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2.12.30

 

 

 

  강의를 마치며 교수는 우리에게 어디 가서 자랑하고 다녀도 좋을 것이라 했다. 한 차례 태풍처럼 불었던 인기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 책의 모든 내용을 꼼꼼하게 따져가며 정독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는 농담을 한 것이리라. 우리가 정말 어디 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온 사례들과 윤리이론의 근거들을 자랑 삼아 말하고 다닌다고 하자. 누가 들어줄까. 한 교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는 정의를 몰라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제목에 목말라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의롭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정의를 막연하게 갈구하고 있다.”


  나는 강의실 뒤편에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의롭고자 하지 않는다, 라. 나는 어떠한가? 알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정의’는 추구해야 하는 미덕이다. 하지만 정의는 권력이 되지 못한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우리를 움직일 만한 행동 기제도 되기 힘들다. 정의로운 권력은 없다. 지난 『정치와 진리』의 리뷰에서도 말했지만, 정치는 그 속성이 윤리·도덕과는 다르다. 인수위와 관련된 지난 KBS 다큐멘터리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왔다. 쓸 만 한 사람 참 많은 줄 알았는데, 정작 자리에 앉히려고 보니까 마땅한 사람이 없더라는 토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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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란 무엇인가』는 미국에서 왜 공동체주의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지를 밝혀주는, 의도된 논리적 구조물이다. 샌델이 여러 철학자들의 위치를 배치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글을 잘 구성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주요 논객들이 『무엇이 정의인가』에서 이미 논했었다.


  샌델이 충돌시키는 주요 이론들을 열거해놓고, 그것들이 어떻게 대결하는지 구도만 살펴보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공동체주의가 왜 도출될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된다. 성실한 독자들이라면 자신의 - 평소 이를 고민한다면- 윤리적 위치에 따라 각 이론들의 지점에 멈춰 서서 굳이 공동체주의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샌델의 말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가게 될 것이다. 읽는 것과 수긍하는 것이 동시에 행해진다.


  먼저 나오는 것은 공리주의이다. 벤담의 것과 밀의 것이 다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샌델은 이 두 공리주의의 대가들을 하나로 모아 반박한다. 마치 불도저처럼 도덕을 과학의 영역으로 밀어붙이는 벤담의 이론에는 성긴 부분들이 많다. 그 안에서는 정의를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공리주의가 현대철학과 윤리학에 있어 경제학의 도움을 받아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은 강조해야 할 것 같다. ‘효용’이라는 가치는 우리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도덕과 윤리 앞에서 어떤 신비로운 감상에 빠져 있을 때마다,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효용이다.


  샌델은 공리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세 개의 이론을 연달아 제시하며, 그 내용은 3~6강, 거의 1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꽉 채운다. 그 이론들의 대표 격인 이들에는 로버트 노직, 임마누엘 칸트, 그리고 존 롤스가 있다. (책 순서와는 달리 교수는 칸트, 노직, 롤스 순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칸트가 공리주의의 반발로 ‘권리’, ‘존중’, ‘자유’의 개념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노직이 공리주의를 비판하며 주장한 것은 결과가 아닌 진행과정(process)을 밝혀야 정의의 문제를 따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노직의 위치는 공리주의와 존 롤스 사이에서 동시에 충돌할 수 있는 자유지상주의의 정점이다. 자유지상주의란 쉽게 말해 “내가 내 것을 처분할 권리가 있는데, 누가 감히 그 권리를 침해하려고 하는가?”라는, 결코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은 ‘권리’ 논쟁으로 귀결되는 이론이다.


  우리는 “부자들의 돈을 조금만 떼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사회가 더 여유로워지지 않을까?”라고 넋두리를 하곤 한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를 이해하면 이런 넋두리는 하나의 범죄로 취급될 만하다. 1970~80년대 우리나라에 급속도로 수입되기 시작한 이 이론은 경제발전과 함께 자연스럽게 옮겨왔는데, 아마 대다수의 경제·경영학도들은 자유지상주의적 사고에 익숙할 법도 하다. 강의 중에도 자유지상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 심지어 - 전부가 경영을 전공 중인 학부생들이었다.


  그들이 부자의 돈을 재분배하는 것, 소위 ‘부의 재분배’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슨 권리로 나의 돈을 빼앗는가?”라는 거의 확정적인 반박이다. 공리주의자라면 결과적으로 사회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결과가 행복으로 딱 떨어질 수 있느냐를 문제 삼으면 공리주의는 다시 측정의 문제에 빠지게 된다. 오히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부의 재분배’를 반대하며 내놓는 ‘권리’의 논거가 훨씬 단단해 보인다.


  세계적 갑부인 프랑스의 베르나르 아르노 현 루이뷔통 회장은 올랑드 대통령의 75% 부유세 정책 때문에 벨기에 국적을 취득하겠다고 해서 논란의 중심에 오른 적이 있었다. 연간 14억 원, 즉 100만 유로 이상을 버는 부자들에게 증세하는 정책은 프랑스 좌파의 핵심정책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여야를 막론한 비난을 받은 쪽은 올랑드 대통령이었다. 물론 좌파 언론인 <리베라시옹> 등에서는 “꺼져, 부자 멍충아!”라는 식의 원색적 문구로 베르나르 회장 측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런 공격은 국민배우 드 파르디유도 받을 만 했다. (오늘 우리나라 언론들은 일제히 75% 부유 증세가 프랑스 헌재로부터 결국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았다는 보도를 냈다. 올랑드 대통령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국가가 국민들에게 아버지처럼 행동하는 것, 입법, 소득의 재분배 같은 것들을 반대한다. 재미있는 것은 자유지상주의가 개인의 인권을 다루는 분야에서는 오히려 복지국가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지상주의의 스팩트럼은 매우 넓으나, 한 가지 가치, 즉 ‘개인’이라는 가치는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한다. 노직의 말이다.


  “개인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는 어느 인간이나 집단도 이 권리들에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이 권리들은 매우 강력하고 광범위한 것으로……”
  (Individuals have rights, and there are things no person or group may do to them (without violating their rights). So strong and far-reaching are these rights that ……)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칸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그의 구미에 적당하게 요약되어 있으나, 사실 1785년에 작성된 이 텍스트의 개념들은 상당히 어렵다. 특히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 칸트의 것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극도 있는데, 예를 들어 샌델이 중요시한 ‘자유’가 있다. 우리는 ‘자유’라 쓰고 개인의 위대한 권리인 것처럼,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때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로 오용하곤 한다. 학생인권조례 이후 교사들이 학생들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중시한다. 그러나 나의 자유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나의 자유는 축소되어 타인의 권리와 조화될 필요가 있다. 일부 학생들이 문제가 된 건, 그들이 저 조화를 전혀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반면, 칸트는 자유를 ‘자율(自律)’이라 쓰고 우리에게 인간이기 때문에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들을 던져놓는다. 이러한 의무들은 칸트의 그 유명한 ‘순수이성’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갖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도덕이 감동적인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한 느낌을 주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절대적 의무 때문이다.


  칸트는 보편적 인권으로 ‘권리’, ‘존중’, 그리고 ‘자유’를 수면 위로 끌어낸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인권이 굳건하게 유지되어야 할 절대적 이유로 앞서 말한 인간의 이성을 꼽았다. 이렇게 하다 보니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와는 전혀 다른 이론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칸트는 공리주의보다 훨씬 따뜻하다.


  칸트는 인간이 선의지(Guter Wille)를 가졌다고 했다. 모든 자질들 중에서도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선의지는 그 수많은 자질들을 올바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지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을 제시했던 것과 패턴이 유사하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나왔다. 선의지는 “보석과 같이 그 자체만으로도, 그 자신 안에 온전한 가진 어떤 것으로 빛날 터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동기이다. 이 동기를 갖고, 내가 한 행동을 모든 사람들에게 권할 수 있다면, 그것이 유일한 준칙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칸트의 윤리가 지켜질 수 있는가를 묻는 자리에서 샌델은 확신을 하지 않는다. 그 예로 클린턴의 성추문 사건을 드는데, 칸트에 따르면 정직하게 사람을 속이는 일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칸트는 윤리에 있어 정말 중요한 개념들을 제시했고,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윤리 관념을 끌어내 종교의 윤리를 전복시키는데 역사적인 역할을 했으나, 샌델에 따르면 칸트의 것은 우리가 따르기에, 소위 ‘2%’ 부족한 정의를 제시할 뿐이다.


  이윽고 롤스이다. 샌델은 롤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를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에둘러 비판하거나 하진 않는다. 롤스의 『정의론』은 자유지상주의와 첨예하게 맞선다. 우선 롤스는 ‘공정한 정의’라는 개념을 통해 애당초 합의하고자 한 여러 사람들 모두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줘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사실이란 그들이 어떤 합의를 하게 되면 향후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즉, A를 고르면 너는 훗날 멋진 의사가 될 것이다, 라든가, B를 고르면 평생 거지로 살 것이다, 와 같은 사실이다. 이것들에 대해 ‘무지의 베일’을 쓰게 되면 우리는 합의를 함에 있어 어떤 것들을 구체적으로 논하고자 할까? (샌델은 더 나아가 ‘계약’이라는 것 자체도 도덕적 한계를 갖는다고 반박한다. 합의가 의무를 발동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의의 제 1원칙이다. 어떻게든 우리가 시작을 평등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한 네티즌의 재미있는 댓글이 있다. 얼마 전, 위대한 축구 선수 메시의 아이가 태어나 화제가 되었다. 그러자 누리꾼들은 온갖 종류의 댓글을 달았다. 그 중 하나는 이렇다. “메시의 아들 : 아빠,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난감을 갖고 싶어요!” 그러자 메시가 얼마 후 하는 말이 “아들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난감 가게를 사왔단다.” 산타클로스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꿈만 같을 것이다. 메시의 아이는 사회적으로 출발하는 선상이 중하류층의 아이들과 판이하다. 누리꾼들은 메시가 서 있는 곳을 일컬어 이른바 ‘신계(神界)’라 한다.


  롤스가 이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차등원칙’을 마련했고, 이것이 바로 그의 『정의론』의 골자가 된다. 롤스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조건 하에, 즉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기대되는 선에서는 불평등을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불평등은 롤스가 ‘도덕적으로 우연(morally contingent)’한 것들이라 지적한 출생, 재능, 집안, 교육 수준 등을 의미한다. 샌델이 공리주의, 칸트주의, 정의론 중 가장 호의적으로 서술한 것이 바로 롤스의 것이다.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함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거대한 이론들과 첨예한 문제들을 살펴가다 보면 독자들은 여전히 저들 이론이 해결하지 못한 무언가가 갈증을 유발한다는 것을 눈치 챌 것이다. 때문에 샌델은 서서히 그의 입장, 즉 공동체주의로 가는 길목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이다. 그에 앞서 샌델은 소수집단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통해 ‘영예’, 『정의란 무엇인가』의 역자 이창신은 ‘영광’이라 오역한 ‘honour’의 문제를 짚고 넘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의 목적(purpose, telos)에는 필연적으로 영예가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그의 정치철학은 호소력을 잃었으나,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 국가[폴리스]가 좋은 품성을 지닌 시민을 양성하고, 그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해 능력구현의 기회를 가지며, 그러한 폴리스를 운영하기 적합한 사람들을 선정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영예를 준다면, 그것이 또 하나의 교육적 효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주장이다. 폴리스는 덕[(virtue)이 있는 시민들을 길러내고, 그들을 통해 운영된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덕 윤리학’이라 한다. (그가 말하는 ‘덕’은 능력에 있어서의 훌륭함이다. 도덕의 ‘덕’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여기서 샌델이 강조하고자 한 것은 능동적인 참여와 교육이다.


  샌델은 곧바로 ‘충직의 딜레마’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넘어간다. 여기서 샌델이 독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국가가 과거의 사건에 대해 사죄해야 하는가?” 쉽게 말해 집단책임, 즉 collective responsibility의 문제이다. 과연 나에게는 얼마만큼의 도덕적 몫(moral stakes)이 있는가?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나는 내가 자발적인 합의, 동의, 약속 등을 통해 초래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그건 my owe이다. 때문에 개인이 국가에 앞선다고 주장한 로크식 생각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최근 이러한 ‘도덕적 개인주의’ 때문에 말이 많다. “내가 안 했는데, 왜 나한테 책임을 물어?”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그래도……”


  샌델이 우리에게서 유도한 생각도 바로 이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뭔가 책임을 져야 할 것만 같다. 사실 그의 공동체주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다지 생소한 윤리이론이 아니다. 우리는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주체임을 강조하면서도 그것 이외의 ‘플러스알파’가 우리를 규정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가족으로부터는 가족애를, 종교로부터는 신념을, 그리고 역사로부터는 애국심과 동질감을 얻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나’ 이외의 정체성을 심어준다. 이를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라는 의미로 ‘encumbered selves’라 부른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밀고 끌어준다는 말은 상식이고, 여기에 편승하지 않으면 무능력한 사람인 것처럼 취급되는 것이 이 사회의 오랜 병폐임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한편으로 이런 문화는 보편적인 권리를 부정하고, 지나치게 소규모의 권리만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냐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샌델은 공동체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보편의 권리를 동시에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하나의 이론을 끌어온다. 그와 같은 계열에 서 있는 매킨타이어의 ‘서사적 인간(storytelling beings)’이다.


  매킨타이어에게 ‘서사’, 즉 스토리란 우리가 삶을 살며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단순한 드라마의 스토리가 아니라, 목적과 방향을 갖고 순간마다 해석하는 것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의 스토리가 있다면 그가 보기에 그보다 더 큰 공동체의 스토리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실재한다. ‘나’가 사회에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정의는 홀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공동체의 스토리와 나의 스토리를 조화시킬 의무가 있다. 때문에 매킨타이어는 개인주의를 “도덕적으로 천박”한 이론이라고 비난한다.


  우리에게는 의무가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앞서 칸트가 ‘자율’이라 말한 의무가 주어진다. 이익을 위한 행동의 조건인 합의 때문에 짊어지는 의무도 있다. 여기까지가 자유주의의 보호 하에 있는 의무이다. 하지만 공동체주의는 여기서 의무 하나를 우리에게 더 부여한다. 바로 ‘연대의 의무’이다. 자발적 의무처럼 조건적이긴 하지만 굳이 합의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의무. 그것은 우리가 누군가의 아들, 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이며, 어딘가에 소속된 직장인이고, 어느 나라의 국민이며, 또한 어느 민족의 후손이기 때문에 부여된다. 그것은 소속된 것들에 대한 충직이고, 또한 책임이다. (그러면서도 샌델은 위의 충직과 보편적 도덕법칙이 충돌할 수 있는 상황들을 예로 든다. 과연 충직과 애국심 등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미국이 왜 샌델을 주목하는가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다소 식상한 이야기로 비춰질 수 있는 내용이 세계적 이슈가 된 이유를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오랜 기간 공공철학을 통해 중립의 정치를 해왔다. 1960~70년대가 정점에 이른 시기였고, 대표적으로 JFK가 그 시대를 상징했다. 그는 당선 후, 자신이 가톨릭 신자인 것과 정책 결정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며 정교분리를 선언한다.


  그러나 레이건 시대인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기독교 보수단체 측에서 “정부가 신념을 개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해 민주당 측에서는 공적인 담론에서 후퇴하며 “개입하면 안 된다.”라는 원칙적 반박을 되풀이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정교분리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표면적으로나마 채택하고 있는 원칙이고, 그 역사는 거의 백 년이 넘는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정교분리가 타당하긴 하나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국가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오바마가 이를 알아차리고, 그의 정권 후기에 이르러서는 태도를 바꿔 이런 말을 했다. 정치적으로 매우 훌륭한 레토릭이라는 찬사를 받은 구절이다.


  “They want a sense of purpose, a narrative arc to their lives ……”


  ‘narrative arc’는 보통 ‘서사적 궤적’이라 해석된다. 매킨타이어의 용어이다. 그들은 어딘가 자신들이 향하고 있다는, 그 목적의 실질적인 촉감을 원한다. 그들의 삶에 큰 서사적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원한다는 뜻이다. 미국인들은 정부가 일정부분은 답을 제시해줬으면 하고 바란다. 롤스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신념을 언급하지 말자는 쪽이었으나, 현재 오바마는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결정하기에 앞서 본질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자는, 즉 공동선에 대해 함께 논해보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샌델이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임팩트는 ‘10강. 정의와 공동선’의 동성혼 허용 논쟁에 있다. 대법원장인 마가렛 마셜의 판결문은 자유주의 입장에서 출발해서 공동체주의 입장으로 마무리되는데, 샌델이 이 판결문의 사례를 책의 후반부에 배치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샌델은 어떤 결정의 옳고 그르고의 문제는 다른 문제이며, 그보다는 어떤 결정이 있기 전의 사회적 현안에 대해 우리가 반드시 결정지향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가렛은 동성혼 논쟁에서 중립적 입장을 충분히 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결론을 내렸다. 더 나아가 마가렛은 동성애도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금지하는 것은 이성애가 동성애보다 낫다는 destructive stereotype을 공인하는 셈이라는 입장까지 취한다.

 

 

*   *   *

 


  『정의란 무엇인가』의 공동체주의가 우리에게 어필하는 바는, 적극적으로 사회문제를 논하는 참여적 정신으로 우리의 공동선(common good)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훌륭한 시민이 되라는 일종의 윤리적 테제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는 좌우 대립을 제외하면 그 어느 나라 못지않은 국가적 결속감이 대단한 민족이다. ‘한민족’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여전히 끓어오르게 만들고,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타국의 움직임이 있으면 냉정하면서도 뜨겁게 행동할 줄 안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가 이곳에서 폭발적 관심을 받은 것은 왜일까? 나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결속의 손실이 체감되고 있기 때문이며, 새로운 방식의 결속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은 샌델의 열풍이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후속 논쟁들만 드문드문 오가고 있으나, 나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정의’에, 그리고 ‘공동체’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는 또 한 번 곪아버린 어딘가를 긁으며, 위의 논쟁들을 되짚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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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1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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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1 2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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