서 들려오는 아내 투샤오잉의 절규는 기절했다 깨어났을 뿐인 팡푸구이를 진짜 죽은 사람으로 내몬다. 살기 위해 죽음, 그 역설의 아이러니. 산 자를 죽이고 죽은 자를 살리는 부정(不正). 욕망은 더욱 강해진다. 미친 욕망이 비열할수록, 고독이 짙을수록 문장은 황홀하고 매혹적이다. 


미덕과 악덕, 아름다움과 추악함의 경계를 뒤흔드는 모호함. 세련된 성적 환희로 표현된 처절함. 영웅을 원하는 사회의 대참사.



산아제한정책으로 인한 폐해는 혐오스럽다못해 부당하고 허황하다. 원제 蛙, [개구리]는 실제 산부인과 의사였던 고모를 모델로 1971년부터 실시해온 산아제한정책의 실상과 울분을 1인칭 화자의 시선으로 해부하는 작품이다. 개구리는 강한 생식력의 상징으로, 모옌의 고향인 중국 가오미 둥베이 향의 토템이라고 한다. 인구수와 경제력의 극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수술대 위에서 치욕과 울분을 견디며 죽어간 여자들과 빛을 보지 못한 채 색종이 잘리듯 잘려나간 티끌만한 생명. 침묵할 수 없던 소설가는 이 희생과 폭력의 시대를 편지글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생명과 목숨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시계(視界)로 삼는다. 





지상                  

                 

       -황학주


여기는 이상하다 이상하게

한 사람씩 온다

다시 올 일 있을까 싶다

나란히 신발 벗을 때는

모르지만

이상하다 이상하게

한 사람씩 나간다

모텔 같다

여기는 물감냄새가 난다는 게 문제지

사랑만 필요했던 

연인들이

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

시간의 종업원이 똑똑똑 노크를 하거나

전화벨을 울려주기까지 하는 곳

슬픈 것은 사랑을 보는 모텔 주인의 생각이며

거기서 나온 인테리어 솜씨일 뿐

이상하고 또 이상해도

여기서 서화를 그릴 수밖에 없다

어느 날 나는 가고

당신은 오는 것을 잊는다 해도





이 쓸쓸한 기운. 못미더운 계절. 스며드는 불안. 잔잔한 고독. 무서움과 두려움. 형체없는 모든 것이 미세하게 감지된다. 단연 무채색의 소설. 모든 것들에 심드렁해진 한 사람을 전율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누구인가. 한시가 아깝던 파리 유학시절에조차 허름한 아파트에서 그녀와 나누던 사랑 외에는 그 무엇도 그의 심연에 파문을 던지지 못한다. 이웃집 노파의 숨겨진 비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서 비로소 중심을 세우고 다시 붓을 들 수 있게 된 그에게서 돌림하듯 특징없는 마을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듣는 시간.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는 진짜 욕망을 본다. 별이 붉고 달이 울었다. 모든 게 그의 환상에 불과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빈방을 떠올리면 한적한 터 금방 허물어질 듯한 집 한 칸이 생각난다. 안락하고 따뜻해서 기어이 매몰되고야 말 그런 집. 마을로부터 30분 떨어진 풍성한 초록의 숲 속에서 세상과 등을 맞댄 채 개울을 틔우고 물고기와 박을 기르며 사는 남자를 보았다. 이십 오 년 전의 연인을 그리며 눈시울을 붉히는 이제는 하얗게 센 머리색의 남자를 보았을 때, 어서 그 남자를 저 세상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운명에게 말을 걸었다. 많은 날들을 나는 아파했다. 그의 한평생이 저릿하고, 처연하고, 애잔했다. 


아무 것 아닌 찰나. 무(無)의 세계로 흩어지는 공허. 확언하되, 이 막연함도 곧 지나갈 것이다.




















신작이 아니었다. 1991년 作. 많은 말을 하기에 너무 짧고 정적이고 부질없다. 고집스럽고 청아한, 실존했던 한 음악가의 삶을 묵직하게 그린다. 절반도 살지 못한 내가 이해할 리 없는 어떤 생애.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에 얹힌 진부함이라니. 세상의 모든 저녁도, 세상의 모든 사랑도, 세상의 모든 이별도, 세상의 모든 황홀도 절망도 같은 형태로 두 번 다시는 오지 않는다. 하물며 아침이라니. 미세하게 달라지는 우주에 균열을 내보고 싶은 자의 목소리. 제 길을 꿋꿋이 걷는 예술가의 찬란한 이름. 감촉과 내음이 따사로워서 잔잔한 호숫가 옆 푸릇한 들판으로 달려나가고 싶다.


17세기 프랑스 출신 비올라 다 감바의 거장 생트 콜롱브. 그는 음악으로 세속적 욕망을 이루고자 찾아온 제자 마랭 마레와는 상반되게, 아내를 잃고 두 딸을 홀로 키우며 영광을 선사해줄 왕실의 부름도 거절한 채 오로지 자신의 음악세계를 지키는 단호함을 보여준다. 소설적 흥미가 툭 불거진 상황설정이나 진한 감동에 있다면 이 소설은 정반대에 위치한다. 내면이 발하는 은은한 빛을 따라 걷는 자는 마침내 황홀경에 도달한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격렬하게 대립하지만 작가는 몸을 낮춰 말한다. 삶이 대체로 그러하며 순간의 선택이 생을 이루게 한다고.






편혜영은 처음이다. 나는 습작을 때때로 지겨워했다. 그때 나는 반드시 무엇이 되고 싶었다. 이 소설집을 읽게 된 건 오로지 그런 생각으로 가득했던 밤들 때문이다. 


영어단어에도 진행형을 쓸 수 없는 동사라는 게 있지. '소유하다(have, possess, owe), 원하다,바라다(want, wish)' 같은 단어. 


현재진행형과 친하지 않은 나는 밤의 현재진행형 앞에 긴장한다. 지나간 것과 지나가는 것, 분노하는 것과 분노하고 있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있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지금 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밤이 원치않는 비밀을 엿보는 중이라고. 애틋하고도 그윽한 시선이 가장 나답지 않은 순간마저 나를 또렷하게 한다고.





기어이 어떠한 조건을 붙이고서야 읽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장편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나는 단편을 그 자체로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단편 밖에 읽지 않았던 때도 그랬고, 습작에 써먹기 위해 줄기차게 읽어야만 할 때도 그랬다. 베끼고 싶은 문장을 종종 발견하지만 읽는 게 서늘해지거나 흥미롭다는 느낌이 없다. 좋다고 느낀 찰나가 가끔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삶의 단면들을 요리조리 쪼개보는 과정을 싫어한다. 부분과 단절을 어려워한다. 흐름이 없어 싫고, 묻혀버려서 싫다. 처음과 끝을 동시에 소유하고 싶고, 오랫동안 여러 번 만나 다정해진 주인공에게 애정을 느낀다. 흥미로이 여기지 못함에도 여덟 개의 어둡고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삶을 직시하고 있어 때론 고마웠다. 밤(夜). 자체로 황홀하고 그 질감마저 투명한 것. 시시콜콜한 밤들이 지나간다. 시공간의 단절이 도무지 있을 줄 모르는, 여기는, 지상이다. 황학주 시인의 말처럼, 나는 가고 당신은 오는 것을 잊는다 해도 별로 달라질 게 없는. 세상 무엇으로도 채우기 힘든, 지상의 어떤 순간과도 바꾸기 어려운, 마침내 괜찮은 계절이 왔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여름의 끝에 간신히 매달린 이 소설이 물었다. 단단하지만 허물어지는 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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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7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7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3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9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학과 역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좋아하는 분야라고 손 번쩍 들어 편협한 독서취향 강조 말고. 문학은 역사를, 역사는 문학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뛰어넘으려는 존재여야 할까. SF문학도 결국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니 대다수의 문학이 역사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사실 아닌가. 역사는 과거가 될 현재의 기록이고 문학은 흔히 말하듯 현실에 있을 법한 사건을 그리는 (예술)학문의 일종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문학은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제재로 삼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여, 인간과 사회를 진실되게 묘사하는 예술이고, 역사는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기록하거나 기록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닮은 듯 다르고 다르다면 섭섭하다. 닮았다고 갈등이 없는 게 아니듯 문학과 역사는 필연적으로 얽혔으니, 이 (제발트) 논쟁은 새삼스럽지 않다. 랑케와 카의 역사에 대한 정의가 다른 것처럼 문학이 (거대하게) 역사의 일부이거나 전부 또는 전혀 다르다고 하더라도 틀린 건 아니다. 물론 제발트가 (독일)문학이 역사 앞에 침묵했다고 말한 것 역시 일리가 있다. 일반론적인 문학과 역사가 아닌 제2차 세계대전을 골자로 한 유럽, 더 좁혀 독일이라는 무대에 국한된 주장이라고 해도 받아들여진다. 전세계는 이 논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2012년 선거를 해놓고 (무의식적으로) 1970년대로 돌아가 사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럴 리도 없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3,4공화국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제대로된 문학이 나오겠는가. 나온다고 해도 온전하겠는가. 온전하다고 해도 그걸로 진정 괜찮겠는가.  



그는 나중에 이런 글귀를 추가했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민자들, p.183)





방에 앉아 방향을 가늠하지도 못한 채로, 거리로 바다로 하늘로 지구 반대편으로 우주로 은하계로, 여기 아닌 저곳에만 눈길이 멎던 날들, 땅에 발붙이기보다 구름에 실린 듯 꿈꾸고 느끼던 날들, 나는 대다수의 비물질적인 것에 남달리 애착이 강하고 욕심이 많았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정서가 남다른 걸로 잘 살아지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즈음 나는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며 줄 위에 선 곡예사마냥 위태위태했으리라. 알게 모르게 사람을 괴롭히기도, 이해 안되는 행동과 말로 나를 타당화하기도 했을 것이다. 자기확신과 자기신념이 강한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위험에 사로잡혀 어떤 날에는 조금만 옅어졌으면 싶기도 했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 현재와 꿈의 괴리가 큰 만큼 사람은 불행하다. 세포를 건드리는 황홀하거나 위험한 순간, 절묘한 진실의 상실, 선택지가 하나 밖에 남지 않았을 때 불쑥 솟아오르는 위화감을 몸소 느낄 때만큼 서늘한 순간이 있을까. 전율할만치 섬뜩하고 잔혹했던 여름은 다른 계절보다 더 많이 읽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사유의 확장과 근사한 리뷰를 선사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침묵했다. 무엇으로도 채우거나 덮을 수 없는 더위 끝의 냉소와 불시착. 나는 여름 내내 불시착한 우주선처럼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책 속에서 책 곁에서 책을 뒤로한 채 더위와 화해하고 한 살 더 먹었다. 



실제와 평가, 현실과 기록 사이의 미묘한 어조를 예리하게 써내려간 작가는 제발트, 그는 북극곰을 지켜주기 위해 틀지 못했던 에어컨 때문에 더 유난하고 별스러워진 여름에도 장엄과 숭고가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증거다. 서늘하고 고결하고 견고하게 샘솟는 문장은 도시와 거리가 처참하게 무너져내리는 순간조차 아름답게 그린다. 유연하고 적확한 문체, 눈에 보이듯 생생한 거리, 생동적이고 아름다운 묘사력 등 그를 찬탄할 만한 요소는 많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 저 멀리 잿빛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듯 눈앞에서 사라진다. 진실이 꿈 같고 비판이 애정 같고 잡힐 듯하다가 달아나는 글. 손택이 사진을 보고 그랬듯, 실제로 보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의 글을 따라가면 텅 빈 거리에 세운 하나의 도시가 완성된다. 망각된 역사 아니, 역사가 망각된 사실 그리고 역사가 망각된 사실의 '고착'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이 태어나 자란 도시를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세심함과 예민함 덕에 '제발트 논쟁'이라 불리는 취리히 대학 강연의 고상한 논점에 다가설 수 있었다. 성급하고 변덕스러웠으나 이제는 더없이 신중하고 솔직해진 갈증. 해소는 각자의 몫이다.


당장 이름을 두 개쯤 댈 수 없다고는 해도 제발트가 문학과 역사, 실체와 기억, 폭로와 침묵 사이에서 고민한 첫 번째 작가는 아닐 것이다. 작가와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늘 시대의 고발과 존재의 엄숙에 대해 고민해왔다는 걸 안다. 내 지난 여름은 독일의 파편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향한 위대한 문학의 탄생을 갈망하고 또 쌓아온 모든 지식과 감정을 지우고 짓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이민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민을 갈 수도 없고 전쟁의 아픔을 배우기 위해 전쟁을 도발할 수도 없다. 겪지 못한 자들은 결국 책과 매체를 통해 간접적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누군가의 모든 상처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독일은 괴테, 토마스 만, 츠바이크, 슐링크, 제발트를 통해 언뜻 엿본 세계가 전부다. 모두 소설가이고, 역사책을 비롯해 전기나 평전 한 권 읽지 않았으니 소설가가 압축해놓거나 새로 그린 세계를 통해 독일을 배운 게 다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을 거쳐만 갔던 기억에 비추어도 그 도시와 나라에 대한 뿌리깊은 상처 때문에 오히려 문학에 대한 취향이 제약받을 정도다. 이 협소한 세계에 베른의 기적, 타인의 삶, 쉰들러 리스트, 굿바이 레닌, 몰락 등의 입때껏 봐온 독일영화 몇 편을 덧붙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그간 생성된 독일에 대한 지식, 사유, 느낌이 변할 정도는 아니다. 유대인, 나치, 수용소, 제2차 세계대전, 베를린 장벽으로 굳혀진 독일 역사 때문인지 제발트의 문학이 그가 드러낸 사건이나 배경보다 문체나 느낌으로 읽히는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전반적으로 가지고 가야 할 기억과 현실 사이의 어떤 괴리, 단호함과 절제 사이 어디쯤에서 실낱같은 끈을 붙잡고 매달리는 이들의 삶에 매혹된다. 훗날, 어느 젊은 날 불볕 더위 아래 아는 게 적어 느낌도 빈약했던 독서를 체화하거나 수정할 날도 오리라.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아우스터리츠]의 절반을 독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을 때 읽던 기억으로, 노벨상 수상이 유력했으나 2001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면서 기회를 놓쳐버린, 더이상은 그가 남겨놓은 글이 없을까, 이미 주어진 글이 흔적 전부일까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제발트의 소설 옆에. 



헨리 썰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막스 페르버. 네 명의 이민자들이 나오는 단편집 [이민자들]은 소설이라기보다 체험수기처럼 다가온다. 네 사람의 사연인데도 하나의 긴 옛날 얘기 같다. 이민의 삶이 가진 다양한 형태와 모습, 고통과 방황, 슬픔과 애처로움이 한데 스며들어 자살이라는 결말로 치닫는 동안 너무도 담담하고 적막해서 암담한 기분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인이 단순하지 않은 외부로부터 발생한 모두 아는 유명한 사건으로 인해 자의로든 타의로든 고향이나 터전, 가족을 잃게 된 그들의 상처에 닿는다. 속단과 오해, 단절과 애수, 절망과 기억이 타오른다. 이들이 살아있는 이유 그리고 용기가 탕하고 울리는 총소리에 발맞추어 출발한 자들에게나 찾아오는 황홀한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운명이 질기디 질긴 애착과 만났을 때 낼 수 있는 비명과 통증이 여전히 문장 사이를 뛰어다니고 종이 바깥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


카지미르 외삼촌은 발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것이 어둠의 경계야. 실제로 우리 뒤의 육지가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린 듯했고, 남북으로 가늘고 길게 이어진 한줄의 모래띠만이 물의 황무지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I often come out here(여기 자주 온단다).' 외삼촌이 말했다. 'It makes me feel that I am a long away, though I never quite know from where(여기 오면 내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어디로부터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렇게 말하고 외삼촌은 큰 바둑판무늬의 외투에서 사진기를 꺼내 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민자들, pp.112-113)


















그리고 제발트 이전을 살았던 츠바이크는 또 어떤가 하면, 같은 아픔을 가진 상처에서 쓰고 또 쓰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끝장낸다. 이런 가여운 사람.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은 독한 사람일까 가여운 사람일까. 하지만 죽음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말에나 남한, 북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어 바다 속으로 뛰어든 [광장]의 이명훈과 충성을 다하고도 버림받은 소년이 투항 대신 기꺼이 죽음의 열차에 올라타는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류환처럼 말이다. 츠바이크의 삶이 어떠했든 그의 작품은 사랑과 이별, 남녀 관계의 인간 심리를 탁월하게 그린다. [체스 이야기]에서는 유독 제발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쓰지만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진다. 1800년대의 유대인과 1900년대의 유대인이 같지 않을지라도 두 작가가 공유해온 유럽의 전쟁, 유대인, 이민자에 대한 감상은 비슷했던 걸로 보인다. 


교묘하고 영리해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란 걸 차치하고도 완전한 소설적 구성, 짜임새, 소재, 주제에 감탄하게 된다. 고도의 체스게임 안에 불안, 고립, 상처, 고통, 절망을 겪은 사내의 과거를 녹여내 복잡하고 유기적인 경험과 기억의 관계를 나치의 억압과 광기에 대항하는 한 인간의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는 도구로 활용한다. 체스판의 말이 된 듯한 남자, 체스로 인해 이미 다 살아버린 남자, 이야기 안팎에 존재하는 고도의 심리전이자 의지의 산물인 체스는 주어인 동시에 목적어, 목적어인 동시에 동사로 기능한다. 무에서도 혼란에서도 사람은 죽는다면 우리가 사는 곳은 이승의 연옥쯤 되는 셈인가. 여느 게임이 그렇듯 치고 빠지고 밀고 당기는 전략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체스가 고난과 고비를 넘어 마침내 도달하리라 여겨지는 인생 여정과 닮았다.



우리를 그저 완벽한 무의 상황에 세워두었던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상의 어떠한 것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 영혼을 압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각각 완전한 진공상태, 즉 외부세계로부터 애매모호하게 폐쇄된 각 방에 가둠으로써 채찍과 추위로 인해 가해지는 외부의 압력 대신 내부로부터 압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지요. 그 내부로부터의 압력이 결국 우리의 입술을 폭파하듯 열게 하는 것입니다. 


도처에 그리고 끊임없이 한 사람 주위에 무만 있었을 뿐입니다. 완전히 무공간적, 무시간적 공허였지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에 따라 생각들도 이리저리 계속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러나 생각 자체는 사실 생각이 그렇게 실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버팀목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생각은 맴돌며 무의미하게 자전하기 시작하거든요. 생각도 무를 견디지 못합니다. (체스 이야기, 중에서)


















불행해보이는 부모님, 자기 상처 안에 갇혀 술로 세월을 사는 아버지와 나름의 상처를 가졌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채로 아버지를 지키는 어머니.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의 과거 상처를 모조리 알게 된 소년이 묻는다. 왜 어머니는 아버지 곁을 지키셨어요, 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도 젊었을 때 얼마 동안은 선택을 할 수 있어.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할 수도 있고, 이 사람과 살거나 저 사람과 살 수도 있지. 그러나 어느 날 너의 행동과 그 사람이 네 인생이 되어버리는 거야. 그때 가서 왜 너는 네 인생을 지키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정말로 멍청한 질문이다. (사랑의 도피, '소녀와 도마뱀', p.36)


그리고 이렇게 떠난 여자도 있다.


마침내 그녀는 그를 떠났다. "나는 네 머리와 가슴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녀는 그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고 나서 그의 가슴을 툭툭 쳤다. "이 안에 내 자리가 있기는 하겠지만 내겐 너무 좁아." (사랑의 도피, '소녀와 도마뱀, p.41)



작품 '할례'를 추가해 복원한 슐링크의 작품집 [사랑의 도피]에서 '다른 남자'는 기시감이 짙다. 모든 소설이 미시감으로 읽히는 반기억력의 소유자에게 읽지 않은 작품에의 기시감이라니 새삼스러워서 이전 책을 도서관에서 읽었나 했더니 2009년은 학교에 다닐 때가 아니고 졸업한 후로 시립 도서관 두세 번 외엔 간 적이 없다. 고로 읽었을 리가 없는데 기억이 난다. 다른 소설과 비슷한가 싶긴 해도 그 다른 소설이 기억나지 않는 한 도랑으로 빠졌다가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추리. 이건 그저 간간이 흘러내리는 비스킷 찌꺼기 같은 느낌일 뿐, 작품집에 대한 희미하고 미미한 느낌으로 한 편의 리뷰를 쓰기란 여간 곤란한 게 아니라서 묵히면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남기는커녕 읽는 순간의 작은 떨림조차도 모래처럼 빠져나가 이제는 정말 아무 것도, 그 어떤 것도 잡히는 게 없다. 소소하고 분산되고 가늠하기 쉽지 않은 균열의 절망만을 확인한다. 더이상 같은 말을 하긴 싫다. 시간이 가면 나이도 먹고 키는 안 크지만 나날이 자라는데 왜 맨날 같은 얘기를 해야 하나. 단편집을 어떻게 한 편의 통일성 있는 리뷰로 표현하란 말이냐, 이딴 웩웩거리는 감상문은 쓰기 싫다. 쓰면 쓰지 못 쓸 건 또 뭔가. 못 쓴다는 건 그야말로 안 써진다는 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나 소재가 주는 통일감, 해석의 방향을 찾기 힘들다는 뜻이다. 다른 의미는 아니다. 



더 달려야 한다. 상처로부터 도망치든 원하는 것을 가지려 안달하든 방향만 정하면 나아갈 수 있다. 구하기 위해 펼쳐든 팔이나 버리기 위해 내민 팔에서는 선의와 악의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행동의 직후를 봐야 알 수 있다. 책도 그렇다. 펼쳐야 알고 읽어야 알고 생각해야 안다. 써져야 쓰는 거다. 안 써지면 안쓰는 거다. 책구경이 취미라 할 수 있는 나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 펼쳐야만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에 나를 구겨넣고 칵테일 섞듯 춤추고 나면 남을 건 남고 버려질 건 버려지겠지. 약간은 초연한 여름. 흐드러질 수록 옅어지는 욕심. 희미하게 강해지는 의지. 먹고 구역질 하고 또 먹는 폭식증 환자만큼 어리석은 행태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책에 관한 한 폭식환자가 되는 게 진리일 수 있다. 헷갈리는 진단, 애써도 어려운 예방, 궁극적 치료까지 한번에 해치우는 길인 양. 읽으면 읽을 수록 낮아지긴커녕 더 높아지고 더 늘어나기만 하는 책탑은 지난 계절에 이어 그대로인데 진저리나게 애처로운 이 계절은 여전히 온몸에 매달려 지치게 하고, 바라보는 나는 못견디게 숨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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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8-28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inmal ist keinmal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고 있는 요즘.
이 말의 어떤 모순적 울림이.. 제 삶에도, 이 포스팅의 책 목록에도, 아이리시스님의 글에도 묻어나 있는 것 같아...
차분해집니다.

아이리시스 2013-08-30 11:44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는 책을 다시 읽고 계시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요. 저 역시 시간을 버티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시간이 너무 안가요. 동시에 빨리가고요. 서있을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느낌.

언젠가, 소설에 나오는 네 사람 중에 dreamout님은 누구와 가장 가까운 편인지 듣고 싶어요 :)





꿈꾸는섬 2013-08-29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와 좋은 글 읽고 가요. 잘 지내죠? 어느새 여름이 지나가고 있네요. ^^

아이리시스 2013-08-30 11:51   좋아요 0 | URL

여름이 얼른 가버리면 좋겠어요. 지나고 나면 이런 여름도 그리워지겠지만요. 꿈섬님이 그 자리에 계속 계신다는 느낌 이제는 들어서 오랜만이라도 서운하지 않아요.

즐거운 주말! (그러나 오늘은 금요일)


맥거핀 2013-08-29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의 과거의 전쟁, 그리고 60년대 사회변혁운동들에 대한 회고와 반성, 그리고 교훈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나오는 것 같아요. 특히 전쟁과 해서는 안될 짓들에 대한 끊임없는 언급과 반성은 집요해보일 정도입니다. 반면 우리의 과거는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졌죠. 일본도 그렇고, 우리 내부에서도 말입니다. 현재에 문제가 되는 여러 사건들 역시 과거의 문제들을 처리하지 못한 것과 여전히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배수아 번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래전에 사놓았는데 아직도 못읽고 있네요. 이상하게 집어들기가 좀 겁이 난달까. 슐링크의 <주말> 이건 어떤가요? 혹시 읽어보셨어요? 예전에 서평만 보고 와 진짜 괜찮겠다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까먹고 있었네요.

아이리시스 2013-08-30 11:59   좋아요 0 | URL

전혀 관심 안갖다가 찾아봤더니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의 번역자는 배수아가 아니던데 맥거핀님이 가진 책은 다른 걸까요? 번역이야 번역이고 녹록치 않은 문장들이고 스토리가 없어서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바로 그 점이 다른 작품과 차별화되긴 하지만요. 과거사 청산을 시작하면 깨지는 건 국민이기도 할텐데요. 소수에게 보상해주기 위해 현시점에서의 세금이 사용되는 거니까. 어느 순간 딜레마에 빠졌어요. 국가범죄 청산이 무슨 간접세도 아니고.. 잘못은 그들이 하고 배상은 국민세금으로..

이건 많이 다른 얘기긴 하지만요.

슐링크는 [더 리더]만 샀습니다. 영 손이 안가지만요. <주말>이나 <귀향>은 언젠가 읽을 목록에.. 그 이후 한 권 더 나온 단편집은 도리도리.



맥거핀 2013-09-02 00:12   좋아요 0 | URL
아..제 착각입니다. (멍청이..ㅋㅋ) 배수아 씨가 번역한 게 아니라 예전에 가장 좋아하는 독일 작가 중에 하나라고 하더군요. 아..<더 리더>가 슐링크가 쓴 거였군요. 몰랐음.ㅋㅋ

아이리시스 2013-09-02 01:54   좋아요 0 | URL
그런거야 뭐. 저는 <삼십세>가 제 책이라고 한 적도 있어요. 저는 실비아 플라스잖아요. 이런 거에 비하면.. 잠깐 헷갈린 게 배수아 작가가 어떤 언어로 된 책을 번역했는지는 생각했는데 모르겠어서 한참 생각을 해봤어요. 화학과 나오신 자연대(공대?)생이었는데. 독어까지 잘하시면 이건 진짜 반칙이죠.

이제 저는 약간 멍청이 취소해드리려고 했는데(진짜예요) 스스로 인증한 겁니다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이걸 신판 나온 마당에 중고샵에 널려있는 구판을 사가지고 아..읽기 싫.. 영화도 한참 전에 봤고 말이죠.

Shining 2013-08-29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발트는 읽어본 적 없어요, 아이님 글 읽고나니 어떤 글을 쓰는 작가인지 궁금해지네요.

저는 독일 작가하면 역시 헤르만 헤세.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좋아하는, 첫사랑 같은 작가. 그리고 하인리히 뵐, 토마스 만, 파크리트 쥐스킨트(독일 작가 맞죠..?;;), 괴테, 카프카가 딱 떠오르는데 그러고 보니 대개 중,고등학생 때 읽은 작가들이네요;

그 다음엔 미하엘 엔데, 베른하르트 슐링크, 그리고 츠바이크! 가 있군요. 슈테판 츠바이크, 제가 정말 사랑하는 작가에요. 모든 작품이 다 좋은데, 구판이 많아서 개정판이나 복간 좀 내줬으면 좋겠어요ㅠ 문동에서 나온 저 책은 정말... 제가 외출할 때 가장 많이 들고 나가는 책 중 하난데 아, 반가워서 막 엉뚱한 얘기만 댓글에 달아요ㅎㅎㅎ

덧) 잠깐, 독일의 경우, 라는 건 다른 시리즈도 이어지는건가요? 유후! :^

아이리시스 2013-08-30 12:17   좋아요 0 | URL

페이퍼 쓸 때, 헤세나 카프카는 떠오르지도 않았어요. ^-^bb (엄지 두개..) 독일인은 아니지만 저는 릴케 좋아해요. 근데 쓸 정도는 아니예요.

신문에서 샐린저 작품집 출간예정 소식을 봤거든요. 남아있는 작품이 있으리란 생각도 못했는데. 츠바이크의 소설은 얼마나 더 있을까요. 더 있겠죠? Shining님 위해 다시 나와주길.. 누구한테 말해야 하죠?(히히)

외출할 때 저 책을 들고나가는 이유는 [낯선 여인의 편지] 때문입니까? (그럴 것 같아)


덧) 1년 후쯤 러시아의 경우, 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질 독서력의 소유자로서..!
아쉬운대로 그 이전에 아프리카라도 어떻게.. (보유하고 있는 텍스트, 지식 전무함)


Shining님, 저 내일 봉하마을 축제 갑니다. ^0^


Shining 2013-09-05 23:11   좋아요 0 | URL
오호. <아홉 가지 이야기> 좋게 읽은 기억은 나는데, 추가로 출간될 작품이 더 있군요. 하긴, 샐린저가 첫 작품이 대표작이 된 작가라고는 해도 그 후 작품 활동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요. 맞아요, 다시 나와주길ㅠㅠ 책이 너무 올드해서 소장 욕구가 떨어진다니까요-_ㅠ 문동처럼 깔끔한 디자인으로 나와주면 좋겠어요, 산도르 마라이 책처럼 견장본에 작은 책이어도 좋을 것 같고. 으으으, 좋겠다!

하하. 둘 다 정말 똑같이 좋아하지만, 아마 외출할 때 데려가는 이유는 낯선 여인의 편지, 때문이 맞는 것 같은데요? 츠바이크 특유의 서정성이 신파로 흐르지 않는 그 미묘함이 좋아요. 근데 체스 이야기, 도 진짜 멋진 소설. 엄지손가락이 더 있으면 모두 합쳐 올려주고 싶은, 진짜 좋아하는 소설들이에요 :)

봉하마을 잘 다녀왔어요?

아이리시스 2013-09-06 20:00   좋아요 0 | URL
봉하마을 얘기는 방명록에서 했고, 샐린저는 늘 다시 읽어야지 하면서도 다시 읽은 적은 없어요. 출간얘기는 원서얘기였으니 번역이 동시에 될지는 몰라도 기다리면 곧 나오겠죠?^-^

그..그..출판사에게 미안해서 다시 내주세요! 라고는 하기가 그렇고 저는 그래서 소장 안했어요.푸하하하. 저한테 있는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스튜어트> 그리고 <초조한 마음>이고 다른 책은 없어요. Shining님 위해서 아무 출판사나 깔끔하게 내주세요, 제발요. 저 그저께 <밤으로의 여행> 샀답니다. 이건 반쯤 Shining님 덕분이에요. 미루다가 미루다가 <시간의 혼> 보다 삘 받은 거니까.

으으으, 네, 그래서 어떤 책 읽다보면 <체스 이야기> 엄청 많이 언급돼요. 그 구조와 상징성이 왜 그토록 많이 회자되는지 읽고나서야 명백하게 알 것 같아요. 읽기 전에도 늘 어떤 작품일까 궁금했었거든요. <낯선 여인의 편지>도 좋았구요. 좋아요. 히히히.
 

 

 

가장 아팠고 또 그리운 여름의 클레망틴.

 

 

 

 

바람이 불어오기에 여름에도 축복이 있다는 걸 알았다. 떠올려보면 예민함을 덜어내기 위한 이십대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나는 한 번도 너그러운 행복 바이러스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친구들 사이에서 까다로운 취급받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던 건 그걸 극복하는 다른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입을 꾹 다물거나 모조리 털거나, 묘하게 신비롭거나 묘하게 솔직해서 성격 자체가 화근이었다. 다 말해주면 화를 냈고, 하지 않으면 답답한 사람으로 몰렸으니까.

 

 

 

 

 

게다가, 제일 벼린 칼인 줄 알았던 나 이상 과민한 사람을 만나면 막막해지곤 했다. 타고난 게 무심한 다혈이니, 끓는 피와 허영만 내려놓으면 무뎌지리라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문학에서 길을 찾건, 인문학에서 인간을 찾건, 다윈과 아인슈타인에게 우주를 묻건, 사람은 원래 생겨먹은 대로, 하고싶은 대로 하는 게 정석이다. 그래서 이제 피한다. 모든 걸 구할 수 있을 듯 나섰던 때도 있는데, 그래, 처음부터 본 적 없는 것처럼 눈감지 않았을 때가 있긴 했는데. 왜 그때 생각이 떠올랐을까. 덥다, 덥다, 하며 엄마가 째려볼 정도로 냉장고 가득 아이스크림을 쑤셔 넣어두고 야금야금 꺼내먹으며 씻고나도 금새 끈적해지는 몸을 뒤틀어 우리나라 기후 어쩌고저쩌고, 제습기 어쩌고저쩌고 그러는 중에 밤이 되자, 뭘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선풍기를 풀가동하고 책상에 앉았다. 아, 이건 아니야, 책상이라니. 골목으로 뛰어나가볼까. 동네 끝에서 끝까지 달려볼까. 여름밤, 아무도 없는 어둠 속 도시의 하늘도 까맣게 빛난다. 하지만 역시 귀찮아. 동네에 아직 친한 친구가 산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불러내서 캠퍼스 벤치에 앉아 맥주캔을 들이켜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귀찮아.

 

시내 피자집에서 생일 파티를 하고 노래방에서 뛰어놀다 폭죽 속 반짝이와 땀과 웃음이 뒤범벅이 되어 깊은 밤 동네 골목을 휩쓸고 다녔던 별처럼 아련한 열아홉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누구의 무엇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던 시간들. 잠깐의 시기나 질투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의식하지 않았던 만큼, 남자/여자, 연애/사랑이란 것이 앞에 놓이지 않았던 시절.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들, 현재 제일 친한 친구, 같은 동네, 같은 골목, 같은 어린시절을 공유한 편안함의 공동체. 학교보다 동네 독서실이 좋았던 이유도, 공부하다 서로 꼬드겨 저녁 내내 노래방에서 놀거나 햄버거 먹으러 가기도 하는, 그게 아니면 편의점과 시장통, 독서실 마당을 배회하며 수다에 수다를 거듭한 그 깜찍한 생활들 덕분이었지만, 덕분에 추억 대신 성적을 잃었다. 애초 잃을 성적 따위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몰랐다. 그 시간이 누군가를 의사도 만들고 판사도 만들줄은. 대충 졸업해서 대충 입학했다. 모두들 서로의 소식을 모른 채 스무 살이 시작되었다.

 

성적보다 친구관계가 더 고달팠고, 야자보다 하교 이후의 사생활을 소중히 했다. 연애 비슷한 것들이 늘 학창시절에 깃들었지만, 내가 혹은 누가 서로의 전부가 된다는 부질없음보다는 자유를 더 사랑했던 것 같다. 여중여고에 다녔으면서도 학교 밖에서는 늘 남자애들을 만나고 다녔는데 특별한 관계가 시작되지 않았던 것은 은연중 굵고 진한 선을 그어버리고 돌아서는 내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애를 하게 된다면 그 연애는 나를 세상 끝까지 데려가야 하리라 믿던 때였다. 그가 아무도 모르는 별로 나를 옮겨주길 원했다. 그 끝은 스무살 연상을 사랑하거나 아님 불륜이라고,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짐작도 못한 채 어렴풋하게 젊음을 과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줄다리기는 오래 계속되었지만 사랑은 착실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애틋하지도 깜찍하지도 아기자기하지도 살갑지도 못할 때가 많다. 기념일 같은 건 쭉 못 챙기는 편에 속한다. 기대를 없애버리고 나면 작은 걸 해도 크게 보인다. 의도하진 않았는데 그럴 때면 정말 무심해서 지나치게 도도하구나 싶을 때가 있다. 나라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내가 피곤한 사람이라는 걸, 상대를 자꾸만 자극하는 형이라는 걸 알고 났을 때 처음으로 부드러움을 갈망했다. 무뎌져야겠다고. 처음 데이트나 처음 받은 선물, 처음 간 여행, 처음 간 모텔, 처음의 대사나 느낌 같은 것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적어도 예민의 촉이 그런 방식으로는 표출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시간이 흘러 내가 알 수 있었던 하나는, 추억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추억이 추억에 포개졌다는 사실 뿐이다. 좋고 편안한 삶에서는 그렇지 않은 삶을 상상하지 못하듯 나빴든 좋았든, 추억은 추억 안에서 흘러갔고, 나는 곧 괜찮아졌다.

 

 

 

파타고니아의 양
                                         

                                                      -마종기


거친 들에 흐린 하늘 몇개만 떠 있었어.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해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어보라고 했지?
그래도 굶주린 콘도르는 칼바람같이
살아있는 양들의 눈을 빼먹고 나는
장님이 된 양을 통채로 구워 며칠 째 먹었다.

어금니 두 개 뿐인 양들은 아예 윗니가 없다.
열 살이 넘으면 아랫니마저 차츰 닳아 없어지고
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
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사랑이 어딘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면 혹시,
파타고니아의 하늘은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줄까?
짐승 타는 냄새로 추운 벌판은 침묵보다 살벌해지고
올려다 볼 별 하나 없이 아픈 상처만 덧나고 있다.
남미의 남쪽 변경에서 만난 양들은 계속 죽기만해서
나는 아직도 숨겨온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하늘이 부르고 바다가 손짓하고 풍경이 부서져내리고 사람들이 함박웃음 짓는 곳에 살고 싶었다. 경쟁하고 헐뜯고 싸우는 살벌함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큰 부도 가난도 모른 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자란 내가 꾸는 꿈이 때로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꿈꾸는 것들은 모두 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이었다. 꿈이 아니라 내가 나빴다. 내가 꾸는 꿈이 동시에 곁의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게 했으니 몽상에도 책임이 있다. 삶도 그렇지만 사람 역시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다. 너나할 것 없이 딱 그만치씩 갖고 살았다. 가치나 의미 같은 것은 스스로 구해야 했다. 마침내 다시 침잠했다. 나는 몸을 떨었다. 두려움은 그때 지나갔다.  

 

 

삶이란 거, 살아간다는 거, 나라는 존재, 우리라는 인간.

지금보다 조금 더 장엄할 수는 없을까.

 

 

 

고래가 있었다
 
                                                            -박미라
 


붉은 장미*의 기억을 끝으로 바다를 접는 고래.
 
붉은, 호흡을 꺼내 구름을 탁본한다
자신이 끌고 다닌 하루의 기록을 찾아보지만 탁본 속에는
주어도 서술어도 생략된 비문(非文)만 가득하다
겨우 찾아낸 꽃잎 문양 수의를 혼자 입기 어려워서
꼬리를 들썩이다가 눈동자 속 파도를 꺼내 보다가
 
바람이 뜯어먹던 발자국을 지나고 백사장이 구워낸 해당화 그늘을 기웃대며
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을 이정표 삼아 아는 길을 가듯 간다
쓰러진 채로 고개 끄덕이는 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자꾸만 돌아보며 바다 쪽으로 길을 잡는다
 
끼니를 잊은 철학자처럼 느릿느릿 잠 속으로 빠져드는 고래
낯익은 물결을 만났을까 잠깐 웃음이 스친 듯도 한데
몸속에 남아 있던 바다가 쿨럭, 외마디를 내뱉는다
제 몸에서 나오는 뜻밖의 비명에 놀란 잔등이 푸르르 떨린다
 
물의 기록이 겹겹이 쌓인 몸속 제 그림자의 그늘이 깊어 몸살을 앓던 중이었거나
다만, 쉴 곳을 찾던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뱃전을 따라 낯선 길을 나서려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래 꿈꾸던 어둠 속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가는 제 몸이
신기하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머리를 흔들어 보는데
 
너무 멀어, 바다는 고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어디서 실컷 싸우다 온 사람처럼 목이 콱 잠긴 오후
처음인 것들이 맨 나중을 설명하는 그곳에
 
고래가 있었다
 
* 붉은 장미 : 죽음의 순간 고래의 숨구멍으로 치솟는 핏물을 부르는 선원들의 말.

 

 

 

끝도없이 침잠하는 밤의 세계에서 하나의 불빛이 되었다, 시는. 나는 아직 완전한 바닥은 아니다. 비로소 세상 전부를 미워하게 됐을 때에도 마음이 살인하게 내버려두지는 말아야지. 바깥 세상이 내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일들로 가득차더라도 누구도 괴롭히지 말고 내 안에서 평온을 찾아야지. 시 안에서 결심한 것 같기도 하다.

 

문득, 파타고니아의 양과 물 속에서 몸을 뒤집는 고래와 날뛰는 여름, 프로방스와 카뮈를 만나러 가기로 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 이성(理性)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그보다 먼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만약 니체가 주장했듯이, 어떤 철학자가 존중받는 존재가 되려면 마땅히 자신이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여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 다음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행동이 뒤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마음속으로 느낄 때는 자명한 것이지만 막상 이성의 차원에서 분명히 밝히려면 깊이 파고들어가 연구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 '시지프 신화' 첫 문단)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 뿐이다. 엄청난 열기 속에서 향초(香草)들의 육감적인 냄새가 목을 긁고 숨을 컥컥 막는다. 풍경 깊숙이, 마을 주변의 언덕들에 뿌리를 내린 슈누아의 시커먼 덩치가 보일락 말락 하더니 이윽고 확고하고 육중한 속도로 털고 일어나서 바닷속으로 가서 웅크려 엎드린다.

( '결혼,여름' 첫 문단)

 

 

따뜻하면서도 시원하다. 차가우면서도 뜨겁다. 계절과 여행에세이의 콜라보레이션은 늘 벅차다. 그리고 카뮈는 빛난다.

 

 

 

 

 

 

 

 

 

 

                               사랑

 

                                                                                             -이철성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사랑에 빠졌다. 나는 양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익숙지 못한 것들이 배를 뒤틀리게 하고 가슴을 칼로 긋고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사랑이 나의 어두운 방으로 들어와 누워있는 날 문질러댔다. 앙칼진 것들이 내지르는 붉은 소름. 불쾌한 입술이 이를 앙다물었다. 나의 사랑은 날 떠나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난 호소했다. 날 떠나지 말아달라고. 거듭거듭 호소하는 나의 혀가 딱딱하게 갇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난 둘이 되어 있었다. 난 놀란 눈을 하고 날 보고 있었다. 난 놀란 나를 때려죽이고 싶었다. 놀란 나는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난 무섭게도 도망치는 날 끝까지 추격하여 때려죽이고 싶었다. 어느 날 난 둘이 되어 있었다. 손이 손을 맞잡고, 입술이 입술에 포개지고, 성기가 성기에 삽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난 죽고 싶었다. 영원히,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으면 했다.

 

 

 

부디, 올 여름 깊어질 즈음 인생의 한때 중 가장 벅찬 순간을 맞이하기를.

그리고 분위기는 반전되어야 한다. 여름에도 사색이, 바다에도 꿈이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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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6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5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6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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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3-07-15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이 시간이 아주 많았으면 좋겠지만.. 하루하루 살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네요. 벌써 7월 중순이에요, 젠장 ㅋㅋㅋ 위쪽 지역은 비 오다 안 오다 그러죠? 올해 대구는 시원한 빗소리 듣기가 어렵네요. ^^

아이리시스 2013-07-16 11:32   좋아요 0 | URL
저는 대구보다 아래에 살잖아요, 까먹은거구나?!(아직 어린데 그러면 안됩니다,,키득키득) 시간이 많아야 음악도 들리고 책도 읽히고 다른 사람 목소리도 들리고 마음도 보이고 알고싶어지고 그런 것 같아서요. 벌써 7월 중순이니, 곧 여름도 지나가겠죠?

주말에 비 한 방울도 안오고 쨍쨍하기만 했어요, 지금도 더없이 쨍쨍한 오후네요! 아직 오전인데.. 아까전부터 오후인 듯한 이 느낌은 뭘까요.
 

 

 

<인페르노>가 펼치는 상황은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밝힌 주장 이상이며, 충분히 설득당할 만큼 매혹적이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의 차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있고, 급진과 온건의 틈마다 존재한다. 현재와 미래 가치 사이를 방황하다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어리석음에 비하면 소설 속 유전공학자인 조브리스트나 맬서스의 맹목에 바탕한 비관은 차라리 인간적이다. 여름, 댄 브라운이 돌아왔고, 다시 종교와 과학이 격렬하게 대립한다. 여기서 세계 다수는 의아하게도 종교의 편에 섰다. 급진적 과학은 더이상 우리를 보호하지 못한 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격렬한 논쟁으로 회귀시킨다. 나자마자 죽을지언정 마지막 욕구는 분출되어야 하며, 잉태의 인위적 제거는 죄악과 다름없다는 종교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동원하여 기아,전쟁,질병에 도전하는 인간의 출산을 막아야 한다는 과학. 소설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굳이 묻지 않지만 그래도 감정이입을 위해 끌리는 쪽에 서보자.

 

단테의 지옥이 주는 비장미와 숭고미를 댄 브라운은 고스란히 가져온다. 그의 특기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로서의 액션이 아니라 기호학과 인류학, 중세 예술 도시를 누비며 만나는 예술적 경지에 오른 관광지와 예술작품에 대한 탄탄한 묘사와 흥미진진한 스릴에 있다. 두오모에서 피티 궁전,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우피치 미술관까지. 이탈리아에 가기 위한 서유럽 여행을 했던 내게 강렬하면서도 깊게 남은 낮과 밤. 고독과 역사가 스며든 도시. 피렌체를 단단히 훑었다고 생각한 건 커다란 착각이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바티칸, 단테, 미켈란젤로, 다 빈치, 브루넬레스키, 조르조 바사리. 한때 심취한 키워드의 집합. 당시 중세 이탈리아를 향한 격렬한 관심은 도서관 서가 몇 칸을 헤집는데서 끝나지 못하고 무작정 비행기를 타게 했다.

 

<다빈치 코드>가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앞 관광객을 소리소문없이 폭발하게 한 것처럼(대다수가 안내도를 받아 '모나리자'만 자세히 관람하고 가는 걸 수도없이 목격함), <인페르노>는 단테, 지옥, 세계의 끝으로 가는 문을 낸다. 언젠가부터 단테는 지옥을 향한 끔찍한 환상, 후대 수많은 문학과 예술작품에 영감을 준 한 명의 위대한 예술가로 대상화 되었다. 환상으로 남은 베키오 다리. 첫눈에 반한 베아트리체를 향한 꽃다발. 줄을 잘못 서서 태어나 자란 곳에서 쫓겨나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한 단테. 

 

 

새벽 공기 찬연한 어느 겨울날, 단테가 건넜다는 베키오 다리에서 숨을 멈춘다. 한참 시간을 들여 건넜다가 다시 건너온다. 특별할 게 없는 그저 강 위 다리일 뿐인데도 그토록 벅찼던 이유는 꿈같은 역사 속에 들어왔다는 착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14세기 아르노 강 위에 세워진 이 다리는 베키오 궁과 피티 궁을 잇는 메디치 가문의 비밀통로로, 시뇨리아 광장, 두오모 성당까지 연결되는 구시가지와 성곽 밖 신시가지를 잇는 지금까지도 강력하게 통용되는 피렌체의 상징이다. 조토의 종탑과 핑크, 그린, 화이트가 고루 섞인 대리석의 두오모에 올라 진한 붉은빛 지붕의 작은 도시를 내려다보며 가슴이 뛰었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고풍스런 도시가 피렌체만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이 도시만큼 시공간적으로 완벽하게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곳도 드물 것이다. 소설에서, 단테의 도시 피렌체에서의 단테마스크와 신곡-지옥편이 전반부의 열쇠를 쥔다면, 후반부의 무대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댄 브라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테를 빌려와 얘기하는 인류가 닥친 눈앞의 지옥이다. 막아내지 못하면 개체수 조절에 실패한 연못 속의 금붕어처럼 공멸의 길로 가는 길을 낼 그런 지옥. 

 

 

 

 

 

 

 

 

 

 

 

 

 

 

 

 

세계인구는 기하급수로 늘어나는데 생산설비나 생산물은 산술급수로 늘어난다. 토지, 자원의 한정된 보급량은 이미 적신호인데다 거의 재앙 수준의 미래가 예상되고 있다. 나와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가 된지 오래다. 나 or 당신이 죽는 게 아니라 모두가 죽을 것이다. 인구증가는 지구가 당면한 가장 거대한 산이다. 소리없는 메아리가 단단한 벽에 부딪쳐 다시 되돌아오고 있는 상황을 눈앞에 두고만 볼 수는 없다. 눈앞의 박애정신이 전 인류를 멸종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재앙을 막아줄 중세의 흑사병이나 에이즈 이상의 강력한 무기가 요구된다. 가능하다면 절반의 희생으로 나머지 절반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맬서스가 예견한 인구증가의 재앙은 유전, 토지, 경제 등 한정된 자원을 이유로 발생하는 국지전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측가능한 미래다. 조브리스트는 이 현상을 막기 위해 나름의 대책을 고찰, 발표한다. 강렬하면서도 논리적인 논문은 학계의 비난 속에서도 숨겨진 추종자들을 양성한다. 어느 날 세계보건기구(WHO)의 인구문제에 대한 안일한 대처를 지적하며 '해결'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신스키 박사를 찾아온 조브리스트는 피임법 강의와 피임도구 설파로 충분한 대처를 하고있다는 그녀의 말을 조롱하며 압박을 가해온다. 

 

세계와 조브리스트의 대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옥의 반대가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뛰어들거나 똥물에 거꾸로 처박힐 필요는 없다.

 

"만약 당신이 어떤 단추를 눌러서 지구 인구의 절반을 무작위로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그렇게 하겠는가?"

"만약 당신이 지금 당장 그 단추를 누르지 않으면 인류가 앞으로 100년 내에 멸종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래요?" (1권, p.357)

 

 

 

 

보티첼리,『지옥의 지도』

 

 

 

처음부터 끝까지 상징과 해석, 스릴의 연속이다. 결말을 얘기하지 않으면 예측되지 않는 편의 충격이긴 해도 해당 결말 외에 다른 결말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새롭거나 예상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단서가 결말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이상 읽어가는 도중이 읽고난 이후보다 중요하다. 인류의 진짜 지옥이 굳건히 지켜주리라 믿던 과학에 있는 게 함정, 반전. 대테러를 막기 위한 두뇌싸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댄 브라운은 낙관적 미래를 예견하지 않는다. 유괴범 추격이 실패하면 기껏 개인이 죽을 따름이지만 이 테러를 막지 않으면 인류 전체가 위험하다. 우선순위를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다. 소설은 정확하게 세 번의 공간이동을 한다. 시간이동은 아니다. 길게 잡아 사흘의 시간, 세 개의 도시, 도처에 널린 단서. 그게 바로 랭던 교수의 길이고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개체수가 지나치게 많아질 경우, 그것이 곧 그 종의 멸종으로 이어지는 건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에요. 숲 속의 어느 조그만 연못에 어떤 조류가 살고 있다고 가정할 때, 일정한 시점까지는 완벽한 영양소의 균형 속에서 개체수를 늘려갈 수 있겠죠. 하지만 증식이 무제한으로 계속되면 얼마 못 가 연못의 표면을 완전히 뒤덮게 되고, 결국 햇빛이 차단되어 물속에서 자라던 영양소의 성장이 중단될 거예요. 그 시점부터는 순식간에 개체수가 줄기 시작해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고요."  (1권, p.349)

 

 

인페르노-푸르가토리오-파라디소.

 

원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과 희극을 모두 다뤘지만 비극편에 더 중점을 두고 서술한 것과는 별개로 희극편은 사라져버렸다. 있긴 있었는데 전해내려오지 않는 것은 세상에 많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가 '삼국사기'인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왜 사라졌는지도 중요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있었다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해당 텍스트가 아닌 같은 시대의 다른 텍스트가 말해준다. 단테를 떠올리면 <신곡>이, <신곡>을 떠올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시학>을 떠올리면 <그리스 비극>이 생각나는 일련의 연상을 통해 왜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먼저인지, 왜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마지막인지를 생각해봤다.

 

연민과 공포를 유발하는 비극과 비교했을 때 무지, 속죄, 배신의 쾌감에서 나오는 희극은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으로 볼 때 위험한 카타르시스에 해당하고, 이 팩트를 두고 '왜 희극편이 사라졌는가'를 소설적으로 증명한 이는 <장미의 이름>의 움베르토 에코였다. 거기 나오는 사라진 희극편, 금서의 장마다 독을 묻혀 읽은 자들을 죽임으로서 책을 감추는 그것. 처음, 책의 시대적 의미를 접하면서 전율했었다. 이 시대 우리는 책을 한낱 고루한 놀이라고 여기지나 않으면 다행일만큼 그 지위를 격하시켰는데, 중세에는 한 권의 책이 곧 우주이자 신이자 세계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적절할 만큼 나는 희고 매끈한 도화지였다. 모든 걸 흡수했고 다시 삼키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금 책의 가치가 곧 중세시대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이탈리아 각 도시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여행지지만 인간의 배신, 음모, 영광, 패배와 같은 역사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대단한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이 늘 그곳을 무대로 하고, 이탈리아에서 종종 그의 소설 속 루트를 따라 여행상품을 계발하기도 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 디오니소스로부터 시작된 극의 형식은 처음에는 낭송이었다. 무대와 관객석을 분리하고 그저 시를 읽어주는 것. 시를 읽어주고 반응을 얻는 기제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라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예술작품을 통한 감정이입과 내면화. 비극은 눈물을, 희극은 웃음을 유발함으로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 하필이면 지옥에서 연옥 그리고 천국으로 향하는 신곡의 순서를 생각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떠올랐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안내에 비로소 천국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 절대자가 있었다. 절대자는 중세의 정신이었다. 절대자는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했다. 웃음은 눈물을 내려다보고, 눈물은 웃음을 올려다본다. 하지만 삐딱한 내가 생각하기를, 절대자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현대가 강력하게 증명해주고 있는데. 국민 전체의 의견은 깡그리 무시된 채 높은 권좌의 손가락 하나면 시작되는 전쟁, 법도 정의도 청춘도 희망도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의 낮은 공명심으로 유지된지 오래.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 내가 높은 곳에 있지 못해서인가. 절대자는 역시 천국에 있는 것인가. 아님 높은 권좌가 세상에 필요한 것을 적절히 제공하지 못하는 탓일까.  

 

 

 

 

 

 

 

 

 

 

 

 

 

 

 

 

 

단테를 좀 더 잘 알기 위해 이 책들을 골랐다. 조금 돌아 <신곡>은 이후에나 다시(아니 처음으로) 시도. 다 빈치나 '모나리자'를 몰라도 <다빈치 코드>가 읽힌 것처럼 단테나 '신곡'을 몰라도 <인페르노>는 얼마든지 흥미진진한 추리 스릴러로 읽힌다. 순전히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내 머리 속 공상 때문에 이 페이퍼를 썼다. 과학도, SF도 아닌 추리소설(에 가까운)을 두고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선택적 가치판단의 시험에 드는 건 우리가 점지된 비범한 능력자가 아니라 지구 어느 곳에서나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누군가에게 영향 받거나 휘둘리기 싫어하는 고약한 성미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각자)의 지구별 탄생이 우연과 무작위로만 가능했을까. 혼돈-인류의 도태와 멸종-을 막아내는 방향으로 인류가 진화해온 이유가 지구를 정화해야 한다는 조브리스트의 주장을 제거시킨다. 언젠가 죽을 것과 죽기로 예정되어 있는 것은 다른 밀도의 위화감을 불러 일으킨다. 설령 두 날짜가 시분초까지 같더라도 말이다. 죽음을 유예시키고자 하는 자의 두려움 끝에 인류멸망(지구종말)의 길이 기다린다는 설정을 더해 탄생한 미친(어떤 언론평에 의하면) 소리.

 

다시 생각해도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내가 극명한 급진주의자가 될 거란 명쾌한 증명은 갖지 못하지만 적어도 소수의 손에 다수의 명이 오락가락하는 순간만은 없어야 한다. 가혹한 흐름이다. 나는 누군가의 선택과 결정에 흔들리는 순간이 제일 두렵다. 모든 것을 꿰뚫어(그렇다고 착각) 신중함 끝에 조심스럽거나 당돌하게 내리는 판단만이 내 것이다.

 

여름이고 세 소설이 나란히 베스트 3를 차지하기고 있기에, 정유정, 댄 브라운, 하루키를 줄지워 정공법으로 지나왔다. 사이사이 다른 책도 읽었다. 좋아하는 드라마도 엄청나게 봤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여왕의 교실]은 몰입도가 짱이고, [황금의 제국]은 아직은 뻔하지만 그래도 재밌다. 그러고보면 특정 분야, 신간차트를 빠짐없이 체크하고 읽(으려 하)고 있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를 줄쳐 지워가며 읽는다는 독서가(배우)의 인터뷰를 보며 신기했었다. 베스트셀러라는 위치가 애매해서 괜히 피해가고 싶거나 독파해야 할 듯한 갈팡질팡 사이에서 괴로운데, 결국 못하는 이유가 자기계발서나 대중도서가 대다수로, 영 내키지가 않기 때문이다. 소문은 발이 없는 거라서 베스트셀러는 그저 '당신이 사면 나도 산다'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수준을 평가절하해서가 아니다. 제대로 집중하면 세 작품을 삼일천하에 끝낸다(그러지 않기는 불가능)는 장단점(?)이 있지만 어쨌든 어떤 책이 불티나듯 팔리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닌가. 그래도 이상하게 애국심 돋아서 아니면 멍청한 국수주의자라고 해도 좋고, 댄 브라운 보다는 정유정이, 하루키 보다는 조정래가 더 오래 상위순위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그냥 그렇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리뷰는 쓰고 싶은데 막 오락가락 머리속에서 춤추는 생각들 때문에 결국 이러다 말 것 같다. 어떤 얘기를 써도 뻔해질 것 같은 반면 한층 내밀한 얘기를 곧잘 쓸 수 있을 듯한 희미한 착각에 시달리기도 한다. 또 금요일. 요즘은 '또 금요일'이란 말을 자주 할 만큼 체감상 시간이 물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더이상 밤을 새지는 않는다.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밥맛이 너무 없고 덩달아 밥먹을 시간도 없어서 겨우 책을 삼킨다. 책은 희한하게 그렇잖아도 내려올 줄 모르는 나르시시즘과 자존감만 자꾸 드높이는 것 같다. 너그러워지는 게 아니라 고립되는 방식으로. 얼음성이나 아이스크림 동굴로 기어들어가고 싶다. 구멍가게를 이용해야 한다고 하지만 세일을 하기에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털었다. 이런저런 것들도. 안산 건 맥주 뿐이다. 온라인에선 안파니까. 애국주의자인 척 한 건 취소다.

 

뭐 딱히 좋은 거라고 책을 광속으로 사모은다는 소식. 이런 소식을 누가 궁금해나 한다고.

 

여름이 지옥이다. 닭들이 자꾸 죽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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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18세기 조선을, 사화와 붕당을, 숙종과 영조와 정조를, 연암과 다산을 좋아한다. 아마 조선을 통틀어 많은 사람들이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대목일 것이다. 그 복잡한 붕당의 흐름과 권력암투을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있어서는 안될, 없어도 좋을 당파싸움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현대와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지 또 융합되지 못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무엇보다 이 시대 얘기들은 무궁무진하고 권력구도와 학문, 사상적 일대기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사람을 매혹시킨다. 팽팽한 긴장선을 타고 흐르는 시대의 봉인. 영정조 시대를 가르는 두 줄기. 연암과 다산. 이런 전무후무한 라이벌. 매력넘친다, 이분들. 평생 같이 갈 남자를 고르는 거면 조금 더 끌리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는데, 인간적으로라면 그럴 수 없다. 너무나 상반된 분위기, 성격, 가치관이 그가 곧 그 사람이므로 가능한 것. 단점조차 인정해주고 싶은 연인이랄까. 생애와 시대가 밀착된 운명, 아름다운 블랙홀 속으로 지금 출발.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암과 다산의 생애와 명리학,양자역학적 사주 분석, 문체와 세계관, 사상과 윤리, 곁들어지는 붕당적 흐름까지. 붕당정치의 흐름을 교양 이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데도 연암의 벗들이나 다산의 친인척, 정조 곁의 남자들 이름이 낯선 경우가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천재들. 그들은 왜 단 한 번도 공식적인 만남이 없었을까. <두개의 별 두 개의 지도>는 이를 시작으로 2년에 한 권씩 3탄을 계획중이란다. 두 별의 생애와 업적, 18세기 정치사상지도와 시대적 흐름 그리고 세계문명권 지성사로 넓혔다가 돌아오는 과정으로. 길고 먼 여행이 되겠지.

 

 

물과 불(불을 품은 물과 물을 품은 불). 지혜와 열정. 사건과 사실을 꿰뚫는 힘과 어둠을 밝히는 투시력. 유머와 박학. 좁쌀 한알과 세상 모든 진리. 완격과 급격. 파동과 입자. 수많은 해석과 모호함의 제거. 노론 '벽파'와 남인-성호 '좌파'.

 

앞이 연암, 뒤가 다산의 특징이다. 두 사람의 출생에 25년이라는 격차가 있었다.

 

'삼중주'를 위한 세 개의 연대기

 

연암 : 1737~1805년

정조 : 1752~1800년

다산 : 1762~1836년

 

 

이 연대기가 말해주는 것? 맘고생 하면 권력과 재물을 다 가졌더라도 단명한다. 정조처럼. 권력의 중앙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쳤던 연암이 살 만큼 살았고, 군주를 잃고 권력으로부터 멀어져 학자로 변신하여 18년, 해배되고 18년을 더 산 다산이 가장 장수한 걸 보면 욕심과 화를 놓고 편히 지내는 기간이 길어야 오래 살 수 있다. 권력과 재물 없이 길고 가늘게 살면 뭐하냐고 묻진 마시고.

 

어쨌거나 두 별 사이의 교집합은 조선의 '달' 정조였다. 연암은 느슨한 권력욕, 자유, 호방한 성격, 다산은 강한 집념과 천주교, 정조는 문체반정과 개혁군주로 요약된다. 연암은 쉰 이후 아내가 죽자 생계형 관직에 딱 한 번 진출한 이외에는 관직과 멀어지려 애쓰는 삶을 살았다. 능력이 특출했기에 군주의 부름을 수없이 받지만 한사코 긍정의 응답을 사양한다. 다산은 달랐다. 과거에서 일부러 백지를 내거나 쓸데없는 글을 끄적이다 나오는 연암에 비하면, 다산은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관직으로의 진출을 꿈꾸었다. 대과에 네 번 낙방하지만 합격 후 왕이 내는 과제를 매번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할 만큼 훌륭했다. 정조가 시도한 '초계문신'이나 '문체반정'은 정치와 학문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였지만 '문체반정'은 사실상 흩트러진 조선의 성리학적 기반을 다스리고 군주의 권력을 확고히 하는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개혁정치가 아니라 보수정치였던 셈이다.

 

벗과 가문, <열하일기>와 <목민심서>, 연암협과 다산초당, 문체와 서학(천주교). 성리학적 기반과 강상의 모든 것을 뒤엎고 유일신(군주)을 해체하며 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 교리가 사실상 서양의 학문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학문이었기에 더욱 타당성을 가질 수 있었고, 대가없이 목숨 바치는 순교자가 늘어났다. 문체반정은 실패했지만 이 '반정'이 조선 시대의 다른 반정(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과는 다른 모습, 색다른 방향의 개혁구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타이르고 어르고 벌하고 유배하는 식으로 어긋난 것들을 바로잡을 거라 믿었던 어진 군주의 순진한 판단인지는 몰라도. 다산은 원칙주의자에 도덕주의자다. 정조의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타당하다고 여긴 듯하다. 비록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 유머와 패러독스를 구사하는 연암의 문체를 군주와 함께 눈감아버림으로서 갈길을 잃어버리지만 말이다. 자신은 배교하지만 피해갈 수 없었던 가족들의 피바람.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던 군주. 군주의 죽음 후 닥친 신유박해. 다산의 삶은 천주교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문체와 서학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 세계화와 맞물리지만 성리학적 지반을 뒤흔든다는 이유로 극렬한 변주를 시작했고, 많은 목숨을 희생시킨다. 서학으로부터 비교적 멀리있어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근거를 갖지도 못한 연암, 서학이 아니라면 후반부 인생을 설명할 수도 없는 다산. 이렇게 두 사람. 균열과 불길에 휩싸이며 꿋꿋하게 나아갔던 신념과 평행가도를 달리는 정반대의 삶, 그 운명이 돋보인다.

 

 

 

 

 

 

 

 

 

 

 

 

 

 

 

 

 

 

신기하다. 무신정권과 대동법이 그런 것처럼 연암 출생부터 다산 사망까지 100년. 영조는 조선역사상 가장 긴 52년의 재위기간으로 유명하고, 정조는 스물 다섯에 왕위에 올라 약 25년간 자리를 지킨다. 가장 개혁적인(보수든 진보든) 시도를 했던 두 왕의 사후, 조선이 급격한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는다는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그 세도정치기가 60년이 넘어간다는 것도, 이후 외세의 개방요구에 한없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도.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할아버지를 향한 애증을 모두 가졌던 정조는 탕평책, 법전편찬 등 할아버지의 업적을 이어가는 의아함을 보여준다. 폭군이 되지 않았다. 권력의 무자비를 휘두르지 않는 대신 학문과 개헉으로서 나아가고 싶어했다. 영정조 시대는 거의 77년이다. 연암과 다산이 왕에게로 통한 행태 역시 다르다. 한쪽은 가능할 때까지 도망갔고, 한쪽은 죽을 때까지 해바라기 사랑을 퍼부었다. 다산을 믿고 의지하고 높이 평가한 건 맞지만 왕이 신하 한 명에게 모든 것을 걸었을 리 없으니 다산의 군주를 향한 사랑이 더 맹목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어찰인 '정조어찰첩'을 통해 밝혀진 걸로만 봐도 정조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맥으로 통치했다. 정조 시대의 측근으로 늘 다산이 등장하는 이유, 정조만 들어도 단 하나의 얼굴이 떠오르는 이유, 그게 바로 반복과 주입이 주는 교묘한 세뇌라할 수밖에.

 

다산이 학자로 변신한 것은 유배지에서다. 군주를 잃은 후 닥친 피바람이 그를 정숙한 학자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연암이 <열하일기>만을 남긴 데 비하면 다산의 저서는 나열하기도 벅찬 양이다. 다양한 주제의 사상적 텍스트들은 질적으로도 우수하다. 그의 시선과 마음은 늘 궁을 향해 있었다. 유배지에서의 많은 나날, 이미 없는 군주를 그리워하며 시대에 대한 애환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을까. 연암이 훨훨 날아가듯 썼다면 다산은 주석과 인용을 통한 잘 짜인 백과사전식 구축에 힘을 쏟았다.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여행하며 붓 가는 대로 물 흐르듯이 쓴 <열하일기>와 목민관에서 지켜야 할 수령의 도덕적 지침서로 여겨지는 <목민심서>가 서로 다른 문체를 잘 설명해준다. 연암은 자신을 깨진 조각으로 여기며 전체에 필요한 일부가 되려 했다. 호기심 대왕, 유연한 지성, 호방한 성격, 폭발하는 역마살을 가진 그의 인생은 소리없이 흘렀다.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한문소설과 시짓기에 능했고, 성리학과 북벌론이라는 거대담론에 휩싸이지 않았다. 반면 다산은 세세한 사항에 집착했다. 세밀한 디테일과 방대한 주석이야말로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청렴과 절욕, 윤리적 내공 등 덕을 지닌 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도덕성에 기반을 둔 삶이다. 명랑과 진지. 두 사람의 기질은 고루 섞여야 마땅했다.

 

천 개의 '고원'과 천 개의 '계단', 유머와 패러독스 그리고 리얼리즘과 파토스. 쭉 읽어가다 알만큼 알게 되었을 때 이제껏 알던 모든 지식과 합쳐지면서 이 두 가지의 비교가 결국 두 개의 별을 밝히는 모든 것이라는 결론이 섰고,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개인사, 사상사, 생활상, 정치사까지 훑어내려온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백 년의 시간이 순간처럼 여겨지기 시작할 때 나는 비로소 지금까지의 독서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에게는 고문이 어렵다. 적어도 아직은 <목민심서>나 <열하일기>를 읽을 능력은 되지 않는다. 연암과 다산이 지향하는 주제 역시 결국 같은 얘기였겠지만 상당부분 달랐다. 양반과 탐관오리의 무능과 허위를 비판하거나 밑바닥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여러 소설들에 드러난 풍자와 역설이 연암의 소설에서 드러난다면, 적나라하게 표출된 비장한 현실의 재현 속 고난과 분노와 격정을 드러내는 건 다산이었다. 서로 다른 글쓰기는 주제든 문체든 그 자체 측면에서 태생적 한계와 생애, 가치관과 세계관을 반영한다. 부조리와 저항 정신만은 꼭 닮았다. 두 사람의 시대를 향한 애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같은 시대를 이토록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다니. 심지어 먼저 간 지인의 묘비명 짓기에도 뛰어났던 이들의 차이는 애도와 증언인데, 지인의 다한 생을 두고 연암이 시를 지었다면, 다산은 증명하고 요약했다. 차이의 향연과 의미의 명징성, 프리랜서와 정규직, 에세이와 백과사전의 차이. 그들이 서로를 건드리지 않거나 만나지 않았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이러한 차이를 잘 알았고, 결코 융합되지 못하리라 여겼거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후자였으면 좋겠다.

 

 

 

 

 

 

 

 

 

 

 

 

 

 

 

 

 

<정조와 18세기>는 스스로를 태양과 달로 표현한 군주 루이 14세와 정조를 비교, 지금껏 개혁군주로 통한 정조에 대한 보수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시각을 담았다고 신문 북세션에서 소개하던 책이다. 심한 학술서 냄새, 이런 책이 교양도서로 자리잡을 리도 없지만 그나마 가장 개혁가였던 정조를 보수주의자로 결론내리면 내 사랑 정조, 그 이미지가 깨어지는 건 슬픈 일인데, 어떤 개체가 반드시 한 가지 평가로 귀결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사도세자의 고백>을 읽고 사도세자가 왕인 나라에 살고 싶다고 썼던 기억난다. 아, 그래서 역사와 시각이 진보하고, 덩달아 독서도 진보하는 거라니까. 고집이 세서 태생상 팔랑귀는 절대 될 수가 없지만 역사를 어쩌나. 자, 제가 나서서 진실을 구하겠습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최근 학계의 다수설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당파정쟁의 희생양이기보다는 살인을 서슴지 않던 미치광이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한사코 자결을 거부했고, 그 더운날 뒤주에서 홀로 몸부림치다 외롭게 죽었다는 것. 어쨌거나 왕위를 이어야 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진 세자가 뒤주에 갇혀죽은 사실이 썩 바람직한 일은 아닌데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충격이 거듭되고 있다. 진실은 하나일텐데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시각은 뒤집히지 않는다. 역사의 어떤 사건을 두고 다수의 힘으로 밀어부치거나 지나친 소설짓기는 불편한데, 그렇다면 재미로 보면 그만이라는 사극도 문제가 된다고 본다. 김태희가 연기하는 장옥정은 인현왕후와 영혼체인지한 것 같다. 비난하기 위해 읽는다는 말도 있으니 난 언제나 그저 보고 읽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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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2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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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04: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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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2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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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04: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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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2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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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04: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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