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1

 

 

 

 

 

 

 

 

  새해 첫 날, 함박눈이 내렸다. 창밖의 나무들은 제각각의 덩치만큼 눈을 얹고 서 있다. 나무의 눈은 가지가 휘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쌓일 수 있다. 나무도 억지로 휘어 제 몸 위의 눈을 털어내지 않는다. 바람이 불거나, 눈이 녹아 무거운 물이 되지 않는 한, 나는 저들의 모양에서 ‘적당’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오후. 마을에 요정처럼 쌓여 있던 눈을 쓸고 들어와 개운하게 씻은 뒤 커피 한 잔을 옆에 끼고 키보드를 만지작거리던 참이었다. 이것도 질환이다. 소위 ‘센치’해지면 눈보다는 손이 더 간지럽다.

 

  읽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많으면 자연스레 ‘나’를 덜어내게 되는데, 때때로 느끼기를 그 모양이 퍽 초라하다.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 정도야?”라는 자괴감이 드는 것은 비근한 일이고, 때때로 더 나아가 주변의 책들을 별로 읽고 싶지 않은 무기력까지 부르지 않은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의 나무처럼 자신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쌓아둬야 하는데, 인간은 제 편한 것만 하려고 드는 버릇이 있어 한 번 글쓰기의 자태에 유혹되면 독서의 얼굴이 별로 예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독서와 이별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사랑이다.

 

  젊을 때 많이 읽으라는 교수들의 말이 하나같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지난 해 일곱 개의 강의 중 다섯 개의 종강 때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독서에 대해 한 마디씩 하고 넘어갔다. 명퇴를 앞둔 - 나와 같은 일산에 거하시는 - 한 노(老)교수는 버스에서 스마트폰 보지 않고 책 한 장이라도 더 넘겨보는 사람이 없다며 혀를 찼다.

 

  독서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이다. 눈으로 문장들을 따라 내려가는 것, 책장을 넘기는 것, 하물며 손가락에 침을 묻히는 것 모두가 아날로그이다. 디지털처럼 0과 1로만 단순하게 이해하고 단속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처럼 독서는 하나의 연속이다. 앞선 독서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뒤이은 독서가 기대된다. 따라서 독서는 기술의 혁명적 진화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된 부분이 있는, 인간의 사고 영역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기술이 생활과 사고를 바꾼다지만 독서는 강조하건대 ‘연속’이며, ‘역사’이다. 오늘날 타자기와 삐삐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으나, 플라톤과 공자를 읽는 사람은 있다. 1시의 세상에 살던 사람들이 읽었던 책을 7시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도 읽는다. 독서는 시침, 분침, 그리고 초침의 끝에 묻어 시계의 360도 전체에 각자의 지문을 남기는 것이다. 해석은 각 시간의 사람들에게 제 몫으로 주어진다.

 

  읽는 건 기억하는 일이다. 독서는 많은 것을 기억하게 해준다. 영향력 있는 저자들이 매해 쏟아내는 책들은 이 시대의 우리가 기억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담고 있다. 우리가 일상의 온갖 제약으로부터 정작 잊으면 안 될 것들을 소홀히 여기고 있을 때, 세상의 한편에서는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작업이, 그 고독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중요한 것은 책이 아니라 세상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책이 세상을 담고 있다는 것을 굳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이 문자로 변환되면 세상 본연의 가치가 줄어든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마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움직이지만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 지구처럼 움직이며, 세상에는 수많은 이들이 나와 때론 무관한 것 같은 삶을 살아가고, 죽고, 또 태어난다.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실제 삶을 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소위 ‘골방철학자’나 ‘개똥철학’처럼 그저 기억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겠으나, 그렇다고 기억의 가치가 저평가될 이유는 전연 없다.

 

  최근 읽고 있는 장석주의 『일상의 인문학』에 이런 구절이 있어 옮겨본다.

 

  “세월이 갈수록 기억의 부실함이 그것을 망각의 자리에로 넘기겠지만, 우리는 망각에 저항해야 한다. 그래도 결국 우리는 어제를 망각하고 역사를 망각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유하는 법을 망각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법을 망각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망각하고, 망각의 악순환 속에서 표류하면서, 바쁘게 살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마땅히 기억해야 할 만 한 일들을 고의적으로 유기하며, 그것을 망각의 불가피함이라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망각이 심해지면,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망각하고, 망각한다는 그 사실 자체를 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망각은 삶을 망친다. 망각은 곧 기원의 기억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기억하는 삶을 위해서라면 책과의 조우는 결코 피할 수 없다. 잠깐이라도 읽는 삶, 짧게라도 메모하는 삶은 빠르게 뛰는 우리의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가치들을 최대한 붙잡아두는 삶이다. 그것은 결코 멋있거나, 낭만적이거나, 운치 있는 일이 아니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다리를 꼬고 최대한 우아하게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고 “멋있다. 부럽다.”며 독서를 시작하고자 마음먹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독서는 힘들고, 고독하며, 때론 잔인할 정도의 자기비판도 서슴지 않고 실행하라 강제하는 행위이다. 그것이 우리를 기억하게 만드는 - 트라우마를 제외하면 - 거의 유일한 길이고, 삶의 가치를 수호하는 - 무력을 동원하는 것을 제외하면 - 역시 거의 유일한 길이다.

 

  나무의 가지에 얹힌 눈을 나에게도 얹어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본다. 결론은 당연히 “새해에는 더 많은 책을 읽어야지.”라는 교과서적이고, ‘초등학생 일기’적인 다짐으로 이어지는데, 나이가 얹힐수록 나는 이런 종류의 다짐이 유치한 것이 아니라 더욱 절실하고 무겁고, 때문에 더 나에게 알맞은 것으로 느껴진다. 독서를 많이 하겠다는 것은 그냥 책장을 넘기겠다는 뜻이 아니므로. 때로 그건 날선 각오이기도 하므로.

 

 

 

p.s 이 졸문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올 한 해 "인생을 바꿀 책" 한 권 '얻어 걸릴' 놀라운 행운이 함께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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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2 0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2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티티카카 2013-01-06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 잘 받아 먹겠습니다. 잘 봤습니다 ^^

탕기 2013-01-07 00: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숲노래 2013-12-0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을 다룬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얼굴로 눈을 맞으면서 살갗과 온몸으로 '눈이라고 하는 책'을 읽을 수도 있어요.

곧 새로운 새해가 되겠네요~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2.12.30

 

 

 

  강의를 마치며 교수는 우리에게 어디 가서 자랑하고 다녀도 좋을 것이라 했다. 한 차례 태풍처럼 불었던 인기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 책의 모든 내용을 꼼꼼하게 따져가며 정독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는 농담을 한 것이리라. 우리가 정말 어디 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온 사례들과 윤리이론의 근거들을 자랑 삼아 말하고 다닌다고 하자. 누가 들어줄까. 한 교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는 정의를 몰라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제목에 목말라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의롭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정의를 막연하게 갈구하고 있다.”


  나는 강의실 뒤편에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의롭고자 하지 않는다, 라. 나는 어떠한가? 알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정의’는 추구해야 하는 미덕이다. 하지만 정의는 권력이 되지 못한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우리를 움직일 만한 행동 기제도 되기 힘들다. 정의로운 권력은 없다. 지난 『정치와 진리』의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정치는 그 속성이 윤리·도덕과는 다르다. 인수위와 관련된 지난 KBS 다큐멘터리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왔다. 쓸 만 한 사람 참 많은 줄 알았는데, 정작 자리에 앉히려고 보니까 마땅한 사람이 없더라는 토로였다.

 

 

*    *    *

 

 

  『정의란 무엇인가』는 미국에서 왜 공동체주의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지를 밝혀주는, 의도된 논리적 구조물이다. 샌델이 여러 철학자들의 위치를 배치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글을 잘 구성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주요 논객들이 『무엇이 정의인가』에서 이미 논했었다.


  샌델이 충돌시키는 주요 이론들을 열거해놓고, 그것들이 어떻게 대결하는지 구도만 살펴보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공동체주의가 왜 도출될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된다. 성실한 독자들이라면 자신의 - 평소 이를 고민한다면- 윤리적 위치에 따라 각 이론들의 지점에 멈춰 서서 굳이 공동체주의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샌델의 말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가게 될 것이다. 읽는 것과 수긍하는 것이 동시에 행해진다.


  먼저 나오는 것은 공리주의이다. 벤담의 것과 밀의 것이 다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샌델은 이 두 공리주의의 대가들을 하나로 모아 반박한다. 마치 불도저처럼 도덕을 과학의 영역으로 밀어붙이는 벤담의 이론에는 성긴 부분들이 많다. 그 안에서는 정의를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공리주의가 현대철학과 윤리학에 있어 경제학의 도움을 받아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은 강조해야 할 것 같다. ‘효용’이라는 가치는 우리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도덕과 윤리 앞에서 어떤 신비로운 감상에 빠져 있을 때마다,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효용이다.


  샌델은 공리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세 개의 이론을 연달아 제시하며, 그 내용은 3~6강, 거의 1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꽉 채운다. 그 이론들의 대표 격인 이들에는 로버트 노직, 임마누엘 칸트, 그리고 존 롤스가 있다. (책 순서와는 달리 교수는 칸트, 노직, 롤스 순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칸트가 공리주의의 반발로 ‘권리’, ‘존중’, ‘자유’의 개념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노직이 공리주의를 비판하며 주장한 것은 결과가 아닌 진행과정(process)을 밝혀야 정의의 문제를 따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노직의 위치는 공리주의와 존 롤스 사이에서 동시에 충돌할 수 있는 자유지상주의의 정점이다. 자유지상주의란 쉽게 말해 “내가 내 것을 처분할 권리가 있는데, 누가 감히 그 권리를 침해하려고 하는가?”라는, 결코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은 ‘권리’ 논쟁으로 귀결되는 이론이다.


  우리는 “부자들의 돈을 조금만 떼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사회가 더 여유로워지지 않을까?”라고 넋두리를 하곤 한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를 이해하면 이런 넋두리는 하나의 범죄로 취급될 만하다. 1970~80년대 우리나라에 급속도로 수입되기 시작한 이 이론은 경제발전과 함께 자연스럽게 옮겨왔는데, 아마 대다수의 경제·경영학도들은 자유지상주의적 사고에 익숙할 법도 하다. 강의 중에도 자유지상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 심지어 - 전부가 경영을 전공 중인 학부생들이었다.


  그들이 부자의 돈을 재분배하는 것, 소위 ‘부의 재분배’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슨 권리로 나의 돈을 빼앗는가?”라는 거의 확정적인 반박이다. 공리주의자라면 결과적으로 사회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결과가 행복으로 딱 떨어질 수 있느냐를 문제 삼으면 공리주의는 다시 측정의 문제에 빠지게 된다. 오히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부의 재분배’를 반대하며 내놓는 ‘권리’의 논거가 훨씬 단단해 보인다.


  세계적 갑부인 프랑스의 베르나르 아르노 현 루이뷔통 회장은 올랑드 대통령의 75% 부유세 정책 때문에 벨기에 국적을 취득하겠다고 해서 논란의 중심에 오른 적이 있었다. 연간 14억 원, 즉 100만 유로 이상을 버는 부자들에게 증세하는 정책은 프랑스 좌파의 핵심정책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여야를 막론한 비난을 받은 쪽은 올랑드 대통령이었다. 물론 좌파 언론인 <리베라시옹> 등에서는 “꺼져, 부자 멍충아!”라는 식의 원색적 문구로 베르나르 회장 측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런 공격은 국민배우 드 파르디유도 받을 만 했다. (오늘 우리나라 언론들은 일제히 75% 부유 증세가 프랑스 헌재로부터 결국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았다는 보도를 냈다. 올랑드 대통령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국가가 국민들에게 아버지처럼 행동하는 것, 입법, 소득의 재분배 같은 것들을 반대한다. 재미있는 것은 자유지상주의가 개인의 인권을 다루는 분야에서는 오히려 복지국가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지상주의의 스팩트럼은 매우 넓으나, 한 가지 가치, 즉 ‘개인’이라는 가치는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한다. 노직의 말이다.


  “개인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는 어느 인간이나 집단도 이 권리들에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이 권리들은 매우 강력하고 광범위한 것으로……”
  (Individuals have rights, and there are things no person or group may do to them (without violating their rights). So strong and far-reaching are these rights that ……)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칸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그의 구미에 적당하게 요약되어 있으나, 사실 1785년에 작성된 이 텍스트의 개념들은 상당히 어렵다. 특히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 칸트의 것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극도 있는데, 예를 들어 샌델이 중요시한 ‘자유’가 있다. 우리는 ‘자유’라 쓰고 개인의 위대한 권리인 것처럼,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때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로 오용하곤 한다. 학생인권조례 이후 교사들이 학생들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중시한다. 그러나 나의 자유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나의 자유는 축소되어 타인의 권리와 조화될 필요가 있다. 일부 학생들이 문제가 된 건, 그들이 저 조화를 전혀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반면, 칸트는 자유를 ‘자율(自律)’이라 쓰고 우리에게 인간이기 때문에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들을 던져놓는다. 이러한 의무들은 칸트의 그 유명한 ‘순수이성’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갖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도덕이 감동적인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한 느낌을 주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절대적 의무 때문이다.


  칸트는 보편적 인권으로 ‘권리’, ‘존중’, 그리고 ‘자유’를 수면 위로 끌어낸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인권이 굳건하게 유지되어야 할 절대적 이유로 앞서 말한 인간의 이성을 꼽았다. 이렇게 하다 보니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와는 전혀 다른 이론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칸트는 공리주의보다 훨씬 따뜻하다.


  칸트는 인간이 선의지(Guter Wille)를 가졌다고 했다. 모든 자질들 중에서도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선의지는 그 수많은 자질들을 올바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지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을 제시했던 것과 패턴이 유사하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나왔다. 선의지는 “보석과 같이 그 자체만으로도, 그 자신 안에 온전한 가진 어떤 것으로 빛날 터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동기이다. 이 동기를 갖고, 내가 한 행동을 모든 사람들에게 권할 수 있다면, 그것이 유일한 준칙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칸트의 윤리가 지켜질 수 있는가를 묻는 자리에서 샌델은 확신을 하지 않는다. 그 예로 클린턴의 성추문 사건을 드는데, 칸트에 따르면 정직하게 사람을 속이는 일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칸트는 윤리에 있어 정말 중요한 개념들을 제시했고,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윤리 관념을 끌어내 종교의 윤리를 전복시키는데 역사적인 역할을 했으나, 샌델에 따르면 칸트의 것은 우리가 따르기에, 소위 ‘2%’ 부족한 정의를 제시할 뿐이다.


  이윽고 롤스이다. 샌델은 롤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를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에둘러 비판하거나 하진 않는다. 롤스의 『정의론』은 자유지상주의와 첨예하게 맞선다. 우선 롤스는 ‘공정한 정의’라는 개념을 통해 애당초 합의하고자 한 여러 사람들 모두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줘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사실이란 그들이 어떤 합의를 하게 되면 향후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즉, A를 고르면 너는 훗날 멋진 의사가 될 것이다, 라든가, B를 고르면 평생 거지로 살 것이다, 와 같은 사실이다. 이것들에 대해 ‘무지의 베일’을 쓰게 되면 우리는 합의를 함에 있어 어떤 것들을 구체적으로 논하고자 할까? (샌델은 더 나아가 ‘계약’이라는 것 자체도 도덕적 한계를 갖는다고 반박한다. 합의가 의무를 발동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의의 제 1원칙이다. 어떻게든 우리가 시작을 평등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한 네티즌의 재미있는 댓글이 있다. 얼마 전, 위대한 축구 선수 메시의 아이가 태어나 화제가 되었다. 그러자 누리꾼들은 온갖 종류의 댓글을 달았다. 그 중 하나는 이렇다. “메시의 아들 : 아빠,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난감을 갖고 싶어요!” 그러자 메시가 얼마 후 하는 말이 “아들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난감 가게를 사왔단다.” 산타클로스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꿈만 같을 것이다. 메시의 아이는 사회적으로 출발하는 선상이 중하류층의 아이들과 판이하다. 누리꾼들은 메시가 서 있는 곳을 일컬어 이른바 ‘신계(神界)’라 한다.


  롤스가 이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차등원칙’을 마련했고, 이것이 바로 그의 『정의론』의 골자가 된다. 롤스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조건 하에, 즉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기대되는 선에서는 불평등을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불평등은 롤스가 ‘도덕적으로 우연(morally contingent)’한 것들이라 지적한 출생, 재능, 집안, 교육 수준 등을 의미한다. 샌델이 공리주의, 칸트주의, 정의론 중 가장 호의적으로 서술한 것이 바로 롤스의 것이다.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함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거대한 이론들과 첨예한 문제들을 살펴가다 보면 독자들은 여전히 저들 이론이 해결하지 못한 무언가가 갈증을 유발한다는 것을 눈치 챌 것이다. 때문에 샌델은 서서히 그의 입장, 즉 공동체주의로 가는 길목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이다. 그에 앞서 샌델은 소수집단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통해 ‘영예’, 『정의란 무엇인가』의 역자 이창신은 ‘영광’이라 오역한 ‘honour’의 문제를 짚고 넘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의 목적(purpose, telos)에는 필연적으로 영예가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그의 정치철학은 호소력을 잃었으나,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 국가[폴리스]가 좋은 품성을 지닌 시민을 양성하고, 그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해 능력구현의 기회를 가지며, 그러한 폴리스를 운영하기 적합한 사람들을 선정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영예를 준다면, 그것이 또 하나의 교육적 효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주장이다. 폴리스는 덕[(virtue)이 있는 시민들을 길러내고, 그들을 통해 운영된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덕 윤리학’이라 한다. (그가 말하는 ‘덕’은 능력에 있어서의 훌륭함이다. 도덕의 ‘덕’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여기서 샌델이 강조하고자 한 것은 능동적인 참여와 교육이다.


  샌델은 곧바로 ‘충직의 딜레마’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넘어간다. 여기서 샌델이 독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국가가 과거의 사건에 대해 사죄해야 하는가?” 쉽게 말해 집단책임, 즉 collective responsibility의 문제이다. 과연 나에게는 얼마만큼의 도덕적 몫(moral stakes)이 있는가?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나는 내가 자발적인 합의, 동의, 약속 등을 통해 초래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그건 my owe이다. 때문에 개인이 국가에 앞선다고 주장한 로크식 생각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최근 이러한 ‘도덕적 개인주의’ 때문에 말이 많다. “내가 안 했는데, 왜 나한테 책임을 물어?”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그래도……”


  샌델이 우리에게서 유도한 생각도 바로 이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뭔가 책임을 져야 할 것만 같다. 사실 그의 공동체주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다지 생소한 윤리이론이 아니다. 우리는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주체임을 강조하면서도 그것 이외의 ‘플러스알파’가 우리를 규정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가족으로부터는 가족애를, 종교로부터는 신념을, 그리고 역사로부터는 애국심과 동질감을 얻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나’ 이외의 정체성을 심어준다. 이를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라는 의미로 ‘encumbered selves’라 부른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밀고 끌어준다는 말은 상식이고, 여기에 편승하지 않으면 무능력한 사람인 것처럼 취급되는 것이 이 사회의 오랜 병폐임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한편으로 이런 문화는 보편적인 권리를 부정하고, 지나치게 소규모의 권리만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냐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샌델은 공동체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보편의 권리를 동시에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하나의 이론을 끌어온다. 그와 같은 계열에 서 있는 매킨타이어의 ‘서사적 인간(storytelling beings)’이다.


  매킨타이어에게 ‘서사’, 즉 스토리란 우리가 삶을 살며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단순한 드라마의 스토리가 아니라, 목적과 방향을 갖고 순간마다 해석하는 것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의 스토리가 있다면 그가 보기에 그보다 더 큰 공동체의 스토리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실재한다. ‘나’가 사회에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정의는 홀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공동체의 스토리와 나의 스토리를 조화시킬 의무가 있다. 때문에 매킨타이어는 개인주의를 “도덕적으로 천박”한 이론이라고 비난한다.


  우리에게는 의무가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앞서 칸트가 ‘자율’이라 말한 의무가 주어진다. 이익을 위한 행동의 조건인 합의 때문에 짊어지는 의무도 있다. 여기까지가 자유주의의 보호 하에 있는 의무이다. 하지만 공동체주의는 여기서 의무 하나를 우리에게 더 부여한다. 바로 ‘연대의 의무’이다. 자발적 의무처럼 조건적이긴 하지만 굳이 합의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의무. 그것은 우리가 누군가의 아들, 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이며, 어딘가에 소속된 직장인이고, 어느 나라의 국민이며, 또한 어느 민족의 후손이기 때문에 부여된다. 그것은 소속된 것들에 대한 충직이고, 또한 책임이다. (그러면서도 샌델은 위의 충직과 보편적 도덕법칙이 충돌할 수 있는 상황들을 예로 든다. 과연 충직과 애국심 등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미국이 왜 샌델을 주목하는가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다소 식상한 이야기로 비춰질 수 있는 내용이 세계적 이슈가 된 이유를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오랜 기간 공공철학을 통해 중립의 정치를 해왔다. 1960~70년대가 정점에 이른 시기였고, 대표적으로 JFK가 그 시대를 상징했다. 그는 당선 후, 자신이 가톨릭 신자인 것과 정책 결정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며 정교분리를 선언한다.


  그러나 레이건 시대인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기독교 보수단체 측에서 “정부가 신념을 개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해 민주당 측에서는 공적인 담론에서 후퇴하며 “개입하면 안 된다.”라는 원칙적 반박을 되풀이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정교분리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표면적으로나마 채택하고 있는 원칙이고, 그 역사는 거의 백 년이 넘는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정교분리가 타당하긴 하나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국가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오바마가 이를 알아차리고, 그의 정권 후기에 이르러서는 태도를 바꿔 이런 말을 했다. 정치적으로 매우 훌륭한 레토릭이라는 찬사를 받은 구절이다.


  “They want a sense of purpose, a narrative arc to their lives ……”


  ‘narrative arc’는 보통 ‘서사적 궤적’이라 해석된다. 매킨타이어의 용어이다. 그들은 어딘가 자신들이 향하고 있다는, 그 목적의 실질적인 촉감을 원한다. 그들의 삶에 큰 서사적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원한다는 뜻이다. 미국인들은 정부가 일정부분은 답을 제시해줬으면 하고 바란다. 롤스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신념을 언급하지 말자는 쪽이었으나, 현재 오바마는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결정하기에 앞서 본질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자는, 즉 공동선에 대해 함께 논해보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샌델이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임팩트는 ‘10강. 정의와 공동선’의 동성혼 허용 논쟁에 있다. 대법원장인 마가렛 마셜의 판결문은 자유주의 입장에서 출발해서 공동체주의 입장으로 마무리되는데, 샌델이 이 판결문의 사례를 책의 후반부에 배치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샌델은 어떤 결정의 옳고 그르고의 문제는 다른 문제이며, 그보다는 어떤 결정이 있기 전의 사회적 현안에 대해 우리가 반드시 결정지향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가렛은 동성혼 논쟁에서 중립적 입장을 충분히 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결론을 내렸다. 더 나아가 마가렛은 동성애도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금지하는 것은 이성애가 동성애보다 낫다는 destructive stereotype을 공인하는 셈이라는 입장까지 취한다.

 

 

*   *   *

 


  『정의란 무엇인가』의 공동체주의가 우리에게 어필하는 바는, 적극적으로 사회문제를 논하는 참여적 정신으로 우리의 공동선(common good)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훌륭한 시민이 되라는 일종의 윤리적 테제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는 좌우 대립을 제외하면 그 어느 나라 못지않은 국가적 결속감이 대단한 민족이다. ‘한민족’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여전히 끓어오르게 만들고,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타국의 움직임이 있으면 냉정하면서도 뜨겁게 행동할 줄 안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가 이곳에서 폭발적 관심을 받은 것은 왜일까? 나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결속의 손실이 체감되고 있기 때문이며, 새로운 방식의 결속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은 샌델의 열풍이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후속 논쟁들만 드문드문 오가고 있으나, 나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정의’에, 그리고 ‘공동체’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는 또 한 번 곪아버린 어딘가를 긁으며, 위의 논쟁들을 되짚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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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1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31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림과 눈물 -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제임스 엘킨스 지음, 정지인 옮김 / 아트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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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8

 

 

 

  나는 탄은(灘隱) 이정(李霆)의 <풍죽도(風竹圖)>를 보고 눈물을 흘린 사람을 알고 있다. 그녀는 “희망보다는 절망이란 감정을 몇 번씩 되풀이 하다 보니 자신감은 자신감대로 점점 잃어가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간 자존감마저 잃게 되는 건 아닌가 상당히 불안해하던 때 유난히 눈에 들어오던” 작품이었다면서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너무나도 내 마음과 같구나.”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그림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몇몇 더 알고 있다. 한 분은 치과에서 본 토마스 맥나이트(Thomas McKnight)의 그림을 보고 난 후 “그림의 야릇한 분위기에 홀리는 바람에 치료 도중에도 그림 생각을 하느라 치과치료의 공포가 싹 가셨다.”고 했다. 다른 한 분은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서 “사람의 언어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물의 언어를 이해하는 순간 눈가가 떨려오면서 눈물이 차올랐다.”고 고백했다.


  현재 왕성하게 미술서적을 내는 한 작가는 “세잔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흐르는 하염없는 눈물,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지만, 후일 나는 우연히 내가 흘린 그 눈물이, 바로 그의 그림에 가득한 푸른 대기의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 전체를 고고히 흐르는 그 푸름은 음울하게  그림 속 사물들끼리 교감하게 하고, 급기야 화면을 박차고 나와 멍하니 서 있는 나의 온 몸에 즉각적인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소리 없이 당해보긴 처음이어서, 그래서 울었던 모양이다.”라고 했다.


  위의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 아니다. <탕기의 아틀리에>라는 미술 블로그를 꾸려가면서 왕래하던 이웃 블로거들의 메일 내용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1년 반이 조금 넘도록 그분들과 글을 통해 알아가던 중 나는 다른 사람들이 미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메일을 통해 일종의 간소한 설문조사 같은 걸 한 적이 있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화가,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판화가, 유명 미술 블로그의 작가들, 창작의 고통에 대해 고백한 화가, 열렬한 미술 애호가, 평범한 직장인, 브라질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미술에 관심 있는 대학생, 나에게 많은 자극이 되어준 미술사 대학원생 등. (조금 안타까운 것은 나와 연이 닿았던 분들 중 꾸준히 소통했던 남성분은 단 네 분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화 콘텐츠 부흥의 일등공신은 2~40대 여성이라는 속설이 인터넷에서도 확인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림과 눈물』의 저자 제임스 엘킨스만큼은 아니겠으나, 나 역시 그림과 감정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거리, 혹은 언어화되기 힘든 세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엘킨스가 무엇을 지적하고자 했는지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미술을 본격적으로 알아가기 시작한 첫 대면은 미학과 했었고, 수 십 권의 미술책을 읽고, 논문을 공부했다. 인터넷으로 도판을 찾아 분석하고, 이면지에 낙서하듯 메모한 것들을 컴퓨터에 옮겨 적었다.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면서도, 아니 공부를 할수록 나는 불면증을 느낄 정도로 어떤 강박관념, 혹은 핸디캡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꼈는데, 그건 바로 “나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였다. 그림그리기를 아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보고 배우는 것, 어쩌면 미술의 몸 전체를 둘러싼 주변부와 미술의 핵심을 함께 공부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창작, 때론 ‘창조’라고 부르고 싶은 제작 과정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가졌던 것은 미술을 학문으로 접하면서 서서히 감정이 메말라가고 있는 것 같은 막연한 통증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엘킨스의 책을 리뷰하기 전에 먼저 - 그도 책에서 재차 언급했지만 - 상기시켜야 하는 것은 미술이 사람들에게 유통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유명한 석학들의 대부분은 대중이 훌륭한 ‘문화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을 강조한 모든 학자들의 장려가 바로 이런 것에 닿아 있다고 봐도 사실 크게 어긋난 판단은 아니다. 미술로 범위를 좁혀 말해보면, 미술관에 가서 애인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은 인터넷으로 먼저 작품 정보를 검색해보라는 우스갯소리도 바로 ‘올바른 문화 소비’의 비근한 예일 것이다.


  언젠가 나는 『보기 배우기』의 저자 마테오 마랑고니가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선과 색채 등 기본적인 지식부터 알아야 한다.”고 한 주장을 이곳에서 짧게 언급한 적이 있다. 초보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작품을 보기 위해 미술관에 간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는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부터 낸시 랭의 속옷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총망라되는 모든 예술의 산물들 앞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해석의 어려움’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난해함 때문에 미술의 지식으로부터 세례를 받고자 하는 경향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문제가 되며, 바로 이 시점에서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애당초 작품을 접할 때 아무런 감흥 없이 넘겨짚으려는 사람들의 태도인데, 그들은 마랑고니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비난하는 부류에도 속하고, 엘킨스가 비판하려는 부류에도 속하게 된다. 즉, 예술을 대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림 앞에서의 집중력 부족, 이것은 분명 무척 흥미로운 문제이다. 사람들은 으레 무엇에도 비할 데 없이 야심차고, 눈부실 정도로 경건하며, 기이할 정도의 집착이 엿보이는, 예술가의 경이로운 성취물에 빈정거리는 말투로 몇 마디 평을 던지고 지나쳐버리곤 한다.”


  나는 이러한 경향이 왜 등장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다가, 별로 특별한 것 없는 두 개의 원인을 찾아냈다. 하나는 모더니즘의 영향이다. 모더니즘은 건조하다. 외형적으로 풍부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이성적 내면으로 끌어당기거나 감성적 외면으로 밀어내버린다. 쉽게 말해서 머리로 이해해야만 감정적으로 폭발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뒤샹의 하얀 ‘분수’를 보고 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워홀은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들의 의미는 역사적이다.


  다른 원인은 전시공간의 문제인데, 이는 한 작가의 메일에서 얻은 결론이다. 그녀는 미켈란젤로를 무척 좋아했다. 직접 보러 다닌 적도 많고, 여러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들은 읽기 쉬워 많은 인기를 얻었다. 나는 한창 카라바조를 공부할 때에 그녀에게 부러운 눈치로 “로마와 피렌체에는 꼭 가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내가 평소 갖고 있는 불만은 태생적인 것이었다. 유럽에 있는 학생들은 하루만 시간을 내면 파리의 루브르든, 영국의 테이트든, 로마의 바티칸이든, 마드리드의 프라도든 마음대로 다니면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인데, 그들과 나 사이의 차이에 나의 사소한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직접 보러 다니는 것도 사실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다. 관광객들 사이에서 작품을 보는 것은 산만하기까지 하다. 도판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온전한 감상이란 있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갖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면 한 가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감상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 ‘그림과 눈물’은 그저 개인적인 경험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엘킨스는 1장부터 12장까지 나눠진 ‘눈물의 사례’들이 각각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6, 7장은 구체적 사례가 아니다.) 또한 그는 이 사례들이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뉘어 있는데, 하나는 작품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운 것[질식]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작품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 운 것[진공]이다.


  엘킨스는 말라버린 이 시대의 눈물을 복원시키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말라버린 눈물을 교양 있는 것처럼 여기게 만든 시대적 문화에 대한 비판이 그 첫 번째이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눈물이 ‘비평화’되기 어려운 위치에 있고, 그로 인해 감상이 비평의 영역으로부터 독립해 온전한 모습을 갖춰갈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남긴다. 엘킨스는 눈물을 이야기하기 할 때, 가장 먼저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비평을 통해 해석될 수 없다. 따라서 작품은 그 자체로 있고, 사람들이 다양하게 반응하는 방식들은 대체로 객관적으로 밝혀질 수 없게 되며, 따라서 비평은 감상의 본질을 건드릴 수 없는 것이 된다. (그 점에서 ‘독자 반응 비평’이라는 문학적 영역의 탐구가 미진한 것도 이해가 될 것이다.)


  “눈물은 나를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 수도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그랬는지도 모른다. 모든 눈물이 깊은 감정적 혼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눈물은 우리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감상은 집중을 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작품을 대할 때 갖게 되는 다양한 정신의 통로들이 종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뒤틀린다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때문에 감상은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확실한 징조”가 느껴지는 순간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어쩌면 두려워할 수도 있는 행위가 된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작품을 뚫어져라 멍하니 쳐다보는 것과 그것을 분석하려고 쳐다보는 것 중 어느 쪽이 훨씬 안정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에 용이한가를 잘 알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이다. “날것의 반응”보다는 ‘분석’이 더 평온한 상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엘킨스의 책을 접할 때 한 가지 공유해야 하는 유의점은 그가 서양 사람이며, 그가 언급한 사례들 중 대다수는 서양화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종교화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동양화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것은 그의 한계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으나, 미술책이 모든 미술의 영역을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니, 동양의 너그러운 독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동양적 미감(美感)을 발휘해 앞서 내가 언급했던 ‘탄은 이정의 예’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엘킨스가 9, 10장에서 언급한 종교와 감정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의 서구화된 독자들은 큰 이질감을 갖진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 별도의 장에서 엘킨스가 독자들에게 건네주는 몇 가지 ‘팁’은 생각보다 유용하다. 감상의 정도(正道)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태도에 관한 조언일 뿐이지만 엘킨스가 말한 것처럼 ‘실질적 제안’이니 혹 관심 있는 독자라면 마음에 새겨두는 것이 어떨까 싶다.


  미술을 공부하면서 내가 읽었던, 또한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실은 마테오 마랑고니의 책에 있는 이 구절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연극과 연주회를 좋아한다. 누구나 그가 느끼고 보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 그렇게 해서 그것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미술관에 가지 않는다. 거기에서 그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지 않으려 하고, 무지한 세계에 당혹해하기 때문이다. 혹은 거기에 간다고 하더라도 과시욕 때문이거나, 관례에 따라 가거나 무언가를 배우러 가는 것이지, 즐거워서인 경우는 분명 드물다.”


  엘킨스도 비슷한 말을 한다. 미술사학자 로즈머리 멀케이의 인용문이다.


  “어쩌면 그림은 단순히 다른 예술보다 약한 것이 아닐지, 그래서 음악이나 시나 건축이나 영화가 그러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엘킨스가 ‘명석’하면서도 ‘불편’한 지적에 대해 굳이 언급하고 넘어간 까닭을 나는 알 것 같다. 그는 확신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끝내 모르겠다며 책을 끝낸다. 눈물의 비밀은 결국 비밀로 남게 되었고, 신비로운 감상보다는 분석 가능한 ‘문자들로 이뤄진 작품’에 더 쉽게 다가갈 수밖에 없음을 시인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엘킨스가 남긴 가장 마지막 말은 반전의 여지를 남겨둔다. 이 책이 여타 미술 서적들과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 없는 삶이 살아가기 더 쉽다는 것만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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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12-29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기 저도 있었죠! 탕기님 방학은 알차게 잘 보내고 있어요? ^^

탕기 2012-12-29 11:08   좋아요 0 | URL
조금씩 책 읽는 속도랑 분량을 늘려가고 있어요 :)
제가 시동이 좀 늦게 걸리는 편이라.ㅎㅎ
방학 때에는 소설 좀 많이 읽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인문학책을 붙잡고 있네요.ㅠㅠ

2012-12-31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31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2.12.21

 

 

  많은 것들은 지나가고, 아주 적은 것들만 남는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어른들이 보기에 나는 아직 새파랗겠지만 어느덧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읊조릴 대열에 합류할 때가 가까워졌다. ‘즈음’이란 자신이 의존하는 명사의 앞뒤로 어떤 기간의 여백을 의미하는 것이니, 어쩌면 나는 이미 합류했는지도 모르겠다.


  연말이니까 시쳇말로 ‘센치’한 마음이 되어 서재 이곳저곳을 바라보면 유독 나를 붙잡아두는 책들이 있다. 몇 권 안 된다. 아주 적은 것들만 남는다고 했으니까. 하나씩 꺼내 옛 손자국들, 틈에 껴 있던 머리카락, 뭘 먹으며 읽었는지 군데군데 번져 있는 연한 붉은 자국들을 본다. 손 많이 탄 꾀죄죄한 책들. 읽는다는 것에 대한 동경.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최근 읽고 있는 책들 중에서도 5년, 10년, 20년이 지난 어느 날들에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각각 있을 것이다. 그 나이나, 그 무렵의 생각에 맞는 책이 오래 간다고 하니, 몇 권 짐작되긴 한다. 5년으로 끊어봤을 때, 내가 책과 함께 한 시간이라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5년은 고등학생 무렵부터 군입대 전까지이다. 그 때는 ‘글’이라면 거의 환장을 했을 때이다. 그 5년에 있어 나에게 가장 기억되는 책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를 꺼내 보여줄 것이다.

 

 

*   *   *

 

 

  어린 마음으로 처음 접한 『좀머 씨 이야기』는 나에게 세 가지로 기억된다. 하나는 ‘장 자크 상페’. 나는 지난 해 동생과 함께 ‘장 자크 상페’전에 다녀왔다. 나와 동생은 지독히도 상페를 사랑한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당시 교과서에 문학 소년으로 등장했던 ‘만득이’를 별명으로 얻었고, 몇몇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함께 글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그 중 한 여학생이 나와 공유했던 키워드가 바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장 자크 상페’였다. 인생에 대한 심각한 토론을 기대하긴 물론 어려웠으나, 그 무렵이란 막연함이 막연함을 위로하던 때였으니, 우리는 『좀머 씨 이야기』로부터 실로 큰 위안을 받았다.


  다른 두 가지는 모두 이 ‘위안’과 관련된 것이다. 그 중 첫 번째 위안은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좀머 씨의 외침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일말의 회의나 ‘밀폐감’ 같은 것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누구라도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대개는 부모나 가족, 혹은 알 수 없는 저 사회에게 던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좀머 씨의 외침을 내뱉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모른다. 인간이 본래 그런 존재인지, 아니면 사회의 특성이 그런 것인지, 여러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저 ‘인문적 외침’은 그래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이 된다. 때문에 우린 대개 저런 질문을 잊거나, 하지 않는다. 힘들다고 하면서도 저마다 잘 살 것이라고 믿으니까 말이다.


  처음에 나와 그녀는 좀머 씨의 외침이 파트리크 쥐스킨트 자신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는데 동의했다. 책날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고, 해설에도 그런 말이 있었으니, 정확하진 않으나 둘 중 한 명이 그걸 보고, 아니면 둘 다 그걸 보고 그냥 뭔가 알아냈다는 정도로 나눈 토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저 말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누구에게나. ‘exit’이라는 단어를 찾아 필사적으로 뛰던 때였다. 그것이 ‘exist’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두 번째 위안은 쥐스킨트가 작품 이곳저곳에 심어 놓은 위트와 유년의 기억이었다. 카롤리나 퀵켈만과의 어린 사랑 -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를 위해 뭔가 한참 준비하고 밤새 뒤척였으나 정작 그녀가 바빠 나의 모든 준비가 공으로 돌아갔을 때의 그 느낌이란! - 이야기, 자전거를 처음 타게 된 이야기, ‘미세스 풍켈’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그 ‘코딱지’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주변 사람들이, 심지어는 카롤리나 퀵켈만까지 애도할 것이라는 헛된 ‘자살’에 대한 생각,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이후의 이야기. 나는 소설의 ‘나’와 연결될 수 있는 나의 경험이라면 모조리 떠올려가면서 반추해보곤 했다. 10년은 더 된 옛날의 독일에서 한 괴짜 작가가 쓴 유년의 기억이 나의 것과 닮았다는 것에도 새삼 놀라면서.

 

  고등학생이면, 사실 좀머 씨의 행동과 이후 행방에 대해서 내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하나의 로맨티시즘이라 여길 법도 했고, 그건 생각이 부족한 사람들이 으레 문학의 결론에 가져다붙이는 그런 꼬리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좀머 씨’라는 사람에 처음으로 집중하게 된 건, 아마 제대 후였을 것이다. 소설 『향수』가 영화화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을 때, 나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그것을 다시 읽었는데 그 참에 『좀머 씨 이야기』도 꺼내든 것이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정의내리길 좋아한다. 적어도 그/그녀에 대해 파악했다고 믿어야만 타인과의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정상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때론 너무 안이하다는 것이 문제다. 소설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도 마음대로 좀머 씨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그런데 정작 그가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것인지? 그러한 끝없는 방랑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가 그렇게 잰 걸음으로 하루에 열둘, 열넷 혹은 열여섯 시간까지 근방을 헤매고 다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와 경마장에 다녀올 때, 갑작스레 우박이 섞인 큰 비가 내린다. 둘은 차 안에서 현기증 나는 바깥을 바라보며 부디 차 지붕이 부서지지 않기를 바란다. 바로 그 때, 도로 위에 좀머 씨가 있었다. 그는 굳이 태워주겠다며 “이러다 죽겠어요!”라고 외치는 아버지에게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소리친다. 이를 두고 아버지는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 날 가족들의 대화에서는 ‘밀폐 공포증’이라는 어려운 말까지 나온다.


  ‘나’는 잠자리에 들어 그 광경과 ‘밀폐 공포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다 뒤척인다. 나는 좀머 씨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하지만 가장 비극적인 묘사를 그 뒤척임 속에서 찾아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빗속에 있으면서도 호수의 물을 다 들이킬 수 있을 것 같은 갈증을 느끼는 표정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저 ‘갈증’이라는 단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갈증’은 보통 ‘욕망’이라는 단어와 자주 어울린다. 좋은 의미로는 열렬한 추구의 모습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결핍의 상황을 뜻할 것이다. 다시 읽은 좀머 씨에서 나는 저 둘이 고통스러운 형상으로 뒤틀려 있는 모습을 봤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은 ‘나’가 숲에서 그의 기이한 행동을 보고 자살을 포기하며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까짓 코딱지 때문에 자살을 하다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던 내가 불과 몇 분 전에 일생 동안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 보지 않았던가!”


  조금 멀리 떨어져서, 어떤 종류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미친 듯이 하는, 때문에 다른 일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 쓰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는 사람의 모습에는 어딘가 감동스러운 면이 있다. 죽음으로부터의 도망, 갈증, 사위(四圍)에 적이 있는 듯 주변을 살피는 긴장. 사실 좀머 씨의 행동이 유별나게 기이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충분히 이해되는 건, 그리하여 우리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된 후 더욱 이 작품에 애착을 갖게 되는 건, 우리도 좀머 씨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라고 말한다면야 굳이 “당신은 좀머 씨에요.”라고까지 우길 건 없는데, 잠시 생각해보자면 장자(莊子)가 말하는 ‘좌치(坐馳)’의 삶을 우리는 좀머 씨와 우리의 모습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좌치’는 참 재미있는 개념이다. 앉아서 내달린다는 거다. 몸은 앉았는데, 마음은 항상 쫓긴다. 그런 삶을 살기에, 그런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점에 가서 소위 ‘힐링책’을 사들고, 그 1~2만원의 책을 보험처럼 끌어안고 다니는 것을, 우리는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책은 좀머 씨의 지팡이가 아닐까.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절규하며 이렇게 외치는 사람에게 나는 과연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과연 나라면 ‘나’처럼 호수로 들어가려는 좀머 씨를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오랜 뒤에 다시 읽은 『좀머 씨 이야기』는 저런 종류의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남겨놨고, 그 어떤 위로나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도 상기시키지 않았다.


  역자(譯者)는 “지극히 순수한 동심으로 쓰여진 아름다운 책”이라 했으나, 나는 이 얇은 책을 덮고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나의 외침인 것도 같고, 누군가의 외침인 것도 같고, 우리들의 잃어버린 외침인 것도 같아서였으나, 그것 말고도 좀머 씨가 걸어 들어간 호수처럼 깊은 어떤 곳에 가라앉은 외침이 생각나서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끝내 살아서 깊은 호수의 밑바닥을 5km나 걸어서 건너갔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는 호수 속에서도 외쳤을 것이다. 뱃사공이 그 때 마침 호수 위에 있었다면 그것을 봤을지도. 나는 그의 행방을 계속 수소문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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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

 

 

 

 

 

  나와 동기 녀석은 그 날도 다소 이른 저녁을 먹고 터벅터벅 정문까지 걸어내려 갔다. 서울에 많은 눈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눈이 내려도 신나지 않은 것이 못내 서글프다며 동기 녀석은 연신 담배를 물었고, 나는 호주머니에 찌른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나도 그렇다.”고 말했다.


  “열심히 해야지?” 무엇을 그렇게 한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당연하지. 졸업이 앞인데.”라고 말을 흐렸다. 그리고 ‘알 수 없다는 것’에 또 한 번 서글퍼졌다. 흥청망청 게으르게 사는 것도 아닌데, 늘 뭔가를 잘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뭐라도 제대로 연습하고 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살면 삶의 지혜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겠지. 그러니까, 내 말은, 적어도 이론대로라면 말이야. 뭘 알고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연신 허연 입김만 여기저기 날리고 있었다. 사위(四圍)가 급속히 낯설어지는 건 이런 때이다.


  지금껏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걷는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남학생들의 단화가 눈길을 처벅처벅 밟는 소리는, 여학생들의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때리는 선명한 소리는 들리는데, 나의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때가 있다.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애 처음 해보는 것 같은 아주 기본적인 일들, 예컨대 걷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숨 쉬는 것, 말하는 것, 의자에 앉는 것 따위들. 연말이 되니 이런 것들이 화두가 된다. 연습과 훈련이라……

 

 

*    *    *

 

 

 

  올해 여든여덟의 생을 마친 그녀의 말을 기억해본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그녀의 시집에 방문한 여행객이 되어, 나는 이름 모를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나서 무명의 돌담에 낙서를 적는다.


  “태어남과 죽음은 성역(聖域)이다. 그곳에 대해서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이에 할애된 시간을 위해 나는 책을 읽는다. 그것은 연습과 훈련이다. 서명. 한국에서 온 여행객 J. 추신 :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국인들을 대신해 진실한 온정을.”

 

 

 

 

*    *    *

 

 

 

  서재를 본다.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옆면에 할머니 주름이 생긴 책들이 꽂혀 있다. 양장본은 커버 모퉁이만 빼면 그나마 멀쩡하다. 읽긴 했으나, 아무래도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하는 저들을 양손 꽉 차게 쥔다. 왼손으로는 옆면을 비스듬히 잡고, 오른손 엄지에 힘을 주며 빠르게 책장을 넘겨본다. 시원한 바람이 눈앞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고, 책 특유의 체취가 미약하게나마 코끝에 얹힌다.


  책의 냄새는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작은 차이를 제외한다면 천편일률적이다. 그 냄새로부터 우리는 책의 어떤 정보도 알아낼 수 없다. 그렇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책의 냄새는 책의 내용이 아니다. 책의 내용은 물질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감각을 닫고 정신으로 그것과 대면해야 한다. 이 순간, 우리는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은밀한 곳으로 들어간다. 음부보다 남 보여주기 더 창피한 곳으로.


  작가는 호수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다. 독자인 우리는 깊은 호수이다. 어디에 돌이 떨어지느냐에 따라 반응하는 사람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어떤 돌은 너무 커서 호수 전체가 출렁이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파동이 서서히 사라지더라도 작가가 던진 돌은 우리 안에 침잠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수많은 돌들 중 몇몇을 골라 그것이 호수를 때리며 가라앉았던 충격을 최대한 되살려보고자 노력한다.


  그건 정말이지 노력이다. 충격의 고통을 기억하고자 하는 일은 인간의 본능과도 배리되는 일이다. 감각으로만 판단하려 한다면 독서는 가히 3D 중 하나로 기억될 법 하다. 그러니 고통과 꾸준히 독대하고자 로댕의 조각처럼 앉아 체처럼 담배를 꼬나물거나 눈살을 찌푸려가며 눈을 지그시 감는 저들의 자세는 감동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늘 피하려고만 했는데, 저들은 평생을 직시하여 온몸을 짜내 책을 쓰는구나!


  책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양질의 고통이다. 어떤 이는 서머싯 몸의 장편 한 권을 읽고 인생을 알게 되었다며 눈물을 흘리고, 어떤 이는 위화의 소설 한 편을 읽고 나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했다.


  고통을 읽는 삶은, 효용과 목적을 초월하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삶이 대개 인간의 단면에서만 펼쳐진다면 독서는 우리의 몸을 강제로 뒤집어 등은 배가 익숙하던 곳으로, 배는 등이 온기를 남긴 곳으로 향하게 한다. 참으로 낯설고 힘든 일이다. 책의 첫 장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장까지 향하는 여정이란. 그리고 한 권에서 시작해 삶의 마지막 책에까지 이르는 고통의 작업이란. 예찬 받아 마땅한 고통이 아닐까.


  나는 죽기 전 유언으로 먼 저승길의 벗으로 삼을 책 한 권 옆구리에 끼워달라고 할 것이다. 그 한 권의 책을 찾는 일. 때론 성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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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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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4: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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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2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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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2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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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8 09: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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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8 1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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