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눈물 -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제임스 엘킨스 지음, 정지인 옮김 / 아트북스 / 2007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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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8

 

 

 

  나는 탄은(灘隱) 이정(李霆)의 <풍죽도(風竹圖)>를 보고 눈물을 흘린 사람을 알고 있다. 그녀는 “희망보다는 절망이란 감정을 몇 번씩 되풀이 하다 보니 자신감은 자신감대로 점점 잃어가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간 자존감마저 잃게 되는 건 아닌가 상당히 불안해하던 때 유난히 눈에 들어오던” 작품이었다면서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너무나도 내 마음과 같구나.”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그림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몇몇 더 알고 있다. 한 분은 치과에서 본 토마스 맥나이트(Thomas McKnight)의 그림을 보고 난 후 “그림의 야릇한 분위기에 홀리는 바람에 치료 도중에도 그림 생각을 하느라 치과치료의 공포가 싹 가셨다.”고 했다. 다른 한 분은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서 “사람의 언어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물의 언어를 이해하는 순간 눈가가 떨려오면서 눈물이 차올랐다.”고 고백했다.


  현재 왕성하게 미술서적을 내는 한 작가는 “세잔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흐르는 하염없는 눈물,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지만, 후일 나는 우연히 내가 흘린 그 눈물이, 바로 그의 그림에 가득한 푸른 대기의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 전체를 고고히 흐르는 그 푸름은 음울하게  그림 속 사물들끼리 교감하게 하고, 급기야 화면을 박차고 나와 멍하니 서 있는 나의 온 몸에 즉각적인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소리 없이 당해보긴 처음이어서, 그래서 울었던 모양이다.”라고 했다.


  위의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 아니다. <탕기의 아틀리에>라는 미술 블로그를 꾸려가면서 왕래하던 이웃 블로거들의 메일 내용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1년 반이 조금 넘도록 그분들과 글을 통해 알아가던 중 나는 다른 사람들이 미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메일을 통해 일종의 간소한 설문조사 같은 걸 한 적이 있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화가,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판화가, 유명 미술 블로그의 작가들, 창작의 고통에 대해 고백한 화가, 열렬한 미술 애호가, 평범한 직장인, 브라질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미술에 관심 있는 대학생, 나에게 많은 자극이 되어준 미술사 대학원생 등. (조금 안타까운 것은 나와 연이 닿았던 분들 중 꾸준히 소통했던 남성분은 단 네 분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화 콘텐츠 부흥의 일등공신은 2~40대 여성이라는 속설이 인터넷에서도 확인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림과 눈물』의 저자 제임스 엘킨스만큼은 아니겠으나, 나 역시 그림과 감정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거리, 혹은 언어화되기 힘든 세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엘킨스가 무엇을 지적하고자 했는지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미술을 본격적으로 알아가기 시작한 첫 대면은 미학과 했었고, 수 십 권의 미술책을 읽고, 논문을 공부했다. 인터넷으로 도판을 찾아 분석하고, 이면지에 낙서하듯 메모한 것들을 컴퓨터에 옮겨 적었다.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면서도, 아니 공부를 할수록 나는 불면증을 느낄 정도로 어떤 강박관념, 혹은 핸디캡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꼈는데, 그건 바로 “나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였다. 그림그리기를 아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보고 배우는 것, 어쩌면 미술의 몸 전체를 둘러싼 주변부와 미술의 핵심을 함께 공부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창작, 때론 ‘창조’라고 부르고 싶은 제작 과정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가졌던 것은 미술을 학문으로 접하면서 서서히 감정이 메말라가고 있는 것 같은 막연한 통증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엘킨스의 책을 리뷰하기 전에 먼저 - 그도 책에서 재차 언급했지만 - 상기시켜야 하는 것은 미술이 사람들에게 유통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유명한 석학들의 대부분은 대중이 훌륭한 ‘문화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을 강조한 모든 학자들의 장려가 바로 이런 것에 닿아 있다고 봐도 사실 크게 어긋난 판단은 아니다. 미술로 범위를 좁혀 말해보면, 미술관에 가서 애인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은 인터넷으로 먼저 작품 정보를 검색해보라는 우스갯소리도 바로 ‘올바른 문화 소비’의 비근한 예일 것이다.


  언젠가 나는 『보기 배우기』의 저자 마테오 마랑고니가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선과 색채 등 기본적인 지식부터 알아야 한다.”고 한 주장을 이곳에서 짧게 언급한 적이 있다. 초보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작품을 보기 위해 미술관에 간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는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부터 낸시 랭의 속옷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총망라되는 모든 예술의 산물들 앞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해석의 어려움’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난해함 때문에 미술의 지식으로부터 세례를 받고자 하는 경향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문제가 되며, 바로 이 시점에서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애당초 작품을 접할 때 아무런 감흥 없이 넘겨짚으려는 사람들의 태도인데, 그들은 마랑고니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비난하는 부류에도 속하고, 엘킨스가 비판하려는 부류에도 속하게 된다. 즉, 예술을 대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림 앞에서의 집중력 부족, 이것은 분명 무척 흥미로운 문제이다. 사람들은 으레 무엇에도 비할 데 없이 야심차고, 눈부실 정도로 경건하며, 기이할 정도의 집착이 엿보이는, 예술가의 경이로운 성취물에 빈정거리는 말투로 몇 마디 평을 던지고 지나쳐버리곤 한다.”


  나는 이러한 경향이 왜 등장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다가, 별로 특별한 것 없는 두 개의 원인을 찾아냈다. 하나는 모더니즘의 영향이다. 모더니즘은 건조하다. 외형적으로 풍부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이성적 내면으로 끌어당기거나 감성적 외면으로 밀어내버린다. 쉽게 말해서 머리로 이해해야만 감정적으로 폭발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뒤샹의 하얀 ‘분수’를 보고 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워홀은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들의 의미는 역사적이다.


  다른 원인은 전시공간의 문제인데, 이는 한 작가의 메일에서 얻은 결론이다. 그녀는 미켈란젤로를 무척 좋아했다. 직접 보러 다닌 적도 많고, 여러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들은 읽기 쉬워 많은 인기를 얻었다. 나는 한창 카라바조를 공부할 때에 그녀에게 부러운 눈치로 “로마와 피렌체에는 꼭 가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내가 평소 갖고 있는 불만은 태생적인 것이었다. 유럽에 있는 학생들은 하루만 시간을 내면 파리의 루브르든, 영국의 테이트든, 로마의 바티칸이든, 마드리드의 프라도든 마음대로 다니면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인데, 그들과 나 사이의 차이에 나의 사소한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직접 보러 다니는 것도 사실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다. 관광객들 사이에서 작품을 보는 것은 산만하기까지 하다. 도판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온전한 감상이란 있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갖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면 한 가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감상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 ‘그림과 눈물’은 그저 개인적인 경험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엘킨스는 1장부터 12장까지 나눠진 ‘눈물의 사례’들이 각각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6, 7장은 구체적 사례가 아니다.) 또한 그는 이 사례들이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뉘어 있는데, 하나는 작품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운 것[질식]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작품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 운 것[진공]이다.


  엘킨스는 말라버린 이 시대의 눈물을 복원시키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말라버린 눈물을 교양 있는 것처럼 여기게 만든 시대적 문화에 대한 비판이 그 첫 번째이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눈물이 ‘비평화’되기 어려운 위치에 있고, 그로 인해 감상이 비평의 영역으로부터 독립해 온전한 모습을 갖춰갈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남긴다. 엘킨스는 눈물을 이야기하기 할 때, 가장 먼저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비평을 통해 해석될 수 없다. 따라서 작품은 그 자체로 있고, 사람들이 다양하게 반응하는 방식들은 대체로 객관적으로 밝혀질 수 없게 되며, 따라서 비평은 감상의 본질을 건드릴 수 없는 것이 된다. (그 점에서 ‘독자 반응 비평’이라는 문학적 영역의 탐구가 미진한 것도 이해가 될 것이다.)


  “눈물은 나를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 수도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그랬는지도 모른다. 모든 눈물이 깊은 감정적 혼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눈물은 우리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감상은 집중을 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작품을 대할 때 갖게 되는 다양한 정신의 통로들이 종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뒤틀린다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때문에 감상은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확실한 징조”가 느껴지는 순간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어쩌면 두려워할 수도 있는 행위가 된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작품을 뚫어져라 멍하니 쳐다보는 것과 그것을 분석하려고 쳐다보는 것 중 어느 쪽이 훨씬 안정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에 용이한가를 잘 알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이다. “날것의 반응”보다는 ‘분석’이 더 평온한 상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엘킨스의 책을 접할 때 한 가지 공유해야 하는 유의점은 그가 서양 사람이며, 그가 언급한 사례들 중 대다수는 서양화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종교화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동양화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것은 그의 한계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으나, 미술책이 모든 미술의 영역을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니, 동양의 너그러운 독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동양적 미감(美感)을 발휘해 앞서 내가 언급했던 ‘탄은 이정의 예’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엘킨스가 9, 10장에서 언급한 종교와 감정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의 서구화된 독자들은 큰 이질감을 갖진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 별도의 장에서 엘킨스가 독자들에게 건네주는 몇 가지 ‘팁’은 생각보다 유용하다. 감상의 정도(正道)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태도에 관한 조언일 뿐이지만 엘킨스가 말한 것처럼 ‘실질적 제안’이니 혹 관심 있는 독자라면 마음에 새겨두는 것이 어떨까 싶다.


  미술을 공부하면서 내가 읽었던, 또한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실은 마테오 마랑고니의 책에 있는 이 구절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연극과 연주회를 좋아한다. 누구나 그가 느끼고 보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 그렇게 해서 그것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미술관에 가지 않는다. 거기에서 그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지 않으려 하고, 무지한 세계에 당혹해하기 때문이다. 혹은 거기에 간다고 하더라도 과시욕 때문이거나, 관례에 따라 가거나 무언가를 배우러 가는 것이지, 즐거워서인 경우는 분명 드물다.”


  엘킨스도 비슷한 말을 한다. 미술사학자 로즈머리 멀케이의 인용문이다.


  “어쩌면 그림은 단순히 다른 예술보다 약한 것이 아닐지, 그래서 음악이나 시나 건축이나 영화가 그러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엘킨스가 ‘명석’하면서도 ‘불편’한 지적에 대해 굳이 언급하고 넘어간 까닭을 나는 알 것 같다. 그는 확신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끝내 모르겠다며 책을 끝낸다. 눈물의 비밀은 결국 비밀로 남게 되었고, 신비로운 감상보다는 분석 가능한 ‘문자들로 이뤄진 작품’에 더 쉽게 다가갈 수밖에 없음을 시인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엘킨스가 남긴 가장 마지막 말은 반전의 여지를 남겨둔다. 이 책이 여타 미술 서적들과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 없는 삶이 살아가기 더 쉽다는 것만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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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12-29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기 저도 있었죠! 탕기님 방학은 알차게 잘 보내고 있어요? ^^

탕기 2012-12-29 11:08   좋아요 0 | URL
조금씩 책 읽는 속도랑 분량을 늘려가고 있어요 :)
제가 시동이 좀 늦게 걸리는 편이라.ㅎㅎ
방학 때에는 소설 좀 많이 읽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인문학책을 붙잡고 있네요.ㅠㅠ

2012-12-31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31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